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 불청객 (6)
'아, 이건 위험한데...'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소녀는 눈 앞의 소년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작게 탄식하였다.
데미안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는 흑색의 오러는 마치 작은 폭풍과도 같이 공간을 휩쓸고 있었다.
부서진 책장의 파편과 여기저기 흩어진 책들이 오러에 휩쓸려 사방으로 비산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의 이목이 몰리지 않은 것은 그녀가 미리 이곳에 쳐둔 결계가 바깥으로의 인식을 온전히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곧 한계에 도달한다.
천년전 크라우스가 사룡을 죽이고 얻어낸 용의 가호는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데미안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오러는 그 기세가 줄어들 줄을 몰랐다.
지금도 휘몰아치는 폭풍이 계속해서 결계를 갉아먹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인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마력량을 보유한 그녀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사용이 가능한 마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계를 유지한다고 하여도 본신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면 이 도시의 군주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리 없다.
"귀찮게시리..."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의 앞을 가로 막고 있는 오러의 폭풍을 손을 흔들어대며 흘려보내기 시작하였다. 일반적인 오러였다면 그녀의 손길 한번에 대기 중으로 흩어졌어야 했지만 지금 주위를 맴돌고 있는 흑색의 폭풍은 흩어지기는 커녕 그 세기가 더욱 거세지고만 있었다.
손끝을 찌르는 익숙치 않은 고통에 그녀의 얼굴이 약간씩 일그러졌다.
자신이 대체 무엇 때문에 이딴 고생을 해야 하는 것인가.그저 오랜만에 산에서 내려와 인간들이 무얼 하는지 둘러보러 온 것 뿐인데 말이다.
그런데 사람 하나 잘못 만나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속에서 열불이 나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그 본질적인 원인이 눈 앞의 소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 역시 알고 있었으면서도 모처럼 몇백년 만에 찾아온 자신의 평화로운 유희 생활이 엉망이 되었다는 것에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저 폭풍의 중심에 서 있는 데미안의 뒷통수를 후려갈겨 기절이라도 시키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아무리 화가 났다 하여도 그녀가 괜한 이에게 분풀이를 할 정도로 못되먹은 성격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방금 전 이곳에서 느껴졌던 그 불길한 감각은 그녀 역시 쉬히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러니 눈 앞의 소년을 진정시킨 후 함께 그 원인을 찾는 것이 올바른 행동일 것이다.
어느덧 그녀와 데미안의 거리는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 졌다.
거리가 가까워진 만큼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각 역시 그녀에게 전해져 왔다. 완전히 용의 것으로 변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데미안의 모습을 보자 그녀는 절로 몸이 움츠려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단순히 형태만을 갖추고 있던 용안(龍眼)은 이전의 사룡에게서 보았던 것처럼 일종의 광기와도 같은 것이 깃든 것 같았다. 변한 것은 그 눈 만이 아니었다. 방금 전 까지만 하여도 가볍게 흘려넘길 수 있었던 용살이라는 업이 가져다주는 본능적인 혐오감 역시 지금은 마치 용의 피어와도 같이 목에 칼을 들이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단지 그 뿐이었다.
그것이 공포라는 감정까지 이어지기에는 조금 부족한 감이 있었다. 검은 검이다만 들이민 검에는 날이 서 있지 않았다. 단지 데미안의 초조함에서 흘러나온 감정의 파편이 그녀를 스쳐지나간 것이었지 그의 칼은 그녀를 향해 있지 않았다.
주변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던 폭풍은 그가 냉정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리가도 하는 듯 천천히 가라 앉기 시작하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은 기다리다가 다가갈 걸. 라며 작게 푸념을 하는 그녀는 얼얼한 손을 흔들고는 데미안을 올려다 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가 데미안에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공교롭게도 먼저 입을 연 것은 데미안이었다.
"테이아."
데미안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그녀의 눈이 크게 떠진다.
테이아.
흔치 않은 이름은 아니었다.
특히 이곳 메로힘이라면 더더욱 테이아라는 이름을 가진 이는 많을 터였다. 과거 메로힘에서는 매섭게 불어오는 북풍을 신의 바람이라고 부르며 그 바람을 일으키는 신을 테이아라 불렀다는 전승이 있었으니 말이다.
