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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판타지의 악당이 되었습니다-45화 (45/131)

< 45화 > 샛별 (2)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에스텔리아의 수도 루덴.

현 대륙에 유일무이한 제국의 수도 답게 그 규모는 여느 다른 나라의 수도들과는 궤를 달리 하였다. 당장의 황제가 기거하는 황성만 하더라도 다른 왕국의 성들과 비교를 불허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제국의 황성은 그 의미가 단순히 황족들의 거처라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신의 혈통으로서, 태어날때 부터 신성을 타고난 그들이 지내는 그곳은 주신 알테어를 믿는 제국민들에게 있어 일종의 성역과도 같았다.

군주의 집인 동시에 신전으로서의 역할도 하니, 그것이 제국의 황성이 다른 나라의 성들에 비해 필요 이상으로 거대한 규모를 가지게 된 이유였다.

그렇기에 루덴에 거주하는 모든 제국민들에게 있어 그 웅장한 황성의 모습은 제국에 대한 자긍심과도 같았지만 빛에는 그림자가 있듯 이를 싫어하는 이 역시 존재했다.

"아바마마께서는 대체 왜 본성을 내비두시고 항상 이렇게 멀리 떨어진 별궁에 계시는지..."

한숨을 내쉬며 별궁으로 이어진 기나긴 복도를 걷고 있는 남자. 오르커스 에스텔리아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대부분 본성과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다른 건물들과는 달리 현재 황제가 머무르고 있는 별궁만은 해와 달 사이의 거리처럼 본성에서 저멀리 떨어져 있었다.

황성 내에는 그 크기 만큼이나 여러 별궁들이 존재했지만 지금 오르커스가 향하고 있는 태양의 쉼터라 이름 붙은 별궁은 그 중 유독 작은 크기를 가진 별궁이었다.

황성 내에 있기에 궁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지, 원래는 궁(宮)이라 하기에도 뭐한 작은 저택 수준의 건물이었지만 이상하게도 현 황제는 본성에서 보다 그곳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모든 업무의 처리가 본성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최종결정권자인 군주는 일의 효율과 본신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본성에 기거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황제는 근위 기사단장을 포함하여 자신의 안전을 책임지는 이들을 모두 별궁으로 이동시키는 것으로 그곳에 눌러 앉기 시작했다.

결국 업무를 전하기 위해 별궁으로 향하는 머나먼 거리를 걸어가는 대신들의 다리만이 고통받을 뿐이었다. 그 때문에 대신들은 황제에게 본성으로 돌아와 달라고 여러번 청하였지만 그때마다 황제의 대답은 같았다.

오르커스 역시 아버지가 별궁에 있는 것이 불만이었는데, 언제나 효율과 결과를 중요시하는 그에게 있어 굳이 본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머무는 아버지의 행동을 그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황제에게 본성으로 돌아와달라고 청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비록 아버지의 괴짜같은 행동을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그는 자신의 식견이 아버지의 지혜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분명 무언가 숨은 뜻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그 뜻에 따를 뿐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무슨 일로 부르시는 것인지 궁금하기는 하네."

어느덧 복도의 끝에 가까워지자 별궁으로 향하는 문을 지키고 있는 기사 한명이 오르커스의 눈에 들어왔다.

풀 플레이트 갑옷 위에 새겨진 노란 태양이 그의 소속을 알려준다. 기사는 오르커스가 문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자 석상 같이 굳어있던 자세를 풀고는 부드럽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미천한 베헬롯.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아, 베헬롯 경. 오늘도 자네가 입구담당인가 보군? 어째 자주 보이는 것이 내기라도 하다 진겐가?"

"하하하...그건 아닙니다만. 일단 안으로 드시죠. 폐하께서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털털하게 웃으며 부정 했지만 정곡을 찔린 것인지 베헬롯의 얼굴은 관리가 되지 않고 있었다. 오르커스는 작게 웃으며 베헬롯의 어깨를 두들겨 주고는 문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열자 선선한 봄바람이 창문을 타고 들어온다. 옅게 들어오는 적당량의 햇빛은 따스한 온기와 함께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황성 안에 존재하는 금과 보석들로 치장된 여느 다른 방들과는 달리 오르커스가 들어온 방에는 사치품으로 보이는 것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굳이 뽑으라고 하자면 탁자 위에 놓여져 있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만년필 한자루 정도랄까.

방의 중심에 위치한 탁자에는 한 인물이 온화한 표정을 지은채 자리에 앉아있었다.

에스텔리아의 현 황제이자 제국에 유례없는 태평성대를 이룩하며 세간의 칭송을 받는 현왕. 아슬란 에스텔리아.

태양빛에 반사되어 찬란한 금빛으로 반짝이는 머리카락과 아무말 없이 손에 쥔 종이를 바라보는 바다와도 같이 깊고 푸르른 눈동자에는 현묘한 기운이 서려있다.

그 모습에 오르커스는 혹여 그의 집중이 깨어질까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몇분을 기다렸을까. 마침내 편지를 다 읽은 것인지 아슬란의 입이 열리며 맑은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졌다.

