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장. 구원.
푸욱―!
살갗을 꿰뚫는 불쾌한 소음이 들렸다.
“헉…… 허억…….”
거친 숨이 폐부를 타고 올라왔다. 기나긴 접전으로 체력은 이미 바닥이 난 상태였다.
주륵―
완전히 찢어진 왼쪽 옆구리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마력도 체력도 바닥난 상태에서 옆구리까지 내어 주고 간신히 얻은 승리였다.
물론 정확히 심장을 찔렀다 해도, 고작 그 정도 일격으로 완전히 끝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기에 금방이라도 힘이 전부 빠질 것 같은 손아귀에 억지로 힘을 줬다.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정말 끝장이었다.
그런 주인의 굳은 마음에 감화된 세이라가 화답을 해 주었다.
【승리의 검, 세이라가 구원자의 뜻을 존중합니다.】
【승리의 기도를 발동합니다.】
【구원자의 소망(SSS)이 발동합니다.】
줄줄이 이어지는 알림들과 함께, 드디어 파우스트가 반응을 보였다.
“쿨럭―!”
주르륵―
입에서 피가 거나하게 터졌다. 다른 몬스터의 피도 아닌, 마기가 점철된 파우스트의 피였다.
맞아봤자 몸에 좋을 리가 당연히 없었지만, 몸을 뒤로 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그대로 파우스트의 피를 온몸으로 받아내었다. 제 피로 얼룩진 지한의 얼굴을 보며 파우스트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체 그대로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하하!!! 아. 살다 보니 이런 일도 겪는군.”
가슴에 칼을 한 번 꽂혀 본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두 번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파우스트는 마음껏 폭소하며 이 기적 같은 일을 찬양했다.
“내 가슴에 두 번이나 칼을 꽂다니. 무시한 것에 대해서는 사과하겠네.”
“두 번이나, 라…….”
횟수로 따지면 벌써 네 번째였지만, 구태여 그 얘기는 하지 않았다. 굳이 할 필요 없는 이야기였으니까.
어쨌든 이제는 정말 끝이었다.
드디어, 윤지호가 말했던 대로 이루어낸 것이다.
이게 그녀가 말했던 기본 조건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뤘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적어도 그녀 앞에 덜, 비참하게 서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물론, 서 있기는커녕 무릎을 꿇을 수 있기만 해도 다행일 것 같지만 그래도 그렇게 위안을 삼았다. 고무적인 쾌거기도 했고 말이다.
“이 정도로는 날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제 목숨을 걸고 덤비다니. 무모한 건지, 멍청한 건지.”
“…….”
물론 알고 있었다.
파우스트는 이미 한번 죽은 존재였다. 인간으로 죽고, 타락해 떨어진 존재.
그를 죽이려면 단순히 심장을 찔러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영체와 비슷하게 현현한 것에 불과한 그는 불사로 봐도 무방하니까.
고작 그 정도로는 그를 절대 죽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세계는 어느 정도 공정했기에 파우스트를 이 세계에서 추방해 원래 있던 세계로 돌려보낼 수는 있었다.
전부 이미 겪어 봤기 때문에 알고 있었지만, 정보를 일부러 흘릴 생각은 들지 않아 가만히 있자, 파우스트가 무언가 깨달은 듯 탄성을 터뜨렸다.
“아. 그녀가 교육을 잘 시킨 것인가. 어쨌든 멋진 대형견이군. 아무렴. 개라면 그래야지.”
“…….”
“그렇지 않으면, 이 정도도 못 하는 개를 뭣 하러 곁에 두겠는가.”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말이 유지한의 가슴에 제대로 박혔다. 그럼에도 여기선 동요해선 안 되었기에, 간신히 평정을 유지하는데…… 그제야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왜, 분노하지 않지?”
처음 심장을 찔렀을 때, 자신의 빈틈을 인정하지 못한 파우스트는 불같이 분노했다.
그뿐 아니라, 이미 두 번. 파우스트의 공략에 성공했을 때 역시 파우스트는 언제나 자신의 뜻이 어그러진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렸었다.
태생부터 천재로 태어나, 천재로 살아와 오만하게 삶을 누려온 그는 자신의 뜻이 어그러지는 것을 납득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심지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연속으로 심장을 찔린 것임에도 그는 분노하기는커녕, 피까지 쏟으면서도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심장에 칼이 꽂힌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을 만한 변화가 아니었다.
지한의 의문에 파우스트는 보란 듯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그런 걸 생각하고 있었군. 그래. 그럴 만하지. 확실히 화날 일이 맞기도 하고.”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엄습했다. 그리고 그런 불길함에 힘을 불어넣어 주듯이 파우스트가 대답했다.
“그야, 분노할 이유가 없으니까.”
마치 무언가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그 말에, 지한이 반응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뭐?”
그에 파우스트가 이보다 더 우스울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을 해 보였다.
“난 파우스트다. 인간의 몸으로 악마와 계약해 한 번의 회귀를 경험하고 스스로 내 세계를 바꾸었으며, 인간으로서의 삶을 마감하고 나서도 다시 한번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
“…….”
“그런 내가 시계 태엽의 변화를 전혀 느끼지 못할 것 같았는가?”
“……!!”
마치…… 알 리 없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듯.
결국 표정 관리에 완전히 실패해 버린 유지한의 눈이 더할 수 없이 커졌다. 놀람을 감추지 못하는 유지한의 얼굴을 보며, 파우스트는 세계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를 보는 것 같은 눈으로 유지한을 내려다보며 실소했다.
“세계는 구원할 줄 알아도 정작 본인은 구원할 수 없는 어리석은 구원자여. 너는 세계가 널 불행하게 만들었다 생각하겠지. 세계는 네게 특별함을 줌과 동시에 책임과 의무로 너를 짓눌렀으니까.”
“…….”
“하나. 세계는 우습게도 널 불행하게 만들 생각이 없었다. 세계도 양심은 있거든. 훌륭하게 의무를 다한 네 불행을 바랄 리가. 네 불행은 네가 자초한 것이다.”
단호하고도 빈틈이 없는, 확신 어린 대답.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기에 그래서는 안 되었음에도 유지한은 되묻고 말았다.
“……어째서?”
완전히 동요하고 있음이 분명한 그 물음에, 파우스트가 이제는 안쓰럽다는 듯한 얼굴로 유지한의 물음에 답했다.
“세계를 뒤튼 건, 오로지 너의 선택이었지 않은가? 나약하고 어리석은, 너의 독단.”
“……!”
“거기에는 세계도, 다른 누군가의 개입도 없었지. 아.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는 너만의 것이지. 다른 누군가의 것이기도 한가?”
어쩜 이리도 어리석고 가련한가.
파우스트가 혀를 찼다.
“멍청하고, 또 너무 어리석어 가엾기까지 하군.”
“……파우스트.”
“그래서 나는 네게 분노할 이유가 없다. 정확히는 네게 보다 훌륭한 복수를 곧이어 할 수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뭐?”
또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유지한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묻자, 파우스트가 오히려 이상한 걸 보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넌 느껴지지 않나?”
“…….”
“아. 그냥 모른 척하고 싶었던 건가.”
비겁하고 어리석은 유지한을 이제는 훤히 꿰뚫어 보듯, 파우스트가 말했다.
“너는 나를 죽이지 못하지만, 그녀는 나를 한 손으로 찢어버리고도 남지.”
“……갑자기 왜 그 이야길…….”
“그녀는 너와 달리 힘을 받고도 모든 책임과 의무를 지지 않았지. 그녀는 세계가 가장 사랑하는 영혼이며, 그럴 만한 자격을 네가 만들었으니까. 덕분에 그녀는 절대자의 재목이 되었다.”
“…….”
“이번의 내 목적은 애초부터 그것이었다. 정말로 시계 태엽이 돌아간 것인지. 그리고 그걸 돌린 놈은…….”
“…….”
“얼마나 어리석고 병신같은 놈인지. 확인하기 위해.”
파우스트가 꺼이꺼이 웃음을 터뜨렸다.
“더없이 만족스럽군. 제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걷는 병신 중에 상병신이어서.”
“…….”
“끝까지 그런 병신인 널 능멸할 수 있어서.”
그 말이 끝나는 순간.
하늘이 울렸다.
“……!”
마치 누군가를 환영하듯.
지한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 하늘의 변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명백히 겁에 질린 태도에, 파우스트가 히죽― 웃었다.
“너는 결국 나를 죽이지 못했다.”
“……!!!”
그제야 파우스트의 뜻을 알아차린 그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기에 파우스트는 마음껏 그를 농락했다.
“고작 ‘나’ 정도도 죽이지 못한 너를, 그녀가 과연 어떻게 볼까?”
“너…… 처음부터―!!”
처음부터 모든 게 계획된 것임을 알아차린 지한이 파우스트를 몰아붙이자, 파우스트가 즐겁게 웃으며 답했다.
“열심히 시간을 끈 보람이 있었군. 내 심장을 찔러줬는데 이 정도 복수는 해야 하지 않겠나.”
“…….”
“너의 절망을 응원하지.”
어리석은 너의 절망은 나의 가장 큰 만찬일 터이니.
그 말과 함께 파우스트의 뒤로 한 인영이 내려왔다.
“뭐야. 안 죽었네.”
설마 그럴 줄은 몰랐다는 듯한 여상하고, 무자비한 말에 파우스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고작 이 정도에 죽을 리가.”
“아. 그래. 그럼 빠져. 이제…….”
“…….”
“내 차례거든.”
절대자가, 미물의 목을 잡은 채 오만하게 명령했다. 그에, 절대자의 손에 붙잡힌 한낱 미물은 순순히 그 뜻에 응했다.
“절대자의 뜻대로.”
파앗―!
말과 동시에 파우스트의 목을 움켜쥔 손에 그녀가 힘을 순 그 순간, 파우스트의 육체는 빛과 함께 먼지처럼 사라졌다.
“……헐.”
너무나 간단하고 허무한 결말에, 주변에 있던 이들의 입에서는 그들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런 소리들은 지한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머릿속에 든 생각은 단 하나.
“……내가 거의 다 끝냈었어.”
‘고작’ 이것조차 해내지 못했다는 것.
그게 각인이 될까, 무서운 마음에 지한은 황급히 변명했다. 하지만 그에, 그런 것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듯한 지호가 여상히 답했다.
“아. 그래.”
“…….”
어딜 봐서 그렇게 보이냐는 것 같은 비아냥거림보다 더 무서운 한마디 반응에, 지한은 발밑이 꺼지는 것 같은 무력감을 느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지호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대한 사랑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무감각한 얼굴을.
그것을 보며, 지한은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 보고, 왔구나.”
결국.
절망 어린 그 목소리에, 지호가 답했다.
“그래. 덕분에 해야 할 일도 확실히 알았지.”
“……뭐?”
【지배자의 낫(SSS)을 현현합니다.】
그 말과 동시에 지호가 지한을 향해 낫을 들었다.
“……!!!”
황급히 그 낫을 막으려 드는 지한의 앞에서, 지호가 무심한 얼굴로 유지한의 의문 어린 얼굴에 답을 주었다.
“말했잖아. 이제 내 차례라고.”
* * *
“……!!”
지한이 급히 세이라로 낫을 막아냈지만, 역시나 완벽히 막아내긴 역부족이었다.
“……큭……!!”
【승리의 검, 세이라가 손상을 입습니다.】
【치명적인 손상이 될 수 있습니다.】
【최대한 빨리 복구를 하길 권고합니다.】
심지어 시스템이 미친 듯이 경고를 울려왔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세이라는 에고 소드이자, 최상급 아이템이었다. 계약자와 함께 성장하는 아이템이었기에 주인과 함께 최상위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현재 지한의 랭킹은 월드 랭킹 2위. 등급은 SSS급이었다.
그렇다는 건 세이라의 등급 역시 SSS급. 세계에서 최고의 아이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세이라가, 단순히 맞닿은 것만으로도 손상을 입다니. F급 아이템이라도 해도 불가능한 일인데.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자신을 향한 살기였다.
“……어째서…….”
의심할 수도 없이, 분명하게 자신을 향해 오는 살기.
어째서.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왜.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 지한이 현실을 부정한 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묻자 지호가 오히려 어째서 그런 걸 묻냐는 듯. 답했다.
“어째서? 글쎄. 네가 그런 걸 물으니 신기하네.”
“……뭐?”
“네가 한 짓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
네가 한 짓을 알고 있으면서 그런 질문을 어떻게 할 수 있냐는 듯. 산뜻하고도 신랄한 비난에 지한은 조금도 반박하지 못한 채 그대로 타격을 입었다.
명백히 상처받은 것 같은 그 얼굴을 보며, 지호가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을 했다.
“정말 몰랐나 보네. 왜. 나를 잘 알잖아. 그렇게 나와 함께 보냈는데.”
“…….”
“내 성격에 그런 짓을 한 너를 용서할 리도, 어떤 식으로 해결을 보려고 할지도, 모르지 아닐 텐데.”
그 말에 지한은 비로소 한 가지를 떠올렸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지만, 정작 한 번도 겪지 않아서 생각지도 않았다. 아니면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막상 그것을 실시간으로 겪었을 땐 당황도 했고, 혼란스러운 나머지 대처하기에 급급해서였을까 그 당시에는 윤지호다우면서 윤지호답지 않은 반응을 보였었다. 하지만 이제 차분한 상태로, 모든 걸 다 정리한 윤지호가 보일 행동은…….
“널 버리는 걸로 해결을 못 했으면, 이제는 다음 차례로 넘어가야지.”
“…….”
단호한 얼굴.
겨눠진 낫.
“네가 날 버리는 걸 못하면, 내가 끝내주는 게 낫지 않겠어?”
그리고 확신을 가득 담아 내리꽂는 말.
굳게 결심을 한 얼굴로.
