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 어림도 없지. (2)
"그래서 아가씨의 약혼자이신 데미안 공자님은....음? 아가씨? 갑자기 왜 웃으시는 거에요?"
"아, 아?....너무 기뻐서. 너무 기뻐서 그래. 헤일리."
남부의 따사로운 햇살이 마차의 창을 통과해 들어온다.
그와 함께 헤일리가 조잘대는 소리에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한번 회귀했던 지난 삶에서 다시 몇십년이 흘러 또 한번 반복되는 풍경이었지만 헤일리가 들려주는 소식은 내 입가에 미소를 안겨주기에는 충분했다.
"아가씨. 아가씨 요즘 좀 이상하신 거 아세요? 처음 성에서 약혼에 대해 들으셨을 때는 멍한 얼굴이셨다가 지금에 와서는 세상 다가진 사람처럼 행복한 표정을 짓고 계시고. 혹시 어디 아프신거는 아니죠?"
"아니. 나는 그 어느때 보다 멀쩡한걸. 그런 좋은 사람이랑 결혼한다니 당연히 기뻐해야지. "
"그, 아직 약혼이에요. 아가씨."
헤일리는 내 대답에 턱을 괴고는 일부러 불안하다는 얼굴을 하고는 말했다.
"흐으음... 이거 괜히 데미안 공자님 좋은 이야기를 했나보네요. 아가씨 그렇게 긴장 놓고 계시면 안돼요. 사람은 실물을 보고 판단을 해야한다고요. 소문으로 듣기에는 착한 사람일지 몰라도 실상은 전혀 다를 수도 있으니 말이에요! 우리 아가씨 이렇게 순진하셔서 어떡해."
헤일리의 쓸데없는 걱정이 시작되었다. 전에는 이때 데미안의 칭찬을 계속해서 내게 들려줬던 것 같은데 아마 그때 긴장하고 있던 나를 안심시켜주기 위해서였겠지. 지금은 너무 풀어진 모습을 보여주니 반대로 걱정이 되는 것일테고.
하지만 헤일리가 걱정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나는 지금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비록 가장 가까운 곁이 아닌 먼 발치에 불과했지만 데미안이 아닌 '그'를 수십년간 지켜보았었는데 그의 성정 하나 모를까.
자연스레 엘레나는 그와 지냈던 과거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얼굴을 찌뿌리고는 고개를 흔들며 떠오르는 기억들을 다시금 기억의 바다에 묻어버린다.
분명 행복했던 시간들도, 엘레나 자신이 그에게 빠져들었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추억들도 있었지만 그 추억들이 어떻든 결과적으로 그건 실패한 삶이었다.
그의 옆에 있기는 커녕 스스로 뛰쳐나와 제멋대로 굴다가 그를 다른이에게 빼앗겨 버렸고 이후 여러 사건의 끝에 다시금 비어진 그의 옆자리에 들어가기는 커녕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그를 떠나보내야 했었다.
'아니, 처음부터 잘못 되었던 거야. 그러니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시작하면 되는거야.'
첫번째 회귀를 하였을 때 그를 자신이 알고 있던 데미안과 동일시 해서는 아니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과 멀어지려고 온갖 수를 쓰던 그였는데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주먹을 날려 약혼을 파기시켜 놓다니, 주어졌던 기회를 제 스스로 차버린 꼴이었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처음부터 그를 데미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분명 자신은 그와 이어질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와 달리 자신의 감정에 대해 방황할 필요도 없고 이전처럼 그의 곁을 떠날 생각도 없다. 가지고 있는 정보도 그와의 관계도 다른 녀석들과 서 있는 출발선 부터가 다르다. 여기서 패배한다는 것은 이전처럼 나 스스로가 뛰쳐나가지 않는 이상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데미안 기다리고 있으세요. 더 이상의 실수는 없을 테니까.'
그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는 자신도 알고 있다.
이전에는 그것을 몰랐기에 왜 자신에게서 멀어지려고 하는지 이해 할 수 없었고 그렇기에 원망도 했었지만 이제는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이 엘레나 에델바이스는 그가 걱정하고 있는 모든 것을 치워버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여자라는 걸 자각하고 있다.
신(神)을 죽였고 천리(天理)조차 거슬러 올랐다. 그런데 고작 천리에서 파생되는 운명의 억지력 정도 쯤이야 그게 무엇인지 인지만 하고 있다면 문제 될 일은 하나도 없다. 설령 일이 틀어진다 하더라도 방해물은 치워버리면 될 일.
이제 자신이 해야할 것은 그와 앞으로 어떤 행복한 삶을 살 것인지 미리 생각 하고 있으면 된다.
"헤일리?"
"네? 아가씨 왜 부르세요?'
"아이는 몇명이면 좋을까? 역시 한명은 너무 적겠지? 음...적어도 세명? 아니 네명이면 적당하려나?"
"세상에.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실실 웃으며 말하는 엘레나와 그런 자신의 주인의 모습에 질린 듯한 얼굴을 하는 헤일리.
이후 엘레나의 입에서는 나름 진지한 가족 계획이 흘러나왔고 헤일리는 그 말을 얌전히 듣고 있으면서도 정말 자신이 알고 있던 엘레나가 맞는지라는 의문과 함께 피부로 느껴지는 이질감에 그저 혼란스럽기만 하였다.
