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팔불출 (5)
나와 요하임이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전에 엘레나와 함께 했던 자리에서 말했듯 나는 이전에 한번 그와 만났던 적이 있었다.
다만 그 첫만남 당시 내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던 지라 내 기억이 잘 못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아주 짧은 대화를 나누고는 곧바로 헤어졌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 내가 맨정신으로 그를 마주하는 것은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라는 소리다.
심지어 2년 전과는 달리 나와 요하임의 관계는 엘레나로 인하여 직접 만나지 않았음에도 큰 변화가 생기게 되었고 그것은 이전까지 파혼을 목표로 두고 있었던 나에게 있어 생각치 못한 기습이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친구라는 점과 오늘 있었던 일들을 통해 그가 그렇게 꽉막힌 성격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를 대하는데 있어 평소 아버지에게 하는 것 처럼 행동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친구네 부모님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긴장하게 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다.
이전에는 그저 아버지의 친구, 엘레나와 파혼 이후에 다시는 만날 일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요하임에 대한 나의 생각이었다면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기에 상황이 너무나도 달라져 버렸다.
아직 정식으로 약혼식을 올린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엘레나와 약혼을 이어가게 되었고 그렇기에 엄밀히 말하자면 눈 앞에 있는 이 남자는 내 약혼자의 아버지가 되어버린다.
즉, 내게 장인어른이 되는 사람으로서 그에 대한 생각도 준비도 안된 나에게 요하임과의 독대는 긴장이 될 수 밖에 없는 자리였다.
무엇보다 불과 몇시간 전에 아버지가 요하임에게 한 짓이 있는데 걱정이 되지 않을리가.
넓게 보았을 때 나와 엘레나 또한 아버지의 짓굳은 장난에 가담한 공범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팔불출 아버지인 그가 엘레나를 질책할리는 없으니 지금은 온전히 나만을 걱정해야 할 때였다.
하지만 다행이게도 그는 뒤끝 있는 아버지와는 달리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 성격인 것인지 요하임이 아버지의 장난에 대해 말을 꺼내는 일은 없었다. 그 대신 요하임은 내가 열어놓은 창 밖의 풍경을 보고는 조용히 내게 말했다.
"메로힘의 설경(雪景)은 남부의 꽃들과는 다른 매력이 있지. 척박해 보이는 대지임에도 사르함 못지 않은 절경들이 여럿 있으니 이곳에 있을 때 한번은 둘러보는 것이 좋을거다."
나는 요하임의 조언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어째 그가 묘하게 사르함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건 내 착각이겠지.
이후에도 우리들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 만큼 분위기가 무겁지는 않았다.
그저 지난 2년동안 어떻게 지냈냐, 또 그때 처럼 몸을 험하게 굴리거나 한 것은 아니냐, 다음 년도 아카데미에 입학은 할것인가 등등 매우 간단한 질문들이었기에 나는 어렵지 않게 요하임의 말에 답할 수 있었다.
오히려 '우리 딸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가?' 같은 질문이 날아올 거라 생각하고 있던 내게 있어 그의 질문들은 마치 오랜만에 만난 아들에게 안부를 묻는 아버지의 모습과 같이 느껴졌다.
그리 생각하니 더는 그와 대화하는 것이 불편하지 않았다.
"실은 어제 딸아이와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네."
아니, 그런데 거기서 갑자기 그런 주제를 꺼내시면.
갑자기 요하임이 엘레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내게 말하니 내 기분은 처음 그와 대화를 할 때로 돌아가버린 것만 같았다. 그녀가 요하임에게 나에 대한 험담을 했을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만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올 말들이 왠지 모르게 두렵게만 느껴졌다.
그것이 괜한 걱정이라는 걸 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약혼자의 아버지와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이런 주제의 이야기가 나오면 그 누구라도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럴 위인은 되지 못했다.
무엇보다 지금 이야기를 꺼내려는 요하임의 얼굴은 어딘가 쓸쓸해 보여 그런 그의 모습은 그렇지 않아도 최대치에 임박한 긴강감을 고조시키기에 충분했다.