무슨 말을 해도 그 결심이 결코 바뀌지 않을 것임을 본능적으로 깨우친 지한은 허탈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게, 네 결정이구나.”
“나 이런 년인 거 이제 알았어?”
새삼.
오히려 그걸 몰랐다면 섭섭할 것 같다며 지호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너무나 친절하게, 지한의 가슴에 확실히 쐐기를 박아주었다.
“그러게 날 사랑하지 말지 그랬어.”
말과 동시에 검과 낫이 부딪쳤다.
결전의 시작이었다.
* * *
“그러게 날 사랑하지 말지 그랬어.”
그건 네게 하는 말이자, 스스로에게 하는 말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게 날 왜 사랑했나.
이런 나일 줄 정말 몰랐나.
내가 이 정도로 썅년인 줄 진작 알았으면 네가 나를 좀 더 쉽게 포기할 수 있었으려나.
하는, 그런 쓰잘데기없는 생각에서 나오는 말이었다.
그랬으면 우리가 좀 더 쉬웠을까.
원래 너무 사랑하면 오히려 그 사랑은 잘 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딴 헛소리를 한 번도 믿은 적이 없지만, 우리가 그렇게 된 것을 보자니 그 같잖은 말이 조금 신빙성 있게 들려왔다.
‘……유지한?’
‘나 왔어!’
세계의 간섭 같은, 크고 거창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 둘만의 문제로 그렇게 되었으니까.
‘그래. 어서 와.’
언제나 사랑은 변함없이 여전했는데.
조금도 식지 않고, 그대로였는데.
오히려 그게 문제였다.
‘……곁에 있어 주면 돼.’
‘소박한데?’
‘……안 소박해.’
……전부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이제 와서 지난 일들을 떠올려 봤자.
결국 내 결심은 변하지 않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왜인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까지 와서도, 이렇게 되었음에도 설마. 너에 대한 사랑이 식지 않아서?
내가 생각하기에도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속으로 실소했다. 진짜 그건 미친년 아닌가.
내 기준에는 진심이었다.
하지만. ……이내 깨닫게 되었다.
“아. 내가 생각해도 난 정말 미친년이야.”
아. 그래. 결국은 이거였다.
여기까지 와서 빌어먹게도. 아니, 오히려 그랬기에 더.
그런 너를 사랑했다.
과거를 보고 왔기에 더욱더 빌어먹게도 무시할 수 없는 진실.
‘나쁜 년이지.’
외적으로든 재력이든 무엇이든 가진 남자가 오로지 자신만을 맹목적으로 바라는 것. 모든 여자들이, 아니.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암묵적 로망. 하지만 그건 로망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었다.
로망이 현실이 되면 그게 그냥 로맨틱하기만 할까.
맹목과 집착은 한 끗 차이인 것처럼. 세상의 모든 것은 생각하는 것처럼 깨끗하고 아름답지만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깨끗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은연중에 소망했다.
‘……윤지호!’
세상에서 내가 제일 소중하고, 내 것을 무엇 하나라도 주기 아까운 나는, 남들은 미쳤다고 할 정도로 상대가 나만을 바라보길. 그러면 내 마음을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오만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너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나에게 기꺼이 미쳐 주었고. 때문에 마지막에 그리 생각했던 것이다.
‘사랑해.’
너를 망친 것은 나라고.
그리고 그것은 여전했다. 결국 나를 위해, 나 하나만을 보며 미쳐버린 너를…….
나는 빌어먹게도 사랑했다. 네가 나를 그토록 사랑하듯.
그래서 나는…….
“너를 죽여서 이 굴레를 끊을 수 있다면. 싸게 먹히는 거지.”
“…….”
“다른 이들보다는 내 손이, 좋지 않겠어?”
너를 죽여서라도, 내 나름의 속죄를 너에게 할 것이다.
내게 미쳐. 내가 망쳐버려, 이제는 돌이킬 수도 돌아갈 수 없는 너를 위해.
“그러니, 제대로 덤벼.”
“…….”
“나 역시 그렇게 할 테니까.”
【절대자가 절대자의 영역을 선포합니다.】
그게 내 구원이었다.
* * *
【절대자가 절대자의 영역을 선포합니다.】
지호가 절대자의 영역을 선포하자마자, 영역에 존재하는 생물을 포함한 모든 것이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쾅―!
“……!!”
사방에 퍼진 짙은 농도의 마력이 주는 위압감이 그들을 자연스레 그리 만들었다. 자연에 흐르는 마력마저, 그녀에게 굴복했고. 마력도 그럴진대 고작 인간은 말할 것도 없었다.
“……허억―!”
그제야 그들은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절대자의 앞에, 그들은 한낱 미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파우스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파우스트를 손짓 한 번에 죽였으니 당연한 것인가.
어쨌든 예상치 못한, 재앙과도 같은 현상에 모두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건 랭커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숨…… 이…….”
“……이게…… 무…….”
말자도, 카밀라도, 케이도. 심지어 밀리언까지도. 모두가 짙은 농도의 마력이 주는 위압감을 견디지 못해 무릎을 꿇었다.
그뿐일까. 폐부까지 들어와 복종을 요구하는 마력의 지배에 숨조차 쉽사리 쉴 수 없었다.
‘이 정도라니…….’
이제 그녀를 어느 정도 겪을 만큼 겪었다 생각했는데 오만이었다. 그동안 자신들을 얼마나 봐줬는지가 뼈저리게 느껴졌다.
자신들 모두가 이런데, 그녀의 목적이 분명해서인지. 아니면 그녀의 마력을 이겨낼 정도의 인물인 것인지. 유지한은 너무나 멀쩡하게 마력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처럼 움직였다.
물론 이쪽은.
‘……빌어먹을.’
온몸을 지배하는 낯선 마력이 말하고 있었다.
끼어들지 말라고. 귀찮게 걸리적거리지 말라고.
백 마디 말보다 더 단호하고 확실한 명령이었다.
이 명령을 대체 누가 거부할 수 있을까.
월드 랭킹 3위가 버티지 못하는 것이면, 이 세계에 있는 모두가 버티지 못하는 것이었다. 대단한 위력이었다.
그런 대단한 위력으로…….
“……우리는 뒤로 빠져야겠어요.”
“거 참. 사랑 싸움 한번 어메이징하게 하시네.”
고작 사랑 싸움을 한다는 게 어처구니없긴 하지만.
뭐. 기대가 되긴 했다. 결과는 사실 불 보듯 뻔하긴 했지만, 그래도.
“……진짜 죽일까?”
“글쎄요. 윤지호는 한다면 하는 녀석이라.”
“휘유~ 진짜 재밌겠네.”
이 대단한 사랑 싸움이 어떻게 될지.
* * *
【절대자의 영역에서는 영역 안의 모든 권한이 절대자에게 부여됩니다.】
【마력 사용의 반작용에 유의해주십시오.】
절대자의 영역 안에서는 마력조차도 절대자의 뜻에 따르는 것인지, 마력 사용에 유의하라는 경고를 보며 지한은 머릿속이 아연해졌다. 자신이 쓸 수 있는 힘이 축소되어서, 뭐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 폐부로 느껴지는 지호의 진심 때문에.
분명 허튼 말 같은 건 뱉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나를 죽인다라.’
설마 나를 죽일 거라고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아니, 생각할 수 없는 것과 같았다. 내가 일단 그러지 못하니까.
네 손가락 하나에 피가 맺혀도 용납하지 못하는 내가 너를 해칠 수가 있나. 네게 버림받는 순간에서조차. 그런 마음을 품지 못했다. 감히 떠올리기조차 불가능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너는 다른가 보다. 하긴. 너는 그렇겠지.
너는, 나만큼. 나에게 미치지 않았으니까.
촤아악―!
그것을 증명하듯, 네가 낫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무심히 말했다.
“마력까지 막는 건 잔인하겠지. 너무 상대가 안 될 테니까. 그 정도 도의는 지켜줄게.”
낫에서 떨어지는 핏방울들을 보며 왼쪽 팔을 거머쥐었다. 아까 검을 맞대다 떨어지면서 입은 상처였다. 떨어지면서 스친 것뿐임에도 꽤나 깊게 베였다.
【절대자가 영역 권한을 실행합니다.】
【절대자가 당신을 ‘예외’로 설정했습니다.】
【당신은 절대자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내게 주는 선물이라는 것처럼 돌아온 마력이 빠르게 상처를 치유시켜나갔다. 그것을 보며 낫을 다잡는 지호를 보며 지한은 결국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네 말대로 내가 벌이고, 이제는 내 통제를 벗어나 버린 이 굴레는 내가 죽어야 끝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너와 달리 나는 이 굴레에 기꺼이 몸을 던질 사람이었고, 너는 당연하다는 듯 깔끔하게 모든 걸 포기하고 현재의 삶을 살아갈 사람이었으니까.
우리의 가장 큰 차이점.
그렇기에 우리 둘 중 하나가 죽는 것은 의미가 없다. 만약 네가 죽는다면, 나는 반드시 다시 모든 것을 바꿔, 다시 시작할 것이니까.
그러함에 어떤 대가가 필요하다 해도.
내게, 너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으니까.
그러니 이 굴레를 끊기 위해 만약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그것은 나여야 한다.
아주 간단하고도, 누구라도 맞출 수 있는 답. 그것을 맞추지 못할 리 없는 너는, 단호하게 결론을 내린 것이다. 내가 내리지 못할 것을 아니까.
너는 정말 대단하고, 나에게 과분한 여자였다. 네 말처럼, 죽는다면 너의 손에 죽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큰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고마워. 네 나름의, 기회를 줘서.”
나는 여전히 욕심이 넘쳐났고, 그 넘쳐나는 욕심을 포기할 수 없었으며.
“하하. 그래. 그래야 너답지.”
네가 내게 학습시켜 준 것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
“이제야, 솔직해지는구나. 마음에 들어.”
너는 그냥 마냥 순종하고, 네 말을 그냥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곧바로 포기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주장을 펼칠 것이면, 자신을 붙잡고 납득시키기 위해 움직이고 노력하는 것을 좋아했다.
너를 붙잡기 위한 법.
멍청하게 계속 세계를 바꾼 나를 위해, 네가 알려 준 방법이었다.
“네가 그러길 바랐잖아.”
“그렇지. 죽어라 말해도 안 듣더니, 그래도 이제는 듣긴 하는구나.”
그러니 이번에는 네 뜻대로 욕심을 내 볼 생각이다.
“언제나 그랬어.”
아직 나는 죽고 싶지 않았으니까.
“네가 바라는 건 언제나 변하지도 않고 포기할 수도 없지.”
“…….”
“그런 우리의 해결 방법이 이거라면, 나쁘지 않아.”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이기도 하고.”
너를 설득하는 것보다.
네가 나를 사랑하게 하는 것보다.
가장 쉽고 간단한 일이었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저 결과물만 보면 됐으니까.
결심을 내리고 검을 잡아 쥐자, 그녀가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좋아. 그렇게 나와야지.”
“역시 이게 정답 맞지?”
“맞아. 의욕도 없는 놈 죽이는 건 되게 찝찝하고 짜증나거든.”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었을지 모르겠네.”
“하지만, 그걸로는 해결이 안 되지. 그러기엔 우리는 너무 멀리 왔잖아?”
이제는 연장하기도 지긋지긋해.
그 말에는 동감할 수밖에 없었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도 그러기엔 지쳤어.”
더 이상 전전긍긍하며, 매달리기만 하기에는 자신도 너무나 지쳐버렸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매듭을 짓는 편이 이제는 나을 것 같았다.
물론 내가 바라는 대로.
“나 역시. 그러니 우리는 이게 맞아.”
“그래.”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이겨야 했다. 생에서 한 번도 이겨본 적 없는 너를.
단 한 번도 이겨본 적 없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이길 것이다.
“망설이지 마. 망설이는 순간 죽을 테니까.”
“너야말로.”
콰과과과광―!!!
아직 너와 함께, 하고픈 것이 너무나 많았다.
* * *
【지배자의 낫이 권능을 발동합니다.】
【빛의 검 세이라가, 계약자의 구원을 소망합니다.】
각각의 무기가 주인의 뜻에 따라, 권능을 발휘함과 동시에 마력을 품고 맞대어졌다.
체엥―!!!
날카로운 굉음과 함께 맞대어진 무기 사이로 지한의 얼굴을 바라본 지호가 미소지었다. 그와 함께, 지한의 등 뒤에 마력 반응이 이어졌다.
【세계의 시초의 주인이, 시초의 메모리를 펼칩니다.】
【시초의 기억에 기록된 존재가 주인의 명에 따라 소환됩니다.】
【죽음의 파수꾼이 소환됩니다.】
“……!!”
촤라락―!
지한이 알아채기 무섭게 등 뒤에 소환된 죽음의 파수꾼들이 사슬을 꺼내 지한을 옭죄었다.
【죽음의 파수꾼이 당신을 죄인으로 선정했습니다.】
【사슬에 구속당합니다.】
꼼짝없이 몸을 결박당한 상태.
그 상태에서 지호가 그대로 낫에 힘을 쥐어 내리찍은 다음 거리를 두고 곧바로 낫을 휘둘렀다.
쉬이익―!
엄청난 마력의 파동을 가르며 제게 다가오는 낫을 보면서도 지한은 놀랍도록 침착했다.
이유는 분명했다. 막을 수 있었으니까.
【구원자가 구원의 노래(SSS)를 읊조립니다.】
“……이런.”
이번에 안타까운 소리를 낸 건 지호였다. 황급히 몸을 뒤로 뺐지만, 그래도 소맷자락이 빛에 타버린 것을 보며 지호가 허, 하는 웃음을 흘리며 덤덤하게 지한을 칭찬했다.
“그래도 주인공 몇 번이나 괜히 한 거 아닌가 봐? 쓸 만하네. 유지한.”
