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 어림도 없지. (1)
사람들은 말한다.
여명의 탑의 주인 '백야의 마녀'의 마법은 신역(神域)에 도달했다고 말이다.
신위를 함부로 입에 담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범주를 뛰어넘은 초월자들이라고 해도 금기시되는 그야말로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미 온 세상 사람들에게 살아있는 현인신(現人神)으로서 추앙받고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이계에서 건너온 바깥의 신들이 도래했을때 하늘이 열리고 땅이 뒤집어지며 그곳에서는 수만의 마물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 여파만으로 이계에 가장 가까웠다던 대륙 7대 마탑 중 하나인 '황혼'이 무너져 내렸고 그들이 대지에서 서서 본격적으로 군세를 형성하자 영원불멸할 것 같은 인간들의 제국은 수십개로 쪼개져 사분오열(四分五裂) 되고 말았다.
대륙의 지배자라고 불리는 인간들이 무너지자 변방에서 살아가고 있던 이종족들은 오죽할까. 아예 멸종을 당한 종족도 있었고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전부인 이들이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그것이 이 대륙의 끝은 아니었다.
그렇게 절망 뿐이 남아있는 지상에 살아남은 이들을 규합하고 세상이 멸망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초월자들을 한대모아 외신들에 대항하게 만든 이는 누구인가.
하늘이 열린 후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이는 심연을 걷어내고 빛을 세상에 다시 내린것은 누구인가.
신을 하늘에서 땅으로 끌어내리는 것으로 모자라 범접하는 것 조차 불가능 했던 신체(神體)를 조각내고 조각내어 완전히 파멸시킴으로서 신살의 위업을 이루어낸 영웅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지지않는 태양이자 여명의 탑주. '백야의 마녀' 엘레나 에델바이스.
그 모든 위업을 일궈낸 이 영웅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이 대륙에 단 한명도 없었다.
멸망을 코앞에 둔 세상을 구해내자 사람들은 그녀를 영웅으로 추앙했고 만인이 보는 앞에서 모든 사태의 원인이 되는 이계의 신을 파멸시키자 그녀를 신으로서 모셨다. 자신들이 믿고 있던 신들 조차 이루어내지 못한 일인데 그것을 모두가 보는 눈 앞에서 증명해낸 그녀가 신이 아니고서는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살아남은 모든 초월자가 그녀의 앞에 무릎 꿇었고 그들 중에서도 그녀를 신으로 믿는 이들이 생겨났으니 평범한 범인들 사이에서는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았다.
그런 그들의 믿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녀의 업이 정말로 신위에 오른 것이었을까. 그녀는 마침내 그 어떤 신들도 건들지 못한 천리(天理)를 뒤집어 버렸다.
***
"엘레나 아가씨. 일어나세요. 거의 다 도착했어요."
"으긋...응으으....음?"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에 이끌려 어둠 속에 잠겨있던 의식이 부상하기 시작한다. 아가씨라니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호칭이다. 비록 미모는 젊은 시절을 유지하고 있으나 이제는 100여년을 훌쩍 넘긴 나이인만큼 이리도 낯간지러운 호칭으로 자신을 부르는 이는 없었다.
같이 전장을 누비던 전우들 마저 자신을 보며 신님 신님 거리는데 다른 이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지금 나를 이렇게 살갑게 부르는 이는 대체 누구일까?
감겨있던 눈을 떠보니 그리운 얼굴 하나가 들어왔다. 100여년이 넘는 오래된 삶을 살았지만 그녀의 기억은 그 누구보다 또렷했고 빛나는 지성은 기억의 바다에서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소녀를 금세 건져내었다.
"헤, 일리....?"
"네. 아가씨의 담당 시녀이자 메로힘의 귀염둥이 헤일리에요. 그보다 아가씨 아직 잠이 덜 깨신것 같으시네요. 어떻게 이런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그렇게 푹 잠을 주무실 수 있으신 건지. 그래도 지금은 정신 차리셔야해요! 곧 약혼자 분을 만나시는데 이렇게 눈곱 잔뜩 붙은 흐리멍텅한 얼굴로 만나실 수 는 없잖아요!!"
"뭐?"
헤일리의 속사포 같이 쏟아지는 말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만 그 와중에도 한가지는 똑똑히 귀에 들어왔다.
