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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판타지의 악당이 되었습니다-22화 (22/131)

< 22화 > 팔불출 (2)

피크닉에서 돌아온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한동안 보지 않고 있던 초록 책을 서랍장에서 꺼내었다.

그 책에는 엘레나와의 파혼 후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전 1년간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와 앞으로의 계획이 적혀있었는데 계속 엘레나와 약혼을 유지하게 되어버렸으니 자연스레 여기에 적혀있는 계획들 또한 모두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아니, 이건 잘된 일인가..."

여기에 적혀 있는 계획표는 굳이 비유해보자면 어린시절 만들었던 잘 짜여진 방학 시간표와 같았다. 아이의 자유는 단 일도 포함되지 않은 정말 철저하게 부모님의 바람대로 만들어진 시간표. 계획대로만 움직인다면 명문대는 반드시 들어갈 것 같은 그런 시간표 말이다.

실제로 나는 엘레나를 만나기 전 까지 그런 시간표 속에서 살아왔다. 누가 이렇게 하라고 명령한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나 스스로에게 미래에 대한 대비라고 말하며 나를 아무리 달려도 끝나지 않는 챗바퀴에 속에 스스로 밀어 넣었다.

그렇게 착실히 계획을 이행한 결과. 나는 처음 목표로 잡았던 크라우스 백작가의 후계자로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다.

다만 알폰스와의 일로 알 수 있듯 그렇게 한다 하여 내가 원하던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이 가문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고, 원작의 데미안처럼 파멸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이유는 모두 나의 가족과 함께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 였다.

그런데 그러기 위한 노력이 오히려 가족과의 관계를 소홀하게 만들어 버렸으니 '나'라는 인간을 더 나아지게 만들어 준다고 하더라도 더는 필요 없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 엘레나와 만난 이후로 이 녀석을 꺼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네."

책에 적혀 있는 내용은 단순히 내 시간 계획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설 속에서 일어났던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과 과거에 일어난 일들이 적혀있다.

크라우스 백작가는 평범한 백작가문이 아니다. 이 대륙에 하나 밖에 없는 제국의 원로가문이며 제국 건국 이전부터 남부의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던 명문가다. 작위가 백작일 뿐이지 대대로 승작을 거부해 왔을 뿐 다른 백작가와 동일시 해서는 안된다.

그런 명문가의 후계자로서 나는 어릴 적 부터 대륙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정보들은 내가 책을 통해 얻은 정보에 대한 믿음을 준다.

모든 일에는 인과관계가 존재한다.

'소설 속 몇장 몇화에 일어나는 일이 지금 여기서 발생한 일 때문에 이렇게 되는 구나' 라는 것을, 나는 그것에서 이어지는 미래를 알고 있으니 내게 들려오는 정보들은 내가 알고 있는 미래를 확신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 책을 보면서 미래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안정감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엘레나와 약혼을 이어가는 것으로 끝나버렸다.

엘레나 에델바이스와 이어지는 데미안 크라우스의 이야기는 소설 속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고 내가 알지 못하는 미래였기에 나는 더 이상 이 책에 적혀 있는 내용으로 안심할 수 없었다.

책을 한번 훑어본 나는 책을 다시 원래 있던 서랍장에 돌려 놓았다.

아무리 그래도 엘레나와의 약혼이 내가 알고 있는 미래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떨쳐내어 주지는 못했다. '미래' 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는 무겁다. 설령 불확실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섣부르게 판단해서는 아니 되었다.

그렇게 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는 책을 찢지도 태우지도 못한채 다시 서랍장에 넣어둘 수 밖에 없었다.

이제 여기에 대한 생각은 그만하도록 하자.

불확실한 미래에 얽메인 다는 것이 얼마나 미련한 짓이라는 것을 요 며칠간 제대로 알 수 있지 않았나.

엘레나와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다.

단순히 헤어지게 될 사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그 거리가 너무 가까워져 버렸다. 처음에는 쉽게 떠나보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고작 며칠 같이 있었다고 이제는 보내기 싫어지다니 더군다나 나는 그녀의 곁에 있는 내가 겪을 미래 또한 알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결국 그녀를 조금이라도 내 옆에 붙잡아두기 위해 아버지께 이실리아관을 넘겨달라고 말까지 해버리고 말았다만.

나의 그 행동이 그녀의 곁에 있기 위해 지옥에 스스로 걸어들어가는 짓이나 마찬가지 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상하게도 내 마음 속은 사이다를 들이 부은 것 마냥 상쾌하기만 했다. 이성과 감정의 괴리감에 나는 내 머리를 톡톡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진짜 내 머리가 어디 이상하게 변했나."