지호의 공격과 동시에 죄인의 사슬을 부수고 죽음의 파수꾼을 소멸시킨 지한이 그래도 아직 남은 공격의 후유증을 감당하면서도 여상히 지호의 질문에 답을 했다.
“그 정도도 못 하면서 너와 함께하겠다는 생각을 품었을까.”
애초에 이 정도도 못 했다면, 너를 만날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었겠느냐고. 유지한이 내상을 다스리며 덤덤하게 답했다.
듣는 사람이 괜히 기분이 나빠질 정도로 한없이 자신을 낮게 보면서도, 현실은 또 꽤나 또렷하게 직시한 대답이었다.
“이 정도도 못 하는데 세계가 너를 볼 수 있게 해 줬을 리 없지.”
그 말대로, 이 정도도 하지 못했다면 세계를 구하지도 못했을뿐더러, 반신의 수준에 올라 세계의 틈에 들어가지도 못했을 테니까.
“거 참 기분 나쁜 대답이네.”
하지만 그래도 듣기 거북한 소리인 건 여전했기에 가감 없이 불쾌감을 표출하자, 지한이 너답다는 듯 미소를 흘렸다.
“사실이니까. 그런 나를 네가 사랑할 리도 없고.”
“…….”
“그래서 그런 소설을 만든 것이기도 했지.”
“……소설?”
“읽었잖아. 내가 만든, 이 세계의 주인공인 내 소설.”
그건 단순히 세계에 대한 자신의 기록을 엮은 것이 아니었다.
지한은 처음 소설을 매개체로 선정했을 때.
고민했다.
기억에는 없다 한들, 수없이 새겨진 감정들은 남아있어서 혹여, 나를 싫어할까 봐.
그러면 주인공을 자신으로 안 쓰면 되었지만, 욕심이 또 들었다. 이걸 보고, 이 소설의 나를 진짜 나라고 생각한다면, 내게 호감을 보여주지 않을까. 당연하게 나를 사랑해 주지 않을까.
한순간의 흔들림.
그리고 지한은 홀린 듯 소설을 만들었다. 윤지호가 싫어할 부분은 전부 빼고. 짜증나고 성가시기는 해도 윤지호가 도저히 신경을 안 쓸 수 없을 만큼 착하게.
이제는 전혀 그렇지 않지만, 가장 처음의 나를 열심히 쥐어짜내며 열심히 좋은 부분만 집어넣었다. 네가 나를 사랑하길 바란다는 그 바람 하나만으로.
너무 멀리 와 버려, 너무나 변해버린 나는. 너를 붙잡을 조금의 자신조차 없었으니까.
“그거 졸라 못 썼더라.”
“그래도 너는 거기 쓰여 있는 나를 사랑했잖아.”
그것만으로도 넘치게 충분하다며, 유지한이 웃었다. 그 미소를 보며 지호는 진심으로 실소를 했다.
그 착각을 내가 할 수는 있어도 이 자식은 안 할 거라 생각했는데.
나도 안 하는 착각을 이 새끼가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졸라 짜증이 났다.
“개새끼가. 사람 빡치게 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예요.”
“……뭐?”
“답해 줄 의무 없어.”
열심히 착각하고 살아. 그냥.
어차피 이제 와 그걸 말해 줘 봤자 뭐가 달라지겠는가.
미주알고주알 설명할 의무는 없었다. 필요도 없었다.
그 소설 속 유지한을 사랑했던 건, 무의식중에 너를 사랑했던 감정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걸.
* * *
챙―!
번쩍―!
무기를 맞댈 때마다 귀가 아릴 듯한 소리가 울리며 서로의 마력 충돌로 인한 빛이 번쩍였다.
촤아악―!
콰가과광―!
그 마력 충돌의 여파로 대지가 요란하게 비명을 질렀지만, 그걸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지한이 신경 쓰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지나친 접촉은 무기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이 올 수 있습니다.】
【빛의 검, 세이라가 자가 수복을 위해 계약자의 마력을 흡수합니다.】
온전히 싸움에 집중해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빠르게 손상되어 가는 세이라가 신경을 거슬렀다.
그뿐일까. 손상이 되어가며 싸울 수는 없었기에 에고 소드인 세이라는 자가 수복 기능을 사용했다. 문제는 손상이 워낙 빨라서 가까스로 수복하는 상황인데도 너무 많은 마력을 소진한다는 것이었다.
상대는 자신과 비등한 것도 아니고, 아득히 높은 위치에 있는 절대자. 마력 한 톨도 허투루 써서는 안 되는데, 예상치 못한 데서 마력이 이렇게 빠져나가다니.
명백히 상정 외였다.
캉―!
“……!”
‘이 정도로 수준 차이가 날 줄이야.’
완벽한 계산 미스였다.
그녀가 절대자의 칭호를 얻었으며, 성위의 급도, 랭킹도 자신보다 높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차이가 날 것이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어쨌든 자신은 한 세계를 평정한 자였으며, 반신의 경지까지 올라갔었으니까. 물론 너무나 많은 세계를 뒤바꾼 페널티로 그 힘을 어느 정도 잃기는 했었으나, 그래도 전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랭킹이 전부가 아니다.
그건 이 세계의 기본적인 전제와 같은 것이다.
랭킹이 높다 하더라도, 상성이라던가 다른 부가적인 요소로 충분히 승패가 달라질 수 있었으니까. 랭킹과는 무관하게.
랭킹은 많은 부가적인 요소가 반영되지 않은, 오로지 힘과 칭호들만으로 나열한 순서일 뿐이었다. 때문에 랭커들 사이에 속설도 존재했다. 랭킹은 경쟁을 부추기는 부나방 같은 것이라고. 모든 걸 말해주지 않으면서 마치 보란 듯 보여주는 그 순위는 싸움을 부추기는 것과 같은 더러운 느낌이라고.
실제로 월드 랭킹 1위에서 10위는 그렇게 압도적인 차이가 나지 않았다. 윤지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서로 싸우지 말자는 랭커들간의 암묵적인 중재법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었다. 승패를 장담할 수 없었기에 그저 가볍게 싸우기만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들 역시 결국 힘에 미친 괴물이었기에 한번 불이 붙으면 누구든 멈출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한 명이라도 자리가 비게 된다면 이는 세계적으로 크나큰 손실이었기에 모두가 얼마 남지 않은 인간적인 면을 끌어모아 맺은 결정이었다.
‘그랬는데…….’
힘에 굴복한 것이 아닌,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한 결정.
심지어 세계를 구원했을 때조차, 이들을 완벽히 짓누르지 못했다. 그랬는데, 그녀는 무위를 조금 선보이는 것만으로도 완전히 그들을 짓누르고 그들에게 복종을 받아냈다.
자신은 절대 할 수 없었던 일.
한때는 마찬가지로 그녀의 무위에 짓눌렸었지만, 그때와 달리 지금은 힘을 전부 찾은 상태.
그런데도 이런 차이라니. 그럴 턱이 없었다.
아무리 기본적인 힘의 차이가 난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이 세계의 주인공이었다. 어떠한 높은 벽도 결국 뛰어넘을 운명을 타고난 자였다. 뛰어넘어야 하는 의무를 진 자이기도 했고 말이다.
주인공.
늘 자신을 불행하게 했지만, 패배는 가져다주지 않는.
때문에 포기할 수도 없게 만드는 칭호.
그게 있는 한, 윤지호가 아무리 높은 벽에 다다라 있다고 해도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럴 터인데…….
그런 복잡한 자신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듯, 사뿐하게 솟아오른 돌 끝자락에 안착한 지호가 여상히 말했다.
“머릿속이 복잡한가 본데. 생각보다 더 수준 차이가 나서 당황스러운가 봐?”
마치 그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숨길 생각이 조금도 없는 그 목소리에 자신 역시 덤덤하게 입을 열 수 있었다. 자신 역시도 이제 와, 숨길 필요는 전혀 없었으니까.
“그래. 이럴 리가 없거든.”
“와. 자신감. 역시 이 세계의 주인공다운 태도야.”
이런 거는 참 주제 파악을 잘해.
지호가 소리 없이 박수를 쳐 주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에 지한은 반사적으로 쓴웃음을 흘렸다.
못할 리 없지 않는가.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후에는 네 곁에 있기 위해서.
“당연하지.”
세계를 뒤바꿨는데, 그 정도 힘을 스스로 자각하고 있지도 못했다면 가당키나 하겠는가.
네 곁에 있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과도 같았는데 그것을 모르면 진짜 머저리였다. 뭐, 어떤 면에서는 이미 머저리가 되긴 했지만.
그런 내 씁쓸한 마음에는 관심이 없는 잔인한 윤지호는, 그런 나를 쳐다도 보지 않고 지루하다는 듯 미간을 구기며 투덜댔다.
“그런데 왜 지금은 이렇게 김빠진 콜라 같으시대?”
잘난 주인공 패시브 어디다 두고?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는데 이따위로 허접하면 오히려 찝찝하게 생겼다고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지한이 헛웃음을 흘렸다.
무기를 맞대고 목숨을 거는 싸움을 하는 지금까지도, 마지막 대미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던 지한이었기에 그 말은 잔인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씁쓸하고 상처받은 마음은 마음이고 그것과 별개로 확실히 이상했다.
힘을 되찾기 전과, 후가 다를 게 거의 없는 느낌이었다.
힘의 차이는 물론, 권능의 차이가 차원이 다른데. 어째서?
페널티가 생각 이상으로 심한 것일까?
그렇다고 여기기에는, 지금 자신의 힘이 전성기 때보다 아득히 떨어지는 수준은 아니었다.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미간을 구기는데, 그런 자신의 얼굴을 빤히 지켜보던 지호가 이내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렸다.
“아하하하하―! 얼굴 봐! 아 어떡해. 너무 웃겨.”
도무지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배까지 잡아가며 폭소를 하는 모습에 그제야 지한은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이, 바로 여기 있다는 것을.
그리고 지한이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것을 눈치챈 지호가 웃음을 멈추고 시원하게 확답을 내주었다.
“맞아. 이번에는 나야. 이 세계 주인공.”
“……!”
설마설마했지만 머릿속으로 추측만 하는 것과 입으로 확답을 듣는 것은 달랐기에 지한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에 지호가 정말 몰랐냐며, 오히려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제법 주인공 먼치킨 설정 다 가지고 있지 않나?”
“…….”
“빵빵한 성좌에 월랭 1위.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고, 이 세계 최강자. 먼치킨 요소 싹 다 갖추고 있는데. 그냥 봐도 주인공이지 않나. 아, 평생을 주인공으로 살아와서 암묵적인 믿음이 있기 때문인가.”
그래. 그럼 그럴 수 있지.
지한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혼자서 다 결론을 지어버렸다. 매우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지한은 반박을 하지 못했다.
전부, 정답이었으니까.
평생, 태어나서부터 자신을 옥죄어오는 만큼 당연하게 누려왔던 것이기에 그것이 사라졌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다. 심지어 의무는 여전히 짊어지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세계마다 일어나는 사건은 조금씩 달랐지만, 그래도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전번의 세계와 똑같이 돌아가고 있었기에.
그런 지한의 의문을 꿰뚫어 본 지호가 의심이 피어날 여지조차 생기지 못하게 단호하게 답을 내려주었다.
“주인공인 너님 때문에 허구한 날 휘둘리는 인생이었잖아. 그래서 이번에는 나 달라고 했어.”
“….”
“나도 한 번쯤은 신나게 휘둘러 봐야 하지 않겠어? 그래야 속이 후련할 거 같다고 하니까 주더라.”
나를 사랑하는 빌어먹을 누구께서.
대수롭지 않게 튀어나오는 폭탄에, 지한이 실소를 흘렸다.
그게 달라고 하면 쉽게 줄 수 있는 것이었던가.
그런 것이었다면 자신이 그렇게 평생을 얽매이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 수밖에 없었기에 웃음이 새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했기에, 의무를 주기 싫어 주인공이라는 자리도 주기 싫어했을 세계가 보여서. 그럼에도 단 한마디에 그것을 쟁취해낸 이가 너무나 대단해서.
정말이지. 윤지호는 언제나 예측을 뛰어넘는 여자였다. 대단하다 못해, 이제는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물론 제일은, 달라고 하니 주고 싶지만 의무는 주고 싶지 않아, 주인공의 의무와 특권은 그대로 내게 유지하면서 최대 특권인 세계를 조율하기 위한 밸런스 패치만 조용히 지워 버린 세계였다.
이렇게도 가능했던 것을 왜 자신에게는 그리도 가혹했었는지.
단순히 사랑받고 아니고의 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어마어마한 차이에 허탈감이 몰려 들어왔다.
“언제는 네 맘대로 날 안 휘둘렀나.”
결국 언제나 날 휘두른 건 너였는데.
늘 휘둘리기만 한 건 나였는데, 네 편을 들어주다니.
이런 차별이 또 어디 있을까.
하지만 지호는 생각이 다른 듯, 허탈한 지한의 말에 헛소리 말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뭐래. 개그하냐.”
단호한 비웃음에 이번에는 발끈하지 않을 수 없었던 지한이 말했다.
“……네 행동 하나하나에 끌려다녔던 건 나였잖아.”
그 말에 지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눈치는 겁나 보면서도 넌 결국 네 뜻대로 했잖아? 결국 네가 단 한 번이라도 내 의사대로 한 적이 있긴 한가? 다시 시작하는 것도. 세계를 뒤트는 것도.”
“……!”
“결국 언제나 끌려다닌 건 나였지.”
그러니 진짜 빡치기 전에 닥쳐.
단호한 선언과 함께 지호가 지한의 앞으로 달려와 그대로 낫을 내리쳤다.
콰앙―!!
“……큭―!!!”
갑작스러운 공격에 지한이 황급히 세이라로 막았지만, 한발 늦어 공격을 다 막지 못하고 조금 뒤로 밀렸다. 그에 내상을 입고 혀를 차는데, 한순간 눈앞에 투명한 파편 조각이 깨져서 흩날렸다.
