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별과 함께 춤을
에스텔리아 아카데미의 도서관은 대륙 최고의 교육기관이라고 알려진 곳의 도서관 답게 여러 장서들을 보유하고 있다.
단순히 책의 보유량만 따진다면 지식의 보고라고 할 수 있는 마탑의 서고와 비견될 정도였기에 언제나 이곳에는 공부에 열정적인 학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물론 도서관의 책들이 반드시 학업에 관련된 책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여타 다른 이유로 도서관에 들리는 학생들도 존재했다.
지금 도서관에 혼자 남아 책장을 넘기고 있는 데미안 역시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림이 있기는 한데 알아보기 참 어렵게 해놨네."
데미안은 도서관 구석으로 들어가 책에 그려져 있는 동작들을 따라해보았다.
몸을 움직이는 것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 데미안이었지만 책에 그려져 있는 그림이 워낙 불친절했던 터라 현재 데미안의 동작은 반쯤 자신의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않아도 두명이서 같이 짝을 이루어 움직이는 동작을 혼자서 허공을 잡으며 움직이고 있으니 그 모습은 남들이 보기에 썩 좋은 그림은 아니었다. 데미안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사람이 없는 구석으로 들어간 것이고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현재 도서관에 있는 이는 데미안과 도서관 관리인 단 둘 뿐이었지만 제아무리 축제 준비 때문에 바쁘다고 하여도 자신과 같은 사람이 더 있을지는 혹시 또 모를 일이었기에 데미안은 최대한 기척을 죽이며 몸을 움직였다.
마음 같아서는 기숙사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축제 때문에 자신을 찾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차라리 사람이 없는 도서관이 더 나았다. 만약 기숙사에서 지금과 같은 짓을 하다가 라인하르트나 리처드에게 걸린다면, 그런 끔찍한 미래는 상상하기도 싫었다.
축제.
여태까지 살면서 춤이라는 것과는 구만리 거리를 유지하던 데미안이 지금 이렇게 춤을 연습하는 이유는 지금으로 부터 삼일 후 열리는 졸업 축제 때문이었다.
현재 에스텔리아 아카데미는 교직원 부터 학생들까지 모두 그 졸업 축제의 준비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엉덩이 무거운 교수들이 직접 나서서 축제 준비를 할 정도였으니 그들이 얼마나 이번 축제에 신경을 쏟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슨 학교 졸업 축제에 그리 호들갑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 졸업 축제는 그저 평범한 졸업 축제가 아니었다.
일곱 마탑의 자제들부터 시작하여 대륙에서 명망 높은 귀족들의 후계들이 모두 이번 연도 졸업예정자들이었다.
결정적으로 그중에는 미래에 황실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1황자와 1황녀도 있었기에 평등한 교육을 모토로 내세우고 있던 교수진들도 올해의 졸업 축제 만큼은 심혈을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학생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자신들의 축제를 즐기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고 말이다.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지..."
몇번을 움직여 보아도 딱히 달라지는 것 같지가 않자 데미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난 시간동안 미래를 대비한답시고 여러가지 노력을 해온 데미안이었지만 이번에 자신이 맞닥뜨린 난관은 여태 해온 노력으로는 돌파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결국 혼자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고 체념하려 할때 데미안은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서둘러 자세를 바로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급하게 자세를 바꾼 탓에 데미안의 몸짓은 매우 어색했고 그것은 보는 이에게 있어 더 큰 의문을 자아낼 뿐이었다.
"....지금 혼자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건가요?"
"일단 이상한 짓은 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는 말아 줄래."
이상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엘레나의 눈빛에 데미안은 순순히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눈 앞에 펼쳐 놓은 책을 보여주었고 그 책을 본 엘레나는 별다른 설명 없이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안간다는 얼굴을 한 엘레나는 데미안에게 책을 돌려주며 말했다.
"음, 그런데 갑자기 이건 왜 보고 계셨던 거에요? 당신은 그런거에 관심 없었잖아요."
"이번에 열리는 졸업 축제 때문에. 졸업 예정자들은 반드시 연회에 참가해야 한다고 하잖아. 그래서 그런거지."
"학교 행사나 이상한 부분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시면서 이런건 또 기억 못했나 보네요."
엘레나의 말에 데미안은 쓴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책에는 그렇게 세세한 건 적혀 있지 않았거든."
