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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판타지의 악당이 되었습니다-15화 (15/131)

< 15화 > 동생은 누나가 필요합니다. (3)

알폰스를 방으로 데려다 준 후 나는 엘레나와 내일을 약속하고는 다시 이실리아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실리아관에 도착하자 역대 안주인들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추억의 회랑으로 걸어갔다. 가문의 기나긴 역사만큼 많은 여인들의 초상화가 있었지만 내가 아는 얼굴은 단 한명 뿐이다.

그 초상화들의 나열 끝에는 아직 천을 덮지 않은 어머니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화공의 훌륭한 솜씨 덕에 초상화 속 그녀는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당장이라도 의자에서 일어나 움직일 것 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그것이 내게 남아있는 그녀와의 기억들을 자극하는 것은 당연했다.

알폰스가 있었던 방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 눈에 익은 방의 배치가 들어왔다.

몇년이 지났는데도 이곳은 여전히 바뀐 곳 하나 없이 그때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었다.

다만 알폰스가 다녀갔기 때문인지 단정하게 개어져 있어야 할 침대의 이불은 조금 구겨져 있었고 누군가 급하게 배개 밑에 숨긴 것으로 보이는 것이 삐죽 튀어 나와 있었다. 알폰스가 이곳에 와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조금씩 머리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침대로 다가가 배개를 들추자 알폰스가 읽다 만 것으로 보이는 낡은 책 한권이 놓여 있었다.

익숙한 필체다.

아니, 필체 뿐 만이 아니라 안에 적혀있는 내용 또한 친숙하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것이 이것은 아르웬, 나의 어머니의 일기장이었으니까.

예전에 가끔 어머니께서 혼자 무언가를 적고 계신것을 보았지만 그것에 대해 물어보면 어머니는 항상 비밀이라며 내게 그 책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후 기억에서 잊고 살았는데 어머니의 방인 이곳에 남겨진 것을 알폰스가 찾아낸 모양이다.

글의 시작은 데미안이 태어나고 나서부터 적은 것 같지만 그렇다고 글이 꾸준히 적혀 있지는 않았다.

특별한 일이 있었던 날을 떠올리기 위해 그때의 강렬한 기분을 적었다는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글을 읽고 있는 나도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기가 쉬웠다.

그녀의 글에 적혀 있는 데미안은 내가 아니었지만 그녀와 나의 추억 또한 분명하게 이곳에 남겨져 있었다.

이 글로 인하여 내가 느낀 것은 어머니의 빈자리에 대한 상실감이 아닌 과거의 느꼈던 따스함을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었다는 행복이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같은 글을 보고 똑같은 생각을 가지는 것은 아니듯 알폰스는 내가 느꼈던 것과는 다르게 느꼈을 지도 모르겠다.

아르웬 크라우스가 세상을 떠난 것은 알폰스가 두살 때의 일이었다.

당시 남부에는 전염병 하나가 유행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원인이었다. 어렸던 알폰스가 걸리지 않은 것이 천운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치료제가 만들어지기 전 까지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고 그 중에는 크라우스의 안주인 또한 포함 되어 있었다.

두살짜리 갓난아기에 불과했던 알폰스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있을리가 없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는 알폰스가 이 일기를 보았을 때 그 추억을 가지고 있던 나와는 달리 더욱 어머니의 빈자리에 대해 통감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은 모르는 어머니를 잊지 못한 형과 아버지의 사이에 있었기에 더더욱 그러했을 지도.

어머니를 이른 나이에 잃은 알폰스에게 있어 가족은 나와 아버지만이 전부였다. 그런데 그 유일하게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알폰스에게서 이미 떠나간 이의 그림자를 찾고 있었다.

추억을 하되 그 그림자에 잡아 먹혀서는 안되었다.

아마 그 사실을 알기에 아버지가 알폰스를 이실리아관에 가지 못하게 했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알폰스를 위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땠을까. 내가 알폰스에게 좋은 형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럴리가.

이제와서 눈치 챈 주제에 좋은 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앞으로 내게 닥칠 미래를 준비해야 했었다는 말은 변명에 불과하다.

솔직하게 인정하자.

악당인 나와 달리 앞으로 있을 미래에도 선역으로 있을 알폰스였기에 나는 그 아이에게 무심했다.

***

나는 어머니의 일기를 들고 이실리아관을 나왔다.

초인이라 말 할 수 있는 육체를 지녔것만 몸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내손에 들려있는 어머니의 작은 일기장은 마치 무거운 철근을 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잘못을 알았으면 바로 잡아야한다.

하지만 가족을 가진것도 누군가의 형이 되어 보는 것도 모두 이번 삶이 처음이었다. 나는 이상적인 형의 모습을 모르고 만약 내가 그렇게 바뀐다 한들 그 아이가 느끼던 상실감을 모두 매워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엘레나와의 약혼이라는 무거운 돌을 내려 놓았더니 또 새로운 돌이 굴러와 마음을 무겁게 한다. 하지만 이것은 정해진 운명같은 것이 아닌 나의 잘못으로 인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엘레나 때 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짊어진 것 같다.

