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 [외전] 리처드
불그스름한 빛이 하늘을 뒤덮었다.
마치 해질녘의 황혼과도 같이 변해버린 하늘의 모습은 바라보는 이에게 있어 여러 뜻 깊은 감상을 전해 줄 만큼 충분히 아름다웠다. 다만 데미안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그저 단순히 아름답다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아직 해가 지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네명의 대마법사들이 만들어낸 '희망의 빛'은 세상을 어둠속에 가두어버린 외신의 힘으로 부터 벗어나게 해주었고 국소적이지만 이전의 세상의 시간을 되찾아 주었다. 그런 '희망의 빛'의 비호를 받고 있는 이곳에서 지금 붉게 변해버린 저 하늘은 명백한 이상현상이었다.
"네 짓이냐. 리처드."
데미안은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그에게 리처드라고 불린 저 변해버린 하늘과도 같은 황혼(黃昏)의 색을 담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는 데미안의 말에 순순히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말도 하지 않은채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리처드의 모습에 데미안이 어째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설명을 묻는 일은 없었다.
리처드가 고개를 끄덕이는 그 순간부터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던 데미안의 손에는 한자루의 검이 쥐어져있었다.
리처드 아르투웬.
현재 단 네명 밖에 없는 대마법사로서 초월의 경지에 이른 그는 다른 대마법사들과 함께 '희망의 빛'을 만들어 내었다. 하지만 이 '희망의 빛'이라는 것은 현재 세상을 뒤덮은 외신의 힘을 걷어내는 대결계이지 밤과 낮을 마음대로 바꾸는 것이 아니었다.
리처드가 뭐라 말하지 않아도 데미안은 이미 알고 있었다.
결계를 벗어날 때마다 느껴지는 세상을 뒤덮은 외신의 신성 특유의 불쾌함이 그 어느때 보다 짙게 느껴져왔으니 말이다. 리처드 또한 데미안이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별 다른 변명 없이 수긍한 것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검을 들고 있으면서도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 전선을 달려왔던 믿음직한 전우가 적의 주구로 전락해버렸다는 사실은 데미안의 가슴을 찢어놓기에 충분했다.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인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그에 대한 의문들이 목구멍 앞까지 튀어나왔지만 애써 다시 삼켜내고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죽이며 검병(劍柄)을 쥐었다. 과거 그가 어떠한 업적을 이루어냈고 어떤 위치에 올라서있었던 간에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리처드 에르투웬이라는 남자는 인류의 배신자였고 적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데미안은 자신의 감정을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버릴 수 있었다.
콰직-
데미안이 마음을 다잡음과 동시에 그와 리처드의 사이에 놓여진 공간에서 살덩이가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 날아온 것인지 모를 창은 정확히 데미안의 목을 노리고 있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꿰뚫었다.
창에 찔리자 더는 몸을 숨기지 못하게 된것인지 기괴한 형태의 칼날을 팔에 박은채 데미안을 노리고 있던 이형의 존재의 모습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창에서 터져나오는 검은 섬광에 휩쓸려 그것은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못한채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제야 여태껏 침묵을 고수하고 있던 리처드의 입이 열렸다.
"하하하. 아쉽네. 역시 이 정도로는 안 흔들리나봐."
리처드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에서 감정을 찾을 수 는 없었다. 데미안 역시 무감정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으나 리처드는 그런 데미안의 모습에서도 그가 미처 숨기지 못한 감정을 찾아냈는지 작게 조소하며 말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는 마. 내가 너랑 정면 승부를 할 수 는 없잖아."
"이런 잔재주는 통하지 않는다는 걸 너도 잘 알고 있을 거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얌전히 목을 내놓으면 고통은 느끼지 않도록 해주마."
덤덤하게 답하는 데미안의 말에 리처드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그건 안되지. 나는 너를 반드시 죽이고 싶은 걸."
그가 자리에서 발걸음을 때자 붉게 물든 하늘이 그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했다. 붉은 하늘 아래에 놓여진 이곳은 그의 영역이었기에 영역 안의 공간은 리처드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다. 리처드가 손을 아래로 내리자 하늘이 내려 앉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붉은 하늘은 시시각각 데미안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고 그의 주변은 높아진 압력을 견디지 못해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땅이 꺼지고 산이 무너지기 시작했지만 데미안은 그 모든 것이 부서지고 있는 세상 속에서 홀로 온전한 형태를 유지한채 똑바로 서서 리처드를 마주하고 있었다.