"그건 당신의 손에 있는 책도 마찬가지에요. 발행년도도 오래되었고 사교계의 역사를 서술한 책이지 춤에 관한 책은 아니라고요."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여기서 그나마 춤에 대해 그림이라도 있는 건 이 책 뿐이었는 걸."
"그리고 연회에서 꼭 춤을 춰야 되는 건 아니잖아요. 왜 그렇게 춤에 대해 집착하는 거에요. 평소처럼 테라스나 연회장 구석에서 술이나 마시면 될 것을 당신 답지 않게 안 하던걸 하려고....춤 신청이라도 받으셨어요?"
엘레나의 말에 데미안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나는 그것을 보자마자 데미안에게서 고개를 돌리고는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노엘 인가요..?"
"그래."
그 대화를 끝으로 둘 사이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데미안은 여전히 아무말 없이 책을 읽고 있었고 엘레나는 그 옆에 앉아 데미안에게서 고개를 돌린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소리 없이 흐르는 기묘한 분위기에 결국 먼저 입을 열게 된 것은 데미안이었다.
"내가 노엘이랑 춤을 추게 된 것이 마음에 들지 않겠다는 건 알겠는데 이건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어떻게 황녀님의 춤 신청을 거절 할 수 있겠어."
"제가 당신이 노엘과 춤을 추는 것을 싫어할 이유가 없잖아요."
"아니, 지금 네 행동에 다 드러나고 있거든. 그 아이를 아끼는 것은 잘 알겠는데 내가 좀 부족해보여도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봐서 좀 봐주면 안되겠니."
"노엘이라면 당신이 거절 했어도 아무말 없이 받아들였을 거에요."
"그래. 그랬겠지. 만약 그랬으면 나는 졸업 할때 까지 반에서 그녀의 원망어린 눈빛을 받았을 테지만 말이야."
"어차피 졸업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잖아요?"
"....원래 이런거에 대한 뒤끝은 좀 길게 남아. 애초에 그런 일을 안 만드는게 최선이고."
"그건 경험담인가요?"
"아니, 아버지한테서 들었어. 예전에 연회에서 춤 신청을 거절했다가 거절 당한 영애가 몇년이 지난 이후에도 그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고 하더라. 뭐, 노엘이 그럴리는 없겠지만. 내 인간관계가 좁다는 것은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만약 내가 그곳에서 꼭 춤을 춰야했다면 어차피 노엘 이외에 선택지는 없었다고. 그러니 딸아이를 달라는 소리는 안할테니 허락 좀 해주시면 안될까요."
하지만 데미안의 변명에도 여전히 엘레나는 마음에 들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어째서 엘레나가 그러는 것인지 그 이유를 데미안은 알 턱이 없었지만 그녀는 지금 자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감정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그것을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낼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 굳게 닫힌 입도 무의식을 막을 수는 없었고 그녀의 불만은 매우 작은 소리로 새어나오게 되었다.
"애초에 저는 당신의 선택지 위에 없었군요..."
"어?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데미안. 제가 연습상대가 되어드릴게요. 당신이 실수라도 노엘의 발을 밟는 일은 없도록 해야죠."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에게 손을 건내며 말하는 엘레나의 말에 데미안은 매우 얼떨떨해 보였다. 이내 그의 얼굴에는 당황이 아닌 걱정이 담기기 시작했고 그는 여전히 엘레나가 건낸 손을 잡지 않고 그녀에게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 그건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그야 나는 '데미안'인걸."
"아직도 그런걸 신경쓰고 있었어요? 그럼 지금 제가 당신과 이렇게 마주보며 대화를 하고 있는건 어떻게 설명할건가요."
"첫만남에 다짜고짜 주먹을 날린게 누군데 그래. 알겠어. 너가 괜찮다면야. 그래도 일부러 내 발을 밟는 건 하지 말아줘."
데미안이 손을 잡자 그녀는 얇게 웃으며 답했다.
"글쎄요?"
***
내 감각은 지금 그 어느때 보다 예민해져 있다.
코 앞에 서 있는 그녀의 숨결이 그대로 내게 흘러들어온다. 몇센티미터도 안되는 거리를 두고 우리는 얼굴을 마주보고 있었고 내가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갔다가는 그녀와 닿게 될 정도로 우리의 거리는 가까웠다.
단순히 거리로만 따지자면 지금보다 가까웠던 적은 이전에도 몇번이고 있었지만 이렇게 서로를 가까이 마주보고 서 있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은 닿을락 말락하는 엘레나와의 거리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 발자국 몸을 움직일때 마다 혹여라도 그녀의 발을 밟지는 않을까 신경을 써야만 했다.
