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뜻밖의 손님들 (1)
요하임이 말했던 연회 날이 되자 겨울성의 문은 아침부터 들어오는 마차들로 인해 복작거렸다.
에델바이스 가문은 북부의 맹주일 뿐 아니라 대륙에 일곱개 밖에 없는 마탑의 주인이었기에 이번 연회에 단순히 가문 휘하의 가신들만이 참석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많은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겨울성 앞에 모여든 이들은 많았다.
물론 성이 그 사람들을 전부 수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는 내가 걱정할 바가 아니다. 어차피 저들 중 연회장에 들어올 수 있는 이는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진정으로 내가 걱정해야 할 일은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대한 것일 거다.
이틀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엘레나와의 연습으로 나는 능숙하다고는 못해도 춤이라고 할 수 있는 움직임을 해내는데 성공했다.
어차피 엘레나 이외에 다른 사람과 춤을 출 일이 생기지는 않을테니 그녀와 합만 어느정도 맞춰둔다면 적어도 그자리에서 망신살 일은 없을 것이다.
"많이 부담스러워 보이십니다. 도련님."
"마음이 편하지는 않죠."
나는 내 오른손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보며 켄의 말에 답했다.
반지에 새겨진 작은 용은 입에 붉은 보석 하나를 물고 있었다.
내게 이런 취향의 반지를 끼는 취미는 없었지만 앞으로 있을 자리를 생각하면 끼기 싫어도 손에 끼워 넣어야만 했다.
만든이의 취향이 심히 의심되는 이 반지는 단순한 반지가 아닌 크라우스의 주인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물품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원칙대로라면 크라우스의 소가주 직책을 달고 있는 나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오직 가주를 상징하는 물건이지만 아버지께서는 내가 메로힘으로 떠나기 전에 반지를 내게 맡기셨다.
그때는 왜 그러셨는지 이해가 가지를 않았으나 오늘 있을 연회를 생각하면 아버지께서 내게 왜 반지를 맡기셨는지 설명이 된다.
반지는 일종의 증표다.
내가 그들이 무시할 수 없는 위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표식이며 크라우스와 척을 질것이 아니라면 찝쩍대지 말고 꺼지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번 연회에 참가하는 이들의 눈이 옹이구멍이 아닌 이상 이 반지를 못알아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제국에서 손 꼽히는 권력자의 신물(神物)을 못 알아볼 정도로 지식이 얕은이가 연회에 참가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재밌는 일이겠지만 애초에 연회의 주최자인 요하임이 그런 사람을 연회장에 발을 들이는 것을 허락했을리 없었다.
이렇듯 반지는 나의 신분을 남들에게 알려주는 물건이기도 하였지만 여기서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본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사실 내 위치를 알리는데 사용하기에 이 반지는 너무 과분하다고 할 수 있다.
연회를 시작할 때 요하임은 나를 대중에게 누구인지 소개할 것이고 내가 입고 있는 정복에 새겨진 가문의 문장만 보더라도 내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이 반지를 손에 끼우지 않더라도 내가 크라우스인지 알게 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소리다.
그러니 아버지가 이것을 내게 맡긴 것은 대중이 아닌 나에게 전하는 메세지다.
이 반지를 가지고 있는 동안 크라우스를 대표하는 것은 아서 크라우스가 아닌 데미안 크라우스라는 것을 기억하고, 가문의 무게를 짊어지고 다른 이들의 앞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그것을 보여달라는 뜻이었다.
흔히들 말하는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와 같은 뜻인데, 아버지에게는 죄송한 이야기지만 나는 아버지가 내게 건낸 반지에 담긴 뜻 보다는 오늘 있을 엘레나와의 춤이 더 신경 쓰였다.
"켄. 역시 춤을 안 출수는 없겠죠?"
"지금까지 아가씨와 열심히 연습하셔 놓고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걱정하지 마세요. 도련님은 충분히 잘 하시고 계신답니다. 그러니 걱정은 모두 내려 놓으시고 오늘 있을 연회를 즐기도록 하세요."
켄은 웃으며 내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켄의 위로에도 나는 고민을 내려 놓을 수 없었다.
확실히 엘레나와의 연습으로 인해 나의 실력은 이전과 비교한다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보는 이들의 몫이었다.
나야 어떤 말을 듣던간에 별 상관은 없다만 나 때문에 엘레나에게 악영향이 가도 좋다는 것은 아니었기에 걱정을 하지 않을 수 가 없었다.
하지만 연회의 시작은 코 앞으로 다가왔고 내게 시간을 되돌리는 재주 같은 것은 없었기에 나는 여태까지 해왔던 그녀와의 연습을 떠올리며 엘레나를 맞이하러 방을 나섰다.
이번 연회는 나와 엘레나의 약혼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기 위한 목적도 있었기에 연회장에 입장할 때 내가 그녀를 에스코트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겨울성의 구조를 빠삭하게 알게 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틀간 방 안에서 춤 연습만 한 것은 아닌지라 그녀가 있는 방까지의 가는 길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있는 방 문 앞에서자 나는 방에서 나오기 전에 이미 여러번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삐둘어진 곳은 없는지 다시 한번 더 옷차림을 검사하기 시작했다.
이전과 다를게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나는 문을 작게 두드리며 그녀를 불렀다.
"엘레나. 지금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들어와도 돼요."
엘레나의 허락이 떨어지자 나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그리고 열린 문 틈으로 방을 들여다 보는 순간 나는 이전과 같은 데자뷰를 느끼며 방으로 들어오는 것도 잊어버린채 멍하니 서있는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전에 아침의 이실리아관에서 그녀를 보았을 때와 같았다. 아니, 그때보다 더 강렬한 빛이 내 눈에 비춰졌다.
