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권-24장. 나를 위해, 제 전부를 내던진 사람이 있었다.(2) (26/30)

목차

24장. 나를 위해, 제 전부를 내던진 사람이 있었다.(2)

25장. 너를 어쩌면 좋을까.

26장. 구원.

에필로그

외전. 부모로서 자식을 위해.

24장. 나를 위해, 제 전부를 내던진 사람이 있었다.(2)

【성기사가 한계를 넘고자 합니다.】

【세계를 향해 성기사가 자신의 한계를 넘기 위해 봉인된 스킬 해제를 요구합니다.】

고오오오―

“……흠…….”

루이스의 주변으로 심상치 않은 마력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황금색으로 변한 하늘과, 머리색이 희게 변하는 루이스를 보며 밀리언은 루이스가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챘다.

어느 날, 별로 비밀이랄 것도 없이 자신의 성좌가 준 힌트로 유추해 낸, 자신이 가진 최고의 스킬을.

자칫 잘못하면 발동하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최고이자, 최악의 스킬을 지금.

벽조차 넘지 못한 상태로 시행하려 하는 것이었다.

“……미친놈이.”

대체 이 전투가 뭐라고 기꺼이 제 전부를 던진 미친놈에게 밀리언은 이를 갈며 찬사를 건넸다. 빌어먹지만, 멋있고. 부러운 새끼였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세계가 응답했다.

【아득한 적 앞에 세계가 성기사의 요구를 일시적으로 허용합니다.】

【성기사가 일시적으로 계단을 밟습니다.】

【일시적으로 ‘성기사’에서, ‘신의 심판자’로 단계를 오릅니다.】

【‘신의 심판자’가 고유 스킬 ‘성좌의 강림(SS)’을 발동합니다.】

【성좌가 계약자의 부름에 즐거운 마음으로 응합니다.】

쿠오오오!! 콰과과광―!

“……악―!!”

어마어마한 마력의 방출로 인해, 카밀라가 그대로 튕겨져 나갔다.

날뛰던 마력이 난폭하긴 했지만, 그래도 성기사의 마력인 덕인지. 정신을 차린 카밀라는 얌전히 자신을 받으려는 밀리언에게 안겼다. 밀리언에게 안기자마자, 카밀라가 황급히 고개를 들어 자신을 깨운 말도 안 되는 광경에 집중했다.

“헐. 저게 뭐야?”

“루이스 오르비앙의 미친 짓.”

“바른 생활 꼰대의 표본이……?”

“원래 그런 것들 돌면 더 무서운 법이야.”

밀리언의 빈정거리는 답변이 끝남과 동시에,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파우스트가 서둘러 움직였다.

“아무리 나라도 이걸 즐겁게 즐기긴 힘들 것 같군.”

왠지 불길해서 말이야.

천재답게, 감마저 빨랐다.

신속으로 튀어 올라가 루이스를 향해 치켜든 파우스트의 검에는 검은 마력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걸 찰나의 순간에 바로 본 밀리언이 재빨리 스킬을 시전했다.

【빛의 술사가 ‘새벽의 환희(A)’를 발동합니다.】

새벽의 환희.

순간적으로 새벽의 눈부신 빛을 끌어와 상대를 향해 꽂는 아주 단순한 스킬이었다.

하지만.

“……으악―! 이, 빌어…… 먹을―!”

암 속성을 다루는 자에게는 아주 치명적인 스킬이었다.

새벽의 가장 눈부신 빛은 최상의 신성과도 같다고 하니까.

“후. 아슬아슬했다.”

밀리언 나름대로 루이스에게 보내는 존중이자, 선물이었다.

그건 아주 완벽한 선물이었다. 큰 타격을 주진 못했지만, 그래도 예상치 못한 타격에 그가 당황하며 몸을 추스르는 사이.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까.

【성좌가 세계에 강림합니다.】

“아. 이거 참. 내 계약자가 내게 뜻하지 않은 선물을 주는군.”

“…….”

“아주 마음에 들어.”

루이스의 얼굴을 하고, 전혀 다른 표정을 지으며 그가 즐거운 미소를 그렸다.

“강자와의 싸움을 즐기는 미친놈이 강림하셨군.”

“아. 걱정 말게. 파우스트. 절대 살살 하지 않을 테니까.”

네놈을 언젠가 꼭 처리하고 싶었거든.

정의로운 대사이나 비틀린 미소.

그에 그 자리에 있는 이들은, 뒤늦게나마 루이스의 성좌를 떠올리고 있었다.

“오라. 뒤랑달.”

【주인과 성장해, 자아를 가진 검. ‘뒤랑달’이 주인의 부름에 응합니다.】

뒤랑달의 주인.

최초의 팔라딘의 명성을 떨친 자.

팔라딘. 롤랑.

“아아. 그래. 네놈은 악마와 계약했다는 것만으로도 항상 날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지.”

