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동생은 누나가 필요합니다. (5)
"따끔하네...."
나는 핏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오른팔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날을 세우지 않은 가검을 들고 하는 대련이라 할지라도 그 검을 들고 있는 이들이 나뭇가지로 고목을 베어버리는 실력자들이었으니 자잘한 상처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그 경우가 달랐다.
흘러 넘치는 감정의 흐름에 따라 검을 휘두르다 보니 원래의 실력은 발휘 되지 않고 기술이 아닌 육체 본연의 힘으로만 휘두르는 검이 되었다.
하지만 이 대련의 목적은 애초에 기술의 향상을 위한 것에 있지 않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감정들을 모조리 밖으로 내보내는 것.
단지 그것 하나만을 생각하고 하였기에 검술의 완성도는 신경 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아버지도 알고 계셨기에 평소라면 호통치실 엉망인 검로(劍路)들을 묵묵히 받아 주셨다.
속을 곪아내고 있던 감정들을 쏟아내기 시작하자 계속해서 가슴을 무겁게 만들고 있는 돌을 내려 놓은 것 같았다.
만약 혼자서 검을 휘두르며 이 감정을 풀어내고자 했다면 절대 지금과 같은 후련함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속에 있는 응어리를 풀어낼 때 누군가 그것을 들어 주었으면 한다.
혼자서 외쳐대는 것은 스스로를 그 감정의 골짜기에 떨어뜨릴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어주지 못한다.
기교라고는 하나도 없는 투박한 검은 검의 정점에 오른 검사의 간단한 손놀림 만으로도 튕겨져 나간다.
그럼에도 나는 검에 감정을 담아 다시 한번 휘둘렀다.
그렇게 몇번을 반복하자 결국 내 손에 들린 검은 아버지의 몸에 배어있는 예리한 검기(劍技)를 버티지 못하고 부러져 버렸다.
부러진 검조각이 오른팔을 스치며 땅에 박힌다.
검조각이 스쳐지나간 자리에 얇은 혈선이 그려지며 핏물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지만 아프기는 커녕 오히려 개운할 따름이다.
부러진 검.
그리고 자신의 팔에서 흘러나오는 피.
이 두가지를 보자 그제서야 제정신이 들기 시작한다. 검을 놓아버린 나의 모습에 아버지의 온정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화는 풀렸느냐?"
"네..."
"미안하구나. 내가 너무 짧게 생각했어. 너도 알폰스도 나이에 맞지 않게 의젓하다 생각해 신경을 써주지 못한 내 잘못이야. 내가 먼저 너희에게 다가갔어야 했는데. 미숙한 아버지라 미안하구나."
아버지의 말씀에 나는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나 또한 알폰스에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우리 부자가 좀 서로 간의 대화가 없는 편이기는 하죠."
분명 처음에는 지금과 같지는 않았다. 어머니가 계실 때만 해도 무언가 문제가 있으면 이리 검을 부딪치며 투닥거리기보다는 대화로 해결을 많이 했으니.
우리 둘 간의 대화가 줄어든 것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이후의 이야기였다. 언제나 가족 간의 대화는 어머니께서 주도하셨으니 말이다.
전생의 기억을 가진 나는 별다른 말썽 없이 커갔고 알폰스 또한 다른 어린아이들과는 달리 조용하고 착한 아이로 자랐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 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걸지도 모르겠다.
그 거리가 가까웠기에 서로를 믿는다는 생각 하에 방치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 대화를 해보려고요. 대련 감사합니다. 아버지."
머리를 아프게 했던 감정들을 모조리 뱉어내니 이제 자신의 대한 혐오감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동생에게 더 나은 형이 되어야 겠다는 생각만이 내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연무장을 나온 나는 곧장 방으로 돌아와 옷장 옆에 놓여진 전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아까전 까지만 하여도 굳어있던 얼굴은 펴져 부드러운 미소를 띄고 있었다. 다만 새하얗던 흰색 소매는 팔뚝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인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고개를 돌려 창가를 바라보니 하늘은 어느세 어두워져 달과 별빛만이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지금 이 시간이면 켄도 마리아도 방으로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다른 시종들도 잘 준비를 하고 있을테니 아무래도 내가 직접 처리를 해야겠다.
"으아..귀찮다...붕대나 상처약을 내가 어디다 두었지."
