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샛별 (1)
새하얀 눈에 덮힌 연무장은 마치 그 모습이 아무것도 그려넣지 않은 도화지와 같았다.
어젯밤 사이에 내린 눈은 온 세상에 하얀 옷을 입히고는 그 자취를 감추었다. 오늘따라 새벽공기가 유달리 차갑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랴. 나는 입에서 흘러나오는 하얀 김을 보며 헛웃음을 흘리었다.
나름 적응이 되었을 만도 한데, 이렇게 눈이 내린 메로힘과는 달리 사르함은 지금쯤 겨울에서 온전히 벗어난 봄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남부의 따뜻한 공기와 총천연색으로 물들었을 거리를 떠올리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 밖에 들지 않았다. 이곳의 새하얀 설경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겨울성에서 지내는 것은 성의 이름 그대로 끝나지 않는 겨울을 경험하고 있는 것만 같았으니.
아무리 그래도 차가운 겨울보다는 따스한 봄이 더 좋지 않은가.
하얀빛으로 반짝이고 있는 세상은 아름다워 보여도 다른 색이 존재하지 않는 무색의 세상이다. 그건 그것대로 멋이 있다만 아무래도 내게는 사르함의 그 다채로운 색채가 눈에 더 맞는 것 같다. 물론 단지 그런 이유에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저 멀리 보이는 펠리오로스 산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을 찌르는 것 같이 높게 솟은 산봉우리에서 이곳을 내려다 보고 있을 누군가를 떠올리니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기만 하다.
내가 데미안이어서 그런가. 어째 내 몸뚱아리는 이 메로힘이라는 지역과 잘 맞지 않는 것 같다.
아직 이야기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이곳에 오고난 이후 계속해서 내게 사건들이 따라 붙는 것만 같다. 황혼의 탑주와 리처드만 해도 충분하건만 거기에 몇년을 앞서는 테이아와의 만남까지, 단순히 흘려 넘기기에는 그 만남들이 가지는 무게가 너무나도 무거웠다.
특히 테이아. 그녀와 엘레나의 만남이 빠르면 빨랐지 이런 식으로 이루어져서는 결코 안되었다.
테이아는 극중 유일하게 엘레나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준 존재다.
그녀가 엘레나에게 알려준 언령(言靈)만 하여도 엘레나를 다른 대마법사와 격이 다른 존재로 끌어올려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데, 지금은 나로 인해 상황이 참으로 애매하게 되었다.
분명 약속을 통해 엘레나와 테이아의 연이 이어진 것은 맞다만 그녀가 엘레나에게 깨달음을 내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뭐, 워낙 변덕스러운 것이 드래곤이라는 존재이니 잘만 유도한다면 어떻게든 될 것 같다만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이었다.
만약 이 세상의 중심이라 불릴만한 이를 말하라고 한다면 누구의 이름을 불러야 할까.
현 대륙을 지배하고 있는 제국의 황제의 이름을 불러야 할까?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초월자. 아니면 저 천상 위에 실재하고 있는 신들?
하지만 나는 그런 질문에 수많은 후보들을 뒤로 하고 망설임 없이 엘레나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이곳이 정녕 내가 알고 있는 소설 속 세상이 맞다면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이야기의 주인공인 그녀가 세상의 중심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매우 당연하게도 언제나 사건은 주인공을 중심으로 일어나게 된다. 내가 이야기를 비틀겠다고 마음을 먹었음에도 말이다.
어쩌면 나로 인해 엘레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 보다 더 크나큰 사건에 휘말리게 될 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주어진 기연을 하나라도 놓쳐서는 아니되었지만 나의 선택으로 인해 지금 그 기연 중 하나가 사라질지도 모르는 위기에 놓여버린 것이다. 그러니 신경이 쓰일 수 밖에.
그렇게 머리를 싸매 안고 있다 보니, 어쩌면 이와 같이 앞으로 내가 엘레나의 곁에 있음으로써 엘레나의 성장에 악영향을 주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다.
상념이 머리를 뒤덮자 나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구름이 낀 내 머리와는 달리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이내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켜 기도가 얼어붙을 듯 차가운 공기를 억지로 속에 밀어 넣었다.
