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샛별 (5)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실로 매우 간단하였다.
제아무리 사르함과 메로힘 사이에 거리가 그 넓은 제국의 끝과 끝에 위치한 만큼 멀다 하더라도 처음 이곳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요하임, 그가 나와 엘레나를 실은 마차를 영주성 앞으로 텔레포트 시키면 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딸과 헤어지기를 원치 않았던 요하임은 엘레나가 마차에 타는 그 순간까지 아쉽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우리의 출발을 늦추는 일은 없었다.
마지막에 은밀히 내게 보낸 눈빛에 행동과는 다른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사르함으로 가장 돌아가고 싶어하던 이가 바로 나였었기에 그의 뜻이 나를 통해 엘레나에게 전달되는 일을 없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는 나의 모습에 요하임은 잠시 한숨을 쉬더니 짧은 말과 함께 곧바로 마법을 가동하였다.
"조만간 다시 보도록 하지."
이에 나는 작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였고 내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쯤에는 이미 새하얀 빛이 마차와 함께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마법이 가동되자 처음 텔레포트를 경험했을 때 느꼈던 기이한 감각과 함께 다시금 백색의 세상이 나의 눈을 스쳐지나갔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빛이 걷어지자 우리는 겨울성이 아닌 크라우스의 영주성에 도착해 있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다만 메로힘에서 있었던 일들 때문인지 간만에 눈에 들어온 집의 모습은 그 어느때보다 정겹게 느껴졌다. 마차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메로힘과는 다른 선선한 바람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겨울성에서는 잘 들을 수 없었던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마당을 장식하기 위해 심어둔 화려한 색의 꽃들이 눈에 들어온다. 더이상 하얀색만이 존재하는 단색의 세상이 아닌 다채색의 세상이 눈에 들어오니 집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가슴에 와닿기 시작했다.
"그렇게나 좋으세요?"
"네. 좋습니다. 역시 집이 최고에요."
오랜만에 느껴보는 남부의 공기에 팔을 활짝 벌려 심호흡을 하니 엘레나는 그런 내 모습이 재밌어 보였는지 그만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전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내 집을 좋아하는 것이 어때서.
데미안으로 빙의한 이후 5년이라는 시간동안 이곳은 이 세계에서 유일한 안식처가 되었다. 그렇기에 심적으로 지친 지금의 나에게 휴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장소는 오직 이곳 하나 밖에 없다.
원작의 시작까지 앞으로 1년.
메로힘에서 처럼 원작과는 상관없이 앞으로 내게 무슨 일들이 일어날지는 모를 일이다만 적어도 당분간은 밖에 나가지 말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되짚어 보며 쉬어가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언제까지고 예상치 못한 일들에 놀라기만 할 수 는 없지 않은가. 잠시 마음을 추스릴 시간 정도는 필요 하였다.
"그건 그렇고 오늘따라 성이 조용하군요. 분명 아버지께서도 우리가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텐데."
평소와는 달리 어딘가 조용한 것 같은 성의 분위기에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가 돌아오기를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아버지다만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철창 앞에서 입구를 지키고 있는 위병 두어명 정도가 끝이었다.
아버지는 업무 때문에 그렇다 하여도 떠나기 전 알폰스에게 검을 가르쳐 주겠다고 목검까지 만들어 주었었는데, 그런 알폰스의 모습도 보이지 않으니 무언가 느낌이 싸하다.
갑자기 불안한 기분이 드는데...
불안감에 풀어졌던 표정이 다시금 굳어지려는 찰나, 문이 열리면서 사람 한명이 이곳을 향해 걸어왔다. 모르는 이는 아니었다. 문에서 나온 이는 켄이 없는 동안 그의 업무를 맡은 부집사 폴 이었다. 나는 폴에게 인사를 건내며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그에게 물었다.
다행이게도 폴은 나의 질문에 고개를 젓고는 옅게 웃으며 답하였다.
"현재 백작님께서는 손님과 접견 중이신지라. 성의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 입니다."
폴의 말에 굳었던 얼굴이 다시 풀리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이 시기이면 봄철 사냥대회가 열릴 무렵인가. 여태껏 한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던 자리이지만 올해에는 여러 사건사고가 겹치는 바람에 완전히 잊고 있었다.
타 가문에서 그에 관해 들렸다고 한다면 지금 성의 분위기가 이렇게 조용한 것도 설명이 된다. 마음 같아서는 곧바로 접견실로 들어가 한시라도 빨리 아버지께 이 반지를 넘기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는 없는 노릇이다.
