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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판타지의 악당이 되었습니다-39화 (39/131)

< 39화 > 불청객 (4)

어지럽다.

뜨겁게 과열되어 버린 머리는 평소에 비해 매우 둔한 활동량을 보이고 있다.

지금 이렇게 책장을 훑어보고 있는 것도 그저 시늉만 내고 있을 뿐, 눈에 비춰진 글자들은 머릿속에 들어가지도 못한채 쫓겨나기만 하고 있었다.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의 제목들을 하나씩 읽어가다보면 이 마음도 가라앉지 않을까 싶었지만 전부 의미없는 행동이었다.

'가만히 있으세요.'

코앞에 놓여있는 책들은 자신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방금전 자신을 향해 짓굳게 웃던 그의 얼굴만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태양과도 같은 따스한 빛을 담은 그의 눈동자에는 얼굴을 붉게 물들고 있는 자신의 얼굴이 그대로 비춰지고 있었다. 그때 그 보드라운 손수건으로 부드럽게 자신의 입가를 어루만져 주었던 그의 손길까지, 모두 방금전에 일어났던 일인 것처럼 자신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되풀이 되기 시작한다.

그렇지 않아도 속에서 끓어오르는 열기 때문에 둔해진 머리인데 그걸 모두 이런데다 쓰고 있었으니 글자가 머리에 들어올리가 있나.

이런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하며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다보니 어느새 그와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눈치채는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옆에서 느껴지던 그의 온기와 체향이 사라지자 그제야 머리는 냉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그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직 처음에 서 있었던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천천히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을 읽어나가고 있었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자 내 몸은 자연스레 그가 있는 곳을 향해 움직였다.

하지만 냉정을 되찾은 머리가 그를 향한 내 발걸음을 멈춰세웠다. 그로 인해 생긴 찰나의 순간은 어지럽던 머리를 정리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를 보자마자 넘쳐흐르기 시작하는 감정을 뒤로한채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눈앞에 있는 책장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그의 옆으로 돌아가는 순간 방금전과 같은 일이 반복될 뿐이었으니. 차라리 지금처럼 거리를 두고 조금이나마 머리를 식히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시에 허전함을 느끼며 다시 그의 옆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자신의 모습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우습기는 했다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하지 않는다면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바보같이 아무것도 하지 못해보고 그의 옆에 서 있기만 할 터였다.

그런 것은 원치 않았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아도 조금 부끄럽기는 하다만 이전에 거리에서 있었던 일은 어찌보면 자신이 원했던 상황이기도 하였다.

오늘 이렇게 야시장에 나온 것 역시 단지 그와 거리를 둘러보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였으니 말이다. 속으로는 앞으로도 아까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다만 이런 흘러넘치는 의욕과는 다르게 만약 그러한 일이 자신에게 또 일어난다고 한다면 아까와 마찬가지로 정신이 버티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잠시 숨돌릴 시간 정도는 필요한 것이다.

"불공평해..."

여전히 평소와 같은 담담한 얼굴로 책장을 둘러보고 있는 그를 보자 살짝 심통이 났다.

자신은 지금 누구 때문에 이렇게 마음고생을 하고 있는데 혼자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무언가 불공평한 것 같았다. 엄밀히 따지자면 방금전에 있었던 일은 온전히 자신의 업보에서 비롯된 일이었으니 뭐라 할말은 없다만.

그래도 언제나 그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밀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는 것은 변치 않았다.

그동안 그 격차를 매꾸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데 그는 손짓 한번만으로도 내 마음을 뒤흔들어 버린다.

이건 불공평해도 너무 불공평한 것 아닌가?

그렇게 불공평하다고 연신 작게 중얼거리는 나의 입가에는 이미 숨길 수 없는 작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이는 그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을 기억하기에 할 수 있는 투정아닌 투정이었다.

나는 다시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 책장을 바라보았다.

