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 뜻밖의 손님들 (6)
"좋은 아침입니다...."
어색하게 인사를 건내오는 리처드에게 나는 이렇게 답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단순히 리처드에게 악감정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물론 내가 앞으로 1년간 리처드를 만날 일이 없다는 것에 좋아한 것은 맞다만 그것은 순전히 그가 <공녀는 사랑받는다.>의 주연이었기에 경계하는 것 뿐이지 내가 어제 처음 만난 리처드를 혐오할 이유는 없었다.
원작을 읽은 독자로서 소설 속 등장인물 리처드 아르투웬을 객관적으로 평가해보자면 그는 단순한 선역이 아닌 친분을 나누어도 괜찮다고 생각할 정도로 성격에 모난 곳이 없는 녀석이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호구랄까.
리처드는 친분이 있는 이의 부탁은 어지간해서 대부분 들어준다. 이것은 단순히 주인공인 엘레나에게만 적용되는 것만이 아닌 말 그대로 리처드 아르투웬과 '친구'라고 부를 정도의 인물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때문에 리처드가 지인에게 빌려주었던 마도구가 어느 이상현상의 원인이 되어 엘레나가 그것을 해결하는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였다.
일이 끝난 이후 나중에 마탑 관계자에게 설명을 들어보면 그 마도구는 황혼의 탑에서도 엄격히 관리되고 있었던 아티팩트였는데 리처드가 탑주의 권한으로 아무런 절차 없이 양도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것만 보면 사건사고를 일으키는 소위 발암 캐릭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엘레나에게 필요한 마도구 또한 한없이 빌려주거나 여러 부탁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들어주기에 양날의 칼 같은 친구라고 할 수 있겠다.
리처드가 엘레나에게 연심을 품고 있기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앞의 사건을 생각해 보면 그에게 호구 기질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거다.
그렇기에 리처드는 이전에 내가 엘레나와의 파혼을 생각했을 때 그나마 아카데미에서 교분을 나누어도 될것이라 판단한 인물 중 한명이었다.
뭐, 결국 엘레나와 약혼을 해버렸으니 이제는 단순히 경계할 대상 중 한명에 불과 하다만.
어제와는 달리 리처드의 얼굴을 보았다는 것 만으로 살심이 끓어오르지는 않았다. 지금 여기에 엘레나가 없다는 점이 크기는 하겠지만 아침의 단련으로 인해 내 머리 속은 청명했으며 확고한 이성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은 리처드와 대화를 해도 다른 사람들을 대하듯 평범하게 대화가 가능하다는 뜻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방금전의 인사를 끝으로 서로에게 말을 걸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리처드의 상태는 실연의 아픔 때문인지 처음보았을 때와는 달리 그리 좋아보이지 않았다.
어제의 보았던 말끔했던 모습은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 해질 정도로 머리카락은 삐죽삐죽 떡이져 있었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것인지 눈가에는 검은 그림자가 내걸려 있었으며 안구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 내려앉은 이 어색함은 단순히 리처드의 처량한 행색 때문에 생긴것이 아니었다.
내가 처음 리처드를 발견했을 때 그의 모습은 마치 광인(狂人)과도 같았다.
신나는 음율의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모를 기이한 얼굴을 한채 달리는 그의 모습은 적어도 정신이 온전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 모습이 남들에게 어찌 보였을지 리처드 본인도 알고 있었기에 저리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말을 걸기에는 눈 앞의 녀석이 수치심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릴까 함부로 말을 걸지를 못하겠다.
만일 어제였다면 리처드가 그러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감정이 아닌 이성이기에 그런건지 리처드의 저 모습을 내가 저렇게 만들었다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이상의 동정심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지금 리처드의 모습이 내가 이전에 그렸던 그녀를 떠나 보낸 이후의 내 모습과 겹쳐 보여 매정하게 대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차라리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무시하고 그냥 지나쳤다면 모를까 괜히 내게 말을 걸어서는.
