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스 판타지의 악당이 되었습니다-34화 (34/131)

< 34화 > 뜻밖의 손님들 (7)

눈을 뜨자 엘레나를 반겨주는 것은 죽어버린 세상이 아닌 침실의 천장이었다.

그제야 그 모든 것들이 꿈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젯밤 리처드를 만났던 것이 문제였을까. 자신의 앞에 놓여진 미래에 더는 그런 비극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무의식은 제멋대로 이전의 삶에서의 기억을 끄집어내었다.

악몽을 꾼 탓인지 속이 갑갑했다.

회귀를 한 이후 이전의 삶의 기억이 담긴 꿈을 꿀때마다 유독 그러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의 삶을 비춰주었던 꿈들은 야속하게도 자신이 행복했던 순간을 단 한번도 보여준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꿈은 언제나 슬픔과 후회가 가득했던 순간만을 내게 보여주었다.

이왕 꿈꾸는거 행복한 꿈을 꾸면 좋을 것을 대체 왜 그런 장면만을 보여주는 건지. 그래도 거기에 장점 아닌 장점이 있었다면 지금 내게 주어진 이 시간을 절대 그와 같이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게 만들어 준다는 점이었을까.

엘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에 놓여진 종이를 들여다 보았다.

그곳에는 어젯밤 그와 화원에서 만들어낸, 자신이 이전부터 생각해온 그와 함께하고 싶었던 일들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뒤늦게 그의 앞에서 이를 적어나갔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부끄럼이 몰려온다. 물론 그에게도 보이지 않고 싶은 자신의 욕망은 여전히 마음 속 깊은 곳에서만 간직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소망을, 특히 그가 보는 앞에서 적는 일은 어째선지 얼굴을 뜨겁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렇게 붉어진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조심스레 그가 적었던 종이의 뒷면을 들춰보았다.

그가 자신이 적는 것을 지켜보았듯 엘레나 역시 그의 옆에서 그가 종이에 자신의 소망을 적는 것을 지켜보았기에 그 뒷편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꼭 그의 비밀을 몰래 들여다보는 것 같아 이상하게 가슴이 떨려왔다.

"헤헤..."

그가 적은 소망의 수는 엘레나가 적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양이 적었지만 거기에 적혀있는 그의 소소한 소망들은 엘레나에게 미소를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어젯밤 화원에서 그와 함께 소망들을 적어 넣었던 기억들을 떠올리자 더 이상 과거에 대한 상념 같은 것은 엘레나의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페이지에 불과하다.

계속해서 과거에 연연한다면 굳이 회귀를 함으로서 시간을 되돌린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 좋은 것만을 생각하자. 운명을 지워낸 자신의 미래는 여기에 적혀있는 것과 같이 그와 함께 채워나갈 일만이 남았으니 말이다.

"오늘도 기대되네."

창 밖에서는 오늘의 태양이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엘레나는 손에 들린 종이를 고이 접어 서랍장에 넣었다.

그러고는 오늘도 어제와 같이 그와 함께 지낼 나날들을 머리속에 그리며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

연무장에서 생각보다 꽤 오랜시간을 보내었지만 다행히도 내가 조찬에 늦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조찬장에 들어선 나는 상석에 앉아있는 요하임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이곳에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정해진 자리인 엘레나의 옆의 앉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데미안."

"좋은 아침입니다."

자리에 다가가자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웃으며 인사를 건내었다. 이렇게 아침마다 그녀의 인사를 받는 것은 그녀와 지내면서 내게 새로히 생겨난 활력소였다. 나 역시 작게 그녀에게 답하고는 미소로 받아주었다.

나는 자리에 앉기전 잠시 조찬장을 한번 훑어보았다.

지금 이 자리에는 나와 엘레나 그리고 요하임 이렇게 세명 밖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어제 연회에서 황혼의 탑주를 만났던 만큼 혹시 조찬장에 그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회와는 달리 지금 이 자리는 오로지 가족만을 위한 자리였기에, 아무리 사이가 돈독하다고 하여도 갑자기 끼어들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만약이라는 것이 있었으니 말이다.

역시 괜한 걱정이었는지 이곳에 있는 우리 이외의 다른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그 사실에 안도하며 식기를 들었다.