무슨 정실 자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히로인도 아니고 내가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복잡해지는 내 머리를 비우기 위해서 나는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침대에 누워 오늘 있었던 일들을 다시 한번 회상해 보았다.

웃고 있는 알폰스와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니 머리가 조금 정리되는 것 같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우리 가족에게 이런 분위기가 나오는 것은 처음 이었으니 말이다. 내가 진정으로 가족의 행복을 바랬다면 이런 쪽으로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이제와서 이 모습을 되찾은 것을 생각하니 아쉬우면서도 다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에 기뻤다.

그렇게 내 기억의 필름은 돌고돌아 꽃밭에 앉아 있는 엘레나를 비춰주었다.

우리 가족과 나란히 앉아 있는 그녀는 웃고 있었지만 어째선지 그 얼굴에는 작은 실망감 또한 함께 비쳐졌다. 그 이유를 깨닫는 것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곧장 감고 있던 눈을 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뭔 짓을 한거지."

생각해 보면 그때 엘레나와 한 약속은 데이트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런 약속에 가족을 끼워 넣다니 제아무리 가족관계 개선에 생각이 몰려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건 누가봐도 내 잘못이었다.

엘레나가 착하기에 웃으며 따라갔던 것이지 누가 데이트에 다른 사람들이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지만 속으로는 내심 실망했을게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약간 힘이 없어 보였는데 그게 이것 때문이었나.

그리 생각하니 가슴에 화살 하나가 박히는 것 같다.

"지금 당장 사과를..."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어버렸다. 지난번에 그녀가 내 방에 온것은 예외로 친다 하더라도 지금은 모두가 잠들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인데 그런 늦은 시간에 그녀의 방에 내가 찾아가는 것은 아무리 약혼자라 하여도 선을 넘었다.

그리고 단순히 사과 하나로 그녀가 용서해 줄지도 의문이다. 아니, 엘레나 그녀라면 그럴지도. 다만 내 마음은 편하지 않을 것 같다. 적어도 그때 약속했던 것을 이루어주는 것이 가장 좋지 않을까.

그렇게 고민에 빠져 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는 나의 눈에 책 한권이 들어왔다.

"이거다."

아무래도 방법을 찾은 것 같다.

***

내가 방에서 찾아낸 책은 사르함의 도시 계획도였다.

그 책을 찾아내자 나의 머리는 순식간에 해답을 만들어내었다. 나는 계획도를 펼쳐 그녀와 어디로 가야할지 이동경로를 만들기 시작했다.

사르함은 남부에서 손 꼽히는 대도시 중 하나로 잘 발전된 만큼 거리의 풍경 또한 아름답다고 평해도 될 정도다. 내가 엘레나의 대해 아는 정보는 제한되어 있지만 최대한 그녀가 흥미를 가질 만한 것들 위주로 갈 곳을 정해 놓았다.

그리고 내가 밤을 새운 것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나와 함께 거리를 걷는 내내 그녀의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세계에는 과학이 발달한 것이 아니라 마법이 발달한 세계였지만 발전한 분야가 다르다 하더라도 내게도 익숙한 먹거리가 몇몇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솜사탕이었는데 그녀에게 솜사탕 하나를 사서 건내주자 그녀는 손으로 솜사탕을 톡톡 건들이더니 쭈욱 뜯어 입에 한번 넣고는 사르르 녹아 사라지는 솜사탕과 그것이 남긴 단맛에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팔던 사람 말로는 아직 사르함 외에 어디를 가본 적이 없다고 하던데 그 때문인가. 메로힘에는 아직 솜사탕이 없던 모양이다.

물론 나는 단것을 먹지 못하기에 내 몫은 사지 않았다. 엘레나가 건내기에 한움큼 먹긴 하였지만 진한 설탕 맛에 나는 차마 얼굴을 찡그리지는 못하고 복잡 미묘한, 괴상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것이 또 재밌었던 모양이다만.

"데미안. 당신 얼굴 이상해요."

"이건 엘레나가 저에게 그걸 먹여서..."

"음. 어제 있던 일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하세요."

"그거는 아까 마차 안에서 다 푸신 것 아니었습니까. 제 볼도 꼬집으셨으면서."

"그건 데미안도 저에게 똑같이 했잖아요. 흐으음? 데미안 솜사탕 한번 더 드실래요?"

"됐습니다."

오늘은 평소와 달리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어 버렸다. 내가 한짓이 있으니 얌전히 당하고만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게 솜사탕을 먹인 것은 참을 수 없었다.

그 값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엘레나의 볼을 열번 정도는 주무르는 것으로 받도록 하자.