“그게, 내 본능이거든.”

그에게는 명예로운 이명 뒤에 다른 이명도 있었다.

“하. 이단 심문관 새끼들은 이게 문제야. 하나밖에 볼 줄을 몰라. 세월이 지나도 뇌가 굳어서 변할 줄을 모른단 말이지.”

“내 사명을 기꺼워하는 편이라서 말이야.”

이단 심문관. 롤랑이 이단을 향해 잔인하게 미소를 지었다.

* * *

솨아아악―!

검은 마력이 검의 획 대로 무자비하게 쏘아졌다.

무자비하게 쏘아진 마력이 롤랑에게 향함과 동시에 먼저 주변 대지에 쏟아졌다. 그 마력이 닿자마자 시커멓게 죽어버리는 대지를 보며 그걸 지켜보던 이들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저걸 전부 피할 수 없을뿐더러, 조금이라도 스쳤다가는 저렇게 재가 되었을 테니까.

어마어마한 위력이었다. 하지만 그걸 분명 보았을 텐데도, 롤랑은 무척이나 즐겁다는 듯 광소를 터뜨렸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지!”

오히려 고작 이 정도도 되지 않았으면 실망했을 것이라는 듯한 웃음에 파우스트가 얼굴을 와그작 구겼다.

“……빌어먹을 놈이……!”

처음으로 상대하기 싫은 티를 팍팍 내며, 몸을 뒤로 빼는 파우스트를 롤랑이 득달같이 따라잡아 뒤랑달을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최상의 성력이 날카롭게 벼려져 파우스트를 향해 뻗어 나갔다.

“……!”

그 공격에 파우스트가 황급히 몸을 뺐지만, 오른쪽 어깻죽지를 길게 베였다. 처음으로 파우스트의 얼굴에 분노가 어렸다.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전투는, 그런 엄청난 무위의 연속이었다.

“……대박.”

아무도 감히 끼어들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멀리 떨어져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어떻게 도움을 주려고 해도 지금 이 순간 그들은 방해꾼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연금술사가 ‘회복의 결계(S)’를 연성합니다.】

때문에 거리를 두었던 이로운과 말자가 있는 곳으로 합류한 그들 사이에서 연금술사가 회복 결계를 펼쳤다.

지금 저건 인간의 무위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롤랑이 사용하고 있는 몸은 인간인 루이스의 몸. 롤랑의 힘을 전부 감당할 수 있을 리 없다는 것은 지나가는 머저리도 알 수 있을 만큼 당연한 이야기였다.

아직 진짜 2차 성장을 하지 않은 채로는 더더욱.

그리고 무엇보다 저런 사기 스킬이 타임 리미트가 없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것을 유추해 보았을 때, 아마 저 전투는 오래 이어지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루이스가 리타이어 할 테니, 그전에 조금이라도 마력과 체력을 회복해야 했다. 루이스가 빠진 자리를 채워 줄, 파우스트와 단독으로 싸워도 어느 정도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저 정령사까지도. 지금은 고양이 손이라도 필요할 때였다.

그런 일렬의 과정을 지한은 조용히 지켜보았다.

시기는 달랐지만, 이미 그는 한번 겪어 본 일이었다. 그는 이미 한 번 세계를 구한 적이 있었으니까.

상황도 아주 똑같았다. 오랜만에 다시 보는 롤랑을 보자니, 새삼 그는 자신이 아직도 이 세계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윤지호가 흔하게 보던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먼치킨을 위해 쉽게 깔아 놓은 레일 따위는 절대 아니었지만, 이건 자신을 위해 설치된 무대였다.

한계를 딛고, 정점에 서기 위한.

빌어먹을 시련이었다.

“아직 유지한은 안 움직여서 풀피잖아.”

“그러네. 근데 저건 왜 안 싸웠어?”

우리만 왜 개고생함?

밀리언이 억울하다는 듯 따졌다.

그것까지 지난 삶과 똑같아서, 지한은 그만 반사적으로 웃음을 흘릴 뻔했다. 아슬하게 웃음을 참은 지한을 대신해서 합리적인 추론을 내민 건 의외로 폭검이었다.

“빌드업 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

자신과는 다르게 농땡이는 절대 부릴 리 없다고 생각한 듯한 얼굴이었다. 뇌에서 필터 없이 튀어 나온, 생각 없이 한 말이었지만, 아무도 부정하지 못했다.

정말 빌드업인지는 몰라도, 그냥 놀고 있을 유지한이 아니라는 것은 모두가 동의했기에.

그런 침묵 속에 지한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빌드업이라, 맞는 말이긴 했다.

지난번에 한 번 겪어 보았기 때문에 이미 공략법은 알고 있었다. 그저 최대한 힘을 아끼는 중이었을 뿐이다. 어차피 진짜 전투는 스킬의 페널티로 롤랑이 리타이어 되면서 시작하니까.