주신 알테어의 이름이 아닌 이상 다른 신들의 이름을 따서 작명하는 것은 흔한 일이 었으니, 하지만 데미안은 그녀를 테이아라고 불렀다.
그녀의 정체가 드래곤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 어떻게..."
그녀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데미안을 바라보았다. 여태껏 대화를 나누며 데미안에게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밝힌 적은 없었다. 아니, 설령 알려주었다고 하더라도 데미안의 입에서 나온 그 이름을 꺼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느닷없이 진명(眞名)으로 불린 그녀는 당황하였지만 반면 데미안은 이전과 변함 없는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테이아. 당신이라면 이곳에 남겨진 힘의 잔향을 추적할 수 있을테지요. 부탁합니다. 저를 그 힘의 근원지로 데려다 주십시오."
"자, 잠깐! 그 이전에 그 이름! 이름에 대해서 설명을 먼저 하거라!!"
"시간이 없습니다. 일이 끝나고 나면 말씀해 드릴테니. 어서."
데미안의 단호한 대답에 테이아는 더이상 그를 추긍하지 않았다.
어린 놈이 자신에게 명령하는 것만 같아 기분이 상하기는 하였다만 그녀 역시 지금 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손바닥 위에 작은 마법진이 그려지기 시작한다. 이내 마법진을 이루고 있던 마나는 한데로 엉키고 섞여 작은 나비의 모습으로 화했다.
마법진에서 튀어나온 새하얀 나비는 잠시 허공을 맴돌더니 어느 한 곳을 지나치자 그 색이 검게 물들었다. 그렇게 나비는 무언가를 찾은 듯 한 방향으로 날아가기 시작하였지만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이상 날지 못한채 공중에서 펑-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말았다.
데미안은 혹여 무엇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그녀를 돌아보았지만 테이아는 그런 데미안의 걱정과는 달리 사라진 나비의 모습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야. 힘의 근원이 소멸한 모양이군."
"...?"
"말 그대로다. 지금 여기에 이 기이한 잔향을 남긴 그 정체모를 것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소리다. 애써 찾아가는 수고를 덜었군."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마법의 결과는 그들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어딘가 뚝뚝 끊겨있는 것 처럼 그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았지만 드래곤이라는 종족이 가지고 있는 낙천적인 성격 탓일까. 테이아는 그 사실을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겨 버렸다.
뭐, 결과만 좋으면 된거 아닌가.
이제 눈 앞의 저 소년에게서 어떻게 자신의 진명을 알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만 듣는다면 기분 좋게 산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테이아와는 달리 데미안의 얼굴은 여전히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이 불길한 감각의 원인이 아닌 지금 자신의 눈 앞에 없는 엘레나의 행방이었으니까. 엘레나를 찾을 단서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의미하게 변해 버렸으니 그는 눈 앞이 깜깜해지는 것만 같았다.
"데미안?"
그런 그의 귓가에 고운 미성이 들려왔다.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그가 그토록 찾고 있었던 그녀가 서 있었다. 엘레나는 난장판으로 변해버린 주변의 모습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왜 책장은 다 이렇게 부서져 있는 건지-"
"엘레나!"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엉망이 된 주변을 살피던 엘레나는 이게 어찌된 일인지 데미안에게 물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자신을 향해 소리치며 달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
어둠 속에 놓여진 탁자의 위에는 교단에 존재하는 일곱 명의 추기경의 숫자처럼 일곱개의 촛대가 놓여져 있었다.
빛은 빛이되 마치 어둠이 타오르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을 한 촛대의 불은 그 느낌 그대로 어둠을 밝히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바람이 통하지 않는 곳이었건만 어느 순간 부터인지 가장 두꺼운 촛대에 붙은 불이 거센 바람 앞에 놓인 것처럼 위태롭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앞서 하나의 불이 꺼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하나의 촛불마저 이런 모습을 보이니 어둠속에서 초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의 눈에는 초조함이 깃들었다.
【이런...】
결국 우려하던대로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이 위태롭던 불은 천천히 사그라 들어갔다.
단 하루만에 교단의 가장 중요한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두명의 추기경이 목숨을 잃었다.
