< 52화 > 샛별 (9)
제국의 수도 루덴에 있는 황성은 그 크기가 매우 큰 것으로 유명하다.
몇몇 사람들, 특히 자신의 아버지와 남매인 오르커스는 그것을 쓸때없이 크기만 크다며 싫어하였지만 노엘은 그것이 좋았다. 자신의 그 필요이상으로 거대한 집이 하나의 거대한 놀이터와도 같아서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황성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이얏호오오오!!!"
"전하아아아!!! 그렇게 뛰어다니시면 위험합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단순히 황성을 휘젓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흘러 넘치는 모험심을 충족 시킬 수 있었다.
여느 어린아이들이 그렇듯 자신 주변의 모든 것이 커보이는 시절이다만 그렇지 않아도 황성은 넓고 신기한 곳이 많았다. 그곳을 둘러보거나 뛰어다니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며 활력을 소모할 수 있었다.
노엘의 나이가 열살이 되자 황제는 그녀에게서 자유를 빼앗았다. 정확히는 황족에 맞는 예의범절을 지키라는 말과 더는 성내를 마음껏 달리지 못하도록 금한 것 뿐이다만.
다름아닌 제국의 단 하나 뿐인 황녀를 자신의 언행을 가벼히 여기는 사람으로 키울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오히려 다른 명문가의 자제들은 더 어릴 적 부터 교육 받는 것을 황제가 노엘을 어여삐 여겨 그간 내버려 두었다는게 맞는 말일 것이다.
어떠한 이유가 있던 간에 황제의 그 말이 노엘에게서 자유를 앗아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거기에 노엘은 별다른 반항 없이 황제의 뜻에 따랐다.
명량하고 활기가 넘친다는 것이 그녀가 단순한 철부지 어린아이였다는 뜻은 아니었기에 노엘은 황제의 뜻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황제가 그리 말한 이후로 더는 그녀가 웃으며 성내를 뛰어다니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로인해 궁인들 사이에서 웃으며 황성을 노닐는 황녀를 바라보는 즐거움 하나가 사라져 버렸지만 어쨌든 가장 큰 피해자는 노엘이었다. 그녀로서는 여태껏 자신이 즐겨하던 놀이를 하루 아침에 그만 두게 된 것이나 다름 없었으니 말이다.
이제는 새로운 놀이감을 찾아야 할 때였다.
황궁은 넓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제한되어 있었다.
시녀들이 자꾸만 가리키고 싶어하는 자수나 다과에 관해서는 전혀 눈길이 가지를 않았다. 책 역시 마찬가지였다. 책을 읽으며 지식을 쌓는 것. 필요한 공부라는 것을 알기에 피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에 흥미를 느끼고 재미었냐고 묻는 다면 단번에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열살이 된 그 해에는 황실에 많은 일이 있었다.
우선 더는 황성을 제맘대로 달릴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노엘에게 있어 가장 큰 이변일테다.
오르커스는 그해, 황제를 따라 중앙정치에 참관하였다. 노엘에게도 그와 같은 자격이 있었기에 처음에는 둘을 따라 참관해보았지만 그녀로서는 귀족들간의 시끄럽게 무어라 떠들기만 하는 말다툼에 전혀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오직 오르커스만이 그 불쾌한 소음들을 귀담아 들으며 희미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노엘은 질색하며 이것이 자신과 맞지 않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와 자신은 상극(相剋). 오르커스가 재미있어 하는 것은 자신에게 맞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황제는 오르커스와 노엘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노엘에게 행동거지를 조심히 하여라 라고 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 둘의 운신에 큰 제한을 둔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성내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모두 겪어본 노엘은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자 눈에 들어온 정원의 모습에 하루는 정원사를 따라 꽃을 가꾸어 보았다. 이전에 했던 것들과는 달리 확실히 재미는 있었지만 계속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출발이 좋다.
그래도 성 안에서 열심히 찾아 해매던 것 보다는 희망의 빛이 보였다. 설마 저 넓은 성 안에서 할 수 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 중, 그저 뛰어다니는 것 정도의 재미를 가진 일을 찾지 못할 줄 그녀가 알았겠는가.
꽃과 노는 것도 좋았지만 노엘은 좀 더 몸을 움직이는 것을 하고 싶었다. 마치 이전에 성 안을 마음껏 달리던 것 처럼 말이다.
조금 생각이 깊어지니 어느새 노엘은 여태 한번도 가지 못한 곳을 걷고 있었다. 황성에 살고 있는 황녀가 모르는 곳이 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그만큼 황성이 넓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전하. 오늘은 이제 그만 돌아가시는게 어떠신지요. 본성에서 너무 멀리 나오셨습니다."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나요? 본성에서 아무리 멀리 떨어졌다 한들 모두 같은 황성의 일부인데."
