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뜻밖의 손님들 (4)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연회장에서 조금 떨어진 테라스.
성 밖의 풍경을 바라 볼 수 있는 탁 트인 테라스는 사람들의 소리로 가득 차 있는 연회장과는 다른 세상에 놓여져 있는 것 처럼 조용했다.
연회장의 천장 위에 놓인 샹들리에 대신 이곳을 밝혀 주는 것은 달과 별들이었지만 그 작은 불빛들은 성 밖의 펼쳐진 전경을 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곳에 홀로 서서 저 멀리 높이 솟은 펠리오로스 산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는 품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내더니 뚜껑을 열더니 그대로 그 안에 들어있는 정체불명의 액체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그것은 순식간에 남자의 몸을 뜨겁게 데워 주었다. 제 아무리 메로힘의 바람이 차다고 한들 그를 얼리기에는 한 없이 부족하다만 그가 이 지독하게도 도수가 높은 술을 마신 이유는 그저 몸을 데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너도 한 모금 마실테냐?"
그는 어느새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소년에게 병을 건내며 말을 걸었다.
어두운 밤에도 소년의 주홍빛 머리카락은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소년은 그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고는 그의 옆에 서서 멍하니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남자는 소년의 행동에 짧게 혀를 차고는 병에 남아있는 술을 마저 들이키기 시작했다.
"리처드. 원래 이럴때는 이렇게 술이라도 마셔야 편해질 수 있는 거다."
"...아버지가 그걸 어찌 아십니까?"
소년의 물음에 남자는 답하지 않았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병을 입에 물고 있을 뿐이었다.
소년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작게 웃고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서서 별을 바라보다 아무말 없이 테라스를 떠났다.
"불쌍한 녀석 같으니라고..."
에르투웬이 어떤 가문인가.
대륙의 지배자라고 할 수 있는 제국에 단 셋 밖에 없는 공작가다. 그 제국이라는 틀을 벗어던진다 하더라도 마법계의 기둥인 황혼의 이름을 지니고 있는 명문 중의 명문. 그런 에르투웬이 얻지 못할 것은 이 세상에 몇개 되지 않는다.
하지만 리처드는 그런 가문의 후계자로 태어났음에도 딱히 가문에 원하는 것이 없는 아이였다. 굳이 따져본다면 여느 마법사들이 그렇듯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기 위한 기반 정도였지 리처드가 프란츠에게 도움을 구했던 적은 한손에 꼽을 정도로 매우 드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나이에 제 힘만으로 마법사들의 벽이라고 불리는 5위계에 도달한 아이다. 아버지로서, 스승으로서 어찌 기특하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을까.
그런 녀석이 처음으로 품었던 연심이다.
여태 마법 말고는 다른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녀석이 처음으로 다른 것에도 눈길을 주었던 것이다. 비록 만남을 가질때 마다 대화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짧은 문답들 뿐이었지만 그럼에도 시시각각 바뀌는 아들의 표정을 보는 것 만큼 즐거웠던게 없었다.
프란츠의 마음을 사로잡은 엘레나 그 아이 또한 리처드와 비견될 재능을 가진 천재적인 마법사였고 그렇기에 프란츠도 내심 엘레나를 며느리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만큼 엘레나의 약혼 소식은 프란츠에게도, 리처드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가지지 못할 것이 없는 것 같은 에르투웬이라 하더라도 건들 수 없는 것은 있는 법이다.
일반적인 귀족가의 여식이라고 했다면 프란츠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리처드와 이어주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엘레나는 평범한 귀족가의 여식이 아닌 에델바이스였고 그녀와 약혼한 데미안 또한 널리고 널린 흔한 백작가의 소가주가 아닌 크라우스의 소가주였다.
왕이 되고자 한다면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에르투웬이라고 할지라도 에델바이스와 크라우스를 건드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다.
무엇보다 어찌저찌 하여 엘레나 그 아이를 얻는다 한들 리처드가 그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걸 프란츠는 잘 알고 있었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들이 실연의 아픔을 견딜 수 있기를 바라며 지금 상황에 대해서 투덜거리는 것 정도 밖에 없었다.
"아쉽기는 하다만 인연이 아닌 것을 어쩌겠는가....근데, 그걸 아서 그 자식이 채갔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짜증 나네."
