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 파혼을 위하여 (4)
"돌겠네. 진짜."
모두가 잠든 새벽. 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얇은 책 한권을 꺼내고는 작게 내뱉었다.
내 손에 들려있는 책의 연녹색 가죽 커버에는 아무런 제목도 적혀있지 않았다. 그야 시중에서 파는 책이 아닌 내가 직접 적은 책이니 당연한 것이었다. 그 증거로 책의 내용은 이곳에서 사용하는 글자가 아닌 모두 한글로 적혀 있었다.
첫장은 무질서한 단어의 나열로 채워져 있어 내가 처음 빙의 했을 당시의 다급함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그때는 닥치는대로 책의 내용을 떠올려 적어 넣는데에만 집중했으니 책에 적혀있는 글자들은 문장이라고 하기에는 조잡하였고 만약 누가 본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문자인지 지렁이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엉망인 글씨체였다.
쓴 당사자인 나도 다시보면 못알아 먹게 생긴것이 여러개 있어 이후 이것을 정리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한장 한장 뒤로 넘겨 도착한 책의 어느 한부분에서 나는 손을 멈췄다.
거기에는 앞에 부분과는 달리 또박또박하게 글씨체로 이렇게 적혀있었다.
[1. 엘레나 에델바이스와의 파혼. 이후 어떠한 특이점이 발생할지 요주의 할것.]
"요주의는 개뿔."
손에 들린 만년필이 책에서 글씨를 파낼듯이 종이를 긁어댔다.
취소선이 수차례 그어져 이제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문장을 보며 오늘 있던 일들을 떠올려 본다.
분명 계획대로 였다면 오늘 그녀와의 만남에서 파혼을 하거나 아니면 간단한 인사치례만 하고 끝낼 일이 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그녀가 마지막에 했던 말이 아직도 내 귓가를 맴돌고 있다.
'그러면 저희 약혼 할래요? 정식으로.'
"왜 거기서 그런 말이 나오는 건데..."
그 자리에서 나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권리까지 떠 넘겨 가며 엘레나 스스로가 선택하도록 만들었다. 그야 그녀가 나와의 약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그런 일을 벌인거였지만 일의 결과는 내 상상과는 정반대로 일어나고 말았다.
세상에. 그 엘레나 에델바이스가 내게 약혼 제안이라니.
그녀의 입에서 약혼하자고 말했을 때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는 모르겠다만 분명 바보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을게 분명하다.
오늘을 위해 소설을 바탕으로 알고 있는 그녀의 성격을 생각하며 수십 수백의 질문과 답변을 준비했었지만 그 중 어디에도 그녀의 약혼 제의에 대한 답은 없었다.
단 한번도 그녀가 내게 약혼을 하자고 말 할것을 생각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원작에서 엘레나가 이런 말을 다른 남주 후보들에게 한 적이 있었나? 일단 내 기억에는 없는데."
하기야 소설 속에서 그런 말을 들은 녀석이 있다면 이 남주 후보라는 명칭은 쓸일이 없었겠지.
엘레나 에델바이스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소설에서 남자 주인공이라는 위치는 이 소설의 장르가 로맨스인 만큼 그녀와 이어지는 캐릭터를 뜻 한다. 하지만 판타지 소설에서 남자 주인공의 주변에 수많은 히로인이 있는 것 처럼 여기에도 그녀에게 반하는 여러 남자 캐릭터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 누가 엘레나와 이어질지 명확히 정해지지 않아 다들 약식으로 후보라고만 불렀다.
소설 속에서는 엘레나가 어떤 후보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
그녀를 좋아하는 놈들이 서로 도움을 주려고 이것저것 하면서 일어나는 나비효과와 이후 그 사실을 안 엘레나가 뒷수습을 하는 등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형식이였지 남녀간의 서로 썸을 타거나 막 대놓고 연애를 하는 그런 일반적인 로맨스 판타지의 전개 방식은 아니었다.
