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파혼을 위하여 (5)
크라우스 백작가가 대귀족이라고는 하지만 아침 메뉴 마저 휘황찬란한 성 처럼 화려하지는 않다.
귀족이라고 해서 음식에 금가루를 뿌려 먹지는 않는다. 물론 하자고 한다면 할수는 있겠지만 굳이? 라는 생각이 앞설 뿐더러 괜한 사치는 오히려 귀족이기에 좋지 않다.
시종이 준비된 식사를 가지고 들어왔다. 오늘의 아침은 주방장의 특제 소스로 양념된 작은 스테이크와 적당히 잘 구워진 계란 후라이. 그외에도 따뜻한 스프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종류의 요리가 준비되어 있었지만 모두 한입에 먹을 수 있게 작고 양도 그리 많지 않았다.
엘레나가 나이프를 들어 고기를 작게 잘라 소스에 한번 푹 찍고는 그대로 입에 넣었다. 맛이 마음에 들었는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는 엘레나. 그 얼굴을 보고 나서야 나는 안심하고 식사를 시작 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나도 나이프를 들고는 고기를 썰어 입에 넣었다. 사용된 고기가 최상급이어서 그런지 부드러운 살코기에서 베어나오는 육즙이 예술이다. 입맛이 고급으로 변한지는 꽤 된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식(美食)은 언제나 질리지 않는다.
"데미안은 고기를 좋아하나요?"
"네?"
잠시 맛의 황홀경을 경험하고 있어 주위의 시선을 신경쓰지 못했는데 바로 맞은 편에 앉은 엘레나는 내가 스테이크를 먹는 모습이 신기했는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나를 보고 있었다.
"물론 좋아 합니다만. 정확히 말하자면 고기보다는 맛있는 걸 먹는 것을 즐긴다고 하는게 맞겠네요. 엘레나의 입에는 어떤가요?"
고기는 진짜 어지간하게 품질이 좋지 않은게 아닌 이상 잘 구우면 거의 다 맛있으니 맞는 말이지.
"제 입맛에도 잘 맞아요. 크라우스의 주방장은 정말 못하는게 없네요. 디저트의 수준도 그렇고 정말이지 이곳에서 계속 살고 싶을 정도에요."
"하하. 칭찬 감사합니다. 식사가 끝나고 나면 성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때 똑같이 말씀해 주신다면 주방장도 기뻐 할 것입니다."
설마, 그게 나하고 약혼하자는 이유는 아니겠지?
손을 모으며 감탄하는 그녀의 모습에 순간 그것이 그녀의 약혼사유가 아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그런거라면 좋을 텐데. 주방장의 요리가 그리워지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내가 이야기에 직접적으로 끼어드는 것 보다는 낫지 않은가.
엘레나는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드문 드문 눈에 들어오는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정원의 모습에 연신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내가 보기에는 한낱 꽃 따위보다 지금 기뻐하는 그녀의 얼굴이 더 아름답게 느껴졌지만 지구의 러시아와도 같은 차디찬 눈의 땅, 메로힘에서 자란 그녀에게는 남부의 이런 모습이 색다르게 느껴졌을 것이다.
"메로힘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기 힘들거든요. 아버지께서 온도를 조정해주시는 마법을 걸어둔 유리화원이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제가 유리창 너머에서 햇살을 받고 있는 꽃들을 보는 것은 처음이에요."
내가 알기로는 메로힘에서 일본 삿포로의 눈축제와 같은 행사가 있는 걸로 기억하고 있는데. 아마도 내가 그 축제에 갔다면 저런 반응이 아니었을까 싶다. 사계절이 있는 나라에서 자란 나로서는 똑같이 사계절이 존재하는 이곳 보다는 1년 내내 눈이 있는 지역이 오히려 더 이국적이고 새롭게 느껴지니 말이다.
'그것보다..'
이 녀석 텐션 너무 높지 않나?