"결국 하기로 했나 보군."

그리 말하는 그의 입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눈에 희미하게 담긴 안타까움을 오르커스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슬란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자신의 쌍둥이 여동생이 검을 배우겠다고 말한 뒤로 처음이었기에 오르커스는 혹여 무슨 큰 일이라도 터진 것은 아닌지 물으려 하였지만 그런 그에게 날아오는 것은 방금 전까지 그가 읽고 있었던 봉인이 뜯겨진 편지였다.

"이건...에델바이스 공작가의 문장이군요. 북부에 무슨일이라도 생긴겁니까?"

편지지를 봉인하고 있던 밀랍에 그려진 한마리의 늑대와 그 위에 떠 있는 다섯개의 별.

그 문양은 제국의 세 군대 밖에 존재하지 않는 공작가 중 하나인 에델바이스의 문양이었다. 이를 보자마자 오르커스는 걱정에 얼굴이 찡그러졌지만 아슬란은 그런 오르커스와는 달리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뭔 일이 있기는 하지. 약혼 통보다. 약혼 통보. 너도 기억하고 있지 않느냐. 에델바이스 가의 여식 말이다. 그 아이가 이번에 약혼을 한다는 구나."

쯧- 소리를 내며 말하는 아슬란의 말에 오르커스는 어렵지 않게 기억 속에서 한 소녀를 꺼내 올 수 있었다.

자신과 같은 나이의 새하얀 순백의 소녀.

외모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던 자신의 입에서 아름답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만들었기에 단 한번 뿐인 만남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외의 별다른 감상은 없었다.

만났을 당시에 워낙 말 수 가 적었던 지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것은 만남의 인사와 헤어짐의 인사가 끝이었다. 기억나는 다른 정보라고 해봐야 에델바이스라는 이름 답게 나이에 비해 마법의 성취가 높다는 것. 그것이 오르커스가 기억하는 엘레나 에델바이스의 전부였다.

그래도 오르커스는 그 적디 적은 정보로 부터 한가지 사실을 유추해 낼 수 있었다.

북부라는 제국의 변방에 위치한 가문이라는 점과 입을 잘 열지 않는 소심한 귀족 영애. 그 두가지 사실이 오르커스를 하나의 답으로 인도했다.

"정략혼이로군요. 상대는 누굽니까?"

그녀의 성격 상 자력으로 누군가와 연인관계로 발전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터. 그렇다면 가문에서 이어준 정략혼이 아니고서야 약혼이 성사될리 없지 않은가. 그 특출난 외모와 에델바이스라는 배경만으로도 엘레나는 일등 신부감이나 다름 없었으니 그리 어렵지 않게 혼담을 성사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이미 에델바이스의 후계자는 현재 황금의 탑에서 수학하고 있는 에델바이스의 장자 엘트먼 에델바이스로 정해져 있었으니. 후계구도에서 밀려난 귀족가의 자제들이 어떠한 운명에 처하는지는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오르커스는 잠시 턱을 괴고는 생각에 빠졌다.

북부라는 변방에 있기는 하여도 에델바이스는 제국의 셋밖에 없는 공작가. 더불어 대륙에 일곱개 만이 존재하는 마탑 중 하나, 여명의 탑의 주인이기 까지 하다. 이런 막강한 힘을 가진 가문들의 혼담은 그들이 어떠한 가문과 맺어지느냐의 따라 제국 정세의 판도가 뒤바뀌어 버리기에 앞으로 그들의 위에 군림해야할 이로서 신경이 쓰이는 것은 당연했다.

다만 그가 가장 크게 걱정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중앙 진출이었다.

제국의 모든 공작가는 변방에 위치해 있었기에 언제나 자신들의 영역에서만 움직일 뿐 여태껏 중앙에 손을 뻗친 적이 없었지만 만일 이번 혼담을 통해 중앙으로 눈길을 돌릴 수 도 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오르커스는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가문들의 이름이 아슬란의 입에서 나오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슬란은 그가 떠올리고 있던 가문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크라우스다. 남부의 크라우스. 그곳의 소가주와 혼약이 맺어졌다는 구나."

다시금 쯧-소리를 내며 혀를 차는 아슬란이었지만 그 소리는 오르커스의 귓가에 들리지 않았다. 크라우스의 이름을 듣자 여태까지 생각했던 모든 불안한 가정들이 지워진 것은 맞았지만 보다 더한 폭탄이 그의 머릿속에서 터져버렸으니 말이다.

크라우스 백작가.

어찌 그 이름을 모를 수가 있으랴.

북쪽의 에델바이스.

서쪽의 에르투웬.

동쪽의 크로멜.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쪽의 크라우스.

제국을 사분하는 네 가문의 이름을 모를 정도로 오르커스는 바보가 아니었다. 크라우스가 비록 공작이라는 작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역사와 무력은 절대로 다른 세 가문의 밑에 있지 않았다.

