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뜻밖의 손님들 (8)
뻘쭘하다.
만약 평범한 이가 황혼의 탑주라고 하는 마법계에서 일곱명만이 존재하는 거물과 단둘이 독대를 하게 된다면 아마 그가 지니고 있는 사회적 지위가 아닌, 자연스럽게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에 위축되고 말 것이다.
인간의 이지를 뛰어넘은 초인들은 범인들에게 있어 존재만으로도 피할 수 없는 재해와 같은 이들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이것은 내게는 통용되지 않는 말이었다.
우선 나 또한 다른 이들이 보기에 프란츠와 같은 초인의 반열에 오른 이였기에 그가 내뿜는 위압에 영향을 받을 일은 없었다. 그가 내게 노골적으로 살의를 보내왔다면 모를까, 지금처럼 재밌다는 듯 웃으며 나를 보고 있는 이에게 내가 두려움을 느낄 껀덕지는 없다는 소리다.
하지만 나는 그의 얼굴에 드리운 그 옅은 미소가 노골적인 살의를 내비치는 것보다 더 꺼림찍하게만 느껴졌다.
이 또한 나의 업보에서 나오게된 일이라는 것이 참으로 한탄스럽다.
잠시 이 일의 시발점을 떠올려 보자. 그래, 어젯밤에 있던 연회. 그 연회가 문제였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발코니에서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반쯤 이성을 잃었었다. 그의 등장은 곧 리처드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기에, 부끄럽게도 이제 막 그녀의 곁에 서겠다고 맘을 먹었던 나는 원작 남주 후보의 등장에 겁을 먹어버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내가 우려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은채 마무리되기는 하였지만 나는 그 과정에서 한 가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리처드 하나만을 생각했던 나머지 처음 내게 말을 건 프란츠 에르투웬을 완전히 무시해버리고 만 것이다. 제아무리 내가 크라우스의 소가주라고 한들 그는 나의 아버지와 같은 시대를 살아간 인물이었고 제국의 공작이었다.
그가 건내온 대화를 정중히 거절했다면 모를까, 나는 그가 자신을 소개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아무말 없이 자리를 떠나버렸다.
명백히 이것은 그의 명예를 모욕했다고 느낄 수 있는 사안으로서 프란츠가 내게 결투를 신청한다면 할 말이 없는 행동이기는 하다.
물론 나도 그에 맞서 반박을 해보자면 애초에 프란츠는 연회에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었으며 그렇다면 내가 그를 상대할 의무 따위는 없다고 말 하는 것이 가능하다만 그가 지닌 권력과 힘을 생각하면 이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와의 결투를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야 그럴것이 내게 결투를 신청할 정도로 마음이 상한 사람이 자신을 모욕한 놈 앞에서 실실 웃고 있지는 않을 것 아닌가.
이로서 마음속에 있는 무거운 짐을 하나 덜어낼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온전히 가벼워 진 것은 아니었다. 나를 보며 웃고 있는 프란츠의 얼굴은 꼭 아버지께서 내게 짓궂은 장난을 치시기 전에 짓던 얼굴과 겹쳐보여 마음이 편해지기는 커녕 그가 어떤 말을 꺼낼지 불길하기만 하다.
내가 아무런 말도 없이 그를 쳐다보고만 있자, 프란츠는 주머니에서 작은 알사탕 하나를 꺼내더니 그대로 입에 넣고는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어이, 꼬맹아.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뭐, 어제는 나도 약간 잘못한게 있기도 하고 딱히 어제의 일로 책잡으려고 만나자고 한것도 아니니 걱정 하지말거라."
"....그럼 대체 왜 보자고 한 것입니까?"
"그냥 친구 아들내미 얼굴 한번 보자고 하는 거지. 무슨 별다른 이유라도 필요한가?"
그렇게 태연히 말하고는 입안에서 사탕을 굴리는 프란츠. 당사자가 저렇게 말하니 어젯밤의 일에 대한 걱정은 더이상 하지 않아도 되겠다만 그럼에도 프란츠가 부담스러운 것은 여전했다. 하지만 그런 나의 마음을 그가 알리가 없었기에 프란츠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내게 축하의 말을 건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말을 못했군. 하루 늦었지만 약혼 축하하네. 만약 약혼식을 할 생각이 있다면 이번에는 에르투웬에게도 초대장이 왔으면 좋겠군."
"하하. 친족들만 모여서 작게 할 생각인지라 안타깝게도 그건 안되겠군요. 대신 나중에 청첩장은 에르투웬에 반드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프란츠는 그렇게 답하는 내 말에 약간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내가 자신을 놀리기 위해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만. 하지만 이는 내가 일부러 그의 심기를 거스르기 위해 한 말이 아닌 이미 이전에 엘레나와 정해두었던 이야기였기에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이미 정해둔 걸 나보고 어쩌라고.
