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장. 너를 어쩌면 좋을까. (27/30)

25장. 너를 어쩌면 좋을까.

“아. 예…….”

그 일련의 과정들을 지켜보며, 나는 점점 얼굴의 표정이 사라져갔다. 어이없음도, 분노도, 짜증도, 그리고 측은함까지도……. 이제는 아무것도 모르겠다.

스케일도 스케일이지만, 나는 도저히 같은 크기로 그에게 보답해 주지 못할 것 같은, 깊은 마음을 보니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정말 대단한 놈이었다. 나를 이렇게까지 만들다니.

맨날 다른 의미로 색다른 놈. 특이한 놈. 그렇게 툴툴댔지만 그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 새끼가 심지어 천재이기까지 해 더욱더 머릿속은 혼란스러워지기만 했다.

나 포함 전부를 알차게 속여 먹었다.

천재적인 재능을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이용당하는 호구. 단순한 머리통의 소유자. 그래서 늘 사람들의 복장을 뒤집어 놓더니 깡그리 다 내숭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무리 그만한 실패를 겪었다 해도, 쓸 만한 정보가 별로 없었을 게 분명한데도 단순한 직감에 기반한 유지한의 추론은 옳았다.

그냥 평범했던 나라면 그 사실을 몰랐겠지만, 이매망량의 힘을 받은 지금은 확연히 보였다.

이 세계의 중축은 유지한다.

내가 원래 살던 세계는 그래도 각각의 특별함과 역할이 적절히 분산돼, ‘모두가 주인공이다’라는, 흔히 책에서 어필하는 문구가 좀 억지를 쓰면 그나마 들어맞기라도 했지만, 이 세계는 철저히 유지한 위주였다.

유지한이 빠진 세계는 그대로 마모되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세계의 색깔 자체가 사라진 것과 같달까.

유지한이 이 세계를 포기하고 내가 있는 세계를 선택했을 때 이 세계가 얼마나 유지한을 부르짖었을지 안 봐도 비디오였다. 유지한 곁에 머무르는 충만한 운명과 관심. 그리고 의무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있던 세계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고, 금방 부스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유지한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이 세계는 유지한이 어떤 짓을 해도 유지한을 버릴 수가 없다. 그러니 유지한이 무슨 짓을 해도 세계에서 추방당할 일은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숱한 추방으로 절망했던 그에게는 아주 최적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내가 그렇게 될 차례임이 맞지만…….

“……이름,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왜요?”

나는 이 세계에서도 특별한 존재였다. 정확히는 어떤 세계에 있어도 나는 빛을 잃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의 존재감과 단단한 영혼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세계가 그런 이를 사랑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아마 나는 어떤 세계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영혼일 것이다. 그러니 세계가 내게 해를 끼칠 일도, 내게 간섭해 나를 추방할 일도 없었다.

진실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나와 다르게 유지한은 이런 걸 전혀 알 수 없을 텐데 어떻게 알고 이런 선택을 한 것인지 진짜 기가 찰 정도였다.

아니, 사실 이건 그렇게 기가 차지 않았다. 저따위로 살았어도 그는 이미 한 세계의 주인공이었다.

그가 바랐던 바는 아니지만, 세계로부터 많은 것을 받은 인간. 심지어 세계가 바라는 엔딩을 보고 반신의 반열에 오른 자였다. 세계의 엔딩을 본 자로서, 무언가 느끼는 것이 있었을 테니까.

정말 기가 찬 것은…….

“……나랑, 만나줄래요?”

“…….”

“노력할게요. 무엇이든. 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라도 될게요. 무엇이든 들어줄게요. 그러니까…….”

“와. 자존감 제로의 망언이다.”

“…….”

“아니, 그걸 떠나서. 그걸 왜 이제 말해요?”

저런 유지한에게 또 다시 넘어가는 나였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렘을 만끽하며 수줍게 웃는 나였다.

어떻게 진짜 저럴 수 있을까.

솔직히 한 번은 그러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진짜 영혼에 새겨지기라도 한 건지, 나는 언제나 유지한의 구애에 넘어갔다. 그것도 일상적인 고백에 OK를 하는 것도 아니고, 진심으로 이 남자를 곁에 둬 보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것이 진지한 마음이든, 가벼운 마음이든. 그것 자체가 내게는 대단한 일이었다. 나를 너무 잘 알고 있기에 그 기적을 몇 번이고 이루는 유지한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정말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그래서 새삼 유지한을 다시 보게 되었다.

이렇게 몇 번이고 다시 너와 사랑에 빠지는 걸 보면. 만약 상황을 떠나, 너의 배경과 조건을 제외하면 너 자체는 내가 반드시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남자라는 것일까.

세상에 그딴 오글거리는 생각을 내가 하게 되다니. 하지만, 이런 광경을 몇 번이고 보게 되니,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해. 세상에서. 제일.”

“이야. 이 남자가 드라마 본 경력을 여기서 드러내네.”

나 역시 진짜 구제불능이었다. 멋대로 나를 휘두르고, 저런 멍청한 짓을 반복하는 네게 분노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네가 좋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듯한 얼굴로 사랑을 말하는 너를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전부 사그라들었으니까. 하도 스케일이 큰, 어지간한 블록버스터 뺨치는 영화를 여러 번 봐서 그런가. 어딘가 망가진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드는 생각은, 너무나 별 볼 일 없는 것이었다.

“그래. 나도 그런 것 같네.”

“……하핫―!”

“으악―!”

……너를 정말 어쩌면 좋을까.

* * *

유지한은 이번에야말로 정말 행복해 보였다. 진정으로 완벽한 행복을 얻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망할 놈이 유지한에게 선물해 준 세계는. 유지한이 바라던 모든 것이 있는 세계였다.

이 세계에서 나는 정말로 가진 게 없었다. 다른 세계에서 이쪽으로 그냥 뚝 옮겨져 왔기 때문인가. 억지로 날 이 세계에 속하게 만들어서 그런지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것은 아무것도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다. 가족도 없는 고아였고, 고아니 당연히 물려받은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루하루 벌어먹고 살기 급급한 환경이라는 의미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라는 사람 자체가 변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다행히 빚 같은 건 없었고 대학교는 장학금으로 다녔다. 그리고 나름 괜찮은 기업에 곧바로 취직해 혼자 살기에는 그래도 그럭저럭 먹고 살 만한 월급을 벌었다.

원래 세계에서 사랑받았던 내가, 이 세계에서 사랑받지 못할 리도 없었으니 고아였고, 가진 게 없다는 것만 빼면 꽤 괜찮은 인생을 살았다.

물론 가족이라는 테두리가 없었던 탓에 살기가 퍽 고달프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런 거에 우울해하고 자기연민에 빠지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그리고, 그건 유지한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상황이었다.

나라는 사람 자체는 전혀 변하지 않고.

“……이게 다 뭐냐.”

“밥.”

“와. 역시 S급 헌터님은 돈 쓰는 씀씀이도 남다른 것인가.”

지난번과 달리, 그는 세계에 윤지호의 존재를 납득시킬 만한 사회적 지위가 충분히 있었고. 지난번과 달리 가진 게 없는 윤지호에게 그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넘쳤으니까.

진짜 도를 넘지 않는 한, 나는 유지한이 해 주는 것을, 역시 재벌에 헌터라 돈 쓰는 씀씀이가 남다른가 보다. 하고 석연치만 납득하고 받아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발전인지 잘 아는 유지한은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가 주는 것에 익숙해지면, 쉽게 그를 놓을 수 없을 테니까. 물론 그렇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그런 희망을 품었다.

선녀와 나무꾼의 나무꾼이라도 되고 싶은 것인지.

유지한은 내가 제 돈을 마음껏 탐내길 바랐다.

좋은 요소도 넘치게 있었지만, 그의 사회적 지위는 내가 불편해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는 어떻게든 내 환심을 사고 싶어 했다.

그가 싫어도, 그를 밀어내고 싶어도, 그의 돈이라도 필요로 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설령 제가 아닌 제 돈만을 바라보아도, 곁에 있어 줬으면 하니까.

어차피 돈이라는 그에게 평생 마르지 않는 샘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상속권을 포기하면서 받은 재산만으로도 죽을 때까지 놀고먹기 충분했고, 헌터로서 벌어들이는 수입조차 어마어마했으니까. 그 마르지 않는 샘물은, 유지한이 내게 내밀 수 있는 유일한 자랑거리였던 것이다.

비소가 절로 튀어나오는 병신같고 엿 같은 생각이었지만, 그게 어떤 간절함에서 나온 것인지 알았기에 욕은 하지 않았다. 물론 그게 아니었다면 천년의 사랑도 식어 버린 채로 바로 쌍욕을 날린 뒤 손절이다.

사람을 대체 뭐로 보고.

하지만 자랑할 것이, 내게 내세울 것이, 그것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주제 파악 하나는 확실한 저 남자의 간절함을 대변하는 것이었기에 뭐라 욕은 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불쌍했다.

내세울 것이 그것밖에 없다고 여기는 것이.

내가 네 돈을 보고 너를 사랑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면서.

“예쁘네. 유지한.”

“……파마할까?”

“그래도 예쁘겠네.”

어떤 세계의 나도 유지한의 조건이 아닌, 정말 순수하게 유지한이란 사람만 보며 사랑했다. 그냥 유지한 자체를 예뻐했고, 사랑했다.

지난번은 유지한이 가진 게 없어 그랬을 수 있지만, 유지한이 가진 게 넘치는 지금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돈 많고, 넘치는 사회적 지위를 부담스러워해서 처음에는 무지하게 깠다.

그럼에도 결국 유지한이란 인간만 보고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것을 분명 알고 있음에도, 내게 간절히 매달리며 나를 붙잡을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다고 여기는 모습에 진심으로 그가 조금 가엽게 느껴지려 했다.

오로지 자신만 보는 나의 순수한 애정은, 그를 더없이 행복하게 해 주었지만 그 애정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고, 사라지지 않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얼마든지 내게서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이미 학습했기에.

“선물!”

“……그만 사. 좀.”

애정은 영원하지 못할지 몰라도, 그의 돈은 영원했다.

“얼마 안 샀는데?”

“집에 안 들어간다고!”

“……어, 그럼 우리 집에 두면 되잖아.”

그랬기에 영원한 것을 염원해 그것에 절박하게 매달리는 남자를 보며, 정말 바보 같지만 욕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 꼴리는 대로 해라.”

“……화났어?”

“……안 났어.”

그렇게, 나름대로 유지한이 만족할 만한 행복한 나날이었다.

하지만 물론 이번에도 문제가 없던 건 아니었다.

좋기만 한 날은 원래 그리 오래가지 않지 않은가.

‘……머저리.’

절박했기 때문에 유지한은 아주 조금이라도 내게 거부당하는 걸 견디지 못했다.

이미 대차게 한번 거절당한 게 격한 트라우마로 남았는지. 외롭고, 오로지 자신에게만 향하지 않는 시선이 서러워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목 뒤로 제 감정을 숨기며 꿋꿋이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그냥 좋기만 한 척을 유지한은 너무나 잘했다. 나뿐만 아니라 이미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랬을 유지한에게 그것은 특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문제는 내가 그런 눈치는 참 빠르다는 것이었고, 그게 아니라도 다른 사이도 아닌 거의 매일같이 보는 연인 사이에서 그런 미묘한 감정을 눈치채지 못할 수는 없었다.

진짜 웃음을 이미 본 이상, 가짜로 만들어낸 미소는 어떻게 잘 만든다고 해도 확연히 티가 날 수밖에 없었다.

“…….”

“응? 왜 그래?”

“……아니야.”

한두 번은 내가 잘못 봤나? 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세 번이 되고, 네 번이 되고. 다섯 번을 넘어가면 그때는 그냥 모른 척을 할 수가 없게 된다.

뭐, 그럴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차피 그걸 계속 묵인하게 되면 묵인해도 처음과 같은 감정은 가질 수 없는 법이다.

“……그만할까?”

그리고, 애초에 나는 그런 불편함을 그렇게 오래 참을 사람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그건 서로에게 마이너스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어째서?”

