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뜻밖의 손님들 (5)
겨울성에 위치한 한 연무장.
아직 동이 트기에 이른 시간이었지만 나는 아무도 없는 연무장에서 조용히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에델바이스 가문이 대륙 굴지의 마법 명문가라고는 하지만 그들의 전력이 오로지 마법사에만 치중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에델바이스라고 하면 전원이 4위계 이상으로 구성된 마법병단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그리 잘 알려지지는 않았어도 에델바이스 내부에서도 오러를 사용하는 순수 기사들로만 구성된 기사단이 존재했다.
마법병단과 비교하기에 상대적으로 부족해 보이는 것은 맞지만 제국에 셋 밖에 없는 공작가 답게 일반적인 귀족가의 기사단 보다는 뛰어난 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 공자님! 오늘도 가장 먼저 나오셨군요!! 저도 하버트 녀석의 잠꼬대만 아니었다면 좀 더 일찍 일어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공자님. 그리고 저 자식 말은 그냥 흘려들어도 괜찮습니다. 누가 할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쯧."
지금 내가 있는 연무장을 향해 달려오는 저 두명만 하더라도 동년배의 다른 기사들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수준 높은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겨울성에 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내가 왜 그런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또 저들과는 왜 친분이 있는지를 묻는다면 그것은 내가 겨울성에 도착한 이후에도 백작가에서 했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단련을 계속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곳에 도착한 당일.
요하임은 나를 불러다가 성의 주요인사들을 소개시켜 주었는데 그 중에는 에델바이스의 기사단장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빌헬름 하트먼.
오러 나이트의 경지에 도달해 있던 노기사는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얼굴에 흉터가 한가득했는데, 그 우락부락한 근육질 몸에서 자연스래 뿜어져 나오는 정순한 투기는 그가 어떤 경지에 올라서있는지를 간접적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그는 요하임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기도 전부터 나를 보며 눈에서 불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나는 요하임의 소개가 끝나자 마자 빌헬름에게 한참을 붙잡혀 있어야만 했다. 아버지를 전쟁터에서 만나본 적이 있었던 그는 내게 아버지와 많이 닮았다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나에게 있어서 정말로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설마 아버지와 기사들에게 수백번은 들었던 무용담을 다른 사람에게 듣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아버지를 향한 찬사를 듣는 것에 기분이 나쁠리가 있나. 단지 빌헬름이 내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내가 어릴 적 부터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자주 들었던 이야기였기에 조금 지루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요하임은 그런 빌헬름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은지 얼굴을 찌뿌리고 있었지만 차마 그에게 그만 하라고 말을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아들에게 아버지에 대한 칭찬을 하고 있는데 그걸 그만두게 막는것은 좋게 보이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나는 그런거 상관없이 요하임이 평소 아버지에게 대하는 것처럼 그만 빌헬름의 입을 막아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무튼, 첫만남이 어찌되었든 간에 나는 빌헬름 덕에 손쉽게 에델바이스의 기사단과 연무장을 소개 받을 수 있었다. 이것이 내가 기사단의 실력을 알 수 있었던 이유다.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는 기사들은 빌헬름에게 내 이름을 듣자마자 다들 내게 선망의 눈빛을 보내왔는데 그 때문에 나는 다시금 크라우스라는 이름이 기사들에게 있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 수 있었다.
아마 겨울성에서 나와 엘레나의 약혼을 가장 기뻐할 인물들을 뽑는다면 빌헬름과 에델바이스의 기사단일게 분명하다. 실제로 그들은 빌헬름에게 내가 엘레나와 약혼한다는 사실을 듣자마자 모두 환호성을 보내며 기뻐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딱히 그들의 기대치에 맞춰 주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런 시선이야 말로 내가 남부에서 살아온면서 가장 많이 겪었던 것이었기에, 그들의 시선에 부담감을 느끼기에는 내가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무엇보다 내가 지금 여기서 무언가를 더 하려고 하지 않아도 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에 서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이런 여유가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평소 백작가에서 행동하던대로 몸을 움직였고 이후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빌헬름의 주도 하에 그들과 간단한 대련을 몇번 하는 것으로 하루도 지나지 않아 그들 사이로 녹아드는데 성공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두 기사. 하버트와 길리어드는 그때 나와의 대련에서 패한 이들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보다 어린 소년에게 패한 것이 분하지는 않을까 싶었는데 내가 새벽에 일어나 훈련을 하는 것을 보고는 어느 순간부터 나와 훈련을 같이 하기 시작했다.
