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 어림도 없지. (3)
과거와는 달라진 반응.
이전에도 내가 주먹만 날리지 않았더라면 받았을 환대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전의 삶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약간의 아쉬움이 들었다. 그러나 마냥 아쉽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과거의 잘못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그것을 되풀이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고 그가 지금 나에게 미소를 지어준 것 처럼 앞으로 겪을 수 많은 일들 사이에서도 그가 나만을 바라 볼 수 있도록 내가 바꿀 것이다.
생각이 너무 많아진 탓에 그만 인사를 해야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생각을 정리하고는 그의 인사에 답했다.
"....반가워요. 크라우스 공자. 에델바이스 가의 장녀 엘레나 에델바이스에요."
으아아아아앗!! 너무 딱딱해!!!!
웃는다고 웃어보았지만 너무 작위적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걱정이다. 입에서 튀어나온 말도 긴장한 상태에서 말한거라 그런지 돌처럼 딱딱하기 그지 없었다.
혹시라도 내가 자신과 대화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 처럼 보이지는 않았을까. 이것 때문에 이전 처럼 그가 바로 파혼하자고 말하면 어떡하지? 등의 온갖 걱정이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다행이도 그런 내 걱정과는 달리 그는 딱히 불쾌해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주변에 있는 이들 때문에 긴장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옆에 서 있던 집사에게 말을 해 헤일리와 함께 밖으로 돌려 보냈다. 헤일리는 문 밖으로 나가면서 나에게 잘해보라며 한쪽 눈으로 윙크를 하고는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나갔다.
문이 닫히자 방안에는 정적이 찾아온다. 이제 이 방에 남아 있는 사람은 나와 그.
단 둘 뿐.
'어?'
그 사실을 깨달자 머리가 다시금 뜨거워 지기 시작한다.
스스로도 자기가 이렇게 외설스러운 사람이었는지 다시 되돌아 보게 만들 정도로 오늘 따라 야릇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 같다. 그가 그런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심지어 오늘 처음 만난 약혼녀에게 그럴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음에도 지금 자신의 사고를 지배하는 것은 이성이 아닌 욕망이었다.
한창 때의 남녀가 단 둘이서 방에 앉아있다.
사용인들은 이미 자리를 떠났고 인간을 뛰어넘은 초월적인 감각에도 이 주변에 남아있는 사람은 자신과 그 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설령 누가 올것 같아도 그건 인식저해결계를 치면 되는 일이다.
중요한건 이 방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누구도 모를 것이라는 거다.
'솔직히 나 정도 되는 여자라면 손댈만 하지 않은가?'
엘레나는 총 3번의 삶을 살아오면서 자신의 외모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잘 알고 있었다. 소드마스터, 대마법사, 제국의 황제 등 명예와 신분을 떠나 남자라고 한다면 자신을 향해 눈길을 돌리지 않는 이는 단 한명도 없었다.
미의 여신을 숭배하는 사제들도 그 여신이라는 작자도 자신보다는 못해 보였다. 실제로 그 때문에 여신에게 저주를 받았던 적도 있지 않은가. 물론 곧바로 보복해 신좌에서 떨군 후 불이 날 정도로 볼기짝을 때려주었다만.
초월자라 불리는 이들 중 몇몇이 자신의 미모에 홀려 욕망을 이겨내지 못해 덤벼들었다가 되려 당한 이들도 있었고 말이다. 그 중에 그는 없었지만 지금 그에게는 연인도 없고 자신에게 적대감도 가지지 않고 있다.
어, 이러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거 아닌가?
만약 이성적으로 생각을 했더라면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을 엘레나였지만 지금 그녀에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게 엘레나가 온갖 망상을 하고 있을 동안 데미안이 먼저 몸을 움직였다.
그의 자그만한 움직임에도 몸이 절로 움찔거렸다.
정말로 자신의 망상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은 정말 약간의...생각이 들기도 하였지만 역시나 그런일은 일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단지 옆에 놓여져 있던 티 세트에서 세트 두개를 꺼내고는 내게 한잔 자신에게 한잔 씩 따랐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향긋한 향을 풍기고 있는 차를 자신에게 건내주고는 처음 보았을 때와 변함없는 평온한 얼굴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 모습에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말도 안되는 상상을 하고 있던 것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신마저 뛰어넘은 대마법사가 욕망에 휘둘려 이성을 잃어버리고 말다니 자신의 손에 죽었던 외신(外神)들과 다른 수많은 신령들이 보았더라면 어이가 털려 스스로 신좌에서 내려와도 할 말이 없는 없는 모습이었다.