어찌해야할지 고민하며 걷다가 어느세 내 방 앞까지 도착하니 켄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눈 앞에 나타났다.

"도련님. 오늘도 고민이 많아보이십니다."

"아? 켄. 여기서 뭐하는 거예요?"

"저야 도련님의 전속 집사로서 도련님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보다 도련님께서는 왜 그리 비 오는 날의 하늘 처럼 우중충한 얼굴이십니까. 아, 에델바이스 영애에 대한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이미 아가씨께선 도련님에게 푹 빠져...."

"그런거 아닙니다."

이 아저씨는 내가 기분이 안 좋으면 다 엘레나 관련된 걸 줄 아나.

능글맞게 웃는 노집사의 얼굴에 무거운 기분이 약간 덜어진것 같다. 그러고 보면 나와 알폰스를 가장 오랫동안 지켜 본것이 켄과 마리아 부부였나. 그렇다면 혹시 켄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켄에게 그에 대해 묻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그 둘이 알폰스에게 이상한 점을 느꼈었다면 곧바로 우리에게 알려 주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마리아가 알폰스를 그냥 두었을 리 없다.

마리아의 성격이라면 분명 어머니를 알지 못하는 알폰스를 가엽게 여겨 이것 저것 신경 써주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알폰스의 감정의 골은 매워지지 못했다.

이걸 해결하려면 제3자가 아닌 가족들이 직접 나서야 한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그러자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그 얼굴을 떠올리자 곧바로 켄에게 말했다.

"켄. 아버지에게 가서 말씀 해주세요. 오랜만에 아들이 대련을 좀 하고 싶다고."

"예? 갑자기요? 그런데 그 꼴로 괜찮으시겠습니까? 평소에 멀쩡한 상태에서 하여도 슬라임이 되어 나오시지 않습니까. 엄청 피곤해 보이시는데 오늘은 쉬시고 내일 하시는게 어떠실지."

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답했다.

"괜찮아요. 오늘은 평소 처럼 빡빡하게 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냥 아들과 아버지간의 '대화'를 할 생각이니까. 그런 내 답에 켄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하는 수 밖에 없었다.

"이거 뒷수습할 때가 문제겠군요."

"그렇게 하지는 않을 건데..."

"도련님이 그리 말씀 하셔도 가주님 성격상 평범하게 끝날리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최대한 조심 해주셨으면 합니다. 에델바이스 영애께서 놀라실 수 도 있지 않습니까."

"큰 소리는 나지 않도록 할게요."

"아니, 크게 다치지 마시라는 소리였습니다. 괜히 피떡이 되어서 나오시면 안되니 말입니다. 그 때문에 영애께서 놀라시면 어떡합니까?"

"....."

할 말이 없네.

잠시후 켄이 아버지에게 말을 하러 떠나자 나는 성 뒤에 있는 연무장을 향해 걸어갔다.

***

크라우스 가문은 명성 높은 무가 답게 연무장이 여러 곳 존재했다. 그 중에서도 내성 바로 뒤에 있는 연무장은 크라우스 가문의 혈족만이 사용하는 곳으로 가문의 이름 아래 서약한 기사라 할 지라도 출입이 금지되는 곳이었다.

나는 연무장에 도착한뒤 뒷편에 준비되어 있는 가검들 중 하나를 골라 들었다.

대련은 대련일 뿐. 목숨을 앗아가는 생사결을 펼치는 것도 아닌데 진검으로 대련을 할 이유는 없다. 과거에 진검으로 했다가 목숨을 잃는 이들이 많아져 그와 같은 무게에 날을 세우지 않은 가검을 이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 한들 오러를 담아 낼 수 있는 검사라면 그것은 진검이나 마찬가지 이겠지만.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잠잠하던 대기 중의 마나가 요동치기 시작한다. 자유로워야 할 마나의 흐름이 무언가 강대한 힘에 이끌리고 있는 것 처럼 어느 한 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오셨습니까?"

그 거대한 흐름의 중심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소드 마스터(Sword Master).

평소에는 억누르고 있던 그 지고한 경지에 오른 이의 강대한 존재감이 여과없이 드러나고 있다.

"그래. 그런데 네가 먼저 나에게 대련을 청하다니 의외구나. 무슨 깨달음이라도 있던게냐?"

아버지의 흥미로워 하시는 얼굴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

"아니요. 그건 아니고. 아버지와 오랜만에 대화도 할겸 화를 풀 곳이 필요해서 말입니다."

그말에 아버지는 딱히 답을 하시지 않았다. 그저 평소와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실 뿐이었다.

눈을 한번 깜빡이자 아무것도 없던 그의 손에는 검이 한자루 들려 있었다.

나 또한 아무말 없이 검을 들었다.

잠시후 바람 소리만이 머무르던 고요한 연무장에 철과 철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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