어제와는 완전 딴판인데. 정말 내가 알고 있는 그 엘레나 에델바이스가 맞나?
약혼 하자는 것도 그렇고 점점 원작에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엘레나의 이미지와 많이 멀어져 가고 있다. 설마 원작이 시작되었을 때의 그 성격을 완성시킨 것이 데미안이었던 건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나와는 관계 없는 일이야.'
그녀의 성격이 원작에 비해 어떻게 바뀌었든 데미안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다. 그녀로서는 오히려 더 좋을 지도 모른다. 지금 부터 내성적인 부분을 많이 고쳐두면 이후에 있을 쓸데없이 고생할 일들을 미리 줄일 수 있는 셈이니 이것이 그녀에게 악영향이 될리는 없는 일이다.
그녀의 하이텐션의 성격에는 신경을 끄기로 결론 내린다.
이후에는 그녀가 이곳 사르함에 와서 보고 느낀 점과 감탄했던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왔고 그것을 내가 적당히 호응해 주는 형식으로 대화가 이루어졌다.
때마침 켄에게 말해둔 디저트가 도착해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아, 데미안! 여기에 오는 길에..."
"그러시군요. 그것 참 신기한 일이었겠네요. 자, 여기 마카롱입니다. 드세요."
"와! 고마워요."
냠!
"...아, 데미안! 마카롱 하니까..."
"그러시군요. 제도에 그렇게 유명한 가게가 있었다니 다음에 같이 한번 가보는 것 어떻겠습니까? 아, 여기 마카롱입니다. 드세요."
"와! 고마워요."
냠!
"...아무튼 그래서 엄청 신기했어요! 저 그런거 보는 거 처음이었어요!!"
"그러시군요. 여기 마카롱입니다. 드세요."
"고마워요!"
냠!
엘레나의 말이 끝나지 않는다.
마치 무한루프에 빠져 있는 것 마냥 나는 그녀가 한가지 이야기를 끝낼 때마다 마카롱을 건내주고 그녀는 그 마카롱을 먹고 또 이야기를 계속한다.
아이처럼 좋아라 하며 말하는 것이 귀여워 한번 물려줬을 뿐인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뭐지? 레퀴엠인가? 나는 이 대화의 끝을 볼 수 없는거야?
엘레나의 입은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대체 원작의 데가놈은 무슨 짓을 했길레 이렇게 말 많은 아이를 그렇게 말이 없게 만들었을까. 생각해 보면 원작에서도 남주 후보 놈은 아니지만 엘레나가 한 동성 친구와 대화를 할 때는 말이 굉장히 많아졌던 것 같다.
그 친구는 엘레나가 마음의 문을 열어준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고 그렇다면 엘레나가 나를 그 정도로 편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인데, 이유는 몰라도 나를 그리 생각해 준다는 것이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비록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과는 완전히 정반대 되어 있다만.
어느세 준비된 마카롱이 전부 떨어졌다. 다른 디저트는 여전히 남아있지만 이것 까지 사용하다가는 아마 우리는 오늘 이 방에서 나가지 못할게 분명하다. 지금이 딱 끊고 밖을 둘러보기 적절한 타이밍이다. 나는 어제의 궁금증을 해결할 겸 대화의 주도권을 다시 가져왔다.
"엘레나. 한가지 물어볼게 있습니다."
"? 아,아아.. 너무 제 이야기만 했네요. 죄송해요. 그, 너무 신이나서..."
"아니요. 괜찮습니다. 엘레나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다만 저희 약혼에 대해 물어볼게 있어서."
"약혼? 아! 그러고 보니 저희 약혼식은 언제 할까요?"
"네?"
이건 또 뭔 소리여.
