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스 판타지의 악당이 되었습니다-51화 (51/131)

< 51화 > 샛별 (8)

기사들간의 대련은 노엘이 자리를 벗어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원래의 하루 일과에 잠시 그녀가 낀 것 뿐이었으니 딱히 대련을 중단한다던가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몇몇 단원들의 옷을 보니 땅바닥이라도 구른 모양인지 여기저기 흙이 묻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뭐, 대련을 하다보면 땅바닥을 구르는 것 쯤이야 이상할게 없는 일이지만 이들이 여태껏 상대한 이가 누구인지 생각해본다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나는 고개를 돌려 노엘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흔히들 귀족가의 영애들이 입는 옷이 아닌 기사의 제복에 가까웠다. 그것도 매우 새하얀 색의.

장식은 가능한 달지 않되 이 옷을 입은 이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꾸며진, 그야말로 착용자의 움직임을 편하게 하는 것에만 집중된 의복이었다. 이 옷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성향이 어떤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확실히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기사들간의 대련에 껴서 단원들과 대련을 하고 있지는 않았겠지.

그녀와 검을 섞은 이들이 아무리 기사단 내에서도 연차가 적은 이들이라고는 하였지만 그럼에도 크라우스에서 키워낸 기사들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그들의 실력은 입증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아무리 황족이라는 신분의 특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런 크라우스의 기사들을 일방적으로 땅바닥에 구르게 만들다니. 역시 평범한 열여섯살 소녀는 아니다.

지금까지 내가 만나본 또래들 중에 평범한 녀석이 있었냐고 물어본다면 그건 또 아니라고 답하겠지만 이렇게 또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그래서 그런지 조금 충격적이게 다가온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빙의라는 특이 케이스로 이전의 삶에서 겪은 기억을 그대로 옮겨왔다 하더라도 그녀는 그런 것이 아니었으니. 그야말로 순수히 검의 재능이 뛰어난 천재라는 소리겠지.

"와아아!"

내 옆에 앉은 노엘의 입에서 연신 탄성이 튀어나왔다.

지금 우리는, 그러니까 나와 알폰스. 그리고 노엘은 현재 기사들이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져 그들의 대련을 감상하고 있었다.

자리의 배치는 노엘, 나, 알폰스의 순으로. 그녀가 바로 옆에 앉아있는 것이 당장이라도 자리를 바꾸고 싶었지만 어린 알폰스를 그녀의 옆에 둘수는 없거니와 이미 자리에 앉은 판국에 내가 움직여 자리를 바꿀 수는 없었다.

어느새 연무장에서는 일반 단원들간의 대련이 끝나고 그 이후는 각 조의 조장을 맡고 있는 이들의 대련이 시작되었다. 확실히 조장급 실력자 부터는 일반적인 기사들이라고는 할 수 없었기에, 그들 사이에서 오가는 기세는 대련이라 할지라도 진정 목이라도 베어버릴 것만 같이 매우 날카로웠다.

그들의 모습을 보자 다시 그들의 사이에 끼어들고 싶어진 것인지 그녀는 당장이라도 쏘아질 것만 같이 시위가 당겨진 화살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를 슬쩍 곁눈질로 보더니 자리를 떠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냥 갈거면 가지...

방금전 까지만 하여도 알폰스 앞에서 신나게 기사들과 대련하였던 그녀가 대체 왜 내 눈치를 보는 것인지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딱 한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알폰스. 미안하다. 약속은 조금만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자."

"네에에..."

알폰스와의 약속을 당장은 지킬 수 없게 되었다는 것.

가문의 검술이기에 타인에게 보여 줄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감히 제국의 황녀를 혼자 내비둔 채 본성의 연무장으로 가는 것은 못할 짓이었다.

반짝반짝

무엇보다 지금 노엘, 그녀는 기사들간의 대련을 한번 훑어 보고는 다시 내개로 고개를 돌리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대련을 볼거면 대련에만 집중하지 왜 자꾸만 내게 시선을 보내는 건지.

다만 내쪽을 바라볼 때 그 눈빛이 어찌나 강렬한지, 무슨 만화도 아니고 꼭 이상한 효과음이라도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뭐라 하고 싶은 말은 있는 것 같은데 억지로 입을 다물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실제로 그녀는 기사들의 대련을 보며 감탄을 하는 것 이외에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눈치라는 것이 있기에 그녀가 입을 열어 말을 하지 않더라도 나는 그녀가 내게 말을 걸고 있는 것 같았다.

