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필로그 (29/30)

에필로그

“으아…… 나 힘들어…….”

쓰러진 유지한에게 무릎을 빌려준 채로, 나도 손 하나 까딱하기가 힘들어 움직일 수가 없어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우리의 잔소리쟁이가 득달같이 태클을 걸어왔다.

“힘들겠지―!!”

그따위 개싸움을 세계 단위 스케일로 했는데 안 힘들면 그게 사람이냐!!

우리의 싸움으로 한번 죽다 살아난 전말자가 기가 막혀 돌아가시겠다는 듯, 아주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휘말린 걸로 따지면 전 세계가 휘말렸겠지만, 그것들은 내 알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전말자는 달랐기에 순순히 그 투정을 들어주며 불쌍한 표정으로 찡찡거렸다.

“응. 내 힐러. 그러니까 힐 좀.”

“내가 네 힐통이냐!”

……아니었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지적해 와서 순간 표정 관리가 안 됐다.

그런 내 표정을 보고 기가 찬 전말자가 ‘저런 썅년이.’라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나서야 황급히 쭈그리처럼 눈을 내리깔았다.

아니. 근데 조금 억울하기는 했다.

우리 애초에 계약이 그거 아니었어?

하지만 아무리 나라도 눈치는 있었기에 지금 이 상황에서 그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전말자가 그런 내 생각을 영 모르지는 않겠지만, 착한 전말자는 ‘어휴.’ 하면서 대부분 넘어가 주니까.

아니나 다를까. 결국 이번에도 전말자는 전말자였다.

【성녀가 고유스킬 ‘치유’를 발동합니다.】

“너한테는 이 정도밖에 못 해 줘. 네 무릎에 뻗은 인간이 훨씬 심각해서.”

애초에 이거 외에 딱히 더 할 필요도 없겠구만. 뭘.

투덜거리는 말을 얹기는 했지만 착실한 전말자답게, 내게 필요한 것을 바로 알아챘다.

녀석의 말대로 그 이상은 딱히 필요하지 않았다. 여기 기절한 놈과 다르게 나는 생채기 하나 없는 상태였고, 마력이 몽땅 떨어져 손가락 들 힘도 없어서 그런 거지 다른 거는 멀쩡했다.

내 몸을 나보다 더 금쪽같이 여기는 성위님이 애초에 내가 다치게 둘 리 없으니까.

마력이야 내가 신나게 펑펑 써서도 그런 것이기도 하고, 마력을 다 쓴다고 신체에 큰 문제는 없었기에 그냥 놔둔 것이다. 때문에 사실 마력을 채우는 ‘치유’ 외의 다른 거창한 것은 딱히 필요가 없었다.

물론 있다면 더 좋기는 하겠지만, 녀석의 말대로 내 무릎에 기절해 있는 놈의 상태가 훨씬 심각했기에 이쪽을 우선시하는 게 맞았다.

“어우. 이쪽은 아주 너덜너덜하네. 어떻게 살아 있는지 용할 정도인데?”

그 이야기에는 나도 동감이었다.

전말자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 예리한 눈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숨 쉬는 게 용하긴 하네.’

[당신의 계약성, ‘세계의 시초’가 지금 저 녀석이 숨쉬는 건 녀석의 성위 덕이라 답해줍니다.]

‘아하.’

하긴. 이 정도 상처를 자력으로 구제하기에 유지한은 너무 멍청하지.

당연히 성위의 개입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파우스트의 싸움으로부터 비롯한 피로 누적부터, 마력 역행에. 건물이 부서질 정도로 처박혀서 얻은 충격으로 늑골 골절, 그에 따른 피를 토하는 내상까지.

중간에 전말자의 치료를 받긴 했겠지만, 그것만으로 저 내상을 전부 치료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거기에 나와의 전투로 얻은 추가 찰과상에 마력 과부하까지.

진짜 안 죽은 게 용하긴 했다.

【계시자가 ‘구원자를 위한 기도’를 읊습니다.】

【오직 구원자를 위한 기도가 구원자에게 닿습니다.】

【치유가 시작됩니다.】

전말자가 기도문을 쉴 새 없이 읊어댔다. 그만큼 사태가 중하다는 의미였다.

쉴 새 없이 외우는 기도문이 금빛 문자로 만들어져 유지한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 보니 어느새 내 몸에도 어느 정도 힘이 돌아와 있었다.

손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마자 나는 망설임 없이 마켓을 열었다.

【블랙마켓을 오픈합니다.】

【절대자 님 환영합니다.】

【엘릭서를 구매하셨습니다.】

물론 말만 구매고 공짜지만.

어쨌든 엘릭서를 그대로 깔끔하게 원샷했다.

“아아. 이제야 살 것 같네.”

역시 피곤할 때는 박X스지.

남들은 평생 한 개 보기도 힘든 엘릭서를 박X스 취급하듯이 원샷 드링킹을 하는 나를 보며 전말자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왜. 뭐. 왜.

너도 이러고 살던가.

특권을 누리는 데 주저함이 없는 꼰대는 원래 뻔뻔한 법이었다.

“근데 님아. 치료 잘못한 거 아니야? 이거 안 일어나는데?”

“와…… 이거라고 하는 거 봐라. 그거 네 거다?”

“내 거니까 이렇게 이야기하지.”

내 애물단지. 결국 버리지도 못하고, 다시 주워온 내가 좀 한심하긴 하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그렇게 시원하게 져버렸는데.

“오. 패배 선언 깔끔하게 하더니. 이제 하자는 대로 해 주는 거야?”

네가?

오우. 대박. 역시 사랑은 다르긴 다른가?

천하의 윤지호도 변화시킬 수 있는 거냐고, 전말자가 ‘소름’, 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 전말자의 반응에 난 무슨 헛소리냐는 듯 답했다.

“뭔 소리야?”

“……응?”

“내가 왜 그래야 돼?”

내가 얘 노예임?

이건 무슨 개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당연하게 답변하자, 전말자가 굉장히 떨떠름한 얼굴로 유지한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랑 싸워서 졌잖아?”

“응. 근데?”

“이거…… 싸워서 이긴 쪽이 뜻대로 하는 이야기 아니었어?”

하도 스케일이 큰 걸 봐서, 내 뇌에 이상이 생겼나?

자기가 아는 이야기와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 전말자가 의문을 표했다.

물론 그렇게 착각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엄연히 조금 다른 이야기였기에 나는 정확히 핵심을 짚어 주었다.

“정확히는 이긴 쪽의 신념에 굴복하겠다는 거지.”

“……응?”

“나는 녀석의 기억을 지우고 우리 관계를 전부 끝내는 게 옳다고 생각했고, 이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했잖아. 그래서 이긴 쪽의 뜻대로 정한 거지.”

결과는 내가 졌고.

그러니까 결국 그것에 대한 문제 해결일 뿐이었다는 말에 전말자가 기함했다.

“그럼……!”

“이제 뭐. 앞으로는 이 녀석이 하기 달린 거지.”

그 ‘이 녀석’을 끌어안고 빙그레 웃자, 전말자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녀석이 불쌍하지도 않냐.”

“별로? 이 녀석도 그렇게 생각할걸?”

“……뭐?”

