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 파혼을 위하여 (1)
로맨스 판타지.
흔히들 줄여서 '로판' 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판타지와 무협같은 웹소설의 장르 중 하나이다. 앞서 말한 판타지와의 차이점이 뭐냐고 묻는다면 판타지 앞에 로맨스가 붙은 만큼 주 타깃층을 여성으로 한다는 것 외에는 별 차이점이 없다.
대체적으로 판타지의 장르의 주인공들이 주요 독자층인 남성들의 이입을 쉽게 하기 위해 남성 주인공을 주로 차용한다면 로맨스 판타지는 마찬가지로 여성 주인공을 차용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주인공이 여자면 로판, 남자면 그냥 판타지다.
물론 장르의 이름에 '로맨스'가 들어가는 만큼 연애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어야 진짜 로맨스 판타지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판타지 속 주인공이 하렘을 차리거나 무슨 일이든 척척해내는 이야기의 성별만 반전시키면 그것이 로판이 되는 것도 마냥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기에 어떤 로맨스 판타지는 인물 중심의 이야기에 치중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탄탄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진짜 '판타지'를 기반으로 둔 여주 중심의 소설을 만들어 가기도 한다.
그런점 때문에 판타지 장르 마니아인 내가 로맨스 판타지를 읽었던 것이었고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 읽는 거였는데."
요즘 소설들의 클리셰가 무엇인가.
바로 회귀, 빙의, 환생. 줄여서 회빙환이다.
작품 내에서 최강자의 반열에 올랐거나 또는 완전히 실패한 주인공이 다시 성공하기 위해 하는 회귀. 원래는 작품 속 등장하는 책이나 게임의 독자, 플레이어였다가 그 속으로 들어가는 빙의. 마지막으로 환생트럭 맞고 현세에서 죽어 이세계 전생을 당하는게 환생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클리셰에 당하고 말았다.
독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생각.
'소설 속에 들어가 주인공이 되어보고 싶다.'
나 또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분명히 있었다. 물론 생각만 했지 간절히 바란적은 없다만. 애석하게도 신이라는 작자는 내 그 찰나에 불가한 생각이 일생일대의 소원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어쩌면 제비뽑기를 했는데 우연히 얻어걸린 걸수도 있고,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갑자기 사람을 통보없이 이세계로 보내 버릴 수 있겠나.
솔직히 글로는 많이 읽어 보았어도 막상 현실이 되어 '눈 떠보니 이세계?'를 당하고 나면 당사자로서는 심히 당황스럽다.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 혼란스럽기도 하고.
빙의 5년 차인 나로서는 이미 전부 적응이 끝난 이야기지만 나도 처음에는 믿기지 않아 일어나자 마자 볼을 꼬집어 보기도 하고 그랬다.
이후 아버지에게 훈련을 빙자한 아동폭력을 몇년간 당하고 보니 그 고통이, 오감으로 느껴져오는 세상의 생동감이 이것을 꿈이 아닌 현실이라고 말해주었다. 조금 일찍 깨달을 걸 그랬나.
아무튼 그 사실을 깨달은 이후 부터는 나름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가문의 비전검술도 익히고 가문 내에서 교육 받으라는 것도 순순히 잘 듣고 있으며 집안 어른들에게 예의를 지키는 것은 물론 나보다 아랫사람에 위치한 이들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솔직히 신분제가 없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소시민으로 살아온 나에게는 꽤나 고역이었다만 인간은 적응의 생물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확실히 몇년을 그리 지내니 약간의 찝찝함은 남아도 적응이 되기는 하였다.
"도련님 많이 긴장하신 것 같아 보이십니다. 단순히 서로 얼굴 한번 보는 것이니 그렇게 긴장하실 일은 아니라 생각됩니다만."
"아무리 구두라고는 하지만 제 약혼자에요. 켄. 맨날 보는 사라나 클로이와는 다르다고요."
내 옆에 서 있는 노집사는 싱긋 웃으며 '그러시겠죠.' 라고 말하고는 공사장에서 사용하는 착암기 마냥 무시무시한 속도로 떨고 있는 내 무릎을 지긋이 눌렀다.
