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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판타지의 악당이 되었습니다-43화 (43/131)

< 43화 > 막간

어둡다.

심연의 끝에서 이어져 온 어둠은 저 끝이 보이지 않는 무저갱을 향해 나의 몸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여기저기 고개를 돌려 저 어둠을 몰아낼 빛을 찾아보아도 이 캄캄한 공간 속에서 빛을 내고 있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 뿐.

언제나 하늘 위에 떠 있던 별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어두운 밤하늘을 밝히던 달 역시 이곳에는 존재치 않았다.

어둠에 마땅히 저항할 방법을 떠올리지 못한 나는 얌전히 그 구멍 속으로 끌려들어 가야만 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나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이곳에서 의외의 것들을 찾을 수 있었다.

방금전 까지만 해도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던 별과 달들이 빛을 잃은채 구멍의 외벽에 박혀 눈에 보이지 않는 천체도를 그리고 있었다.

나의 손에 닿자 먼지가 되어 바스라지는 별들과 그와 동시에 내게 흘러들어오는 기억들에 나는 지금 여기에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아 차릴 수 있었다.

그것은 과거였다.

정확히는 내가 회귀를 하면서 사라져버린 시간들이었으며, 앞으로 영원히 나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게 될 것들이었다. 이를 깨닫자, 지금 나를 잡아당기고 있는 이 어둠의 정체가 무엇인지 가닥이 잡히기 시작한다.

다시 한번 아래를 내려다 보자 그곳에 있는 것은 더이상 끝이 보이지 않는 무저갱이 아니었다.

[■■■■■■. ■■■■■?]

[■■. ■■■■■!]

나의 눈과 귀로는 알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뭉개져 버린 모습. 비록 시간대가 뒤죽박죽 뒤섞여 있었지만 저것은 틀림없는 자신의 기억이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 벽에 붙어 있는 것들과는 달리 내게 있어 고통스러운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기억들의 집합체였다.

그래. 나를 붙잡고 있는 이 어둠은 회귀 이전의 기억 속으로 자신을 끌어당기고 있던 것이었다.

그동안 과거의 기억들이 꿈에 나타날 때마다 어째서 나에게 행복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광경만을 보여주었었는지 이제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 빌어먹을 외신의 신성은 그 주인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자신을 괴롭히고 있던 것이다.

원래대로였다면 무의식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렇게 내가 느낄 수 있을 리 없었지만, 지금은 무슨 이유에선지 나는 무의식의 영역에서도 똑똑히 의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어둠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다.

내가 과거의 후회에서 현재의 삶의 동기를 찾은 것은 맞다만, 그것이 저 절망 밖에 보여주지 않는 고문실에 스스로 들어가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무의식이었다면 몰라도 의식이 있는 지금은 분명 어떻게든지 저항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 회전을 빠르게 돌려보아도 그 방법이라는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이 괴현상이 단순히 외신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면 애초에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을 것이었다. 그저 힘으로 짓누르고 꿈에서 깨면 될 일이었으니까.

나는 이 어둠 밖에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서 유일하게 빛을 잃지 않고 있는 몸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는 손으로 어둠을 잡아 뜯어 보아도 나를 붙잡고 있는 어둠은 여전히 건재하기만 했다.

틀렸어. 아무것도 통하지 않아.

외신의 신성력은 이미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를 놓아주었을 뿐, 이 일의 본질적인 원인은 내가 아직 잊지 못한 과거에 남겨둔 후회와 미련에 있었다. 그렇기에 내가 그것을 버리지 않는 이상 이 어둠을 물릴 방법은 없는 셈이다.

"아."

입에서 짧은 탄식이 새어나왔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일이 처음인 것도 아니지 않은가. 단순히 악몽으로 생각했던 것에 숨겨진 내막이 있었을 뿐이지,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잠깐, 아주 잠깐만이다. 밤은 그리 길지 않으니. 얌전히 과거를 돌아보며 꿈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다 보면 시간은 금세 지나갈 것이다.

"데미안..."

그렇게 체념에 가까운 생각을 하며 어둠에 몸을 맡기려는 순간, 문득 오늘 있었던 그와의 시간들이 머리속을 훑고 지나간다. 눈을 감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자신에게 장난을 치는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회귀 이후 그와 함께 보냈던 시간들을 하나둘씩 떠올리자 어째선지 왼손에서는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는 착각이 아니었다.

옅은 하얀빛 밖에 내지 못하고 있던 나의 왼손은 어느새 햇살과도 같은 밝은 황금빛에 둘러싸여 있었다.

빛은 어둠을 몰아내며 더욱 그 크기를 키우기 시작했다. 이내 내 주변을 완전히 감쌀 정도로 커져버린 빛에 의해 어둠으로 만들어진 세상이 무너져 내린다.

과거의 대한 미련으로 채워진 세계가 부서짐을 느끼자 나는 곧 내가 이 꿈에서 깨어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는 의식의 흐름에 몸을 맡기었다.

***

"으, 으음...."

정신이 들자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꿈속에서 내내 느꼈던 어둠 속으로 떨어지는 기묘한 부유감이 아닌 침대의 푹신한 감촉이었다.

눈에 비춰지는 익숙한 방의 풍경과 안개속에 갇힌 것과 같았던 꿈 속과는 달리 맑고 깨끗한 감각이 이곳이 현실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어찌저찌 악몽에서는 벗어나게 되었지만 이를 다시 경험하고 싶은 마음 따위는 없었다. 정신이 온전히 깨어나면 이에 대한 해결책 부터 마련해야 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잠시 서랍장에 넣어둔 소망종이를 보며 이 꿀꿀한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할 때, 나는 왼손에서 전해져오는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왜 아직도 손이 뜨겁....데미안?"