폐부를 깊숙히 찌르는 것 같은 냉기가 속을 채우니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다. 내가 이곳에 빙의한 이후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살아왔는지를 기억해내곤, 손에 들려있는 검을 보며 작게 웃었다.
이전에 엘레나가 내게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었다.
가족이라고.
아직 만난지 얼마 지나지 않을때의 말이었지만 분명 그녀는 내게 그렇게 말하였다.
그때 엘레나가 내게 그러한 말을 한 것은 단순히 내가 느끼는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녀의 말에 담긴 그 의미마저 비어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는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려 했던 말이었건만 지금은 그 말이 내 삶의 동기를 확고히 해준다.
이 몸에 빙의한 후 데미안이 되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 나는 나의 가족들에게 소설 속 데미안과는 달리 그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니 이것은 그 맹세의 연장선이다.
내가 벌인 일에는 내가 책임을 진다.
그녀의 옆에 있겠다는 것은 나의 선택이었고 그로 인해 벌어진 일에 대해 내가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한 것.
그리 생각을 정리하고 나자, 어느새 손에 들린 검에는 밤하늘을 닮은 짙은 흑색의 오러가 맺혀 있었다.
오러(Aura)는 단순히 마력을 응집해서 만들어낸 칼날이 아니다.
무인이 일평생 얻어낸 무의 대한 깨달음과 정신을 현실에 실체화 해 낸 것이 오러다.
빙의 이후 지금까지 여전히 빛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흑색의 오러. 데미안으로 빙의하기 이전에는 그래도 나름 금빛이라는 아름다운 색이라는 것이 존재했는데 빙의 과정에 데미안이라는 존재에 오염이라도 된 것인지 나의 오러는 이전의 색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오러는 육체가 아닌 영혼, 심(心)의 것일 텐데. 뭐, 짐작이 아예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어제만 해도 그놈의 광증 때문에 이성을 잃어버리고 말지 않았는가. 그와 관련이 있는 것이겠지.
아무튼 비록 이전의 색을 되찾은 것은 아니어도 분명 어젯밤을 기점으로 단순히 검기만 하던 오러에 무언가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 느껴져왔다. 빙의 이전에도 느끼지 못하였던 어떠한 기묘한 감각이 검을 타고 올라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자세를 잡고 이전부터 수천 수백번은 휘둘렀던 동작들을 머릿속에 그려넣는다.
여태껏 몇번이고 반복했던 동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그 모든것이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것처럼 새롭게만 느껴진다.
발을 내딛자 뽀드득하고 밟히는 눈의 감촉은 마치 맨발로 밟은 것과 같이 그 감각 하나 하나가 뚜렷하게 신경을 타고 전해져온다. 그와 동시에 눈 앞에 그려진 선을 따라 검을 내려 그었다.
그렇게 완성된 동작은 머릿속에서 내가 그린 그림과 데칼코마니 마냥 완벽히 일치했다. 전신을 찌릿하게 울리는 그 일체감을 느끼며 나는 다시 한번 발을 내딛으며 몸을 움직였다. 물이 자연스레 흘러가는 것 처럼 내 몸은 하나의 흐름을 타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면서 만들어지는 흐름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앞을 향해 뻗어나간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았던 연무장이라는 도화지에는 나의 발걸음과 검을 휘두르며 생겨난 검흔이 새겨졌다.
이제 과거에 대한 답습은 완전히 끝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몸은 여전히 이렇게 움직이라 지시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심장의 박동 소리, 근섬유의 수축과 이완. 예민해진 감각들이 모두 한데 어우러져 하나의 음율을 이룬다.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은채 흐름을 따라 한보 한보 앞으로 나아가자 그때마다 무언가를 향해 다가가고 있는 듯한 기이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앞으로 간다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 줄 수 있을 힘을 잡아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의 오감은 이전과는 다른 영역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느끼지 못하였던 거대한 무언가가 일으키는 흐름을 인지하는 순간, 그것은 나의 몸을 짓뭉갰다. 내가 만들어내고 있던 흐름은 그것을 거스르지 못하고 흡수되듯 사라져버렸고 내가 걷고 있던 길 역시 흐름을 잃음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무아(無我)가 깨진다.
