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동생은 누나가 필요합니다. (4)
저녁 시간이 다 되어 갈 때 오늘도 있을 만찬에 엘레나는 방에서 옷가지를 단정히 하며 때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엘레나의 방으로 들어온 데미안의 전속 집사 켄이 그녀에게 알려준 것은 데미안이 만찬에 불참한다는 이야기였다.
"오늘 저녁에 있을 식사에 가주님과 데미안 공자님은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해 오시지 못하게 되셨습니다."
"아. 그렇군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켄."
기다리고 있던 데미안과의 저녁 식사가 취소되었다는 소식에 엘레나는 아쉬웠지만 데미안과 크라우스 백작이 오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이 갔기에 마냥 아쉬워할 수만은 없었다.
오늘 이실리아관에서 있던 일들을 데미안이 그냥 넘어갈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이실리아관을 떠올리니 절로 거기에서 만난 어린 소년. 알폰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크라우스 백작을 똑 닮은 데미안과는 달리 이실리아관의 주인이었던 오늘 본 초상화 속의 여인 아르웬 크라우스를 닮은 그 어린 아이의 얼굴이 말이다.
알폰스 크라우스.
그 아이는 데미안과 마찬가지로 이전의 삶에서도 엘레나와 인연이 닿아 있는 아이였다.
첫번째 삶에서는 데미안의 비틀린 소유욕 때문에 같은 영주성에 지내면서도 자주 마주쳐 본적이 없었지만 이후 데미안과의 파혼 후 시간이 흘러 엘레나는 어떤 사건으로 인해 장성한 알폰스와 다시 마주하게 된다.
그때의 알폰스는 영웅이라 불러도 모자름이 없는 남자였다.
터전을 잃은 백성들을 한명 한명 만나가며 독려하고 크라우스라는 가문의 후계자라는 위치에 있음에 몸을 사릴만도 한데 무너지고 있는 남부전선의 최전방으로 달려가 직접 군대를 진두지휘했다. 그때 당시 나이가 고작 열일곱에 불과했다.
당시 상황이 아무리 어린아이의 손이라도 빌려야 할 정도로 급박하였다고는 하지만 그 어린 나이에 수만의 목숨을 짊어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데미안이 행적을 감춘 뒤 비어진 후계자 자리를 채우기 위한 부담감 또한 막중하였으리라. 그런 여러한 악조건 속에서 스스로 일어난 알폰스는 영웅이 맞았다.
하지만 데미안이 아닌 '그'가 그 자리를 대신 함으로써 알폰스 크라우스의 이야기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원하신다면 방으로 식사를 가져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켄의 말에 엘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알폰스 도련님은 어제와 같은 곳에서 식사를 하시나요?"
"네. 그렇습니다만."
"그렇다면 저도 그곳으로 가야겠네요. 저는 크라우스의 약혼녀로서 미래에 이곳의 안주인이 될 몸. 가족 간의 식사 자리에 빠질 수는 없죠. 무엇보다 아직 어린 도련님을 혼자 있게 놔둘 수는 없잖아요."
그런 엘레나의 미소 담긴 말에 켄은 잠시 넋을 잃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그에 화답하듯 작게 웃으며 엘레나에게 답했다.
"그렇지요. 아가씨께서도 이제 크라우스가 되실 몸이시니. 제가 실언을 했군요. 죄송합니다. 식사는 6시 종이 울리기 전에 준비가 끝날테니 종이 울리고 움직이시면 됩니다."
켄이 방을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6시 정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성에 울려 퍼졌다.
엘레나는 이곳에 하루 밖에 지내지 않은 사람 같지 않게 곧장 길을 찾아내며 식당으로 향했다. 주인을 보필하기 위해 하루 종일 성의 구조를 파악하려 노력하던 헤일리는 자연스레 길을 찾아내는 똑똑하신 자신의 주인의 모습에 씁쓸할 따름이었다.