“결국 제가 원하는 것을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갖게 되었잖아?”

유지한의 힘으로, 스스로 나를 납득시켜 만들어낸.

처음으로 유지한이 가지게 될 우리의 온전하고도 평범한 관계.

아마 유지한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 녀석이 거의 평생을 바라왔던 일이니까.

그런 우리 둘을 보며 전말자가 깔끔하게 평했다.

“질린다. 너희들.”

“나도 질림. 그래도 뭐 어쩌겠어.”

이런 녀석을 사랑하는데.

바보 같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뭐 둘이 좋다는데…….”

여러 사람한테 참 폐를 많이 끼치긴 했지만, 당사자들이 좋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힘 센 놈이 어차피 장땡이었다.

그렇게 전말자는 납득했다.

“일단 여기를 좀 뜨자.”

이제는 정말로 끝이었다.

* * *

찰칵― 찰칵― 찰칵찰칵―

“여기 한 번만 봐주십시오!!”

“아니. 한 말씀이라도……!!”

“게이트 클리어는 어떻게 되신 겁니까?”

“현재 세계 곳곳에서 이상 반응이 발생해 그 여파로 많은 사람들이 큰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건지―!”

“국내 곳곳에서도 피해 속보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자세한 원인 규명과……!”

……아. 졸라 시끄럽다.

연이어 터진 대사건들로 인해 육체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완전히 지쳐버린 이들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연이어 터진 대사건들로 인해 육체적으로도, 심신적으로도 지쳐버린 이들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게이트 안.

그것도 인류의 명운을 건 게이트에 카메라 진입이 가능할 리는 당연히 없었으며, 설령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그곳에 목숨 걸고 카메라를 들고 들어갈 용자 역시 당연히 없었다.

다들 제 목숨은 금쪽같으니까.

그리고 그 격전지에 웬 카메라.

전투에 걸리적거리지만 않으면 다행이었다. 걸리적거리는 순간 그 자리에서 사망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으니 하소연조차 하지 못하리라. 애초에 거기를 찍겠다고 카메라를 들고 가는 미친놈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사람은 죽어도 할 말 없다는 것이 그들의 지론이었다.

어쨌든 그렇다 보니, 진실을 향한 모두의 궁금증은 폭발 중인 상황이었다. 그냥 레이드 클리어만으로도 그럴진대 초절정 사랑 싸움으로 세상이 한 번 다 뒤집혔었으니 이제는 단순한 궁금증을 넘어 집착까지 이르렀을 것이다.

안다. 알지만…….

“와. 졸라 질린다. 진짜.”

“저것들은 대체 왜 안 뒤지는 거야?”

“미국 파리 새끼들보다 집요함은 더 쩌는 거 같은데.”

“눈빛이 아예 맛이 갔는데?”

목숨 걸고 싸우고 와서 녹다운 된 사람한테 이게 할 짓인가.

진짜 저거 다 쓸어버리면 안 되나.

너무나 피곤하고 역겹다 보니 사나운 생각이 마구 솟구치려는데 그나마 함께 전장을 뛰었던 이들 덕에 간신히 다시 억누를 수 있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거리입니까?!”

“당신들은 양심도 없습니까?! 우리들의 지금 모습을 좀 보시죠!”

“우리는 지금 당신들의 궁금증이 아니라 치료와 휴식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당신들의 궁금증 해소가 이들의 목숨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멀쩡한 이들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열변을 토했다. 그에 기자들이 쭉 한번 상황을 둘러보았다.

“……으윽…….”

“부상자부터 빨리 옮겨! 사망자는 되도록이면 밟지 말고!”

이름 좀 날린다는 국내 랭커들의 신음 소리와 지천에 깔린 사망자들을 피해 부상자들을 먼저 찾아 헤매는 구급대원들. 그들도 목숨을 잃은 자의 노고를 알기에 숙연하게 고개를 숙이면서도 열심히 부상자를 찾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가급적 사망자들을 밟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그리고 월드 랭커들의 상태도 말이 아니었다. 말자가 어느 정도 치료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모두 너덜너덜한 꼴은 면치 못했다.

이들을 전부 치료하기에는 시간도, 능력도 부족했기에.

기절한 유지한은 밀리언이 업고 있었고, 루이스는 연금술사가, 카밀라와 이로운은 상처가 그래도 어느 정도 회복돼 제 발로 걷고 있긴 했지만, 썩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가장 때깔 좋은 윤지호는 데이모스의 품에 곱게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그걸 감사하게 생각했다. 저분의 심기를 건드리면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지 세계 스케일로 이미 확인을 마쳤기 때문에. 그들은 그냥 생각만 했지만, 저 고매하신 분은 생각만 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친구인 성녀님께서 심각하게 고민을 하셨다.

“일어나면 저것들 다 치운다고 그냥 한 방에 쓸어버릴 텐데…… 어떻게 윤지호를 안 깨우고 저것들을 곱게 처리할까요?”

“…….”

참 성녀답지 않은 어휘였지만, 너무나 이해가 잘 가는 말이라 모두가 숙연해졌다.

물론 목표는 금방 설정이 되었다.

절대 윤지호를 깨워서는 안 된다는 것.

이미 최저치를 찍다 못해 나락까지 간 기분에서 아주 조금 기분을 끌어올린 상태로 평온히 자고 있는 사자의 코털을 일부러 건드려 주변을 잿더미로 만들 필요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주제 파악 못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고.

그중 으뜸. 앵그리 버드의 민족. 대한민국의 인간들은 정말 상황도 잘 무시했고, 주제 파악도 참 못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을 저희도 알 권리가 있습니다!”

“잠깐만 시간을 내주시면……!!”

글쎄. 그 잠깐만이 잠깐만이 아닐 텐데.

그리고 무엇보다 그 잠깐을 정말 낸다고 한들 분명 소설처럼 부풀려지고 사람들 입에 더럽게 오르내릴 것을 생각하니 모두의 얼굴이 썩었다.

찰칵―! 찰칵찰칵―!

“잠시면 됩니다!”

“저희도 시간을 많이 뺏을 생각은 없습니다!”

“이쪽 보시고 몇 마디만―!”

표정이 썩어들어가는 것을 보고도 아랑곳 않고 사진을 찍어대는 것도 능력이었다.

……그냥 이대로 다 싹 쓸어버리는 것도 진짜 괜찮지 않을까. 랭커들도, 막아선 헌터들도 질린 얼굴로 솟구치는 그런 생각을 간신히 참아내던 중…….

결국 그들이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뽑았다.

“……아. 미친. 뭐야.”

낮게 뇌까리며 나오는, 가라앉은 기분을 여실히 드러내는 살벌한 목소리에 모두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살기 위해 취하는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일단 일반인보다 몇 배로 뛰어난 오감을 가지고 있는 헌터들은 지금 당장 이 자리를 탈출하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저기 외곽에 있는 이들 중에서는 성치 않은 몸으로 바닥을 기어서 벌써 탈출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로.

매우 추한 모습이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추하다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젠장. 부럽다.’

왜 나는 끝쪽에 안 있었지…… 라고 한탄하는 중이었다.

추한 몰골을 보이는 것보다 나 사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나중에 ‘추하게 지 혼자 기어서 빠져나가냐!’라고 매도당해도 혼자 빠져나간 것에 자랑스러워할 자신이 다들 있었다.