"채가기는 무얼 채갔다는 거냐."
"왔냐..?"
아무생각 없이 내뱉은 혼잣말에 답이 올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프란츠의 떨떠름한 표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프란츠의 혼잣말에 답했던 이는 당연하게도 그가 이곳에 왔음을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던 요하임이었다.
프란츠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짜증도 분노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가 자신이 초대하지 않았음에도 연회장에 발을 들인것은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둘의 사이가 그 정도도 용납되지 않을 정도로 빡빡한 사이는 아니였으니 말이다.
며칠전 크라우스의 성에 갑자기 난입하고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마차를 텔레포트 하며 사라진 요하임이었기에 더더욱 그를 책할 마음 따위는 없었다.
"감히 내 성에서 멋대로 결계까지 치다니, 네가 간이 부었구나. 프란츠."
"아들과 좀 조용히 대화를 하고 싶었거든. 뭐, 몇마디 못 나누기는 했지만. 누굴 닮아서 그렇게 과묵한건지."
"적어도 너는 아니겠지."
요하임의 대답에 프란츠는 조용히 웃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요하임에게 술을 건내려고 하였지만 누가 다 마셔버린건지, 어느세 손에 들려 있는 병에 담겨 있던 술은 전부 비워져 있었다. 하지만 술은 그의 손에만 들려 있던 것이 아니었다.
"의외로 생각보다 순순히 물러나더군. 다행이야, 혹시라도 너를 닮아 연회장에서 난동을 부리면 어쩔까 싶어는데 말이지."
"나쁜 새끼. 그걸 지금 내 앞에서 말해야겠냐."
"뭐 어떤가. 당사자는 지금 여기에 없는데."
"내가 있잖아. 미친놈아."
프란츠는 요하임의 말에 얼굴을 잔뜩 찌뿌리고는 손에 들린 잔에 담긴 과일주를 냉큼 입에 털어냈다. 과일주의 단맛이 입안에 퍼지자 그의 얼굴도 풀어지기 시작했다. 다만 그는 여전히 서글픈 눈을 한채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레나가 리처드와 이어졌다면 좋았을텐데."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딸아이에게 어떤 선택도 강요한 적이 없네."
"알아. 나도 알고 있다고. 그냥 인연이 아니었던 게지.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네. 나도 귀엽고 참한 며느리가 가지고 싶었다고. 젠장. 아서 그 자식은 복도 많아가지고."
일곱 탑주들 중에서도 친분이 깊었던 둘이었기에 리처드와 엘레나가 만난 것은 한번이 아니었다.
둘은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친분을 쌓았고 그렇기에 프란츠가 그러한 기대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엘레나는 리처드가 아닌 단순히 아버지들간의 장난으로 시작되었던 데미안과의 약혼을 선택했다.
당사자의 선택이 그러한 것을 어찌하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프란츠는 절로 오늘 이 자리에서 만난 소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의 오랜친구의 모습을 정말이지 똑 닮은 그 소년의 모습을 말이다. 데미안과의 만남을 떠올리자 프란츠의 손에 들려있던 잔에 미세한 파문이 일렁거렸다.
"확실히....호부 밑에 견자는 없다고 하더니 그 녀석도 보통은 아니었어."
"그야 당연하지. 누구 딸이 반한 남자인데."
"야, 너 솔직히 말해봐. 네가 엘레나에게 뭐라고 했지.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한데?"
데미안 크라우스.
자신의 아들을 제치고 엘레나와 약혼한 소년과의 만남은 프란츠에게 있어서도 잊지 못할 느낌을 주었다.
그 소년은 단순히 기억 속의 친구와 닮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간담이 서늘해지는 눈빛과 피부를 저릿하게 만드는 살기(殺氣)까지, 고작 열여섯 밖에 되지 않은 소년은 전쟁터에서나 보았던 친구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만약 그때 소년이 검을 꺼내는 것을 막지 않았으면 그 이후의 일이 어찌되었을지 머릿속에 쉬이 그려지지 않았다. 아니, 알고 있음에도 대마법사라고 불리우는 경지에 오른 프란츠의 자존심이 그 이후를 떠올리는 것을 허락치 않았다.
프란츠는 무심코 자신의 목을 매만지며 애써 그 가능성을 부정했다.
'단순히 착각이겠지...'