"고작 이런 걸 보여줄려고 그런 꼴이 되어버린거냐."
데미안은 자신을 향해 내려오는 하늘을 향해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고는 베었다.
자신을 향해 내려오는 붉은 하늘을. 무너지는 세상을 베어냈다.
리처드가 극에 다다른 마법으로 세상을 무너뜨렸다면 그는 무극(武極)에 다다른 무리로 세상을 베어넘겼다. 마치 깨져버린 거울처럼 붉게 물들었던 황혼의 색을 담은 하늘이 부서진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곳 저곳에 흩뿌려진 하늘의 파편은 곧 문이 되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들을 이곳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쨍그랑!!
데미안은 곧장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검을 던져 파편들을 부쉈다.
허나 사방으로 흩어진 파편들을 처리하는 것은 검 한자루 만으로는 부족했다. 결국 데미안은 모든 문을 부수지 못했고 문을 타고 넘어온 존재들은 그를 보자마자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포식자처럼 달려들었다.
그러자 데미안을 중심으로 그의 주변에서 오러로 이루어진 폭풍이 휘몰아쳤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 것들은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그 몸이 풍선처럼 터져나갔다. 그럼에도 여전히 데미안을 향해 다가오는 이계의 존재들은 많았다. 그것을 확인한 데미안은 남아있는 파편들을 부수는 것을 포기하고 그 원인인 리처드를 향해 뛰어올랐다.
반지에 오러를 흘려보내자 그곳에 박혀있는 드래곤 하트는 자신의 육신으로 빚어진 무구들을 꺼내었다. 오래전 죽은 사룡의 육신은 여러 형태의 무구들로 가공되었고 그 종류는 단순히 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룡의 머리뼈를 가공해서 만들어진 거대한 도끼가 그의 손에 들린다.
데미안은 그대로 공간을 찢을 듯 힘껏 힘을 담아 리처드를 향해 용두도끼를 내려찍었다.
텁-
하지만 도끼가 리처드를 쪼개어 버리는 일은 없었다. 어느순간 부터 생긴것인지 데미안의 등 뒤에 소환된 거대한 거인이 그가 리처드를 해치지 못하게 도끼를 붙잡고 있었다.
"아무리 너라고 해도 끊임없이 나오는 마물들을 홀로 상대할 수 는 없어."
코 앞에서 들려오는 리처드의 목소리가 데미안의 신경을 긁어댔지만 거기에 심력을 소모할 여유따위는 없었다. 데미안은 곧바로 도끼를 손에서 놓고는 처음에 꺼내었던 창을 다시 손으로 불러들인 뒤 거인의 머리를 향해 던졌다.
창은 검은 섬광을 터트리며 거인의 머리를 꿰뚫었다. 다시 도끼를 손에 쥔 데미안은 리처드를 찾았지만 이미 자신의 주변에는 그를 향해 다가가지 못하도록 수많은 소환수들이 소환된 상태였다. 마치 벌레떼를 연상시킬 정도의 마물들의 무리가 데미안을 덮쳐왔다.
이전처럼 오러의 폭풍을 불러일으키는 것만으로 치워내기에는 그 수가 너무나도 많았다. 손에 들린 무구를 휘두르며 그 수를 줄여보아도 사방에서 개미떼 처럼 끊임 없이 몰려오는 마물들은 죽여도 죽여도 그 수가 줄지를 않았다.
그렇게 온전히 마물들의 무리로만 만들어진 파도는 데미안을 그대로 휩쓸어 버렸다.
제아무리 초월자라고 한들 한계는 있는 법이었다.