평소의 나였다면 그것은 눈 감고도 해낼 수 있을 정도 였지만 지금은 바로 눈 앞에 있는 엘레나가 있기 때문인지 머리 속 생각 대부분이 그녀로 채워져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지는 것만 같았다. 결국 나는 내 스스로 내 발을 밟는 것으로 잡념을 털어낼 수 밖에 없었다.
"데미안. 자꾸 자신의 발을 밟으시면 어떡해요. 발은 괜찮나요?"
"미안합니다. 그, 몸이 오늘따라 뜻대로 움직이지가 않는군요."
내 양손은 모두 그녀를 잡고 있는데 묶여 허벅지를 꼬집는 짓도 못한다.
나름대로 그녀의 미모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더니 아무래도 내 착각이었던 것 같다. 자꾸만 그녀를 향해 다가가려는 내 발걸음을 막으려면 내가 내 발을 밟는 수 밖에 없었다.
계속 내가 발을 밟아대자 엘레나는 잠시 눈을 감더니 방법이 생각났다며 내게 말했다.
"데미안. 한번 눈을 감아보는 건 어때요?"
"하지만 그러면 제가 밟는게 제 발이 아니라 당신의 발이 될 수 도 있어요. 엘레나."
"괜찮아요. 그리고 데미안이 저에게 온전히 몸을 맡기면 그럴 일은 없을거에요."
결국 나는 엘레나의 말대로 눈을 감고 그녀의 손을 잡게 되었다. 시야가 가려지니 절로 다른 감각들이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와의 정확한 거리를 잴 수 없게 되었으니 눈을 떳을 때 보다 그녀와 부딪칠 수 있는 위험도가 높아진 것은 사실이었다.
"천천히 제 호흡을 따라해봐요."
엘레나의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인다. 그 목소리를 따라 나는 가까이서 느껴지는 그녀의 숨결을 느끼며 그녀와 똑같이 숨을 쉬기 시작했다.
나와 그녀의 숨결이 온전히 뒤섞여 전혀 분간이 되지 않게 되자 그녀가 나를 이끌며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길잡이가 되어 주는 노래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오직 엘레나 뿐, 그녀는 나를 움직이는 바람이었고 나는 그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새가 되어있었다.
눈을 감고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꽤 오랜시간이 지난 것 같았음에도 내가 그녀의 발을 밟는 불상사는 눈을 감은 이후 단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시간의 흐름도 잊은채 그녀와의 춤에 빠져들게 되었다. 흐름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지니 자신감이 조금 붙은 것인지 나는 감고 있던 눈을 떳다.
그리고 눈을 뜨자 들어온 나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엘레나의 얼굴에 나는 평정심을 잃어버리고 그대로 발이 꼬여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나 진짜 춤 못추네.
***
엘레나가 떠나간 자리에 데미안은 떠나지 않고 혼자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녀가 도와준 춤의 연습은 성공적이었다. 역시 그림으로만 보고 어정쩡하게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는 직접 짝지어 몸을 움직였던 편이 확실히 더 도움이 되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고 그녀의 움직임에 맞추어 움직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기에 단 한번의 연습만으로 데미안은 춤이라고 할 수 있는 움직임을 할 수 있게 되어 엘레나와의 연습은 아주 짧게 끝났다.
데미안은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려다 놓았다.
심장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평소보다 더 격하게 뛰고 있었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애써 가슴의 두근거림을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을 계속해서 해보았지만 방금전의 일을 떠올리기만 하면 심장은 다시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버려야 한다. 버려야 하는데 말이지."
파혼 이후에 서로 없는 사람처럼 살 것이라 생각했던 두 사람은 미래를 바꾸기 위해 힘을 합쳤고 그렇게 엘레나와 데미안은 자신들 만이 가지고 있던 여러 비밀들을 공유하게 되었다.
미래를 바꾸었다.
죽었어야만 했던 황녀를 살리고 외신을 따르는 이교도들이 아카데미에 침범하는 것을 막아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게 존재하는 법이다.
그녀와 이러한 관계가 된 것은 그저 의견이 같았기에 생긴 우연이었음을 잊지 않고 있다.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이상을 생각하는 것은 과욕이며 오만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데미안 크라우스라는 사실을 다시금 자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