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스 판타지의 악당이 되었습니다-49화 (49/131)

< 49화 > 샛별 (6)

노엘 에스텔리아.

현 대륙을 지배하고 있는 제국의 하나 뿐인 황녀.

그런 지고한 위치에 올라있는 만큼 제국 내에서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겠지만 그러한 사실을 제외하고도 <공녀는 사랑받는다.>를 읽은 이라면 이 이름을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공녀는 사랑받는다.>

틀림 없이 이 이야기속 주인공은 엘레나 에델바이스이지만 그 이야기를 시작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노엘, 그녀 였으니.

소설의 본격적인 시작은 엘레나와 데미안이 파혼을 함으로 시작하게 되는 것이었지만 그 파혼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한 원인은 바로 엘레나와 노엘의 만남에서 있었다.

구름이 걷히자 다시금 순금을 녹여 만든 것만 같은 소녀의 금빛 머리카락이 태양빛을 받아 반짝인다. 그와 더불어 그녀 특유의 활력 넘치는 분위기가 마치 지상에 태양이 내려온 것만 같은 착각을 주었다.

그래, 태양.

그녀는 보이는 바와 같이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태양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소녀였다.

태양은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주변을 밝게 비추어 준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간혹 사람들 중에서도 존재 자체 만으로도 주변의 분위기를 바꾸는 그런 태양과도 같은 이들이 존재한다. 노엘 역시 그런 사람들과 같은 부류에 속하는 이였다.

그러니 노엘과 엘레나의 만남은 가히 운명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태양이 빛을 주어 꽃을 키우듯. 데미안이라는 어둠속에 잠겨 있던 엘레나에게 노엘은 그녀의 빛이 되어 주었다.

노엘은 수동적이었던 엘레나를 능동적으로, 자신의 힘으로 설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노엘이 준 용기는 엘레나가 데미안과의 파혼을 결심하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그야말로 모든 일의 시작이 된 셈이니 둘의 만남을 운명이라 하지 않는다면 뭐라 하겠는가.

그런만큼 비록 지금은 데미안이었지만 <공녀는 사랑받는다.>를 읽은 독자로서 노엘의 등장은 기뻐해야 할 일이 맞았다.

단순히 데미안의 파혼 원인이 된다하여 내가 선역(善役)의 등장을 꺼려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원작의 데미안 처럼 내가 무언가 찔릴 만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그런게 있었다면 이미 요하임의 앞에 서지도 못했다.

분명 엘레나와 노엘의 만남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고 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녀는 사랑받는다.> 속 이야기일 뿐이다.

내가 데미안이 되었고 엘레나 역시 소설과 같이 더 이상 어둠 속에 잠긴 꽃이 아니었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뒤바뀌어 버린 지금에 이르러서는 노엘과 엘레나의 만남이 어떠한 작용이 될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어쩌면 이번 만남을 통해 엘레나와 노엘은 그저 스쳐만 지나가는 인연이 될 수도 있고 원작보다 더욱 친밀한 관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 만남이 나쁜 방향으로 흘러갈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는 걸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 둘의 성격상 플러스면 플러스이지 마이너스 요소가 될만한 건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나쁜 일 하나 없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내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공기 빠지는 소리를 입에서 흘리며 멍하니 그녀를 보고 있었다.

다 좋다. 다 좋은데....

대체 왜 그게 하필이면 오늘이냐고.

분명히 내가 1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고 말은 하였지만, 쉬겠다고 마음 먹은지 몇분 지나지도 않았다. 이쯤되면 내게 악의를 가지고 있는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이러한 상황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해보아도 이상하지 않다.

단지 나 혼자 만의 생각이었을 뿐이었지만 눈 앞의 노엘을 보자 꼭 그녀가 내 시간을 가져간 것만 같은 박탈감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녀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나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는 그녀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올릴 수 밖에 없었다.

***

이실리아 관으로 향하는 본성의 복도.

가까운 곳에 화원이 있어서 그런지 열려있는 창에서 흘러 나오는 꽃향기가 복도를 은은하게 채우고 있었다. 그 향기에 엘레나의 곁을 따라 걷고 있던 헤일리는 금세 헤실거리는 얼굴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창 밖에서는 완전히 피어난 형형색색의 꽃들이 세상을 장식하고 있었다.

메로힘과는 거리가 먼 따스한 봄의 향기.

여태껏 맡을 일이 없어서 그런 것이지 이미 한번 사르함에서 지내었던 헤일리였기에 오랜만에 맡은 봄내음에 완전히 취해버린 모양이다.