분명 이 땅에 강림하신 그 분을 영접하러 간 이들이 무슨 이유에서 숨을 거둔 것인지 지금 이 자리에 남아있는 이들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불이 꺼질때마다 거대한 무언가의 감정이 자신들의 뇌를 흔들어 놓았다는 것 하나 만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자신들에게 이러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이는 이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하나 둘 꺼져가는 촛불을 보며 미소를 지으면서도 이 거대한 감정에 휘둘리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꼈다.
어째서 신은 충복의 죽음에 슬픔이 아닌 기쁨을 표하시는 것일까.
이해할 수 없는 신의 뜻은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머리는 당혹과 의문으로 가득차 있지만 원치 않는 기쁨이라는 감정에 그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고 있다. 자유의지를 잃어버린 것 같은 자신들의 모습에 공포라는 감정은 자연스럽게 따라 붙어왔다.
그렇게 이곳에 모인 모든 추기경들이 혼란스러워 할때 유일하게 진심으로 그 감정에 동조하고 있는 이도 있었는데, 그것은 이 중 가장 신에 가깝다고 불리우는 대주교 펠리안이었다.
그녀는 눈 앞에 꺼진 두개의 초를 보고도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단지 자신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감정에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을 뿐, 펠리안은 자신을 흔들어대는 감정의 격류에 마치 커다란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를 보다못한 한 추기경이 그녀를 향해 불만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금 대체 뭐하자는 거요! 대주교! 지금 상황이 어떤지 알고 있으면서도 그리 웃고만 있을 거요!!!】
공간을 울리는 그의 말에 펠리안은 웃음을 멈추고는 지긋이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소리친 추기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어째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다는 얼굴을 한채 그에게 물었다.
【벨로트 추기경이야 말로 이상한 말을 하시는 군요. 저희의 신께서 기뻐하시고 계시는데 어찌 웃음을 참으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분을 영접하러 간 두 명이 목숨을 잃었소! 헌데 신께서는 그에 대해 슬픔은커녕 기뻐하시고만 계시지. 무언가 잘 못 되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 것이오?】
자신들이 품고 있는 의문을 관통하는 그의 말에 자리에 앉아있던 몇몇 추기경들은 무심코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그런 그의 말에도 펠리안은 여전히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오히려 그의 말에 화가 나기라도 한듯, 그녀의 주위로 검붉은 신성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어리석군요. 벨로트 파이만.】
그녀의 루비색 눈동자가 어둠속에 불길하게 빛을 내었다.
가냘프고 여린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에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담겨있었다.
피와 같이 붉게 빛이 나는 루비색 눈동자를 마주하자 벨로트는 머리가 깨질듯한 고통을 느끼며 신음을 토해내었다.
【감히 신의 뜻에 사견을 더 하려 하다니. 추기경이라는 자가 불경하기 짝이 없군요.】
【그..그런 것이 아니오라...】
고통으로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린채 힘겹게 입을 여는 벨로트의 모습에 다른 추기경들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런 이들의 모습이 마음에 든 것인지 펠리안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말하였다.
【다들 쓸데없는 상념은 떨쳐 내시지요. 파울라 추기경과 이올론 추기경이 숨을 거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의 신께서 이 땅에 내려오셨다는 것은 확실하니, 분명 두 추기경 또한 그 분의 곁으로 갔을테니 말입니다.】
안타깝다는 기색은 커녕 즐겁다는 듯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탁자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벨토르를 제외한 추기경들은 서둘리 고개를 끄덕였다.
펠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집회를 끝내겠다고 선언하자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벨로트 역시 지끈 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이 공포로 가득 찬 장소를 벗어나기 위해 몸을 움직였지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벨로트 추기경.】
【네..대주교님...】
벨로트는 펠리안에게 당장이라도 자신의 머리를 헤집고 있는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를 향한 두려움이 그 말을 입 안에서만 헛돌게 만들었다.
그런 벨로트의 맘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펠리안은 살며시 그의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대며 그에게 주었던 고통을 다시 제 손으로 가져갔다.