덕분에 원치 않는 눈치싸움이나 하고 있고 말이야.
다행이게도 리처드는 내가 흘린 땀방울들이 모두 말라버리기 전에 입을 열었다. 어렵게 입을 땐 리처드는 내 앞에 놓여진 가검을 보고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말했다.
"그, 아침부터 대단하시군요. 평소에도 그렇게 단련을 하시는 모양입니다."
"집안이 그렇다 보니. 그러고 보면 공자께서도 마탑에서 나오시는 길 아니셨습니까. 공자야 말로 학구열이 대단하시군요. 제가 알기로는 탑마다 담당하는 분야가 서로 다르다고 하던데 말입니다."
"하하. 그저 겉핥기에 불과할 뿐이지요."
방금전의 일을 언급할거라 생각했던 내가 아무렇지 않게 받아주는 모습에 리처드의 얼굴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말문이 트이자 리처드는 더 이상 내가 불편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이걸 붙임성이 좋다고 해야하나.
그래도 자신이 좋아하던 이의 약혼자인데 생각보다 리처드는 나를 대하는데 있어 거리낌이 없는 것 같아 보였다. 마음을 완전히 정리한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려는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뭐, 의도가 어찌되었든 확실히 이전보다 대하기 편해진 것은 내 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서로간의 어색함이 완전히 사라질 무렵 우리는 대화를 끝내야만 했다. 저 멀리서 켄이 나를 아침에 있을 조찬에 데리러 가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흐른 모양이다. 땀까지 흘렸으니 지금 서두르지 않는다면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리처드는 나를 향해 다가오는 켄의 모습을 보자 미안하다며 사과를 건내었다.
"이런, 제가 공자님을 너무 붙잡고 있던 것 같군요."
"아닙니다. 제게 있어서도 좋은 시간이 었습니다."
원작의 남주 후보가 아니라 차기 황혼의 탑의 주인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생각하면 값진 시간이 맞았다.
나는 리처드에게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는 켄이 있는 곳을 향해 발을 돌렸다. 우리는 그렇게 별다른 말 없이 헤어졌다.
옷을 갈아 입기 위해 방으로 걸어가는 동안 나는 리처드와의 대화를 곱씹어 보았다.
그와의 대화는 크라우스와 에르투웬이라는 서로의 가문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만난지 별로 되지도 않은 그와 내가 가지고 있는 공통된 화제라고 해보았자 엘레나에 대한 이야기 말고 다른게 있겠는가. 하지만 그는 나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정확히는 의도적으로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확실히 약혼자 앞에서 꺼내기에 적합한 주제는 아니지.
리처드가 엘레나에 대해 미련을 온전히 버렸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 짧은 시간에 오랫동안 품고 있던 연심을 버릴 수 있었다면 과연 그가 그녀를 사랑했었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는 것에는 조금 아쉬움이 남았다.
리처드에게는 미안한 이야기다만 어쩌면 나는 리처드와 대화를 하면서도 그가 엘레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를 바랬던 걸지도 모르겠다.
분명 이전이라면 거기에 대해서 질투를 느꼈을 테고 그것이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듣기 싫어했겠지만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걸까.
나는 어젯밤 화원에서 그녀가 내게 해주었던 말을 떠올리며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
***
"데미안 크라우스."
리처드는 자신의 눈 앞에서 사라지는 남자의 이름을 작게 읊조렸다.
크라우스의 이름은 리처드도 어릴 적 부터 많이 들어왔기에 잘 알고 있었다.
대륙에 잘 알려진 영웅담의 주인공 중 한명이니 아마 제국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대부분은 알고 있을 것이다.
사룡(邪龍)을 무찌르는 영웅의 전설은 여러 어린 소년의 맘에 불을 지폈다. 리처드는 천성이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기에 영웅담 속 영웅 처럼 기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영웅담은 어릴 적 많이 읽었던 이야기책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제 크라우스라는 이름은 리처드에게 있어 그저 영웅담 속 영웅에게 붙어있는 이름이 아니었다.