메로힘에서도 그렇고 요근래 자꾸만 내 주위에서 사건이 발생해서 그런지 작은 일에도 과하게 반응하는 것이, 신경이 많이 예민해진 모양이다.
아버지와의 만남은 손님과의 접견이 끝난 이후에나 가능할 것 같으니 우리는 먼저 방으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나는 짐을 내리고 있는 헤일리에게로 가 짐을 건내 받고는 방까지 엘레나를 에스코트 하려 하였지만 그녀는 내 손에 들린 짐을 곧바로 자신의 손으로 옮기더니 이내 괜찮다며 거절하였다.
"데미안. 알폰스 도련님과 약속하셨잖아요. 사르함으로 돌아오면 검을 가르쳐주기로. 그동안 제가 데미안을 독점했으니 이번만은 도련님께 양보해드려야겠지요?"
그러고는 작게 웃으며 '저는 도련님께 미움 받기 싫거든요.'라고 덧붙였다.
엘레나의 농담 같으면서도 농담 같지 않은 말에 나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었다.
이미 철이 들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영특한 아이가 바로 알폰스이지만, 그동안 어머니를 닮아 약한 몸 때문에 검술을 익히지 못한 탓인지 검에 관해서는 또래 아이들과 별반 다를바 없는 감정표현을 내비친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잠시 엘레나를 에스코트 하였다 하여 삐칠 정도로 알폰스가 속이 좁은 것은 아니다만 그 사실을 엘레나가 모를리 없었으니 그녀의 말은 그만큼 알폰스에게 빨리 가보라는 뜻이었다.
다시 짐을 들게 생긴 헤일리는 아쉽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그에 수고하라며 방긋 웃어주고는 켄에게 그간의 업무를 보고하고 있던 폴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폴. 혹시 알폰스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나요?"
알폰스가 지내는 본성의 방은 창가에서 내려다 보면 마당이 훤히 보인는 곳이다. 그렇기에 만약 알폰스가 방에 있었더라면 분명 우리가 도착을 한 것을 보고 밖으로 나왔을 테지만, 지금 이곳에 알폰스는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 알폰스가 다른 곳에 있다는 건데.
사실 짐작가는 곳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 아침 일찍 도련님께서 밖으로 나가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만. 하녀들이 하는 말로는 기사단의 연무장 근처에서 도련님을 보았다고 하더군요. 도련님께서 다시 돌아오셨다는 소식은 듣지 못하였으니 아마 아직 그곳에 계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역시나.
아무래도 내 예상이 맞은 것 같다.
연무장에서 잔뜩 기대한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알폰스의 모습을 생각하니 웃음이 안 나올 수 가 없었다. 의욕이 넘치는 것은 좋지만 적어도 내가 올 때까지는 기다려 주었으면 좋았는데 말이지.
나는 아직 손에 끼워져 있는 가주의 반지를 바라보았다.
방금 까지만 하여도 빨리 아버지께 넘기고 싶다는 생각 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되려 아직 손에 이 반지가 들려 있어 안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함부로 여기서 검을 꺼내었다가는 나중에 아버지께 꾸지람을 들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오늘만큼은 알폰스가 원하는대로 해주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목검을 처음 손에 들려 주었을 때만 하여도 그렇게나 기뻐하던 알폰스였는데 전설 속에서 선조들이 사용하던 검이라니, 알폰스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가 되었다.
***
그렇게 모두를 뒤로 한채 나는 홀로 기사단의 연무장이 위치한 곳으로 발걸음을 돌리었다.
본성에서 약간 거리가 있는 곳에 위치한 그곳은 크라우스가 자랑하는 '검은 용 기사단'의 요람이자 나의 오래된 놀이터였다.
뛰어난 기사들을 수없이 길러낸 장소를 놀이터라고 하기에는 조금 그렇다만 지금껏 내가 그곳을 향했을 때의 마음가짐을 떠올려 본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었다.
영주성 내에 크라우스만이 사용하는 연무장이 따로 존재한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곳에서만 검을 휘둘렀던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그곳은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사용된 장소였지 실질적으로 내가 검을 단련하기 위해 시간을 보낸 곳은 여타 다른 기사단원들이 사용하는 일반적인 연무장이었다.
물론 단련이 아닌 크라우스라는 가문의 후계자로서 내가 휘두를 검의 상태가 어떠한지 알아보기 위해 간 이유 또한 없지 않아 있다만 가장 큰 이유는 언제나 일로 자리를 비우시는 아버지를 대신할 상대를 찾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 놀이터라는 나의 표현 또한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그들과 검을 맞대는 것은 당시의 내게 있어서 일종의 놀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그러한 감상은 지금도 여전하다만.
