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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판타지의 악당이 되었습니다-40화 (40/131)

< 40화 > 불청객 (5)

이교도.

세간의 사람들은 태양을 가린 문양을 새기고 다니는 이들을 그렇게 불렀다.

물론 그들이 내세우는 '진실된 밤'이라는 이름도 있기는 하였지만 아무도 그들을 그런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태양은 대륙인들에게 있어 주신 알테어를 상징하는 신성한 문양이었으니 그것을 의도적으로 가리고 있는 문양을 새기고 다니는 행동은 알테어의 신성을 부정하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대륙은 다신교로서 여러 신들의 존재를 인정하였지만 그 수많은 신들 중 주신(主神)이라고 불리는 이는 오직 빛과 광명의 신 알테어가 유일했다. 과거 그가 현세에 용사라는 화신의 모습으로 내려와 세상의 악과 맞서 싸웠다는 것은 대륙에 살고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그 전설은 종족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이들의 역사의 기록되어 있었으며 그것 하나만 하더라도 그가 다른 여러 신들과 차별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상 가장 강대한 힘을 가진 나라이자 현재까지도 이어져 온 천년이라는 역사를 자랑하는 제국 역시 주신 알테어가 남긴 흔적이었다.

용사는 지상에 에스텔리아 라는 막강한 제국을 세운 이후 여러 전설을 남기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제국의 황족들은 그의 후손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대대로 알테어를 상징하는 찬란히 빛나는 금발과 함께 막강한 신성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렇기에 제국은 알테어라는 흔들리지 않는 구심점과 정통성을 가질 수 있었으며 그 결과 지금의 대륙은 제국의 것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 조차 어쩌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자신들의 주적이나 다름 없는 이교도 집단. '진실된 밤'이었다.

제국은 자신들의 상징인 태양과도 같이 대륙 전역에 그 영향력을 과시하였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 제국이 모든 곳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제국의 영광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들의 밑에 내려앉은 어둠 역시 그 크기를 키워갔다.

아무리 찬란한 빛이라고 할지라도 그림자는 따라붙기 마련이다.

'진실된 밤'은 그런 존재였다.

제국이 아무리 떼어내려고 하여도 사라지지 않는 그림자와 같았다. 기나긴 시간동안 제국은 이교도의 존재를 지우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보았지만 그때마다 그들은 이름을 바꾸고 형태를 바꾸며 계속해서 그 명맥을 유지해 왔다.

과거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진실된 밤'이라고 하는 그들 역시 그간의 역사가 증명해주듯 절대로 제국과 공존할 수 없는 이들이었다. 그렇게 제국이 아무리 지우고자 하여도 사라지지 않는 이교도들의 존재에 불만을 품었듯, 이들 또한 자신들의 처지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 그저 미치광이 광신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이교도들이었지만 그들은 과거 제국이 그러했듯 자신들의 신을 주신으로 내세워 세상을 지배하기를 원했다.

저 머나먼 별의 저편에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을 외계의 신을 지상에 강림시켜 태양을 땅으로 떨어뜨리는 것. 그리고 그 무너진 세상에서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 바로 그들의 목표였다.

말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절로 나올 정도로 이들의 생각은 그저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은 것 같아 보였지만, 이계의 신이 자신의 신자들에게 건내주는 힘은 그런 꿈을 꾸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지상의 그 어떤 것보다 매력적이며 강력했다.

원한다면야 당장이라도 제도를 불바다로 만들며 세상을 혼란에 빠지게 만들 수 있었지만 그런 식으로 나서 봤자 결국 끝에 쓰러지는 쪽이 자신들이라는 것을 그들은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긴채 조용히 기다려왔다.

제국이 용사라는 알테어의 화신에 의해 세워졌던 것 처럼 자신들의 신이 이 땅에 강림할 그 날을 말이다.

현대에도 초월자라 불리우는 이들은 있었지만 과연 그들이 과거 신화를 써내렸던 영웅들보다 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런 영웅들과 견주어 보아도 모자름이 없는 이들이 아예 없다고 할 수 는 없겠다만. 그렇다고는 하여도 적어도 천년의 제국을 세운 '용사'에 비견될 만한 이는 없다고 단언 할 수 있었다. 아니, 설령 용사가 다시 이 땅에 강림한다 하여도 이들은 자신들의 신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들의 신은 자신의 강림을 약속하였고 승리를 가져다 주겠다고 말하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약속의 때가 다가왔다.