"공자님. 공자님은 사르함에 언제 돌아가실 생각이십니까?"
"글쎄. 깊이 생각해 본적은 없지만 아마 일주일은 넘기지 않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떠나시기 전날 저와 대련 한번만 더 해주시는 걸로 하죠."
"야, 아서라. 무슨 고작 5일 훈련하고 대련이냐? 결과가 안봐도 뻔하구만. 공자님 저는 이 녀석 다음으로 부탁드립니다."
분하지 않기는 개뿔. 역시 그들도 기사였고 무인이었기에 승패에 연연하는 것은 똑같았다.
어느세 깜깜하던 하늘에 해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햇빛에 비춰진 그들은 자신들이 흘린 땀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고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메로힘의 차가운 바람에 땀은 순식간에 식어버렸지만 초인(超人)이라 불리우는 오러로 담금질 된 기사의 몸은 이 정도 날씨에 추위를 떨 정도로 나약하지 않았다.
어느정도 단련이 끝나가자 하버트는 소매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내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연회는 어떠셨습니까? 쩝, 저도 맘 같아서는 참가하고 싶었지만 외성 경비 쪽으로 차출 되는 바람에 말이죠."
"딱히 이렇다 할만한 건 없었는데 말이지."
하버트의 말에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대답을 하고는 손에 쥐고 있던 가검을 제자리에 돌려 놓기 위해 자리를 떳다.
연회.
하버트는 그 자리에 가지 못했던게 아쉬운 모양이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그저 사람들이 모여있는 조금 시끄러운 자리일 뿐이었다. 어젯밤 연회에서 그나마 괜찮은 점이 있었다면 엘레나의 드레스 차림을 볼 수 있었다 정도겠지.
곰곰히 생각해보면 여러 일이 많기는 했다.
갑자기 등 뒤에서 황혼의 탑주가 튀어나오지를 않나. 거기에 더불어 1년 후에나 볼거라 생각했던 남주 후보까지 만나게 되었고 말이다. 그저 이름만 나눈 짧은 만남에 불과했지만 원작의 주연을 만난다는 것만으로도 내게 강렬한 인상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그래도 연회는 끝났으니 당분간은 만날 일도 없겠지."
1년후 아카데미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필연이지만 그 이전 까지 리처드의 얼굴을 볼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황혼의 탑에 갈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엘레나는 메로힘을 떠나면 사르함에서 지내게 될테니 리처드가 마탑도 없는 사르함에 올 일은 없었다.
어젯밤 연회에서 순순히 물러나는 것만을 보고 그가 엘레나를 향한 마음을 단념했다고 판단하기에는 아직은 너무 이르다. 그렇기에 나는 당분간이지만 엘레나와 리처드가 만날 수 있는 접점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었다.
아무튼 불안 요소는 남겨두면 안된다.
걱정이 덜어지니 절로 몸이 가벼워진것 같다. 나는 검을 수납대 넣고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역시 아침에 운동을 하는 것은 사람의 심신을 건강히 만들어 준다.
사르함의 아침과 비교하자면 조금 춥기는 해도 상쾌한 아침공기가 폐부를 찔러온다. 얼음을 가슴에 들이붇는 듯한 이 느낌. 어쨌든 정신을 차리게 만들어 주었으니 됐다.
"이제 돌아가 볼....."
"....."
이제 그만 방으로 돌아가려고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나는 어떤 한 사람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를 보자마자 나는 놀라움과 당혹감에 그 자리에서 굳을 수 밖에 없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상대도 나를 보자마자 발걸음을 멈추고는 멍하니 서서 나를 처다보기 시작했다. 잠을 자지 못한건지 눈가에 어둠이 드리운 그는 멋쩍은 얼굴로 내게 조심스레 인사를 걸어왔다.
"아, 안녕하세요."
리처드 에르투웬.
그는 아직 겨울성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
연회장을 떠난 리처드는 조용히 성의 뒷편에 위치한 백색의 탑을 향해 걷고 있었다.
갑작스래 자신의 귀에 들려온 엘레나의 약혼 소식. 리처드는 그 소식을 듣자 머리를 망치로 세게 얻어 맞은것 같았다.