황혼의 탑주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만 어제와 같은 난입은 사양하고 싶었다.

오늘 조찬에 올라온 메뉴는 매우 단출하였다.

따뜻하게 데워진 고기 스튜와 간단한 입가심을 위한 푹신한 빵이 전부였다.

누군가 이런 메뉴를 보고 혹시 에델바이스가 가난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는데, 제국에 셋 밖에 없는 공작가가 돈이 없을리 있나. 메뉴의 선정이 이러한 것은 어제의 열렸던 연회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식욕이 없는 아침에는 이 정도가 적당했다.

나는 스푼을 들어 스튜를 한스푼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러자 따뜻한 스프의 향이 입안을 서서히 채우기 시작했다. 식욕이 없으니 이런 식으로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아직 잠에서 덜깬 미각을 깨우는게 좋다.

'맛은 좋은데...뭔가 좀 부족하네.'

에델바이스의 식사를 책임지는 주방장의 실력은 가히 일류라고 칭해도 손색이 없는 실력자임이 분명했다. 지금 내가 맛보고 있는 고기스튜도 그렇고 겨울성에서 지내는 동안 이곳의 식사가 맛없다고 생각한 적은 없으니 말이다.

그래도 역시 집밥이 최고랄까.

아무래도 지난 5년간 나는 우리집 주방장의 손맛에 길들여졌나 보다. 크라우스에서 먹었던 것과 같은 음식을 먹게 되면 자꾸만 속에서 사르함에 있을 우리 주방장의 편을 들어주게 된다. 그러다 보면 또 영주성에 있을 가족들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젠장. 이거 향수병 초기 증세 아닌가?

무슨 수련회에서 엄마 보고 싶다고 우는 꼬맹이도 아니고.

아무튼 이건 우리집 주방장이 고기스튜를 너무 기깔나게 잘 만들어서 그런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갑자기 영주성이 떠오르는게 말이 되는가. 나는 스튜가 뜨거운지 호호 불면서 떠먹고 있는 엘레나를 보며 머리에 떠오른 생각을 지워나갔다.

그렇게 식사가 어느정도 진행되고 있는 와중 갑자기 요하임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래서 어젯밤의 연회는 괜찮았는가?"

"음, 솔직히 말해서 저는 그런 자리는 별로 몸에 맞지않는 것 같더군요. 그냥 좀 갑갑했습니다."

"그리 말하는 것을 보니 그래도 아직은 어린 녀석이 맞구먼. 원래 연회라는 게 그런 자리지. 다들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서로를 물어뜯기 위해서 안달이 난 승냥이들의 모임일세. 하지만 크라우스라고 한다면 그런 승냥이들에게 겁먹어서는 안될테지만."

그런점에서 어제의 자네는 합격이었네.라고 요하임은 문득 내게 칭찬을 건내었다. 나는 그런 요하임의 말에 고맙다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갑작스러운 칭찬에 무언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꼭 무언가를 부탁하기전의 뇌물을 건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내가 이 위화감의 정체를 알게 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뭐, 이제 연회도 끝났으니 마음 편히 메로힘을 구경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런 의미에서 자네, 내가 경치가 좋은 곳을 알고 있는데 한번 가볼텐가?"

본론은 이거였구만.

어쩐지 갑자기 칭찬을 하시더라니. 나를 어딘가에 끌고 가시려고 밑밥을 던지고 계시던 거였다.

정확히는 나와 엘레나를 같이 데리러 나가고 싶으신 것이겠지만. 사실 요하임이 이러한 말을 꺼내었던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기에 나는 연회가 끝난 다음날인 오늘 이 말이 나올것이라 예상은 하고 있었다.

아버지 성격상 우리 가족과 엘레나가 다같이 나들이를 나갔다는 사실을 숨겼을리 없으니 말이다. 팔불출 아버지인 요하임이 그걸 그냥 넘어갈리 없었다. 아마, 자신도 딸과 같이 나들이를 나가고 싶으신 것 같은데....이를 어쩌지.

"저, 오늘은 선약이 있는지라."

"선약은 무슨? 자네가 이곳에 머문지 얼마나 되었다고 약속을 잡을 만큼의 친분이 생겼다는게 말이 되는가?"