탕!

검과 검이 부딪치며 생겨난 굉음이 공간을 울린다.

하지만 여전히 노엘의 눈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이제는 아예 대련을 하고 있는 기사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아무말 없이 오로지 나만을 바라 보고 있다. 이쯤 되면 계속 모른 척 하고 있는 것도 고역이다.

눈에서 광선이라도 나올 것 같은 푸르게 반짝이고 있는 노엘의 눈동자와 내 눈이 마주쳤다. 정말이지 볼때마다 사람 부담스럽게 만드는 눈이다.

나는 기사들간의 대련이 어느정도 끝이 나는 것 같자, 그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전하. 검을 좋아하십니까?"

"네!"

"그래 보이십니다."

나의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있게 대답하는 노엘. 나는 거기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짧게 답했다. 내가 거기서 대화을 끝내자 그녀는 생각했던 것과 달라서 그런건지 잘 모르겠다는 둥 고개를 갸웃거리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홀로 기사들이 대련을 하고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방금 전 까지 검을 부딪치고 있던 있던 두 기사의 승패는 이미 결정이 나 있었다. 나는 자리로 돌아가는 둘 중 한명을 붙잡고는 그에게 손을 건내었다.

"카르멘 경."

"아, 소가주님. 그런데 이 손은..? "

"검 좀 빌리도록 하지."

"네? 어...여기 있습니다."

카르멘은 내 말에 스스럼 없이 방금 전까지 쥐고 있었던 검을 내게 넘겨주었다. 수련용 가검. 날이 서 있지는 않았지만 실제 검과 같은 무게로 제작하였기에 손에는 병장기 특유의 묵직한 손맛이 느껴졌다.

이미 이곳에 오기전에 에델바이스의 기사들과 한번 대련을 했었지. 그래서 오늘은 알폰스에게 검을 가르쳐 줄 때를 빼고는 들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결국 이렇게 다시 검을 들게 되었다.

내가 검을 들자, 노엘은 재빨리 이곳을 향해 달려왔다. 그녀의 얼굴은 그 어느때보다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해 줄 말은 검을 들고 서라는 말이 아닌 다시 자리로 돌아가라는 말이었다.

"전하께서는 잠시 자리에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네?"

그녀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작게 미소짓고는 말을 이었다.

"저도 몸은 풀어야 하니 말입니다."

그 말에 노엘은 환한 미소를 짓고는 순순히 자리로 돌아갔다.

콧노래까지 부르는 것이 그게 그렇게 좋은가 싶다만 안타깝게도 나는 나중이라면 몰라도 지금 그녀와 검을 섞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몸이야 이미 앞서 말했다 싶이 메로힘에서 대련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기에 관절에 기름칠을 한것 처럼 매끈하게 잘 돌아간다.

그녀의 시선에서 내가 명확히 알 수 있었던 것은 딱 하나였다.

눈 앞의 남자, 데미안 크라우스는 얼마나 강한가?

크라우스의 검에 대한 호기심도 분명 있었겠지만 그녀의 눈에서 느껴지는 것 중 가장 강하게 와 닿은 것은 크라우스의 검술이 아닌 자신과 같은 나이의 검사인 나의 강함이었다.

보면 알 수 있다 싶이 노엘 에스텔리아는 천재다.

기사란 존재는 초인(超人)으로 범인으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곳에 서 있는 자이다. 물론 노엘은 범인이 아니다. 그녀는 제국의 황녀였고 신의 혈통을 이었으니 당연히 초인의 범주에 들어간다.

다만 기사를 이기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기사란 오랜시간 자신의 무(武)를 갈고 닦아 초인의 영역에 들어선 존재다. 그렇기에 그들의 가장 큰 무기는 초인으로서 얻어낸 강인한 신체가 아닌 그간의 갈고 닦은 기술이다.

신성력과 오러. 그 두가지를 사용하지 못한다면 노엘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기술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단순히 육체적인 스펙으로 따진다면 열여섯의 노엘보다 이미 완성된 신체를 가지고 있는 기사단원들의 스펙이 우위에 있다.

그럼에도 노엘은 대련에서 승리하였다.

제아무리 상대가 황녀이기에 그들이 손대중을 두었다 하더라도 그녀보다 기술이 뛰어났다면 그들이 질 일은 없었을 것이다.

몇년은 앞서 단련했던 이들의 노력을 무(無)로 만들 수 있는 사람. 그렇기에 노엘은 천재이다.