“……?”
갑작스럽게 보이는 파편들에 영문을 몰라 미간을 찌푸리는데 같은 것을 본 지호가 말했다.
“아. 이제야 터졌네.”
기다리느라 죽는 줄 알았네.
거참 더럽게 오래 걸린다는 못마땅한 소리.
하지만 그 말은 귓가에 들려오지 않았다. 감탄사와 함께 그 파편 조각이 무엇인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누구시죠?’
언젠가 지호와 함께했던 장면이.
“……무슨 짓을 한 거야―!!!”
처음으로, 지한의 입에서 피 끓는, 분노 어린 고함이 터져 나왔다.
‘유지한.’
‘……저 아세요?’
‘……응. 아주 잘.’
그건 지한이 지호와 함께한 기억의 파편이었다.
* * *
“야. 이 미친 새끼야!!!”
급이고 뭐고 그딴 거 없었다. 그런 것보다 눈앞을 새하얗게 만드는 분노가 더 우위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넘치도록, 그리고 참을 만큼 참았다고. 성좌, ‘승리를 걷는 자’는 자신했다.
애초에 성좌는 오랜 시간을 보낸 만큼 제정신인 것들이 하나도 없었기에, 제일 제정신이 박힌 그가 성좌들의 기둥이 되고는 했었다.
때문에 말투도 고쳤다. 근엄하고, 고지식하게.
성좌들의 모범이 되기 위해.
애초에 그보다 높은 급의 성좌는 거의 없다시피했기에, ‘승리를 걷는 자’는 자신이 성좌들의 물을 맑게 하는 데에 지대한 공언을 했다 여겼다.
그게 사실이기도 했고.
하지만 그런 지적이고 근엄하며, 늘 정의롭고 진중한 자신의 이미지를 단번에 깨버리는 놈 때문에 ‘승리를 걷는 자’ 매일 머리를 쥐어뜯었다.
‘저딴 게 왜 왕이어가지고……!!’
‘승리를 걷는 자’가 매일 하는 생각이었다.
성좌들은 이미 한 차원에서 신의 존재에 다다른 이들이었지만 그들 사이에서도 급은 있었고, 그에 따라 왕 역시 존재했다.
그들보다 더 아득히 먼 시간을 넘어, 세계란 것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늘 그 자리에 존재했던 시초. 그를 이길 수 있는 성좌는 아무도 없었다. 그 어떤 대단한 성좌도 그의 시선 한 번에는 숨조차 쉬기 버거워했다.
그게 시초의 권능이었다. 그렇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는 왕이 되었다. 누구도 넘볼 생각도 감히 하지 못하는, 아득한 권좌였다.
문제는 그렇게 오래 살아와서인지, 저 왕께서 돌아도 단단히 돌았다는 것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분을 이기지 못해, 온몸으로 분노를 표출하며 성큼성큼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고매하신 왕께서는 심드렁하게 손을 흔들어 그의 속을 아주 제대로 뒤집어 놓으셨다.
“어. 왔어.”
이쯤이면 올 때가 되었다 싶긴 했지.
오히려 왜 이제 왔냐는 듯한 눈빛에 ‘승리를 걷는 자’는 결국 그대로 뒷목을 잡았다.
“이 개새끼야!!!”
“어우. 목소리 한번 우렁차네.”
되도 않는 할아버지 흉내 드디어 때려치웠군.
자신을 향한 우렁찬 쌍욕에도, 제대로 듣지도 않는 건지 그 같잖은 흉내를 드디어 벗었냐며 축하한다고 소리 없는 박수를 성의 없이 치는 모습에 ‘승리를 걷는 자’는 이내 화내기를 포기해 버렸다.
이놈과의 대화에서는 화를 내 봤자 제 체력만 빠졌다.
“……대체, 어쩌자고 그딴 걸 허락해 준 거야?”
“……허락이라니?”
그건 또 뭔 소리냐는, 시치미를 뚝 떼는 모습에 ‘승리를 걷는 자’ 헛소리 말라며 비소를 흘렸다.
“시치미 떼지 마. 상대의 기억을 지우다니. 성좌도 쉽사리 하기 어려운 걸 일개 인간이 할 수 있을 리 없어.”
‘승리를 걷는 자’는 확고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기억은 단순히 기억이 아니었다. 기억은 그 세계에 그들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기록과 같은 것. 세계와 그들을 연결하는 끈이었다.
거창하게 이야기하자면 그들의 존재를 세계에 새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억이 사라진다는 건, 자신이 세웠던 기록들이 소멸된다는 것. 즉, 영혼과 세계의 단단한 연결 끈이 희미해짐을 의미했다.
때문에 기억과 관련된 권능은 거의 금기시되었다. ‘거의 금기’라고 하는 건, 굳이 그들이 금기라고 지정하지 않더라도 애초에 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한 시간의 아주 짧은 기억이라도, 세계는 절대로 누군가의 기억을 건드리는 것을 용납지 않았다.
기억을 사라지게 하는 마법도, 말은 사라지게 한다지만 사실은 머릿속 저편에 묻어 두는 것에 불과했다. 생각이 나지 않도록.
시간을 돌리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새겨진 시간이 있기 때문에 시간을 돌린다 해도 새겨진 시간과 기억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다만, 새겨졌지만 아직 기억은 하지 못하는 상태였기에 돌아간 시간 속에서 볼 때는 사라진 것처럼 보일 뿐.
전부 눈 가리고 아웅과 같았다. 때문에 그렇게 몇 번이고 기억이 지워졌을 터인데도, 지호가 결국 기억해낼 수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 ‘승리를 걷는 자’는 그 장면을 보았을 때, 그냥 감춰두는 것이겠거니와 했다. 결국 갈 때까지 가는군, 이라고 혀까지 찼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 깨진 파편의 빈 자리처럼 지한의 영혼에 공백이 조금씩 생겼으니까.
그것을 보자마자 ‘승리를 걷는 자’는 그대로 미친 듯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의심할 여지도 없었으니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지독한 여자가, 되살린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데 고작 그런 흐지부지한 선택을 하지는 않을 테니까!
정말 지독할 정도로 영리하기까지 했다. 그것보다 더 최악인 건, 그녀 스스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라도 원한다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줘서라도 이뤄 줄 미친놈이 곁에 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이뤄 줄 능력까지 가지고 있는, 아주 위대한 미친놈이.
“다른 것도 아니고 기억이야. 세계의 불문율을 잊은 건 아니겠지? 대체 어쩌자고……!”
이 미친놈 중에 상 미친놈이! 여자 하나에 미쳐서……!
라고, 한 여자에 완전 미쳐서 세계를 여러 번 말아먹은 놈의 성좌가 소리쳤다.
그제야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아들은 그가 공손히 손을 들며 발언했다.
“아. 뭔 말 하는지는 알았는데, 내가 한 거 아니다.”
“뻔히 다 보이는데 그런 시치미가 통할 것 같아?”
“아니. 의심은 이해하는데 진짜 아니라고.”
자신은 억울하다고 열심히 얼굴로 피력하며 그가 수경을 가리켰다. 그에 미심쩍은 눈을 하면서도 ‘승리를 걷는 자’가 수경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렇게 자신과 다른 수경이 보여주는 진실에 ‘승리를 걷는 자’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두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에 그가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그치? 나 진짜 아니라니까.”
그냥 우리 애가 대단한 거임!
아주 위풍당당하다 못해, 자부심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에 ‘승리를 걷는 자’는 짜게 식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맞는 말이긴 했는데, 저 꼬라지를 보니 긍정을 해주기 매우 아니꼬웠다.
더불어.
“그래도 넌 막을 수 있지 않았나.”
방관한 그의 죄도 없지 않았기에.
때문에 가자미눈으로 그를 비난하자, ‘승리를 걷는 자’의 그런 태도에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듯 그가 말했다.
“내가 왜?”
너무나 당연하게 내가 대체 왜, 그래야 하냐는 대답에 ‘승리를 걷는 자’가 말문이 막힐 뻔한 것을 억지로 참아내고 힘겹게 말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기억이야. 가능하다 해도 도리상 말려야…….”
“그니까. 왜. 윤지호가 하고 싶다는데.”
‘아 놔. 이런 개새끼가.’
윤지호가 하고 싶으면 무얼 해도 상관없다는 거냐!
물론 진짜로 그렇게 생각할 것이 뻔해서 그 말을 굳이 뱉진 않았다. 대신 눈으로 욕을 대신하자, ‘이매망량’이라고 제 계약자에게 사기를 친 잘나신 왕님께서 정말 가소롭게도 사랑에 빠진 눈으로 말씀하셨다.
“자기 스스로 얻어서, 일궈내고 이루어낸 걸 도와주진 못할망정. 감히 내가 막을 수 있나.”
“……그래서,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고 말하는 건가.”
“어차피 너도 그렇지 않나?”
“뭐?”
어차피 너나 나나 도긴개긴 아니냐는 반문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승리를 걷는 자’가 되물었다. 하지만, 그런 반응에도 이매망량, 세계의 시초는 제 발언을 철회할 생각이 없었다.
“우리는 이미 수천수만 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질릴 대로 질렸지. 성좌라 허울은 좋지만 결국 다들 하나같이 이곳에 갇혀 있는 죄인과도 같아.”
“…….”
“나가 본 적도 있지만, 나가 보았자 우리의 존재를 세계가 버티질 못하니 스며들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이곳에 다시 틀어박히게 되지. 그러니 이제는 나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이렇게 바라만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거고.”
안 볼 수 있나.
유일한 오락이자, 그들은 가지지 못한 것.
그리고 앞으로 가지지 못할 것에 대한 동경과 애정은 신이나 인간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세계의 시초. 그를 제외한 모든 성좌는 그것을 가져보았기에 더더욱.
“그렇기에 방식은 다들 다르지만, 모두가 자신의 화신에 대해 애정이 남다르지.”
“……모두가 그렇지는 않아.”
증오하고, 장난감으로 여기고 혐오하는 성좌가 그토록 많이 존재하는데 ‘승리를 걷는 자’가 어떻게 그것을 확언하냐 말했지만, 그의 생각은 여전히 확고했다.
“그 또한 애정이고 관심이지. 정말 싫다면 보지 않으면 될 것을. 자꾸 돌아보고, 결국 간섭하지 못해 안달하지 않나.”
삐뚤어져도 애정은 결국 애정이지.
애정은 좋은 것만 있는 게 아니지 않나.
다들 여러 방식으로 표현하지만, 결국 골자는 애정이었다. 그것은 눈앞에 있는 놈도 마찬가지였다.
“세계 때문에 녀석을 선택한 너 역시도.”
“…….”
때문에 ‘세계의 시초’는 확신했다.
이 고지식한 정의를 들이미는 놈조차도, 세계의 추를 맞추기 위해 화신을 선택했지만 단 한 번도 그 녀석을 아끼지 않은 적 없다는 것을. 증거는 이미 놈이 훤히 보여 주었다.
“그래서 그렇게 헐레벌떡 달려온 것이지 않나. 네 화신이 불행해질까 봐.”
일이 터지기 무섭게, 이리 헐레벌떡 자신에게 달려왔으니까. 멍청하고 어리석지만, 결국 사랑하는 자신의 화신을 위해.
“……그래. 나 역시 성좌니까.”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냐고.
꽤나 오랜 시간 유지한을 지켜봐 온 ‘승리를 걷는 자’가 답했다. 순순한 긍정에 세계의 시초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넌 네 화신을 다해 최선을 다해. 나 역시 그럴 테니까.”
“…….”
“내가 수백 번 생각해도 유지한보다 윤지호가 우선인 것처럼. 너 역시 그러라고.”
“…….”
“네 화신이니까.”
너무나도 확고한 충언.
그에 ‘승리를 걷는 자’는 가만히 자신의 왕을 바라보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후 빠르게 그곳을 벗어났다. 그의 충고대로, 제 화신을 위해.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그는 다시 바닥에 엎어져 애정이 가득한 얼굴로 수경을 통해 이 연쇄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어떤 너라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나.”
닿지 않을 고백을 하며.
* * *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그냥 유지한을 죽이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날까?
나는 그러면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만족할 수 있을까?
답은 전부 ‘아니’였다.
고작 그런 걸로 만족할 수 있을 리가.
나는 그 정도로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속 편하고 쉬운 인간이었으면 애초에 유지한이 그 개고생을 안 했을 것이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가 떠올랐다. 그냥 댕강 목을 자르는 것보다, 더 잔인하고. 하나 모든 것을 시원하게 청산할 수도 있는 방법이. 모든 것을 처음으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이.
망설일 것은 없었다. 이미 유지한이 내게 여러 번 했던 쓰레기 짓이었으니까.
‘너와 나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나겠지.’
나는 틀린 말은 하지 않았다. 네게는 죽음과도 같은 것일 테니까. 아니 그보다 더한 일이려나.
네 안에서 나를 죽이는 걸, 너는 네 목을 치는 것보다 더 끔찍하게 여길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유지한의 반응은 상상 이상이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너를 죽이는 짓.”
정확히는 네 안에 있는 나를 죽이는 짓이지만.
이게 내가 내린 결론.
내 ‘구원’이었다.
너에게서 나란 존재를 없애주는 것. 이미 반신의 존재에 다다른 너는 단순히 죽인다고 해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솔직히 너를 죽이는 건, 내 입장에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너를 죽이고 속 편히 다 끝났다며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빌어먹게도, 아직. 너를 사랑하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법이 최고인 것 같았거든. 표정 보아하니 잘 선택한 것 같네.”
표정 대박인데?
그런 속내를 꾹 감추고, 보란 듯 비꼬자 여전히 지금 이 현실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유지한이 내게 말했다.
“……어떻게?”
“뭐가.”
“어떻게 이게 가능해?”