나의 말에 요하임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수상쩍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우선 선약이 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오늘 하루는 엘레나와 보내기로 약속했으니 말이다. 아마,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이곳 메로힘에 있는 동안 나에게 결정권은 없다. 그녀가 나에게 알려주었던 것들을 이루어주기 위해서 나는 그녀의 뜻에 따를 것이었고 그러니 요하임과 같이 나들이를 가는 것 또한 내가 아닌 엘레나가 결정해야 할 일이었다.

나는 난처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엘레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런 내게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버지. 죄송하지만 데미안은 오늘 저와 먼저 약속을 잡았습니다."

"어허..? 그러냐? 혹시 어디를 가는 것이라면 이 아비에게 말해주지 않겠니."

"야시장이요. 오늘 밤이 매주에 한번 야시장이 열리는 날이잖아요. 데미안은 여태까지 겨울성을 나가본적이 없으니 그에게 이 메로힘의 모습을 소개 시켜주기에 이것보다 나은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럼! 아주 잘 생각했다!! 메로힘의 명물 하면 야시장이지. 남부에서는 보기 힘든 것들이 이것저것 많이 모여있을테니 아주 좋은 경험이 되겠어."

엘레나가 말끝을 흐리니 요하임은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그가 아무리 딸과 나들이를 나가고 싶어하는 마음이 강해도 그것이 딸이 원하는 바를 물릴 정도는 되지 못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눈가에 드리운 아쉬움은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그야 딸이 자신이 아닌 약혼자를 선택했으니 아버지로서 섭섭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엘레나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웃으며 요하임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칭찬 감사합니다. 아버지. 아, 그러고 보니 제가 이번에 마탑의 서고에서 성위마법 '별의 빛'에 대한 책을 찾아 읽어보았는데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혹시 아버지께서 시간이 되신다면 식사가 끝나고 난 후 해석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

"그걸 말이라고! 당연히 되고 말고!!"

엘레나의 말에 잔뜩 흥분한 요하임. 엘레나는 그 몰래 나를 돌아보며 한 쪽 눈을 찡긋 감았다. 그에 나는 엘레나가 요하임에게 한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태까지 그녀가 내 앞에서 마법의 대한 이야기를 꺼내었던 적은 없었지만 그녀가 마법에 대해서 어느정도의 소양을 지니고 있는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방금 전 엘레나가 요하임에게 한 말은 그저 아버지와 같이 시간을 지내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여태껏 모든 것을 혼자 스스로 깨우쳐 온 엘레나였기에 요하임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 그녀를 가르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엘레나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따지고 보면 요하임이 우리와 나들이를 나가고 싶어 하는 마음은 딸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마음에서 기인 한 것이었으니 지금 엘레나가 건낸 말 만큼 요하임을 만족 시킬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었다.

"죄송해요. 데미안. 야시장이 열리기 전까지 겨울성의 다른 모습들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아닙니다. 기사에게 있어서도 깨달음은 중요한 문제이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저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군요."

원래는 엘레나가 어젯밤, 마저 둘러보지 못한 겨울성의 남은 부분을 보여주겠다 약속했건만, 어쩔 수 없지. 아침에 하던 단련이나 이어서 해야겠다.

하지만 그리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 요하임은 정말 뜻밖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아, 그러고 보니 데미안. 내 너에게 전해주어야 할 이야기가 한가지 있었구나."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너도 어제 만났으니 알고 있겠지만 황혼. 그 녀석이 너를 만나고 싶다고 하더구나."

아니, 갑자기 그 아저씨 이야기가 왜 나오는 겁니까?

그보다 방금전 까지 자신과 나들이를 나가자고 한 인물이 누구였지?

나는 그런 의문을 품고 요하임을 바라보았지만 요하임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시치미를 때고는 엘레나를 향해 따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뭐지, 더 이상 이용 가치가 없다는 건가.

아무튼 그렇게 우리들의 아침은 빠르게 마무리 되었다.

식사가 끝나자 마자 요하임은 서둘러 엘레나를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또 만나는 구나. 꼬맹아."

"아, 네. 그, 안녕하세요..."

나를 내가 씹었던 대마법사의 앞에 던져둔채 말이다.

아무래도 나는 좆된거 같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