정신이 들었을 때의 나는 내가 처음 검을 꺼내들었던 곳의 반대편에 도달해 있었다.
다시금 시야에 들어오는 순백색의 세상에 나는 깊은 허탈감을 느꼈다.
분명 손 끝에 닿을 것만 같았는데 무어가 문제였을까. 그것을 마주하는 순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만약 그것을 잡을 수 있었다면, 한 발자국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면 분명 무인의 끝이라 불리우는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 할 수 있었음을.
"와...아..하하..하하하..."
허탈함과 동시에 드는 억울함에 공기 섞인 웃음을 내었다.
초월(超越)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제야 정확히 알 것 같다.
마치 거센 파도에 내던져진 것만 같던 그 느낌. 거스르지 못할 것 같은 그 흐름의 벽을 넘어서 비로소 자존하여 오롯이 서 있을 줄 알아야 완성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그 벽을 넘을 수 없었다.
무언가로부터 이렇게 불가능하다는 느낌을 받는 다는 것은, 절대로 넘을 수 없는 벽을 마주한다는 이 느낌은 그리 썩 좋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좌절은 하지 않는다.
되려 어떤 길을 걸어야할지 뚜렷한 목표가 정해진 것 같자, 그 사실에 끌어올랐던 감정을 순식간에 밑바닥으로 가라앉히며 머리는 냉정을 되찾아갔다.
나는 곧바로 뒤를 돌아 바닥을 향해 검을 그었다.
가볍게 일은 검풍에 연무장에 그려진 흔적들이 모두 지워져간다. 그렇게 한바탕 작은 눈바람이 일고 난후 그 자리에는 어떤 인영 하나가 서 있었다.
하얗게 탈색된 머리카락과 얼굴에 새겨진 여러 흉터들. 에델바이스의 백랑 기사단장. 빌헬름 하트먼이 서슬퍼런 안광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빌헬름 경. 여긴 어인 일이십니까. 평소보다 조금 일찍 나오신 것 같습니다만."
"일찍은 무슨. 제시간에 나온 것을 공자께서 시간을 착각하신 것이지요. 하버트와 길리어드는 외성에 일이 생겨 나오지 못했습니다."
아, 그런건가.
사실 지금 내 감각들은 모두 어딘가 조금 엇나가 있는 것 같았다. 너무 예민해져서 정신과 약간의 괴리감이 든달까. 어쨌든 정상은 아니라는 소리다. 지금도 저 멀리 빌헬름이 작게 내쉬고 있는 숨소리가 바로 내 옆에 서 있는 것 처럼 귓가에 들려온다.
그가 지금 검을 빼내고 있는 쇠소리 마저도.
나는 검을 땅에 박고는 감각의 통제에 정신을 집중하며 그에게 물었다.
"뭐하는 겁니까?"
"대련입니다. 항상 그 두아이들과 하지 않으셨습니까. 공자께서는 곧 이 겨울성을 떠나셔야 할테니 떠나시기 전에 한번쯤 손을 섞어두고 싶어서 말입니다."
하필이면 지금?
나 죽을 것 같은데.
검을 쥐고 있는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이 한 합이라도 검을 부딪쳤다가는 손이 나갈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데 어째서 일까.
당장이라도 들어 눕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건만 나는 여전히 검을 쥐고 서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땅에서 검을 뽑고는 그에게 말했다.
"대련 좋죠. 들어오세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마치 늑대와도 같은 기세를 담아낸 매서운 바람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
눈이 떠지자 마자 왼손에 느껴지지 않는 온기에 절로 손을 움켜쥐고 말았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왼손에는 이전과 같이 그의 손이 잡히는 일은 없었다.
"갔구나..."
잠자리에서 방금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마치 찬 개울물에 씻어낸것만 같이 깨끗하고 맑았다. 그렇기에 어젯밤 잠자리에 들기전 있었던 일 역시 또렷히 기억하고 있었다. 몇시간이나 지난 일이었음에도 그가 자신의 머리를 어루만졌던 따스한 손길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 같다.