어째서라니.

설마 진짜 모를 거라 생각한 걸까.

아니. 모를 리가 없겠지.

나를 어느 정도 파악하다 못해, 이미 몇 번을 겪어봤으니.

그냥 너는 모른 척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쨌든,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을 참으로 볼 만했다. 눈물이 차오른 눈으로 그가 그동안 참아왔던 모든 설움을 토해냈다.

어째서?

나 이번에는 잘했잖아.

저번처럼, 너한테 떼를 쓰지도 않고. 네가 용납하지 못하는 것을 요구하지도 않았잖아.

하지만 그건 어렵사리 말로 꺼낸 내 생각을 굳히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그 눈물에 마음이 쓰라리듯 아픈 건,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네, 그런 얼굴을 보니까 여기까지 하는 게 맞는 거 같아.”

유지한이 한가지 대단히 착각한 것이 있다.

분명 유지한의 사랑에 비해 내 사랑이 부족한 건 맞았다.

감정의 깊이라는 게 있다면 분명 천지 차이가 날 것이다.

내가 표현도 잘 안 하고, 언제나 태평하고 쉽게 너와 함께했으니 내 사랑이 가벼워 보였을 수 있지만, 그래도 나는 인생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너를 사랑했다.

표현을 못 하고, 굳이 이런 진지한 마음보다는 마냥 웃고, 사랑스러운 나날을 보내는 것이 좋았기에 그렇게 행동했을 뿐.

모든 세계에서 나는 너를 사랑했다.

가족. 윤지우를 제외하고 누군가를 이렇게 사랑해 본 적이 있나 싶을 만큼.

물론, 네 어마어마한 사랑과 비교하자면 초라해 보일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 사랑이 얕은 것이 아니었다.

이성적으로 너를 버린 것은 서로를 위한 이성적 선택. 내 원래 성격이 그런 것일 뿐, 그렇다고 그게 너를 언제든 버려도 상관없을 정도로 얕게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울고 있는 너를 보고, 그런 너를 달래주고 싶지 않을 정도로, 너를 적게 사랑하지 않았다.

“……갈게.”

그래서 도망쳤다.

나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유지한을 사랑하는 것과 나를 바꾸는 것은 염연히 다른 문제였고, 나는 이런 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 선택이 옳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바로 그렇게 단번에 쑥― 사라지는 것인가. 심지어, 내가 뭘 잘못했냐고 울고 있는 너를 보면서.

그랬기에 회피한 것이다. 아무리 나라도 그걸 태연히 받아낼 자신은 없었으니까.

그걸 보며 나는 이제 심드렁히 생각했다.

‘아. 이제 또 한 번 뒤집어엎을 차례인가요.’

이미 여러 번 봐서 이제는 대강 눈에 보였다.

두 번째 거부였다.

첫 번째 거부에 더 노력을 해 보긴커녕 바로 세계를 뒤집은 놈이 바로 이놈이었다.

첫 번째에 어느 정도 학습을 했다고 해도, 버림받는 것이 한두 번으로 학습으로 해결되는 것인가. 그것도 순전히 두 사람만의 관계 문제로 인한 이별인데.

또 버림받은 것을 납득하지 못하고 세계를 뒤집을 것이 불 보듯 뻔했다.

‘……하암.’

그래서 저 녀석더러 머저리라고 하며 심드렁하게 하품이나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심정이 아주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경험이 좋을 리도 없고, 세계를 핑계댈 때는 좋았지만 온전히 자신을 탓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놈이었으니까.

하지만, 왜 저리도 일찍 포기를 할까.

솔직히 이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되돌리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저러고서도 아직 감정은 다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고 한번 붙잡아 보기라도 할 것이지 너무 쉽게 포기를 한다.

물론 붙잡는다고 붙잡혀 줄지 아닐지는 자신도 모르겠지만, 아마 저 때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상태에서는 아마 붙잡혀 줄 가능성도 있었다.

어쨌든, 너를 사랑했고, 여전히 너를 사랑하는 상태니까. 한 번 정도는 눈감고 못 이기는 척 붙잡혀줄 수도 있다.

확신은 못 하지만.

그런데도 그 가능성을 아예 생각지도 못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그 오만에, 환멸이 일려 했다.

‘……어?’

하지만 이번에는 예상과 달랐다.

“……!!”

“……싫어.”

당연히 이번 세계를 포기할 줄 알았던 유지한이, 처음으로 윤지호를 붙잡았다. 오로지 제 문제로 버림받았으니, 이번에는 오로지 제힘으로.

“사랑해. 아마 영원히 그럴 거야. 그러니까…….”

“…….”

“제발 날 버리지 마.”

“…….”

“곁에 있어 줘. 뭐든 해도 좋으니까.”

곁에 있어 줘. 아니. 곁에만 있게 해 줘.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채 그저 붙잡혀 있자, 안 그래도 소박한 소원이 점점 소박해져만 갔다. 뚝뚝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는지 고개를 숙인 채 열심히 빌었다.

오로지, 나를 붙잡기 위해.

그 처량하고, 볼품없는 모습조차 예뻐서 ‘나’는 마음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 흔들리는 마음은, 결국 다시 사랑이 되었다.

“얼굴 봐라. 몇 살이야?”

천천히 손을 뻗어 눈물을 훔치자, 멍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이 어찌나 얼빵하고 귀엽던지. 결국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쪽이 훨씬 예쁘네.”

감추는 것보다 이렇게 터뜨리는 쪽이 훨씬 예쁘다 말하며 ‘나’는 기꺼이 붙잡혀 주었다.

아직 눈에 비치는 모습이 너무나 예쁜…….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 * *

【‘파우스트’의 힘이 개방됩니다.】

【마력의 폭등으로 인한 혼돈에 주의 바랍니다.】

“……으아아악―!”

푹―

“커억―!”

“젠장! 카밀라!”

아주 간발의 틈을 놓치지 않은 파우스트의 손이 카밀라의 배를 그대로 관통했다.

휘릭―

연금술사가 황급히 사슬로 카밀라를 잡아당겨 아슬아슬하게 파우스트의 손에서 카밀라를 빼 오는 데 성공했지만, 심각한 치명상임은 변하지 않았다.

연금술로 만든 결계로 일단 급하게 상처를 틀어막은 케이가 밀리언을 향해 소리쳤다.

“밀리언! 카밀라는 내가 맡을게! 넌 이든을 도와!”

어차피 연금술사는 다른 랭커들처럼 최전방에서 메인으로 싸울 수 없는 랭커였기에 밀리언보다 그가 빠지는 것이 옳았다.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를 악물며 밀리언이 답했다.

“알았어―!”

입에서 피가 새어 나올 것 같았다.

처음 유지한이 최종적으로 랭크를 앞지르면서 모든 것에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었다. 최종적으로 가장 마지막 단계에 다다른 유지한은 그가 보기에도 그보다 아득한 무위를 느낄 수 있었으니까.

이 정도면 파우스트와 충분히 해 볼 만했다.

【세계가 파우스트의 존재를 용납지 않습니다.】

【절대자가 파우스트의 존재에 대한 불쾌를 표출했기에, 세계가 파우스트를 거부합니다.】

【세계의 억제력으로 힘이 봉인됩니다.】

결계는 사라졌지만, 아직 그들의 절대자가 남긴 안배가 있었으니까. 이렇게까지 해 줬는데 지면 아마 저 파우스트가 아니라, 그녀가 우리를 가만두지 않겠지.

이제는 알 수 있는 그녀만의 호의와 살벌한 협박에 밀리언은 상황에 맞지 않게 웃음을 흘리기도 했다.

‘레이 밀리언.’

‘……!’

‘바로 내 밑에 있는 값은 해야지?’

그들의, 아니 자신의 절대자의 뜻대로.

“……어련하실까.”

비록, 이제는 자신이 그 바로 밑에 있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여기 안주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1위의 자리를 욕심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딱히 누군가에게 지고 싶지도 않았고, 그저 살아가다 보니 강해져야 했기에 강해졌고, 강해졌기에 올라선 것뿐이었다.

원래 처음 성좌에게 바랐던 소망은 정말 보잘것없기 그지없었다.

‘빛을, 어두운 곳은 싫어요.’

그저 빛이 필요하다는 정말 별 것 없는 소망. 그 소망으로 빛을 얻었고, 부가적으로 얻게 된 1위였을 뿐이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1위를 뺏겨도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밑까지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자신은 언제나 그녀의 바로 밑에서.

“어이. 이쪽이라고!”

그녀의 시선을 받고 싶으니까.

바로 옆은 포기할지라도, 바로 밑까지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 일념 하나로, 그는 비로소 계단을 넘었다.

【빛의 술사가 한계를 개방합니다.】

【빛의 술사가 ‘빛의 유희자’로 단계를 넘습니다.】

【빛의 유희자가 ‘빛의 환희(SSS)’를 발동합니다.】

파지지직―!!

화르륵―!

“으아아악―!!”

밀리언의 강력한 한 방에 파우스트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려왔다.

그에 카밀라가 감탄의 목소리를 내었다.

“와. 이 새끼. 지가 무슨 히어로인 줄 아나…!”

“이런 상황에서는 그래도 되지!”

“하. 아무렴!”

【광전사가 ‘광전사의 살인무’를 춥니다.】

촤아악―!

“……크흑―!”

“이쪽을 무시하면 곤란하지.”

【구원자가 ‘구원을 위한 찬가’를 발동합니다.】

푸욱―!

카밀라와 연계해 유지한의 검이 그대로 파우스트에게 꽂혔다.

“……됐어―!”

완벽히 들어간 한 방에, 매우 희망적인 상황이 펼쳐져 사기가 고조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이…… 빌어먹을 것들이……!!”

그들의 예상보다 더.

【마력이 폭주합니다!】

【파우스트가 세계의 억제력에 저항합니다.】

【제어할 수 없는 힘이 억제력을 밀어냅니다.】

세계의 억지력도 그를 다 막지 못할 정도로, 파우스트가 대단했다는 것이었다.

“잠깐…… 놀아줬더니…….”

“…….”

“이런 버러지 같은 것들이……!”

유지한의 검이 단번에 심장에 꽃히자, 그동안 그들을 유린하던 여유로운 신사의 모습을 벗어던졌다.

치지직―

파우스트의 옷이 찢어져 나가며 몸이 팽창했다. 그와 동시에 인간의 형상조차 벗어던지고 드디어 본래의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며, 밀리언이 황급히 지한을 향해 외쳤다.

“유지한. 피해―!!!”

하지만 외침은 한발 늦었다.

【‘파우스트’의 힘이 개방됩니다.】

【마력의 폭등으로 인한 혼돈에 주의 바랍니다.】

콰아아아앙―!

파아아앙―!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마력이 팽창했다.

“……으악―!”

“다들 피해―!!”

미친 파괴력에 모두가 황급히 몸을 뒤로 뺐다.

파사삭―

“……미친.”

마력이 닿은 곳이 단번에 파이면서 땅까지 검게 변했다. 건물. 나무. 무차별적으로 전부 파괴하고 부식하는 미친 마력을 보며, 모두가 단번에 얼어붙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유지한이 날아왔다.

“……유지한―!!”

“커헉―!!”

어디서부터 날아온 것인지, 후방에 있던 성녀의 무리들도 지나쳐 유지한은 그대로 건물에 처박혔다.

쾅!

파사삭―!

엄청난 굉음과 함께 건물이 부서져 내렸다. 순식간에 그 건물의 잔해에 파묻히는 것을 보며, 그나마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말자가 소리쳤다.

“유지한 씨! 어서 꺼내요! 어서!”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 정신을 차린 이들이 서둘러 힘을 발휘했다.

【보석술사가 ‘부유의 바람’을 사용합니다.】

【바람의 마법사가 ‘떠받드는 바람’을 발동합니다.】

다행히 그들에게는 이럴 때 가장 적합한 바람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이 많았기에 구조는 아주 손쉬웠다.

“성녀님!”

“이리 눕혀요! 서둘러야 해요!”

1초라도 간절한 상황이었기에 말자가 황급히 유지한을 치료했다.

