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스 판타지의 악당이 되었습니다-23화 (23/131)

< 23화 > 팔불출 (3)

아버지께서는 요하임의 행동에 크게 화를 내시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우리를 사르함에 계속 있게 하실 생각은 아니셨던 것 같다.

그 일이 있고 다음날 아버지께서는 기사단의 재정비와 시종들에게 마차를 준비하라 명하셨다.

요하임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그렇게 욕을 하셨으면서도 우리를 메로힘에 보내지 않으려고 하셨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하기야 우리가 출발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 대마법사 요하임 에델바이스가 직접 텔레포트로 이곳에 행차해 우리를 데려갔을 테니 말이다.

그래도 뒤끝은 있어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최대한 늦게 보내실 생각이신지 준비가 전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요하임이 말한 마지막 기한인 이틀째 되는 날 출발하라고 말하셨다.

사실 그것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찬성이었다.

남부에서 북부까지의 거리가 거리인 만큼 메로힘까지 가는데 적어도 며칠은 마차를 타야 할 것이다. 더군다나 크라우스에는 워프 게이트를 열 수 있는 수준의 마법사가 존재 하지 않았다.

요하임이 게이트를 열 수 있던 곳으로 가는데만 하여도 어느정도 시간이 걸릴텐데 요 며칠간 외출이 잦았던 탓에 곧바로 출발하였다가는 엘레나의 체력으로는 부담이 될 것이 뻔했다.

어제 나와 함께 사르함의 도심지를 걸을 때만 하여도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지 않았음에도 돌아가는 길에 졸음을 버티지 못하고 내게 기대어 잠들었던 엘레나다. 그러니 그녀에게 하루 정도는 휴식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번 메로힘에 가는데 사용할 마차는 우리 가문의 마차가 아닌 엘레나가 타고 온 에델바이스의 마차였다. 지나가면서 얼핏 보았는데 누가 마법사 가문 아니랄까 온갖 마법이 덕지 덕지 붙어 있어 현대의 장갑차를 연상케 해주었다.

엘레나의 말로는 주변 환경에 맞추어 마차 내부의 기온을 변화시켜 주고 언제나 최적의 상태를 유지케 해주는 마법도 걸려있었다고 했었나. 외부로 부터의 충격을 막기 위한 상위 방호 마법 또한 걸려 있다고 한다.

거기에 마차가 움직이면서 발생하는 흔들림을 내부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하게 하는 마법이라던지 뭔가 불편할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은 모두 마법으로 인해 해결되어 있었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더니 마법이라는거 정말 편해 보이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마법사 할껄. 왜 하필 무가(武家)의 자식으로 빙의를 해가지고 말이야.

무력적인 측면에서는 몰라도 세상 살아가는데는 정말 편해보이는 기술임은 틀림 없었다. 혹시나 해서 엘레나에게 물어본 결과 나에게는 마법에 대한 재능이 없다고. 아니, 애초에 기사는 마법을 다룰 수 없다고 한다.

기사가 걸어가는 길과 마법사가 걸어가는 길은 똑같은 '끝'을 향하지만 그 길은 서로가 닿을 수 없는 평행선과 같아 기사가 초인으로서 행하는 이적(異跡)을 마법사는 이루어 낼 수 없고 마찬가지로 기사 또한 마법사가 마법으로 행하는 이적을 따라할 수 없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원작에서도 신성력과 오러를 동시에 사용하는 인물은 있어도 마법과 오러를 동시에 사용하는 인물은 등장한 적이 없었다.

이 로맨스 판타지, 설정이 너무 빡빡한거 아닌가. 그 맛에 읽었던 것이기는 하다만.

결국 어릴적 부터 계속 꿈꿔왔던 마검사의 꿈은 접어야만 하였다. 옆에서 조용히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알폰스도 마법과 기사의 길은 양자택일이라고 하니 심히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고민해 봤자 어차피 너의 재능은 검사란다 알폰스.

원작에서의 알폰스는 뛰어난 기사였고 실제로 알폰스는 크라우스 가문의 남자 답게 검에 대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만약 알폰스가 원한다면야 마법을 배우는 것을 막지는 않겠다만 굳이 그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이 알폰스는 금세 마법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았다.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도 오랜만이네."

언제나 몸을 움직여 왔던 나도 오늘 하루 만큼은 수련도 공부도 모두 내려놓고 간만의 휴식을 만끽하고 있었다.

데미안으로 빙의한 이후 하루도 검을 놓은 적이 없었는데 막상 이렇게 스스로 검을 놓아보니 무언가로 부터의 해방감과 동시에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느껴졌다.

몸은 그 어느때 보다 편하다가 말하고 있는데 내 마음은 그렇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는 편이 나았던 걸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방을 나섰다.

검을 휘두르기 위해 연무장으로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렇게 가만히 앉아만 있다가는 괜한 생각들에 머리가 어지러워 질것 같아 머리를 비우기 위해 걷는 것이었다.