도저히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얼굴이었다. 하긴. 이 녀석 입장에서는 저런 반응이 당연한 것이긴 했다.
기억을 지우는 것은, 녀석이 가장 바라던 것 중 하나였지만, 세계를 뒤집기까지 했으면서도 결국 이루지 못한 것이기도 했다. 세계를 뒤집는 것은 대가를 치러서 어떻게든 가능했다고 쳐도, 내 기억에 실질적으로 손을 대는 것은 불가능했다.
덮어 두고, 미뤄 두고 감춰 두는 것은 가능했어도. 어떤 대가를 치룬다 한들 기억은 쉽사리 건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것을 몸소 알고 있으니 내가 아예 기억을 부숴 버린 것에 놀랄 수밖에.
사실 그건 특혜를 누리고 있는 나라도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세계가 그것을 용납해 줄 리 없으니까.
정확히는 ‘나’를 위해서.
세계가 눈을 감아 준다고 해도 인과율에 따라 당연히 대가를 치러야 했고, 그건 일개 인간이 감당할 만한 대가가 아니었다.
세계가 손을 써 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기에 만약 대가를 치러야 했다면 세계가 아예 용납을 해 주지 않았을 것이 불 보듯 뻔했기에 시도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을 가능케 한 건, 정말 우연찮게 얻은 산물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얻고, 기억하기 썩 좋은 기억은 아니었기에 기억과 같이 묻어 놓았던 산물.
‘벨로아 루체.’
빌어먹을, 망할 여자가 내게 남긴 것.
찝찝하고 불편해서 팔지도 못하고 그냥 처박아 뒀던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어쩌면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세계가 내게 이것을 주려 그곳에서 벨로아 루체로 빙의시킨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 정도로 기가 막히게 딱 들어맞았다.
【벨로아 루체의 유산(A)
벨로아 루체가 남긴 유산.
시전자가 유산을 오픈하면, 유산의 내용을 획득할 수 있다.】
벨로아 루체.
겁쟁이인 남자로 인해 상처받고, 분노했으며 그럼에도 세계를 위해 노력한 그녀를 위해 세계가 그녀에게 주었던 권한.
그녀는 그것을 사용하지 않고 유산으로 내게 남겨주었다.
【‘벨로아 루체의 유산(A)’을 오픈합니다.】
【유산의 내용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아이템의 등급을 재확인합니다.】
【아이템의 등급이 변경되었습니다.】
【‘벨로아 루체의 유산(L)’이 상속됩니다.】
끝까지 멍청하고 바보 같은 여자였다.
【벨로아 루체의 유산(L)】
세계를 위해 헌신하고, 세계의 틀을 새로 구축한 벨로아 루체의 공을 인정해 세계가 그녀에게 준 선물.
세계의 그 어떤 영혼의 기억도 손댈 수 있는 권한이다. 원하는 이의 기억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다.
세계가 그녀에게 이것을 준 이유는, 그 머저리로 인해 괴로워하는 네가 안쓰러워 세계 나름대로 고심해서 준 선물이었을 것이다. 너는 이미 세계를 위해 충분히 열심히 최선을 다해 주었고, 그것을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었으니까.
그 머저리를 기억에서 완전히 삭제시켜 버릴 자격이.
하지만 그 바보 같은 여자는 그래도 사랑했기에, 기억을 지우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을 유산으로 남겨 두었다.
언젠가, 반드시.
이것을 필요로 할 게 분명한…… 자신을 대신할 사람을 위해.
물론 그것만으로는 대가를 치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나는 순도 100% ‘벨로아 루체’가 아니었으니까. 물론 빙의를 했던 덕에 그 이름은 내게도 상속이 되어 있으나,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제대로 기억을 뒤져 지우는 것에도 엄청난 연산과 과정이 필요했다. 그리고 정말 기가 막히게도 내게는 그 두 가지를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 이미 수중에 있었다.
【아세르의 눈물(SS)
세계를 위해 희생해 세계를 지탱하는 위대한 대마법사 아세르가 후회를 담아 떨어뜨린 눈물.
아세르의 마도와 지식의 정수이다.】
【아도니스의 눈물(SS)
운명의 여신 아도니스의 눈물.
운명의 여신의 권능을 일부 사용할 수 있다】
아세르의 지식을 이용해 연산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고, 아도니스의 눈물로 충분히 대가를 채울 수 있었다.
【루체의 거울(A)
대마법사 아세르의 연인.
벨로아 루체의 희대의 역작.
연인과 같이 마법에 꽤나 재능이 있던 벨로아 루체가 평생을 바쳐 만들어낸 작품이다.
원하는 상대의 기억과 속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
거기에 ‘루체의 거울’까지.
이 정도로 완벽하게 다 손에 쥐여 주었는데, 해내지 못하면 진짜 병신이었다.
“확실히 인생은 운빨과 템빨이야.”
정확히는 그런 운과 템빨을 내게 주지 못해 안달인 세계 덕인가. 역시 사랑은 받고 보는 게 좋은 것이긴 한가 보다. 물론, 끗발 센 놈의.
“그냥, 마치 정해진 수순처럼 내 손에 다 쥐여 주더라고. 내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
“네가 받아보지 못한, 누려보지 못한 혜택이지.”
세상 억울한 일이지만, 뭐 어쩌겠는가.
어차피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을 터이니 더 이상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행동으로 보여 주었을 뿐이다.
변하지 않는 내 결정을.
파삭―!
낫을 휘두르자, 허공에 휘두른 것뿐인데도 기억의 파편들이 실체를 드러내며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마치 눈앞에서, 일말의 희망조차 남기지 않고 소멸시켜 버리겠다는 것처럼.
그것을 보며 내 기분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어찌 됐든 너와 내가 함께했던 기억들이었다. 그것들을 내 손으로 손수 부숴내는 게, 그리 좋은 기분일 리는 없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조용히 유지한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나를 보며, 유지한이 분노가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녀석에게 정면으로 받아보는 분노라니. 퍽이나 신선한 기분이었다.
“……내 기억이야. 이건 내 거라고.”
아무리 너라도 그것을 간섭할 권한은 없다고, 유지한이 차갑게 일갈했다. 그 차가운 분노를 정면으로 받아들이며, 답했다.
“그러면 힘으로 증명해.”
“……윤지호.”
“우리의 합의는 그것이었을 텐데?”
이제 와서 또 뭔 소리인지.
분명히 나는 처음부터 너와 합의를 보았다.
모든 것은 이긴 자의 뜻대로.
그러니, 네 뜻을 고집하려면 너는.
“미주알고주알 되도 않는 소리 말고, 나를 이겨.”
“…….”
“모든 건 그걸로 결정될 테니까.”
나를 이겨야 한다.
“힘내 봐. 기억을 다 잃기 전에.”
최선을 다해 분발해.
후회 없도록.
콰아아앙―!
“……윽―!”
“나를 이겨야 하지 않겠어?”
분명, 그것조차 기억할 수 없게 될 테지만.
* * *
세상 모든 것이 제 뜻대로 되면 얼마나 좋을까.
캉―!
카앙―!
귀가 아플 정도로 날카로운 금속음 사이에서, 지한은 사춘기 이전에 진작 포기했을 철없는 생각을 했다.
【빛의 검 세이라가 계약자의 운명을 확인합니다.】
【세이라가 당신을 위한 노래를…….】
파삭―!
‘오늘은 뭔데?’
‘음……. 글쎄?’
‘아. 내 사랑은 이제 필요없으시다?’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이미 어른이 된 지 오래 되어서, 이제는 허황된 생각일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멍청하게 사람은 그래도 결국 소망하게 된다. 그 공식이 자신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분명 들어주지 않을 신께. 세계에게 간절히 빌었다.
제발. 내게서 이것마저 앗아가지 말아 달라고.
사실 처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내 소원을 이뤄줄 내 ‘신’은 오직 너뿐이었음에도.
하지만 역시나 돌아오는 것은, 바뀐 것 없는 잔인한 현실뿐이었다.
【세이라가 계약자의 영혼에 이변을 감지합니다.】
【영혼의 파편의 부재로 세이라가 온전한 힘을 발휘할 수 없게됩니다.】
세이라가 경고하지 않아도 이미 넘치도록 느끼고 있었다. 모를 리가 없었다.
챙그랑―!
바로 눈앞에서.
‘사랑해.’
‘응?’
‘사랑해. 윤지호.’
‘……와, 하트 어택이다.’
네가 뭘 잃어가고 있는지를 깨달으라는 것처럼, 또 마지막으로 기만하는 것처럼. 지난 기억들을 눈앞에 보여 주었다. 그렇게 더없이 소중한 것들은, 하나씩 부서져갔다.
‘……뭐야. 난 진지했는데.’
‘헐. 귀여워.’
나를 더 두렵게 하는 건, 그렇게 눈앞에서 보았으니 기억을 떠올려야하는데, 그 장면이 내 머릿속에 있었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사라진 후 되짚어 봐도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정말로 사라진 것처럼.
그 증거로 단단했던 영혼에 빈자리가 생겨나고 있었다. 절대, 지금 이 현실을 부정할 수 없도록.
콰앙―!
【지배자의 낫이 빛의 검 세이라를 통제 아래로 놓으려 합니다.】
【세이라의 자아가 필사적으로 거부합니다.】
【계약자의 영혼이 불안정해 세이라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세이라가 빠른 문제 해결을 요구합니다.】
‘그게 말처럼 쉬울 리가.’
그게 되었으면 이렇게까지 절망하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어쩜 너는 내게 이리도 잔인할 수 있나.
차라리 나를 죽이는 게 나았다. 네 손에 죽는 거라면 기꺼이 미련 없이 목을 내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안 된다. 절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건 유일한 ‘내 것’이었다. 너도, 세계도, 누구도 강제하지 못하는 오롯한 내 것.
내가 나로 있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나를 이루는 것. 나를 지탱하는 힘. 아무리 너라도 이걸 내게서 빼앗아 갈 자격은 없었다.
너뿐 아니라, 그 누구라도―!
【구원자가 구원을 노래합니다.】
【구원자가 구원을 노래하며 공간 통제가 발생합니다.】
【세계의 간섭이 약해지며, 구원자의 소망이 우선시됩니다.】
【구원자의 구원과 지배자의 영역이 대치합니다.】
필사의 각오가 마력에 깃들자, ‘구원자’라는 타이틀이 지한에게 반응했다. 그로 인해, 드디어 상황이 대칭으로 갈 가닥을 보이기 시작하자, 수없이 뜨는 알림음을 보며 지호가 휘파람을 불었다.
“오. 드디어 머리를 좀 썼네?”
단순히 힘으로 압도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니 당연히 우회책으로 가야했다. 문제는 그 우회책이, 천상 강자로 살아온 놈에게는 불가능한 생각이라는 것이었다.
밑에서 올라왔다 말은 하지만, 인생에 주인공이라고 타이틀을 달고 올라온 놈이 진짜 그럴 리가 있을까.
평생 위의 위치로 살아온 놈이었다. 내가 속성으로 가르치긴 했지만 평생을 몸에 밴 습관이 사라질 리가 있겠는가.
당연히 쉬운 싸움이 될 것이라 여겼다. 실제로 속속들이 쉽게 기억을 부쉈고.
하지만 내 예상보다 더, 놈은 조금 더 대단한 듯 했다. 정확히는, 기억에 대한 집념이 생각보다 더 대단한 듯했다. 오로지 집념 하나로 타이틀이 반응해 멍청한 그를 대신해서 움직여 줄 정도이니.
이 경우에는 그의 타이틀이 생각보다 그를 아끼며 지금 그의 집념이 정당하다 여기는 것일까.
사실 ‘구원’이라는 것은 어떻게 해석하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 옳고 그름은 없었다. 때문에 ‘내’ 구원이 맞지 않는다는 소리인가? 라는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다행이라 생각했다. 나한테는 분명 방해가 되는 게 맞지만, 그래도 이렇게 네 편을 들어 줘서. 다른 것도 아니고 네 메인 타이틀은 네게 많은 힘이 되어줄 테니까.
어떤 상황에서든. 너의 정의를 위해서.
“근데 그것만으로는 안 돼. 알지?”
“……왜 이런 선택을 한 거야?”
“너도 했잖아?”
거 참.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쓸데없는 말이었다.
콰앙―!
파사삭―!
‘왜, 이런 짓을 했어?’
‘……나는…….’
“나는……!”
“못한 거지. 가능했다면 했을 테지.”
단지 그 차이일 뿐이지 않나?
네가 나를 잘 아는 것처럼, 너도 날 잘 알았다.
만나온 시간이 얼마고, 겪어온 시간이 얼마인데. 특정한 어떤 것들은 눈물이 날 정도로 잘 모르지만 적어도 이런 것은 질릴 정도로,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잘 알았다.
만약 나처럼 이런 일이 가능했다면 망설임 없이 그것을 실행할 사람이 바로 너라는 걸.
내가 언제 기억을 되찾을까. 덜덜 떨 일 없이 자신이 바라던 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적어도 근심 하나는 줄었을 터이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기도 했을 것이다. 물론 내게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개소리였지만.
아니, 차라리 그게 가능했다면 나 역시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이런 개같은 상황과, 조우하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까.
즉, 너는 그냥 개자식이었다. 할 거면 확실하게 하기라도 하던가.
결국 뭐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해서 내가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망할 놈.
“그리고, 네가 이 정도는 되야 납득이 가지 않겠어?”
“……뭐?”
“고작 죽는 것 정도로 네가 정말로 죽을 것 같지도 않고, 내 손에 죽는다 해서 이 망할 연애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까? ‘아. 이렇게 끝났구나. 정말 끝났구나.’ 할 수 있어?”
“…….”
“네가?”
나는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너는 매정하다 할지 몰라도, 굳이 죽는 것이 아니라도 그냥 가능했다.