고위 귀족가 도련님으로 빙의를 하고 난 후 생겨버린 고질병이다.
몇년간 시종들이 왠만한 일들을 대신해 주니 원래라면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들을 스스로 해결할 생각을 하지 않고 시종들을 불러 해결할 생각이 먼저 들어 버린다.
고작 5년 밖에 되지 않은 빙의가 다섯배나 되는 소시민으로서의 25년치 삶을 눌러버리다니 정말 무서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나는 외투를 벗고는 피가 나고 있는 소매를 걷어낸 후 이리저리 방을 둘러대며 의약품들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는 붕대와 상처약.
잘 생각해 보니 내 방에 그런게 있을리 없었다.
'아, 피난다.'
'으아아아!! 도련니이임!!! 당장 포션이랑 소독하게 성수도 가져와!!'
'아니, 이거 그냥 종이에 베인거...'
'그것도 덧나면 큰일나요!!'
자잘한 상처 하나만 나도 주위에 있는 이들이 온갖 호들갑을 떨어대며 움직이는 탓에 굳이 약을 구비해둘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아버지와의 대련을 제외하면 그리 자주 다치는 편도 아니었고. 그리고 언제나 시종들을 부를 방법도 있었으니 더더욱 그런 생각을 가질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내 방 책상 위에 놓여져 있는 은색 종.
이 종을 치면 어떤 시간대에 불구하고 시종들을 부를 수 있지만 지금은 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것 때문에 괜히 성이 부산스러워 지면 십중팔구 엘레나에게 까지 소식이 들어갈 것이 분명했다. 아마 그녀라면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내게 달려올지도 모른다.
자잘한 상처에 불과하기는 하나 굳이 그녀에게 내가 다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밖으로 나가 포션을 찾아내는 수 밖에 없는 건가. 포션이나 그런 물품들은 기사단에서 훈련할 때 마다 쓰이는 물건이기도 하니 어느 연무장이나 근처 창고 하나만 뒤져도 나올것이다.
"젠장. 그러고 보니 나 아까까지 연무장에 있었지. 그냥 그 때 포션 하나 집어 먹을걸 그냥 여기로 와가지고...."
짐 하나 덜어냈다는 생각에 아무생각 없이 방으로 돌아온게 실수였다. 대체 어떤 바보가 지 다친것도 잊어버리냐.
그렇게 방을 나서려고 할 때 쯤 문 너머로 어떤 냄새가 풍겨왔다. 그 냄새가 무엇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내가 평소에 즐겨먹는 고기 스튜의 냄새였으니까. 아무래도 오늘 있을 저녁 식사에 참가하지 못했으니 밥을 먹지 못한 나를 위해 누군가 내 방에 식사를 가져오는 것 같다.
들려오는 발 걸음 소리가 익숙하지 않은 걸 보니 켄이나 마리아는 아닌 모양이다. 아무래도 다른 시종들에게 미리 말을 해논 것 같다. 덕분에 큰 소동 없이 포션과 붕대를 받아낼 수 있을 것 같다.
똑똑-
"들어오게."
짧은 노크소리가 들리자 나는 밖에 있는 이에게 곧바로 들어오라 말했다.
"오늘 저녁은 고기 스튜인가? 문 너머로 냄새가 풍겨오더군. 그런데 방금 와서 미안하지만 자네 붕대랑 약 좀 가져와....."
우선 상처를 보더라도 당황하지 않도록 자연스래 말을 걸어보았지만 막상 방에 들어온 이의 얼굴을 보자 당황하게 되는 것은 나였다.
시종이라 생각했던 이는 내가 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엘레나였다.
"엘레나? 어째서 엘레나가 여기를?? 아니, 잠깐만! 일단 나가 주..."
"팔..."
내 팔의 상처를 보며 작게 읊조리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오늘 아침 그녀와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단지 약혼에 대해 조금 더 생각을 해보자고 말했을 뿐인데 울어버리는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런 그녀가 내 팔의 상처를 보면 어찌 반응을 할지 몰라 숨기려던 것이었는데 지금 모습을 보니 그리 쉽게 넘어가려고 하지는 않을 것 같다.
"왜, 왜 이렇게 다치신 건가요? 설마 아버님께서..? 아버님 그때 식사 자리에서의 말은 그저 농담인 줄 알았는데 정말로...."
