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어림도 없지. (4)
입 안에 단맛이 가시지를 않는다. 이제는 침까지 달게 느껴질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해서 디저트를 입에 넣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거절해애애애애.....'
여태까지 먹으면서도 물리지 않게 맛있다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가 자신에게 주는 것인데 바로 눈 앞에서 거절할 수 있겠는가. 먹어야지. 보통 남자들은 이렇게 많이 먹는 여자를 싫어하지 않나 싶었지만 그가 보기에는 여전히 합격점이었는지 생글생글 웃으며 내 접시 위로 디저트들을 올려두었다.
물론 엘레나도 여자인 만큼 자신의 체형에 민감하기에 아무리 데미안이 주고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더는 위험하다 싶어 거절하려고 했지만.
'귀엽네.'
데미안의 이 한마디에 격침되어 버리고는 군말 없이 자신에 접시에 쌓여가는 디저트를 입에 넣었다.
분명 데미안 본인도 알지 못한 무의식에서 튀어나온 작은 소리였을게 분명하지만 그만큼 진실한 말이 따로 없었고 그런 본심에서 튀어나온 귀엽다는 말은 엘레나의 동기가 되기에는 충분했다.
마침내 그 많던 디저트들이 그녀의 입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아무리 삶을 여러번 반복했다고는 하지만 평생을 귀족으로 살아왔던 엘레나에게 있어 연심을 품고 있는 상대에게 별로 보여주고 싶은 모습은 아니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미 대가를 받아버렸는데.
결국 그의 말과 미소에 거절하지 못하고 먹어버린 것은 자신이었다.
'맛있기는 했어....아니! 그래도! 그래도오오!!'
하지만 어찌되었든 부끄러움은 사라지지 않아 머리에서 열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거기에 데미안에게 그런 말까지 들었으니 엘레나의 얼굴이 붉게 변하는 것은 이미 정해진 미래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읏, 으으으...."
차마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가 없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자신을 이렇게 만든 원인이라 할 수 있는 그는 지금 이런 자신의 모습이 재밌다는 듯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기만 했다. 그 모습이 퍽이나 보기 좋았지만 그래도 심통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영애는 제가 생각한것 보다 단것들을 많이 좋아하시나 보군요. 미리 준비를 해두기를 잘했나 봅니다."
"으으으읏! 그, 고마워요...분명 공자님도 많이 좋아하시던 것들이었을 텐데 저에게 다 양보해 주시고...제, 제가 다음번에 올때는 저희 영지에 유명한 파르페 가게가 있는데 거기 있는거 종류별로 하나씩 꼭 가져올게요!"
그런 마음에서 나온 미약한 반항이었을까. 그가 단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 말을 꺼내었다. 이런 내 말에 그도 순간 당황했는지 웃고 있던 얼굴이 순간 굳어버렸다. 이후에 그에게 억지로 파르페를 먹여주면 그는 과연 어떤 얼굴을 하며 먹을지가 절로 상상이 되었다.
거절할까? 아니면 거절하지 않고 억지로라도 먹을까? 그야 약혼녀가 주는 선물인데 거절 할 수 는 없겠지.
싫은 얼굴을 하면서도 묵묵히 내가 떠주는 파르페를 먹는 그의 모습이 그려지자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그래. 지금의 일은 훗날 설욕하면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에 대해서 은근히 아는 것이 많았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또 무엇을 싫어하는지.
하늘마저 베어가를 수 있게 된 소드마스터가 되었으면서 유령을 무서워 한다던가, 술은 또 엄청 약하면서 취할때까지 주독을 날리지 않다거나 등 지금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이 정보들을 잘만 이용한다면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그의 여러 모습들을 보다 다양하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떠오르니 장작을 넣은 모닥불 마냥 의욕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와 단둘이 있는 이 자리도 적응이 되어버린 것인지 심장의 고동이 안정되어 가는 것이 느껴진다. 여전히 평소보다 배는 두근 거리는 심장이었지만 그래도 더이상 삿된 욕망에 휩쓸려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게 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나의 분위기가 안정되었다는 것을 그도 느꼈는지 그가 슬슬 우리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어떤 말을 하려고 할지는 대강은 알고 있었고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그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뜻을 들어줄 생각은 없다.
분명 그가 원하는 것은 나와의 파혼이었을 테니까.
그가 입을 열었다.
"음, 에델바이스 영애. 실례지만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아, 예! 물론이에요! 그럼 저도 데미안 공자님이라고 불러도 되는 거죠?"
"네. 물론입니다. 구두지만 일단은 약혼자이니 욕만 아니면 아무렇게나 부르셔도 상관없습니다."
"야, 약혼....네. 저희 그, 약혼했었죠."
멀쩡한 정신으로 그가 자신과의 관계를 확인시켜 주는 말을 듣자. 가슴이 뜨거워진다. 당장이라도 서로의 손에 반지를 끼워줘 그와의 관계를 보다 확고하게 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그가 운명이라는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아쉬웠다.
그래. 그 빌어먹을 운명.
이 세상에는 운명(運命)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그것은 필연, 반드시 일어나는 일들을 말한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마치 그물처럼 운명이라는 실타래에 엮여 있다. 설령 그것이 인간의 인지를 뛰어넘은 초월자나 신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 그리고 첫번째 삶에서의 데미안과의 파혼. 이어서 내가 겪었던 여러 사건들. 이 모든 것이 하늘이 정해둔 이치에 따라 실현되는 운명의 일종이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데미안, 아니 '그'는 본인이 맞이할 운명을 알고 있다.