그 말을 듣자마자 엘레나는 곧바로 마차의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창한 봄의 햇살. 크고 작은 새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잘 가꾸어진 도시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마차가 모퉁이를 하나 돌자 저 멀리 아름다운 성이 하나 보이기 시작한다.
높게 솟은 첨탑과 굳건해 보이는 성벽. 자신은 이곳이 어딘지 알고 있다.
지금 보는 이 모든 것들은 이미 자신의 기억 속에 한번 들어왔던 것들이라는 걸 그녀는 보자마자 눈치 챌 수 있었다.
"진짜 돌아왔구나....."
원래는 모두 폐허가 되어 부서져 있어야 할 건물이 멀쩡하게 남아있다.
자신의 눈 앞에서 죽었던 사람이 웃는 얼굴로 살아있고 세상은 멸망하기 이전의 생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저 이루어질 수 없는 헛된 소망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만들었을 뿐인데 그것이 이리 실현될 줄이야. 그야말로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마법의 수식은 모두 머릿속에 남아있었지만 그럼에도 이해되지 않는 것으로 가득하다.
그 이해되지 않는 반쪽짜리 수식이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회귀'는 그야말로 우연의 산물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네? 아가씨 뭐라고 하셨어요?"
"아니야. 아무것도."
"에이, 거짓말. 갑자기 그런 얼굴을 지으시는데 아무일도 아니겠어요? 분명 약혼자 분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제가 그럴 줄 알고 미리 다 준비를 해놨다구요. 제가 알아본 결과 아가씨의 약혼 상대이신 데미안 공자께서는 이 근방에서 친절하기로 유명하다구요. 얼굴도 엄청 잘 생겼어요! 아, 아가씨는 이미 초상화를 보셨..."
"헤일리. 조용."
엘레나의 차가운 대답의 헤일리는 꾹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 이름을 듣자마자 무심코 마력이 흘러나와 버렸다. 자신에게 있어서도 이미 오래전의 일의 불과했지만 그때 그가 남긴 상처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엘레나. 오, 아름다운 나의 엘레나. 너는 내것이다. 나만의 것이야.'
'어째서 다른 곳에 눈을 두는 거지? 네 눈은 오직 나만을 바라보라고 있는 것이다. 남에게 시선을 주지 말란 말이다. 다음에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 두눈을 파내겠다.'
'왜 그런말을 하는 것이지. 네가 나를 떠나겠다니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 너는 절대 나를 벗어나지 못해!! 엘레나 에델바이스는 나 데미안 크라우스의 것이라고!!!!'
"쯧."
과거 그의 진흙탕 같은 집착에 희생되었던 나날들을 생각해 보면 치가 떨려온다. 과거로 돌아온 기념비 적인 날이 하필이면 그와 처음으로 만나는 날이라니.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속이 매쓰꺼워지지만 그래도 약혼식이 끝난 이후가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가.
지금이라면 별다른 복잡한 절차 없이 약혼을 파할 수 있으니 따지고 보면 최적의 타이밍이 아닐 수 없다.
'딱 기다려라 데미안. 만나자 마자 네놈의 턱주가리를 날려버려 주마.'
그런 무서운 생각과 함께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창밖을 바라보며 손을 풀고 있는 자신의 주인의 모습에 정말 저분이 자신이 알고 있는 아가씨가 맞는지 혼란스러운 헤일리였다.
크라우스 가문의 성에 도착하기 까지는 별로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자신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사르함에 들어온 후였고 영주성은 눈에 들어올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남부의 대영주라는 위용의 알맞게 성은 크고 화려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의 무너지고 다 부서져 가는 폐허가 아닌 뛰어난 조각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예술품과도 같았다. 성의 정문에는 크라우스 백작가의 상징인 검을 휘감은 용이 새겨져 있어 마치 용이 문을 수호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마찬가지로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정복을 입은 기사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는데 제국에서 손 꼽히는 검술명가 답게 그들의 기세는 드높았다.
성의 주인되는 크라우스 백작이 대륙에 다섯명 밖에 없는 소드 마스터인 만큼 그의 가문의 병사들의 실력이 없을리 없다. 생각해보면 데미안은 참으로 돌연변이 같은 존재다. 크라우스 백작은 물론 데미안의 동생인 알폰스는 모두 뛰어난 무인에 인격자였지만 오직 데미안 만은 자신의 아버지와 닮은 것은 외모 뿐 그 외 모든것이 단점 투성이인 남자였다.