아무리 죽어라 목을 멘다고 해도 결국 그뿐인 사랑. 없으면 당장 죽을 것 같을지 몰라도 결국은 죽지 않고, 영원히 가지도 않을 감정.
영원한 사랑은 없다고 믿었기에, 더욱 선택은 쉬웠다. 언젠가는 무뎌지고 사라질 것이라고 확신했으니까.
하지만 너는 아니겠지.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는 너는 그런 자신을 굉장히 좋아했으니까.
남들은 그런 자신이 싫다고, 그러고 싶지 않다 하는데 너는 오히려 기껍다는 듯. 그렇지 않은 자신을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나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모든 것에 납득을 하지 못했다.
빠져나가자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으면서 기꺼이 진창에 빠지는 남자를 사랑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다지도 극단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콰앙―!
“윽……!”
“아. 말하니까 더 짜증나네. 왜 자꾸 말을 시켜대. 마음에 안 들면 입을 털지 말고 이기라고. 그냥.”
말하자니 진짜 없던 것도 생기는 건지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분 나쁜 감정이 북받쳐 일부러 더 난폭하게 공격을 감행했다.
쾅―!
챙!
“……잠깐……!”
“입 털지 말라고. 좀.”
그게 잘한 건지는 또 모르겠다.
파삭―!
파사사삭―!
공격을 할 때마다 어김없이 기억의 파편들이 떨어져 내렸다.
문제가 있다면 그 떨어져 내린 기억이 어떤 기억인지 유지한 뿐만 아니라 내게도 보인다는 것이었다.
‘……으악―!’
‘또 뭘 폭파시킨 거냐.’
‘……미안.’
음식은커녕 계란 후라이 하나도 하지 못하고 후라이를 폭파시키던 유지한.
‘……어떻게 해야 되지?’
‘아이고야. 총각. 그냥 요리 안 하는게 좋지 않겠어? 소질이 없어도 너무 없는데.’
‘……할 거예요. 해야 해요.’
‘와. 색시 때문에?’
‘……해 주고 싶어요.’
‘오마나. 색시는 좋겠네. 아주 좋아 죽네. 좋아 죽어.’
팔자에도 없는 요리 학원까지 등록해, ‘색시’란 단어 하나에 볼을 발그레하게 붉히며 아주머니들의 특급 비법을 전수받았던 유지한.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다행이다. 드디어 쓸 만해졌나 보네.’
놀람이 가득한 내 얼굴을 보며 행복하게 웃던 너.
전부 내가 사랑했던 너였다.
간신히 잊고 있던 것이 눈앞에 펼쳐지자 아무리 나라도 평정을 유지하긴 힘들었다. 분명 내가 저지르고 있는 짓인데 왜 내게까지 보이는 건지. 그럴 필요가 있는 건지.
조절하고 싶었지만, 이건 아무리 나라도 월권이라 할 수 있는 능력이었기에 그렇게 세밀하게 제어를 할 수는 없었다.
노력을 해 보기도 했지만 깔끔하게 묵살당했다. 마치, 네가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건지. 뭘 부수고 있는 건지 똑똑히 보라는 것처럼.
정말 더러운 기분을 결국 전부 눌러버리지 못하고 이를 악무는데, 유지한이 소리쳤다.
온 감정을 담아.
“그래! 못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
드디어.
이제야 겨우 드디어 내 앞에서 완전히 솔직해진 너를 보며 나는 잠시 공격을 멈추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지한은 참아왔던 감정을 터진 수도꼭지처럼 쏟아내었다.
“너를 사랑했고, 너만 있으면 아무것도 필요없었어! 그래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고, 너는 용납하지 않을 것도 잘 알아! 그래서! 그래서…!!”
“…….”
“나도 노력했어. 나도…… 그게 내 최선이라고 생각했어. 할 수 있는 것을 전부 다 해 봐야겠다고……. 그때는 그렇게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어.”
“…….”
처음 맛보는 온전한 절망.
절망이란 것 자체를 맛보지 못한 너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고, 인정하기도 싫었을 것이다. 모든 걸 처음으로 돌릴지언정.
이해는 갔다. 아마 모든 인간이 한 번쯤은 생각했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잘못했어. 실패한 것도. 전부. 하지만…….”
“…….”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나한테 이런 벌을 내릴 수가 있어……. 차라리 세계가 그랬다면 이렇게도 원망스럽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너는 다르잖아.”
“…….”
“너는…… 너는 나를 사랑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야?”
나를 위해 모든 걸 버리고, 희생하면서도. 결국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나까지 희생시킨 남자가 울며 내게 물었다.
이해는 하고,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차라리 자신을 죽이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우리가 서로 사랑했던 기억을 죽이는 거냐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그 외침에 나 역시 간신히 참아왔던 감정들이 터져 버리고 말았다.
“하. 그런 말을 할 거면 처음부터 일을 이렇게 만들지 말았어야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말일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 * *
이 싸움이 시작되기 전, 스스로에게 한 다짐이 있었다.
절대로 화를 내지 말아야지. 원망 같은 거, 아예 꺼내지 말아야지.
이제 와 해도 어차피 아무 의미도 없는 것.
말해서 무얼 하나.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러니 절대로 입 밖에 꺼내지 말아야지.
서로에게 상처만 될 뿐인 말 따위. 하지 말아야지.
너는 어떨지 몰라도 나는 여기서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았기에 그렇게 굳게 다짐했었다. 하지만 인생은 역시 다짐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하. 그런 말을 할 거면 처음부터 일을 이렇게 만들지 말았어야지―!!!”
결국 참았던 마음이 이렇게 터져 나오고 만다.
뱉어 놓고 아차 싶긴 했다. 이렇게 될까 봐 그렇게 다짐했던 것이었는데. 하지만 이미 봇물 터진 듯 새어 나오는 마음은 막을 길이 없었다.
“……!!”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낫도 집어던진 채 멱살을 잡아 올렸다.
내가 이렇게까지 감정적으로 나올지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설마 그래도 멱살을 잡을 줄은 생각지 못했던 것인지 유지한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늘상 보던 천진난만한, 뭐 이런 머저리가 다 있나 싶으면서도 결국 뭐라고 하지 못했던. 내가 사랑했던 얼굴.
그 얼굴이 더 화를 돋운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지를 거면 아예 제대로 지르던가! 이 이도 저도 아니게 어중간한 새끼야!”
“……뭐?”
여전히 너를 사랑했기에. 빌어먹게도 여전히 그런 너를 사랑해서.
“하. 넌 끝까지 내가 네가 도를 넘은 짓을 해서 내가 용납을 못 한다 생각하지?”
“……아니었어?”
“맞아!!”
아닐 리가. 그 ‘도를 넘은 짓’이 내게 준 피해가 얼마인데.
하지만.
“하지만 고작 그거 가지고 내가 여기까지 왔겠어?! 이 머저리야. 넌 내가 그렇게 정의로워 보이든?”
진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인생에는 히어로보다 빌런이 본인 사는 인생에 매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한테 이상한 감투를 씌우고 지랄이다.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정의로웠다고. 진짜 녀석은 내가 왜 이토록 화를 내는지 단 한 번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나 보다.
물론 녀석의 추측은 맞았다. 일부분만.
내가 잃은 게 얼마인데.
하지만 그것보다.
“나와 함께하고 싶었던 것이었으면 너는 끝까지 노력했어야 했어. 중간에 포기하고 몇 번이고 세계를 뒤트는 것이 아니라.”
“……!!”
“노력조차 하지 않은 채 애꿎은 세계만 뒤틀고, 그 결과 이도 저도 아니게 망가져만 갔지. 아예 망가뜨릴 거였으면 내 다리라도 분질러서 확실히 네 옆에 놓기라도 하던가. 결국 그럴 용기도 없는 너는 아무것도, 한 게 없어.”
빌어먹게도 너를 사랑하는 마음 역시 비등했다. 때문에 네가 차라리 그 빌어먹을 정의를 내다 버리고, 그저 나를 굴복시켰다면 납득했을 것이다. 순응해 주었을 것이다.
결국은, 나 역시 너를 사랑해서.
망가진 사랑이라도. 잘못된 사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같이 지옥으로 떨어져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너는 결국 지옥에 떨어질 용기도 없었고, 나와 같이 떨어질 용기는 더더욱 없었으면서. 정당한 행복을 바랐다. 정당하지 않은 짓을 저질렀으면서.
그게 모순이었고, 결국 모든 것을 망가뜨려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너 때문에.
“그럼에도 여전히 놓지도 못하고, 놓을 생각조차 없지.”
“……지호야.”
“……그러니까 우리는 이게 맞아.”
때문에 너를 원망한다. 네가 너무나 미웠다.
미쳤으면서도 결국 바닥까지는 떨어지지 못한 고고한 네가.
그러면서 스스로 망가지는 걸 주저하지 않는 네가.
꽈악―!
“……큭―!”
유지한의 목 위로 두 손을 올렸다. 그대로 목을 강하게 옥죄자, 유지한이 숨이 막히는 소리를 내었다. 그럼에도 손을 떼기는커녕, 손에 더 힘을 주었다.
내 모든 원망과 분노를 담아서.
눈물이 코를 타고 유지한의 볼 위로 떨어져 내렸다. 제가 목을 졸리고 있음에도 우는 나를 보며 놀라는 멍청한 남자의 모습에 처절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제는 감정을 도저히 통제할 수가 없었다. 해선 안 되는 말이 터져 나오는 입까지도.
“정말 빌어먹게도, 나도 구제불능이라…….”
“…….”
“차마 내 손으로 너를 죽일 수는 없을 것 같거든.”
허세 하나는 진짜 킹이었다. 유지한이 뒤지는 걸로 끝나지 않느니 어쨌느니. 그럴듯한 가정을 근거로 들었지만 사실 전부 다 개소리였다.
물론 저지르고도 남을 년이라, 한다고 마음을 먹으면 못 할 것 같아도 어찌저찌 질렀을 테지만. 그렇게 해서 네가 죽은 이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네가 나 없는 세상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는 것처럼, 나 역시 없었다.
너를 죽이고, 너라는 상흔이 가슴에 남아 평생을 갈 거 같아. 죽을 때까지 지우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네가 없으면 크게 의미가 없을 이 세상에서, 너를 떠올리지 않을 자신은 없었고. 그렇게 되면 결국 내가 너를 죽였다는 사실에 무뎌질 일이 영원히 없을 것 같아서.
그리고 그렇게 너를 평생 사랑할 것 같아서.
그것이 너무나 무서웠다.
“너를 죽이고 너 없는 인생을 사는 것보다, 그냥 너에게서 나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지우고 네가 있는 세상에서 남남처럼 사는 게 백배 낫겠더라고.”
“……윤지호.”
“빌어먹게도 선택권이 없더라. 결국 나도 너랑 똑같은 구제불능인가 봐.”
너를 버리고는 잘 살 자신이 있었다.
이별은 이별일 뿐. 그렇게 벌어진 일이었다. 하고 마침표라는 것을 찍을 수 있으니까.
그 마침표 점 하나가 감정을 정리하는 데 생각보다 많이 관여한다는 것을 알기에 그렇게 하겠다 선택했다. 죽이지 못했기에 사실 내게 선택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개의치 않았다.
그냥 남들보다 거하게 화려하고 스펙터클한 이별을 겪었다. 생각하면 그만이니까. 물론 워낙 연애부터 스펙터클했기에 이로운처럼 완전히 잊는다거나 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나답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
나는 그런 여자니까.
“그래도 너보다는 내가 결단력 있고, 끝을 볼 수 있는 성격이니까. 내가 해 주겠다고.”
“…….”
너는 못 하지만 나는 가능하니까.
그러니까 내가 해 주는 거야.
이게 우리의 사랑을 위해서 내가 마지막으로 해 줄 수 있는 일이니까.
“이런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면 말해 봐.”
만약 이런 내가 틀렸다고 생각한다면.
꽈악―!
“윽―!”
“내가 틀렸다면. 나를 뿌리치고 나를 이겨. 그리고 나를 굴복시켜.”
세뇌를 시키는 것처럼.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유지한에게 수없이 반복해서 주장했다. 나를 부정하고 싶으면 나를 이기라고.
유지한에게 하는 말도 같지만 마치 스스로에게 하는 말 같기도 했다.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나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마음 한편에서 바라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드니,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응. 유지한. 해 보라고. 해 봐.”
“…….”
“나를 이기라고.”
아. 그래.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소망했다.
“틀렸다고, 납득할 수 없다고.”
“큭―!”
네가 나를 틀렸다 말해 주길.
나를 이기고, 나를 굴복시켜, 나를 납득시켜 주길.
“나를 이기겠다고 말해.”
“……윽…….”
“……반드시, 나를 넘겠다면서?”
“……!”
그 순간, 기억의 파편이 그들 사이로 부서져 내리며 한 기억을 비춰주었다.
‘……반드시, 당신을 넘을 겁니다!!!’
마치 일부러 의도한 것처럼.
‘……그래. 꼭. 나를 넘어서.’
그들이 떠올리고 있는 어느 날의 기억을.
‘하지만 지금의 당신은 약하니까. 당신이 나를 넘어설 그날까지. 당신이 위험해진다면.’
‘…….’
‘당신을 구해 주러 올게.’
누군가를 설레게 했을, 어느 날의 약속.
파사삭―
그리고 이제는 사라져 버린 약속.
그렇게 약속이 부서져 내려가는 광경을 눈앞에서 바라보며 우리 둘의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더 동요한 건 내 쪽이었다. 눈앞에서 산산이 부서져 버린 약속에, 마음이 흔들려 버린 내가 나도 모르게 목을 쥔 손에 힘을 살짝 풀었다.
그 틈을 타, 그런 나와 달리 오히려 각오를 한 유지한이 손을 들어 내 손을 잡아챘다.
타악―
“……!”