"그것이..."
여태껏 곁에서 시중을 들던 시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꼭 자신이 더는 이곳으로 가지 않았으면 하는 것 처럼.
원래 사람이라는게 하지말라고 하면 할 수록 더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법이다. 노엘은 평소와 같은 해맑은 미소를 짓고는 시녀의 말을 무시한채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발걸음을 옮기자 노엘의 귀에는 어떠한 소리가 들려왔다. 단단한 무언가가 부딪치는 소리였다. 시녀는 자신의 귀를 자꾸만 괴롭게 만드는 이 소리가 싫은 것인지 인상을 잔뜩 찌뿌렸지만 노엘은 그녀와 달리 지금 귀에 들려오는 난잡한 쇳소리가 하나의 아름다운 선율과도 같이 느껴졌다.
마침내 노엘은 소리의 원인이 무엇인지 찾을 수 있었다. 소리의 근원지에 도착한 노엘의 눈에는 황실의 기사들이 검을 단련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언제나 황제의 곁을 지키는 이들이었기에 노엘에게도 익숙한 얼굴들이었지만 그들이 저리 검을 빼들고 휘두르는 모습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갑작스레 등장한 노엘의 모습에 기사들은 모두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 손에 든 검을 내려놓고는 노엘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저, 전하?"
노엘은 기사들의 경례에도 자신을 부르는 시녀의 당황스런 물음에도 답하지 않았다. 아무말 없이 조용히 그들이 서 있는 연무장으로 걸어갔다.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노엘을 보자 기사들 역시 아무말도 하지 못한채 그대로 자리를 지키는 수 밖에 없었다.
노엘은 자신에게 있어 가장 가까운 기사의 앞에 섰다.
그녀의 시선은 기사를 향해 있지 않았다. 그가 바닥에 내려놓은 검을 향해 있었다. 노엘이 땅에 놓인 검을 줍자 그곳에 있는 모두의 시간이 멈춘것만 같았다. 날을 세우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검이었고 어린 소녀가 그것을 휘두르다 다치는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물건이었다.
기사라는 초인이 휘두를 것을 상정하고 만들어낸 물건이다. 속이 꽉찬 무거운 철검을 열살의 소녀가 드는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이었다. 노엘이 검을 들다 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검과 함께 넘어졌다가는 다칠 가능성이 매우 컸으니까.
노엘의 손이 검에 닿자 그녀의 바로 앞에 서 있던 기사는 곧바로 노엘의 행동을 제지하려 하였다. 시녀는 비명을 지르며 노엘에게 달려들었고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이 노엘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노엘을 향해 달리던 이들 모두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제자리에 멈춰섰다.
우웅-
노엘의 손에 들린 검이 잘게 떨리며 소리를 내었다. 희미한 빛무리가 검신(劍身)을 감싸고 있었다.
노엘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검을 들어 올렸다. 검을 든 그녀는 검과 같은 빛을 전신에 휘감겨 있었다. 저 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기사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검을 휘두르자 검로를 따라 작은 검풍이 일었다.
무언가를 베기에는 아직은 미약한 산들바람이었지만 그것이 머지않아 그녀의 앞에 선 모든 것을 찢어낼 돌풍이 될 것임을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한번의 휘두름을 끝으로 노엘은 검을 다시 땅에 내려놓았다.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해야할지 찾은 것이 기쁜지 그녀는 성의 복도를 달릴 때와 마찬가지로 크게 소리내며 웃었다.
이것이 노엘 에스텔리아가 처음으로 검을 잡았을 때의 기억이다.
***
꿀꺽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이질적인 감각에 노엘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이성은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지만 마음은 그러하지 못하였다. 처음으로 병균의 침입을 받은 것과 같이 그녀에게 살기(殺氣)에 대한 내성은 없었다.
검이라는, 사람을 해하는 도구에 그토록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는데 어째서 살의라는 마음에 이토록 약한 것일까. 당연하게도 그에 관한 이유는 노엘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정신을 다잡고 감고 있던 눈을 떠 대련이 이어지고 있는 연무장을 바라본다.
그곳에는 여전히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서로의 검을 교환하는 이들이 있었다. 죽음을 눈에 담고 검을 휘두르는 둘의 모습은 그 공방을 보는 것만으로도 보는 이의 목이 베이는 것과 같은 서늘함을 선사해 주었다.
대련이라는 것은 분명 서로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 선에서 행해지는 것일 텐데, 저 둘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검격은 매서워지기만 하는데 처음 검을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잔잔한 수면과도 같은 얼굴은 여전히 고요하기만 하였다.