아무리 그래도 고작 열여섯이다.
기사로서 꽤나 높은 성취에 이른 것 같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소드 마스터도 아닌 어린 소년에게 8위계에 오른 대마법사가 목숨에 위협을 받다니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인가. 그저 그 인간 같지도 않은 녀석과 매우 닮은 기세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알맞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프란츠의 자존심을 긁어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여튼 이건 전부 아서 그 자식 때문이야."
"너는 뭐든 그 녀석 탓으로 돌리는 것 좀 고쳐야겠다. 대체 몇년 동안 그러고 있는 거냐."
"시끄러...이게 다 그 놈의 업보지. 하여튼 아서 그 놈은 내 인생의 도움이 된 적이 없었어. 친구 잘 만나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거였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카데미 시절 아서와 항상 붙어먹으며 가장 재밌게 놀았던 놈이 프란츠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요하임은 짜게 식은 눈으로 프란츠를 바라보았다.
술이 계속 들어가서 그런가.
그 말을 시작으로 아카데미에 다닐때 부터 시작된 아서와의 악연을 늘어 놓는 프란츠의 모습에 요하임은 언제나 그랬듯 취기를 날려주는 해독 마법을 써주는 대신에 계속해서 비어지는 프란츠의 술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다음날 숙취로 고생할 프란츠가 뭐라 할것이 눈에 선하지만 그러면 뭐 어쩌겠는가. 녀석의 말대로 친구를 잘못 만난 놈의 잘못이지.
***
이번 연회가 나를 주인공으로 열린 것이기는 하였지만 막상 내가 연회장에 있던 시간은 별로 되지 않았다. 당초 목적은 나와 엘레나의 약혼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기에 내가 그 시끄러운 공간에 계속해서 있을 이유는 없었다.
가만히 연회장에 남아 있었다가는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괜히 피곤한 일만 만들어 낼 뿐이다.
크라우스의 가주 대리라는 자리가 함부로 말을 걸 수 있는 위치는 아니다만 내 외견이 어린것도 있고 하여 꼭 말을 붙이려는 이들이 한명 씩은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내가 연회장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던 이유는 혹시라도 엘레나가 연회를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원작 소설 속 그녀는 연회에 대해서 별다른 감정이 없는 것으로 나왔지만 글이 아닌 내 옆에 서있는 엘레나는 오늘 따라 평소보다 더 기분이 좋아보였기에 그녀에게 함부로 밖으로 나가자고 말을 꺼내기 꺼려졌다.
"데미안. 밖으로 나갈까요?"
"엘레나.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요. 지금 얼굴에 다 드러나고 있는데."
그런가? 유리잔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아도 딱히 이상한 점을 찾지 못하겠는데, 그녀는 내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 보기라도 하고 있는건지 단숨에 속마음을 들춰냈다.
이전에도 내 마음을 곧바로 맞추어 내던 엘레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녀가 이와 관련된 초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로 그녀는 내 마음을 능숙히 읽어내었다.
"그리고 제가 배려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도 연회장에 계속 있기는 싫었거든요."
엘레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을 수 는 없었다.
그야 그녀는 연회장에 들어오고 난 이후 단 한번도 싫어하는 기색을 내비친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다시금 괜찮다고 말하자 엘레나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뾰로통한 얼굴로 나를 쳐다 보았다.
"데미안은 저를 거짓말쟁이로 만드실 생각인가요?"
"아, 아니. 그럴리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괜찮다고 하는데도 자꾸 사양하시는 건가요?"
엘레나가 그런 표정을 지으며 말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로 연회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하지만 연회장에서의 그녀는 항상 미소짓고 있었고 그 미소를 꾸며 만들어 내었다고 생각하기에는 어려웠다.
나는 이 모순되는 상황에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한채 그녀에게 사실대로 말하였다.
"미안해요. 계속 웃고 계시기에 당신이 연회를 즐기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네? 그게 무슨...."
엘레나는 내 대답에 잠시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더니 갑자기 고개를 뒤로 돌리며 손을 내밀어왔다.
"데, 데미안이 착각하신거에요."
아. 그렇구나. 내가 착각했던거구나.
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티가 났다.
그녀가 어째서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연회에 참가하면서 웃을 수 있었는지는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기로 했다. 그런 엘레나의 모습을 굳이 다른 이들에게 까지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기에 나는 별 말 없이 그녀가 건내는 손을 잡았다.