손이 잡힌 순간, 실수를 깨달았지만 이미 상황은 반전된 후였다. 내 양손을 잡은 채, 유지한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나를 향해 말했다.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단단한 얼굴로.
“그래. 네게 다짐했었지. 너에게 미쳐 잊고 있었나 봐.”
“……!”
“너는 약속을 지켜 줬는데.”
언제나 나를 지켜 주었지. 위험해지면 반드시 나타나 나를 구해 주고, 나를 이끌어주었지.
잊고 있던 사실을 되새기는 것처럼 말하며 유지한이 흔들림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모자라고 바보 같아서.”
“……이제 안 것처럼 말하지 마.”
“하긴. 넌 진작 알았지. 그래서 항상 나보다 훨씬 앞서가서 혼자 다 감당했지.”
자조적인 목소리에 괜히 울컥했다.
그걸 이제야……!
달라지는 것도 없이 너무 멀리 와버린 이제야 알게 되는 머저리같은 남자에 대한 울분이 솟아올랐다. 그런 나를 보며 유지한이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내가 할게.”
“……뭐?”
“멍청한 짓도 이 정도면 넘치도록 했으니까……. 이제부터는 정신 차려야지.”
그 순간 머릿속에 알림음이 울려 퍼졌다.
【구원자가 세계에게 요청합니다.】
【구원자의 요청에 세계가 순리를 따릅니다.】
【이 세계의 주인공이 정당한 자리를 다시 되찾기를 요구합니다.】
【이 세계가 순리의 따른 주인공의 의지를 따라 움직입니다.】
“……!!”
“네가 나한테 여기까지 기회를 줬잖아. 그러니까 할게.”
유지한이 미소를 지었다.
듬직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내가 처음 너에게 반했던 그 미소를.
“내가 이 세계의 주인공이야. 윤지호. 그것만은 절대 변치 않는 명제지.”
【구원자가 본래의 타이틀을 되찾습니다.】
【이 세계의 주인공이 재설정되었습니다.】
“……허.”
“그러니까 주인공답게 욕심부릴래.”
유지한의 자신만만한 선언과 함께 이 세계가 화답했다.
【주인공의 의지에 따라 세계가 순응합니다.】
【지배자의 영역이 취소됩니다.】
그 알림을 들으며 얼빠진 얼굴의 내가 말했다.
“고작 주인공의 타이틀을 가져갔다고 해서, 나를 이길 수 있을 거 같아?”
그 물음에 유지한이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답했다.
“물론 타이틀만으로는 무리지. 세계의 시초 자체가 내가 손 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자신만만해?”
말과 동시에 권능을 발휘했다.
【‘세계의 시초의 주인’이 ‘권능’을 발휘합니다.】
【‘절대자’ 타이틀이 권능을 따라 빛을 발합니다.】
보라고. 이래도 나를 이길 수 있겠냐고.
권능이 발휘되자마자 내 마력이 유지한을 짓눌렀다. 훤히 보이는 중력의 무게가 힘겨울 것이 뻔한데도 유지한은 여전히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너한테도 너를 사랑하는 성위가 있지만, 나한테도 있거든.”
“……뭐?”
“나와 평생을 함께한 성위가.”
그와 함께 유지한의 머리 위로 별들이 빛났다.
【‘승리를 걷는 자’가 자신의 화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승리를 걷는 자’가 성좌들에게 이 의제의 판결을 청합니다.】
【성좌. ‘정의의 심판관’이 침음합니다.】
【성좌, ‘윤리의 도덕자’가…….】
【성좌…… 가…….】
그 뒤로도 줄줄이 뜨는 성좌들.
그것을 보며 유지한이 무엇을 믿었는지 깨달았다.
“……와. 한 방 먹었네.”
* * *
“오. 쩌네.”
솔직히 조금, 아니. 많이 놀랐다.
‘승리를 걷는 자’가 이렇게까지 유능할 줄은 몰랐다. 이 정도의 인망이 있을 줄이야.
【성좌……가…….】
【성좌, ‘지혜의 서기관’이…….】
【성좌, ‘미래를 보는 자’가…….】
줄줄이 속속들이 제 존재를 알리는 성좌들을 보며 아무리 나라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승리를 걷는 자’가 누군지 알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대단한 성좌인 걸 알고 있기는 했지만, 사실 나는 ‘승리를 걷는 자’를 꽤나 얕보고 있었다.
인도의 승리의 신. 무루간.
다른 말로는 우리에게 더 익숙한 명칭은 스칸다.
물론 대단한 성좌였다. 인도 최고신 중 하나였으니까.
승리의 신이자 전투에 있어서 최강으로 친다는 신.
하지만, 아무래도 대중에게 더 익숙한 승리의 신은 무루간이 아닌,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승리의 여신 니케였기에 상대적으로 그를 얕보게 되는 경향이 있었다.
성좌의 격은 그 성좌가 쌓아 온 신화.
급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성좌는 분명히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성좌의 위력은 대중에게 얼마나 각인되었느냐에 따라 갈렸으니까.
하지만 생각보다 ‘승리를 걷는 자’는 성좌들에게 꽤나 인정받고 존중받는 성좌였나보다. 그의 위력보다, 예기치 못했던 인망이 정말 놀랍고 감탄스러웠다.
반면에…….
“어이. 우리 별님. 예상은 했지만, 인망이 더 많이 똥망이신가 본데.”
이쪽이 많이 심하게 똥망이신 거 같은데…….
님 인간…… 아니 성좌 관계 괜찮으신 거임?
유지한 위에 은하수를 방불케 하듯, 무수히 많이 떠 있는 저 많은 별들이 다 ‘승리를 걷는 자’의 참된 지지자인 것은 아닐 것이다.
【성좌. ‘지옥의 화신’이…….】
【성좌. ‘마계의 절대자’가…….】
‘……아니, 이거 너무…… 어째…….’
딱히 그를 열성적으로 지지해서라기보다는 내 뒤에 있는 이놈에 대한 반감 때문에 저러는 성좌들도 절반 이상일 것임을 확신했다. 내가 기억하는 몇몇 이름들은 누구를 지지할 성정이 아니었으니까.
워낙 안하무인이라 예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상상 이상으로 이곳저곳에서 원한을 많이 산 듯했다.
‘뭐야. 어디다 이렇게 원한을 사고 다녔어?’
뭐 길게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답은 바로 지천에 있었기에 두말할 것 없이, 성위님을 족치자 아니나 다를까. 저 욕하는 거에는 기가 막히게 반응하는 성위님이 바로 변명을 해 왔다.
[당신의 계약성 ‘세계의 시초’ 님이 저것들이 날 일방적으로 싫어하는 거다. 내가 있어 봤자 혼자 너나 보면서 시시덕거리지 뭐 할 게 있겠냐. 재미도 없다고 억울하다 항변합니다.]
아오. 고놈의 재미.
재미도 없다니. 이미 해 봤다는 거네?
장담컨대 질투 같은 게 아니라 본인 스스로 원한을 샀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무료한 성좌에게 재미는 그 어떤 것보다 가치 있는 것이다.
그 재미 하나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는 게 바로 성좌라는 존재. 때문에 성좌들을 좋게 보지 않는 시선 역시 존재했다.
물론, ‘재미를 위해 이용당하는 그 경우’에 성좌 본인이 장난감이 되는 일은 상정되지 않았다.
성좌들은 모두 각기 다른 세계에서 나름대로 최상의 자리에 오른 이들이었다. 누구에게 당하고 그럴 족속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전두엽에서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 자체가 아예 쏙 빠지는 것이고.
그리고 여기. 그런 성좌들을 손가락으로도 굴릴 수 있는 존재가…….
성좌들에게는 대재앙이었으리라.
고작 자신의 재미를 위해서 자기들을 그렇게 굴려대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녔던 거야……?’
저 고상하고 성질 더러운 성좌들에게 무슨 짓을 했기에 저들이 저렇게 열렬하게 저쪽 편에 붙는 것인가.
[당신의 계약성 ‘세계의 시초’ 님이 아 나 진짜 별거 안 했다고 열심히 어필합니다.]
‘…….’
……음 많이 했군.
저 녀석이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문득 샘솟았지만, 그건 언제든 알 수 있는 거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기에 뒤로 제쳐 놓기로 했다.
일단, 괜히 말해서 저쪽에서 듣기라도 했다가는 화만 더 돋울 수도 있고.
뭐 어쨌든.
“이거 예상외의 든든한 지원군이네?”
이럴 영향력이 있다고 해도 ‘승리를 걷는 자’가 유지한을 위해 이렇게까지 움직여 줄 줄은 몰랐다.
유지한 본인이 직접, 친히 써 준 작중 소설에서 ‘승리를 걷는 자’는 비중이 매우 약했다. 아니 약했다고 하기는 그렇고 그냥 씬 스틸러 정도?
간간이 나와서 재밌는 맞장구를 쳐 주거나, 중요한 순간 유지한이 성장하도록 조금 도움을 주긴 했지만. 그 정도일 뿐이었다. 결코 스스로 직접적으로 나서거나 한 적은 없었다.
나와 유지한이 함께 있을 때 역시 한 번도.
그는 언제나 조용히, 감상을 하듯 즐기면서 지켜볼 뿐이었다. 여타 성좌처럼 장난질도 치지 않고 그냥 묵묵히. 그저 성장을 지켜보겠다는 것처럼.
어떻게 보면 그렇게 큰 애정을 보이지 않았다는 표현이 옳기도 했다.
딱 봐도 보인다고 해야 할까. 세계가 유지한을 선택해서, 마찬가지로 세계의 중심을 위해 유지한을 화신으로 선택한 것이.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움직일 줄이야.
“사랑받네. 유지한.”
‘다행이다.’
진심이었다. 분명 내게는 매우 더러운 상황이지만,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내 생각보다 네 성좌가 너를 아끼는 것이 참 다행이었다. 내가 네 곁을 떠나고 나서도, 나를 대신해. 그가 너를 지켜줄 테니까.
물론 이 마음은 드러내 봤자 좋을 것이 없었기에 덤덤하게 비꼬는 듯한 말을 내뱉자, 이 와중에도 내 말을 전혀 비꼼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남자가 수줍게 웃었다.
“그러게. 나도 예상 밖이야.”
“거짓말.”
그런 것치고는 주인공 대사 너무 제대로 된 타이밍에 완벽하게 하지 않았니?
진짜 모르는 거였으면 그렇게 완벽한 타이밍에 완벽한 대사를 칠 수 없었다. 확신을 담아 놈을 비난하자, 녀석이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뭐.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럼 그렇지.
소설에도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표현은 하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둘이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뭔가가 있는 듯했다.
뭐. 나와 성위도 시스템 알림 대화가 아닌, 그냥 둘이 하는 티키타카가 꽤나 많았으니까. 그건 굳이 말을 통하지 않고도 가능한 것이었다.
가령, 가끔씩 나한테서 뿌X클을 뜯는 것 같은.
‘아. 이건 좋은 게 아니군.’
정신이 번쩍 현실로 돌아왔다. 이런 잡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확실히 위험했다.
지금 수십, 수백의 가까운 네임드 급 성좌들이 유지한을 지지했고, 반면에 이쪽은 내 성위님 하나뿐.
내 성위님이 킹갓 제너럴 급이어도 다구리에는 답이 없다고, 지금은 꽤나 위험한 상황이었다.
정말 우스운 건, 대체 무슨 믿음인지 나도 모르겠지만 왠지 내 성위님이 발리지 않을 거라는 이상한 확신이었지만.
‘성위님. 성위님도 다구리에 장사 없어?’
이미 확신하고 있으면서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에,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으면서도 성위님이 익살스럽게 맞장구를 쳐주었다.
[아무렴. 저런 것들이 트럭으로 몰려와도 날 이길 수 있을 거 같아?]
역시나 내 성위님다운 자신감이었다.
“아. 역시 내 성위님.”
혼자 젤 꿀 빨았으면 역시 이 정도 자신감은 있어야지.
자신만만한 성위님의 확답을 들으며 나는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분명 상황은 그렇게 썩 달가운 상황이 아님에도 이 상황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즐거워 미칠 것 같았다.
그야…….
“아. 이제야 제대로 발휘해 볼 수 있겠어.”
드디어, 내 뜻대로 날뛰어 볼 수 있을 테니까.
최강의 성위를 등 뒤에 두어서 그런가, 내 최고의 장점이자 단점은 내 맞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 역시 결국은 헌터. 한번 마음껏 날뛰어 보고 싶은 욕구는 당연히 있었다. 그러나, 적당한 상대가 상대가 없으니 그럴 수가 있는가.
하지만 드디어, 내게도 제대로 된 맞수가 생겼다. 온 힘을 다하지 않으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맞수가.
그것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즐거웠다.
내가 본 실력을 다해도 어차피 유지한은 ‘승리를 걷는 자’가 알아서 지켜 줄 것이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힘을 조절할 필요 없다는 것.
“와아. 이거 중독되면 큰일 나겠는데.”
그것은 내 생각 이상으로 나를 고양시키는, 매우 신나는 일이었다.
【‘세계의 시초의 주인’이 숨겨왔던 본 마력을 전력 개방합니다.】
【‘세계의 시초의 주인’이 절대자의 마력을 전개합니다.】
【세계가 마력에 반응합니다!】
【‘세계의 시초의 주인’이 세계를 향해 명령합니다.】
【세계가 절대자의 명령에 순응합니다.】
【세계가 ‘세계의 시초의 주인’의 지배권에 들어왔습니다.】
처음으로 최대치까지 개방해 본 본 마력.
마력을 개방하는 것만으로도 이 세계가 내 지배하에 놓이며, 내 의지를 기다린다.
무엇이든 네 뜻대로 하겠다는 듯.
그와 함께 세계가 뒤틀렸다.
“……!!”
“이런……!”
“……이게 뭐야!”
