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파혼을 위하여 (2)
나는 지금 태어난 이래 가장 크게 긴장하고 있다.
두근두근ㅡ
이렇게 터질듯이 펌프질하는 심장이 그 증거다. 아버지와 함께 나간 첫 마수사냥에서도 이리도 크게 뛴적이 없는데 저 여자가 눈앞에 있는 것 만으로도 내 몸은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안되는 위기가 찾아왔다는 것을 아는지 본능적으로 전신의 감각을 극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크라우스 백작가의 장남이 꼴사납게 레이디 앞에서 긴장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은가. 간신히 예민해진 감각들을 잠재우고는 나는 눈앞의 여인을 마주보았다.
눈과 같이 새하얗고 고운 순백색의 피부와 긴 머리. 잘 세공된 자수정을 그대로 박아 넣은듯 맑고 투명한 자안(紫眼). 저 닫혀있는 입꼬리가 살짝이라도 올라가는 것 만으로도 주변에 있는 남자들의 헛된 상상을 일으킬 것이다.
가히 경국지색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외모.
글로만 묘사되었던 모든 것들이 현실로 나타나고 보니 그간 엘레나 에델바이스의 외모를 제멋대로 상상한 내 상상력이 얼마나 빈약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그 수려한 미모에 나 또한 순간 여러 잡생각이 들었지만 확고한 목적의식 덕분인지 금세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녀를 그렇게 경계하고 있던 나조차 이럴텐데 그야말로 무방비에 가까웠던 원작 남자들은 어땠을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다.
짜식들 그렇게 간이고 쓸개고 죄다 빼주는 이유가 있었구만.
옆에 서 있는 세상만사 다 겪은 켄 마저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으니 혈기왕성한 십대 놈들이라 한다면 말할 것도 없다. 그야말로 꿀을 눈 앞에 둔 벌처럼 왱왱되며 몰려 들었을 테지. 실제로 데미안과 파혼한 그 날 이후에 아카데미에 있던 대다수의 남자들에게 구혼장이 날아왔다고 적혀있었으니.
이제는 아카데미 입학식부터 편지 테러를 당하겠구만.
"반갑습니다. 에델바이스 영애. 저는 크라우스 가의 장남 데미안 크라우스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크라우스 공자. 에델바이스 가의 장녀 엘레나 에델바이스에요."
약간 머뭇거리기는 하였어도 싱긋 웃으며 내 인사에 화답하는 엘레나. 그 미소에 기껏 얌전히 만든 심장에 다이너마이트가 터졌다. 역시 약혼은 되도록 빨리 파혼하는게 좋겠다. 이러다가 진짜 그녀에게 빠져 무슨 헛짓거리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멍해 있는 켄의 구두를 밟아 나가라고 신호를 주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켄은 한껏 오해한 얼굴로 내게 윙크를 하며 엘레나가 데리고 온 메이드와 함께 문을 나섰다.
그 둘이 나가자 이제 방에는 남아있는 것은 나와 엘레나 단 둘.
조금 마음 놓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 둘을 내보낸 것은 좋았지만 막상 단 둘이 남으니 내가 다 긴장이 되기 시작한다. 그 긴장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미리 준비해 두었던 차를 찻잔에 따라 그녀에게 넘기고는 나도 한잔 따라 가볍게 입가심을 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저희가 약혼관계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죠? 에델바이스 영애."
제국에서 아름답다고 소문이 자자한 그녀와 제국의 검술명가의 자제라는 지위 외에는 알려진게 없는 나와의 약혼. 그것도 태어나서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이 둘이 말마따나 왜 약혼했는지 알 수 없을 이 기묘한 관계에는 사소한 뒷배경이 있다.
나의 아버지인 크라우스 가문의 가주 리처드 크라우스 백작과 그녀의 아버지인 에델바이스 가문의 가주 요하임 에델바이스 공작은 오랜 친구 관계다.