우리는 그렇게 연회장을 벗어났다.
등 뒤에서 사람들의 아쉬워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것이 우리의 발걸음을 막지는 못했다.
행선지의 주도권을 잡은 것은 엘레나였다. 나는 안타깝게도 겨울성의 지리에 대해서 거의 무지했고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연회장에서 내 방으로 가는 길과 그녀의 방으로 가는 길 밖에 알지 못했다.
백작가에서 지낼 때와는 다르게 역할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 셈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았기에 엘레나가 내게 이 넓은 겨울성을 전부 소개해주려고 하는 것은 아닐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가려는 것일까?
이상하게도 아무것도 모른채 그녀와 걷게 되니 가슴이 설레여 오는 것 같다.
이것이 단순한 호기심 때문일지 아니면 다른 감정에 의해서 그런 것일지, 거기에 대해서는 그거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둔채 나는 그녀에게 몸을 맡겼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우리가 도달한 곳은 어떤 문의 앞이었다.
문 앞에 선 엘레나는 내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된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체 어떤 곳이길래 그녀가 이런 얼굴을 하는 것일까. 그런 궁금증이 속에서 일었지만 그건 그녀가 문을 활짝 여는 것으로 그 궁금증은 순식간에 풀려버리고 말았다.
"여기는..."
"어떤가요? 데미안. 이곳은 제가 이 겨울성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에요."
방 안에는 이곳과는 또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각양각색의 꽃들이 서로 어우러져 피어있는 이곳은 기후 조차 바깥과 달랐다. 이곳은 작은 화원이었다. 춥고 척박한 북부의 땅에서 유일하게 꽃을 키울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겨울성의 화원.
나는 이곳을 알고 있다.
"음, 데미안이 보기에는 조금 부족해 보이실 수도 있겠지만요."
"그럴리가요. 무척 아름다운걸요."
엘레나는 내게 이곳을 소개하면서 부끄럽다는 듯 말했지만 나는 이곳에 만들어진 환경에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었다.
그야 이곳은 엘레나가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않고 직접 꾸미고 만들어낸 그녀만의 화원이었으니까.
제아무리 엘레나가 뛰어난 마법사라고는 하지만 이것을 혼자만의 힘으로 가꾸는데 있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이곳은 단순한 화원이 아닌 그녀의 노력의 결실이자 엘레나만의 성역이었다.
소설 속에서도 엘레나와 그녀의 가족에게만 허락되었던 공간에 발을 들였다는 것에 내가 어떠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는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엘레나는 나를 이끌며 이곳에 있는 것들을 하나씩 설명해 주기 시작했고 나는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으며 이 작은 화원을 감상했다.
크라우스의 영주성에 있는 화원보다 크기는 작았어도 결코 부족하다는 들지 않았다. 서로 주는 느낌이 달랐기에, 이곳은 마치 아늑한 방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방에 들어갔을 때 보다 더한 떨림이 내 심장에서 느껴진다.
원작에서 지쳤던 그녀가 유일하게 평온을 얻던 장소였기에 그런걸까, 이곳이 그녀에게 있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는 나였기에 그녀의 소중한 추억을 공유한다는 생각에 쉽게 떨리는 마음을 진정 시킬 수 없었다.
하지만 그리 생각하는 것은 나만이 아니었나 보다. 엘레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제가 지난번에 이야기한 거 기억하고 계시나요? 당신이 나에게 해주었던 것 같이 나 또한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알려드리겠다고."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화원은 제가 처음으로 마법을 배웠을 때 만들어낸 곳이에요. 처음에는 이곳 메로힘에서 자라는 들꽃 몇송이가 시작이었어요. 이후 실력이 늘면서 좀 더 다양한 환경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고 지금에 이르러서 이런 모습이 되었죠."
그녀는 가장 낮은 화단에 피어 있는 꽃을 보며 웃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그 화단이 엘레나가 처음으로 만들었던 화단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상상이 되었다. 그 어린 소녀가 어떻게 화단을 가꾸었을지.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난 엘레나는 다시 나를 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그래서 데미안에게 꼭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저의 추억이 깃든 이곳에 당신과의 기억도 같이 넣어두고 싶었거든요."
내게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소망을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사랑스럽게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