갑자기 약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 괜시리 어젯밤 화원에서 있었던 일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젯밤 연회장에서 나간 우리는 그녀가 만들어낸 화원으로 향했다.
이미 밤이 깊은지 오래였기에 우리에게 남아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관계를 이전보다 더 가깝게 만들어 주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곳에서 나는 그녀의 소망을 들었으며 그녀가 그리는 나와 그녀의 미래를 보았다.
그동안 나름대로 많이 대화를 하면서 서로를 알아가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날 화원에서 나누었던 그녀와의 대화만큼이나 의미가 있었던 이야기를 꼽아보라고 한다면 그리 많지는 않을 것 같다.
우리가 약혼에 대해서 본격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도 그때였다.
만약 프란츠가 나와 이틀만 더 일찍 만났어도 그가 약혼식에 참석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리 되지 못한 것을 보니 이것은 하늘의 뜻임이 틀림없다.
"또 나를 앞에 두고 딴생각을 하는 구만. 하여튼 이래서 크라우스란..."
"아하하...죄송합니다."
프란츠의 핀잔에 잠시 과거를 들여다 보고 있던 정신이 돌아왔다. 나도 모르게 그날의 기억 속에 빠져버렸던 모양이다. 행복했던 그곳에서의 시간은 매우 짧았으니, 그렇기에 여운이 더 크게 남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프란츠가 아니었다면 그때와 같은 시간을 보다 더 많이 보낼 수 있었을 텐데.
"뭔가? 그 눈빛은. 어쩐지 되게 기분이 나쁜데."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래도 나는 감정을 숨기는 것이 미숙한 편인가 보다. 그래도 나름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데 있어 자신이 있는 편이 었는데, 엘레나도 그렇고 요즘 들어 다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들여다 보는 것 같다.
프란츠는 눈썹을 몇번 씰룩거리며 움직이더니 이내 표정을 완전히 풀고는 헛기침을 하며 내게 말을 걸었다.
"흠흠, 그건 그렇고...자네도 알고 있지?"
"무엇을 말입니까?"
"그, 내 아들 리처드 말일세."
"아...."
그의 입에서 리처드의 이름이 언급되자 나는 이전과 같이 불안을 느끼기 보다는 오늘 아침에 만났던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이다 보니 프란츠는 이전부터 리처드가 엘레나에게 연심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나 보다. 어제 연회장에서 나와 리처드가 대화를 나누는 것을 프란츠 역시 보고 있었던 건지 리처드의 이야기를 내게 꺼내는 그의 모습은 아까와는 달리 매우 흐트러져 있었다.
"너무 리처드를 미워하지는 말아주게. 그 아이가 자네와 엘레나에게 우를 범하는 일은 없을게야. 이것은 내 에르투웬의 이름을 걸고 약속할 수 있어. 어제 그곳에 갔던 이유도 그저 그 아이의 마음의 정리를 위해서였다네. 별 다른 이유는 없었어."
프란츠는 마치 내가 그를 증오라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이 자리에 없는 리처드를 대신해 열심히 그를 변호했다. 확실히 어제 연회장에서 내가 리처드를 대했던 태도를 보면 그리 좋았다고 말 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내가 그에게 화를 낸 것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 리처드의 앞에 서 있던 나는 원작의 남주 후보와 엘레나가 만났다는 사실에 상당히 날이 선 상태였다. 그것을 프란츠가 느끼지 못했을리 없었으니 일부러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일테다.
만약 그가 오늘 아침 연무장에서 나와 리처드가 대화하는 것을 보았다면 이런 말을 꺼내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리처드 공자가 그럴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나는 프란츠의 말에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그런 내 모습에 프란츠는 내가 이리 나올 것을 예상치 못했는지 벙찐 표정을 하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야 프란츠의 입장에서 보자면 어젯밤만 해도 아들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놈이 하루 아침에 태도를 바꾸어 버린 꼴이었으니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이후 나는 그에게 오늘 아침 연무장에서 리처드와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내게 이야기를 들은 그는 그제야 이전과 같은 털털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가...이거 내가 괜한 말을 한것 같군."
당사자들간의 이야기가 이미 끝났는데 괜히 설레발을 친 꼴이 되었으니 부끄러울 만도 하였지만 프란츠는 오히려 편안하다는 듯 안도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보다 녀석은 어땠는가? 멀쩡했나? 아니지, 그럴리가 없지. 분명 머리는 산발에, 잠도 못자서 눈은 붉게 변해 있었을게 분명해. 그렇지 않나?"
"음, 분명 그러하기는 했습니다만."
"역시. 그 놈은 나를 닮았다니까. 뭐, 남자가 태어나서 한두번 정도는 실연을 당할 수도 있지. 그래도 기가 팍 죽어 늘어져 있지는 않아서 다행이네."
이 인간, 어째 이상한데서 부자간의 공통점을 찾는 것 같다.
나는 그런 프란츠의 모습을 보며 어째서 그가 아버지와 친구인지 조금이나마 이해가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