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스 판타지의 악당이 되었습니다-13화 (13/131)

< 13화 > 동생은 누나가 필요합니다. (1)

크라우스 백작가의 영주성은 크라우스 가문이 제국 건국 초기 때부터 존재해왔던 원로 가문인만큼 가문의 역사를 함께해온 영주성 역시 그 유구한 역사를 여러 일화를 통해 간직하고 있다.

이실리아관 또한 영주성과 동시대에 만들어진 건물 답게 이 건물에 얽힌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이 이실리아라는 이름의 유래였다.

초대 크라우스 가문의 안주인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별관. 이실리아관.

그렇기에 이곳은 대대로 크라우스 가문의 안주인들이 사용해 왔고 기나긴 시간 동안 수차례 공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역대 안주인들이 남긴 흔적은 여전히 여러가지의 모습으로 조금씩 남아있다.

지금 우리가 거닐고 있는 이 꽃밭 또한 그런 흔적 중 하나였다.

이 화원은 데미안과 알폰스의 어머니이자 당대 크라우스 가문의 안주인이었던 아르웬 크라우스가 이실리아관에 남긴 흔적 중 하나로, 화원 한 구석에서 불어오는 히아신스의 꽃내음은 그녀와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어릴 적에는 어머니와 자주 걷던 화원이었지만 그녀가 떠나간 이후 우리 가족 중 이곳에 오는 이는 가끔 마다 들리는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오지 않게 되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떠난 후에는 단 한번도 이실리아관에 오지 않으셨고 알폰스는 어째선지 이실리아관에 발을 들이는 것을 꺼려했다.

그렇기에 이 곳을 걸을 때의 나는 언제나 혼자였다.

화원은 사용인들에 의해 깨끗히 관리가 되고 있었지만 고용된 입장에 있는 그들이 이 곳을 마음 놓고 감상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업무가 끝나면 서둘러 화원 밖으로 나가기 바빴고 결과적으로 이곳의 방문객은 오로지 나 혼자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화원에도 오랜만에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그녀의 아름다운 용모와 그 뒤의 배경에 꽃까지 놓이니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다.

나의 손을 살포시 잡은 엘레나는 내가 이끄는대로 천천히 움직였다.

화원(花園)은 꽃을 감상하기 위한 공간.

그 공간에 서 있는 이상 우리 사이에 있어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천천히 걸으며 구역마다 바뀌는 꽃의 변화와 조금씩 달라지는 향기를 맡는다. 화창한 봄의 하늘은 푸르렀고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꽃들의 모습은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단 둘이 걸으니 여태까지 혼자 걷던 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향도 평소에 맡던 것과는 다르게 느껴져왔다. 계속해서 비어 있던 한 쪽이 채워지는 느낌이랄까, 알 수 없는 충만감이 차올랐다.

아마도 오랜만에 누군가와 같이 이 거리를 걸어서 그런것이겠지. 나는 그렇게 자꾸만 간질거리는 마음과 조금씩 기어나오려고 하는 본능을 치워내고는 엘레나를 바라보았다.

때마침 그녀의 뒤에 피어있는 히아신스들은 그녀의 눈과 같은 보라색이었다.

자연스럽게 꽃에 녹아드는 그녀의 모습은 가끔씩 사람의 이성을 저 멀리 날려 보낼 때가 있다.

몇번이고 느끼는 것이었지만 참으로 비현실적인 외모다. 저 정도는 되어야 로맨스 판타지의 주인공을 한다는 말인가.

그녀는 언제 부턴가 세계가 보여주는 그림 속에 빠져 들었는지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와는 달리 잔잔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그녀와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그 어떠한 화가도 그리지 못할 풍경이 그려져 있었다.

조용하다.

새들의 지저귐도 꿀벌들의 윙윙거리는 날개소리도 저 푸르른 세계에 묻혀버린다.

잠시 우리는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서서 지켜보기로 한다.

그렇게 몇분이 지났을까,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은 구름을 움직여 해를 가렸다.

그림자가 세상에 드리우자 우리는 마치 약속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다시 걷기 시작했다.

***

화원에서 나오자 그녀의 기분은 완전히 풀어졌는지 처음 만났을 때의 엘레나 에델바이스로 변해있었다. 고요한 호수처럼 잔잔한 눈동자와 어딘가 무심해 보이는 그 얼굴은 내가 소설을 읽으며 떠올렸던 엘레나의 모습과 똑같았다.

그런데 왜 이리 새로워 보이지?

분명 저 모습이 내가 알고 있는 엘레나가 맞을 텐데 낯설어 보이는 이 느낌은 뭘까. 생각해보면 이곳에서 그녀를 만나고 나서 내가 본 건 웃는 엘레나. 우는 엘레나. 부끄러워 붉어진 엘레나 같은 것 밖에 없었다.

아니, 이브이도 아니고 뭐가 이리 다양해.

