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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판타지의 악당이 되었습니다-10화 (10/131)

< 10화 > 어림도 없지. (5)

우리의 대화는 그걸로 끝이 났다.

그는 내게 묻고 싶은게 있는 것 같아 보였지만 때마침 크라우스 백작이 저녁 만찬에 초대를 한 덕분에 우리는 식당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나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그는 분명 내가 파혼을 선택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그로서는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는 생각해야만 한다. 그리고 알아내야 한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의 전제부터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엘레나 에델바이스부터 데미안 크라우스에 이어서 이 모든 세상이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는 달리 틀어져 있다는 것을 말이다.

운명을 바꿀수 있다고 내가 그에게 말해주는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초월자로 가는 길은 누군가 제시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그 스스로 깨달은 신념을 이정표 삼아 가는 것이기에 내가 말한다 한들 그에게 주어진 길의 이정표를 바꾸어 버릴뿐 도움은 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은 생각하지 말자.

아직은 때가 아니다.

지금 내게 있어 중요한 것은 그와 어떻게 거리를 줄일지이다. 저렇게 가슴이 설레이는 미소를 지어주어도 속으로는 나를 경계하고 있을게 분명하니 그것 부터 어떻게 하는 것이 먼저였다.

하지만 당장은 딱히 이렇다할 무언가가 없었다. 그는 나를 식당으로 에스코트 하고 있는 중에도 고민이 많은듯 수심에 잠긴듯한 얼굴이었기에 대화를 나누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보였다.

그가 지금 속으로 어떤 걱정을 하고 있을지 짐작가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 나는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다만 조금 신기한 것은 이렇게 생각이 다른데 가 있으면 자그마한 실수라도 있기 마련인데 고민하는 와중에도 그는 에스코트 하는데 있어 단 한번의 실수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식당이 가까워 지자 그는 고민하기를 그만둔 것 같아 보였다. 가족을 중요시 하는 그 다웠다.

데미안이 식당의 문을 열기전 말했다.

"음, 엘레나? 혹시 저희 아버지께서 뭐라고 말씀하신다면 그냥 무시하셔도 됩니다."

"네?"

"그게 정신건강에 이로워요. 아, 그보다 아까 약혼은 대체..."

"들어가도록 하죠."

나는 데미안의 말을 끊고 그가 잡은 식당 손잡이를 밀어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보이는 것은 나와 데미안을 위해 준비된 비어있는 두 자리와 상석에 앉아있는 크라우스 백작. 그리고 그의 어린 동생 알폰스 크라우스가 자리에 착석해 있는 모습이었다.

비어있는 자리에 나와 데미안이 앉자 시종이 자리로 미리 준비된 요리를 가져왔다.

하지만 식사가 시작되지는 않았다. 상석에 앉아 있는 크라우스 백작이 요리에 손도 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지긋이 고개를 돌려 나와 데미안이 앉은 쪽을 바라보았다.

아서 크라우스.

남부의 지배자이자 현대륙의 다섯 밖에 없는 소드마스터(Sword Master)라는 칭호를 가진 초월자.

마흔을 넘긴 중년이라고 할 수 있는 그는 입신(入神)의 든 경지 덕인지 과거 내가 그러했듯 그의 몸은 아직까지 전성기와 같은 젊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열여섯이 되는 자신들과 별 나이차가 없어보일 정도의 젊은 모습. 그의 정체를 모르는 이가 그를 본다면 절대 소드마스터인 크라우스 백작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의 장난기 가득해 보이는 청년의 얼굴이었다.

실제로 그는 털털한 성격의 소유자로 그리 격식을 중히 여기는 편은 아니었다. 보통 권위적인 성향이 강한 무가(武家)의 다른 가주들과는 달리 아이들에게 장난을 많이 치며 정을 중히 여기는 상냥한 아버지였다.

그럼에도 옳고 그름은 확실해 첫번째 삶에서 데미안에게 누구보다 가혹하게 처벌했던 사람이기도 하였고.

검은 머리카락과 황금빛 눈동자. 데미안이 누구를 닮았는지는 그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데미안이 장성했을 때의 모습은 지금 눈 앞에 있는 크라우스 백작과 쌍둥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닮았으니 말이다. 그는 내 얼굴을 보자 작게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엘레나. 오랜만에 보는구나. 너가 기억할지는 모르겠다만 어릴적에 한번 만난적이 있단다. 그때는 귀여운 꼬마 아가씨였는데 이제는 너희 어머니를 닮아 아주 아름다운 숙녀로 자랐구나."