그렇게 헌터들이 ‘아이 씨. 내 인생 왜 이래.’ 하고 망했다는 생각을 삼키며 입술을 잘근 씹는데, 그런 헌터들은 보이지도 않는 건지 아니면 눈에 뵈는 게 없는 것인지.

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모를 자신감을 무장한 채 기자들이 지호에게 마이크를 들이밀려 했다.

“윤지호 씨! 한 말씀만……!”

“이번 레이드에 참가하신 겁니까?!”

“월드 랭킹 1위의 강자로서 세계를 위해 공헌할 생각은 어째서 없으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현재 세계 곳곳에서 피해를 호소하고 있고, 윤지호 씨의 도움을 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강자로서 이들을 위해서 움직이셔야 하지 않으십니까?”

“절대자로서 세계가 당신의 힘을 필요로 합니다. 이에 향후 움직임은 어떻게 하실 건지…!”

……잘들 논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이미 떡을 받기로 확정받은 사람들처럼 아예 기정사실로 만들어서 소설을 쓰는 꼴이 참 가관이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이들조차 공포보다 질린다는 생각을 먼저 할 정도였으니.

“……이야. 여기 소설 지대로네.”

“대놓고 파우스트 레이드도 안 뛴다고 했던 인간이 그래도 이러고 있는데 거기다 대고 우와…….”

“한국 혹시 뭐 대단한 거 가진 거 있어? 배짱이 장난 아닌데?”

월드 랭커들은 진심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원래 이렇게 배짱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월드 랭킹 1위. 절대자에게까지 이렇게 할 배짱이 있다고는 정말 생각지 못했으니까.

그들도 눈앞에서 발발 기기 바쁜데.

밀리언은 휘파람을 불기까지 했다.

그 감탄을 들으며 주변에 있던 녹음과 원티드는 그대로 이마를 짚었다. 뭐라 반박을 하고 싶어도, 반박할 말이 없었기에 더 문제였다.

“성녀님 뭐 하세요?”

“아까 윤지호 잠들기 전에 엘릭서 뜯었어요. 미리 마셔 놔야죠.”

“……왜요?”

“……최대한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서?”

“…….”

그래도 사람은 안 죽는 게 여러모로 편할 테니까.

라고 말하며 말자가 마저 엘릭서를 마시는 모습을 보며 성녀가 이미 모든 걸 해탈했다는 것을 깨달은 이들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차라리 저게 현명한가.

진지한 고민에 빠지는데, 결국 문제는 커지고 말았다.

“……주인. 어쩔까?”

먼저 나서지 않고 웬일로 조용히 있는다 했더니, 주인의 의사를 물어보려고 한 거였나 보다.

뭐. 그냥 즐기는 걸 수도 있고.

입가에 띤 은은한 미소가 뭔가 굉장히 거슬렸다. 물론 뒷감당할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

그리고 그런 주변 이들은 전혀 안중에도 없는, 있을 필요도 없는 절대자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허.”

그 단발성 헛웃음만 들었을 뿐인데 주변 헌터들 모두가 예감했다.

아. 끝났구나.

신실한 종교인들은 벌써부터 자신들의 신을 찾아 기도문까지 읊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상황 파악을 못 하는 듯, 기자들이 입을 나불댔다.

“지금 반응은 무슨 뜻으로 해석하면 됩니까?”

“설마, 인류의 위기에 힘을 보태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그 위기 이미 저쪽이 다 처리했거든요. 나머지는 그냥 인간의 문제잖아.

절로 태클을 걸고 싶은 소리였지만 여기서 괜한 주목을 받는 건 꿈에서도 사양이었기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런 같잖은 것들을 내려다보며 절대자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딱 한 마디. 명령을 내렸을 뿐이다.

“데이모스.”

“응. 주인.”

“지금부터 거슬리게 하는 것들은 그냥 다 치워.”

“오. 죽여도 된다는 거지?”

“나한테 지저분한 꼴만 안 보이면.”

핏자국 정도만 남는 것쯤이야. 뭐.

아예 죽일 거면 깔끔하게 시체까지 없애라는 소리에 모두의 얼굴이 시퍼레졌다.

특히 있는 대로 미주알고주알 나불댔던 기자들은. 당장 그게 무슨 소리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이 뭐라 항의의 목소리를 내기도 전에, 처음으로 떨어진, 적성에 맞는 명령에 잔뜩 상기된 얼굴의 악마가 들뜬 목소리로 입을 열었으니까.

“진짜?! 그래도 돼?”

“어.”

어차피 더럽게 많은 인구. 좀 줄어도 될 때가 됐긴 했지.

덤덤하게 읊조리는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더 할 말은 없다는 듯 눈을 감으며 윤지호가 대화를 원천 차단했다.

그 말을 끝으로 데이모스가 신난 얼굴로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누구 하나 어서 걸려 보라는 듯 신난 발걸음이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그의 앞을 가로막는 자도. 그를 멈추는 자도 없었다.

목숨은 소중했으니까.

그렇게 홀연히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들은 생각했다.

“……졸라 멋있다. 진짜.”

역시 윤지호가 최고였다.

* * *

한편, 기절한 지한은 뜻하지 않게 무척이나 특별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오로지 어둡기만 하고 어두운 공간.

그럼에도 익숙한 포근함이 느껴졌다. 때문에, 지한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이곳으로 자신을 초대한 이가 누구인지는 바로 알아채었다.

이래 봬도 몇십 년을 함께한 사이였으니까.

“성위님.”

몇 번의 세계를 뒤틀고 다시 시작했어도, 그는 언제나 자신의 성위가 되어 주었으니까.

그것이 정답이라는 듯 유지한의 앞으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뭐야. 너도 붙어 다니더니 그 녀석의 말투가 붙기라도 했나?”

처음 보는 성위의 모습이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었고. 만날 것이라 생각한 적 또한 없었기에 그의 외형에 순수하게 놀랐다.

가끔은 어르신 같은 말투. 또 가끔은 양아치 같은 말투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그는 조금 나이가 있어 보이게 행동했기 때문에, 성위라는 존재가 나이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겉보기에는 나이가 들어 보일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그의 외형은 이제 겨우 20살이 되었을까 싶은 외형이었다. 둘이 나란히 있으면 이쪽이 오히려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그런 지한을 보며 성좌. ‘승리를 걷는 자’ 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왜. 내가 그렇게 어려 보이나?”

“……솔직히 조금 놀랐습니다. 더 세월의 티가 묻었을 거라고 상상했거든요.”

지한의 솔직한 대답에 ‘승리를 걷는 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아 그래. 확실히 그렇지. 겉모습은 이래도 벌써 수백 수천 년을 살았으니.”

자신도 알고는 있지만 누구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 웃음이 나온다는 듯 ‘승리를 걷는 자’가 한참을 웃었다. 그런 그를 지한은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이윽고, 웃음을 멈춘 ‘승리를 걷는 자’가 물었다.

“어떠냐. 이제 만족스러우냐?”