"내 평생 엘레나가 그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네."
"네?"
"그 아이가 꽃을 많이 좋아하거든. 그래서 처음에는 단순히 남부에 다양한 꽃이 많이 피어있으니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해보았지. 그곳에 사는 자네야 말로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만 크라우스 영주성의 화원은 제국 내에서도 손 꼽히는 명소이기도 하니 말이야.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그는 이내 내게 부럽다는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데미안. 엘레나가 웃으며 내게 이야기 할 수 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자네 때문이었네. 대체 그 열흘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아이가 너에게 빠져들었던 것일까. 나는 그것이 참으로 궁금해."
그건 저도 궁금합니다.
요하임의 말에 나는 이번 만은 여태까지 잘만 대답했던 입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는 나와 처음 만났었던 그때부터 내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요하임의 질문에 대한 답은 절대 내게서 찾을 수 없는 것이었고 그것은 이 세상에서 오직 엘레나 그녀만이 알고 있는 답이었다.
하지만 요하임도 애초에 내게 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던 것인지 얇게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라도 메로힘을 둘러보다 이곳에서 살고 싶어지면 언제든지 내게 말만 하게. 겨울성에 빈 방은 많으니 말이야."
"그거 농담이시죠? 저는 크라우스의 소가주입니다만."
"자네에게는 동생이 한명 있지 않은가. 아서 그 녀석은 앞으로 100년은 넘게 살것 같더구만 그냥 동생에게 소가주직을 넘기는 건 어떤가? 그 가주라는 자리 내가 앉아 있어 봐서 아는데 해야할 일만 많지 별로 쓸 때 도 없다."
이후 문을 열고 나가면서 당연히 농담이었다고 말하는 요하임이었지만 그 말을 꺼낼때의 얼굴이 어찌나 진지하던지 단순히 농담이라고 생각하기에는 힘들었다.
이 팔불출 아버지는 내가 이곳에서 살고 싶다고 농담이라도 한번 했으면 진짜로 겨울성에 없던 방도 만들어 버릴 위인이었다.
"아, 이걸 말하는 걸 잊을 뻔 했군. 모처럼 자네가 메로힘에 왔으니 이참에 가신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이틀 후 연회를 열려고 생각하고 있네만."
"저는..."
"나도 알고 있네. 아서에게 들어보니 자네는 여태 사교계에 나가본 적이 한번도 없다고. 그 놈 머릿속에는 예나 지금이나 검 밖에 없는 것 같아. 그래도 이번 기회에 한번 참가해 보는 것이 어떤가. 앞으로 에델바이스라는 이름을 달고 살아가려면 연회는 피할 수 없는 일이네."
"다시 한번 더 말씀 드리지만 저는 크라우스의 소가주입니다. 연회는...네, 말씀대로 이번 기회에 한번 경험해 보는 것으로 하죠."
"크라우스나 에델바이스나, 아무튼 잘 선택했네. 지금 제도(帝都)에서 유명한 부티크의 주인이 메로힘에 와 있으니 그녀에게 엘레나의 새로운 드레스를 의뢰하는게 좋겠어. 자네는 운이 좋은 줄 알아."
말은 저렇게 했지만 드레스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드레스가 이틀만에 지어질리 없으니 말이다.
나는 이 일에 대해서 요하임이 사전에 미리 계획 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었다. 아마 이번 연회의 목적은 단순히 그가 엘레나의 새로운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 엘레나의 약혼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기 위함일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나는 별 다른 말 없이 그의 제안에 응한 것이었고 말이다. 만약 내가 여기서 요하임의 제안에 거절을 했다 하더라도 금방 아버지에게 연락이 왔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그렇게 요하임을 떠나보내고 무언가를 놓친것 같은 찝찝함에 자리에 다시 앉아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다시금 곱씹어 보았다. 그리고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불길한 기분의 원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연회라고 하면 그, 춤을 춰야 하는건가?"
생각해보면 나라는 녀석은 검무(劍儛)를 출 수는 있어도 평범한 춤은 전생이든 현생이든 태어나서 단 한번도 춰 본 적이 없는 놈이었다.