남부의 귀족들은 대부분 농사를 짓기 좋은 비옥한 땅덩어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매년 내려오는 마수들을 처리하면서 개인의 무력을 성장시킴과 동시에 토벌로 인한 부산물들로 막대한 부를 쌓아올렸다. 그리고 그런 이들의 꼭대기에 서 있는 가문이 바로 크라우스 백작가다.

대륙에 단 다섯 밖에 없는 소드 마스터가 주인으로 있는 가문.

크라우스와 에델바이스.

혼약이라는 것이 남들에게 축하받아 마땅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 두가문의 혼약은 오르커스에게 있어서는 제국이 분열의 위기에 놓이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물론 너무 과한 생각이라는 감도 없지 않아 있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의심의 여지는 남겨두어야 한다.

오르커스는 눈을 떠 아슬란의 눈을 보았다.

현왕이라 불리우는 사내의 눈에는 지금 그에게 있는 불안감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무언가를 안타까워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적어도 그 두 가문의 약혼에 대해 걱정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결혼도 아닌 약혼이지만 그래도 축하인사는 전해야 겠지. 오르커스."

"네."

자신을 이름을 부르며 슬그머니 웃는 아슬란의 모습에 오르커스는 품고 있던 불안감을 고이 접어 가슴 속 깊은 곳으로 집어 넣었다. 그는 오르커스에게 황가의 문장으로 봉인되어 있는 편지 한통을 건내주고는 말했다.

"네가 다녀와야 겠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무게라곤 느껴지지 않아야 할 종잇조각이 쇳덩이를 든 것 마냥 무거워졌다. 하지만 감히 거절의 말을 꺼낼 생각은 하지 못하였다.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회피해보았자 그것 또한 언젠가 자신이 물려받을 제국에 그대로 남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오르커스는 알고 있었다.

오르커스는 편지를 품 속에 넣고는 아슬란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슬란은 그에 흡족한 표정을 짓더니 방문을 나서려는 오르커스의 등을 보고는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그를 불러세웠다.

"잠깐."

"또 무엇입니까?"

"가는 길에 노엘. 노엘 그 아이도 같이 데리고 가라."

"네?!"

오르커스는 곧바로 아슬란의 말에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은 아슬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쓰게 웃으며 오르커스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나중에 갔다와서 한소리 듣지 말고 그냥 같이 갔다오려무나."

"지난번에 크로멜 가에서 있었던 일을 잊으셨습니까? 노엘, 그 아이는 검에 관한거라면 사람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다구요. 그때 때마침 검성께서 은거하시고 계셨기에 크로멜 소가주와 대련하는 것으로 넘어간거지 이번에 크라우스 백작을 만나면 어떤 일을 벌일지 저도 모릅니다."

노엘.

노엘 에스텔리아.

아슬란에서 입에서 나온 그 이름에 오르커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언제나 밝은 미소를 지으며 활력이 넘치는 자신의 쌍둥이 여동생.

누군가 그녀와의 사이를 묻는다면 당연 오르커스는 사이가 좋다고 자신있게 답할 수 있었다. 같은 날에 태어났음에도 그 아이는 자신이 오빠라는 것에 단 한번도 불만을 품지 않았고 언제나 살갑게 대하였으니 말이다.

오르커스 역시 노엘을 황위를 향한 경쟁자가 아닌 평범한 여동생으로 대했고 그렇게 둘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노엘, 그 아이가 검에 관심을 가지기 전 까지는 말이다.

마법에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자신과는 달리 검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노엘은 어찌된 일인지 검이나 무예에 관련되기만 하면 그 열정이 과하게 솟아올랐다. 마치 어디로 튈지 모를 공과 같달까.

지난번 서부의 이종족에 관한 일로 제국 3대 무가 중 하나인 크로멜 가문이 루덴에 도착했을 때만 하여도 눈을 반짝이며 다짜고짜 크로멜의 소가주에게 달려가 대련을 신청했을 정도였으니.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크라우스 백작을 만나면 어떻게 반응할지는 오르커스 역시 상상이 가지를 않았다.

걱정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들의 모습에 아슬란은 괜찮다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괜찮다. 그 녀석이라면 노엘 그 아이가 무슨 일을 벌이든간에 어떻게든 대처할수 있을 테니. 그리고 그것보다는 네가 자기만 놓고 혼자 사르함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노엘이 알게 되었을 때가 더 문제가 아니더냐."

"확실히...."

평소에는 지상에 내려온 천사와도 같이 온화한 여동생이었지만 만약 자신을 두고 크라우스 백작을 만나고 왔다는 사실을 알게된다면 그 아이의 칼이 누구를 향하게 될지는 굳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마도 하루종일 황실 연무장에 붙잡혀 있어야겠지....어쩌면 그것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생각의 정리는 빨랐다.

무엇이 득이고 무엇이 실이었는지는 매우 뚜렷했으니 딱히 고민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오르커스는 옅게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노엘에게도 말해 두도록 하죠."

"그래, 잘 생각했다."

그렇게 두 부자는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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