"백작님은 제 어릴적 기억 그대로의 모습이시네요. 덕분에 떠오르는 것도 쉬웠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매일마다 주름이 늘어난다고 투덜 거리시는데 말이죠."

이 말은 사실이었다. 아버지께서는 가끔 마탑에서 돌아오시면 씩씩 거리는 얼굴로 거울을 들여다 볼때마다 그런 말씀을 하셨으니까. 어릴때는 몰랐다만 크라우스 백작과 아버지의 관계를 떠올리면 충분히 짐작이 가능한 이야기였다.

크라우스 백작도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에 그는 박장대소를 하며 아버지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하하하하하!!! 그 녀석 아직도 벽을 넘지 못한거냐? 녀석, 허구한날 나에게도 수정구로 연락해 불만을 털어 놓기만 하고 자기가 연락해 놓고 막상 내 얼굴을 보면 더 화내더니만 집에 가서도 그리 투덜댔구만? 고맙다. 엘레나 덕분에 녀석을 골릴만한게 한가지 늘었어."

"별 말씀을요."

솔직히 말하자면 크라우스 백작은 천재라고 불리는 이들 중에서도 천재라고 불리는 이였기에 아버지의 불평이 딱히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 누가 이제 막 마흔을 넘기는 나이에 초월자의 격에 다다르겠는가. 그 기록을 갱신하는 이가 지금 내 옆에 한명, 동부에 한명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크라우스 백작은 역대 최연소로 초월자가 된 남자였다.

아무튼 크라우스 백작, 아니 시아버님은 지금 내게 있어 가장 든든한 아군이다.

첫번째 삶에서 백작이라는 직위와 소드마스터라는 절대자의 위치에 있었음에도 데미안 사건을 묻어버리지 않고 스스로 공론화 시켜 나와 아버지께 무릎까지 꿇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먼저 그에게 주먹을 날려 파혼을 했던 두번째 삶에서도 언제나 나의 파혼을 아쉬워 하시던 분이시다.

현재 나의 가장 열렬한 약혼 지지자이시며 앞으로 나와 데미안의 사이를 진전시키기 위해 물밑에서 도와주실 분. 이전에는 나를 그 놈과 같이 있는 시간을 늘려버린 원흉이었지만 지금은 그와의 관계를 가깝게 만들어줄 기회를 누구보다 많이 만들어주실 예정이다.

크라우스 백작은 나에게서 데미안에게로 노선을 틀었다. 대화의 주제는 놀랍게도 나의 아버지인 요하임 에델바이스에 대해서였다. 그가 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었나? 내 기억 속에 이때쯤 아버지께서 남부로 내려 오신 기억은 없는데.

"그러고보니 데미안. 너도 어릴적에 요하임 그 녀석 만난거 기억하고 있냐?"

"갑자기 제머리를 잡고서는 '딸아이를 울렸다가는 백야빙옥(白夜氷獄)에 처박아주마.'라고 말하시던 분이었기에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말에 몸이 흠칫하고 떨렸다.

아빠는 대체 무슨 말을 하며 돌아다니신 거야?!!

그럴리는 없겠지만 방금 전 데미안의 말 때문에 혹여 요하임이 데미안에게 무슨 짓을 하여서 그가 자신을 밀어내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 까지 간 엘레나였다.

크라우스 백작이 웃으며 데미안에게 물었다.

"뭐? 하하하하!! 그때 네 나이가 몇이었지?"

"그때가...열넷이었죠. 누군지도 모르는 분이 갑자기 다가오셔서는 알 수 없는 말들을 하시길래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말 하나 하나에 딸아이를 많이 아끼신다는 것이 느껴지시는 분이 셨습니다."

"네?"

분명 백야빙옥에 가둬버린다고 하였으니 다음에는 더 심한 말이 나올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엘레나에게는 뜻밖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후 데미안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엘레나는 얼굴을 붉어질 수 밖에 없었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 하고 있지만 속으로 꾹 참고 있는다고... 싫은 것을 싫다고 좋아하는 것을 좋다고 말하기 어려워 하는 아이라 옆에서 많이 살펴주고 아껴주라 하셨습니다. 또 단걸 아주 많이 좋아하니 처음 만날 때는 우선 과자부터 쥐어주라고 하시더군요. 그러면 경계를 좀 풀거라고."