"아가씨. 데미안 공자님께서 왜 그렇게나 기뻐하셨는지 저도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저런 소리를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나 또한 헤일리가 한 말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작게 소리 죽여 웃었다.

사르함에 도착하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 마차에서 내리는 그의 모습은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강아지와 같아 보였으니까. 그에게 꼬리는 없었지만 그가 얼마나 집에 돌아오는 것을 기다려 왔는지는 그의 얼굴을 보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도."

나는 헤일리의 말에 긍정하며 그녀와 마찬가지로 곳곳에서 풍기는 봄의 향기에 취해 보았다.

메로힘의 겨울이 싫은 것은 아니다만 역시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이곳을 고를 것 같다. 크라우스의 영주성에서 나는 봄내음은 그의 체향과 맞닿아 있었으니. 이곳에서는 어디에 있든 그와 함께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 매우 컸다.

그렇게 향기에 취한 우리는 어느새 방으로 간다는 목적도 잊은채 발걸음을 멈춰 봄향기를 풍기고 있는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아가씨. 파랑새에요."

헤일리가 가리킨 손가락 끝에 파랑새 한마리가 날개짓하며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유독 푸르게 빛나는 깃털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새의 존재는 다채색의 세상에서도 확실하게 눈에 띄었다.

헤일리는 그저 신기하다는 얼굴로 계속해서 우리 주위를 날고 있는 파랑새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그것의 정체를 알고 있었기에 싱긋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장소가 바뀐 탓인지 이곳이 어딘지 파악하려는 듯 성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이 내 눈에는 귀엽게만 보였다.

아마, 지금쯤 이 장면 역시 스승님의 눈에 들어가지 않았을까.

내가 메로힘을 떠나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셨을 테니 조만간 이쪽으로 연락이 날아오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사르함에 있으니 직접 오시고 싶으셔도 오시지 못할실테고, 편지나 영상을 통해 하실려나?

어떤 방법일지는 모르겠지만 미리 답장할 말 정도는 생각해 두고 있어야 할것 같다.

계속해서 창 밖을 보고 있자 아직 방에 도착하지도 않았음에도 우리는 이미 방으로 들어온 것 처럼 늘어지기 시작했다. 이미 파랑새를 관찰하는 것은 뒷전으로 밀려난 후 였다.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봄바람은 자꾸만 눈을 간질인다.

다행이게도 헤일리의 눈꺼풀이 완전히 감기기 이전에 새가 시야를 벗어나 우리는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아직도 반쯤 눈을 감고 있는 헤일리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 방으로 돌아가면 잠부터 자야겠는걸?"

"헤헤...이상하게 이곳에 오고나서부터 자꾸만 졸음이 쏟아지네요."

상황을 이렇게 만드는 것에 조용한 성의 모습 역시 영향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오늘따라 사용인들이 돌아다니는 빈도가 적은 것 같다. 지금까지 성에 들어오고나서 마주친 이는 처음 성에 들어왔을 때 만난 폴 밖에 없었다.

그가 알폰스와 보내는 시간 역시 한 두시간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것 같으니 그냥 오늘 하루는 침대에 누워 따스한 사르함의 햇살을 만끽하며 보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리 생각하기가 무섭게 저 멀리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또각

구두소리가 복도를 울린다.

헤일리는 그 소리에 잠이 달아난 모양인지 아까까지만 하여도 감길락 말락 하던 눈을 번뜩 뜨고 있었다. 나 역시 구두소리가 가까워지자 전신을 맴돌고 있던 나른함이 가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은 헤일리와 같이 누군가 온다는 것을 의식해서 내 스스로 한 행동이 아니었다.

내 몸이 지니고 있는 신성과 상극의 기운이 다가오는 것에 몸이 반응한 것이었다.

그말인 즉슨, 신성력을 가진 누군가가 지금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소리가 된다. 내가 알기로는 크라우스 영주성에 상주하고 있는 이들 중 신성력을 지닌 이는 단 한명도 없는걸로 알고 있는데...거기에 나는 문득 성에 들어가기 전 폴이 데미안에게 하였던 말이 떠올랐다.

더는 구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내 의식은 그 어느때보다 선명함을 유지하고 있다.

나는 천천히 창문에서 고개를 돌려 복도를 바라보았다.

익숙한 금빛 머리칼이 눈에 들어온다.

이미 그 구두소리로 정체를 어느정도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어째서일까. 나는 그 얼굴을 보자마자 그만 얼굴을 찡그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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