이전에 조장급 기사들의 대련에서도 이러한 분위기가 풍기었던 것 같지만 지금 연무장에서 펼쳐지는 둘의 대련과 비교한다면 그것은 어린아이의 장난이나 다름없다.
검과 검이 부딪치면서 불꽃이 튀었다. 각자의 검로가 뒤엉키며 한차례 둘의 검이 서로의 몸을 스쳐지나갔다. 데미안의 검은 상대의 목 깃을 베어냈고 그웬이라 불린 기사의 검은 그의 오른 어깨를 스치었다. 날을 죽여낸 대련검이었음에도 두 검사가 품은 예기(銳技)를 죽일 수는 없었나 보다.
오러를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이미 저 둘의 검은 진검과 같았다.
지금 당장 대련을 중지하라 소리쳐도 이상할게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그러한 말을 꺼내려 하지 않았다. 노엘의 옆에 앉아있는 알폰스 역시 나이에 맞지 않은 덤덤한 얼굴로 둘의 대련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미 이러한 상황에 익숙한 이들 처럼 말이다.
노엘 역시 대련을 중지 시키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다. 그들의 대련을 보고 있으면 마음속 한구석에 담아두고만 있던 고민이 풀리는 것만 같았기에 아무말 없이 둘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았다. 검이 부딪칠때마다 빨라지는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머리속에 든 상념을 비워야 했으니 모든 것을 잊고 오로지 검의 궤적만을 보았다.
데미안이 검을 한번 휘두를 때 마다 검신에 비친 태양빛이 부서지며 세상에 흩뿌려진다. 그의 검은 마치 빛을 조종하고 있는 것만 같아 분명 오러를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검에는 빛이 가득했으며 그가 내려긋는 검로(劍路)를 따라 햇살이 내려앉았다.
마법이라도 사용하는 것일까.
오러를 통해 있을 수 없는 이적을 행하는 모습은 보았어도 순수한 기예로 저러한 검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검의 천재로 널리 알려진 남자이자 크라우스와 마찬가지로 제국 삼대 무가 중 하나에 속하는 크로멜 가의 소가주와 검을 부딪쳤을 때에도 이러한 감상을 느낀적은 없었다.
크로멜의 소가주. 라인하르트 크로멜의 검은 마치 하늘의 변화와 같이 변화무쌍하며 도통 종잡기가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검법의 영역에 있는 것이었다. 어떠한 뜻이 담겨져 있는지 알아 낼 수 있었으며 또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길이 보였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저것은 여태 알고 있던 검들과는 완전히 별세계에 있는 것만 같다.
오러 한줌 담기지 않은 평범한 검에 불과하지만 만일 자신이 신성과 오러를 동시에 담아 그와 검을 맞댄다 하여도 데미안의 검에 닿는다면 그마저도 빨려들어갈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미 상상속에서는 단 한합만에 노엘의 검은 부러져있었다.
아직 제차례가 온것도 아닌데도 벌써부터 패배한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노엘은 굳이 그러한 패배감을 부정하지 않았다. 실제로 데미안과 검을 겨루면 이러한 결과가 나올것 같았기 때문이다. 명확히 실력에 차이가 나는 것을 부정하는 것만큼이나 미련한 짓은 없었기에 노엘은 이번에는 마음을 달리 먹고 연무장을 바라보았다.
이전처럼 승리를 생각하지 않고 순수히 저 검을 받아내려면 어떻게 해야할지부터 생각했다.
검과 함께 거기에 머무는 빛이 파도와 같이 출렁거린다. 그 모습이 꼭 환영처럼 사방에서 동시에 검이 휘둘러지고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웬은 피하지 않았다. 우직하게 제자리에 서서 힘을 주어 땅에 발을 딛고 자신의 검과 함께 몸을 뒤틀었다. 무엇이 진짜인지 굳이 그가 구별할 필요는 없었다. 데미안의 검이 지척에 다가왔을때 그는 자세를 풀어 단숨에 자신의 앞에 있는 모든 것을 베어냈다.
가히 패도적인 검격이었다. 그가 일으킨 검풍이 연무장을 넘어 여기까지 전해졌으니.
바람에 휩쓸려 일렁거리던 빛의 검들이 사라진다. 하지만 그웬의 검이 데미안의 손에 쥐어진 검마저 베어낸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공중을 돌며 그웬이 만들어낸 바람을 타고는 검에 바람을 실었다. 데미안의 검이 그웬의 검면을 스치듯 지나간다. 어느새 그웬이 그었던 검로는 역으로 데미안의 검로가 되어있었다.
그웬이 검을 회수하는 것 보다 데미안의 검이 그의 목에 닿는 것이 먼저였다.