“밸런스 패치 무엇인데!!”
“이쯤이면 트롤 아냐?!”
근거리에서 내가 아주 잘 아는 이들이 내 마력의 영향을 제대로 받아 기겁하는 소리를 브금 삼아 나는 눈앞에 황급히 울리는 알림창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성좌, ‘지혜의 서기관’이 세계의 개연성 적합 요구를 신청합니다.】
【세계가 요청을 기각합니다.】
【성좌, ‘중립의 현자’가 중립의 권능을 발휘합니다.】
【성좌, ‘마계의 절대자’가 마력을 개방합니다.】
【성좌, ‘정의의 집행자’가 권능을 개방합니다.】
【세계의 지배가 일시적으로 약해집니다.】
“오우. 편도 많으셔. 역시 머릿수는 많을수록 좋은 건가.”
알림창과 동시에 완벽히 내 지배하에 있던 세계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세계를 완벽히 지배할 필요는 없었다. 사실 지배할 생각도 별로 없긴 했다.
내 마력이 자동으로 그렇게 만든 거지. 더 정확히는 기다렸다는 듯 세계가 내게 고개를 숙인 것이지만.
어쨌든 이 정도 지배만으로도 충분했다. 성좌들의 개입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나를 보며 유지한이 세이라를 들었다.
“전혀 동요하지 않네. 이 정도면 충분히 네게 위협이 될 만할 텐데.”
“어머. 주인공님. 네 머릿수에 놀라기는 했지만 이쪽에는 그 많은 머릿수와 단번에 맞먹는 한 명이 있거든.”
아주 든든한 한 명이지.
말과 동시에 나는 성위님을 향해 자신만만하게 물었다.
‘성위님 자신 있지?’
그에 내 빌어먹을 성위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너와 함께라면. 무엇이든.]
어차피 더 이상의 소모성 싸움은 의미가 없었다. 이번 최후의 한 방으로 결정이 날 것이다.
【빛의 검, 세이라가 최종 진화를 마칩니다.】
【구원의 검, 세이라가 계약자의 구원과 소망을 노래합니다.】
【성좌, ‘승리를 걷는 자’가 자신의 화신에게 권능을 부여합니다.】
【성좌, ‘지혜의 서기관’이 힘을 보탭니다.】
【성좌, ‘정의의 집행자’가…….】
【성좌, ‘마계의 절대자’가…….】
그것을 그들도 이미 숙지하고 있는 듯, 이 한 방을 위해 모든 것을 붓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나 역시 즐거운 마음으로 최후를 준비했다.
【세계가 절대자의 의지에 기꺼이 따릅니다.】
【세계가 당신을 위해 모든 개연성을 감당합니다.】
【성좌, ‘세계의 시초’가 제 주인을 향해 미소를 짓습니다.】
【당신은 성좌에게 성좌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부여받았습니다.】
【비기,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발동합니다.】
【등급을 측정할 수 없는 스킬입니다.】
【세계의 크나큰 충격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사용에 주의해 주십시오.】
아아. 그래. 알아.
아예 세계를 뒤집는 스킬인 거.
내 성위님의 최상위 스킬 중 하나.
모든 것을 집약한 공격 스킬.
그건 세계를 통째로 상대에게 던지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한낱 인간은 절대 감당할 수 없는. 인간은 물론이고 성좌도 당해내기 힘든, 그가 성좌들을 짓밟은 스킬.
아니나 다를까, 이 스킬에 악몽이 있는 성좌들이 치를 떨면서 날뛰었다.
【성좌, ‘마계의 절대자’가 인간이 이걸 발동할 수 있을 리 없다고 소리칩니다!】
【성좌, ……가…….】
【성좌, ‘중립의 현자’가…….】
줄줄이 뜨는 알림음에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다들 쫄보만 모였나. 애초에 수로 밀어붙일 거였으면, 이 정도는 각오했어야지.
마력이 쭉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즐겁게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나라도, 이 스킬 하나를 씀으로써 모든 마력을 소진할 것임을 예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오히려 아낌없이 더 마력을 퍼부었다. 어차피 이걸로 결정날 테니까.
우리의 모든 것이.
“자. 그럼…….”
“…….”
“죽지 말라고!”
“……물론!”
그렇게 짧은 대화를 끝으로.
【비기, ‘구원의 정의’가 발동합니다.】
【비기,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실현됩니다.】
우리의 마지막이 맞붙었다.
* * *
【‘세계의 시초의 주인’이 숨겨왔던 본 마력을 전력 개방합니다.】
【‘세계의 시초의 주인’이 절대자의 마력을 전개합니다.】
【세계가 마력에 반응합니다!】
【‘세계의 시초의 주인’이 세계를 향해 명령합니다.】
【세계가 절대자의 명령에 순응합니다.】
【세계가 ‘세계의 시초의 주인’의 지배권에 들어왔습니다.】
“응?”
우적우적―
어느새 스킬 낭비까지 해 가며 주전부리를 구해와 먹으며 사랑 싸움을 1열에서 직관하고 있던 이들이 갑작스러운 시스템의 알림음에 일동 정지했다. 그리고 그대로 곧 이어지는 충격을 감당해야만 했다.
콰광―!!!
“……!!”
“이런……!”
“……이게 뭐야!”
“밸런스 패치 무엇인데!!”
“이쯤이면 트롤 아냐?!”
스킬이고 나발이고 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그녀의 존재 앞에 모든 것이 무력해진 듯 땅바닥에 처박혀서 힘없이 늘어져 있을 뿐.
마치 자신들 안의 마력이 투지 자체를 상실한 것처럼.
그 마력마저 그녀에게 지배당한 것처럼.
구구구궁―!
“……뭐…… 뭐야―!”
“땅이 갑자기 왜 갈라지는데?”
“그게 아니야…… 갈라진 땅이 뜨고 으악―!!”
“야!!”
대지가 갈라지고, 중력마저 이상이 생긴 듯 갈라진 땅이 그대로 기울어지며 떠올랐다.
그뿐일까.
그들이 있는 공간을 비롯해 건물이 부서지고, 혹은 건물 밑에 있는 땅마저 떠올랐다. 그리고 이윽고, 하늘마저 갈라지고 위아래가 바뀌는 것을 보며 그 자리에 있는 그들은 깨달았다.
그녀로 인해 세계가 뒤집히고 있다는 것을.
도저히 이 변화에 적응할 턱이 없는데, 믿을 수 없는 시스템의 알림이 들려왔다.
【비기,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발동합니다.】
비기. 비기가 있다고?!
물론 있을 수 있지만, 이미 그냥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사기급인 스킬을 여러 개 봤기 때문에 비기라는 게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아니 이미 그 정도인데 비기도 있으면 그거 그냥 사기 아니야?!
이미 충분히 끝을 모르는 높은 벽을 봤던 이들이었기에 그 벽이 그것보다 더 높은 벽이었다는 사실에 기겁을 했다.
“그 와중에 ‘데우스 엑스 마키나’야.”
“스킬명까지 소름이네.”
그 와중에 스킬명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무슨 스킬인지 몰라도 이름만 들어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스케일일 거 같아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뒤이어 시스템이 굳이 친절하게 예감을 진짜로 만들어 주셨다.
【등급을 측정할 수 없는 스킬입니다.】
【세계의 크나큰 충격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사용에 주의해 주십시오.】
“와, 알림 사이즈 보소.”
“……유지한 죽는 거 아냐?”
도저히 믿기지 않지만, 그 생각을 안 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의 싸움을 지켜봐 왔다. 결국 유지한을 죽이지 못한 윤지호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도.
그런데 이제 와 유지한을 죽이려 하는 것인가?
답은 ‘아니’ 였다.
만약 그럴 것이라면 애초에 이런 복잡하고 힘든 길을 가지 않을 여자였으니까.
그렇다는 건 유지한이 안 죽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의 머리로는 유지한이 이것을 견딜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이건 유지한이 아니라도 마찬가지였다. 세상 어떤 인간이 와도, 심지어 성좌라 해도 저걸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대체 어쩌자고…….
“……진짜 끝을 보려는 건가?”
“존재 자체도 소멸시켜버리겠다는 거?”
“아. 그거 좀 일리 있다.”
다들 심각한 상황에 탄식을 금치 못하는데…….
【빛의 검, 세이라가 최종 진화를 마칩니다.】
주인공은 괜히 주인공이 아니라고, 여기서 또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갔다.
【구원의 검, 세이라가 계약자의 구원과 소망을 노래합니다.】
【성좌, ‘승리를 걷는 자’가 자신의 화신에게 권능을 부여합니다.】
【성좌, ‘지혜의 서기관’이 힘을 보탭니다.】
【성좌, ‘정의의 집행자’가…….】
【성좌, ‘마계의 절대자’가…….】
거기에 줄줄이 이어지는 성좌들의 후원까지.
진짜 난놈은 난놈이구나.
매우 떨떠름했지만, 어쨌든 덕분에 해 볼 만한 싸움이 되었다.
과연 누가 이길까?
감도 잡히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
이 한 방을 마지막으로, 우리의 미래가 결정된다는 것이었다.
【비기, ‘구원의 정의’가 발동합니다.】
【비기,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실현됩니다.】
마침내, 두 사람의 비기가 맞붙었다. 그와 동시에 시야가 하얗게 점멸되었다. 그게 그들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생전 처음 알았다.
한계치까지 마력을 쭉쭉 뽑아내는 것이 이렇게 힘이 드는 일이라는 것을.
정확히는 힘이 든다기보다, 온몸에 힘이 쭉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다들 이걸 극한으로 겪고 어떻게 그렇게 매번 다시 싸우러 가는 건지 모르겠다.
특히 다 회복되지 않았는데도 튀어가는 유지한.
진심 이해할 수 없었다. 나였으면 48시간 침대에서 안 나왔다. 진짜로.
어쨌든 그렇게 쭉쭉 들이붓자니 확실히 스케일이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
“왜. 버거워?”
“……너야말로.”
또 깨달은 한 가지.
통상적인 범주를 완전히 뛰어넘은 두 힘이 맞붙으면 그대로 세계가 정지한다는 것.
정확히는 아예 무가 된달까.
물론 일시적인 현상이겠지만 인생에서 다시 하지 못할 특별한 경험이었다.
카앙―!
서로의 힘이 맞붙으면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서로의 곁에, 주마등처럼 많은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아. 내 아이스크림.’
‘사랑해.’
‘너무한 거 아니야?’
‘그래도 나 사랑하잖아?’
서로가 함께한, 모든 기억들.
그 기억들이 지나감과 함께 나는 완전히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완벽한, 끝을 보기 위해.
【성좌…… 가…….】
【성좌, ‘미래의 계시자’가…….】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였다.
서로가 모든 힘을 쏟아부은 그 순간.
마지막으로 성위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지호. 후회 안 해?]
되먹지도 않은 물음에, 나는 그 순간 빵 터질 뻔했다.
“이제 와서?”
그런 건 시작 전에 했어야지.
이제 와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소리를 왜 하냐는 일침에 그가 웃었다.
[그래. 그래야 윤지호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시야가 점멸됐다.
다시 시야를 찾았을 때는.
“헐…….”
“끝난 거야?”
모든 것이 다 정상적으로 돌아와 있었고, 더불어 나의 지배 역시 풀린 상태였다. 그리고 모든 힘을 남김없이 다 써버려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내 앞에 유지한은 검으로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하아…… 하아…….”
“……전부 끝났네.”
“내가…… 내가…….”
“아. 그래.”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이 싸움은…….
“내가 졌어.”
나의 패배였다. 깨끗하게 시인할 수 있었다.
설마, 승패를 가르는 유일한 변수가…….
“아. 진짜 내가 선물해 준 것 때문에 내가 지다니. 웃음도 안 나오네.”
내가 저 녀석에게 선물해 준 것일 줄이야.
정말, 조금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운명의 여신의 세 가지 애정(S급)에 담긴 소망이 실현됩니다.】
【세 번째 보석에 보유자의 소망을 이룰 수 있는 ‘소망’이 실현됨에 따라 보석이 파괴됩니다.】
【운명의 여신의 세 가지 애정(S급)이 쓰임을 다하고 기능을 잃습니다.】
파삭―
유지한의 귀에 있던 귀걸이가 힘을 잃고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내렸다.
힘은 막상막하.
아니 내가 조금 더 우세한 상황이었다. 저쪽은 세계의 개연성을 전부 부담하지 못했고, 이쪽은 제약이 없는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내가 유지한을 위해 바란 소망이 유지한의 소망을 이루어 주려 발동되는 순간.
승패를 쉽게 가를 수 없던, 아슬아슬한 차이로 힘겨루기를 하고 있던 줄다리기의 승세가 달라졌다.
“내 발등 내가 찍은 건가.”
자조적으로 상황을 평가하는 나를 유지한이 덮쳐왔다.
“드디어, 드디어…….”
“그래. 이제 네 뜻대로 해.”
내가 졌으니 그래야지.
나는 내가 한 말은 지키는 사람이었다.
[당신의 계약성 ‘세계의 시초’가 그래도 끝나서 속 시원하지 않냐 묻습니다.]
‘응. 맞아. 속 시원해.’
이제야…….
털썩―
네가 바라던 대로 이루어 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어쩌면 그 아이템은 유지한이 아닌, 나의 소망을 이뤄준 건지도 몰랐다.
나 역시.
“기절해버렸네. 하긴. 당연한 건가.”
너를 사랑하기만 하는 나날을 간절히 바라 왔으니까.
“일어나면…… 유지한. 드디어 네가 바라던 나날이 펼쳐질 거야.”
“…….”
“그날이 우습게도 너무나 기대가 돼.”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너를 사랑할 테니까.
“윤지호…… 야…… 이―!”
“아. 전말자. 나 힐 좀 주라. 못 일어나겠어.”
“아오. 이딴 걸 친구라고……!”
네가 그렇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