문 앞에 도착하자 헤일리가 노크를 두어번 하고는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어제와 같은 식당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날과는 달리 상석은 비어 있었고 엘레나의 자리의 옆에 있어야 할 이도 지금은 이 자리에 있지 않았다. 오직 알폰스 만이 쓸쓸히 자리를 지키며 자리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식당에 들어오는 엘레나의 모습을 보자 알폰스의 얼굴에 반가움이 깃들었다.
엘레나의 기억 속에 있던 알폰스 크라우스를 떠올리기에는 눈 앞의 소년은 외로움을 많이 타는 어린아이였다. 데미안이 알폰스 때문에 백작과 이야기를 하러 갈 것이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그 시기가 너무 빨랐다. 공교롭게도 빠르게 일을 해결 하고 싶어 움직인 데미안의 행동이 또 다시 알폰스를 혼자 놔두게 만들어 버린거다.
하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엘레나가 있었다.
"좋은 저녁이에요. 알폰스 도련님."
"아! 네. 좋은 저녁이에요. 그,..엘레나...누..누나?"
엘레나를 뭐라 불러야 할지 몰라 고민하던 중에 나온 '누나'. 알폰스는 자신이 말하고도 혹여 실례가 되지는 않았을까 곧바로 엘레나의 얼굴을 살폈지만 엘레나는 오히려 그 호칭이 마음에 든다는 얼굴이었다.
"누나라... 좋네요. 저에게는 오라버니가 한명 있지만 동생은 없었거든요."
"정말 누나라 불러도 괜찮아요?"
"물론이죠. 도련님은 데미안의 동생이니. 저는 그의 약혼녀, 아직 정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알폰스. 우리는 가족이에요."
엘레나의 가족이라는 말에 알폰스는 기뻐하였지만 이내 비어있는 엘레나의 옆자리를 보자 알폰스의 얼굴은 다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지금 이 자리에 크라우스 백작과 데미안이 없는 이유를 알폰스도 알고 있었다.
알폰스는 고개를 숙이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엘레나에게 말했다.
"죄송해요. 원래라면 형님도 아버지도 이자리에 계셨을 텐데. 괜히 저 때문에 누님께까지 폐를 끼치게 됬어요..."
대륙 제일의 검사 중 한명인 아버지 아서 크라우스. 아직은 어리지만 후계자로서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뛰어난 형. 데미안. 그런 둘 밑에서 자란 알폰스는 과연 자신감이 넘칠 수 있을까.
알폰스가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엘레나가 겪어왔던 미래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알폰스의 능력이 부족한 자신감을 채워주기에는 주변인들의 능력이 너무나도 뛰어났다. 더군다나 데미안은 크로멜 가의 라인하르트와 더불어 대륙 최연소 소드 마스터가 되어 버리니 그 간극은 더욱 멀어져만 갔다.
엘레나가 알고 있는 미래의 알폰스도 그러한데 지금 이 미숙한 아이는 더 했으면 더 했지 그보다 덜 하지는 않을 것이다.
엘레나는 알폰스의 사과를 받지 않았다. 대신 알폰스에게 한가지 질문을 던졌다.
"도련님은 데미안에게 서운한게 있나요?"
"네? 아니요! 형님께 서운한게 있..."
"그렇다면 왜 오늘 이실리아관에 있을 때 데미안에게 대답하지 못했나요?"
"저는..."
다시 말을 흐리려는 알폰스에게 엘레나는 말했다.
"알폰스,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서로 이해 할 수 없어요. 대화란 다른이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에요. 언제까지고 가만히 상대가 먼저 알아주기를 기다리다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채 끝나 버리고 말거에요."
말을 하지 않으면 다른 이는 모른다. 그것이 엘레나가 이전의 삶을 통해 절실히 깨달은 것 중 하나였다. 알폰스는 가지고 있는 자신감이 없다. 그렇기에 형에게, 아버지에게 바라는 것이 있음에도 그것을 쉽사리 말하지 못한다.
엘레나의 말이 알폰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는 모른다. 다만 지금 알폰스가 한가지 결심을 했다는 것은 확실했다.
엘레나의 따스한 목소리가 알폰스의 귀에 들려온다.