아무래도 엘레나에게 메로힘의 안내를 부탁하려고 했던 생각은 접는게 좋겠다.
***
나는 데미안의 몸에 빙의를 한 이후 살아남겠다는 일념하에 성실히 학업과 단련에 임하였다.
그리고 그 학업이라는 것에는 귀족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소양과 예의범절 또한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있어 춤이라는 것은 여전히 생소한 것 중 하나였다.
왜냐면 그 춤이라는게 필수적인게 아니었으니까!
내가 짠 인생계획에도 내가 연회에서 다른 사람과 춤을 춘다는 것은 들어가있지 않았다. 반드시 해야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굳이 배우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꼭 연회에 참가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나는 구석이나 발코니로 들어가 얌전히 술이나 마실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경우가 다르다.
춤이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고는 하였지만 나는 이틀 뒤에 있을 연회의 주인공이었고 로맨스 판타지에서 언제나 연회의 주인공들은 춤을 췄었다.
내가 5년동안 데미안으로 살면서 이 세상의 장르가 정녕 로맨스 판타지가 맞는지 고민을 한 적이 있기는 하여도 역시 주인공인 엘레나와 엮여서 그런 것일까 나는 이번 연회에서 내가 그녀와 춤을 추게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요하임은 내가 사교계에 나가는 것이 처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말로는 그저 연습삼아 나가보라고 하였지만 에델바이스 공작가 휘하의 가신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약혼자인 내가 부족한 모습을 보인 다는 것이 내게 어떠한 영향을 줄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적어도 최소한의 기준은 맞추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춤, 이것만은 도저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만약 내가 춤을 추지 않는다고 한다면 약혼자가 곁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엘레나에게 춤을 신청하는 녀석들은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 아름다운 여자가 눈 앞에 있는데 춤 못추는 약혼자가 눈에 들어올리가 있나.
그리 다가오는 남자들을 그녀가 거절하는 것을 보는 것도 꽤 재미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역시 그녀에게만 의존하는 것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에게 의존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없애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켄이라면 충분히 경험이 많겠지."
지금 내가 이 성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만한 사람은 단 두명. 엘레나와 켄이 전부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녀에게 도와달라고 내가 직접 말하기에는 체면이 서지를 않는다. 스스로 해결하겠다고 결심 했으니 엘레나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일단 보류다.
그런 점에서 켄은 오랜 시간동안 크라우스의 집사로 지냈으며 여태까지 그가 나에게 해주었던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때 그는 젊은 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연회에 참가했던 경험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경험 많은 켄이라면 나에게도 분명 유의미한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종이 어디 있더라. 아, 여기 메로힘이었지."
켄을 부르기 위해 은종을 찾아보았지만 이곳이 항상 지내던 크라우스 영주성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나는 5년 동안 길들여진 습관에 자조하며 밖으로 나가 그를 찾아보려고 하였지만 그럴 틈도 없이 내 방에는 또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이번에 찾아온 손님은 지금 나의 고민을 단번에 해결하게 해줄 수 있는 이였지만 동시에 내가 지금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엘레나였다. 그녀가 어떤 생각으로 내 방에 찾아왔는지는 어제 했던 이야기를 통해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엘레나 죄송하지만 겨울성의 안내는 다음에 부탁해도 될까요. 지금은 켄에게 가야 할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렇게 나는 엘레나에게 말하고서 켄을 찾기 위해 방문을 넘...지 못했다. 어째선지 문을 막고 있는 엘레나는 웃으며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고 평소의 그녀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었던 당당함과 장난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 겨울성은 에델바이스 가문에게 버프라도 주는 장치가 있는 건가.
"고민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네요. 데미안."
엘레나의 말에 나는 흠칫 놀라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내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을 알아낸다는 것이 이제와서 별로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지금 엘레나의 모습은 꼭 내가 무엇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방금전 요하임이 내게 떠나면서 짓던 것과 똑 닮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도와드릴까요?"
그런 그녀의 말에 나는 거절할 생각도 하지 못한채 무의식적으로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