"다들 실력이 얼마나 많이 늘었으려나..."
고작 일주일이라는 시간 안에 크나큰 변화를 기대하기에는 어렵겠지만 방금 전 만 하여도 에델바이스의 기사단원들과 대련을 한 몸이니 충분히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날씨가 화창하고 푸른 것이 검을 휘두르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아니다. 아니지. 내 정신 좀 봐."
오랜만에 맡는 풀내음과 눈에 들어온 익숙한 놀이터의 모습에 그만 원래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만 모양이다. 내가 단원들과 대련을 하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하는 알폰스이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몫이 사라지는 것을 달가워 할리가 없다.
"흐아아아압!"
연무장에 거의 다 왔다는 것을 알리는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에델바이스의 것이 아닌 크라우스의 문양이 그려진 기사단의 제복이 보인다. 그들은 연무장 한 곳에서 원형으로 둘러 서 있었는데, 아마도 단원들간의 대련이 진행 중인 것으로 보였다. 그들이 만들어낸 원형 울타리를 자세히 살펴보니 장대 같이 키가 큰 이들 사이에 섞여 있는 작은 아이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기척을 죽인채 살금살금 소년의 뒤로 걸어갔다.
모두들 대련에 정신이 팔린 것인지 그곳에 서 있는 기사들 중에서도 내가 다가오는 것을 눈치 챈 이가 한명도 없었다. 뭐, 나야 좋은 일이지만.
"얍."
"으갸가가아아아아!! 무, 무슨 ㅇ...형님?"
어느새 지근거리에 들어서자 나는 자세를 낮추고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알폰스의 겨드랑이 사이를 향해 손을 집어 넣었다. 갑작스런 자극에 알폰스는 놀라 소리쳤지만 곧바로 뒤를 돌아봐 내가 했다는 것을 알고는 반가운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나는 아직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내가 아무말 없이 씨익하고 입꼬리를 올리자 알폰스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듯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자, 잠시만.."
"얍. 얍."
"흐히히힣!! 으아하아아..아..혀, 형..가, 간지러워요!!!!"
알폰스가 간지럼에 격하게 몸부림을 쳐 손에 들고 있던 목검을 떨어뜨리자 그제야 나는 알폰스에게 간지럼을 태우는 것을 멈추었다. 땅에 떨어진 목검을 다시 주워 흙을 털어낸 나는 다시 알폰스에게 검을 건내주며 물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
"네에..."
아직 여운이 남은 것인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하는 알폰스. 나는 알폰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어딘가 부러진 곳이나 다친 곳은 없는지 살펴 보았다. 그래도 내가 없는 사이 무모한 행동을 한 것 같지는 않아보여 다행이었다.
어느세 사람들의 시선은 우리를 향해 있었다. 하기야 그 난리를 피웠는데 시선이 몰리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한 거지. 하지만 어쩐지 그 느낌이 이상했는데, 나와 알폰스의 장난이야 항상 있던 일이기에 이상할게 없는 일이다만 우리를 향한 이들의 시선에는 뜻 모를 긴장감이 섞여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 시선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유독 따가울 정도로 강하게 느껴지는 눈빛에 나는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었다.
방금전까지 대련이 이루어졌던 연무장의 중앙. 그곳에는 이미 승부가 결정난 모양인지 오직 한 사람 만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곳에 서 있는 이가 시선의 주인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내게 이런 시선을 보내오는 이가 누구인지 그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하늘 높이 뜬 태양빛에 반사되어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금빛이 반짝거린다. 꼭 그 모습이 햇무리와 같아 마치 지상에 태양이 하나 더 떠 있는것만 같았다. 그 황금빛 물결 속에서 푸른 하늘의 색을 담은 눈동자가 나와 마주쳤다.
"당신이군요!"
밝고 화사한 목소리가 귀에 틀어박힌다.
바람이 불어온다. 구름이 하늘에 뜬 해를 가리자 그제야 눈 앞에선 이의 모습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어."
눈 앞에 서 있는 검을 든 소녀의 모습을 보자 내 입에서는 바람 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소녀와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만 그녀가 누구인지 나는 단번에 알아 차릴 수 있었다. 소설 속 묘사와 한치에 어긋남도 없는 그 모습에 내 머리는 곧바로 기억의 바다 속에서 그녀의 이름을 건져올렸다.
노엘 에스텔리아.
제국의 황녀이자, 소설 속에서 데미안을 엘레나에게서 때어낸 이 중 한명. 그렇기에 내가 모를래야 모를 수 가 없는 이였다.
그래서 왜 네가 여기에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