아버지께서 억지로 데려갔던 그 자리에서 리처드는 엘레나를 만났고 한 눈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단순히 그 비인간적인 미모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과 유일하게 말이 통하던 박학다식한 그녀의 지성은 멈춰있던 리처드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이후 아버지들간의 친분을 이용해 리처드는 엘레나를 만나러 자주 겨울성에 놀러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뚝뚝하기만 하던 그녀도 계속해서 말을 걸자 어느 정도 답을 해주기 시작했다. 대화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문답이었지만 어찌됬든 리처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아버지들간의 친분. 프란츠와 요하임의 사이가 좋다는 것은 알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였다. 리처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리처드는 자신과 엘레나와의 약혼 이야기가 오가기를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될거라 의심치 않았다.
엘레나의 약혼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쩐지 며칠 전 부터 아버지께서 자신을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시더니 그 이유가 이 때문이었나.
하지만 리처드는 단순히 엘레나가 약혼했다는 사실 만으로는 마음을 포기 할 수가 없었다.
귀족들간의 정략혼이야 흔한것이니 엘레나 또한 그런 경우라고 생각했고 그리 믿었다.
고작 정략혼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긴다는 것을 리처드는 참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의 주먹진 손에는 보이지 않는 희망이라는 끈이 잡혀져 있는 것 같았다.
"다행이다..."
탑으로 향하는 리처드의 손에는 아무것도 쥐어져 있지 않았다.
연회장에서 자신의 약혼자와 함께 서 있는 엘레나의 웃고 있는 모습은 리처드의 마음을 부숴버리기에 충분했다. 그 옆에 서 있는 남자 또한 그녀를 향한 애정이 눈빛에 묻어나올 정도였으니 자신이 생각했던 모든 가정이 틀려버린 것이다.
입에 문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유독 오늘 따라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침이 쓰게만 느껴졌다.
자신이 그 자리에 설 수 없다는 것이 슬프면서도 또 그녀가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행복한 것이 머리를 어지럽게 한다.
어두운 밤인데도 불구하고 탑 안은 여전히 밝았다. 끊임없이 지식을 갈구하는 학자들에게 있어 밤과 낮은 구분이 없는 법이었다.
리처드는 여명이 아닌 황혼의 탑에 소속된 마법사였지만 기초적인 마법서라면 소속에 관계없이 열람이 가능했기에 탑은 순순히 리처드를 안으로 들여 보내주었다. 하지만 5위계에 오른 마법사에게 말 그대로 기초에 불과한 마법서가 도움이 될까?
그 사실을 리처드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뭐든 좋았다. 리처드는 배움을 위함이 아닌 망각을 위해 책들을 꺼내 들었고 책을 빼곡히 채운 글자들로 자신의 머리를 덮어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시간이 지났을까. 리처드가 열람이 가능한 서적들을 모두 읽자 탑의 난 창을 타고 들어온 아침의 햇빛이 리처드를 반기고 있었다.
머리는 더 이상 어지럽지 않았다.
따스한 아침 햇살을 받으니 오히려 시라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평생 시 같은건 쳐다본적이 없던 리처드 였지만 아무튼 마음은 그러했다.
리처드는 자신이 지금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는 하고 있었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리처드는 탑을 나왔다. 오늘따라 유독 햇빛이 밝아 보이는 것이 자신의 미래를 축복해주는 것 같아보였다.
그래, 잊는거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거야.
아직 자신의 인생은 많이 남아있지 않았는가. 고작 열여섯에 이런 고민을 계속 붙잡고 있는 것 만큼 인생을 낭비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뇌다 보니 조금씩 몸에 힘이 돌아오는 것 같아 그 고양감에 리처드는 자신을 주체하지 못했고 곧장 겨울성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차가운 바람이 폐를 찔러오지만 어찌되든 좋았다. 리처드는 달리고 싶었다.
아침 햇살로 반짝이는 백색의 성은 어찌나 어여쁜지 주변의 풍경을 눈에 담으며 리처드는 달렸다.
"엑.."
하지만 그렇게 계속될 것 같던 리처드의 뜀박질은 얼마가지 않아 멈추고 말았다.
풍경에 녹아들어 있었지만 자신의 기억 속에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는 그 사람의 모습이 비춰지자 리처드는 방금까지 자신의 몸을 맹렬히 돌리고 있던 활력을 모두 잃어버린 것 만 같았다.
그가 자신을 보고 있었고 자신 또한 그를 바라보았다.
"아, 안녕하세요."
리처드는 쪽이 팔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