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스 판타지의 악당이 되었습니다-29화 (29/131)

< 29화 > 뜻밖의 손님들 (3)

리처드 에르투웬.

지금 엘레나에게 말을 걸고 있는 저 주홍빛 머리의 소년은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에게서 익숙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야 그럴것이 리처드 에르투웬이라는 인물은 엘레나가 주인공으로 있는 <공녀는 사랑받는다.>의 남자 주인공 후보 였으니, 소설을 읽었던 나에게 있어 처음 보는 리처드의 모습이 어딘가 익숙해 보이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리처드를 보자마자 내 머리는 자동적으로 녀석에 대한 정보를 끄집어 내기 시작했다.

원작이 시작하기 1년 전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소설 속에서 서술되었던 재능을 생각했을 때 위계는 적어도 4에서 5위계. 특기는 세상의 바깥을 연구하는 황혼의 탑 소속 답게 공간과 소환계통의 마법. 신체능력은 또래 평균치 정도이지만 사고속도가 빠른 마법사 답게 감각과 반응속도는 일반인의 범주는 넘었을 것으로 예상.

그리고 그렇게 튀어나온 정보들은 어느순간 부터인지 '어떻게 하면 녀석을 확실하게 죽일 수 있을까?'라는 이상한 방향성을 지닌채 나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그것에 대해서 이상함을 느꼈을 때는 이미 머릿속에서는 '확실하게 죽일 수 있다.'라는 결론이 나온 후 였고, 내 오러는 당장이라도 반지에 감응해 검을 소환할 기세였다.

'이런 미친.'

나는 서둘러 광기에 의해 끊어질려고 하는 이성의 끈을 붙잡고는 반지와 감응하려는 오러를 거두었다.

요 며칠간 엘레나와 지내면서도 잠잠했던 광기가 리처드를 보니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 같다.

리처드의 존재가 마음속에 남아있는 불안감을 극대화시킨 탓일까.

엘레나와 지내게 된 이후에도 잘만 통제되고 있던 광기가 리처드를 보자마자 무의식적으로 폭발해버리고 말았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원작의 데미안보다 더한 놈이 되어 버릴뻔한 순간이었지만 그간 엘레나와 함께 지내었던 추억이 광기에 잠기는 것을 막아주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데미안 크라우스.

내가 왜 이렇게 불안해 하는지는 스스로도 이해하고 있다.

다른 남주 후보들이 원작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아카데미에서 만나게 된다면 리처드와 엘레나의 관계는 원작의 시작 전이라고 할 수 있는 데미안, 즉 나와의 만남보다 더 이전에 시작되었다는 것이 그 원인일 것이었다.

엘레나와 리처드의 시간에 내가 없었다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건 사실이다.

앞으로 있을 만남에 나는 그녀의 곁에 있을 것이었지만 나와 엘레나가 만나기 이전의 시간에 까지 내가 있을 수 는 없는 법이니 말이다.

이것에 대해서 한번도 생각을 해본 적이 없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엘레나와 만나기 이전의 나는 리처드 때문에 그녀가 나와 파혼할 것이라고 확신하지 않았나.

하지만 그녀는 파혼을 선택하지 않았고 나와의 약혼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그걸로 충분한거 아닌가?

이것은 그 누구의 개입이 들어가지 않은 오로지 엘레나 에델바이스 스스로가 내린 결정이다. 그렇다면 그녀와 리처드가 내가 모르는 어떠한 과거를 가지고 있든 간에, 더는 거기에 대해서 내가 걱정을 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과거가 어찌되었건 지금 엘레나의 옆에 있는 것은 나다.

그 사실을 자각하니 리처드에 대한 불안감이 조금은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완전히 경계를 늦출 수는 없었다. 방금전 내 앞에 갑자기 나타난 황혼의 탑주도 그렇고 괜히 안심하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나는 기척을 죽인채 조용히 엘레나와 리처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아, 안녕 엘레나. 오랜만이야."

"....안녕하세요. 리처드 공자."

정신을 둘에게 집중하고 있는 탓인지 연회장에 울려퍼지는 노랫소리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그 둘의 대화는 내 귀에 또렷이 들려왔다.

엘레나에게 말을 거는 리처드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가득했고 얼굴빛 또한 그리 좋지 않아 보였다. 리처드가 이전부터 엘레나를 짝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리처드의 모습을 보며 내가 그에게 동정이나 연민을 느끼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신경이 쓰이는 쪽은 엘레나였다.

어딘가 대하기 어렵다는 듯한 얼굴과 목소리.

원작 속 엘레나와 리처드의 대화에서는 전혀 저런 기색이 없었는데 말이다. 심지어 데미안과 약혼을 유지하고 있던 당시에도 엘레나는 리처드에게 살갑게 대했었다.

엘레나가 리처드의 연심을 눈치채고 있었나?