"에, 엘레나? 이건 그, 제가 실수 해서 그런 거니까. 그만! 그만 진정하세요."
엘레나는 내 상처를 보고 흥분했는지 팔에서 흘러 나오는 피를 손수건으로 닦아 주면서 계속 해서 뭐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더니 포션을 가져오겠다며 방을 나가버렸다.
"아니, 우리집에 포션이 어디있는 줄 알고..."
"데미안! 찾았어요!!"
"네??"
놀랍게도 엘레나는 내 방을 나간지 몇분 지나지 않아 포션을 가져왔다. 개인적으로 챙겨온 것인가 했지만 포션의 병에 새겨져 있는 문양은 이곳 사르함에서 우리 크라우스와 전속 계약을 맺은 공방의 문장이었기에 더더욱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작 그 포션을 가져온 엘레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내 상처에 포션을 바르고 있었다.
붉은색의 포션이 상처 부위에 닿자 상처에서 흘러나오던 피가 멎기 시작했다. 이곳이 아무리 검과 마법의 판타지가 있는 곳이라고는 하지만 포션 한번에 상처가 완벽하게 치유되지는 않는다.
그런 것은 신들을 믿는 성직자들이 행하는 기적에 가까우며 포션은 상비약, 피로 회복제 등 복용자의 회복을 도와주는 아이템에 가깝다. 그래도 곧바로 피가 멎어버리는 것이나 자연적인 회복능력을 향상 시켜준다는 것 만으로도 굉장한 것이었지만.
그녀는 혹여 상처가 덧날까 싶어 내 피를 닦아낸 손수건에 「클린(clean)」을 걸고는 정성스럽게 상처 부위에 손수건을 묶어주었다. 헌데 가까운 거리 탓일까. 그녀의 부드러운 숨결이 내 살갗에 그대로 닿아왔다.
"엘레나 저기..."
집중하고 있는 탓에 안들리는 것인지 나는 잠깐 고개를 숙여 열심히 손수건을 묶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다시 한번 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엘레나?"
"네? 데미안 잠깐만요. 이거 생각보다 어...흐에에에에?!!"
"너무 쎄게 묶었어요."
내 물음에 고개를 든 그녀는 코앞까지 다가온 내 얼굴에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쳐버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진지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지며 당황해 하는 모습은 절로 내 입꼬리를 자극한다.
나는 엘레나가 열심히 묶고 있던 매듭을 조금 느슨하게 만들고는 그녀에게 다시 팔을 건내었다.
"이번에는 조금 살살 묶어주실래요?"
"에..아, 네."
그녀가 다시 내 팔에 매듭을 묶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조금 풀어진 얼굴에 손길도 지나치게 힘이 들어갔던 처음과는 달리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렇게 잠시후 내 팔에는 그녀의 손수건으로 된 나비가 하나 앉게 되었다.
"예쁘네요. 고마워요. 엘레나. 그런데 엘레나가 왜 제 식사를..."
"그, 그게..."
나는 그녀가 가져온 트레이 위에 올려진 것들을 보았다. 하나는 내 식사로 보이는 고기스튜와 다른 하나는 단거를 먹지 못하는 나와 맞지 않은 디저트들이었다. 내가 단것을 먹지 못하는 것은 이제 그녀도 알텐데 저게 왜 있을까.
나는 싱긋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엘레나도 내 미소의 의미를 아는지 얼굴을 더욱 붉혔다. 그런 엘레나의 부끄러워 하는 얼굴은 장난을 치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나는 아무말 없이 그녀를 향해 조금씩 거리를 좁혀 갔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내 얼굴은 어느새 그녀의 코와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다만 이번에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의 얼굴이 매우 빨개졌지만 이전처럼 뒤로 도망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 꼭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눈을 감자 나는 다가가는 것을 멈췄다. 대신
뾱-
"헤엣...?"
그녀의 말랑말랑해 보이는 볼을 향해 손가락을 콕 찔렀다. 역시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말랑말랑하다. 알폰스의 볼따구 그 이상이야.
엘레나는 눈을 뜨고는 이게 지금 무슨 일인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엘레나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냥 꼭 한번 만져보고 싶었어요."
엘레나는 그 말에 잠깐동안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이내 제정신을 차리자
"뎨미아아아앙!!!"
하고 힘껏 내 이름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