대주교는 불길한 빛을 내뿜고 있는 성물을 보여주며 그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날이 다가왔다고 선언했다.

확실한 증거와 함께 계시가 내려오자 결단은 빨랐다. 한시라도 빨리 이 땅에 내려온 신을 모시기 위해 그 자리에 있던 추기경 둘이 성물을 들고 예언의 장소인 메로힘으로 떠났다.

메로힘에 도착하자 성물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빛을 뿜어내었고 그것은 그들을 더할 나위 없는 흥분의 도가니에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어언 수백년을 기다려온 대계가 자신들의 손에 이루어질 생각을 하니 머리에 피가 쏠리는 것은 당연했다.

【늦는군.】

어둠조차 그의 거대한 체구를 숨길 수는 없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채 메로힘의 백색 성벽 위에서 형형색색 빛나고 있는 도시를 바라보고 있는 그는 돌아오지 않는 자신의 동료를 생각하며 그리 중얼거렸다.

그녀의 능력을 생각해본다면 설령 예언의 인물이 겨울성 내부에 있다고 하여도 지금쯤이면 찾았다는 연락이 와야 할 시간이었다.

수색을 하기에는 이 거대한 몸이 눈에 너무 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얌전히 이곳에서 기다리는 편을 선택하였지만, 그것만 아니었다면 그는 당장이라도 저 밝게 빛나고 있는 도시로 뛰쳐나가 그 빛을 모두 거두고 어둠으로 물들고 싶은 충동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고작 자신의 자그마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대계를 어그러트릴 수 는 없는 법.

그는 고개를 돌려 무한히 펼쳐져 있는 것 같은 새하얀 설원을 바라보았다. 어둠에 잠겨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 풍경이 되려 그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만약 예언의 그분을 만나 뵙게 된다면 이 시끄러운 도시를 저 설원과 같이 만드는 것에 대해 말해보는 것은 어떨까. 그분과 함께라면 저 거슬리는 탑도 그 짜증나는 백색의 마법사도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 메로힘을 무너뜨리는 것은 위대하신 분의 강림을 온 세상에 알리는데 더할 나위 없어 보였다. 다시 생각해보아도 괜찮은 생각인 것 같다며 그는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그리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고 있던 그의 얼굴에 갑자기 분노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아무말 없이 설원을 보는 것도 혼자 앉아 생각만 하는 것도 이제는 질렸다. 그의 얕은 참을성은 금세 그 바닥을 드러내었고 그는 흉흉한 보랏빛 안광을 내뿜으며 다시 도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생각해보니 잠시 도시에 나가 날뛰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인것 같군. 백색의 대마법사가 내려온다 하더라도 파울라가 제때에 도착한다면 능히 자리를 피할 수 있을 것이고...어쩌면 이런 나의 모습을 보고 그분께서 곧바로 모습을 드러내실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는 방금전 자신이 속으로 되내었던 말과는 완전히 상반된 말을 하며 고개를 주억 거렸다.

이토록 극한의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하는 것은 그의 타고난 천성이었다만 그래도 사리분별이 가능했던 이전과는 달리 외신의 힘을 받아들인 이후부터 그는 완전히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어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본신의 능력은 초월자라 불리우는 이와 맞서도 살아는 남을 수 있을 정도로 출중하기에 이런 그를 제어하기 위해 다른 이와 붙여서 같이 보낸 것이었지만 그의 인내심이 바닥 날 정도로 시간이 지체될지는 대주교 역시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고오오오-

당장이라도 도시를 향해 도약할 것 처럼 자세를 잡은 그의 하반신에 막대한 양의 오러가 깃들기 시작한다.

대기의 흐름 마저 뒤틀어 버리는 그의 오러는 다리에 집중되고 있는 여파 만으로도 그가 서 있는 성벽에 막대한 부담을 주고 있었다. 이는 그의 무식한 오러 운용방식이 문제이기도 하였지만 일반적인 오러 나이트들의 기교를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자색빛 오러는 패도적이고 무거웠다.

한점에 모인 힘이 결국 고점에 도달했다.

조금이라도 건드렸다가는 터질 것 같은 폭탄으로 변모한 그는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자 주저없이 자신의 다리에 모인 오러를 터트리려고 하였다. 다행이게도 타이밍 좋게 그의 눈 앞에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말이다.