머리를 비우기 위한 산책은 영주성 본관을 한바퀴 도는 것 정도면 충분했다. 그렇게 산책을 마치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고 할때 나의 눈에 새하얀 빛 하나가 들어왔다.

마치 별빛과도 같던 그 빛을 찾아 고개를 올려보니 테라스에 나와 밤하늘을 보고 있는 엘레나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순백색 머리카락은 어두운 밤에도 마치 스스로 빛을 내고 있는 것 같이 반짝이고 있었다.

내일을 위해 오늘은 일찍히 잠자리에 들었다고 들었는데 중간에 잠이라도 깬 것일까. 그녀는 하늘하늘한 잠옷 차림 그대로 테라스에 서 있었다. 그런 옷차림 때문인지 어딘가 무방비해 보이는 엘레나의 모습에 나는 그녀를 향한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엘레.."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다 말을 멈추었다.

밤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내가 있는 이 세상과 동떨어진 곳에 있는 별과 같았다.

마치 나와는 다른 별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괜히 내가 말을 걸어 엘레나의 시간을 망치는 것은 아닐까 싶어 나는 기척을 죽인채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과는 달리 방으로 돌아가는 발을 멈춰 세운 것은 저 위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였다.

"왜 아무말도 하지 않고 빤히 보고만 있다 가시는 것인가요? 데미안."

어째서 말을 걸지 않았냐며 추궁하는 것 같은 엘레나의 말에 나는 뭐라 답해야 할지를 몰라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사람 얼굴을 수치심으로 터트릴것도 아니고 어떻게 그때의 감상을 그대로 그녀에게 말해 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엘레나는 자신의 말이 거리 때문에 닿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밑으로 내려가기 위해 난간 위에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놀라 서둘러 내력(內力)을 끌어올려 자리를 박차 올랐다.

그녀가 뛰어난 마법사라는 사실은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열여섯이라는 나이에 제5위계 티페레트(Tiphereth)에 오른 천재 마법사는 마법계 역사상 엘레나와 리처드 에르투웬 그 두 사람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엘레나인 만큼 3층 난간에서 뛰어서 내려오는 것 정도 쯤은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웠을 테지만 그녀가 입은 하늘하늘한 잠옷 때문인지 아니면 엘레나 특유의 불안감을 유발하게 하는 분위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내 몸이 먼저 움직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단 한번의 도약으로 엘레나가 서 있는 난간에 도달한 나는 서둘러 엘레나를 품에 안아들고는 테라스로 내려왔다.

평평한 바닥이 발에 밟히자 그제야 세차게 뛰던 가슴이 진정되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난간 위에 올라간 것이냐고 엘레나를 꾸짖으려 했던 마음도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는 머리에 의해 사그라들어 갔다.

괜한 행동을 한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 잠시나마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그래도 그녀를 향한 걱정에 나선 것이니 부끄러워 할 필요 없다고 속으로 되내이며 애써 뜨거워지는 얼굴을 가라앉혔다.

"데미안..."

품안에서 작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에 얼굴을 붉히며 버벅거리던 엘레나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호흡은 길게 늘어져 있었으며 작게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여태 내가 봐왔던 엘레나가 맞나 싶을 정도로 평온해 보였다.

이제 그만 엘레나를 품에서 내려놓으려 하였지만 그녀가 내 옷을 꽉 붙잡고 있어 하는 수 없이 나는 난간에 걸터 앉은채 엘레나가 손을 놓을 때 까지 계속 안고 있어야만 했다.

품에 안겨있는 그녀는 정말로 어딘가로 날아가버릴 것 같이 가벼워 나도 모르게 무심코 안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몇분을 있었을까. 엘레나가 나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빼자 나 또한 그녀를 천천히 바닥에 내려 주었다.

그제야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볼 수 있었다. 나와 눈을 마주한 엘레나는 기다렸다는 듯 내게 물었다.

"왜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냥 가려고 하셨던 거에요."

역시 이 질문을 피할 수는 없구나.

"별을 보는 것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아보여 방해하지 않으려 그랬던 겁니다."

이렇게 답하니 그녀도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그 대신 나의 옆으로 다가오더니 나와 마찬가지로 난간에 걸터 앉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위험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엘레나 정도의 마법사라면 떨어지는 와중에도 부유마법으로 몸을 띄울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내가 이곳으로 올라오지 않아도 되었던 것 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둘러 뒤로 넘어가지 않도록 붙잡았다.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녀가 만일 하나 이곳에서 떨어져 다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버리지 못했다. 엘레나는 자신의 뒤를 받치고 있는 내 팔이 마음에 들었는지 꼭 뒤로 넘어갈 것 처럼 기대며 장난을 쳐댔다.

"위험해요 엘레나. 그러다가 제가 팔을 빼버리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헤헤...당신이 그럴리가 없잖아요."

그야 그렇다만 저는 지금 당신의 행동 때문에 수명이 깎여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역시 지금의 엘레나는 평소와 좀 다르다. 사람이 바뀐것은 아닌데 뭔가 마음이 많이 풀어져 있다고 해야하나, 완전히 자기 기분따라 행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건지 그녀와의 거리가 평소보다 더 가깝게만 느껴졌다.

