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불청객 (2)
프란츠와 헤어진 이후 나는 겨울성의 주위를 힘없이 배회하고 있었다.
"무슨 사람이 그리 말이 많은 건지...."
리처드에 대한 이야기가 끝난 이후에도 나는 그에게 한참을 붙잡혀 있어야만 했다. 이전에 빌헬름에게 붙잡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후로 여태까지 내 마음속에서 말 많은 사람 1위는 빌헬름 이었지만 이제는 프란츠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물론 들을만한 것 역시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지냈던 아카데미 이야기라던지 말이다. 그 이외에는 전부 아버지의 행실로 인해 자신이 얼마나 고생했는지에 대한 푸념이었다만. 어째 아버지가 저지른 일에 대한 업보를 죄다 내가 대신 받아내고 있는 것 같았다.
학창 시절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은 상대 조차 되지 않을 정도다. 어찌나 말이 많던지 아침에 시작된 대화가 해가 질 무렵까지 이어졌으니 말이다.
진지하게 황혼이라는 이름이 노을이 질 때까지 말을 한다고 해서 붙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는 말이 많았다.
만약 그가 입이 아프다고 중간에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더라면, 그때 내가 자리를 뛰쳐나가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도 그 자리에 붙잡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엘레나아..."
정신이 지치니 내 입에서 튀어나온것은 엘레나의 이름이었다. 평소였다면 무심코 그녀의 이름이 나왔다는 것에 온갖 생각을 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기력 조차 없었다. 그냥 엘레나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리고 때마침 내 눈에 하얀빛이 들어왔다.
세상은 노을빛에 의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지만 그 세상에서 그녀 혼자만이 하얀 색체를 간직하고 있었다.
성을 향해 걸어오던 그녀 역시 나를 발견했는지 나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게는 그녀가 내 앞에 올 때까지 기다릴 만한 인내심이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곧장 그녀를 향해 달렸다.
"데미안 왜 그런 모습.....어..어.어어..."
"보고 싶었어요."
내가 왜 그때 그런 행동을 했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저 지쳐있었기에 자연스레 나온 것이라고 밖에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의 앞에 겨우서서 춤을 추는 주제에 내가 태연히 그녀를 안아 주는 것은 아직 까막득히나 먼 일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녀를 품에 안았던 나의 머릿속에 있었던 것이라고는 따뜻한 엘레나의 체온과 그녀의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들려왔다는 사실 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한참동안 엘레나를 품에 안으며 안정을 찾아갔다.
저 멀리서 아니꼽다는 요하임의 시선이 날아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후 제정신을 차린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차마 바라보지 못하며 방으로 돌아갔다.
이런 우리가 서로의 얼굴을 다시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은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난 후 외출을 위해 겨울성의 입구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였다.
"그, 그럼 갈까요?"
"네...."
애써 태연한 척 나에게 말을 거는 엘레나였지만 아직 방금전의 여운이 떠나가지 않았는지 그녀의 귀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리고는 성의 문을 밀어 열었다.
겨울성의 문이 열리며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뼛속까지 시리게 만드는 것이 메로힘의 북풍이건만 내 얼굴은 여전히 뜨겁기만 하였다.
***
"많이 춥네요."
나는 엘레나의 손을 잡은 채 그리 말하였다.
높게 떠 있던 태양이 저 멀리 산봉우리 사이로 사라지기 시작하니 확실히 이전과는 달리 기온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는 사실을 몸소 체감할 수 있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눈과 같이 하얗던 순백색의 도시는 새하얀 도화지가 검은 물감에 물드는 것과 같이 어둠속에 잠겼다.
그렇게 온 세상이 어둠에 잠겨 갈 때쯤 저 멀리에 있는 산과 같이 하늘 높이 솟은 백색의 탑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마치 어두운 밤바다의 어둠을 걷어내어 주는 등대와 같이 탑의 꼭대기는 환하게 빛이나고 있었다.
잠시후 탑에서 뿜어져 나온 빛무리는 탑을 중심으로 메로힘의 온 거리에 퍼지기 시작했다. 도시 전역으로 퍼진 빛무리는 제자리를 찾아가듯 곳곳에 들어선 가로등 속으로 들어갔다.
더이상 도시는 어둡지 않았다.
도시의 골목 사이사이에 들어선 가로등 덕인지 빛에 휘감겨진 도시는 해가 떠있던 낮의 거리보다 더 밝아진 느낌을 주는 것 같았다.
그 현실같지 않은 광경에 나는 넋을 잃은 채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마치 동화속 세상에 들어온 듯한 몽환적인 아름다움에 나는 하늘에서 흩어지는 빛무리를 눈으로 쫓았다.
이는 감성의 문제랄까.
과학기술이 극도로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살아왔음에 이보다 더 현실같지 않고 화려한 것들을 목도한 바 있었으나 단순히 화려하기만 한 그림이 명화가 아니듯 지금 내 눈에 비춰지는 풍경 만큼이나 내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다.