크라우스 백작가에서 보낸 초대장에 세뇌마법이라도 걸려있던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가 어느덧 두 사람을 태운 마차는 크라우스 백작가의 성에 도착하고 있었다.
***
마음가짐을 달리 하니 세상이 달라 보이는 걸까.
처음에는 그저 증오스럽기만 하였던 백작가의 성이 지금은 오랜만에 다시오는 정겨운 집처럼 느껴질 정도다.
첫번째 삶에는 데미안이 자신에게 온갖 상처를 안겨준 고문실이었고 두번째 삶에서는 '그'가 자신의 연인과 지내던 집으로써 이 성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답답함과 아픔을 동시에 주는 공간이었다.
그런 곳이 마음가짐 좀 달리 했다고 집처럼 느껴진다니 참으로 웃긴일 아닌가.
과거 그러했던 것처럼 안내를 받으며 천천히 그가 있을 방을 향해 걸어나간다. 이전과 같은 긴장감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제가 있을 곳을 찾은 것 처럼 안심이 되었다.
사람이 사는 집에는 그 집에 사는 사람의 체취가 묻어난다고 했나. 단순히 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하고 많은 이들이 거주하는 성이었지만 그럼에도 여기저기에서 그의 흔적이 느껴져 왔다.
미세하게 맡아지는 그의 향기를 따라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사용인이 안내하고 있는 곳과 동일했다. 그렇게 방 문 앞에서니 언제부턴가 손이 떨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문 너머에 내가 알고 있는 '그'가 있다. 데미안이 아니라.'
오랜만에 느껴지는 그의 체향과 존재감에 자동적으로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서둘러 두손으로 해벌레 웃고 있을 얼굴을 가리고는 흥분을 가라앉히도록 한다.
후우우우...후우우....
수차례 심호흡을 하는 것으로 겨우 거쌔게 뜀박질 하고 있는 심장을 잠재운다. 풀어져 있는 얼굴도 이리저리 만져대며 원상태로 되돌리고는 헤일리를 바라봤다.
"헤일리. 지금 나 어때? 어디 이상한데 없지? 그렇지?"
"지금 가장 이상한건 아가씨 정신인데요...뭐, 얼굴은 언제나 평소처럼 아름다우십니다!"
"그냥 아름다운걸로는 안돼! 북부제일, 아니 대륙 최고는 되어야 한다고!"
그러자 헤일리는 내말에 약간 질색한듯 입을 손으로 가리며 말했다.
"엑. 아가씨. 그, 안 부끄러우세요..? 아가씨께서 그 정도로 예쁘시기는 합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스스로 말하는 건...."
이거 전에 네가 나한테 말해 준거 거든!!!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약간 다듬는 정도로 끝내고 헤일리에게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를 보내었다. 헤일리는 내 신호에 고개를 끄덕이며 노크를 두번 정도 하여 안에 있는 이들에게 내가 왔다는 것을 알리고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이전에는 문을 열자마자 그를 향해 달려들어 턱에 주먹을 날렸었다. 그 덕에 대화라고 할 것도 없이 곧바로 우리는 서로 파혼을 선언했었지만 그렇다면 평범하게, 원래의 엘레나 아델바이스로 들어간다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문이 열리자 자신과는 대비되는 밤의 어둠 처럼 새까만 흑색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온다.
의자에 앉아있는 이는 자신의 머리색과 같은 검정색의 원단에 금사로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정복을 입고 있었다. 분명 방문이 열렸을 때만 하여도 화산같이 폭발할 것 같은 기세를 내뿜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부터 깔끔하게 갈무리 되어 그를 고고한 귀공자로 만들어 주었다.
용의 것을 닮은 그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고 이내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언제나 보아도 아름다운 색이다. 과거 데미안을 보았을 때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던 그 색이 지금은 하늘에 떠있는 태양처럼 밝고 따스하게만 느껴졌다.
눈을 마주한지 몇분이나 되었을까. 나에게는 영겁처럼 느껴졌던 그 시간이 실제로는 찰나에 불과했는지 벽에 붙은 시계의 시간은 1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가 나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이전에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있었나? 그야 당연히 많았지. 그는 자신의 연인과 있을 때는 언제나 그녀에게 저런 얼굴을 지어주었으니까. 저런 미소를 나에게 지어준 적은 그가 내 품에서 숨을 거두기 전 그 단 한번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헌데 이제는 그 미소가 자연스레 나를 향해 있었다. 이것 하나 만으로도 내가 회귀하기 전 느꼈던 모든 감정들과 괴로움이 보상받는 것 같았다.
곧이어 부드러운 미성이 내 귀에 들려왔다.
"반갑습니다. 에델바이스 영애. 저는 크라우스 가의 장남 데미안 크라우스라고 합니다."
그 미소와 함께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심장이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이미 머리는 정상적인 사고를 하기를 포기하였다. 이성이 제거되어 본능밖에 남지 않은 머리는 오로지 내 욕망만이 가득한 상상을 계속해서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신위에 다다른 지성이 그걸 내 몸으로 행하지 않도록 막은 것이었다.
만약 그것을 여과없이 드러냈을 경우 그가 무슨 눈으로 나를 볼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이성과 욕망이 뒤섞인 머리가 판단하길 한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의 나는 그가 나에게 말해준 그저 형식적인 한마디 만으로도 너무나도 행복해 한다는 것이었다.
이거 너무 쉬운 여자 아닌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