* * *

「“현재 윤지호 씨는 자택에 들어가 종적을 감춘 상태이며…….”」

「“일부 강경파 인원들이 윤지호 씨의 선언을 듣고 집안 침입 또는, 테러를 감행했지만…….”」

「“끄아아아아악―!! 살려, 살려 줘―!!”」

「“현재 보시는 바와 같이, 침입을 강행한 이들과 원거리에서 테러를 감행한 이들 모두 이렇게 산채로 불타올랐습니다.”」

「“일부 여론에서는 너무 잔인한 거 아니냐. 어떻게 사람을 불태울 수 있냐. 힘을 가진 강자로서 모범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모자라 폭거를 일삼는 것으로 규정하며 규탄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현재 경찰은 살인 미수로 볼 수 있지만, 일단 직접적으로 그녀가 이런 방화를 저질렀다는 뚜렷한 증거가 없다는 점. 자택 침입과 테러 등 일부 집단이 범죄를 먼저 저질렀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경찰은 죄를 묻기 어려울 것이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TV 어느 채널을 틀어도 실시간 속보로 나오는 뉴스를 보며 정하나가 뒤집어지게 웃었다.

“캬하하하핫하하핫―!”

저렇게 멍청한 꼬라지라니.

어떻게 웃지 않을 수 있을까.

병신들도 이런 병신들이 없었다. 윤지호는 절대 저런 말을 번복할 녀석이 아니었다. 번복할 거면 애초에 하지도 않았겠지.

특히나 저 단호박 같은 얼굴을 보아하니 딱 각이 나왔다. 저건 절대로, 씨알조차 허용해 주지 않을 얼굴이었다. 그러니 저 전말자가 자포자기하면서 엘릭서나 드링킹하고 있었지.

전말자가 해탈한 얼굴로 엘릭서를 드링킹하고 있는 것도 진짜 킬포였다. 안 웃긴 게 없었다. 코미디 프로가 다 망하는 이유가 있다.

“아하하하핫―! 아 표정 미쳤어!”

너무나 재밌어 내지르는 환호성 때문에 며칠을 못 잔 것인지 아니면 너무 집중해서 그런 것인지.

눈에 핏발이 서다 못해 아예 빨개진 눈으로 필사적으로 노트북 화면만 바라보며 손을 움직이던 여울이 여전히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버럭―! 히스테리를 부렸다.

“아니 여기서 마녀 같은 웃음소리 서라운드로 내지 말아줄래? 나 일하는 거 안 보여?”

“취미 생활 하는 거 아니고?”

너무 신나 보이는데?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데?

핏줄 다 터져서 호러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눈이 그렇게 반짝반짝 빛나기도 힘들 거라고 정하나가 여상하게 평하자 현재 제 상태를 돌아본 여울이 눈을 한 바퀴 굴리다가 순순히 납득했다.

“윤지호는 내 사랑.”

평생의 영원한 알라뷰.

무미건조하다 못해 덤덤한 목소리였기에 그냥 대충 대답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숨길 수 없는 사랑이 눈에서 아주 열정적으로 흘러내렸기에 정하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여울의 사랑 고백을 평했다.

“윤지호의 스케일을 사랑하는 거겠지.”

“어. 졸라 최고야.”

이래서 내가 얘를 끊을 수가 없다고 깔깔거리면서 미친 듯이 현란하게 움직이는 손을 지켜보며 정하나는.

‘네가 그러니까 윤지호가 지금 널 안 만나 주는 거야.’

라고 생각했다.

이슈에 미친 저 광기가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뻔히 알고 있었으니까. 수많은 카톡 테러와 전화 테러에 한 번도 응답하지 않은 것이 그 증거였다. 그 와중에, 그럼에도, 계속 테러를 멈추지 않는 이 녀석도 난놈은 진짜 난놈이었다.

“그나저나 유지한은 깼어?”

“아직. 그게 하루아침에 나을 수준도 아니고. 매우 당연하지.”

한 달 정도 의식 없어도 이해할 수 있음.

물론 지금 전말자가 전폭적으로 치료를 돕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완치에는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도를 넘은 힘을 사용한 대가는 인간이 쉬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전말자는 잘하면 영구적인 내상. 혹은 헌터로서의 은퇴까지 갈 수 있을 것이라 이미 진단하고 있었다.

물론 이 얘기가 언론에까지 흘러가지는 않았다. 흘려서도 안 될 이야기이기도 했다.

절대자이자, 국내 랭킹 1위. 월드 랭킹 1위가 인간의 편이 아님을 저리 시인하는데 유지한마저 그렇게 된다면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파국이었으니까.

때문에 모든 언론을 통틀어 막아, 윤지호에 대한 뉴스는 막지 못한 대신 유지한의 ‘유’자도 나오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전투에 참여했던 모두가 큰 부상을 입고 업혀 나온 데다, 다른 월드 랭커들도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중이었기 때문에 유지한의 부상 사실은 알아도 헌터로서 재기불능이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다. 그동안 훌륭한 헌터들 덕에 안전 불감증에 걸린 국민들은 이런 것에는 뇌가 없다고 여겨질 정도로 참 태평했다.

그들도 결국 사람인데.

어쨌든 앞으로가 그리 꽃길만 예상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여울은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근데 윤지호가 너무 안 움직이는데.”

“저 꼬라지 보고도 나오고 싶겠냐.”

정하나가 맥주를 들이키며 시니컬하게 대꾸하자, 그 말은 물론 인정하지만 뭔가 꺼림칙하다는 듯 여울이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아예 소식조차 없잖아. 측근들한테까지. 그쪽도 문제가 있긴 있나 보네.”

나오기 싫은 건 백번 맞겠지만, 지금 이 아수라장 속에서 신속하게 처리해야 될 일이 있을 것이다.

왕왕거리는 청와대부터 시작해서 이것저것.

직접 마주하는 짓은 당연히 안 하겠지만, 어쨌든 소식은 들려와야 했다. 일단 현 대통령부터 윤지호의 하수인이었으니.

하지만 놀랍도록 윤지호에 대한 소식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 물론 저 겁나게 호들갑 떠는 쓸데없는 뉴스를 제외하고.

그렇다는 건 진짜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건데, 무슨 문제가 있지 않는 한 윤지호가 그럴 리 없다는 것 역시 잘 아는 여울림이 심각한 얼굴로 머리를 굴렸다. 그런 여울림을 보며, 정하나는 여전히 별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채널을 돌리며 여울림의 논리에 반박을 했다.

“문제라기보다는 그냥 회복 중일걸? 문제가 있었으면 전말자가 유지한이 아니라 윤지호 쪽에 딱 붙어 있었겠지. 아마 그냥 피로랑 근육통 정도일걸? 그마저도 그쪽은 걔라면 발이라도 핥을 성위 있으니 괜찮을 텐데, 뭘.”

커밍아웃을 하기 전에는 그냥 세상이 얘를 사랑하나 싶었는데. 커밍아웃을 하고 보니 답지 않게 지고지순하고 절절한 미친 사랑을 윤지호의 성위가 하고 있었다. 그걸 줄곧 옆에서 보아 왔기에 정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면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하나였다.

근육통에 겁나 잠만 자고 있겠지.

어차피 지금 처리하나 나중에 치우나 도긴개긴인 거 마음 놓고 뻗어서 자고 있을 것이라 정하나는 확신했다. 때문에 이리 태평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긴. 그러네.”