애초에 그런 욕망에 질 남자였다면 자신이 이렇게 빠져들지도 않았을 텐데 그걸 잊고 제멋대로 기대하고 있었다니 부끄러워 죽겠다.
다만 그와는 별개로 자신이 그에게 있어 그리 매력적이지 않는 것인가 하는 마음에 괜한 아쉬움이 들기도 했다. 그 때문에 괜히 또 시무룩해져 그가 넘겨준 찻잔을 이리저리 만지기만 하고 있을 때 그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저희가 약혼관계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죠? 에델바이스 영애."
"네..."
하지만 여기서 대화가 더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는 나의 반응에 내가 아직도 긴장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나는 망상으로 인한 수치심에 뭐라 말을 꺼낼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방에 조용해지려고 할때 어디선가 달콤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냄새의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려 보니 그가 준비해둔 티세트 옆에 있는 접시 위에서 나는 것이었다. 푸드커버가 덮여져 있어 그동안 눈치 채지 못하고 있던 모양이다. 접시 위에 올려져 있는 디저트들은 당장 제도에서의 유명한 쇼콜라티에가 만들어낸 것과 비교해 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크라우스 백작가에는 제도에서 일하던 쇼콜라티에 한명이 주방장으로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첫번째 삶에서 이곳에서 느꼈던 유일한 기쁨이 언제든 그가 만들어낸 디저트를 먹을 수 있었다는 것까지 떠올리니 이런 작품이 왜 여기에 있는지 이해가 갔다.
내가 디저트에 반응을 보였다는 것을 알았는지 그는 다행이라는 얼굴을 하며 입을 열었다.
"제가 평소에 단것을 즐겨먹어서 말입니다. 부끄럽지만 영애와의 자리에서 먹으려고 미리 준비해두었습니다. 혹시 에델바이스 영애께서도 단것을 좋아하는지요?"
"앗, 네. 네. 좋아해요."
'거짓말. 단거 하나도 못 먹으면서...'
그가 단것을 잘 먹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가 데미안이 아니라는 증거 중 하나였다. 데미안은 자신으로서도 잘 먹지 못할 정도의 단것을 잘만 먹었으니 말이다.
그가 이것을 준비한 이유는 아마도 자신을 위해서 였을 것이다. 긴장을 풀어주기 위함이었겠지만 나는 그가 한 말과 저 디저트를 보며 문득 바로 이전의 삶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여기와 같은 장소였지만 분위기는 지금과 달리 살벌했던 그 때를 말이다.
그 자리에서도 저 디저트들은 같은 자리에 있었다. 비록 나에 의해 바닥에 엎어져 엉망이 되어 버렸지만.
'애써 준비한게 엉망이 되었군.'
그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뭉개진 디저트들을 보며 말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지금의 저 눈과는 달리 베일것 같은 날카로운 칼과 같았다.
'굳이 대화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군요...음, 굳이 존칭을 사용할 필요도 없겠지. 엘레나 에델바이스. 그대가 파혼을 원하는 것 같으니 원하는 대로 해주마.'
그것이 끝이었다. 이후의 대화는 없었고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 헤일리와 함께 백작가를 떠났다.
그렇게 이전의 나와 그는 첫단추 부터 잘못 매여진,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지금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가슴 속에 남겨진 미련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던 걸까, 자꾸만 묻고 묻어도 다시 생각나게 만든다. 이렇게 이전과 달라지는 현재를 보면 볼 수록 말이다.
그가 접시에 정성스래 디저트를 올리기 시작한다. 모든 종류의 디저트가 하나씩 접시에 올라가자 그제서야 그는 웃는 얼굴로 내게 건내 주었다.
이전의 그도 내가 그리 행동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처럼 똑같이 행동했을 텐데, 이 멀쩡한 다과들을 보니 자신에 의해 뭉개졌던 디저트들이 되려 떠오른다.
내가 뭉개버렸던 거였다. 그의 선의를.
이제는 없던 일이 되었다 한들 이미 한번 그의 선의를 짓밟았었다는 걸 기억하기에 그에게 미안했고 또한 고마웠다.
그가 주었던 것들 중 케이크 한 조각을 골라 포크로 다시 작게 한번 자르고는 입에 넣었다.
"냠~"
역시 실력하나는 확실한 주방장 답게 케이크는 환상적인 맛이었다. 극상의 초콜릿과 생크림. 거기에 푹신하고 촉촉한 반죽까지 완벽 그 자체였다.
그렇게 천천히 케이크를 음미 하면서 지금 입안에 퍼지는 이 달달함을 앞으로도 계속 느낄 수 있기를 나는 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