뭐, 이야기가 마지막 까지 간다면 남자 주인공이 정해지고 로맨스 위주의 전개가 될 수 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소설은 완결이 난 소설이 아니었고 적어도 내가 이곳에 빙의하기 전까지의 전개에서는 그녀가 직접적으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묘사를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그때의 엘레나는 데미안과의 관계에서 크게 데여 남자에 대해 마음의 문을 굳게 닫은 상태여서 그렇지 지금의 엘레나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면 바로 그것이 이유가 될 수 있는 가 하겠지도 싶지만 내가 알기로는 지금 그녀의 곁에는 소꿉친구라는 관계로 이루어진 남주 후보 하나가 있는 걸로 알고있다.
비록 지금은 틀어졌지만 내가 안심하고 계획을 세울 수 있게 한 요인이기도 하다.
대륙 7대 마탑중 하나이자 엘레나의 가문인 여명의 에델바이스와 상극에 있는 황혼의 에르트웬.
그 에르트웬 가문의 적장자이며 훗날 이계의 연결자라고 불리는 대마법사 리처드 에르트웬이 내가 생각해둔 안배였다.
원작에서도 소꿉친구인 엘레나와 리처드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을 뿐더러 그 쪽에서는 이미 오래전 부터 엘레나를 짝사랑하고 있었다고 서술되었던 만큼 나는 엘레나가 적어도 나와 리처드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고 하면 당연히 리처드를 고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엘레나가 그 녀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글에 묘사된 적이 없어서 모르지만 적어도 오늘 처음 만난 나보다는 가까운 사이일게 분명할테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엘레나가 리처드를 생각해 파혼을 할거라고 예상했건만 내 생각만큼 리처드를 이성으로 보지 않았던 걸까.
그 예상은 아주 보기 좋게 빗나갔다.
"왜 그렇게 능력있는 소꿉친구를 두고 나를 택한건지 도저히 알 수 가 없네."
아직 어린 나이에 불구한 지금에도 리처드 에르트웬은 에르트웬 가문이 낳은 마법천재로 명성이 자자하다. 그에 비하면 나는 우리 가문이 무가(武家)로서 이름 높은 것이지 내가 딱히 명성을 떨치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딱 검술명가의 장남. 이 정도?
이렇게 같이 지낸 시간, 능력 에서도 차이가 나는데도 그녀가 날 고른게 이해가되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거다.
오늘 있었던 만남에서도 그녀에게 스스로 선택을 하도록 강요했지 약혼을 하자고 강요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와 대화하는 도중 줄곧 나는 나와의 약혼을 하지 말라는 뜻을 넌지시 내비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리 답했다는 것은 그 약혼하자는 말이 온전히 그녀 스스로 내린 결정이라는 말이된다.
그렇다면 엘레나는 대체 나의 무엇을 보고 그런 답을 내린 것일까.
이세상에서 그녀 자신을 제외하고, 아니 어쩌면 그녀보다 더 잘 알지도 모르는 나로서도 아무리 고민해 보았지만 그 답을 찾을 수가 없다.
그렇다는 건 여기에 대한 해답은 온전히 그녀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건 아직은 해보는게 어떠냐는 제의일 뿐이지 나는 아직 거기에 대해서 답을 하지 않았어. "
고민해 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차라리 고민을 하지 말고 다른 방도를 생각하는게 훨씬 낫다.
원작의 시작 까지는 아직 1년이라는 시간이 남아있다. 그 사이에 어떻게든 약혼을 깨는 쪽으로 유도하면 될터. 그렇다면 원작의 데미안처럼 악행을 저지르지 않고 그녀가 내게 학을 때게 하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다시 생각에 잠겨보려고 하지만 앞서 머릴 너무 많이 사용한 반동인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고 머리가 지끈거리기만 한다.
"아, 모르겠다. 그냥 잠이나 자자."
나는 그만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였다.
***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가 어두웠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듯 맑고 푸른 하늘을 보여주었다.
침대는 마치 타임머신과 같다. 잠깐 누워있기만 하여도 순식간에 시간을 지워주니 그야 말로 마법 같은 물건이 아닐 수 가 없다. 이전 생에 사용하던 싸구려 침대도 그러했는데 그와 비교할 수 없는 백작가의 물건이라면 더하면 더했지 절대 현대의 기성품보다 못난 점은 없었다.
내방에 있는 침대는 내가 이곳에 빙의하여 바뀌어버린 삶 속에 몇 안되어 만족하는 것 중 하나이다.