여울림이 그 말에 순순히 동의하며 정하나의 옆에 있던 다른 맥주를 따 마시며 하나의 옆에 앉았다. 그렇게 둘은 말없이 맥주를 홀짝이며 채널을 돌리는데 문득 한 채널로 시선이 갔다.

「“역시 사랑인 거죠―!!!”」

유지한과 윤지호의 관계에 대해 토론을 하는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원래 그냥 리얼 예능? 이런 프로로 알고 있는데, 이 주제가 나오다니…….

윤지호가 핵폭탄이긴 한가 보다. 이리저리 이야기 안 하는 데가 없고.

「“그럼요. 그렇게 자기는 참여 안 한다고 대대적으로 선언했는데 결국 참가한 건, 연인의 위험을 참지 못한 것 아니겠어요?”」

「“게이트 클리어 후. 행동 보면 확신합니다. 전. 이렇게 또다시 단호하게 귀찮게 굴지 말라고 하고 있잖아요? 유지한 씨 외에는 신경 쓸 가치를 못 느낀다는 거죠!”」

「“여기서 우리의 한때, 아니 다시 떠오르는 화제의 영상. 10억 뷰가 넘은 명장면. 다시 보고 오시죠!”」

우와. 사람 순살 참 어렵지 않군.

아니. 이 경우에는 목숨이 아깝지 않은 건가.

홀짝―

두 사람 다 아무 말 없이 동시에 맥주를 홀짝이며 진심으로 소리 없이 저 용기와 패기에 감탄했다.

‘아 미친―!!!’

둘 다 그 장렬한 외침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외침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넌 뭐 했어―!!!’

‘아니 난 뭔 죄야―!!’

‘내 변호사잖아!!’

멱살 잡혀 죽어가던 공주인을.

“……공주인 또 난리 났겠네.”

“그때 저 영상 이 세상에서 다 소멸시켜버리라고 아주 염병이었는데….”

“애초에 그러면 저런 명장면을 찍지 말던가.”

저런 걸 어떻게 안 봐.

정하나가 시니컬하게 현재 화면에 나오는 영상을 가리키며 냉철히 평했다.

「“사랑해.”」

듣는 이도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로 처절하고 절절한 고백.

한 번도 안 본 이는 있어도 한번 보았다면 절대 한 번만 볼 수 없다는 마약의 영상이었다. 그들도 이미 심심할 때마다 알고리즘에 떠서 주구장창 봤지만, 몇 번을 내리 봐도 정말 질리지가 않았다.

아마 드라마를 찍으라고 해도 저렇게 찍지는 못할 것이다.

영상을 본 모두가 자신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고, 미친 퀄리티의 저 영상을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윤지호가 희대의 흑역사라고 익룡의 포효 소리까지 내어가며, 저거 다 초상권 침해라고 내리라고 난리를 피워 공주인이 백방 노력을 했지만.

영상의 모든 수익이 원티드에게 갈지언정, 이미 수백만 갈래로 퍼진 영상을 삭제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건 신이라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때문에 결국 그걸 찍은 불쌍한 카메라맨과 방송국들을 고소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걸 찍어서 방송시킨 메인 피디는 그대로…… 뒷말은 생략한다.

어쨌든 그 소식이 들려왔을 때의 댓글을. 정하나는 아직도 잊지 못했다.

― 당신의 희생을 기억하겠습니다. 아멘.

― 당신은 인류를 위해 가장 위대한 일 중 하나를 실천하셨습니다. 당신의 업적을 잊지 않겠습니다.

― 메인피디들의 교본. 정석이십니다. 다른 피디들도 부디 본받길.

― 근데 니들은 놀리는거야. 진담인거야?

└ 평소라면 아묻닥 놀리는건데 이번은 백프로 찐 진심임. 내 영혼이 말하고 있음.

└ 미투. 진짜 울면서 무한 플레이중.

└ 이걸 보고 비웃는다면 그새끼는 눈깔이 삔거거나 매국노새끼임.

……단체로 먹이는 것 같은 그 댓글을 윤지호와 같이 봤었기에 더 잊을 수 없었다.

오히려 불쌍한 생각이 들었는지 윤지호도 그대로 태블릿을 던지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공주인의 비명 소리 또 간만에 듣겠군.”

“넌 그게 좋냐.”

아주 멱 따는 소리인데.

정하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음에도 여울림은 뭐 그런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한 얼굴로 여상히 답했다.

“남의 불행은 나의 즐거움.”

……그래. 너 잘났다.

새삼 저런 성격이어서 기자가 된 것이라 생각하면서 정하나는 그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그 순간, 마침 티비에서 그 장면 중에서도 희대의 킬포가 나왔다.

「“울지 마. 유지한.”」

“캬아― 진짜 대사를 주고 시켜도 저렇게 못 하겠다.”

여울림이 맥주를 들이키며 걸쭉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말에는 적극 동감이었다.

“근데 윤지호는 진짜 이제 보면 취향이 참 이상해.”

왜 굳이, 고르고 골라. 저런 놈에게 메인 건지.

물론 아예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더 컸다. 언제나 칼 같고, 우리들의 기둥이었던 윤지호였기에.

그런 정하나의 말에, 여울림이 대답했다.

“……너만큼?”

“아. 내가 할 말은 아니구나.”

그러네.

친구들 사이.

남자 보는 눈이 제일 나쁘다고 평가받는 정하나가 순순히 수긍했다. 자기가 생각해도 제가 사랑하는 남자는, 사랑을 하기에 좋은 남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놈의 정의가 무엇인지.

나보다 소중하지도 않으면서 버리지 못하고 항상 나를 가장 먼저 포기하는 개새끼. 그런 놈을 왜 버리지도 못하는 건지.

스스로도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당장 버리고도 남을 새끼인데 어째서. 그놈의 사랑이 무엇인지.

윤지호도 그런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와 윤지호는 달랐으니 완전히 납득이 되지는 않았다.

“뭐. 어떻게 보면 우유부단한 내 개새끼보다 장렬하게 윤지호한테만 올인한 미친놈이 더 나은 것 같은데 사실 둘 다 별로이지 않아?”

정하나의 시니컬한 평가에 여울이 코웃음을 쳤다.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너네 둘 다 남자 보는 눈 별로야. 본인들이 완벽해서 그런가 평범한 것들은 눈에 안 차지?”

“……뭔가 아니라고 하고 싶은데 결국 고른 놈이 그 모양이라 뭐라고 반박을 못 하겠다.”

“자랑이다.”

“근데 윤지호는 나랑 다르잖아?”

그런데도 왜 고르고 고른 게 저렇냐고, 정하나가 되도 않는 하소연을 했다. 그 하소연에 답을 이미 어느 정도 유추한 여울림이 남은 맥주를 그대로 원샷하며 말했다.

“글쎄. 윤지호는 너보다 더 완벽하지. 근데 너무 완벽해서, 그 자식은 선 긋는 것도 완벽해. 하지만 자기에게 온몸으로 매달리는 거에는 참 약하지. 자기 없이 못살 것 같으면 버릴 수도 없으니까 그냥 마음을 줘 버려. 하도 완벽해서 그런가, 생각해 보면 이 자식 취향이 제일 나빠.”