"지금은....주무시고 계시려나."
내가 다시 눈을 감기 전까지 그는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아무말 없이 내 손을 잡아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그가 있었기에 다시 잠에 들었음에도 악몽을 꾸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태까지의 삶을 통틀어 이보다 편한 잠자리는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기분이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이 좋은 것 하나 만은 확실했다.
눈을 뜨고나니 또 다시 그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나 때문에 밤을 새어야 했던 그 였기에 지금 쯤 침실에서 숙면을 취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몇 날 며칠을 숙면을 취하지 않을 수 있도록 단련된 육체라고는 하여도 밤을 새는 것이 그리 좋은 일은 아니니.
"그렇다면...내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얼굴이 뜨거워 진다.
그가 내 침실에 들어왔듯 나 역시 그의 방에 들어가도 되지 않을까? 물론 어제의 일은 불가항력이었다고는 해도 그래도 이제 약혼자 사이인데, 내가 그의 방에 들어가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새벽에는 약간의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분명 새벽과는 달리 깊이 잠에 들었을 터. 그가 잠에서 깰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미 반쯤 자기합리화에 들어간 생각이었지만 그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행복한 상상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귓가에 파고드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가씨. 무엇이 그리 재미있으셔서 웃고 계신건가요?"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려보니 헤일리가 게슴츠레 눈을 뜨고는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작스런 그녀의 등장에 나는 화들짝 놀라며 헤실헤실 웃고 있던 입가를 서둘러 가렸다.
"....헤, 헤일리? 갑자기 들어오면 어떡해?!"
"한참 전 부터 여기에 서 있었어요. 아가씨. 그건 그렇고 아가씨!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리 야심한 시간까지 데미안 공자님과 방에 있으셨던 건가요!!! 아무리 약혼하신 관계라고는 하지만 아직 식도 올리지 않...."
"그, 그만!!! 아무일도! 아무일도 없었으니까!!"
헤일리의 말에 더는 참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헤일리의 괜한 헛소리를 듣다보니 절로 그런 광경이 떠올려지는 걸 어쩌겠는가. 나는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것 같이 붉어졌지만 헤일리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얼굴로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히히. 농담이에요. 공자님께서는 제가 방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아가씨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고 계셨으니까요. 그건 그렇고 진짜 아가씨는 데미안 공자님에 대해서..."
"헤일리이이이!!!!"
"으냐냐나아아아-! 아,아까씨이이 야퍄여!!"
나는 부끄럼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헤일리의 볼을 꼬집었다. 헤일리는 볼이 늘어나는 것이 아픈듯 싫은 소리를 내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내가 헤일리의 볼을 잡아당기는 것을 놓자 헤일리는 자신의 빨갛게 변한 볼을 매만지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아파요오...아가씨이이.."
"헤일리가 나를 너무 놀려서 그런거 잖아!"
"그렇게 말씀 하시면 할말이 없지만요..."
그치만 아가씨의 반응이 너무 재밌는 것을 어떡해요...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헤일리의 모습에 다시 한번 더 볼을 꼬집을까 생각이 들기도 하였지만 그것을 눈치챘는지 손바닥으로 자신의 볼을 가리는 헤일리의 모습에 손을 거두었다.
대신 헤일리는 알려줄게 있다며 여전히 손으로 볼을 가린채 내게 속삭여왔다.
"아가씨. 데미안 공자님을 만나시려면 방 말고 연무장으로 가셔야 해요. 공자님께서는 방을 나서고 나신 후에 곧바로 연무장으로 향하셨거든요."
"..아, 그렇..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헤일리! 내, 내가 언제 방으로 간다고..."
갑작스런 헤일리의 말에 나는 말을 더듬어가면서 까지 그녀의 말에 부정하였다. 내가 그의 방으로 간다고 말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있었나? 아무리 곰곰히 생각해보아도 그런 말을 꺼낸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내가 의문스런 눈빛으로 헤일리를 바라보자 그녀는 그저 웃음을 지어보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공자님을 만나러 가시는데 그런 머리로 가실 수는 없겠죠? 제가 금방 정리해 드릴게요."