【계시자가 ‘계시자의 기도’를 발동합니다.】

아껴뒀던 치유 스킬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가 받은 외상은 단순한 외상이 아닌 것을 직감했으니까.

역시 예상대로 ‘계시자의 기도’조차도 파우스트의 마력을 이겨내지 못했다. 다른 수는 더 없었기에 일단 내상 회복만이라도 되길 애를 쓰며 말자가 간절히 외쳤다.

“유지한 씨! 정신 차려요!”

그의 손에는 검이 보이지 않았다. 끝까지 검을 쥔 손을 놓지 않다 튕겨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상황은 좋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느긋하게 있을 시간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커억―!”

말자의 예상대로 타락한 본모습을 드러낸 파우스트가 분노를 숨기지 않으며 곧바로 카밀라의 배를 뚫었다.

“성녀님. 카밀라를 부탁드립니다.”

“맡겨주세요.”

“네. 그럼 저는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로써, 전력은 연금술사와 밀리언밖에 없게 되었다.

“……무운을 빌겠습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세계 최고의 힐러라 해도, 이 정도 부상을 단번에. 전투에 나설 수 있도록 회복시킬 수는 없었다.

아무리 힐러라 해도 치유가 가능한 건 육체적인 것일 뿐.

정신적 충격과 피로까지는 해결해줄 수 없었으니까.

최악의 상황에 이를 악물면서, 말자는 해야 할 일을 했다.

“비키세요.”

【계시자가 ‘계시를 위한 축복’을 발동합니다.】

일단 아무리 힘을 쏟아부어도 차도가 없는 유지한 보다 당장의 전력을 채우는 것이 중요했다. 다행히 카밀라는 그냥 배를 관통당한 것인 듯, 파우스트의 마력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이 정도는 충분히 치료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바로 전력으로 투입할 수 있었다. 빠르게 메워지는 배를 보며 말자가 주변을 향해 말했다.

“유지한 씨를 일단 옮…….”

하지만,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에게, 갑자기 이변이 발생했으니까.

“……이게 무…….”

주구장창 귀에 걸고 다니는 귀걸이에서 빛이 나며, 유지한을 감쌌다.

그리고 빠르게 유지한을 회복시키는 힘을 보며 그제야 그들은 왜 저런 불편한 귀걸이를 유지한이 걸고 다녔는지 알 수 있었다.

“아이템?”

“아니…… 그래도 저런 회복력이라니…… A급도, 아니 일반 S급도 불가능하지 않아?”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와, 최고의 힐러도 이루어내지 못한 것을 이루는 아이템을 보며 말자는 깨달을 수 있었다.

아. 윤지호. 네 안배구나.

하긴. 네가 저 유지한을.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단순히 네가 준비해 놓은 흔적을 마주한 것뿐인데,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안심이 되었다.

언제나 대단한 친구 녀석이었다.

그리고 유지한은…….

【운명의 여신의 세 가지 애정(S급)이 사용됩니다.】

【시전자가 바란 첫 번째와 두 번째 소망이 실현됩니다.】

“첫 번째 소망은, 어떤 상처든 치유할 수 있는 힘을.”

“두 번째로는…… 늘 최상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을.”

언젠가, 누군가가 그에게 전해 주었던 소망을 들으며. 서서히 눈을 떴다.

“……정말…… 이길 수가 없다니까…….”

이런 너를, 어떻게 이겨.

* * *

콰아아앙―!

“……!!”

한순간의 패착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검을 놓아서는 안 되었는데.

모든 게 순조로웠다. 과거, 파우스트는 이 스킬로 심장을 찌르면 언제나 마지막을 맞이했으니까.

그래서 제대로 검이 심장을 관통했을 때는, 이제 끝이구나. 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언제나 그랬으니까,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착각을 하고.

참 멍청함은 그냥 제 특성인 것인지. 어째서 이번에는 지난번과 진행이 확연히 달랐는데, 왜 이것조차 다를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바뀐 게 그렇게나 많은 만큼, 변수도 많고 나 역시 변했을 것인데.

윤지호가 백날 멍청하다고 했던 비난을 인정은 했지만 이렇게 뼈저리게 깨달은 적이 있던가.

엄청난 마력의 파장으로 날아가면서 희미해지는 의식 사이에서도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몸이 변화한다 하지만 심장이 관통된 이상 그 상황에서 추가타를 노릴 수는 있었다. 검을 제대로 잡고만 있었더라면.

“……방심했군. 그래. 괜히 구원자가 아니지.”

분노 어린 비소에 순간 멈칫한 것이 문제였다.

“……!”

순간 당황해 잠시 힘이 빠지는 타이밍을 파우스트는 놓치지 않았다.

세이라를 쥐고 있었더라면 파우스트의 마력 파장을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겠지만, 세이라를 손에서 놓는 순간, 세이라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기에 속절없이 날려졌다.

‘……젠장―!’

완전히 상황이 뒤바뀌었다.

세이라를 놓는 순간 승패가 갈렸다.

파악―!!

콰과과광―!!!

건물에 부딪치는 순간 충격을 이기지 못한 건물이 부서지면서 그 잔해에 깔리며 생각했다.

어쩌면 이렇게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것인지.

원하는 것도.

해야 하는 것도.

이루어야 하는 것도.

전부 엉망이다.

진짜 왜 이렇게 되는 걸까.

내가 간절히 원하는 건 언제나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일까?

‘……이번에는 진짜로 경멸받으려나.’

이젠 하다하다 이런 것도 못하냐고.

이것조차 못하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온갖 절망적인 생각이 나를 휘감았다. 그렇게 많은 실패를 했고, 또 한 번 실수를 한 것뿐인데 왜 이러는 것인지. 벼랑 끝에 서 있기 때문인가.

“……찌질하다. 진짜.”

마지막 기회인데, 결국 나는 또 실패하고 이렇게 마지막 기회를 장렬히 날려 버리는 것인가.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어디…… 한번 제대로 해 봐. 다음에는.’

‘…….’

‘……다음에는 될지 누가 알아?’

네가 만들어 준 것이나 다름없는 기회였음에도, 이렇게 허망하게 날려 버리는 머저리 같은 내가 참을 수 없이 원망스러웠다.

당장 심장을 뜯어내고 싶을 정도로.

“……네 기억을 없앤 게 정말 잘한 짓이었을까?”

아니, 이건 내게 선택지가 없는 문제기도 했다. 최종적인 선택권은 네게 있었으니까. 바꾼다면 바꿀 수 있지만, 네 선택을 내가 저버릴 수 없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뻐했다. 그 순간의 나는 진심으로 그 결정을 좋아했다.

그럴 수밖에.

‘……무슨 짓을 한 거야?’

모든 기억을 다 가지고 나를 만난 너의 얼굴을 알고 있었으니까.

어떤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어떤 얼굴로 내게 분노했는지 이미 겪어 봤으니까.

그것을 두 번 겪을 자신은 없었다. 근데 어차피 기억을 이렇게 찾게 될 거, 왜 이리 좋아하고, 안심했던 것일까.

“……진짜 한결같은데…… 넌…….”

어차피 진실을 캐낼 것이고, 절대로 그걸 그냥 덮어 두지 않을 것을 알고 있는데….

“……유지한!”

“여기 있어!!”

“얼른 꺼내! 얼른!!”

그런 절망적인 상념이 깨어진 것은, 빛이 새어 나오고…… 나를 구해주러 온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였다.

네가 내게 준비해 준 안배가.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구원자의 타이틀을 받고 쉽게 절망에 빠질 리가 없는데, 갑자기 이렇게까지 무너지려 하다니.

그제서야 그런 자신의 절망마저 파우스트의 마력이 부추긴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이리로 눕혀요. 얼른!”

성녀의 황급한 외침과 함께 몸이 눕혀지자, 재빨리 상태를 체크했다. 이미 한 번의 실수를 저지른 만큼 두 번의 실수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됐다.

날려질 때 파우스트의 분노가 찐득하게 묻어, 상처 난 곳이 후벼 파이며 더욱 상처의 악화를 가속화시키고 있었다. 그것을 이제야 깨닫는 자신의 나약함에 지한은 입술을 깨물었다.

전부 상정 외였다.

파우스트가 예상외로 강한 것도 있었지만, 문제는 자신이 그때보다 약해졌다는 것이다.

물론, 파우스트의 등장 시기가 훨씬 앞당겨지며 그런 것도 있었지만, 자신은 ‘구원자’라는 타이틀을 이미 오래전에 달아 보았기 때문에 그리 차이가 있을 리 없을 것이라 여겼다.

실제로도 그게 맞긴 했다. 단 한 가지가 달라졌을 뿐이다. 이 세계의 중심으로, 세계가 자신이 아닌 윤지호를 선택했다는 것뿐. 그것이, 지금의 격차를 만들어 낸 것이었다.

완벽한 자신의 실책이었다.

이 파우스트의 마력을, 성녀가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때도 이기지 못했는데, 지금은 말할 것도 없었다.

“유지한 씨! 정신 차려요!”

아니나 다를까. 성녀의 힘은 이 상처에 통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때보다 한층 성장해 있었기 때문에, 상처가 더욱 악화되지 않을 정도로는 막아줄 수 있었다.

하지만 전투에 나서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이 몸뚱아리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입술을 짓씹는데…….

“성녀님. 카밀라를 부탁드립니다.”

설상가상으로 카밀라까지 리타이어 되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순식간에 절망적으로 뒤바뀐 상황 속에서 서서히 다시 파우스트의 마력에 잠식되어 가려는 순간.

이변이 발생했다.

【운명의 여신의 세 가지 애정(S)이 사용됩니다.】

【시전자가 바란 첫 번째와 두 번째 소망이 실현됩니다.】

귓가에 울려 퍼지는 알림음.

그와 함께 지한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풍경이 펼쳐졌다.

기억도 없으면서, 아직 자신을 사랑하기 전이었음에도.

그녀가 나를 위해 바랬던 소망을.

“첫 번째 소망은, 어떤 상처든 치유할 수 있는 힘을.”

“두 번째로는…… 늘 최상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을.”

참으로 나는 끝까지 머저리 같고 멍청했다. 고작 저 소망에 이 상황에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으니까.

몸 상태가 조금 더 좋아졌을 뿐. 실제 상황은 아무것도 나아진 것이 없건만,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작 네가 나를 위해 준비해 둔 안배 하나만으로도.

처음의 목적이. 내가 원하는 단 하나의 소망이 멍청한 나를 일으켰다.

“……유지한?”

“카밀라 회복을 부탁드립니다. 카밀라에게는 미안하지만 최대한 빨리 다시 전선에 합류해야 해요.”

“……물론이에요.”

나는 네가 이 귀걸이에 담았던 소망대로 꼭 이룰 것이다.

“주인공 행세 한번 기가 막히게 하는군.”

“……이로운.”

“나도 합류하지. 그래도 짐은 안 될 테니.”

그 누구도 아닌. 내 손으로.

‘부디, 당신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참. 질리지도 않는군.”

“꼭 이뤄야 할 것이 있거든.”

오로지, 나를 위한 소망을.

* * *

와우. 유지한. 어메이징.

언빌리버블!

나는 진심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나랑 결혼해 줄래?”

이런 금기의 단어를 꺼내는 패기가 있을 줄이야.

그의 용기는 그야말로 놀라운 것이었다. 단순히 내가 등을 돌리는 것에마저 엄청난 트라우마를 가진 그가, 거절당하면 어쩌려고, 그런 용기를 내었는지. 그 패기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성장했구나. 그래도.

무려 4번의 뻘짓이 그래도 헛되지 않았다는 것에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그래. 그렇게까진 멍청하진 않았구나.

다행이다.

까여도 뭐. 저 정도면 진짜 많이 컸지.

거절당한다 해도 개소리 말라고 꺼지라는 소리를 듣지는 않을 정도리라. 수락한다는 가정은 머릿속에 들어있지도 않았다.

그야, 나는…….

“……뭐?”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에 굉장히 회의적인 사람이었으니까.