“…….”

“미쳐도 자신에게 미쳐서 자기 없이 못살 것 같은 놈은 놓질 못하거든.”

그 말은 반대로, 그 정도로 윤지호를 사랑하지 않으면 윤지호를 가질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이로운과 유지한의 차이는 바로 그것이었다.

이로운이 쉽게 버림받았던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이로운은 윤지호가 없어도 잘 살아갈 수 있었으니까. 때문에 버리는 데에 망설임은 없었으리라. 하지만 유지한은 달랐다.

여울림은 처음 유지한이 윤지호를 바라보는 시선을 마주했을 때부터 언젠가 이렇게 될 것이라고 예감했다.

자신이 옆에 있음에도 자신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며, 오로지 윤지호에게만 모든 신경을 쏟는 그 남자를, 윤지호는 절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

저 완벽한 윤지호가, 완벽한 만큼 바라는 단 한 가지.

하나,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그게 미친놈이라도. 좋은 놈이 아니라도.

오히려 좋은 놈이 아닌 것이 좋을 것이다. 진짜 좋은 놈은 절대 미친 듯 윤지호만 볼 수 없으니까.

“근데 솔직히 그 정도가 아니면 윤지호의 눈길 한 번이라도 받을 수 있을 거 같아?”

그 녀석이 얼마나 짠돌이인데.

감정 한 톨, 시선 한 톨 주는 것조차 아까워하는 구두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여울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세간의 눈으로 볼 때 두말할 것 없는 미친놈이고, 괜찮은 남자는 아니었지만 그렇기에 유지한은 윤지호를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누가 봐도 정상적이지 않고, 응원하기 힘들었지만, 미쳤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윤지호에게 모든 것을 순순히 바쳤기에 그 선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윤지호가 어찌 보면 제일 썅년이었다.

그리고 그런 제 누나를 알고, 제 누나에게 기꺼이 미쳐 준 인물 중 한 명인 윤지우의 어록도 있었다.

“그래서 윤지우도 그러잖아.”

“응?”

“제 누나지만 저거 진짜 썅년이라고. 취향도 진짜 미쳤고.”

저걸 평생 맞춰 줄 수 있는 놈이 있을지 모르겠다고.

그걸 다 맞춰 준 녀석의 입버릇이었다.

녀석이 늘 윤지호의 남친들을 경계했던 것은 윤지호를 뺏길까 싶었던 것도 있었지만, 윤지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까 하는 탓도 있었다. 이로운을 탐탁지 않아 했던 것도 저 오만한 자존심이 심기를 건드릴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결론은 진짜 그 난리를 피우다 정말 차였지만.

“그래도 유지한은 인정하드만?”

“자기랑 동류인 걸 알아서 그래.”

차이점이라 하면 윤지우는 애초부터 윤지호에게 모든 게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거하게 사고를 치지 않았지만, 유지한은 그러지 않아서 강제로 윤지호를 맞추기 위해 사고를 친 것일 뿐.

물론 윤지우로서도 유지한 자체는 그렇게 썩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윤지호에게 완벽히 미쳐있는 것만큼은 합격이었으니 가만히 있는 것이지. 애초에 윤지호의 기준을 통과했으니 그 이상은 윤지우가 뭐라 할 바가 아니었다.

결국 선택권은 전부 윤지호에게 있었으니까.

“근데 고른 건 고른 건데, 지금 또 뭔가 애매하지 않나?”

완전히 유지한 너밖에 없음.

너로 정했다!

이건 아니지 않냐고 여울림이 무심하게 팩트 폭격을 던졌다. 그 난리를 쳤는데도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인 게 참 어처구니없었지만, 그게 사실이었기에 정하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 뒤로부터는 유지한이 어떻게 하냐에 달렸지.”

윤지호가 그렇게 쉬운 여자일 리 없지 않겠나.

괜히 우리 사이에서 난공불략 최종 보스라고 불렸던 것이 아니다.

“근데 슬슬 일어나야지.”

“너무 길면 윤지호 그냥 게임 셋 할 텐데. 클났네.”

물론 그렇다고 유지한이 엄청 마음에 든 것은 아닌 친구들이 짓궂은 생각을 했다.

“흐응. 근데 얘는 대체 뭐 하고 있대?”

* * *

“엣취. 누가 내 욕하나?”

‘얘는’에서의 그 ‘얘’가 재채기를 하며 중얼거렸다.

그 소리에 옆에 있던 데이모스가 무슨 그런 뻘한 소리를 하냐는 듯 대답했다.

“전 세계가?”

지금 주인 욕을 안 하는 놈들이 있어?

매우 지당한 발언이었고 그런 건 조금도 신경 안 쓰는 데다, 오히려 우러러보는 척하며 이러니저러니 고나리질 하는 것보다 이편이 본인도 백배 나았기에 상관없었지만, 지금 저 태도는 마음에 안 들었다.

꼬집―

“아. 뭐라고?”

“잘못했습니다.”

확 돌려보낼까 보다. 라는 소리가 나올 것을 알아차렸는지 바로 꼬리를 내리는 데이모스의 모습에 흡족해하며 꼬집고 있던 뺨을 놓았다.

그 모습에 ‘진짜 인색하다.’며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 정도는 넓은 아량으로 넘어가 줄 수 있었다. 그런 데이모스를 뒤로하고 나는 이곳에 온 목적을 내려다보았다.

“진짜 순수하게 자네.”

솔직히 얼굴은 내 취향. 인정.

뻘한 소리를 하며 자는 유지한의 앞에 앉았다.

모두가 예상한 것처럼 집에 처박혀 있던 것은 맞았다. 아무리 나라도 그 정도 힘을 움직였는데 아무렇지 않을 리 없었으니까.

뭐 그래 봤자 근육통에 피로 정도로 잠만 실컷 퍼질러 잔 것뿐이다. 그래도 힘을 많이 쓰긴 했는지 한 일주일은 아무것도 못 하고 누워서 잠만 잤다. 그사이 내가 아예 움직이지를 않자 불안했는지 인간들이 아주 별 난동을 다 부린 것 같았지만.

솔직히 어이가 좀 없었다. 아니 대체 내가 뭐로 보이는 거야.

힘을 그렇게나 많이 썼는데 당연히 휴식을 취해야 하지 않는가.

그 정도 머리도 없는 것인지. 아니면 제 앞날이 더 중요한 것인지.

후자인 것이 불 보듯 뻔했기에 상대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어쨌든 그렇기에 이렇게 유지한을 보러오게 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어차피 금방 일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으니 상관없었지만.

도를 넘은 힘을 사용했기에 페널티가 있기는 할 것이다. 나와는 다르게 원래 이 녀석에게 허락된 힘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뭐 상관없었다. 애초에 내가 사랑한 건, 주인공인 네가 아니었으니까.

너는 그 사실을 이제야 조금은 깨달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아. 멍청해서 이쪽은 생각도 안 하려나.”

피식―

웃을 소리가 아니었는데도 그냥 웃음이 나왔다.

이제는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가 보다.

모든 귀찮은 생각들과 굴레를 내려놓고 비로소 오로지 너로만 볼 수 있어서. 사실 너만큼 그것을 기대하는 나였기에.