뜨겁던 머리는 이제 이전에 비해 많이 가라앉은 것 같다. 진정된 마음으로 차분히 책장을 둘러보니 이전과는 달리 한번씩은 읽어보았던 익숙한 책의 제목들이 여럿 보이기 시작했다.

차를 마시며 잠시 시간을 보낼 용도이니 완전히 내용을 모르는 책보다는 가볍고 잘 알고 있는 책을 고르는 것이 낫겠지.

"<별의 호수>, <요정의 집>, <마법사와 목각인형>..."

시야에 닿은 책들의 제목들을 작게 중얼거린다.

모두 어린 아이들이나 읽을 법한 얇은 동화책들이었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책들을 책장에서 뽑을 수 있었다. 단시간 안에 읽을 수 있는데 동화만한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세 권의 책들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기도 했으니.

'동화? 당신 그런 취향이 있었어요?'

'동화가 뭐 어때서. 나름 주는 교훈도 있는데 말이야. 무엇보다 이야기의 끝이 항상 해피엔딩으로 끝나거든.'

'꼭 그런것 만은 아니던데...'

그런 내 말에 그가 꺼내든 것이 이 세 권의 책이었다.

나 역시 읽어본 적이 있었던 책들이었기에 그가 말하지 않아도 그 책들의 결말이 어떻게 나는지 알고 있었다.

'해피엔딩'이라...그때는 아무런 생각없이 흘려넘겼던 말이었지만 그가 나와 이 세상을 책을 읽으며 알게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책의 마지막을 읽지 못했다고 하였지만 이야기에는 언제나 끝이 존재하는 법이다.

그렇다면 그가 읽었던 그 책의 결말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나는 영원히 이것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 이름모를 이야기의 결말이 어땠는지는 이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내가 정해 놓은 이야기의 결말은 분명 해피엔딩이었으니.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찾았다.】

그러니 우선 이 거슬리는 그림자 부터 눈앞에서 치워야겠다.

***

"너 뭐야...? 동족? 아니 동족이라고 하기에는 느낌이 이상한데?"

마치 목에 칼이 겨눠지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날카로운 목소리.

단순히 겉모습만을 보았을 때 이제 막 일곱살이 된 알폰스와 동갑내기일 것 같은 어린 소녀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기세가 아니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로브의 안에서 보이는 용의 것을 닮은 황금빛 금안이 흉흉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이를 어찌 반응 해야할까?

시치미 뚝 떼고 뒤돌아 서기에는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가 않았다.

갑자기 온몸이 서늘한 것이 이게 말로만 듣던 드래곤 피어(dragon fear)인가? 무언가 전신을 압박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이와 비슷한 것은 이미 아버지께 지겹도록 겪었던 것이었기에 그리 어렵지 않게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내가 분명 처음 메로힘에 왔을때 용종을 보고 싶다고 말을 꺼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원종을 보고 싶다고 한 적은 없었는데.

여러가지 정황들이 눈앞의 소녀를 내가 알고 있는 그 드래곤이라고 알려주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내가 어찌 반응해야할지 혼란을 주는 이상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그녀는 향후 엘레나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존재가 되는 이였으니, 지금 내가 섵불리 접촉하는 것이 정말로 옳은 일인지 나로서는 판단할 수 없었다. 앞으로 적어도 5년은 후에 있어야 할 만남이 나로 인해 단축되어 버리면 그로인해 어떠한 결과가 나올지 나로서는 예측하기 힘들었다.

이미 나로 인해 완전히 꼬여버린 원작이다만 여태까지의 만남과는 달리 엘레나와 눈 앞의 소녀와의 만남은 이야기에 있어서도 큰 분기점에 해당했다.

앞으로도 그녀의 곁에 있으며 미래에 대한 걱정은 따로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나였지만 갑자기 이런 존재가 내 눈앞에 나타난 것에 대해서는 나로서도 쉽게 넘기기 어려운 일이였다.