데미안이 어떻게 파멸했는지 어떠한 삶을 살게 될 것인지 그는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엘레나가 알고 있던 데미안이 엘레나와 마찬가지로 회귀를 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데미안인 그는 본질적으로 원래의 데미안과는 다른 존재다. 그것은 지금 엘레나 자신의 눈에 보이는 찬란히 빛나는 그의 영혼으로 확인이 가능했다.
이전의 삶에서 찬탈해온 외신들의 신성(神聖)이 그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 온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기본적으로 운명이라는 것은 원래 이세상에서 난 것들에게 부여되는 것.
그렇기에 천리를 거스른 자신과 바깥에서 온 이방인인 외신. 그리고 마치 외신들과 같이 이계에서 온 그는 누구보다 운명의 억지력에서 거리가 먼 존재였다.
정작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아직은 운명이라는 억지력에서 벗어나기에 약했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운명을 경계하고 있었지만 그는 몰라도 자신은 알고 있다.
그가 '데미안' 이라는 운명에서 벗어나 자신과 같은 초월자가 되었었다는 것을.
아직은 이른 이야기였지만 그는 분명 그렇게 될것이고 어떻게든 내가 그리 만들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그의 고민이 자신에게 있어 걸림돌이 될지 알고 있었기에 미리 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너무 조급해해서는 오히려 일을 망칠 뿐이다. 차근차근 그가 스스로 알 수 있도록 하나씩 바꿔 가면 그는 분명 빠른 시일내에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눈치가 빠른 남자였으니까.
그래도 그런 말은 하지마.
"엘레나. 지금 당신의 기분이 어떨지는 이해가 됩니다. 생판 남이나 다름 없는 저와 약혼이라니 그야 꺼려하는게 당연하겠죠."
아니야.
"앗. 그, 그렇지는 않아요!"
정말로 내 기분을 안다면 밀어내지 말아줘.
서둘러 아니라고 말해보지만 그에게 내 맘은 닿지 않는다. 내 진심이 닿기 까지에는 아직 그와의 거리가 너무 멀었고 그 거리를 뛰어넘어 내 맘을 담아 전하기에는 내가 너무 미숙했다. 긴 시간을 살아왔음에도 연애라는 것은 나와 거리가 먼 영역이었다.
첫번째 삶에는 사랑을 알지 못했고.
두번째 삶에는 사랑을 깨닫자 마자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이 세번째 삶에서 나는 이 사랑이라는 것의 위력을 여실히 느끼고 있다.
"굳이 그렇게 말씀 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도 마찬가지니까요."
그가 눈 앞에서 나를 거부하는 모습에 이미 그럴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상처 받는 것은 왜일까. 이미 나는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이게 사랑이라는 것을.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기에 아파하고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사랑에 의한 것이라고 하여도 고통은 고통이었기에, 그가 나를 밀어낸 이유를 알고 있어도 나는 그에게 물었다.
"저, 지금 그 뜻은 데미안 공자께서는 저와의 약혼이 싫으시다는..."
"아니요. 그럴리가요. 제가 영애와의 약혼을 싫어할리 있겠습니까. 영애와의 혼인은 제국의 모든 남자들의 꿈과도 같은 일인걸요."
그말을 들으니 이게 또 뭐라고 기분이 좋아진다. 그저 입발린 말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사랑이라는게 사람을 참 감성적으로 만들게 한다.
그의 말이 이어진다.
"하지만 저는 오로지 저만을 위한 행복 보다는 저와 함께할 반려 또한 행복할 결혼을 원합니다. 솔직히 말해주세요. 엘레나 아델바이스. 지금 당신은 저를 사랑하고 있나요?"
나는 순간 이 물음에 솔직히 대답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와 나는 오늘 처음 만난 사이. 그 시간이라는 개연성의 부족이 내 입을 닫게 만들어 버렸다.
그래도 다행인것은 그가 곧바로 파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내가 파혼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랄까. 분명 첫번째 삶과 두번째 삶의 자신이라면 모를까 이미 나는 그 의도를 다 알고 있는 몸이다.
그러니 이런 수작질은 통하지 않아요.
"꼭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결혼 생활이 불행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희 부모님께서 그러셨고 다른 가문들 역시 그러하겠죠. 하지만 저희는 그분들과 다르게 선택이라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뜻은?"
"한 평생을 함께할 반려를 한번도 말 섞은 적 없는 타인으로 선택하라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아무리 귀족들간에 정략혼이 유행이라지만 저희 둘의 관계는 단순한 정략혼이 아니지 않습니까. 엘레나양과 저에게는 집안의 강요로 맺어졌던 다른 분들과는 달리 서로를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여기서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곧 클라이막스가 온다는 것을.
예상했던 것 대로 곧이어 그는 나에게 선택을 하라 말했다.
"저는 엘레나 양이 어떤 답을 내놓든 간에 그것을 존중 할 것입니다. 부디 부담가지지 마시고 이야기 해주세요. 지금 저희의 만남은 약혼 전 서로를 알아가기 위한 자리이기도 하지만 이 약혼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말하기 위한 자리이니까요."
이 정도 판이 깔렸으면 말해도 되겠지.
이건 어디까지나 약혼의 대한 생각을 말하는 거니까. 이 대답의 기준이 되는 것이 사랑일지 아니면 경제적 이득에 대해서 일지는 그가 판단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 여태껏 그가 말했던 '사랑'이라는 주제에서 벗어나든 간에 나는 그가 정해준 파혼과 약혼 이라는 선택지 중에서 내가 원하는 선택을 하면 되는 거다.
당연히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러면 저희 약혼 할래요? 정식으로."
"네?"
그의 얼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를 들으니 그간 답답했던게 뻥 뚫리는 것만 같다.
아무튼 당신이 선택하라고 해서 한거에요. 참고로 무르기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