안 될 것을 알면서도 재촉을 하고 싶어졌다.

“어서 일어나. 유지한.”

“…….”

“우리 해야 할 거 많잖아?”

나는 너와 하고 싶은 것이 정말 많은걸.

* * *

“어떠냐. 이제 만족스러우냐?”

제 앞에 있는 자신의 성위의 말에, 유지한은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만족이라.

한 번도 그런 것을 느껴본 적이 없는, 늘 부족한 것만 가득한 세상만을 겪어왔기에 유지한에게 만족이라는 단어는 무척이나 생소했다.

만족이라는 게 뭔지조차 잘 모르겠으니까.

그런 나를 알고 있을 터이면서 그럼에도 자신의 성위가 그리 묻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지한은 그 까닭을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성위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응.”

“망할 놈 같으니.”

단호하게 나오는 대답에, 성좌 ‘승리를 걷는 자’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혀를 찼다. 질타 어린 답이지만 그 속에 어린 애정을 보란 듯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변치 않는 애정을 확인하며, 지한은 그제야 평생을 묻지 못했던 질문을 입에 담았다.

“‘승리를 걷는 자’.”

“왜 부르느냐.”

“왜, 나를 선택했습니까?”

‘승리를 걷는 자’는 자신을 선택할 이유가 전혀 없는 성좌였다.

세계가 자신을 주인공으로 선택해서, 세계의 추를 생각해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 같은 건 그냥 허울 좋은 핑계.

다른 이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지 몰라도 지한은 전혀 아니었다. 지한이 직접 겪어 온 ‘승리를 걷는 자’는 그런 성좌가 전혀 아니었으니까. 그가 고지식하고 정의를 내세우는 이유는 분란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혼란은 늘 누군가의 불행을 야기하니까. 늘 승리를 해 온 그는, 누군가를 불행하기만 하게 했기 때문에 그것이 싫었던 것뿐이다. 평생을 성좌와 함께하고 성좌와 모든 것을 공유한 자신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랬기에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가. 자신을 선택했는지.

하지만 묻지 못했다. 그가 필요했으니까.

우습게도 얼굴 한 번 보지 않은, 그저 시스템으로 대화를 하는 사이였지만, 어느새 당신이 내 안에 깊숙이 박힌 존재 중 하나였으니까.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랬기에 그동안 묻어왔던 질문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자, ‘승리를 걷는 자’는 조심스럽게 그 질문에 답을 해주었다.

“네 생각대로. 나는 처음에 네 성위 같은 건 될 생각이 없었다.”

“…….”

“성위가 된다는 건 성좌에게 큰 즐거움이 되기도 하지만 많은 영향력을 끼치지. 계속 지켜보다 보면 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까. 성좌도 결국 인격체이기에 변하지 않을 수 없지. 그리고 나는 그 변화가 싫었다.”

“……어째서입니까?”

“누구는 이 나태가 지긋지긋하다고 말하지만, 늘 전쟁터 속에서 살고 누군가를 짓밟으며 승리하는 생을 살아온 내게는 지금 이 시간이 내 생에 가장 평화롭고 조용한 순간이었으니까.”

승리를 걷는 자.

그 말 그대로 늘 승리를 걷는 인생만을 살아온 자.

그건 무척이나 우월하고 행복한 인생일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게 꽃밭이기만 하지는 않았다. 승리를 한다는 건, 투쟁을 견뎌야 한다는 것과 같았으니까.

언제나 투쟁 속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그는 늘 승리를 거머쥐었으나 이제는 그 승리도 투쟁도 전부 질려버렸다. 때문에 성좌가 되고 얻은 이 고요함과 나태함을 진심으로 즐겼으며, 성좌가 되기 위해 쌓아온 업적인 투쟁과 승리보다 질서와 조율을 우선시한 것이었다.

유지한을 지켜봤던 것도 그런 이유와 같았다.

“넌 주인공으로서 이 세계의 중심에 서 있었고, 그런 너를 지켜보기만 할 생각이었지 성좌는 될 생각이 없었다. 너를 지켜보는 데에 사실 네 성좌가 될 필요까지는 없으니까.”

그 머저리 같은 왕 새끼가 지가 사실 닿고 싶어서 그런 거였으면서 가까이 지켜보고 싶다는 핑계를 대서 착각할 수 있는데, 사실 지켜만 보는 건 누구든 가능한 것이었다.

물론 간섭을 하거나, 생각까지 읽을 수는 없지만 그냥 행동만 지켜보는 건 쉬운 일이었다. 그래서 ‘승리를 걷는 자’는 그냥 조용히 지켜만 볼 생각이었다.

“하나 지켜볼수록 깨달았지. 세계를 위해서 네가 반드시 필요한 존재인 만큼. 너는 껍데기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지만 속을 채울 것은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걸.”

그건 세계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하기에 불필요한 것들이니까.

하지만 세계가 유지한을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세계라고 해도 유지한에게 그리 모질지 않았다.

하나.

“세계가 아닌 인간들이. 네가 주인공이란 것을 알고 이 세상을 위해 움직이라는 것처럼 그렇게 움직이더군. 때문에 너는 언제나 가진 것은 넘쳤음에도 텅 비었지.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왜 주인공이라는 이유 하나로, 네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지.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홀린 듯 네 성좌가 되어 버렸다.”

충동과도 같은 것이었다. 마치 성좌가 되기 전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아서.

한순간의 실수처럼 저지른 충동이었다.

“하지만 너는 힘을 가지고, 누군가를 지킬 능력이 되었음에도 언제나 텅 비어 있더구나. 마치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네게 가까운 지인조차 네 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아. 그래서 나중에는 화가 나더군. 왜 너는 행복해질 수 없는 건지. 행복이란 것을 느껴보지 못하고 사는 것인지.”

“…….”

인간이라면 당연하게 누려야 하는 것을 배제당한 채 껍데기만 우월하게 살아가는 너.

그런 너를 인간들은 시기하고 질투하며, 이용했다. 그런 네가 안쓰럽고, 어리석고, 너를 이렇게 만드는 인간들에게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그렇게…….

“결국 너를 사랑하게 되더구나. 나도 어쩔 수 없는 성좌인 거지.”

‘승리를 걷는 자’의 입에서 자조적인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흔들림 없는 애정에 지한의 눈이 흔들렸다.

“……나는 당신의, 정의를 몇 번이나 어겼습니다.”

왜, 그럼에도 변치 않았냐고. 지한이 물었다.

그에 ‘승리를 걷는 자’는 별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깟 정의가 무엇이길래?”

“……!”

“너는 세계를 구했고, 세계를 위해 희생했으며. 그럼에도 보답받지 못한 자였다. 그런 네가 처음으로 부린 욕심을, 내가 처음으로 행복해지고 싶다고 품은 염원을. 그깟 정의 하나를 이유로 내가 너를 매도할 수 있겠나.”

내가 그 정도로 편협한 놈처럼 보이냐며 ‘승리를 걷는 자’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네가 행복하길 원해 네 성좌가 되었고, 네 행복을 위해 움직이는 널 보며 기쁨을 얻었다. 다시 너를 몇 번이고 선택한 이유는. 그것이면, 넘치도록 충분했다.”