내 팔에 기댄 그녀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 보더니 별빛을 눈에 담고는 내게 말했다.

"데미안 그거 알아요? 메로힘과 사르함의 밤하늘은 똑같이 별이 빛나고 있지만 그럼에도 서로 조금씩 달라요."

우리가 서 있는 땅은 둥그니까 서 있는 장소에 따라 보이는 별자리와 보이지 않는 별자리에 미세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엘레나가 이렇게 말하니 그녀가 꼭 메로힘의 하늘을 그리워 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그녀처럼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똑바로 바라 볼 수 없었다.

다만 이런 생각은 이어지는 엘레나의 말에 그대로 씻겨져 나갔다.

"그러니 메로힘에 가면 그때는 제가 데미안에게 알려줄게요. 당신이 이곳에서 나에게 해주었던 것 처럼 나도 당신에게 메로힘의 하늘을, 내가 사랑하는 그곳을 알려주고 싶어요."

엘레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난간에서 내려와 내게서 등을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

"그, 그러면 이제 저는 내일을 위해 다시 들어 가야할 것 같네요. 잘자요 데미안."

평소와는 거리감이 많이 줄어들었다고는 하나 방금 전 말은 엘레나도 부끄러웠는지 밤눈이 좋은 나의 눈에는 그녀의 귀끝이 붉게 물들었다는 것이 훤히 보였다.

나는 침대 위에 누운 그녀를 향해 손을 살짝 흔들어 주고는 창문을 닫으며 자리를 떠났다.

방으로 돌아오자 마자 침대에 누운 나는 문득 내 방에 놓여져 있는 전신거울을 들여다 보았다. 그 거울은 창을 타고 들어온 달빛에 의해 반짝이고 있었는데 거울이 놓여진 위치 때문인지 침대에 누워있는 나의 모습 또한 온전히 거울에 비춰지고 있었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한번 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이불을 얼굴까지 올려 덮었다.

내가 보았던 그 거울 속 소년의 얼굴은 방금 전 엘레나와 마찬가지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

다음날 아침.

메로힘으로 갈 준비가 끝난 크라우스 가문의 영주성 앞에 한 남자가 공중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 누가 크라우스의 땅에서 저리 행동할 수 있겠냐만은 그는 상관없다는 듯 담담한 얼굴로 아들을 보내기 위해 밖에 나와있는 크라우스 백작을 보며 이리 중얼 거렸다.

"역시 너라면 이 날 출발 시킬 줄 알고 있었다."

"너..너 이 자식!!"

"네녀석 성격이라면 조금이라도 일찍 출발 시켜줄리가 없을 것 같았다. 정말이지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군."

"야! 요하임!! 너야말로 네가 올거면 일찍 좀 말을 하란 말이다!!"

"시끄럽다. 아서. 기사단까지 준비해준 것은 고맙다만 역시 내가 직접 데려가는 것이 낫겠다 싶어 내가 온거다. 불만 있냐?"

"그냥 나를 물 먹일려고 한거 잖냐!"

"잘 알고 있군."

에델바이스 가문의 문장이 그려진 마차 위에 내려온 그는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마차에 한번 툭 치더니 이내 허공에는 범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복잡한 마법 술식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지금 발동하고 있는 마법은 지정된 좌표로 사물을 이동시키는 「텔레포트(teleportation)」.

초월을 이루어낸 아서로서는 마법사가 아님에도 이 공간의 흔들림을 감지하고 또한 술식을 베어버릴 수 있었지만 만약 그러했다가는 저 마차가 무사하지 못할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가 검을 뽑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있는 텔레포트 또한 아서가 검을 뽑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요하임이 잘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것이었고 말이다. 그렇기에 요하임이 일부러 아서를 골리기 위해서 일부러 그런 것이기도 했다.

"그러면 나중에 연락하도록 하지. 잘 있어라."

마차를 감싼 백색 빛과 함께 요하임은 원래 이곳에 없던 사람 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정확히 이곳에서 에델바이스의 마차만을 가지고 사라진 것이었다.

그렇게 요하임의 마법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대기에 온전히 흩어졌을 쯤 아서는 크게 웃으며 자신의 아들을 불렀다.

"내가 말했지? 저 녀석 반드시 이렇게 갑자기 아침에 와서 이러고 사라질 거라고. 내기는 내 승리구나 아들아."

아서의 말에 화답하듯 성의 문이 열리며 분명 요하임과 함께 이곳에 없어야 할 데미안과 엘레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지의 친구분이라고 했을 때 부터 눈치챘어야 했는데...음, 엘레나. 그렇게 부끄러워 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그냥 저희 아버지와 똑같은 분이시라고 생각하시면 된다니까요."

그런 데미안의 말에 엘레나는 손으로 어제와는 다른 의미로 붉어진 얼굴을 가리느라 답하지 못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