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막간
나는 내 품안에서 훌쩍이고 있는 엘레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내력(內力)까지 활성화 시키며 품에 안고 있던 덕일까, 멈추지 않을 것 처럼 펑펑 흘러내리던 눈물은 점차 줄어 들었고 얼음장 같이 차가웠던 그녀의 몸은 다시 온기를 되찾아갔다.
귀족 집안의 도련님으로 살아서 그런지 이제는 손수건을 들고 다니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려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돈 많은 크라우스 백작가 답게 손수건은 부드러운 실크 재질의 고급품이었지만 나로서는 눈물을 닦아 주는 내내 그 고운 얼굴에 상처가 나지 않을까 행동이 조심스러워 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래 사춘기 여자아이들은 이렇게 감정기복이 심한가?'
열여섯이면 사춘기가 올 나이는 지나지 않았나? 잘 모르겠다.
내가 관심법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의 속마음을 어찌 알 수 있겠나.
하지만 단순히 어린 소녀의 사춘기로 치부하기에는 엘레나 에델바이스가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은 내게 있어 충격적인 일이었다.
소설 속 엘레나는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마음은 강철과도 같이 단단하여 그녀가 작중 눈물을 흘린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소설과는 많이 바뀌어 버린것 같지만 지금 내 품에 안겨있는 이 아이도 고작 하루도 안되는 짧은 시간동안 보았음에도 내 앞에서의 그녀는 활발하고 밝은 모습만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방금전 까지만 하여도 나와 웃으며 이야기 하던 아이가 이야기의 주제가 바뀌었다고 눈물을 터뜨리다니, 오히려 당황스러운 것은 내 쪽이다.
혹시 연기 였던 것은 아닐까 싶었지만 그녀의 눈에 담긴 회한과 슬픔, 원망의 상대는 틀림없이 나, 데미안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데미안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녀가 원작의 데미안을 알고 있다면 오히려 증오어린 눈으로 나를 한대 쳤겠지, 내 품에 이리 얌전히 안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순전히 나를 향한 감정이었다는 것인데 어제도 그렇고 그녀가 내게 호의를 품을 만한 일이 있었는가?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 나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다. 이 이상의 고민은 괜한 두통을 불러 올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제도 이에 대해 생각하다가 결국 답을 찾지 못하고 포기했는데 지금에 와서 괜한 망상을 덧붙여 추리해 봤자 어차피 엉터리 해답 밖에 나오지 않을게 뻔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은 안될 것 같았다. 내 말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그녀를 다시 울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 물론 이 데미안의 몸은 그러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지만 나에게 사람을 울리는 취미 같은 건 없다.
울고 있는 것 보다 웃었을 때의 모습이 더 아름다운데 왜 그걸 모르는지. 이러니까 초반에 삼류악역으로 탈락했지. 이 새끼는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구만.
'이제는 진짜 모르겠다.'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
매우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 이유야 어찌 되었든 지금 그녀가 가지고 있는 마음은 어차피 원작이 시작하면 남주 후보 중 누군가에게로 떠날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괜한 생각 가지지 말자.
나는 어디까지나 소설의 악당일 뿐이니까.
악당은 주인공에게 상처를 입히고 증오를 받아내는 역할이지 사랑을 받는 역할이 아니다. 내가 어떠한 발버둥을 하더라도 나에게 부여된 것이 데미안이라는 악역이란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내 안위를 위해 이렇게 일찍 파혼하려고 하는 내 행동이 괜한 짓이었을 지도 모른다.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는 거였으니.
어쩌면 원작이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꽤 오랫동안 그녀의 약혼자로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데미안 크라우스와 엘레나 에델바이스의 파혼은 절대적인 것. 한 사람의 운명도 바꾸지 못한 내가 세계의 분기점이나 되는 큰 사건을 비틀 수 있을리가 없다.
나는 어떤 식으로든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떠나게 될 것이다.
단지 그것을 단순히 '이별'이라는 것으로 끝나기를 바랄 뿐.
그러니 지금 나의 행동은 단순히 그 미래에 있을 어떠한 일의 부채감을 지우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제까지 이러고 계실 건가요? 같이 영주성을 구경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아직까지 내 품에 기대고 있는 엘레나를 토닥이며 작게 그녀를 불렀다.
흐르던 눈물은 내가 모두 닦아 주었다.
그녀의 눈가는 약간 빨갛게 변했을 뿐 그리 크게 부은 것 같지는 않았다. 여전히 내 눈에는 아름다워 보일 뿐이다.
아까전의 흐트러졌던 호흡도 이제는 평상시의 안정된 상태로 바뀌었다는 것은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으니 알아 차릴 수 밖에 없었다.
"오늘은 날씨가 좋군요. 여기서도 화원이 훤히 보인다고는 하지만 직접 가서 보는 것이 더 좋을 겁니다.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꽃향기는 향기롭거든요. 물론 이실리아관에 볼 것은 그게 전부가 아니랍니다."
그녀가 내 말에 따라 천천히 기대고 있던 가슴에서 떨어졌다.
엘레나는 피부가 매우 하얗기 때문에 특히 얼굴이 붉어지는 것에 있어서는 티가 많이 났다. 그녀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내게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푹 숙였다.
고민을 약간 지워낸 탓일까, 상당히 가벼워진 마음에 그녀의 행동을 보자마자 나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내 웃음소리에 그녀는 더 작게 몸을 웅크렸지만 보는 입장에서는 그저 귀여울 따름이다.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앞에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 부디 제게 당신께 이실리아관을 소개 할 수 있는 영예를 얻을 기회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여전히 묵묵부답인 엘레나. 나는 거기에 몇가지 말을 더 붙였다.
"그러고 보니 이실리아관의 이름에 대한 유래를 설명해드리지 않았네요. 이실리아라는 이름은 초대 크라우스의 안주인의 이름이라고 한답니다. 그래서 초대 가주 께서는 그분의 이름을 따서 이 별관을 만드셨다고 합니다. 이후로 이실리아관은 크라우스의 안주인이 지내는 공간으로 자리매김 했지요."
움찔-
"엘레나. 저의, 차기 크라우스 백작의 약혼녀로서 미리 여기의 길은 익혀두는게 좋지 않을까요."
말이 끝나자마자 작은 손 하나가 내가 내민 손을 꽉 잡아 쥐었다.
얼굴을 가리는 손이 하나 없어지자 그녀의 반쪽 얼굴이 드러났다.
가려지지 않고 드러난 곳의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올라간 입꼬리와 웃고 있는 자줏빛 눈이 내 눈에 비춰졌다.
그 얼굴을 보자 어쩌면 그 날이 왔을 때 슬퍼할 것은 그녀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슴 구석 한켠에 나지막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