아니, 그렇다면 이야기의 근간부터가 뒤바뀌어 버리게 된다. 엘레나가 나와의 약혼을 받아들인 것부터 그렇기는 하다만 그래도 그녀가 리처드의 연심을 알아차렸다고 생각하기에는 엘레나가 리처드를 바라보고 있는 눈은 꼭 무언가를 경계하고 있는 것만 같아 보였다.

"엘레나."

나는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것을 그만두고 힘을 담아 그녀를 불렀다.

내 목소리가 무사히 닿았는지 그녀는 정확히 내가 있는 곳을 찾아냈다. 둘의 대화가 더 진행되기 전에 나는 엘레나의 곁에 서고는 연회장에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기에 찾고 있었습니다."

"아, 미안해요. 잠시 친구를 만나서. 오래 기다리셨나요?"

"그리 말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리고 친구라 하신다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며 리처드를 바라 보았다.

리처드는 갑작스러운 나의 등장이 상당히 놀란 모양이었다. 그래도 마탑의 후계자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지 그는 순식간에 얼굴을 바꾸고는 언제 그랬냐는듯 평온한 얼굴로 나를 보며 인사를 건내었다.

"크라우스의 가주 대리를 뵙습니다. 저는 에르투웬 가문의 리처드 에르투웬이라고 합니다."

"아, 황혼의 이름은 남부에서도 위명이 높지요. 제가 여의치 않게 친구와의 만남을 방해하게 만들었군요. 죄송합니다."

나 또한 그와 같은 얼굴로 웃어주며 손을 건내었다. 리처드는 친구라는 말에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듯 웃으며 내 손을 맞잡았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엘레나 양을 너무 붙잡고 있던 것 같군요. 약혼 축하드립니다. 엘레나도...약혼 축하해."

거기서 우리의 대화는 더 이상 지속 되지 않았다. 잡고 있던 손을 놓은 리처드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더 축하 인사를 건내고는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 인파속으로 사라졌다.

소설과는 달리 깨끗이 물러나는 리처드의 모습에 의외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지금 나는 엘레나의 약혼자였다. 소설과는 달리 그녀의 옆에 서 있을 자리의 주인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그렇기에 리처드는 별말 없이 물러난 것이었다.

"저 자와는 어떤 관계였습니까?"

나는 리처드가 자리에서 완전히 떠났다는 것을 확신하자 엘레나에게 물었다.

리처드와 대화를 나눈 이후에도 나는 어째서 그녀가 무엇을 보고 경계를 했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 짧은 대화를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었냐고 묻는다면 별로 할 말은 없다만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리처드 에르투웬이라는 인물은 엘레나에게 있어 한 없이 무해한 존재였기에, 방금전 대화에서도 내가 그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감정은 안타까움과 체념이었지 그녀가 경계를 할 만한 정도의 무언가는 느낄 수 없었다.

소설을 읽었음에도 내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이야기를 읽은 독자라 하더라도 전지적일 수는 없으니 말이다.

분명 엘레나와 리처드 사이의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확실한데 막상 리처드의 머릿속에는 나와 엘레나의 약혼에 대한 체념만 들어있었을 뿐 별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으니 나는 그것을 엘레나와 리처드와의 관계에서 찾고자 하였다.

하지만 엘레나에게는 그게 다른 의미로 들렸나 보다.

그녀는 내 말에 잠시 멍하니 내 눈을 응시하더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사람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붉어진 얼굴을 하며 내게 물었다.

"지금 그거는 질투인가요...?"

"네?"

"데미안 질투하는거에요? 제가 리처드와 대화해서 그런건가요? 질투 맞죠?!"

"아니, 엘레나.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저는 그저 당신이 리처드라는 저 남자와 어떻게 친해...."

나는 그녀에게 변명 하는 것을 멈추고는 다시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엘레나의 입장에서 보기에 내 행동이 어떻게 보였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거기에 대해서 답을 내리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확실히 엘레나의 말대로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녀에게 보여주었던 나의 행동은 다른 남자와 만나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질투하고 있는 남자친구 처럼 보였다.

거기에 끝으로 어떤 사이였냐고 묻는 것 까지. 정말 빠져나올 구석이 없구만.

의기양양한 얼굴로 내게 어서 말하라고 재촉하는 엘레나의 모습에 헛웃음만이 나온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엘레나의 말도 틀린건 아니었다.

그녀와 리처드가 대화하는 모습을 보며 느꼈던 불안감에는 분명 질투라는 감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그녀에게 말하는 것 어째선지 지는 것만 같아 나는 뻔뻔하지만 끝까지 부정하기로 하였다.

"질투 한거 아닙니다. 정말 궁금했을 뿐이에요."

"아, 네~ 이번 한번만 믿어 드리도록 할게요."

키득키득 웃으며 말하는 엘레나는 여전히 내 말을 믿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도 보기가 좋아, 결국 끝까지 말을 바꾸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미 내가 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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