떠올리고 나니 내가 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엘레나 에델바이스라는 인물의 모습이 참으로 뒤죽박죽으로 바뀌어버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전처럼 머리가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엘레나."

"네? 데미안. 왜 부르세요?"

"아니. 그냥 불러 봤습니다."

나의 물음에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나갔다. 그 모습을 보자 그제야 제자리를 찾아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만족감에 무심코 입꼬리가 올라갔다. 엘레나는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엘레나의 표정 처럼 정해진 결말도 쉽게 바뀌면 좋을텐데. 그렇지 않다는게 한스러울 뿐이다. 그래도 원작과는 다른 엘레나의 행동 덕에, 마음이 가벼워 진것인지 아니면 완전히 내려놓고 순응해 버린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전처럼 고민만 하며 끙끙 앓고 있던 때보다는 마음이 편해졌다.

"화원은 어떠셨습니까?"

"아, 확실히 여기서 바라 보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 있었어요. 고마워요 데미안. 이런 경험을 하게 해주어서."

"자고로 꽃은 좁은 독실에서 보는 것 보다는 넓고 탁 트인 곳에서 봐야 제대로 볼 수 있는 겁니다. 인공적인 것에 자연을 온전히 담아낼 수 는 없는 법이니까요."

내 말에 엘레나는 작게 웃으며 수긍했다.

켄과 엘레나가 데려온 메이드는 자리를 비웠는지 보이지 않았다.

켄은 그렇다 쳐도 이름이...헤일리였나? 원작에서는 데미안에게 계속해서 신변을 위협 받아 엘레나의 학대사실을 숨기고 있다가 끝에 가서는 데미안을 고발하는데 일조하던 녀석으로 기억하고 있다.

아마도 그 둘은 나와 엘레나를 배려해서 자리를 피한듯 하다.

원래도 내가 에스코트하려고 하려고 했으니 뭐.

나는 아직도 여운이 남은건지 창 밖의 화원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에게 말했다.

"날씨 참 좋네요."

"그러게요."

"다음에도 나갈까요?"

"...바구니."

"?"

"바구니에 디저트도 챙겨서 나가요."

단거 그만 먹어... 몸 안 좋아진다.

하지만 엘레나는 마법사니까 어떻게든 하겠지.

나는 엘레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매트도 챙겨서 나가도록 하죠. 당분간은 계속해서 맑을 것 같으니 조금 멀리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사르함에는 경치가 좋은 곳이 많거든요."

그런 내 말에 그녀가 뾰루퉁한 얼굴로 답했다.

"경치라면 메로힘도 지지 않아요...."

"뭐, 그렇겠지요. 매트 깔고 앉았다가는 얼어 죽겠지만."

메로힘. 그곳은 기후가 불곰국이나 다름 없는 곳이다.

눈이 내릴때는 눈으로 성을 만들어도 될 정도로 많이 내리는 지역이니. 에델바이스 가문이 마법명가라서 다행이지 우리 같은 무가(武家)가 그곳에 있었으면 자원이라도 많지 않는 이상 진작에 망했을 거다.

"언젠가는 메로힘에서도 하도록 합시다. 얼음 위에 매트 깔고 앉아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그래도 일단 오늘은 이실리아관 부터 마저 둘러 보도록 하죠."

북극에서 살아남기 보다는 500년된 고성에서 살아남기가 먼저였다.

***

"이분은?"

"저희 어머니십니다."

엘레나가 벽에 걸려있는 한 초상화의 앞에 서서 물었다. 그 초상화의 옆에도 다른 초상화들이 일렬로 걸려있었지만 그녀는 정확히 아르웬 크라우스의 초상화를 찾아내었다.

이실리아관이 안주인들의 집 역할을 한 덕에 이곳에는 역대 안주인들의 초상이 걸려있었다. 그렇기에 어머니, 아르웬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사실 엘레나가 정확히 아르웬의 초상을 꼭 집어 지목한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 초상화 속 인물과 아주 닮은 사람을 그녀는 이미 한번 만나 본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흰색 천을 주웠다.

원래는 어머니의 초상화를 가리던 천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와 관련된 물건들을 모두 이실리아관으로 보내었다. 이 초상화를 제외하고도 어머니가 그려진 모든 것들을 말이다. 이곳에 있는 초상화들 중 유일하게 어머니의 초상화가 흰색 천으로 가려져 있던 것은 혹여 이곳으로 왔을 때 어머니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서 였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미워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지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얼굴을 보기만 하여도 눈물 부터 흘리기에 그리 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천이 땅에 떨어져 있다니. 성의 사용인이 실수 한 것이라면 다시 되돌려 놓았으면 되었을 텐데 왜 되돌리지 않았던 것일까. 이실리아관의 가려진 초상화에 대해 모르는 사용인은 없을텐데.

그 이유는 곧바로 밝혀졌다.

"어....혀, 형아...."

"알폰스."

어머니의 물건으로 가득한 방에서 한 아이가 나왔다.

초상화의 그려진 여인을 똑 닮은 아이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