켄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할지는 뻔히 보인다. 분명 약혼자와 만난다는 생각에 두근거림을 주체하지 못하는 혈기왕성한 십대 꼬맹이로 보고 있겠지. 하물며 그 상대가 예쁘다고 소문이 자자한 에델바이스 가의 장녀라면 더더욱.
하지만 그건 틀렸다.
지금 내가 떨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예쁜 약혼자를 만난다는 설렘이 아닌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 두려움에 의해 떨고 있는 것이었기에.
그녀에 대한 소문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에델바이스 가의 흰백합. 황제 마저 칭찬한 미모의 소유자. 절벽 위에 핀 가련한 꽃 등등 죄다 그녀의 미모를 찬사하는 말들 뿐이었지만 딱히 내가 두려워 할 소문들은 하나도 없었다. 실제로 그녀는 미모 뿐만 아니라 인성에 대해서도 꽃과 같다고 찬사하는 이들이 있으니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사실에 대해서는 다름아닌 내가 보증 할 수 있다.
그런 완전무결한 그녀를 내가 두려워 하는 이유는 딱 한가지.
그녀가 이 세상. <공녀는 사랑받는다.>의 주인공이었으니까.
***
지금은 나이기도 하지만 내가 빙의한 인물. 데미안 크라우스는 소설 속에서 주연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삼류 악역이 적당하겠지.
제국 3대 무가 중 하나인 크라우스 백작가의 후계자이자 제국에서 아름답다고 소문이 자자한 엘레나 에델바이스의 약혼자.
스팩 하나만 본다면 어디 판타지의 주인공급 스팩이다.
짱짱한 배경에 아름다운 약혼녀까지. 거기에 세간에 천재는 아니지만 수재라고는 불릴 수 있을 정도의 무재(武材)를 타고 났으니 남부러울 것 하나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인성이 그 모든걸 말아먹는다.
어디하나 부족한 곳 없는 가문. 남들이 떠받들어 주는 재능.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약혼녀까지. 이 삼신기를 태어나자마자 가진 이 녀석은 지독하게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이며 제멋대로였다.
그야말로 망나니 그 자체.
만약 데미안이 로판 속 남자 주인공이었다면 이 모든 단점들이 여주인공의 손에 의해 장점으로 탈바꿈되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데미안은 첫번째 남주 후보의 무력을 판별해주는 스카우터이자 여주인공이 가문의 힘이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역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자중하고 또 자중했다.
원작의 데미안이 싸가지가 없어서 문제가 되었다면 나는 싸가지 있게 행동하면 될 일이다. 여주인공과의 약혼도 단지 집안 어르신들이 구두로 한 언약이었을 뿐 딱히 법적인 효력을 가진것도 아닌지라 비교적 쉽게 파할 수 있다.
어느 망나니 인식개변 소설 처럼 주인공이 될 마음은 추호도 없다.
훗날 제국제일검이라 불릴 소드마스터나 이계의 힘을 끌어 사용한다는 황혼의 마탑주.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는 제국의 황태자까지.
그녀의 곁에 있기만 하여도 이런 강자들과 피튀기게 싸우게 될 것이고 소설 초반부에 퇴장하는 악역에 불과한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소설 속의 데미안이 그랬듯 무대에서 빠르게 퇴장당하고 말 것이다.
애초에 승산이 없는 싸움은 하는게 아닐 뿐더러 삼류 악역에 빙의된 몸으로서 내 주제는 잘 알고 있기에 주제 파악하면서 평범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 내 소소한 꿈이다.
조연으로써, 그것도 초반에 퇴장할 악역이 약혼자로서 여주인공과 친하게 지내는 것은 어불성설. 필시 온갖 사건사고에 휘말릴게 뻔하고 그것은 내 꿈과는 완전히 정반대 되는 삶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무대 위에 올라서지 않으면 된다. 그리하면 죽을일도 사건에 휘말리지도 않을터.
그녀의 이야기에 끼어들지 않기 위해서는, 나는 반드시 이 약혼을 파혼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