처음 데미안과 눈이 마주쳤을때 리처드는 당장이라도 자신의 머리에 매직 미사일을 쏘고 싶다는 마음이 한가득이었다.
저 바깥으로 뛰쳐나갔던 이성은 데미안의 얼굴을 보자마자 제 집을 찾아왔고 이지를 되찾자 머리를 터트릴 정도의 수치심이 속에서 솟구치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이런 모습을 그녀의 약혼자에게 보이다니, 다른 이들에게 보였어도 결코 좋지 않은 모습을 가장 보여주기 싫은 이에게 보이고 만 것이었다. 만약 그의 입에서 방금전의 행동에 대한 말이 나온다면 그때는 정말로 리처드의 정신은 그래로 무너지고 말 것이었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뜨고 싶은 리처드였지만 이미 그에게 인사를 건내고 난 후였다. 이대로 자리를 피한다면 저 남자가 자신을 속으로 어떻게 생각할지 그리고 방금전 자신의 행동이 엘레나에게 흘러들어가는 일은 죽어도 싫었다.
하지만 다행이게도 데미안은 굳이 리처드의 기행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고 자신의 말을 부드럽게 받아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리처드는 데미안의 머리 위에 뜨고 있는 태양이 성인(聖人)을 뜻하는 후광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나쁜 사람인 것 같지는 않았어."
아직 리처드의 나이가 어리기는 하다만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기에 통찰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는 절대 그가 자신의 치부를 들추지 않아서가 아니다.
데미안과의 대화는 길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짧지도 않았다.
분명 만난지 하루도 되지 않은 사람임에도 마치 그는 자신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처럼 느껴졌다. 어제 연회장에서 만났을 때와 풍기는 분위기도 달랐지만 그와 대화하는 것은 왠지 모르게 편안함을 주는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의 집사를 따라 자리를 떠나자 리처드는 문득 자신의 팔뚝을 바라보았다.
"키는 나보다 조금, 아니 좀 많이 컸나? 팔은....으음..."
리처드는 자신의 팔뚝과 기억 속 데미안의 팔뚝을 비교해 보았다. 리처드의 몸이 빈약한 것은 아니다. 높은 위계에 오를 수록 마나는 마법사의 육체를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 준다.
특히 5위계라는 경지에 오른 리처드의 몸은 오랫동안 훈련한 건장한 남성의 몸과 견주어도 꿀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역시 제국에서 손꼽히는 무가의 후계자랄까, 데미안과 비교해 본다면 어딘가 부족한 점이 많아 보이는 몸이었다.
하기야 항상 서고에서 책을 읽는 리처드와 오늘 처럼 단련을 계속하는 데미안의 몸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것이기는 하다만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리처드는 자신의 마음에 드리운 짙은 패배감을 지울 수 없었다.
"나도 마법말고 검을 선택할걸 그랬나."
리처드는 그리 자조하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나.
그녀가 자신이 아닌 데미안을 선택한 것이 그리 단순한 이유일리 없지 않은가.
무언가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을테지, 자신에게서는 느끼지 못한 무언가를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질투.
질투야 난다만 어쩔 수 없지. 아직은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탓이다.
그래도 데미안과 대화를 나눈것이 어떤 작용이 된 것인지, 리처드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새벽 내내 의미 없이 책을 읽었던 것 보다는 확실히 마음이 편해진 것 같았다.
마음이 완전히 놓이니 리처드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잠도 자지 않고 밤을 새며 책을 읽었던 녀석이 갑자기 미친놈 처럼 뛰기 까지 했으니 몸에 무리가 온 것이었다. 계속해서 감겨오는 눈꺼풀을 버틸만한 힘은 더이상 그에게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리처드는 미약하게나마 붙잡고 있던 의식의 끈을 놓아버렸다.
질투도, 미련도 모두 수마에 잠겨 묻히고 만다.
눈을 감은 리처드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