그렇게 우리는 거리를 돌아다니다 드디어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공방에 도착했다. 엘레나는 갑자기 가구를 사러 온것에 의아해 했지만 그녀가 앞으로 지낼 이실리아관의 있는 이전 물건을 그대로 쓸 수 는 없었다고 설명하자 그녀도 납득하는 것 같았다.

다만 나도 엘레나도 한가지 잊고 있던 사실이 있었다.

"아."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는 엘레나의 모습에 무슨 일이 있는가 하였더니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연락...안했어요."

"네?"

"아버지께 연락하는 거 잊고 있었어요..."

엘레나의 말에 나는 머리에 망치로 한대 얻어 맞은것 같았다.

원작의 엘레나가 아카데미 입학 전까지 크라우스 성에서 지냈다는 묘사가 있어 나는 그동안 엘레나가 이곳에 지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요하임 에델바이스 공작.

엘레나의 아버지이자 나 또한 한번 뿐이지만 만나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현재 일곱 마탑 중 하나인 여명의 탑의 탑주로서 마법실력이 매우 뛰어난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나는 거기에 한가지 사실을 더 알고 있다. 그가 어마어마한 팔불출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원작에서의 엘레나가 아버지에게 하는 연락을 빼먹었을리 없었다. 그랬다가는 그대로 요하임이 이곳으로 날아와 데미안을 보고 파혼을 선언했을 테니 말이다. 아마도 데미안의 감시하에 연락을 취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내가 원작의 데미안과 달라서 발생한 일이다.

그리 생각하니 되려 안심이 되었다. 나는 원작의 그 녀석과 달리 구릴게 하나도 없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엘레나는 사르함에 계속 있고 싶습니까."

"네? 어, 그,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내 말에 얼굴을 붉히는 엘레나. 그녀의 반응에 잠깐 머리가 띵하더니 그제야 내 말이 무슨 뜻으로 들렸을지 생각해내었다. 워낙 정신이 없다 보니 마음 속에 두고만 있던 말이 그대로 튀어나와 버렸다.

"아, 아니 이게 아니라...잠시만요. 그, 아카데미에 입학식전 까지 이곳에서 지내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묻고 싶은거였습니다. 그동안 당신이 어디로 떠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기에 엘레나가 메로힘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저도 잊고 있었나 봅니다."

나의 말에 그녀는 잠시 멍하니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웃으며 답했다.

"물론이에요. 그야 저는 이제 이실리아관의 주인인걸요. 그러니 앞으로도 사르함에 있는 것이 맞겠죠?"

어쩐지 나의 동의를 구하는 것 같으면서도 앞으로 이곳에 있겠다는 그녀의 답에 나는 서둘러 손을 올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렸다.

"그렇다면...일단 오늘은 돌아가도록 하죠. 돌아가서 공작님께 말씀드리도록 해요."

그녀는 내 손을 잡고는 웃으며 알겠다고 답했다.

설마 원작에서도 그녀를 크라우스 성에 1년 동안 있게 해준 요하임인데 엘레나가 부탁한다면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연락은 이제부터라도 자주 하면 되는 것이고.

그렇게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풀리게 될것이라 생각하며 우리는 마차에 올라 영주성으로 돌아갔다.

성 안으로 들어가자 마자 수정구를 들고 계시는 아버지를 만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한채 말이다.

아버지가 들고 계시는 수정구에는 엘레나도 나도 잘 알고 있는 얼굴이 비춰져있었다.

[엘레나. 오랜만이구나.]

"아, 아버지..."

수정구에 비치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요하임의 얼굴에 엘레나를 얼마나 생각하는지는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다만 그 따뜻한 목소리는 어딘가 약간 화가 나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였다.

[일단 메로힘으로 돌아오도록 해라.]

"네?"

갑자기 돌아오라는 요하임의 말에 엘레나도 나도 심지어 수정구를 들고 계시고 있던 아버지 또한 당황스러워 했다.

"야! 다짜고짜 무슨 말을 하는..."

[넌 입 다물어라. 물론 거기 서 있는 네 녀석도 같이 와라. 내가 할 말은 이것으로 끝이다. 이틀내에 출발했다는 소식을 못전할 경우 내가 직접 이곳으로 와서 엘레나와 함께 데려가도록 하지. 이상.]

"뭐? 야! 야 요하임!!.....이 자식이 지 할 말만 하고 끊어버려?!!"

아버지는 수정구를 연신 두드리며 요하임을 계속 불러댔고 나와 엘레나는 폭풍처럼 지나간 요하임의 모습에 아무말도 하지 못한채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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