정확히는 만약 한다면 다 늙고서나 생각해 본다고 할, 지독한 개인주의자였다.

심지어 저 때 나이는 25살.

결혼을 생각하기에는 애초에 너무 이른 나이였기에 생각할 것도 없었다.

“너랑 매일을 함께 하고 싶어. 곁에 있고 싶어.”

“…….”

“내가 네 곁에 있게 해 줘.”

하지만 정말 놀랍게도 기적이 일어났다.

“흠. 그래 뭐. 너라면, 나쁘지 않겠네.”

“……!!”

“생활비는 네 통장.”

“……어 ……어! 뭐든! 전부 줄게!”

“아니 전부까진 필요 없고.”

……대박.

진심으로 놀랐다. 유지한이 아니라 ‘나’에게.

4번이나 이 말도 안 되는 연애를 겪고, 드디어 내게도 이상이 생긴 것인가.

결혼이라니. 25살의 내가?

지금 25살의 내가 보건대, 내가 머리에 총이라도 맞지 않은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유지한을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결혼이란 것 자체에 거부감이 있으니까.

“……사랑해. 정말로.”

그런데 청혼 수락이라니…….

“세상에서, 가장.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을 정도로.”

“…….”

“사랑해. 윤지호.”

유지한이 만들어 낸 불굴의 기적이었다. 정말, 그 순간 유지한의 울면서도 기쁨이 가득한 미소는…… 내가 봐 온 그 어떤 미소보다 행복한 미소였다.

단언할 수 있었다.

이 순간이, 이 생이.

유지한에게 가장 행복한 나날이었음을.

“알아. 바보야. 그만 울어. 누가 보면 찬 줄 알겠네.”

“응. 응.”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끼이이익―!!

“……!!”

“……윤지호―!!!”

하지만 그 방식은,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전개로 이루어졌다.

* * *

“……근데 결혼은 뭐부터 해야 돼?”

……혼인 신고?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이유는 당연히 관심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소설은 좀 보고 살았지만, 그렇다고 소설이 결혼의 세세한 과정을 그려주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냥 웨딩드레스 입으러 가고, 그런 거만 좀 보여 주지.

그리고 그건 지금의 나에게도 다를 건 없었다.

‘……허.’

물론 혼인 신고를 먼저 떠올린 것에 대해선 실소했지만.

그런 ‘나’의 의문을 해소시켜 준 건, 의외로 이런 걸 절대 알 리 없다 생각한 놈이었다.

“일단…… 집은 내가 있고, 혼수도 전부 있으니까. 결혼식 준비만 하면 되겠다. 식장부터 잡고, 드레스랑 스튜디오…… 아. 편하게 플래너랑 계약하는 게 좋으려나.”

대체 어디서 알아 온 것인지.

아니면 예전부터 염원해 온 것이니만큼 소망을 담아 그간 열심히 수집한 것인지 정보를 줄줄 내뱉는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런 머리로 일을 합리적으로 해 봐라!

하도 멍청하게 호구짓을 해 대서 그 뒤치다꺼리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던 인간으로서는 이가 아주 빠득빠득 갈렸다.

“혼인 신고서는 미리 쓰는 게 좋겠지……?”

어이구. 약을 판다. 약을 팔아.

그 와중에, 아주 어리버리한 얼굴로 은근슬쩍 약까지 팔아대는 얍삽함에 진심으로 치가 떨렸다.

저런 좋은 머리통이 있으면서 왜 이딴 데만 쓰는 것인가.

아무리 이런 데 관심이 없어도, 결혼식 올리는 도중에 파혼한다거나, 결혼하고 얼마 가지 않아 헤어지는 커플이 워낙 많아, 보통 식을 올리고 1년 뒤에 혼인 신고를 하는 편이 좋다는 지식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진심으로 뒷골이 당겼다.

그리고 이런 지식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나는 ‘나’이기는 했기에 본능적인 감이 참 좋았다.

나이스.

“아니. 뭐 미리 해 봤자 좋은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인생 어찌 될지 모르는 거 굳이 지금 할 필요 있나.”

촌철살인까지 완벽해!

잘했다. 나야!

정말 이럴 생각은 없었지만, 내가 그동안 했던 개고생이 자꾸 오버랩 되다 보니 유지한도 이 정도는 좀 당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응.”

눈에 띄게 시무룩해지는 모습에도 굴하지 않고, 무뚝뚝하게 인터넷 서칭하고 있는 나를 보며 박수라도 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혼인 신고서를 일찌감치 쓰지 못하게 된 게 유지한에게 무척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겠지만, 이미 인생 최고의 기적을 손에 넣었기에 그 이상 욕심을 부리지는 않았다.

과욕이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 이미 겪어 보았으니까. 분에 넘치는 것을 손에 넣고도 더 욕심을 부려 기적처럼 얻은 이 행복이 깨질 가능성이 있었기에, 유지한은 절대 과욕을 부리지 않았다.

어차피 관계가 유지되는 한 언젠가 얻어낼 것이기도 했고. 고작 이딴 것에까지 과욕을 부려 지금 얻은 기적을 포기할 용기가 유지한에게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것만 제외하고, 유지한은 행복하고 또 행복했다.

“……윽. 이거 뭐야. 원래 이렇게 불편한 건가요?”

“예쁨과 편함은 원래 반비례하는 거랍니다. 신부님.”

“……냥 대충 고…… 넋이 나갔네.”

“어머. 신랑님이 신부님을 정말 사랑하시나 보네요.”

처음 바라보는 결혼이란 제도.

웨딩드레스를 입고, 자신에게 다가올 나.

모든 게 처음인 남자에게는 전부 꿈만 같은 듯했다.

행복해 보였다.

정말로.

나와 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조금, 섭섭할 정도로.

그 정도로 완벽한 나날이었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어쨌든 결국 실패했기에 여기까지 온 것인데, 저렇게 완벽한 나날이 어떻게 실패를 했다는 것이지?

결혼하고 싸워서 결국 헤어지기라도 한 것인가?

사랑이 식는 경우는 사실 흔한 것이었으니, 결혼 준비하다가 문제가 생겨서 틀어졌나?

여러 가설을 떠올렸다. 딱히 마땅히 그럴싸한 것을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문제가 생겨서 헤어지는 쪽으로 내 생각은 굳어져 있었다.

“……너 전화 불난다.”

“……안 받아도 돼.”

“호출인가 본데?”

지금까지 그랬고, 딱히 더 뭔가 문제 될 것은 생각나지 않았으니까. 그런 내 가벼운 믿음이 산산조각 난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금방 돌아올게.”

드레스 샵에서 나와, 결국 유지한이 호출에 이기지 못하고 무덤덤한 손짓으로 배웅을 받으며 아쉬운 발걸음을 떼, ‘나’와 멀어진 순간.

빵―! 빠앙―!!

“아가씨! 피해요!!”

“꺄악―!!”

갑자기 ‘내’게 돌진하는 트럭. 피할 틈 따위는 당연히 없었다.

그리고 비명 소리에 유지한이 황급히 뒤를 돌아봤지만, 이미 상황은 늦은 후였다.

“꺄아아아악―!”

“……구…… 구급차……!”

“사람이 치였어요!”

“아가씨! 아가씨!”

트럭에 치인 몸이 그대로 도로로 굴러떨어졌다. 유지한의 미친 과보호로 상처 하나 없는 몸이 피로 얼룩지다 못해 군데군데 살이 찢어지고, 뼈가 튀어나왔다.

교통사고. 그것도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트럭에 치인 인간의 모습은 드라마에서처럼 예쁘고 고운 모습이지 않았다.

유지한이 멍하니 그 자리에 못 박혀서, 도로를 피로 적시는 ‘나’를 허망히 바라보았다. 도저히 자신에게 벌어진 현실을, 지금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어서. 인정할 수 없어서 넋이 나간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게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윤지호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런 그를 바라보는 윤지호의 눈은….

“……무…… 슨 짓을…… 한…… 거야……?”

방금 전까지 내내 보여 줬던, 그를 사랑하기만 하던 눈이 아니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믿을 수 없다는, 원망을 하는 것 같은 눈이 자신을 향하자 유지한은 아까와 다른 의미로 심장이 덜컥 무너져 내렸다.

그 원망 어린 눈에, 아니라고. 내 얘기를 들어달라고 서둘러 달려가 변명이든 뭐든 해야 하는데… 발걸음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유지한이 망설이고, 두려워하며 시간을 지체하는 사이, 유지한을 비난하던 그 눈빛 그대로 윤지호는 결국 숨이 끊어졌다.

너무나 있을 수 없는 일에, 그대로 사고가 정지해 버린 유지한은 ‘내’가 숨이 끊어졌다는 것조차 바로 인지하지 못했다. 머릿속의 혼란만으로 이미 한계였으니까.

윤지호가 모든 기억을 기억해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숨이 끊어진 것도 감당하지 못할 충격이었지만, 그것을 외면한다 해도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자신을 추궁하는 그 눈에 유지한은 그대로 소리 없이 무너져내렸다.

털썩―

“어머! 이봐요! 이봐요!”

“방금 치인 여자분과 아시는 사이세요?”

“신랑님!”

“신랑이래. 어떡해…….”

그렇게 유지한의 세상이 무너졌다.

* * *

“아아. 징글맞게도 살아있군.”

죽지도 않고, 도망가지도 않고. 질기기도 하지.

파우스트가 미소 어린 얼굴로 조롱하며 이를 갈았다. 이제는 감정을 숨기지 않으며 사나운 기세를 거침없이 쏟아내는 모습을 보며 지한은 고요히 파우스트의 가슴에 꽂힌 세이라를 확인했다. 파우스트의 여유가 사라진 점과, 가슴에 꽂힌 세이라가 빛을 잃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직 스킬의 효과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구원을 위한 찬가’는 세계의 힘을 빌려 구원을 청하는 구원자의 고유 최고 스킬 중 하나였다. 자신의 마력도 마력이지만, 세계의 힘을 근본적으로 빌린 것이기 때문에 세계가 제 기능을 하는 한, 스킬의 위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랬기에 과거, 파우스트가 이 스킬에 당했던 것이었다.

스킬이 약해질지언정, 유지가 되는 한. 계속 파우스트를 옭죌 것이며 구원자가 바라는 구원을 위해 세계가 찬가를 부르며 파우스트를 갉아먹을 테니까. 그리고 아직 자신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 승산은 충분히 있었다.

네가 남겨준 안배 덕에.

“행운의 여신이 내 편이거든.”

유지한의 자신감에 파우스트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빌어먹을 절대자 같으니. 세계의 절대자가 나와 적으로 지금 현재 있지 않다는 것에 감사할 지경이 될 줄이야. 너 따위가 이 정도로 내 성질을 긁는데, 그녀는 어련했을까.”

“…….”

“솔직히 세계가 이 정도로 그녀의 의지를 따라줄 줄 몰랐어. 어떤 세계에도 이 정도로 세계의 사랑을 받는 영혼이 없었는데, 어떤 괴물인지.”

정말 상정 외야.

파우스트는 분노하면서도 꽤나 현실적으로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분노를 하면 보통 허점이 생기기 마련인데, 이리도 냉철하게 상황파악을 하다니…….

참 골치 아픈 괴물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네 칭찬을 들으니 기분은 좋았다.

“나 같은 건 비교도 안 되는 사람이지.”

“의무는 네가 지고, 애정은 그쪽이 받는 인생이 마음에 드나 보군.”

“원래는 저주도 해 봤는데, 지금은 환영이 되었지.”

너는 분명 이런 나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어차피 잔뜩 의무만 쥐고 있던 인생.

그나마 그 인생의 대가를 네게 주는 것은 충분히 괜찮은 보답이었다.

“그러니 너는 그 사람이 오기 전에 나를 먼저 죽여야 할 거야. 그렇지 않으면 네게 승산이 있을 리 없을 테니까.”

“아아. 뼈에 새기도록 하지. 널 잘근잘근 씹어먹어야 확실히 내게도 승산이 보이겠지.”

서로를 향해 미소 짓던 두 인영이 동시에 빛과 같이 움직였다.