꿈에서 깨어났음에도 여전히 손을 떠나지 않고 있는 온기에 고개를 돌리자, 내 손을 잡은 채 곤히 잠에 들어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갑작스런 등장에 하마터면 오밤중에 비명을 내지를 뻔 하였지만, 비어있던 오른 손을 움직여 입을 막는 것으로 겨우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던 비명을 다시 삼킬 수 있었다.

잠시 생각을 멈추고 심호흡을 하며 미칠듯이 뛰는 심장과 머리를 진정시킨다. 천천히 냉정을 되찾은 머리는 잠에 들기 이전의 기억을 꺼내주었다.

잠에 들기전 마차에서 그와 손을 잡고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는 있다만 설마 침실에 도착할 때 까지 그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무엇보다 손을 놓아주지 않는 나의 모습을 보며 짓궂게 웃었을 그의 모습이 머리속에 그려지자 얼굴이 뜨거워졌다.

조심스레 그와 맞잡은 손을 빼내 보려 하지만 놓치지 않겠다는 듯 꽉 쥐고 있는 그의 손을 뿌리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는 수 없지.

내가 놓고 싶어도 그가 놓으려 하지를 않으니 조금만 더 이렇게 손을 잡고 있는 수 밖에.

그와 맞잡은 손을 보고 있으니, 그제야 꿈 속에서 느낄 수 있었던 온기와 빛이 설명이 되기 시작했다.

그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나를 악몽 속에서 꺼내준 것은 다름 아닌 그의 힘이었다.

뒤늦게 꿈 속에서 느꼈던 따스한 온기와 기분 좋은 빛이 그의 것이었다고 생각하니 방금까지 꿈으로 인해 우중충했던 마음은 태양이 뜬 것 처럼 맑게 개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그의 손을 잡은 채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불편해 보이는 자세였음에도 얼굴 하나 찡그리지 않은채 잔잔한 호수와도 같은 얼굴로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저렇게 평온해 보일지 몰라도 잠시 후 일어났을 때를 생각하면 분명 몸을 이리저리 뒤틀며 뻐근해 할 그의 모습이 절로 그려진다.

마음이 놓이기 시작해서 그런걸까. 잠들어 있는 그의 모습을 보자 갑자기 별의 별 생각이 다 들기 시작한다.

지금이라도 그를 깨워주는 것이 맞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지만, 또 한 편으로는 이런 무방비한 그의 모습에 평소 그에게 하지 못했던 것들을 할 수 있을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기나긴 고민 끝에 나는 양측의 의견을 섞은 절충안이라고 할 수 있는 답을 내놓았다.

아주 조금만 하다가 그를 깨우는 것으로.

정확한 제한시간도 없는 것이 이미 욕망에 패배해 버린 결과 같다만 뭐 어떤가.

그리 마음이 정해지자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망설임 없이 그의 볼을 쭈욱 잡아당겼다. 비록 이전처럼 그의 얼빠진 반응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기분은 좋았다.

아마 그의 성격 상 내가 자고 있는 사이에 지금의 나 처럼 내 볼을 잡아당기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괜히 한 쪽 볼이 얼얼해지는 것 같다. 나는 다시 한번 그의 볼을 길게 쭈욱 늘리고는 다음 목표인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나의 새하얀 머리카락과는 달리 완전히 대비되는 짙은 검은색의 윤기나는 머리는 쓰다듬고 싶다는 마음이 절로 들 정도로 보드라워 보였다.

어차피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나와 그 단 둘 뿐.

하물며 그는 잠에 빠져있었으니 나의 행동에 대해 무어라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히히히..."

손을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 마디 사이사이를 간지럽힌다. 그 느낌이 좋아, 나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른 채 그의 머리를 만져대었다. 언제나 슬픔과 후회만을 보여주었던 꿈과는 달리 현실에서의 행복은 이토록 손쉽게 내 손에 잡혔다.

그 사실이 더는 꿈에 대한 것을 생각나지 않게 만들었다.

그의 머리가 나의 손에 의해 어느세 까치집 처럼 봉두난발이 되어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 손은 멈출 줄을 몰랐다. 일부러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다시 정갈히 다듬는 것이, 마치 거리의 아이들이 하였던 놀이가 생각났지만 재밌으니 된거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 그의 품에서 울음을 터트렸을 때, 그때 그가 이렇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던 것 같은데....지금에 와서 떠올려 보려고 하니 어떤 느낌이었는지 잘 기억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비어있는 그의 한쪽 손을 들어 슬그머니 내 머리 위에 얹었다.

"이런...느낌이었나? 아니, 좀 더 힘을 빼고...."

그러고는 최대한 그때의 느낌을 재현하기 위해 천천히 그의 팔을 움직였다.

축 처진 팔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그 모습이 매우 어색해 보였다만 그의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느낌만은 그대로 였기에 나는 매우 만족하며 그의 손길 아닌 손길을 느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부터인지 기이한 위화감이 그의 손에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내 손에 들린 그의 팔에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지만 팔을 움직이면 움직일 수록 처음 내가 팔뚝을 움직였을 때와는 달리 뭐라 말할 수 없는 미묘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나쁜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투박했던 이전보다는 보다 더 상냥하고 섬세하게 느껴졌달까.

처음에는 그저 내가 그의 팔을 움직이는 것이 능숙해졌다고 생각하였지만 별다른 힘을 주지 않아도 절로 손이 움직이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자, 나는 더 이상 맘 편히 그의 손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이윽고 그는 더 이상 숨길 마음이 없어진 것인지 내가 손을 놓았음에도 여전히 부드럽게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나의 시선이 닿은 그곳에는 태양빛을 담고 있는 듯한 금안이 어둠속에서도 선명하게 그 빛을 빛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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