엘레나는 그런 넋이 나간 내 모습을 보며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아름답죠? 한달에 한번 여명의 탑에서는 작업과정 중에 쌓이는 잔여 마력을 이렇게 바깥으로 방출하는 것으로 처리를 해요."
"그럼 모든 탑들이 저런 방식으로 잔여 마력을 처리하는 것입니까?"
이런 광경을 봐버리니 그동안 마음속에 있지도 않던 황혼의 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였다. 하지만 엘레나는 안타깝다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아마 아닐거에요. 제가 알기로는 이런 방식으로 잔여 마력을 처리하는 곳은 여명의 탑밖에 없다고 들었어요. 대부분의 마탑들이 이렇게 공개적으로 마력을 처리 하지는 않거든요."
"아..."
그럼 황혼의 탑 굳이 갈 필요 없겠네.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이미 하늘에서 사라진 빛을 찾아 위를 바라보고 있자, 그녀는 나를 잡고 있던 손을 잡아 끌더니 터져나간 별빛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는 거리로 나를 이끌었다.
약간 심통이 난것 같은 그녀의 얼굴은 마치 자신이 아닌 하늘에 시선을 두지 말라고 내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뜻대로 거리와 함께 반짝이는 보석같은 자색의 눈동자와 마주하니 더 이상 내게 밤하늘을 밝히던 불빛을 향한 미련은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따라 빛이 들어오는 거리로 발을 들였다.
"날씨가 추운데도 거리에 사람들이 많이 나와있네요."
나야 오러를 다룰 줄 아는 이였으니 그렇다 쳐도 오늘 밤이 야시장이 열리는 날이어서 그런지 거리에는 상당히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밖에 나와있었다.
거리에 간이로 세워진 노점들과 신기하다는 얼굴로 그것들 사이사이를 들락날락하는 아이들의 모습도, 도 그런 아이들을 서둘러 챙기는 부모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 외에도 여러 오락거리들로 인해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끊이지 않고 있었다. 단순히 소리의 크기로만 따져본다면 연회장에서의 말소리는 이들에 비할바 되지 못했지만 나는 지금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이 소리가 시끄럽다고 느끼지 못했다.
엘레나는 나의 말에 당연하다는 얼굴로 싱긋 웃으며 답했다.
"메로힘에서 지내는 사람들에게 있어 이정도 날씨는 평범한 거랍니다. 게다가 방금 전 처럼 잔여 마력을 처리하는 날과 야시장의 개장일이 겹치는 날은 흔치 않거든요. 그 때문에 사람이 많은 것일 수도 있겠네요."
아, 그냥 다들 이 날씨에 익숙한 거구나.
태연하게 말하는 엘레나의 모습에 그제야 그녀가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 이런 메로힘의 모습은 일상과도 같은 것일텐데 그녀와 지냈던 사르함에서의 기억들 때문인지 당연하다고 느꼈어야 할 엘레나의 말들에 나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천천히 엘레나를 따라 거리를 걸었다.
한 블럭을 넘길 때 마다 우리의 손에 들리는 것은 하나 둘 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야시장이라는 이름 답게 여러가지의 먹거리를 팔고 있었는데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는 것 중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것은 빙의 이전의 세상에서 팔던 싸구려 닭꼬치의 맛을 그대로 재현한 무슨 긴 이름을 가진 고기 꼬치였다.
식감도 식감이지만 놀랍게도 여기에 발라져 있는 소스마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맛을 내었기에 혹시 나 이외의 빙의자가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후 엘레나에게 들어보니 그냥 메로힘에서 오래전 부턴 유행했던 음식이라 카더라.
엘레나는 단것을 좋아하는 그녀의 입맛에 맞게 달달한 것 위주로 손에 쥐고 있었다. 그 중에는 과일을 설탕물에 얼린 빙당호로를 닮은 것도 있었는데 그것이 그녀가 내게 건내는 것 중 유일하게 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장난으로 내밀었던 것 뿐인데 내가 아무렇지 않게 한입 베어물자 생각도 못했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무슨 내가 못 먹을 것을 먹은 것 마냥 곧바로 어쩔 줄 몰라하며 내게 말했다.
"저, 그 데미안. 방금 꺼는 장난이었어요. 일부러 먹지 않아도 되는데...."
"저도 과일은 먹는답니다. 너무 달지만 않으면요. 이건 새콤한게 먹을 만 하네요."
남들은 내가 단것을 아예 먹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만 나도 맘만 먹는다면 먹을 수 있다. 그리 즐기지 않을 뿐이지.
물론 방금전 먹은 빙당호로는 내 기준으로도 너무 달았다만. 내가 그것을 먹은 이유는 단순히 그녀가 내게 건낸 것이었기 때문이 아닌 이전에 먹었던 기억이 있었기에 그 추억을 살려보고자 입에 넣은 것에 가까웠다.