마차에 새겨진 에델바이스 가문을 상징하는 늑대를 확인하고 다가온 기사들에게 헤일리가 신분을 증명하는 백금패를 보여주었고 이후 별다른 검사 없이 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가씨. 긴장하지 마시구요. 평소 하던대로만 하시면 되요. 아, 그렇다고 너무 의기소침해 계시지는 마시구요. 데미안 공자님이 잘나간다고 하시지만 어디 우리 아가씨만 하시겠어요? 당연히 우리 아가씨가 최고지. 북부최고미녀! 아니 제국, 대륙제일미!! 우윳빛깔 엘레나!!!"
"헤일리. 너가 그런 말을 하니까 더 긴장되는 것 같은데?"
"헉! 알았어요!! 저 이야기 끝날 때 까지 숨 참을게요! 흡!"
"프흡.. 농담이야.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마 순식간에 끝날테니까."
그와 대화를 나눌 생각은 일도 없다. 지금 엘레나의 머리를 지배하는 것은 자신의 손으로 데미안을 때리는 것 뿐. 회귀 이전의 데미안은 가문에서 파문되었을 뿐더러 뒤늦게 찾아 복수를 하려고 했어도 세상의 멸망이 코앞으로 다가와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의 신경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을 거슬러 돌아옴으로서 자신의 손으로 그를 단죄할 기회가 주어졌다. 이를 헛으로 넘길 생각은 없었다. 아직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었지만 어차피 녀석은 쓰레기라고 불러도 모자람 없는 인간이다. 이왕 파혼할거 화끈하게 저질러 주는 편이 자신의 정신건강에 이롭다.
그러니 옆에서 헤일리의 입에서 들려오는 데미안의 선행들은 그의 본질을 알고 있는 자신에게 있어 불쾌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
어째선지 이전 생에서 들어본적 없는 죄다 처음듣는 낯선 이야기들이었지만 무엇이 되었든 간에 실상은 모두 조작된 것일게 분명할 터. 딱히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그럼 아가씨 힘내세요!"
어느덧 데미안이 있는 방 앞에 도착했다. 헤일리는 두손을 불끈 쥐며 응원을 보내왔고 나 또한 두손을 불끈 쥐며 기도(氣道)를 가다듬었다.
비록 내가 마법사이기는 하다만 무인들의 정점에 이른 이들과 싸워본 몸이다. 일반적인 무가의 자제라면 몰라도 그 게으른 데미안 정도는 지금의 간단한 호신술 정도로도 제압이 가능할것을 확신했다.
신역에 도달했던 감각이 방안의 존재감을 감지해내었다.
소드 마스터는 아니더라도 그의 근접한 경지에 오른 강자가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데미안은 아닐테고 그렇다면 그의 전속 집사인 켄인가? 이전에 그와 자주 마주친 것은 아니라 잘 몰랐지만 이런 실력을 숨기고 있었을 줄 은 몰랐다.
"엘레나 에델바이스 영애께서 오셨습니다."
헤일리가 문을 노크하며 내가 왔다는 것을 알린다. 그러자 방 안에서 느껴지던 기세가 더욱 휘몰아치는게 느껴졌다.
그것이 시발점이었다. 헤일리가 문을 열자마자 나는 켄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헤이스트」 까지 사용하며 데미안을 향해 달려들었고 곧바로 마력으로 강화된 주먹을 그의 턱을 향해 내려꽂았다.
쾅ㅡ!
사람의 몸과 몸이 부딪쳤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법까지 사용하며 내지른 주먹이니 어느정도 단련한 무인이라 할지라도 맨몸으로 맞는다면 어디 한군데가 부러질 정도의 충격은 되었을 거다.
하지만 눈 앞에 나타난 결과는 내가 생각 하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 입니까. 엘레나 에델바이스."
분명 턱이 부서진채 드러누웠어야 할 데미안이 내 주먹을 여유롭게 잡아채고는 크라우스 가문 특유의 용을 닮은 금안(金眼)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그'와의 첫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