만인지적(萬人之敵)이 가능한 이라면 그보다 더 많은 양으로 찍어누르면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 이곳에 소환된 모든 마물들은 외신의 힘을 받아 더욱 강화된 것들이었기에 이를 혼자서 상대한다는 것은 그가 아무리 초월자 중에서도 신인(神人)이라 불리우는 이라 할지라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마물들에게 파묻힌 데미안의 모습을 보자 리처드는 미친듯이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처음에 웃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목표를 달성했다는 것의 성취감과 더불어 일말의 그 어떤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외신의 신성에 오염되어 버린 그에게 남아있는 것은 처음 마음이 무너져 내렸을 때 부터 지니고 있던 지워지지 않는 미련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리처드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정신이 나가버릴 것만 같았으니 말이다.
"뭘 그렇게 처 웃고 있는 거냐."
자신의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오는 그 목소리는 끊이지 않는 리처드의 웃음을 곧바로 멈추게 만들었다. 리처드는 고개를 돌려 자신이 만들어낸 그의 무덤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눈에 비춰지는 광경에 두눈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는 절대 보이지 말아야 할 빛이 마물들의 틈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윽고 마물들의 산이 무너지며 금빛의 광휘를 휘감고 있는 그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처음과 변함 없는 모습으로 리처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
"지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엘레나는 시시각각으로 색이 바뀌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희망의 빛'이 있는 이곳에서 외신의 잔향이 느껴지는 것일까.
네명의 대마법사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대마법 결계 '희망의 빛'은 여태까지 단 한번도 외부의 침입을 허용했던 적이 없었다. 외신의 맹렬한 공세 때문에 수세에 몰린 지금, 여태까지 인류가 존속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이 '희망의 빛'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외신의 진체(眞體)라도 강림하지 않는 이상 무너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그 결계의 안에서 느껴지는 힘은 틀림없는 외신의 신성이었다.
갑작스러운 이변에 엘레나는 서둘러 결계의 술식을 열어 확인해 보았지만 메로힘 전역을 보호하고 있는 '희망의 빛'은 여전히 건재했고 술식이 손상된 흔적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엘레나는 순간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전신에서 느껴지는 이 잊을 수 없는 불쾌함은 지금 엘레나가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별과 같이 빛나는 엘레나의 지성은 그녀를 혼란에 휩쓸리게 내버려두지 않았고, 매우 빠른 속도로 상황을 정리해 나갔다.
침입이다.
어떻게 결계를 뚫고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결계 안에 적이 들어왔다는 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하필이면 자신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다행인 점이 있다면 지금 이곳에 있는 남아있었던 이가 그였다는 사실일까. 이전과 달리 외신에 의해 그에 대항할 초월자들이 많이 줄었음에도 이렇게 전쟁을 계속해서 유지 하고, 승리를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것에는 그의 존재가 매우 컸다.
다행이게도 일이 무사히 끝난 것인지 엘레나가 이변의 발생지로 생각되는 곳으로 이동하는 사이 하늘은 원래의 색을 되찾았으며 자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외신의 신성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갑작스래 발생한 이변인 만큼 아무리 그라고 하더라도 상처를 입었을 가능성이 컸다.
아니나다를까 그녀가 예상한대로 이변의 발생지로 보이는 곳은 정상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부숴져있었으며 파괴의 흔적 만이 잔뜩 남아있었다.
"데미안!!"
그럼에도 멀쩡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엘레나는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는 서둘러 그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앞에 쓰러져 있는 남자를 보기 전까지는.
검에 심장이 관통되어 쓰러져 있는 남자는 엘레나에게 너무나도 익숙하고 친근한 얼굴이었다. 이전의 삶에서도 그들과 끝까지 함께 싸웠던 전우였으며 자신의 가장 오래된 친구였으니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데, 데미안 이게 무슨...아하!! 이거 장난이죠? 그, 그런거죠? 리처드도 그만 장난치고 어서 일어나지 못해요? 저 충분히 놀랐거든요! 어서 일어나세요!!!"
그런 엘레나의 말에 데미안도 누워있는 리처드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리처드의 몸을 흔들고 있는 엘레나도 그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 역시 차갑게 식은 리처드의 몸에서 외신의 잔향을 느꼈기에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끝까지 리처드의 옷을 놓지 못했다.
지금 눈 앞의 상황이 차마 현실이라는 것이 믿기지가 않아 애써 등을 돌려 외면하고 있을 뿐이었다.
악몽이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끔찍한 악몽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