서로가 먼저, 서로의 심장을 꿰뚫기 위해.

* * *

삐이이잉―!

“모두 비키세요!”

“피해자분과 관계자분 안 계시나요? 신원 확인을 해야 합니다!”

사고 현장은 어느 세계나 동일하게 아수라장이었다.

붉은색으로 난자한 현장. 넝마가 된 시체.

사람을 흥분하게 만들기 충분한 소재였다.

더불어, 예비 신혼부부들의 성지. 청담 웨딩거리.

나쁜 일도 분명 많았겠지만, 핑크빛이 주가 되는 이 거리에 이런 사건이 벌어졌으니. 다른 곳보다 더 소란스럽고, 관심도 집중되었다. 이곳에 온 커플은 대부분 예비 신혼부부들이었고, 그게 아니라도 연인을 이렇게 허무하게 잃는 일은 흔한 사건이 아니었으니까.

“이쪽이요!”

“여기 여자분과 관계된 분 있어요!”

그래서 그곳에 있던 이들 역시, 다른 곳에서라면 그냥 모르는 척했겠지만 지금 순간만큼은 오지랖을 맘껏 발휘했다. 그들의 오지랖에 뒤늦게 지한을 인지한 경찰이 지한에게 향해 다가왔다.

“청담 경찰서 한…… 괜찮으십니까?”

“괜찮을 리 있겠어요?!”

“신랑이라고 하던데…… 신부를 저렇게…… 아우…….”

거의 민폐에 가까운 오지랖에 경찰은 그래도 상황을 사건에 필요한 관계를 바로 알 수 있었다.

“……배우자분이시군요. 심정은 아시겠지만 잠시 도와주시겠습니까?”

이런 관계는 그냥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경찰로서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다른 사건도 아니고, 사망 사건이었다. 트럭에 치여 소생의 여지도 없이 그대로 사망한 사건.

심지어 사람이 많이 나다니는 이 거리에서, 마치 노린 듯 정확히 여자를 친 정황. 사망 사건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골치가 아픈데, 잘못하면 스케일이 커져도 한참 커질 수 있는 사건이었다.

때문에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래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가해자인 트럭 기사는 여자를 침과 동시에 그대로 건물에 트럭이 처박혀, 마찬가지로 사망한 상태였다. 가해자를 취조하기에는 이미 그 가해자조차도 증발해 버린 것이다. 경찰로서, 가장 지랄 맞은 상황에 경찰이 결국 감정을 참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리는데…….

“……저분 근데 유지한 아니야?”

“유지한? S급 헌터?”

“……뭐?”

사건에 온 신경이 치우쳐, 지한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던 경찰이 그 소란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빌어먹을.

단순히 일반인이어도 골치 아픈데 어지간한 공인보다 더 셀러브리티 공인인 S급 헌터면……. 안 그래도 단순하지 않은 사건이, 전국을 강타할 이슈 사건이 되게 생겼다.

제발 그것만은 아니어라.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한의 얼굴을 살펴본 경찰의 표정에 이내 절망이 서렸다.

사건에 정신이 팔렸을 때는 그런 걸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유지한이 이런 곳에 있을 턱이 없다고 여겼기에 몰랐지만, 이렇게 알고 다시 보니 정말 유지한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주변인들도 지한의 존재를 전부 알아보기 시작했다.

“맞네! 유지한!”

“대박! 유지한이라고?!”

“유지한이 결혼할 상대가 있었어?!”

유명인이긴 하지만, 그래도 유지한이 ‘내’ 뜻에 따라 ‘나’의 존재에 대해 철저히 감췄기에 그제야 내 존재를 깨달은 이들이 ‘대박 사건’이라며 입을 틀어막았다.

해외 토픽감의 빅 가십 뉴스였다. 하지만 개중 제정신이 박힌 이들도 있었기에 황급히 자신의 옆에 있는 이를 제지했다.

“아니. 자기야. 그건 아니지. 그래도 지금…….”

“……아. 그러네.”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을 다시 상기한 이들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대단한 가십거리라고 해도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게 엄청난 실례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 중에서도 개념이 없는 것들도 분명히 있었지만, 모든 게 무너진 것만 같은…… 초라한 유지한의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 있었기에 아무리 개념이 없는 이들이라도 쉽사리 입을 놀릴 수 없었다.

‘……살다 살다…….’

이렇게 내가 죽는 모습을 또 보게 될 줄이야.

참 못 볼 꼴 이번에 여럿 보았지만, 정말 가지가지였다.

이쯤 되니 유지한이 왜 그렇게 정신이 망가졌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기 시작할 지경이었다. 처음부터 세계가 그를 망가뜨렸지만, 나를 만난 후 이어지는 일들은…… 아무리 강인한 인간도 정신을 망가트리기 충분했다.

유지한이기에 그래도 멀쩡한 척 저리 버티고 있는 거지, 엔간한 사람들은 진작 정신병원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물론 이 모든 걸 소설 보듯 보며 전혀 이입 같은 건 하지 않는 나는, 조금 짜증나고 어쨌든 나와 같은 모습의 내가 처참하게 죽어 있는 모습이 조금 불쾌하다 느낄 뿐. 멀쩡했다.

나는 짧게 혀를 차고는 유지한을 돌아보았다.

“……유지한 씨. 저기…….”

“정신 놓은 거 아니야……?”

“……S급 헌터가?”

“……이봐요. S급 헌터는 사람이 아니에요?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는데?!”

“……아니 전…… 그냥…….”

사람들이 자신을 에워싸며 싸우고 논쟁하면서도 계속 자신을 부르는데도 유지한은 모든 것이 들리지 않는 것인지 여전히 멍한 얼굴로 처참한 넝마가 된 나를 바라보았다.

혼이 나간 얼굴이었다.

처음 보는 내 죽음이었으니, 제정신인 편이 이상한 것이긴 했다. 더욱이, 비로소 이뤄냈다고 생각했던, 완벽히 행복한 나날에서.

절망이 너무 깊어지면, 절망조차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하던가. 감정이 아예 사라진 것 같은 얼굴에서, 눈물 한 자락이 흘러내렸다.

“……내가…….”

“……유지한 씨……?”

“……뭘…… 잘못했지……?”

대체, 이번에는 뭘 잘못한 거지?

나는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 대체 왜…….

자신이 죽는 것이라면 차라리 이렇게 망가지지 않았겠지만, 나의 죽음을 목도한 남자는 그대로 처참하게 망가졌다. 그 눈물을 보며, 내 기분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러게.’

이번에는 나도 의문이었다.

이번에 유지한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도를 넘는 욕심을 부리지도 않았고, 위기도 누군가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이겨냈으며, 오로지 제 손으로 행복을 가꾸었다.

모든 인간이 그렇듯이.

그런데 왜 이리도 세계는 유지한에게 잔인한 것인가.

이건 도를 넘어도 너무 넘었다. 아무리 세계는 본래 공평하지 않다지만, 이건 너무나 부조리했다.

이 세계가 다른 세계에서 온 ‘나’를 이물질로 보고 치워 버린 것인가?

아니 그것도 이치에 맞지 않았다. 그러면 진작 징조가 있었어야 했고, 세계에 섞이지 않은 낌새가 보였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영혼 자체가 세계에 애정을 받는 영혼이었기에 이 세계에서도 완벽하게 적응을 했다. 마치 원래의 세계에 사는 것처럼.

망할 놈이 짜 놓은 것도 있긴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 망할 놈조차 세계에 완벽히 자신을 안착시키는 것은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건 오로지 자신의 능력이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지난 것들은 분명 납득할 수 있는 근거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런 근거도, 맥락도 없었다.

그것을 세계도 느낀 것일까.

[빌어먹을.]

한발 늦게 상황을 알아챈 망할 놈이 욕지거리를 시전했다. 그 진언에 유지한이 천천히 시선을 올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망할 놈이 어떤 수를 쓰기도 전에, 이건 자신이 바랬던 시나리오가 아닌 것인지 세계가 스스로 세계를 되돌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양심은 있군.]

이를 갈고 있지만, 그래도 안심한 듯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시야가 점멸됐다. 그리고 다시 시야를 되찾았을 때.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피가 낭자했던 풍경 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

트럭도 사라지고, 트럭으로 인해 파손된 건물도 깨끗이 돌아왔다. 지한에게 집중되어 있던 사람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오로지 ‘나의 죽음’만 리셋이 된 것이다.

세계가 나의 죽음을 용납지 못한다는 듯.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차별인가. 싶었지만 그래도 유지한은 그런 차별이 미치도록 기꺼운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털썩―!

물론 힘이 풀렸던 다리가 제대로 서지를 못해 잠시 휘청거렸다 다시 일어났지만 그런 통증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당장,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 것이 있었으니까.

유지한이 기대를 머금은 눈으로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유지한이 고개를 들자. 그의 눈앞에는…….

“……윤지…….”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모든 걸 기억해낸 내가 서 있었다.

* * *

“미쳤어? 돌았어?! 아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질문이되, 질문이 아니었다.

쉼 없이 몰아치는 비난에, 유지한은 혼이 나간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방금 전, 생각지도 못한 기적을 맛보고 환호하던 남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살아생전, 이런 비난을 받아 볼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까.

아니, 어떻게 저걸 한 번도 예상을 안 한 거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머리통이다. 한두 번 벌인 것도 아니고, 그렇게 많이 뒤틀었으면 이런 변수가 생길 수 있는 것은 솔직히 예견 가능한 일이지 않는가.

심지어 세계는 몇 번이고 ‘나’를 건들며, 네 불행을 재촉했는데 말이다.

“그딴 짓을 해놓고 입은 지금 꿰매놨어?! 말을 해! 벙어리야?! 돌은 짓을 했으면 그만한 자신감이 있었을 거 아냐!?”

그리고 절망에 빠진 그런 얼굴조차 열이 오르게 하는 한 요소가 되는 듯해 쉴 틈 없이 나는 무섭게 몰아붙였다.

솔직히 나는 매우 정당하게 화를 내고 있었기에 내 입에서 쏟아지는 그 모든 비난들이 심하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약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 변명할 생각도 없다?”

“…….”

결국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내게 변명조차 한 번 하지 못한 유지한의 모습에 실망하고 분노한 내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리다 그대로 가방을 집어 들고 집을 나서려 했다.

띠리링―!

덜컥―!

“말했으면…… 뭐가 달라졌을까?”

“……뭐?”

그리고 문이 열리는 그 순간. 문이 열리는 것처럼, 굳게 닫혀 있던 유지한도 입을 열었다.

“말한다 해도, 너는 분명 내 행동을 이해하지도, 용납하지도 못했을 거고. 용서하지도 않았을 거잖아. 그걸 아는데…… 어떻게 말을 할 수 있었겠어?”

“…….”

“나한테는 그런 방법밖에 없었는데…… 너와 함께할 방법이 그것뿐이었는데…….”

뚫린 입이라고 있는 대로 지껄이는 헛소리였다. 심정은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심정과 이놈이 한 행동은 매우 별개의 일이었다. 그리고 저걸 변명이라고 내뱉는 것 자체에서 글렀다. 그것도 제대로 빡쳐 있는 내게.

아주 기름을 제대로 붓는 행태에, 역시나 ‘나’는 이번에는 분노가 아닌. 그보다 더 업그레이드 버전인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그래서, 그게 내 모든 걸. 내가 이뤄왔던 모든 삶을 송두리째 바꾼 이유라고?”

“……난…….”

“야. 이 빌어먹을 새끼야. 네 말대로 나는 절대로 너를 용서할 생각이 없어.”

어쩜 저리 멍청할 수 있을까.

진심으로 생각했다.

나를, 내 성격을 그리 잘 안다고 하면서, 저 순간에 저렇게 말하면 분노하다 못해 아예 혐오가 싹틀 나를 정말 몰랐던 것인지.

나는 짧게 혀를 찼다.

그 순간 아니나 다를까. 혐오가 가득한 얼굴로 ‘나’는 더없이 차갑게 분노했다.