"어..어.."
헤일리는 능숙한 솜씨로 순식간에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 갔다.
무언가 여전히 헤일리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그래도 지금 중요한 것은 그를 만나는 것이었으니, 나는 헤일리에게 간단히 머리를 정리받고 주변에 있는 가벼운 외투를 들쳐 입은채 방을 나섰다.
평소였다면 조금이나마 자제라는 것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이 마음을 주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당장이라도 그와 마주해야 이 두근거림이 진정될 것만 같았다.
그렇게 그가 언제나 단련을 하고 있다고 알려진 연무장 근처에 도착하자 나는 공간을 가득 채우듯 울리고 있는 쇳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단순한 대련이라고 생각되기에는 소리에서 전해지는 살벌한 기운이 내 발걸음을 재촉했다.
소리의 근원지에 다가갈수록 대기 중의 마나가 일렁이는 파동이 눈에 띄게 보인다. 그 파동의 중심에는 한 늙은 기사와 검을 든 젊은 소년이 일사불란하게 새하얀 눈 밭위를 거닐고 있었다.
오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 오로지 본신의 기예만으로 주위의 마나를 진동시킨다.
둘의 검이 부딪칠때마다 청명한 소리와 함께 그들의 곁으로 자연스레 마나가 움직이는 것이 눈에 보인다. 다른 기사들이 보았다면 절로 고개를 떨굴 정도로 경악할 광경이었다만 무엇보다 지금 자신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빌헬름을 상대하는 그의 움직임에 있었다.
지금 그의 모습은 회귀 이전에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던 모습과 놀랍게도 똑 닮아 있었으니 말이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과 기세가 아직 그가 초월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려주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의 기술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검의 끝에 가까워져 있었다. 이전의 삶에서 보다 더 빠른 속도로 말이다.
아름답다.
검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 같지만 그가 보여주는 움직임은 아름답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유려하고 섬세했다. 백전노장의 기사인 빌헬름 경의 매서운 검격들을 일검에 흘려내는 그의 모습은 경이롭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아가씨이이!! 그렇게 달리시면 넘어져요!!"
어느새 그를 불러야 한다는 생각도 잊은채 그의 검무에 푹 빠져버려 바라만 보고 있게 되었다. 뒤에서 들려오는 헤일리의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아마 그대로 넋을 잃은채 둘의 대련이 끝날때까지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고...숨차아...아가씨. 그런데 왜 여기에 서 계시는..."
헤일리는 차가운 공기를 들이 마신 것이 괴로운지 헉헉 소리를 내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다 고개를 다시 들어올려 멍하니 연무장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이상하다는 얼굴로 쳐다보았지만 이내 그녀의 귓가에도 저 쇳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는지 연무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지금 이게 대체 무슨..."
헤일리는 연무장의 모습을 한번 보더니 이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경악했다.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지금 저기서 데미안과 검을 나누고 있는 이가 누구였는지 다시 한번 떠올릴 수 있었다.
"할아버지이이이이이이이!!!!!"
빌헬름 하트먼. 에델바이스 백랑기사단의 단장인 그는 다름아닌 헤일리의 조부였다.
쇠소리는 간단히 묻힐 정도로 거대한 헤일리의 고함 소리가 연무장 전체로 퍼져나갔다. 놀란 표정으로 헤일리를 바라보는 빌헬름 경의 모습에 나는 작게 웃음을 흘리었다. 아무래도 헤일리는 빌헬름 경이 데미안을 공격하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무래도 대련은 이걸로 끝이 날 것 같다. 나는 빌헬름 경과 똑같은 얼굴로 헤일리를 바라보고 있는 그를 향해 다가갔다.
"데미안."
헤일리에 비해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러보았지만 그는 곧바로 고개를 내쪽으로 돌리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환한 미소로 화답하였고 그 역시 입가에 작은 미소를 그리고는 그대로 자리에 쓰러졌다...?
어?
"데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