귀족 가문 사이에서 정략혼이 오고가는 것은 당연한 일인 이 시대에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둘은 '나중에 니 자식이랑 내 자식이랑 결혼하자!' 등의 약속을 하였고 장남으로 나 데미안, 저쪽은 엘레나가 태어나자 둘은 좋다며 우리 둘을 약혼시켰다.
하지만 그 둘도 한번 밖에 없을 결혼에 자식의 의견은 존중되어야 된다고 생각을 했는지 구두로 약속하였고 아직 정식 약혼은 치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 이 자리는 정식으로 약혼식을 치르기 전에 만남을 가지는 자리다. 원작에서는 이런 설명은 일도 없이 둘이 이미 정식으로 약혼식까지 치른 사이라고 나오지만 뭐, 나로서는 좋은 편이다. 운이 좋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약혼을 파 할 수도 있을 테니.
데미안 이 녀석이 원작 시작전이라고 해도 싸가지가 있을리가 없는데 그와 직접 만나보고도 약혼을 한 그녀의 선택에 약간의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녀의 성격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네..."
내 질문에 작게 대답하고는 내가 따라 준 찻잔을 만지작 거리기만 하고 있는 그녀.
이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소설 초반의 그녀는 자기주장이 약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소설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여주가 계속해서 이런 성격이었으면 고구마 100% 였기에 사건이 전개되며 이 성격 또한 고쳐지게 되는데 그 계기가 나와의 파혼이라는 점이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녀가 어릴 때부터 학대를 당해서 이런 성격이 된 것은 아니다. 요하임 에델바이스는 딸바보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팔불출이었고 그녀의 어머니 또한 자상하고 좋은 어머니였다고 한다.
인간의 성격이 단순히 자라온 환경 하나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녀의 이런 모습은 태어날 때부터 지닌 성정이었다.
본연의 외모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남들이 떠받들어 주는 삶이었지만 천성이 유약한 그녀에게 있어서 그것은 부담이 되었고 그녀를 더욱 작게 만들었다. 태어날 때부터 오만방자하고 안하무인이었던 데미안과 비교하자면 완전히 반대되는 모습이다.
어쩌면 그렇기에 할 말 못할 말 다하는 데미안의 말에 따랐던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아마 원작에서 데미안은 그녀를 보자마자 약혼하자고 말했을 것이고 유약한 엘레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약혼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특유의 고귀한 분위기 때문에 다른 이들은 다가가는 것조차 힘들어 했는데 빠꾸없는 데미안의 행동력 때문에 성사된 약혼이라니 어찌보면 코메디나 다름 없지만 이런 성격은 이후 데미안과의 파혼이 있고 난 후 달라져 자신에게 오는 구혼장을 모두 거절 할 수 있을 정도는 되게 된다.
아무말도 못하던 병아리가 삐약ㅡ 하고 울 수 있게 된 정도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그녀는 그 삐약하고 우는 것조차 못하는 상태다.
이 경우에는 어찌해야 하나.
원작에서 그녀를 바꾼것은 데미안에게 제멋대로 휘둘리는 게 싫다는 부정적인 감정에 의해서다.
단지 그 하나 뿐이 아니라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을테지만 '데미안'이 그 방아쇠가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서 원작의 데미안 마냥 싸가지 없이 행동하며 그녀가 바뀔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하는가?
그건 내가 싫다.
무슨 스스로 자폭 스위치를 누르러 가는 것도 아니고. 나는 그녀를 위한 삶이 아닌 나를 위한 삶을 살기로 결심한 몸이다.
어차피 내가 나서지 않아도 그녀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쌓게 해줄 떨거지들은 아카데미에 널려있을 것이고 그것을 원작의 남자 주인공 후보놈들이 알아서 처리해 줄 거다. 나는 그녀에게 있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이미지를 주는 것과 이 약혼을 파혼하기만 하면 된다.
"....."
"....."
우선 대화는 할 수 있을 정도의 변화는 필요할 것 같다.
내 쪽에서 아무말이 없으니 그녀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없었다. 대화를 하기 싫어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라 우물쭈물 하며 찻잔을 만지작 거리고만 있을 뿐이다. 것보다 저거 아직도 안 마셨네...