깊은 잠에서 일어나서 그런지 목이탄다.
나는 시종을 불러 찬물을 한잔 들이키고는 그대로 욕실로 들어가 몸을 씻었다. 과학이 아닌 마법으로 움직이는 분무기. 이곳에서 지낸지 꽤 오랜시간이 지났음에도 언제봐도 신기할 따름이다. 몸에 부딪히는 물방울들이 남아있던 잠을 앗아간다.
방으로 돌아가니 언제왔는지 모를 켄과 그의 손에 준비되어 있는 의복이 눈에 들어온다.
고급진 흑색 원단으로 만들어진 옷의 왼팔 부분에는 크라우스 백작가의 상징하는 용이 금사(金絲)로 새겨져 있다. 사치라고 하기에는 단정하고 고아하다.
수건으로 몸에 묻어있는 물기를 닦아 내고는 자연스래 켄에게서 옷을 건내받아 입었다.
"백작님께서 조찬에는 오시지 말라고 하십니다."
"음? 저 뭐 잘못했어요? 갑자기 아들 아침을 굶기시네."
"그게 아니라 동쪽 별관에서 에델바이스 가의 아가씨와 같이 드시라고 하셨습니다."
"....완전히 붙여 두려고 하시는 구만. 아버지께 알겠다고 전해줘요."
얼굴을 찡그리는 내 모습에 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왠지 언짢아 보이십니다만. 설마 도련님. 아가씨께 무슨 실례라도?"
"아니, 제가 얼굴을 찡그리는데 왜 제가 실례를 끼친게 되는거에요? 상식적으로 엘레나 영애가 했다고 생각하는게 맞지 않나?"
"그럴리가요. 도련님게서 무의식적으로 뭔가 했다면 모를까 엘레나 영애는 아니죠."
"켄. 제 집사 맞아요?'
"농담입니다. 농담. 그런데 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그렇게 아름다운 약혼녀를 얻으셨는데 기뻐 하셔야죠. 제 나이 50 평생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혹시 진짜로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요?"
순박한 노집사의 얼굴에 걱정이 드리운다. 나는 켄에게 걱정 말라고 일러두고는 옷매무새를 마저 가다듬고 아침이 기다리고 있을 별관으로 향했다.
아침의 저택은 생각보다 부산스럽다. 사용인들은 일어나자마자 각 창문에 달려있는 커튼을 치고 외부 내부 할것 없이 청소를 시작한다. 내가 데미안의 몸에 들어오고 나서는 최대한 모범생처럼 굴었더니 만나는 이들 마다 모두 웃는 얼굴로 내게 인사를 하며 맡은 일을 하러 떠났다.
옛날에는 시녀들이 아버지 어머니 몰래 먹으라고 캬라멜이나 간식들을 쥐어줬는데. 지금은 몸이 어느 정도 자라서 그런지 간식을 주는 일이 없어져 조금 아쉬운 일이었다. 내가 단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내게 호의를 표하는 것 까지 싫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어제 있던 일이 떠올랐다.
"아, 켄. 주방장에게 조찬 이후에 어제와 같은 디저트를 준비해 달라고 해주세요."
"도련님은 단걸 잘 안드시...아. 네 알겠습니다."
켄은 잘 알겠다는 얼굴로 웃으며 답하고는 별관, 이실리아관의 문을 열었다.
"도련님. 그러면 아가씨와 좋은 식사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켄도 좋은 아침 되기를."
켄이 열어준 문을 지나 들어가자 햇빛에 의해 반짝이는 방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 쪽 면이 연금술사들의 공방에서 만들어진 유리로 된 이실리아 관의 벽은 저택 내부에서 아침 햇살을 받고 있는 꽃들의 정원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공간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지금 내눈에 들어오는 것은 꽃이 아닌 한 사람이었다.
순은 같이 새하얀 백발이 유리를 통과한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다. 마치 지상에 별이 내려온 듯 밝은 빛을 내고있는 그녀는 주변의 다른 것들을 눈에 들어오지 않게 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상당히 위험하다.
그녀에게 보이지 않게 손을 다리 뒤로 숨겨 꼬집고는 작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엘레나."
수정 같이 맑은 자줏빛 눈에 내 얼굴이 담기자 그녀가 웃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데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