아빠!!!!

요하임이 팔불출이라는 것을 엘레나 또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설마 데미안에게 직접가서 이렇게 이야기 할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을 끔찍하게 아끼는 요하임인 만큼 그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 자체가 그를 내심 마음에 들어했다는 것 이니 기분은 좋았다만

그거랑 수치심은 별개라고!!!!!!

자꾸만 아래로 내려가는 얼굴.

고개를 살짝 돌려 재밌다는 듯 말하고 있는 데미안의 얼굴을 보니 그는 웃고 있었다. 정확히는 부끄러워 하는 자신을 보면서 말이다.

누가 보기에는 그가 나를 조롱한다고 생각할 수 도 있는 상황.

하지만 지난 몇십년간 그를 봐온 내가 느끼는 것은 달랐다.

'부끄럽지? 이제 내가 싫지?'

그 웃는 눈은 마치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나는 잠시 얼탱이가 없어졌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귀엽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리 느꼈다. 파혼을 하고 싶다면 그 데미안처럼 윽박지르고 난폭하게 굴면 될것을 사춘기 남자애의 장난 수준의 공격에 오히려 내쪽에서 피식할 정도다. 그리 생각하니 부끄러운것도 서서히 가시는 것 같았다.

거기에 때마침 우리 든든한 아군께서 지원을 해주셨다.

"아, 아아!! 그런거였어! 단걸 안 먹는 니 녀석이 단걸 무더기로 준비해달라고 했다길래 내 이상하다 싶었더니. 그런거였구나. 그런거였어!"

크라우스 백작의 말에 데미안이 방금 전 나와 같이 움찔 거렸다. 나는 그틈을 놓치지 않고 데미안에게 감동받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네? 분명 공자께서는 단걸 좋아한다고 하셨는데."

"뭐라? 저 데미안 크라우스가? 웃기는 소리. 저 놈은 혀에 문제라도 있는지 단걸 하나도 못 먹는다. 그런데 단걸 좋아한다고? 오, 데미안 너 설마..."

크라우스 백작이 음흉한 얼굴로 데미안을 바라보자 데미안은 곧바로 백작의 말을 끊었다.

"단거 먹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 유언비어 퍼트리지 마십시오."

"유언비어는 네 입에서 나오는 거고. 내가 널 키우는 동안 네 녀석이 캬라멜 하나 들고 다니는 걸 본적이 없다."

"본 적이 없다니. 많지 않았습니까? 어릴때 매일마다 주머니에 캬라멜 무더기로 들고 다녔는데. 그리고 절 키운건 마리아죠. 아버지께서 키워주신건 제 맷집이고."

"그건 시종들이 쥐어준거였잖냐. 네가 그거 안 먹고 상자에 넣어서 보관하고 있다는 걸 이 성에서 모르는 사람이 있을 것 같으냐? 그리고 너 말 잘했다. 오늘 어디 한번 내가 키운 맷집 좀 보자."

갑자기 분위기가 식당이 아닌 연무장으로 변해버리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그의 어린 동생 알폰스의 말이 결정타가 되어 데미안에게 박혀 버렸다.

"아, 맞아요! 지난 번에 형 방에서 상자 하나를 열어봤는데 예쁘게 포장된 캬라멜과 사탕들이 있었어요! 그거 먹으려고 했는데 형이 먹으면 안된다고....소중한거라고.."

그 말에 데미안은 더는 반격하지 않았다.

'어머머.'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바로 옆에 앉아있는 나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의 귀끝이 붉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 모습에 지금 당장이라도 저 얼굴을 끌어안아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오늘의 승리를 생각하며 간신히 끓어오르는 욕망을 잠재울 수 있었다.

이어서 크라우스 백작의 윙크가 이어졌고 어린 알폰스는 자신이 말하고 나서 굳어버린 형의 모습에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 거리고는 식사를 마저 하기 시작했다.

나도 다시 식기를 들어 식사를 다시 시작했다. 입에 들어오는 요리는 분명 달콤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이상하게 달달했다.

역시 이번 회귀는 매우 성공적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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