하는 수 없지. 내가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수 밖에.
나는 옆에 차와 함께 준비되어 있던 은색 푸드커버를 걷어냈다.
그 안에는 여러 디저트들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대부분 달달해 보이는 것이 전부였다. 원작에서 단것을 좋아한다는 언급 때문에 내가 미리 준비해둔 디저트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커버를 걷어내자 눈에 들어오는 디저트의 모습에 그녀의 눈이 반짝이는게 보였으니 다행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제가 평소에 단것을 즐겨먹어서 말입니다. 부끄럽지만 영애와의 자리에서 먹으려고 미리 준비해두었습니다. 혹시 에델바이스 영애께서도 단것을 좋아하는지요?"
"앗, 네. 네. 좋아해요."
먹음직스러운 디저트들의 모습에 정신을 못차렸는지 대답은 하여도 그녀의 눈은 계속해서 디저트를 향해 있다. 그야 이것들은 우리 영주성 수석 주방장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들이 었으니 눈이 안갈리가 있나. 듣기로는 제도에서도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일한 실력자라는데.
나는 준비된 집게로 나와 엘레나의 접시에 각각 한 종류 씩 담고는 그녀에게 건내주었다.
"감사합니다아..."
이게 그렇게도 맛있어 보이나?
아까 단것을 좋아한다고는 말했지만 그것은 그녀에게 디저트를 주기 위한 구실일 뿐 나는 단걸 잘 먹지 않는 편이다. 너무 단것은 느글느글 하기도 하고.
웩.
대충 케이크 하나를 잘라 집어먹었더니 너무 달아서 더 먹지를 못하겠다. 서둘러 옆에 따라둔 차를 마셔 입에 가득한 단맛을 중화 시킨다.
사람들은 대체 이게 뭐가 좋다고 먹는건지.
물론 내가 남들보다 단걸 잘 먹지 못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래서 초콜릿도 카카오 함유량이 높은 것만 먹을 수 있었지 일반적으로 시중에 파는 것은 잘 먹지 않았다. 옛날에는 내가 항상 먹던 카카오 99%가 일반적인 건 줄 알고 남들에게 권했다가 몰매를 맞은 적도 있다.
잠시 옛생각에 빠져있다 보니 엘레나의 반응을 보지 못했다. 겉으로 생긴것만 봐서는 하나의 예술품과도 같지만 이건 달아도 너무 달았다. 아무리 단 것을 좋아하는 엘레나라도 마음에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영애 마음에는 드시..."
"냠~"
우물우물
그게 괜한 걱정이었다는 걸 보여주듯 세상을 다가진것 같은 얼굴로 케이크를 퍼먹는 엘레나의 모습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살짝 입꼬리를 올려 웃는 것 만으로도 심장이 위태로운데 그녀가 진심으로 행복해 하는 얼굴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평생 내가, 그것도 사람을 상대로 가지고 싶다는 소유욕이라는 음습한 욕망 따위를 가져본적은 없지만 그녀의 미소는 오로지 나만을 바라보고 싶게 한다는 마음을 만들어 내는 마성이 있었다.
굳이 파혼을 해야할까. 나는 원작의 데미안과 다른....
꽉-
쓸때없는 생각이 자꾸 기어오르는 것 같아 그녀에게 보이지 않게 허벅지를 꼬집었다.
고통으로 되찾은 이성의 방벽은 통제되지 않는 감정을 다시 마음 속 깊은 곳으로 묻어버렸다.
'미치겠네.'
그녀의 아주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내 감정에 크나큰 영향을 주는 것 같다. 내가 그녀에게 한눈에 반했다고 하기에도 이건 너무 이상했다. 예쁜 사람이 미소 하나 지었다고 거기에 소유욕을 느낀다니 이거 완전 미친놈 아닌가.
아무래도 내 생각보다 그녀가 내 곁에 있는 것은 많이 위험한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