원래 무인이라고 한다면 나이를 불문하고 자신이 지금 어느정도의 위치에 서 있는지 필연적으로 궁금해 한다. 이것에 본래의 인품과 성격은 상관없다. 이는 당연한 것이니까.

그러니 노엘도 궁금했던 거다.

아서 크라우스의 아들은 과연 어느 정도 위치에 서 있는지. 자신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는지가 말이다.

미래에는 조금 달라지기는 하다만 여태까지 검에 있어 최고의 천재를 뽑으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다섯 소드 마스터들 중에서 아서 크라우스를 뽑는다. 왜냐면 그가 그들 중 가장 이른 나이에 소드 마스터에 올랐으니까.

잘난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난게 죄다.

나도 내가 천재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래도 나름 재능이 넘친다는 소리는 듣고 살았으니 빙의한 지금은 남들에게 있어 천재인 것과 같이 보일 수 있도록 흉내 내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그러니 내가 노엘과 대련을 하지 않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내가 그녀보다 위라는 사실을 똑똑히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지금 그녀가 내게 과한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 실력이 어느정도인지 궁금해서 이니까.

일부러 실력을 낮춰 보이는 짓은 하지 않아도 된다.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한다면 그녀가 크라우스에 약간이나마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좋으니. 그녀가 절로 물러날 정도의 수준 차이만 보여주면 된다.

실은 그렇다고 그녀가 물러난다는 확신을 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책으로 그녀를 읽었다고 한들. 엘레나나 리처드와 같이 후반에서도 등장하는 주연, 조연도 아니고 초반에 등장하고 퇴장하는 주조연일 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그녀의 단편적인 부분에 불과하니 나로서는 단지 이리할 것이다라고 추측하며 움직일 뿐이다.

일단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 노엘은 여기서 기사단을 보고 있을게 아니라 아버지에게 일대일 과외를 받고 있었을 테니까.

"그웬 경."

"네. 소가주님."

나의 부름에 주위를 둘러싼 단원들 사이에서 조용히 대련을 지켜보고 있던 한 기사가 걸어나왔다. 그가 겉에 걸치고 있는 기사단 정복의 소매에는 다른 기사들의 것과는 달리 유일하게 금색 줄이 네개 존재했다. 그것이 그가 이 검은 용 기사단의 단장이라는 증거였다.

그는 내가 무어라 말을 하지 않더라도 이미 손에 대련용 가검을 들고 있었다. 하기야 우리가 같이 지낸 시간이 몇년인데. 이제는 습관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지.

"몸을 푸신다고 하시니. 어떻게 해드리면 좋겠습니까."

그는 점잖은 얼굴에 그렇지 못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피식하고 웃고는 손에든 검을 한바뀌 돌려 고쳐 잡으며 답했다.

"항상 하던대로."

"네."

그웬 경은 나의 말에 검을 자세를 잡고는 검은 용 기사단 특유의 기수식을 취했다.

그 순간 이곳의 공기가 바뀌기 시작한다. 여태껏 다른 이들이 검을 나누며 오고갔던 분위기는 어린애 장난이라는 것을 보여주기라 작정이라도 한 것인지 따스한 봄날과는 어울리지 않는 서늘한 살기가 이곳에 내려앉았다.

일변하는 이곳의 분위기에 계속해서 여기를 주시하고 있던 노엘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이곳에 있는 이들 중 오로지 그녀 만이 그러했다.

가장 어린 알폰스 마저도 덤덤한 얼굴로 나와 그웬 경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그런 노엘의 모습을 보자 조금은 새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정상적인 반응인데 말이지. 여기 있는 사람들은 죄다 익숙해져 버렸기에 저런 반응을 도통 볼 수 가 없으니 말이다.

엘레나.

그녀 역시 처음에 이 모습을 보았을 때는 조금은 놀란 눈치였지만 금세 평정을 되찾았고 말이다. 여태껏 살기에 노출된 적이 없는 것은 두사람 다 같을 텐데 역시 주인공이어서 그런가. 적응은 그녀 쪽이 빨랐다.

뭐, 아무렴 어떤가. 생각보다 조금, 아니 많이 놀란 것 같아 보이지만 오히려 지금은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그림에 더 어울릴 것 같다.

나는 항상 하던대로 검을 잡고 자세를 취했다.

이전과는 달라진 변화를 느낀것일까. 언제나 말 없이 내 상대를 해주었던 그웬 경의 입이 기수식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작게 열리었다.

"성장하셨군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끝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신호 삼아 동시에 땅을 박찼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