유지한이 정말로 묻고 싶어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승리를 걷는 자’가 순순히 내어주었다.

세계를 몇 번이고 뒤집어 엎었음에도 몇 번이고 ‘승리를 걷는 자’가 자신을 선택했던 이유를.

“자. 그럼 이제 묻겠다. 이제는 행복하느냐?”

그 물음에, 지한의 머릿속에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이내, 자신 어린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행복을 바란 성위를 향해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었다.

“응. 그리고 앞으로. 행복해질 예정이야.”

드디어, 곁을 허락받았으니까.

처음으로. 멀고 먼 길을 돌아 얻어낸 것이었다. 어찌 보면 너무나 쉬운 길을 어렵게 돌아왔다. 지금도 얻은 것은 기껏해야 허락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괜히 윤지호의 연인이 아니었으니까.

처음부터 이제 다시 일궈 나가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내 그 어떤 순간보다 행복해.”

비로소 제대로 된 ‘처음’을 얻었다는 것에.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진심으로 행복했다.

드디어 처음 가져본 완전한 것.

유지한의 행복한 미소에 ‘승리를 걷는 자’가 미소를 지었다.

“뭐. 처음부터 다시 개고생하며 시작해야 하는 주제에 그렇게 웃고 있는 걸 보니 어이가 없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겠지.”

“…….”

“이제 가거라. 손이 발이 되도록 열심히 빌러 가야지 않겠나.”

“아……!”

그제야 여기서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깨달은 유지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빵한 자신의 사랑스러운 화신을 보며 ‘승리를 걷는자’가 길을 열어주며 미소를 지었다.

“즐겁게 네 행복을 지켜보마.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

“그리고 생을 마감하면, 내게 즐겁게 이야기를 들려주러 오려무나.”

그 말과 함께 눈앞이 점멸됐다. 얼른 가야 함을 알면서도 아쉬움을 느꼈다. 전멸되는 시야 사이, 마지막으로 지한이 선언했다.

“반드시 행복해져서, 당신에게 최고의 인생이었다고 말하러 올게.”

‘승리를 걷는 자’에게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최고의 대답이었다.

* * *

띠띠띠띠―

번쩍―!

눈을 뜨자마자 눈부신 빛과 함께 소란스러운 소리가 지한을 반겼다.

“정신이 드십니까?!”

“환자분!”

“유지한 씨 정신이 돌아왔어요! 성녀님!”

“제가 확인할게요. 비켜주세요!”

【성녀 고유스킬 ‘치유’가 발동합니다.】

무거웠던 몸이 바로 가벼워짐을 느끼며, 상대가 누군지 바로 알아차렸다.

“성녀님…….”

“유지한 씨. 진짜 돌아왔네요. 다행이에요.”

말자의 미소와 함께 유지한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직 일어나면 안 돼요!”

“괜찮습니다.”

말자의 배려와 치료는 정말 고마웠지만 지금 지한에게는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지금 시간이 얼마나 지났습니까?”

“게이트 클리어를 기점으로 이야기하자면 2주가 지났어요. 오래 누워 있었던 만큼 아직 치료가 필…….”

벌떡―!

말자의 당부가 끝나기도 전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2주 만에 깨어난 주제에 벌떡벌떡 잘도 일어나는 그 모습을 보며 기함을 하는 이들이 눈에 보였지만 지한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이런 것이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예상보다 더 오래 있었다. 마음이 급했기에 팔에 꽂힌 링거를 뽑으며 움직임을 서두르자, 뒤에서 말자의 비명과도 같은 고함이 들려왔다.

“당신 지금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해요. 유지한 씨!”

“괜찮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말을 들을 수는 없었기에 짧은 인사를 마치고 다시 마저 몸에 붙은 것들을 떼어내자, 말자가 기가 막힌다는 듯 소리쳤다.

“지금 치료가 안 되면 평생 헌터 생활 못 할 수도 있어요! 그 정도 페널티를 받았는데. 잘못하면 그대로 은퇴라고요!”

말자의 외침에 움찔한 것은 그곳에 있는 의료진이었다. 유지한의 은퇴가 자신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더라도 유지한이란 헌터의 부재가 얼마나 자신들에게 영향을 끼칠지는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지한은 태연했다. 오히려 그걸로 자신을 막아서기에는 초점을 잘못 잡아도 한참을 잘못 잡았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것에 집착하던 시절이 있었다.

잘나면 더 사랑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하지만 그것을 손수 산산조각 내주었다. 너무 늦게 그것을 깨달아 버렸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처음부터 너에게는 그런 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믿지 않았다. 그래도 아무것도 없는 나보다는 더 쓸모가 있을 테니까. 이 세상에서 너에게 줄 것이 더 많았으니까.

처음부터 너는 나에게 무언가를 바란 적이 없었는데.

그리고 나 역시도.

“……무슨……!”

“전 윤지호만 있으면 처음부터 아무것도 필요 없었어요.”

“……!!”

“이미 아시지 않습니까.”

“유지한……!”

말자의 외침을 뒤로하고 달리며 생각했다.

헌터 따위. 너와 비교하면 조금의 가치도 없었다.

처음부터 원해서 가진 것도 아닌데.

얼마든지 버릴 수 있었다.

“어…… 유지한이다―!”

“유지한 씨……!!”

그럼에도 네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놓지 못했고. 나를 정의하는 것에 헌터를 뺄 수 없었기에 포기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으면서. 그렇게 살아왔기에.

“유지한……! 유지한이다!”

너무나 당연하게 있어 와서.

“유지한 씨! MBS입니다!”

그것 때문에 오히려 정작 내가 가진 것은 너무나 보잘것없어서.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집착했다.

“잠시 대화를―!”

“너무 빨라……!”

“잡아!”

너에게 잘 보이고 싶고, 잘난 나를 주고 싶었으니까.

전부 다 네 표현대로. 개짓거리였다.

전부 알량한 내 자존심이었다.

“잡을 수가 없어…….”

“유지한……! 유지한 씨!!”

너는 그런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줬는데.

처음부터 잘못되었던 것이었다.

그런 보잘것없는 나를 봐 주었기에.

그런 나를 긍정해 주었기에.

그런 나를 향해 웃어주었기에.

“……!”

“……하아…… 하아…… 찾았다.”

단번에 너에게 빠진 것이었는데.

온 마음을 바쳐 사랑에 빠진 것이었는데.

세상 모든 걸 버려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

“……유지한?”

그리고 너는 그런 나를 넘치도록 사랑해줬다.

언제나. 어느 순간에도 변치 않고.

“하아…… 하아…….”

분명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길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비로소 보잘것없는 나 자신을 인정하며, 온전히 네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넘치도록 충분했다.

어떤 일도, 이번에는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이 닥치더라도,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걸을 것이다. 바닥을 기는 한이 있더라도, 아니. 기꺼이 모든 것을 걸고 매달릴 것이다.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구제 불능인 나를 위해, 네가 만들어 준 이 기회를.

“……너…… 어떻게 여기에…….”

그래서 너는 내게 언제나 평생 바래지 않을 빛이었다.

평생을 봐도 질리지 않고, 맹목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는 나의 유일한 빛.

나의 이정표.

“안녕. 윤지호.”

나의 절대자.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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