솔직히 그 모든 것을 제외한다 하더라도 내 출신을 듣고 그녀가 어찌 반응할지가 문제였다.

세간에 용살(龍殺)에 대한 전설로 널리 알려진 크라우스였기에 드래곤인 그녀가 나의 출신을 듣고 의문을 해소하는 것과 이후 그녀가 나를 어찌 대할지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였으니 말이다.

혹시 또 모르지. 선조 중에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가 있어서 크라우스를 싫어할 수도 있는 법 아닌가.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어떤 말이든 간에 꺼내는 것이 좋아보였다.

설령 천년을 넘게 살아온 드래곤이라고 할지라도 목숨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까지 대마법사의 영지에서 날뛸 생각을 하지는 않을 테니.

나는 그녀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내었다.

"위대하신 존재를 뵙습니다. 저는 크라우스 백작가의 소가주직을 맡고 있는 데미안 크라우스라고 합니다."

생각에 잠긴듯 손가락으로 머리를 짚으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그녀는 내 소개를 듣자 눈을 번뜩이며 내 얼굴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마침내 무언가를 떠올렸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크라우스!! 그래서 그런 느낌이 들었던 거였어! 어쩐지 천년만이라 그런지 기억이 가물가물....흡!"

풀리지 않은 의문을 해소한듯 한껏 기분이 좋아진 그녀의 해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잠시 서둘러 자신의 입을 막고는 주변을 허둥지둥 둘러보기 시작했다. 큰 소리로 말하길래 방음결계라도 쳐 놓은 줄 알았더니 그건 또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소설 속에서 묘사했었던 그녀의 모습과 완전히 일치했기에 나로서는 조금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내가 만나왔던 원작의 인물들은 어딘가 내가 알고 있던 모습과는 달랐으니까.

다행이게도 그녀는 딱히 크라우스라는 이름을 신경쓰는 것 같아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의문점이 풀렸다는 것에만 의의를 두는 것 같았다.

그녀는 요리조리 주변을 살피고는 시선이 느껴지지 않자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손을 허공에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을 걸어왔다.

"휴...결계치는 걸 깜빡했었네. 그건 그렇고 자네는 용케도 내 정체를 알아차렸구나."

신기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

이걸 뭐라고 답해야 할까.

손이 닿자마자 '나 용이오.' 하면서 나를 향해 피어까지 내며 티를 내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가? 방금 전 까지만 하여도 나를 세상에서 도려낼것 같이 노려보던 눈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그녀의 눈은 매우 해맑아 보였다.

그렇게 그녀의 말에 어찌 답할까 생각하고 있을 때, 책장의 너머에서 방금전 드래곤 피어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졌다. 나를 향해 뭐라 재잘거리고 있던 그녀의 목소리 역시 정지 버튼을 누른 것 처럼 멈추었다.

그것은 마치 세상 그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말아야 할 '부조화' 그 자체였으며 여태껏 삶을 살아오면서 느꼈던 것 중 가장 불쾌함을 자극하는 느낌이었다.

그녀 역시 나와 같은 감각을 느낀 것인지 굳은 얼굴로 책장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감각을 느끼자마자 내게 생각이라는 것을 할 시간은 없었다. 이미 몸은 그 감각의 근원지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고 오러로 강화된 몸은 그대로 책장을 뚫어 버렸다.

미지의 위협 속에서 내 머리는 단 한 가지 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제발 그녀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를, 내가 느끼고 있는 이 불길함이 내 착각이기를.

하지만 그것은 그저 내 희망사항일 뿐, 현실이 그리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내 머리는 매우 잘 알고 있다.

마음속 한켠에 품고 있던 불안감은 곧 내게 현실로 다가왔다.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도착한 그곳에는 조용히 책을 둘러보고 있어야할 엘레나도, 그 불길한 기운을 내뿜고 있어야 할 무언가도 마치 그 존재 자체가 세상에서 지워지기라도 한것 마냥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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