“네가 저지른 짓에 대해 한 번이라도 내게 동의를 구한 적이 있나? 내 의사가 한 번이라도 섞인 게 있어? 단 한 번도, 내 의사 한 번을 묻지 않은 채 네 멋대로 저지른 일에서. 내가. 왜. 너를 이해하고. 용납해 줘야 하는데?”

당연한 것이었다.

단순히 아. 나를 사랑해서 그런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인가. 이게.

굳이 내가 아니라도 어떤 여자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상에 어떤 여자가 이런 걸 이해해 줄 수 있을까.

물론 자신의 얘기가 아니라면 해 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당사자 생각 따위는 1도 안 하는 뭣 같은 빌런도 있겠지만. 장담컨대, 본인의 이야기가 되면 100이면 100. 난리가 날 것이다.

얼마나 대단한 대의를 품고 한 행동이든, 자신의 피 한 방울도 손해 보는 것을 아까워하는 게 사람이다. 그런데, 유지한의 저 짓거리로 ‘내’가 잃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아니, 너무나 많다 수준일까. 아예 인생 자체를 송두리째 빼앗긴 것과 같았다. 가족도, 친구도, 내가 그동안 쌓아온 경력도. 전부.

내가 살아가며 이끌어왔던 모든 걸 빼앗은 것이다. 그것도 의사조차 묻지 않고, 멋대로. 오로지 자신의 욕심 하나를 채우겠답시고.

세상 어떤 사람이 이걸 쉽사리 이해해 줄 수 있을까.

솔직히 지금 이걸 드라마 시청하듯 보고 있는 내 머리통도 이해를 해 줄 수는 없었다. 나도 그럴진대, 실제로 겪고 있는 인간은 오죽할까.

“야. 이 개새끼야. 그걸 지금 할 말이라고…… 억―!”

뒷목을 잡는 게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솔직히 막말로 지금 당장 ‘내’가 저걸 죽이고 있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생각보다 저 ‘내’가 유지한을 꽤 많이 사랑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놀라는 중이다.

막말로 죽음을 불사하는 사랑이었어도 저런 병크를 터뜨리면 내 성격상 그대로 바로 모든 정이 다 떨어지는 편인데.

새삼 사랑의 위대함이라는 것에 감탄했다.

‘……쩌네.’

그래. 고작 그까짓 게 뭐라고. 대단하긴 하구나.

물론 그 감탄은. 아니나 다를까 이어지는 유지한의 병크에 단번에 쏙 들어갔다.

“……어쩔 수 없었어?”

그 말에 ‘나’는 보란 듯 코웃음을 쳤다.

“개소리 마.”

‘나’는 일부만 기억하는 게 아니라 그와 함께했던 모든 나날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 있게 그를 비난할 수 있었다.

그 비난은 정당했다.

“너는 언제든, 어느 때든 내게 말할 기회가 있었고. 하다못해, 내게 용서를 구할 시간 역시 넘치도록 있었어―!!”

‘나’는 언제 어느 때건, 유지한을 사랑했고, 무심한 태도를 취했지만 언제나 항상. 유지한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뿐일까.

유지한이 드러내곤 했던 조금의 감정도 놓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모르는 척해 주었다.

그건 내 나름의 배려이기도 했다. 굳이 말하지 않는 것을 캐물을 필요가 없기 때문도 있었지만, 직접 말해 주길 기다린 것이다.

물론 시무룩한 얼굴이나, 무언가 물어볼 수 있는 종류의 문제면 가차 없이 물었지만, 한없이 불안해하거나 서러워하거나 외로워하는 것 같은 류는 쉽사리 물을 수 없었으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혼자 해결해야 하는 문제면 굳이 내가 먼저 꺼내지 않는 것이 맞다 생각했다.

그래서 묻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네가 불안해하는 나날이 길어지며, 계속 기다렸다. 언젠가. 네가 네 불안을 말해 주기를. 내게 의지해 주기를. 그렇게 나는 계속 기다리며 기회를 주었고, 너는 보란 듯 그 기회를 전부 발로 까버렸다.

그런 내게 어쩔 수 없다고 말하다니.

나는 처음부터 네게 왜 그런 짓을 했냐고 물은 것이 아니었다. 어째서 ‘내게’ 한마디 말 한 마디 없이. 이런 일들을 저질렀냐고 물은 것이지.

애초에 핀트조차 맞지 않았지만, 그래도 전자를 이야기할 것이었으면 너는 내가 납득할 수 있는 답을 내놓았어야 했다.

“그 많은 시간 동안! 너 혼자 불안해하고! 상처받고! 서러워하던 그 많은 시간 동안!”

“……!”

“네가 내게 말을 할 조금의 시간은 생각도 하지 않은 거지. 내 의사는 생각지도 않았을 테니까!!”

장렬하게 실패했지만.

“그런데, 뭐? 어쩔 수 없었어……?”

“……윤지호…….”

“정말 내 생에 다시 없을 개소리였어.”

내가 악귀와도 같은 얼굴로 분노를 토했다. 단언컨대. 살아서 지금까지 저렇게 분노해 본 적은 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 분노 앞에, 유지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고작, 너 따위를 위해서. 네 욕심만을 위해서. 내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겼는데…… 뭐 어쩔 수가 없어?”

“…….”

“말은 참 쉬워. 그렇지?”

그리고 그런 모습에 ‘나’는 더 기분이 시궁창에 처박혔고.

“참 좆같다. 너.”

그리고 그런 너를 사랑한 내가.

……라는 뒷말이 함축된 것 같은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그대로 그 집을 나섰다.

“……어디가? 갈 데도 없……….”

그 와중에 유지한이 현재의 내 현실에 대해 콕 집어 말하는 것에 대해.

너무나 나답게.

“하. 네가 다 뺏어갔다고 해서, 내가 너 없이 못사는 병신인 것 같아?”

유지한의 가슴에 비수를 꽂고.

‘이야. 끝내주네.’

거참 끝내주는 전개였다.

* * *

‘팝콘 씹어야 되는 거 아닌가?’

진심으로 팝콘이 필요했다.

맥주랑 의자도.

진짜 그냥 볼 수 없는 개막장이었다.

“와. 너 진짜 최고네.”

낯짝도 두껍고.

보란 듯 빈정거렸지만, 유지한은 굴하지 않았다.

하긴. 이 정도에 굴할 거였으면 애초에 그 낯짝으로 여길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름 공인이면서 얼굴 팔리는 것도 신경 안…… 아. 일부러구나. 내가 대놓고 화를 내지 못할 테니까.”

‘내’가 차갑게 조소했다.

지금 있는 곳은 호텔 로비였다. 그것도 체인으로 유명한 4성급 호텔 로비.

이 세계에서 원래 지내던 집은 유지한과 결혼을 약속하며 처분했기 때문에 따로 거주처가 없었다. 그랬기에 나갈 때 유지한이 갈 데도 없지 않냐고 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역시 나였고, 특별한 능력도, 가족도. 무엇도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 나름 수중에 돈은 충분했다. 아. 물론. 나오자마자 손에 끼고 있던 프러포즈 반지를 전당포에 팔아 얻은 돈도 아주 넉넉했고.

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아주 엿 같지만. 다이아몬드로 된 줄 알았던 반지가 A급 마석에 미스릴로 제작된 아이템 님이셨던 덕분에 돈은 향후 몇 년간은 호텔을 전전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힘 앞에서 개인 정보 보호란 종이짝보다 얇아지기 마련이기에, 유지한은 손쉽게 ‘내’가 거주하는 곳을 찾아내었다.

그 정도는 당연히 예상했지만, 이렇게 낯짝이 두껍다 못해 뻔뻔한 짓을 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한 듯 ‘내’가 서릿발처럼 차가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이제는 거의 경멸과 비슷한 눈초리였다.

과연 이 커플이 어떤 파국을 맞이할지. 흥미진진한 눈으로 지켜보는데…….

털썩―!

“……!”

유지한이 무릎을 꿇고, ‘내’ 바짓자락을 붙잡아왔다.

자존심 같은 건 일찌감치 없어지고도 남았기에 무릎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듯 쉽사리 꿇렸다. 문제가 있다면 저 무릎이 얼마나 값싼지 ‘나’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차디찬 시선이 제게 꽂히는 것을 느끼며 유지한이 입을 열었다.

“……알아.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아니. 너는 모른다.

모르기에 이리 뻔뻔히 내 앞에 얼굴을 드러내고, 고작 저 값싼 무릎을 바친 것이다.

제 무릎의 가치가 얼마나 값싼지 알면서 용서를 구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냐는 ‘나’의 말에 군말 없이 바친 걸 보면 그 사실은 아주 명확했다.

‘하암.’

너무나 뻔해 하품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내가 크게 하품을 하는데, 유지한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절박해서…… 정말 이 방법밖에 생각나지 않았어…….”

“…….”

듣기만 해도 눈물이 물씬 날 것 같은, 애처로운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나’는 변함없이 차디찬 얼굴로 유지한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나’의 반응을 보며 유지한이 더욱 절박하게, 바짓자락을 붙잡고 매달려 소리쳤다.

“날 이용해. 지금은 그때와 달라. 나는 너에게 줄 수 있는 게 많아. 네가 가지고 이용할 수 있는 게 넘치도록 있어.”

“…….”

“나는 ‘유지한’이야. 네가 원한다면, 네게 이 세계를 안겨 줄 수 있어.”

“…….”

아.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구나.

제가 말하면서도 망가지고 있으면서 절박하게 매달리는 남자의 말을 들으며 나는 차분해졌다.

이 세계의 주인공은 ‘유지한’.

그건 결코 변하지 않을 원제와 같은 것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을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이용할 줄이야. 이렇게나 잘 알고 있었으면서 왜 자신을 위해서는 이용해먹지 않은 것인지.

아. 이게 너의 기준에서는 아주 유용하게 써먹은 것인가.

어쨌든 비소가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건 결국 같은 존재인 ‘나’도 마찬가지였는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런 ‘나’를 보며 그의 얼굴을 완전히 절망에 물들었다. 절망 어린 눈에서 눈물이 한 자락 떨어져 내리며, 마침내. 유지한이 완전히 부서졌다.

“……나를 이용해 줘. 제발.”

“…….”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어. 개처럼 기라고 해도 할 수 있고, 네가 죽이라는 모든 것을. 누구라도 죽일 수도 있어. 널 위해 뭐든. 그게 무엇이든 안겨 줄 수 있어. 이 세계에서는 나는 그럴 수 있어. 전처럼 네게 아무것도 주지 못하지 않아. 그러니까…….”

“…….”

“제발. 이용해. 이용해 줘.”

“…….”

줄줄 새는 진심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그동안 제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는데.

‘넌, 일 안 해?’

‘……돈은 어디서 나는 거야?’

‘뭐. 내 돈 써도 상관없지만.’

그냥 흘리듯 던졌던 말.

내가 너와 영원을 함께할 생각은 없었기에. 네가 내게 온전히 종속되질 바라지 않았기에 던졌던 말.

이게 이렇게 돌아올 줄은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것들을 전부 이렇게 담아 두었을 줄은 정말 꿈에도 알지 못했다.

나는 네게 물질적으로 뭔가 받고픈 사람이 아니었기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내가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에 되레 아무것도 줄 수 있는 게 없는 남자는 제 존재 이유를 그것에서 찾고 있었다.

내가 흘리듯이 던진 말 때문에.

그리고, 지금 매달리면서. 내세우는 것이. 그동안 내게 한 번도 내세우지 못한 것들이라니. 어이가 없고. 내세우는 것이 고작 그딴 것들이라는 남자가 너무나 병신같이 가련해서. 그러면서 그런 것으로 마음 돌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렇게 비틀린 거래를 내어 놓는 남자가 진심으로 혐오스러웠다.

‘날 이용해 줘.’가, 날 버리지 말라는 말인 것을 안다. 하지만 차라리 날 버리지 말라고 했다면, 이렇게 분노를 넘어 혐오의 감정이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끝까지 ‘나’에게, 그리고 저 자신에게도 솔직하지 못한 저 머저리는 모르는 듯했지만.

덕분에 ‘나’는 완전히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하. 하하하. 아하하하하하―!”