"도련님. 서운한것이 있으면 마음에 쌓아두고만 있지 말아요. 도련님은 아직 어리니 응석부리고 싶으면 응석부리면 되요. 데미안이 자신의 동생의 응석하나 받아주지 못할 사람인가요? 그렇다면 실망인데..."
"아, 아니요! 형님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그냥 제가 말을 하지 않아서...그래서 몰랐기에 그랬던 거에요."
기본적으로 알폰스 크라우스는 선인(善人)이다.
아직 어리지만 생각이 깊은 알폰스가 그에게 말을 하지 못한 이유는 단지 자신감이 없어서 만이 아닌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형에게 굳이 자신에 의한 짐을 더해주기 싫어했기 때문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을 하지 않고 혼자만 품에 안고 가는 것이 알폰스에게도 데미안에게도 좋은 일일 리 없다.
실망할거라는 말에 곧바로 부정하는 알폰스. 엘레나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는 듯 웃으며 알폰스의 말에 긍정했다.
"물론 알고 있어요. 단것도 못 먹는 주제에 시종들에게 받은 캬라멜을 버리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 그렇게 속 좁은 사람일리 없잖아요. 그러니 알폰스, 형을 믿고 그에게 말해줘요."
이야기를 끝낸 엘레나가 스푼으로 앞에 있는 스프를 한숟갈 떠서 입에 넣는다. 약간 식은 스프의 미지근한 온도는 먹기 적당한 상태로 변해 있었다.
"너무 식기 전에 그만 먹도록 할까요?"
엘레나의 말에 알폰스가 웃으며 답했다.
"네."
식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
기쁘다.
오늘 있었던 알폰스와 데미안의 일은 단순히 형제간의 갈등을 넘어서 자신에게 의미가 깊은 일이었다. 이전의 삶에서 '그'가 데미안으로 있을 때 파혼으로 인해 비어버린 1년의 시간에 새로운 이야기가 들어섰다는 것이었으니까.
파혼 후 자신이 그를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은 1년후 입학할 아카데미에서의 일이 었으니 말이다. 지금은 파혼도 하지 않았고 천천히 그의 삶에 녹아들어가고 있다.
자신이 알고 있지 못했던 그의 대한 일들을 곁에서 알아 간다는 것이 행복하다. 그가 아르웬 크라우스를 어떻게 생각했고 아버지, 동생과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자신이 그의 옆에서 함께 겪어가고 있다.
그는 알고 있을까? 그가 알고 있는 미래와 운명이라는 것은 이미 자신의 존재로 인해 백지나 다름 없어 졌다는 것을.
우리에게 있을 미래에 불행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오늘 그랬던 것 처럼 내가 그렇게 만들것이다.
"흠흠흠~"
콧노래를 부르며 그의 방을 향해 걸어간다.
손에는 다과와 아직 저녁을 먹지 못한 그를 위한 식사가 들려있었다. 원래라면 시종이 전해주어야 했을 것이었지만 그와 이야기 하고 싶은 마음에 내가 대신하여 들고 가고 있다. 아직 그의 방에 가본적이 없었기에 헤일리가 내가 왜 그 위치를 알고 있는지 궁금해 했지만 그것은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다.
단지 식사를 전해주러 가는 것 뿐이지만 마치 꼭 한밤 중에 밀회를 위해 나온것 같은 느낌에 마음이 조금 들뜨는 것은 사실이었다.
똑똑-
"들어오게."
방문을 두드리자 곧바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자신을 시종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그럼 뭐 어떤가. 어쩌면 갑자기 들어온 자신의 모습에 그가 깜짝 놀라하는 모습을 볼지도 모른다. 그런 기대감에 나는 힘껏 문을 열었다.
"오늘 저녁은 고기 스튜인가? 문 너머로 냄새가 풍겨오더군. 그런데 방금 와서 미안하지만 자네 붕대랑 약 좀 가져와.....엘레나? 어째서 엘레나가 여기를?? 아니, 잠깐만! 일단 나가 주..."
"팔..."
그의 당황하는 얼굴은 확실히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피를 흘리고 있는 그의 오른팔과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