한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 검은 그대로 뻗어나가 목을 쳤다. 검이 지나간 길을 따라 혈선이 그어진다. 그대로 목이 땅에 떨어지며 피분수가 솟구치며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사람이 죽었다. 그것도 대련 중에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주위에서 비명소리는 커녕 어떠한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상한 이명이 귀를 채우는 것만 같다. 그렇게 피로 붉게 물드는 세상 속에 갑자기 한줄기 빛이 눈에 들어왔다.
태양빛에 의해 데미안의 손에 들린 새하얀 검신이 밝게 빛을 낸다.
그제야 노엘은 그 모든 것이 환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대련의 승자는 데미안이었다. 노엘이 본 환상과는 달리 그웬의 목은 멀쩡히 몸과 붙어있었고 데미안의 검은 정확히 그의 목에 닿기 직전에 멈추었다. 대련에서 진 그웬이 데미안을 향해 경례를 한 이후 제자리로 들어가자 데미안의 눈은 노엘을 향하였다.
전설 속의 용을 닮은 날카로운 눈동자는 마치 그녀의 속을 꿰뚫어 보고있는 것만 같았다. 노엘은 그런 데미안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과 다름 없는 맑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마주한채 옆에 둔 검을 들고는 데미안을 향해 걸어갔다.
방금전의 대련을 보아서 그런 것일까. 노엘의 심장은 터질듯이 세차게 뛰고 있었다.
죽음을 담아낸 검은 무서웠다. 여태껏 죽음에 대해서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그녀에게 사람이란 어떻게 죽을 수 있는지, 그러한 환상까지 보여줄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에 대한 공포를 느끼지 못했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테다. 하지만 노엘은 그러한 공포를 안겨준 데미안에게 걸어가는 이 발걸음이 매우 가볍고 설레이기만 하였다.
이 마음이 계속될지는 데미안이 어찌 행동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노엘은 그것 또한 기대가 되었다.
데미안의 앞에 선 노엘은 검을 들고는 말하였다.
"이제 제 차례군요!"
".....그렇네요."
힘차게 말하는 노엘의 모습에 데미안은 그녀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그걸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자세를 잡으며 자신을 향해 반짝이는 눈빛을 보내오는 노엘의 눈빛에 살며시 미소를 짓고는 기수식을 취하였다.
노엘은 그런 데미안의 미소를 보자 어째선지 그는 처음부터 자신이 어떠한 생각으로 대련을 신청하였는지 알고 있었던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그런가. 그와 눈을 마주하자 지금도 자신의 속내를 읽히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면 오히려 좋다.
자세가 완전히 잡히고 호흡이 안정되기 시작하자 그녀를 바라보는 데미안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이전에 그웬과 대련을 시작하기 전과 같은 무정한 표정이 그의 얼굴에 덧씌워져 있다.
멀리서 바라보던 것과는 달리 바로 눈앞에서 온전히 자신을 향한 살의는 확실히 그 결이 달랐다. 온몸의 털이 쭈뼛서는 느낌. 손에서 나는 식은땀에 당장이라도 검을 놓칠 것만 같았지만 두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이것을 기대했으니까, 노엘은 웃으며 검을 휘둘렀다.
깡-!
단 한번도 들어본적 없는 소리가 노엘의 귀를 찔렀다.
여태껏 그녀가 검을 휘둘렀을 때 나오던 청명한 소리와는 매우 거리가 멀었다. 무언가 깨지는 소리 같았다. 노엘은 자신이 휘두른 검날을 보자 그것이 사실 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길게 뻗어 있던 검신은 반으로 쪼개져 검이라 부르기 민망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노엘의 검을 쪼갠 원흉은 정확히 그녀의 목 앞에 멈춰 서 있다.
끝이 뭉툭한 것이 날이 서있지는 않았지만 그가 휘두른다면 그녀가 본 환상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노엘은 다시 한번 데미안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대련 시작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그의 눈동자에서는 감정을 찾기 힘들었다. 무정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의 모습은 그대로 검을 자신의 목에 찔러 넣어도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을 터 였다.
여태 그녀가 검을 들었을때 마주하였던 이들에게서 보였던 공통적인 망설임은 그의 눈에 비쳐지지 않았다. 눈 앞의 적을 이기기 위한 검사 한명이 서 있을 뿐이었다. 이에 노엘은 웃으며 부러진 검을 땅에 내려 놓았다.
"헤헤...졌어요!"
그 말에 다시 데미안의 눈에 감정이 깃든다. 그는 웃으며 답했다.
"수고 하셨습니다."
데미안의 이 짧은 대답이 노엘은 여태 기사들에게 들었던 어떠한 답보다 마음 깊숙히 와 닿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