이곳에는 그때와 같은 햇빛은 없었지만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 별처럼 스스로 빛나고 있었다.
내가 입고 있는 검은빛의 크라우스 가문의 정복과 대비되는 순백색의 드레스는 그녀의 머리카락과 어우러져 반짝이고 있었고 그렇게 지상에 내려온 별로 변모한 그녀의 모습은 내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서로의 모습을 본 우리는 몇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어떤가요?"
엘레나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옴과 동시에 멈춰있던 머리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제야 내가 무슨 추태를 부리고 있던 것인지 깨달았고 나는 서둘러 그녀를 향해 있던 시선을 수습하고는 그녀에게 손을 건내며 말했다.
"무척 아름답습니다."
"다, 다행이네요! 너무 과한 것은 아닌가 싶었는데 데미안이 그렇게 말해준다면 안심이에요..."
엘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내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이 닿자 나는 무심코 손에 힘이 들어갔음을 알 수 있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아파하지는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려는 찰나 내 손을 잡고 있는 엘레나 역시 내 손을 놓지 않겠다는 듯 손에 힘을 주어왔다.
우리는 그렇게 손을 맞잡고 겨울성의 복도를 걸었다.
내게 가까이 붙은 그녀에게서는 라벤더향이 은은하게 풍겨왔다.
손을 타고 느껴지는 그녀의 맥박과 체취에 여태 나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걱정들은 그녀의 대한 생각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연회장으로 가지 않고 이렇게 엘레나와 계속 걷는 것은 어떨까.
나는 그리 생각하며 연회장을 향해서 아쉬운 발걸음을 내딛는 수 밖에 없었다.
***
눈 앞의 거울 속에는 새하얀 순백색의 소녀가 한명 서 있었다.
"역시 마담 샬롯이야."
그녀가 만들어낸 드레스는 언제나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자신의 외모를 과신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만든 이 드레스가 있다면 오늘 만큼은 확실하게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거기에 더불어 헤일리가 몇시간 동안 붙어서 꾸며준 자신의 모습은 스스로가 보아도 이 이상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흠 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엘레나. 지금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서둘러 그에게 들어오라 말했다.
연회가 있기 전 이틀간 그와 춤 연습을 하며 그에게 자신의 외모가 통한다는 것을 알아낸 것은 근래 들어 가장 큰 수확이었다. 그만큼 이전과는 다르게 자신과 그의 거리가 줄었다는 것을 의미했으니 말이다.
서로의 숨결이 곧바로 느껴지는 그 거리에서 나와 눈이 마주칠때 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희미하게 얼굴을 붉히는 그의 모습은 그가 내게 빠져들고 있다는 확신과 함께 성취감을 주었다.
그러니 지금 이 모습이 확실한 결정타가 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지금의 자신은 스스로가 보아도 완벽했고 요즘들어 자신에 대한 면역력이 약해진 그라면 필히 그 어느때보다 동요하게 될 것임을 자신했다.
다만 여기서 내가 한가지 놓치고 있던 것이 있다면 나는 이미 오래전 부터 그에게 빠져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밤하늘 같이 어두운 머리카락과 어울리는 검은 정복을 입고 있었다.
그 정복은 팔에 크라우스를 상징하는 검을 휘감은 용이 금사로 자수 되어 있었다. 이전에도 그가 처음 나를 만났을 때 입었던 옷으로, 그가 주로 즐겨입는 옷이었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평소와 별다른 점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특유의 절제된 분위기와 함께 이전과는 다르게 반쯤 이마를 드러내어 용을 닮은 날카로운 눈매가 돋보이는 그의 모습은 내 머릿속을 백지로 만들어 버렸다.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던 나는 방 문을 열고 들어온 그의 모습에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는 침묵이 찾아왔다.
우리는 마치 처음 부터 약속이라도 했던 것 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은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차려! 엘레나 에델바이스!!'
"어..어떤가요?"
정적 속에서 가까스로 정신줄을 부여 잡은 나는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고 그는 잠시 눈을 몇번 깜빡이더니 고개를 살짝 돌리고는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무척 아름답습니다."
"다, 다행이네요! 너무 과한 것은 아닌가 싶었는데 데미안이 그렇게 말해준다면 안심이에요..."
그렇게 말한 나는 그의 손을 잡고는 그에게 기대었지만 아쉽게도 그는 이미 정리가 되었는지 처음과 같은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런 멍청한 여자 같으니.
그가 나를 보고 느꼈을 떨림을 여태 자신은 그를 보며 몇번이고 느껴왔는데 말이다. 연회를 위해서 준비했을 것이라는 그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았다니. 이것은 자신의 실수였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오늘 그에게 딱히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그저 헤어스타일에 색 다른 변화를 주었다는 것뿐, 그런데 열심히 공들여 준비해 온 자신과 무승부라니 뭔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이런 패배는 익숙한 일이 되어버린지 오래였다.
그래도 자신에게 눈을 때지 못하던 그의 모습을 보았으니 그것으로 만족하려고 할때, 자신의 손을 붙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는 것이 느껴졌다.
힘이 들어갔다고는 하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손에 담긴 온기가 더 확실하게 느껴져 기분이 좋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왜 그는 갑자기 손에 힘을 주었을까.
그것에 대한 의문은 자신의 귓가에 들려오는 그의 심장 소리가 답이 되었다.
그와 손을 잡고 있는 지금, 내 심장은 어느때 보다 거세게 뛰고 있었지만 내 손을 타고 느껴지는 떨림은 내게서 나오는 것이 아닌 손을 잡고 있는 그에게서 오는 것이었다.
그에게 기대어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가 여태까지 나와 함께 있었던 시간들 중 지금 가장 두근거리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 소리없이 작게 웃고는 내 손을 붙잡고 있는 그 손을 꽉 잡아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