한껏 개운해진 머리에 그는 황망하다는 눈으로 펠리안을 바라보았다. 펠리안은 그런 벨로트를 향해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이전과는 달리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름이 아니오라 제가 벨로트 추기경께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아, 네! 하명하시지요.】
벨로트는 곧바로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명예로운 기사와는 달리 마치 잘 조련받은 개와도 같았다만 그는 자신의 행동에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이것이 본래 정상적이 모습이었다. 방금 전 자신의 행동은 미지의 공포와 두려움에 이성을 잃어 저지른 실수였다.
다행히도 신의 강림으로 인해 그녀의 기분은 매우 좋아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녀가 직접 그에게 걸어둔 고통을 가져갈리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는 얌전히 무릎을 꿇은 채 펠리안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제가 신께 바치고자 하는 물건이 있는데 그것을 경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니 저에게 내어주실 수 있을까요?】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순간 벨로트는 자신의 머리에 손을 올려다 놓은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는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펠리안에게 뭐라 말을 꺼내려 하였지만 이미 그의 몸뚱아리는 목에서 떨어져 땅바닥에 널부러진 후였다.
탁자 위의 놓여진 촛대의 불 하나가 꺼져갔다.
펠리안은 기대가 가득 담긴 눈으로 불이 꺼진 초를 바라보았지만 이전에 불이 꺼졌을 때와 같은 감정이 전해져 오지 않자, 흥미를 잃은 눈으로 벨로트의 머리를 보고는 집회장 어딘가를 향해 던졌다.
【그 분께서 추기경들의 목숨을 원하시는 건 아니었나 보군요.】
그녀의 눈에 처음으로 안타깝다는 감정이 깃들었다.
혹시나 싶어 추기경의 목을 바치라는 뜻인가 싶어 해보았지만 역시 그러한 뜻은 아니었나 보다. 신의 뜻을 감히 자신의 잣대로 헤아리려고 했던 스스로의 모습에 그녀는 자책하며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를 들여다 보았다.
그 목걸이에는 파울라에게 건내주었던 성물과 같은 검은 보석이 교단을 상징하는 문양에 박혀있었다. 이를 보며 펠리안은 자신이 그녀에게 주었던 성물이 무사히 신께 전달 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순간 부터 은은하게 성물을 통해 전해져 오는 감정의 파편이 그 증거였다.
다른 추기경들은 느끼지 못하는 이 따스하게만 느껴지는 감정이 오로지 자신만을 향한 것 같아, 펠리안은 감복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목걸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던 펠리안은 다시 목걸이를 옷 안으로 묻어 넣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목걸이에 박힌 검은 보석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올론의 불이 꺼진 이후부터 목걸이를 통해 계속 잔잔하게만 전해져 오던 감정이 갑자기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변했다.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던 앞의 것과는 달리 그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감정이 몸을 훑고 지나갔지만 펠리안은 그것을 굳이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이 또한 신의 뜻이라 여기며 펠리안은 따스한 온기를 품고 있는 목걸이를 소중히 손에 쥔채 눈을 감아 기도를 올렸다.
【네, 때가 되면 신께서 다시금 계시를 내리시겠지요.】
어째서 지금 당장 자신들의 곁으로 오시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자. 전부 다 그분께서 생각하시는 바가 있을 터이니.
펠리안은 그리 마음을 다잡으며 이제는 아무도 남지 않은 집회장에서 벗어났다.
***
"엘레나!! 어디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네? 네에..."
코 앞까지 다가온 데미안의 얼굴과 그의 뜨거운 숨결에 엘레나는 절로 얼굴이 뜨거워 지는 것을 느꼈다.
평소와 분위기가 다른 탓일까.
회귀 이후 언제나 둥그런 그의 모습만을 보았기에 그런지 저렇게 날카로운 눈동자로 자신을 훑는 그의 시선은 마치 심장을 꿰뚫는 것만 같았다.
"데, 데미안!! 그...너무 가까워요.."
하지만 무엇보다 엘레나의 머리를 뜨겁게 만드는 것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그와의 거리에 있었다.
이전에 그녀와 마주하는 것이 부끄러워 춤을 추는 것을 어려워 한 데미안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그는 서슴없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스스로 다가가는 것은 괜찮아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데미안의 모습에는 전혀 내성이 없는 엘레나였다.
그런 엘레나의 감정을 대변하듯 다시금 그녀의 주위에는 온풍이 살랑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