아니. 결론이 아니었다.

“아. 정말 시원하네. 이제야 명확히 보여.”

“…….”

“고마워. 덕분에 이제야. 비로소. 처음으로. 제대로.”

“……윤…….”

“너를 버릴 수 있게 되었어.”

그동안은 타의에 의해. 혹은 감정은 남아 있지만 현실과 생각에 부딪쳐 이성적으로 결정을 내렸었다.

한 번도, 자의로. 유지한 자체에 대한 모든 감정이 사라져, 놈을 버려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나로 인해 이렇게 망가져 나까지 같은 곳으로 떨어져 주길 바라는, 빌어먹을 개새끼를 보고 있자니 비로소 확신이 들었다.

너에 대한 모든 감정을 버릴 수 있겠다는.

너에게는 더없이 잔인한 일이었겠지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내 눈앞에서 사라져. 유지한.”

“…….”

“나는 네가 가진 그 어떤 것도 가질 생각이 없어. 더럽거든.”

“……!”

“그러니 너에 대해 남아 있던 그나마 좋은 내 기억까지 전부 쓰레기통에 처박기 전에.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 마.”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너를 버렸다.

* * *

그 뒤의 인생은 역시나 ‘나’답게 탄탄대로인 인생이었다.

기본적인 능력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기에 집은 바로 회사 근처로 구하고 회사에 복귀했다. 애초에 결혼한다고 아직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복귀해도 별말은 없었다.

눈 돌아가게 바쁜 회사라 그런 거에 궁금할 틈도 없었던 덕도 있었지만. 바쁘게 돌아가는 회사에 몇 안 되는 순기능이었다.

인생에 가족도, 친구도. 이제는 유지한마저 빠졌지만 예상했던 대로 인생은 평화롭게 흘러갔다.

“……헐. 저기 봐…….”

“맞아……?”

“맞는 거 같은데…….”

“……대박…….”

물론 호텔에서 한 바보짓이 있었기에 이제는 ‘나’를 알아보는 이들이 왕왕 있었지만, 사람은 언제나 비빌 곳이 있어야 비빈다고. 서릿발처럼 차갑게 개무시를 하고 있으니 후안무치하게 ‘유지한 여친이세요?’ 하고 덤비는 미친놈은 없었다.

물론 덤볐으면 뼈도 안 남게 분쇄해 주었을 것이다. 본보기는 중요했으니까.

사람들 눈치 같은 걸 볼 리가. 남의 눈치는 보면 볼수록 호구 취급당하기 딱 좋았다. 그렇게 한번 낙인찍히면 유지한과 세트로 엮여 뭔 짓을 해도 공인이니까 네가 감내하라는, 말도 안 되는 프레임을 자신에게도 씌울 것이다.

유지한이 공인이지, 유지한 여친은 공인이 아님에도.

뭐. 그게 아니라도 사실 극대노한 상태는 여전했기에 누가 건들면 죽자고 갈아 버릴 게 분명했다.

“……씨발.”

이미 결론을 낸 것 같지만, 사실 결론이 난 건 유지한과의 관계일 뿐이었다.

상황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이 세계에서 낙동강 오리알 같은 신세였고, 내가 가진 어떤 것도 되찾지 못한 상태였다. 되찾을 방법 역시 요원하고.

웬만한 사람이었으면 그대로 미쳐버렸으리라. 그럼에도 간신히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 모든 일의 원흉은 그따위 헛소리나 하고 있다니.

빠직―

“어머. 대리님! 손이……!”

“아. 요즘 펜이 약하네요.”

“대리님 손이 더 약하신데요!”

내 손으로 부순 펜의 날카로운 부분에 그대로 손이 베여 피가 줄줄 흐르는 것을 보며 식겁하는 사람들이 나를 등 떠밀었다. 덕분에 반차를 쓰고 병원에 가서 대충 지혈과 소독을 하고 나와 카페에 늘어져 생각을 정리했다.

이 세계는 놀랍게도 자신의 원래 세계와 흡사했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게 달랐으며, 이곳의 자신에게는 중요한 것이 없었다.

“……날씨는 더럽게 좋네.”

정확히는, 모든 걸 갖다버린 지금을 기준으로 설명하자면 이 세계에서 ‘유지한’을 제외하고 ‘내’게 가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 유지한을 버렸는데 더 이상 이 세계에 있을 이유가 있나.

돌아가고 싶었다.

유지한을 제외하면 제게 가치 있는 것은 모두 다른 쪽에 있었으니까.

그리고,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면, 그도 분명…… 괜찮아지겠지. 근처에 있는 것보다 차라리 아예 다른 세계에, 원래의 자리에 돌아간다면 미련을 떨치기 더욱 쉽지 않겠는가.

결론은 참 간결하게 내려졌지만, 문제는 ‘나’는 유지한처럼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분명 세계에 사랑을 받는 영혼은 맞았지만, 그것과 힘을 가진 것은 별개였다. 세계는 힘을 가졌다고 해서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오히려 세계에 애정을 받는 이들은 특별한 힘을 받지 않고 평온하게 사랑만 받으며 살아갔다.

힘이 행복만이 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힘에는 책임과 의무 역시 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세계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덕분에 빈털터리인 현재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정화수라도 떠놓고 빌어야 되나……?

나름 그래도 예쁨받으니까 통하기만 하면 어찌저찌 협박이든 뭐든 해서 되지 않을까?

상황이 하도 막장이라 그런가 막 나가는 생각까지 좀 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나를 부르는구나.]

“……!!”

전혀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시였다.

금세 평정을 되찾고, 깨달았다. 귓가에 들린 게 아니라 머릿속에서 울려 퍼진 것이라는.

나 역시 처음 듣는 세계의 목소리에 느슨했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스템이 쓸데없는 사감이 섞인 메시지를 여러 번 보내 세계가 정말 의지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긴 했지만 그게 정말일 줄이야.

설마가 사람 잡는 진실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세계?”

[세계도 맞고, 각성자들은 시스템이라고도 부르지. 어느 쪽이든 맞는 말이란다.]

“유지한한테 개 같은 짓 한 그 ‘세계’가 맞다는 거지?”

기억을 전부 가지고 있었기에 세계가 무슨 짓을 했는지 역시 전부 기억하고 있어, 세계에게도 썩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내’가 삐딱하게 묻자, 세계가 침착하게 답을 내주었다.

[……그것 역시. 나는 네 곁에 유지한이 있지 않길 바랐으니까.]

“어째서?”

[유지한은 네게 이로운 자가 아니니까. 그는 주인공인 만큼 많은 운명과 의무에 얽매여 있지. 그만큼 그와 엮이면 너 역시 거기에 휘말릴 테니까.]

너무나 당연하게 전해오는 애정에 좀 놀라웠다. 저렇게 대놓고 편애할 줄이야.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유지한을 좋아하지 않는 티가 아주 풀풀 퍼졌다. 저럴 거면 대체 왜 유지한을 선택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럼 유지한을 왜 내버려 뒀어. 아니 막긴 했지. 그냥 처음부터 틈을 주지 말지 그랬어.”

처음으로, 원망이란 걸 쏟아내 봤다. 유일하게 제대로 원망을 쏟아낼 수 있는 상대였으니까.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더라면…….”

처음부터, 시작조차 불가능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 아닌가.

왜 그런 틈을 줘서…….

결국 사랑을 한 건 나였기에 내가 할 말이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그런 원망을 한 번쯤은 해 보고 싶었다. 누구에게도, 원망을 하지 못했으니까.

[유지한은 넘치도록 희생했고, 많은 것을 해 주었지. 애정이 있고 없고를 떠나 그 희생과 노고는 감사를 받기 충분했으나,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그에게 한없이 가치 없거나, 그가 아닌 나를 위해서였지.]

“……그래서, 한 번 마음이 약해졌다?”

[마음은 약해졌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틈을 내어주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이미 반신에 다다른 그였기에 내가 막을 틈을 놓친 거지.]

그랬기에 정말 세계 자신으로서도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고, 세계가 설명했다. 세계의 말은 정당했고, 납득할 만한 것이었기에 원망을 더 할 수도 있었지만 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때문에, 원망보다는 다른 말을 내뱉었다.

“나는 돌아갈 수 있어?”

그에 세계가 답했다.

[네가 바란다면.]

무엇이든.

자연스럽게 내려오는 애정에 ‘내’가 답했다.

“돌려 보내 줘.”

그 말에 기꺼이 세계가 응했다.

“……좋네. 사랑받는다는 거.”

눈앞에 세계가 아스라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세계가 ‘나’를 위해 직접 움직여 준 것이다. 그것들을 보며,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 이제 끝이구나.

드디어…… 이 빌어먹을 연쇄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겠구나.

이것으로 됐다 여겼다. 이제는 세계가 절대 유지한에게 틈을 내어주지 않을 것이고,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갈 테니까.

미련도, 결국 이루지 못한 사랑도, 상처도, 아련함도 전부 희미해질 것이다.

언젠간. 반드시.

하지만 그것도 산산조각으로 깨어졌다.

파지직―!

[빌어먹을 유지한.]

“……어딜 가.”

“……!!”

빌어먹을 초월자로 인해.

“……뭐 하는 거야. 미친 새끼야.”

육성으로 튀어나오는 쌍욕에도 유지한은 무심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처음이었다. 유지한이 저런 차가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는 것은.

유지한이 나를 저렇게 내려다볼 수도 있구나. 가능하다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놀랍고 새로웠다. 물론 그가 저지른 짓과 비교하자면 새 발의 피이긴 했지만.

세계가 직접, 나를 위해 움직여 준 것이다. 세계가 직접 주도한 움직임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세계가 그랬든, 누가 그랬든.

주체가 누구든, 그런 건 조금도 상관없다는 듯 그는 너무나 완벽하게 세계의 뒤틀림을 베어냈다. 그는 이 세계 한정으로. 정말 완벽한 먼치킨이었다.

구원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세계를 구하고 얻은 보상으로 세계에 간섭할 권능을 얻게 되긴 했지만 이 정도로 완벽하게 세계의 의지를 자를 수 있을 줄은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기겁을 하는 나를 보면서도, 그런 모든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 유지한이 말했다.

“정말 나를 버렸네. 네가.”

“…….”

“하긴. 넌 나랑 달라도 너무 다르지. 나는 그게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것인데… 너는 그게 세상에서 제일 쉬우니까.”

자조적인 미소에서 나오는 원망과 소리 없는 울음소리 같은 비명을 들으며 ‘나’는 머리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순간 정신이 확 들었다.

“안 돼. 못 보내. 네가 뭐라고 해도, 보내 줄 수 있을 거 같아?”

“…….”

비로소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차라리 네 뇌를 주물러서라도…… 껍데기라도 가질 거야.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포기란 걸 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래? 윤지호?”

“…….”

“나도 자신이 없는데, 너는 내가 그게 가능할 것 같아?”

“…….”

“왜…… 왜…… 다 쉬웠는데…… 너만…… 너만. 이렇게…….”

아아. 이 남자를 망친 건 나다.

자신을 버리고 아예 떠나려고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느낀 배신감과 슬픔. 분노.

그 모든 것이 점철되어, 고통으로 얼룩진 얼굴을 하고 있음에도 죽인다고 말도 감히 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끝까지 포기조차 하지 못해, 이제는 할 용기조차 없어 ‘내’게 물어오는 남자는 이미 혼자서 돌아갈 힘조차 없었다.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망가져 있었다.

그리고, 그를 그렇게 만든 건. 결국 나였다.

누구의 개입 없이도, 더없이 단호하게 너를 버릴 수 있는 나.

그 순간 처절하게 깨달았다. 만약 원래 세계에 돌아간다 하여도, 이제는 자신의 생각대로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갈 수 없다는 것을. 제자리로 돌아가는 건 나 하나였다.

정말 좆같은 현실이었다.

하지만 가장 열 받는 건, 그딴 쓰레기 같은 짓을 벌였음에도 나 혼자만 제자리로 돌아가는 결과만큼은 바라지 않는 ‘나’였다.