【어이, 파울라 너무 많이 늦었....】

자세를 고쳐서고는 불만 어린 표정으로 그림자의 속을 들여다 보며 말하는 그였지만 이내 자신의 몸을 강타하는 강렬한 압박감에 말을 멈추고 말았다.

오러를 끌어올리느랴 그 어느때보다 예민해진 오감은 그동안 의식의 밑바닥에 묻어두고만 있었던 이성을 다시 떠오르게 만들었다.

어둠 속에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시선과 마주하자 마치 알몸으로 바깥에 내던져 진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전신을 순식간에 훑고 지나간 강대한 신성은 그로서도 매우 익숙한 느낌의 것이었지만 그것이 여태껏 자신이 경험했던 그 어떠한 신성보다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틀림없다.

지금 눈 앞에 있는 분이야 말로 대주교가 말했던 예언의 그 분이다.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무릎이 절로 꿀려지는 것만 같은 이 위압감.

언제나 자신을 비호하였던 힘이 이제는 되려 자신을 짓누르기 시작하니 생소한 느낌이 들었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 힘에 굴종하는 것 뿐, 그 이외의 것은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어둠이 걷히며 드러나는 모습에 그의 눈이 휘둥그래 커졌다.

어두운 밤에도 뚜렷하게 빛나는 것 처럼 보이는 백색의 머리카락. 그의 탁한 보랏빛 눈과는 달리 수정을 닮은 맑은 자색의 눈동자가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순간 그 외모에 정신을 놓을 뻔 한 그였지만 눈 앞에 서 있는 이의 모습이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어떠한 이와 매우 닮아 있다는 사실에 정신을 다잡을 수 있었다.

【에델...바이스...?】

그의 눈에 비춰지고 있는 소녀의 모습은 틀림없이 메로힘의 군주인 에델바이스 가문의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그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 자신의 가슴을 가득 채우는 것을 느끼며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운명도 이런 잔혹한 운명이 있을까.

하필이면 에델바이스라니. 신도 참으로 짓궃으시지 않은가.

아마 저 육신에 이전의 에델바이스의 여식에 대한 정신은 남아있지 않을테지만 그래도 에델바이스의 손으로 메로힘을 무너뜨린다니 그 상상만으로도 그에게 기쁨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딸아이에게 죽음을 맞이할 그 백색의 마법사를 생각하니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가질 않는다.

그러한 상상을 하며 실실 웃고 있는 그의 귓가에 고운 미성이 파고 들어왔다.

"무엇이 그리 재밌으셔서 웃고 계신 건가요?"

【아, 아무것도 아닙...컥!!】

아름답지만 전신을 서늘하게 만드는 목소리에 서둘러 고개를 들어 보았지만 이미 그녀의 뜻에 따라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던 신성은 순식간에 그의 목을 옥죄어 왔다.

추기경들 사이에서도 유독 강인하고 단단한 몸을 자랑하는 그였지만 그녀가 휘두르는 막대한 신성 앞에서 강철보다 단단하게 단련된 육체는 언제든 우그러뜨릴 수 있는 종이와도 같았다.

자신의 몸을 짓누르는 힘에 더이상 그는 환희와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에서 나오는 무력감이 주는 것은 언제든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공포심이 전부였다. 그 공포가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하자 그제야 이전에는 눈에 보이지 않던 것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파...울..라...】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순백의 소녀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먼저 그녀를 찾아간 추기경 파울라의 머리가 틀림없었다. 소녀는 그의 말에 들고 있던 머리를 바라보더니 이내 손에서 화염을 일으켜 재도 남기지 않은채 세상에서 지워버리고 말았다.

"패력의 이올론."

자신의 이름을 나직히 부르는 소리에 그는 무심코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 보았다. 뭐라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이미 한계까지 죄여온 목은 그가 겨우 숨을 내쉴 수 있게 해주고 있을 뿐, 그에게 말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는 주지 못하였다.

"우선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네요. 덕분에 찾는 수고를 덜을 수 가 있었어요."

여전히 그녀의 목소리는 처음과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오히려 이올론의 공포심을 자극할 뿐이었다.

어째서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일까. 자신을 향한 저 살의는 대체 무엇일까. 온통 풀리지 않는 의문들 뿐이었지만 의문만 들 뿐 그 이상으로 사고가 이어지지 않는다.

혼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그녀의 말은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흐릿해진 시야에는 불길하게 일렁이고 있는 자색의 눈동자 만이 비춰지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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