나는 그녀의 말에 벙찐 표정을 지었지만 엘레나는 그런 내 얼굴을 보지 못했는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역시 봄이 좋겠죠? 아니, 봄에 해야해요! 활짝 핀 꽃에 둘러싸여 식을 올리는 것은 예전부터 꿈꿔온 일이었거든요. 아, 그것은 결혼식 때 하고 약혼식은 데미안이 저희 집으로 와서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메로힘이 다른 건 몰라도 풍경 하나는 보기 좋으니까요."
"에? 네? 어, 잠깐. 잠깐만 진정해요. 엘레나."
폭주기관차 마냥 거침없이 말을 내뱉는 그녀를 간신히 멈춰 세웠다. 조금이라도 늦었다가는 아직 성인식도 안된 몸으로 2세 계획까지 들었을지 모른다.
이건 너무 급발진인데.
뭐라 지적을 하고 싶어도 생글생글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니 아무리 봐도 진심이라 무슨 말부터 해야하는지 짐작이 가지를 않았다. 원래라면 두근거려야 할 심장도, 그녀의 얼굴을 보면 항상 기어나오던 음습한 욕망도 그녀의 기세에 짓눌려 당황스럼 만이 내게 남았다.
그녀에게 어떻게 말을해야 할지 기나긴 고심 끝에 나는 그냥 원론으로 돌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이미 원작과 많이 틀어진 것으로 보이는 엘레나의 성격으로 보아 어떤 반응일지는 미지수 였지만 그래도 한번 속 시원하게 말 하는게 나을것 같았다.
저 웃는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에 대한 두려움이 몰려왔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엘레나. 저희 아직 약혼에 대해서 명확히 이야기 하지 않았잖아요. 무엇보다 약혼은 아직 시기상조..."
"네?"
차갑다.
단 한마디였지만 그 말 한마디가 내게 주는 느낌은 영구동토에서 불어오는 블리자드 그 이상의 것이었다.
방금 전까지 햇살 처럼 따스한 미소를 비춰주던 얼굴은 차가운 달빛으로 변했으며 그녀와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아까와는 정반대되는 목소리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데미안."
"네, 엘레나."
분명 날씨는 따뜻한데 내 손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은 얼음장 처럼 차가웠다. 엘레나는 내 손의 온기를 탐하듯 계속해서 손을 어루만져댔고 나는 손을 타고 올라오는 냉기에 몸을 떨었다. 절대 그녀의 분위기에 겁먹은 것은 아니었다.
가느다란 그녀의 손에 점점더 힘이 들어갔다. 아프지는 않았다. 단지 그녀가 내게 왜 이러는지 의문 만이 남을 뿐.
하지만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할 일말의 여지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내게 말했다.
"데미안이 그랬잖아요. 저의 선택을 존중해 주겠다고. 그리고 저는 당신과의 약혼을 선택했어요. 그거면, 그거면 충분한것 아닌가요?"
절대 녹지 않을 것 같았던 얼음이 녹아내려 물이 떨어졌다.
얼어붙어 있던 그녀의 얼굴에는 물기가 가득했으며 나를 바라보는 자주빛 눈동자는 흘러넘칠 것 같은 물방울로 일렁거렸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에요."
부서질것 같다.
살짝 만지기만 해도 금이 가는 살얼음이 이러할까. 어딘지 위태로워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홀려버리기라도 했는지 나는 내가 절대 꺼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말을 입에 담고 말았다.
"미안해요."
내 손을 붙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두손으로 맞잡았다. 여전히 얼어붙을 것 같이 차가웠지만 그래도 지금은 잡아야만 한다. 그래야만 할것 같았다.
"당신에게 불안감을 주려고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너무 갑작스러워서. 서로를 알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려고 하던거였어요. 그게 전부에요."
그리 잡은 손을 당겨 그녀를 내 품으로 끌어당겼다.
품 안에 쏙 들어온 그녀의 등을 천천히 토닥이며 그녀가 진정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가슴에 닿아 느껴지는 그녀의 숨결이 점차 안정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렇게 내 품에 안긴 그녀의 모습에 어째선지 미소가 지어지면서도 동시에 착잡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