그놈의 사랑이란 게 대체 뭔지.

사랑이라는 게 정말 다 이런 것인지.

버렸다고 생각했던 사랑이 갑자기 샘솟아 나와 핑계와 이유를 만들어냈다. 그래도 아직 너에 대한 사랑이 1%라도 남아 있어서.

네게 분노하고 여전히 너의 모든 행각이 치를 떨도록 싫었지만 그럼에도 네가 망가지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하.”

나라는 구제불능에 ‘나’는 조소했다. 결국 내가 유지한을 욕할 처지가 아니었다.

어찌보면 참 도긴개긴. 서로 각자의 욕심으로 바라는 것이 있었고, 그것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씁쓸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왜 우리는, 이리도 평범하게 행복을 함께할 수 없는 것인지.

뭐. 어차피 다 지나온 것.

그것을 굳이 뒤돌아보며 오래도록 사색에 빠지는 취미는 없었기에 금세 맑은 정신으로 돌아와 유지한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마음속으로 어떻게 할지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거리낌 따윈 없었다. 이미 너는 몇 번이고, 내 의사 없이 모든 것을 진행했는데 나라고 그러지 말란 법이 어디 있는가. 오는 게 있으면 주는 것 역시 있어야 하는 법이다.

“……윤지호……?”

결심이 섰기에 망설임은 없었다.

그랬기에 거리낌 없이 시원하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주는 마지막 선물이기도 했다. 이번 생에 마지막으로 주는 빅엿이기도 했고.

“……왜…….”

갑작스러운 내 미소에 당황한 유지한이 멈칫했다. 그리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나는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유지한의 손에 들려 있는 세이라를 잡고 단번에.

푸욱―

“……!!!”

나의 심장을 향해.

세이라는 계약자가 아니면 쥘 수도, 들 수도 없는 에고소드였다. 내가 유지한의 손을 빌어 움직인다고 해도 움직일 수 있는 검이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 세이라가 발동된 상태에선.

그렇기에 유지한이 방심을 한 것이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믿었다. 자신은 세이라를 쥘 수 있다고. 그래도 꼴에, 세계의 애정을 받는 몸이었으니.

아니나 다를까.

【세이라의 정식 사용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세이라의 사용 조건을 일부 충족하였습니다.】

【세이라가 임시적으로 사용을 승인합니다.】

훌륭하게, 예상대로 세이라는 제 손에 따라 움직여주었다. 이리도 쉽게 내 뜻대로 움직여 내 심장에 박혀주었으니.

“……와…… 진짜 더럽게 아프네…….”

인생사. 내 심장에 내 스스로 칼을 꽂을 것이라고는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생전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일을 저지르게 만들어 주는 빌어먹을 유지한에게 심심한 찬사를 보내며 울컥― 피를 쏟아내었다.

“……욱―!”

“윤지호……!!!”

입에서 피가 쏟아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유지한이 황급히 나를 붙잡았다.

“어째서……!”

어째서 이런 짓을 한 것이냐고. 믿을 수 없다는 눈이 처절하게 떨렸다.

그걸 보며 솔직히 웃음이 좀 났다. 상황에 맞지 않게 좀 짓궂게 놀리고 싶은 마음이 싹텄다.

왜. 죽는 것도 내 마음대로 못하냐고.

하지만 지금 그 말은 농담이 아닌 진담으로 들릴 것이었기에, 그 말 대신. 미리 생각해 둔 대사를 꺼내기로 했다.

“너는 스스로가 이미 대단히 잔인하고 이기적으로 변했다고 생각하는데. 너는 일단 천성이 그래도 착해빠져서.”

“……너…….”

이미 너는 흑화하다 못해 밑바닥까지 떨어져, 스스로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무자비하다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내 입장에서는 코웃음만 나는 개소리였다. 결국 천성은 여전히 착해빠져서 이 정도밖에 못 하는 머저리 주제에.

“미안한데.”

“…….”

“내가 너보다 몇 수 위야.”

너 따위가 나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진짜 이기적이고 무자비한 건, 나처럼 천성 자체가 쌍년인 사람을을 말하는 것이다. 하고자 할 생각을 안 해서 그렇지, 하고자 한다면 너 따위가 나한테 가당키나 할 것 같은가.

듣기만 해도 배가 찢어지게 웃을 수 있는 쌉소리였다.

“지금까지 네 뜻대로 했으니, 이번 마지막은, 내 마지막을, 내가 한 번쯤은 정해 봐야 하지 않겠어? 졸라 좆같지만.”

빈정거리는 내 미소에 유지한이 웃었다.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하. 정말 수준이 다르네.”

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유지한의 눈물을 느끼며 나는 썅년답게 다시 유지한에게 족쇄를 걸었다.

정말 네가 포기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어디…… 한번 제대로 해 봐. 다음에는.”

“…….”

“……다음에는 될지 누가 알아?”

네가 정말로 포기할 수 없는 핑계를 내가 만들어 주기 위해.

그렇게 절망적이고 지옥 같은 희망을 안겨주며 나는 보란 듯 미소를 지어주었다.

“물론 이번에 다시 돌아가면 이번보다 더 쓰레기 같겠지. 지금까지의 뒤틀림도 있었으니 아마 지금보다 더 지랄 맞을 거야. 뭐. 일단 되돌리는 것부터 몇 배로, 더 힘들겠지만. 근데…….”

“…….”

“고작, 그 정도도 못하면서…… 감히 내 곁에 있을 수 있다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승리에 도취된 미소를 한껏 지었다.

네가 바라는 대로, 반드시 망막에 새기라고.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 아니라도, 마지막에 저 녀석의 망막에 비치는 내가 초라한 꼴인 것은 죽어도 싫어서. 그런 내 미소에, 유지한이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하. 넌 진짜…….”

“뭐.”

내가 이런 년인 거 이제 알았어?

삐딱하게 답을 해 주자, 유지한이 정말 너답다는 듯 눈물이 줄줄 흐르면서도 기쁜 미소를 지었다.

“……네가 허락한 거야. 이번엔.”

그 와중에, 내게 허락을 받았다는 것 하나에 다시 희망을 품는 어리석은 남자를 보며, 나는 진심으로 답을 해주었다.

“그래. 어디 한번 최선을 다해 봐.”

네 구원을 위해서.

누군가를 구원하는 건 이제 토할 만큼 질리지 않았나.

이번에는 좀 스스로를 구원해 보길.

병신같이 계속 실패만 하지 말고.

뭐. 이번에는.

“……나중에 봐. 윤지호.”

내가 널 구원할 것이지만.

네가 못하니 내가 해야지 별수 있나.

물론 그건 네가 바라는 방식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그래.”

천천히 눈이 감겼다. 그게 이 생의 마지막이었다.

“세계님. 들었지?”

그리고 다시 세계의 품 안에서 ‘나’는 다시 눈을 떴다.

[진심이냐.]

내 물음에, 이제는 존재를 숨길 생각도 없는 세계가 되물었다. 그에 나는 기꺼이 답을 내주었다.

“어. 이대로 병신같이 휘둘리다 끝나기에는 태산 같은 내 자존심이 용납을 못해서.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 의지로. 다시. 시작할 거야.”

[……결국 유지한에게 다시 휘둘리게 될 터인데도?]

어차피 저 세계는 유지한이 주인공이었으니, 주인공 주체로 돌아가는 세계에서 결국 ‘나’는 다시 휘둘릴 수밖에 없다.

“설마.”

그리고 ‘나’는 당연히 그럴 생각이 없었다.

“유지한이 바라는 의지를 들어주되, 그 주인공 나 줘. 내가 할래. 힘도. 이번의 주체는 나야.”

[……뭐?]

“지금까지는 열심히 휘둘려줬으니까 이번에는 내가 휘두를 거야. 갖다버리더라도 신나게 한번 휘두르고 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아.”

당돌한 내 대답에, 세계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내. 내가 바라는 답을 내주었다.

[그래. 네 뜻대로.]

그 말과 동시에 세계가 나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며, 나는 잊지 않고 내 스토커를 향해 말했다.

“아. 이건 당신한테도 해당사항이야. 스토커님.”

당신도 그냥 멀리서 지켜보긴 질렸잖아?

그에 나의 고매하신 스토커. 나의 ‘성위’가 미소지었다.

어련할까. 나의 윤지호.

그리고 유지한은 내 의지대로 세계를 재창조했다. 저번의 실패를 발판삼아 이번에는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지어 나와 그의 세계를 연결하는 방식을 택했다.

자신의 어리석고 병신같은 건 전부 지우고, 오로지 좋은 면만. 내가 사랑하는 면만 그려서.

그리고 그 소설을 매개로 내게 사랑받는 자신이 되기 위해 자신의 세계를 꾸미고 재창조했다. 재창조의 대가를 그의 어머니. 이화연이 모두 짊어진 걸 꿈에도 모른 채.

* * *

그렇게 모든 진실을 알게 된 내 감상은 딱 하나였다.

“……졸라 개막장이네.”

진실은 너무나 허무하고, 복잡하면서 쓸데없이 스케일만 큰…… 매우 병신 같은 이야기였다.

시시하기 짝이 없으면서도, 스케일이 하도 커 블록버스터 뺨치게 된 이 망한 이야기의 전말을 엿본 내 감상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낼 수가 없었다. 뭐라 정의할 수 없었으니까.

“나 참. 진짜 삽질을 몇 포대로…….”

유지한은 멍청이 같았고. 나는 거기에 전염이라도 된 듯, 같이 멍청이가 되는 길을 기꺼이 선택했다.

그 아들의 바보짓을, 오로지 아들의 행복을 위해 그의 어머니는 기꺼이 제 모든 것을 내놓아 대가를 짊어졌으며.

그리고…….

포옥―

[나는 기회를 잡았지.]

“그치. 내 성위님이 젤 성공했네.”

이 새끼가 젤 승리자였다. 계속 엿보기만 하다 단 한 번. 대가를 치르고 바로 기회를 잡은 승리자.

망할 스토커 자식.

[……나는…….]

끌어안은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에 비하면 내가 아주 보잘것없는 인간인데도, 내가 마치 자신의 신이라도 되는 듯.

제일 이해할 수 없는 건 사실 이 자식이긴 했다. 그냥 지켜보기만 한 것뿐이면서 왜 이리도 절절한지.

“어. 말 안 해도 돼. 괘씸하긴 하지만, 네겐 감사하고 있으니까.”

주축을 나로 바꾸기로 했다지만 정작 힘을 주는 건 꺼려했다. 세계는 내게 책임과 의무를 주고 싶지 않아 했으니까.

그런 세계를 대신해 이 남자가 내게 전부를 주었다. 책임과 의무는 전혀 없이, 오로지 특별함만. 어떠한 대가도 없이. 내가 맘대로 활개를 칠 수 있게.

세계가 그에게 유달리 약한 이유 중 하나였다. 물론 다른 이유가 더 크겠지만.

“그래도 죄진 건 아는 것 같으니. 나 그거 줘.”

[……뭘?]

“너.”

그걸로 없는 셈 쳐 줄게.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지?

짓궂게 미소를 지어 보이자, 이매망량이 황당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다 이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발칙하고 사랑스러운 윤지호 같으니.]

그다운 긍정의 말. 그와 함께 입술에 따뜻한 감촉이 내려앉았다. 가볍게 맞닿는 입술과 함께 그의 형체가 빛가루처럼 사라졌다.

세계가 납득하는 개연성을 모두 소진했기에.

그가 남긴 가벼운 키스와, 내 당돌한 요구대로 준 선물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수백 개의 가면(S)이 최종진화를 마칩니다.】

【거짓된 가면이 깨어지며, 감춰졌던 진실된 모습을 되찾습니다.】

【‘이매망량의 주인’ 타이틀이 거짓된 이름을 벗습니다.】

【‘세계의 시초의 주인’ 타이틀이 자신의 주인에게 진실된 이름을 드러냅니다.】

【‘이매망량’ 진실의 이름. ‘세계의 시초’가 당신을 향해 미소 짓습니다.】

“좋아. 가 볼까.”

이제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을 처리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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