기억 속의 맛과는 조금 달랐지만 그래도 충분히 과거의 향수를 느낄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달긴 달다.
엘레나는 자신이 건낸 빙당호로를 내가 먹었다는 것에 기뻐하는 것 같았지만 내가 그녀가 건네준 빙당호로를 다 먹은 뒤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는 하나 남은 것을 쳐다보자 그녀는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데, 데미안 하나 더 드실래요?"
"...괜찮습니다. 나중에 돌아가는 길에 몇개 더 사가도록 하죠."
엘레나는 내가 괜찮다고 하자 그제야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하나 남은 빙당호로를 입에 조심히 물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이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건가.
만약 내가 빙당호로를 달라고 했다면 그녀는 틀림 없이 주었을 테지만 그 입맛에 맞지도 않는 것을 물며 떠올릴 추억이 그녀의 미소만큼 값진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지금 이렇게 그녀가 행복해하는 얼굴을 보는 것이 더 값어치가 있는 일이었다.
나는 조용히 그녀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다 그녀가 좋아할만한 새로운 단것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
밤에 잠겼던 도시를 다시 밝혀 주었던 빛마저도 들지 않은 어두운 골목.
한창 야시장으로 북적이는 메로힘에서 일부러 이런 곳에 있는 이들이 정상적인 사람일리는 없었지만 전신을 휘감은 검은 로브로 자신들의 모습을 감추고 있는 이들은 특히나 수상쩍어 보였다.
밤의 어둠보다 더 새까맣게 칠해진 로브의 안에 숨겨진 목걸이는 그들의 소속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 문양은 현재 대륙에서 주신(主神)이라 추앙받고 있는 빛의 신 알테어의 상징인 태양을 가린 마치 일식을 연상케 하고 있었다.
이는 그들이 대륙에서 떠 받들고 있는 주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현 대륙에서 '이교도'라고 불리우는 이들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였다.
만인의 적으로 여겨지는 그들은 그 존재를 숨기기는 커녕 옷과 갑옷에 문양을 집어 넣어 평소 자신들의 소속을 숨김 없이 드러내는 족속들이었지만 이번만은 예외라는 듯 작은 목걸이 하나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버리지 못하는 마지막 신앙심과도 같았으나 그들의 행적을 알고 있는 이들의 눈에 비치는 그 모습은 신실한 교도의 모습이 아닌 미치광이 광신도와 같았다.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인영에서 인간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정말로 이곳에 있는 것이 확실한가?】
【대주교님께서 계시를 들으셨다고 하셨으니 확실하다. 그 증거로 신물(神物)이 이리 반응하고 있지 않은가.】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손에 들려있는 검은빛의 보석.
그 보석은 형태만큼은 아름다웠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불쾌함을 느끼게 만드는 불길한 기운을 끊임없이 내뿜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그런 사특한 기운을 마치 따스한 태양빛을 찾은 것 마냥 환희에 가득찬 얼굴로 맞이하였다.
그 보석을 꺼낸 그림자는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 같이 흔들렸다.
【대주교께서 발탁되시는 날에도 신물이 이리 빛나지는 않았다. 분명 이곳 메로힘에는 그분의 사도가, 아니 어쩌면 우리들의 주께서 강림하신게 틀림없다.】
어둠속에 숨어있는 이는 며칠전 미쳐버린 광인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때려부수던 대주교의 모습이 떠올렸다.
그녀는 울음을 토해내며 자신들의 신이 사라졌다는 등의 불경한 소리를 연신 중얼거렸다. 그녀가 대주교의 자리에 있는 이만 아니었다면 당장에라도 때려죽여도 할말이 없는 발언이었지만 그 자리에 있는 이들 역시 모두 그와 같은 생각을 하였기에 아무도 그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대주교는 곧바로 환희에 가득찬 얼굴을 지으며 땅에 머리를 박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오랫동안 성궤에서 꺼내지 않고 있었던 성물을 꺼내들며 그들에게 자신들의 오랜 염원이 이루어졌다고 선포했다.
평범한 이들이었다면 절대로 따라갈 수 없는 사고의 흐름이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신에 미쳐있었고 그들의 눈에 비치는 성물의 짙은 어둠이 대주교의 말을 이해하게 만들었다.
대주교의 말대로 메로힘에 들어서고 나서 성물은 그 어느때보다 짙은 어둠을 흩뿌리고 있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녀의 말이 옳다는 것은 증명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단 한 가지 그들의 머리 속에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강림과 함께 멸망의 초석으로서 무너져 내렸어야 할 메로힘이 건재하다는 것이었지만 그러한 의문은 그들의 광적인 신앙심 앞에서 묻혀버리고 말았다.
어둠 속에 숨은 이들은 자신들의 신을 맞이한다는 기쁨에 젖어 웃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