그전까지 힘을 쓰는 것은 낭비였다. 때문에, 지한은 지난번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이 되는지 확인을 하며 힘을 비축했다.

“롤랑이 돌아가면 바로 움직일 겁니다.”

이미 한번 겪어 본 일이었다.

무엇보다, 유지한은 이전의 그가 아니었다.

기억을 전부 되찾은 지금.

그는 세계를 뒤틀기 전에, 완성형의. 이야기의 엔딩을 보았던 주인공이었으니까.

“컥―! 이런.”

“훗…… 세계가 그래도 아직 미치진 않았나 보군. 돌아갈 시간이네. 이단 심문관. 다시 안 만나길 빌지.”

“아. 아쉽군.”

【‘성좌의 강림’이 종료됩니다.】

【한계를 넘은 스킬 사용으로 몸에 과부하가 옵니다】

【‘신의 심판자’에서 ‘성기사’로 타이틀이 격하됩니다.】

【세계가 허락한 시간이 만료되었습니다.】

“루이스를 회수해.”

“……넌?”

“이제부턴 내가 상대할 거야.”

내가 만족하지 못한 엔딩이었지만, 힘만으로 보았을 때.

고작 저 파우스트를 상대하지 못할 리 없었다.

아니, 파우스트뿐 아니라.

나의 절대자의 길에 축복을.

【승리의 검 ‘세이라’가 승리의 노래를 부릅니다.】

【‘정의의 수호자’가 벽을 넘어섭니다.】

【완전한 타이틀을 거머쥐었습니다.】

이미 더 오를 곳이 없는 정상에 오른 내가 뛰어넘지 못할 벽은 없었다.

【타이틀이 변경됩니다.】

【이 세계의 ‘구원자’에게 무한한 광영을!】

【랭킹이 변동됩니다.】

【현재 유지한 님의 월드 랭킹은 2위입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곤.

그 사실이, 아직 네가 나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아 오히려 기꺼웠다.

그렇게, 이미 세상을 한 번 구한 ‘구원자’가.

“아. 복병이 여기 또 있었군. 어쩐지 그 여자가 그리 자신만만해하더니. 이유가 있었어.”

이번에는 자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검을 들었다.

“그래.”

“…….”

“내가 그 여자의 자신감이거든.”

간절한 소망을 담으며.

* * *

지켜보면서 깨달은 건 생각보다 많았다. 알고 싶은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내 의사와 무관하게 알게 된 이런저런 것들.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우습게도 계속 알고 싶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남의 연애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 쓰나 보다. 어찌 보면 내 연애이긴 하지만. 내 연애사라면 그렇게 사족을 못 쓰며 승냥이같이 달려들어 만족을 모르던 친구들이 새삼 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아. 어딜 만ㅈ…… 으하하학……! 항복……! 항복!”

“흥이올시네.”

“아니 이게…… 까하하학―!”

신기하고, 알면 알수록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게 진짜 유지한이라니.

저게 진짜 나라니.

이런 생각을 수십 번은 한 것 같았다. 장난도 칠 줄 아는 유지한과, 그 장난에 박장대소하는 나라니. 지금의 나로서는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모습이었다.

“아오…… 스물일곱 너무 과로시키는 거 아니에요?”

스물일곱의 나는 이렇게 달라지는 걸까?

아니면 그냥 다른 유지한이어서 나 역시 달라진 것일까.

액면가는 비슷한데.

스물다섯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말하면 나는 서른둘인데.”

“……아. 죄송합니다. 아저씨. 범죄자의 싹이 이렇게 보이시네요.”

“야!”

“어이구. 어딜 손을…… 꼰대 묻을라.”

“……이…… 이!”

아. 이렇게, 결국 내게 이기지 못하는 유지한을 보니 내가 아는 유지한이 맞긴 했다. 스물일곱의 윤지호와, 서른둘의 유지한의 연애는 이런 모습이었다.

결국 유지한이 지는 연애는 맞았지만, 처음부터 무조건적으로 저자세를 취하는 것이 아닌, 할 말을 다 하는 동등한 관계.

작중에서도, 그리고 현재의 내게도 결코 보여 주지 않았던, 자존감이 가득한 모습과 행복한 미소가 정말 보기 좋았다. 내가 만들지 못한 유지한임에도, 또 내가 만든 유지한이었기에 하염없이 지켜봐도 도무지 질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너무한 거 아냐?”

“아이고. 우리 신기루님 또 삐지셨네.”

“……또 신기루님.”

아. 심지어 이 둘은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다.

웃긴 건, 할 건 A to Z까지 다 해 놓고 관계 정의만 안 한 그런 뭣 같은 사이었다. ‘사귀자!’, ‘오케이!’ 단 두 마디만 해도 바로 오늘부터 1일이라 정의내리고 홀가분해질 터인데 둘 다 그걸 못했다.

정확히 이 경우는 안 한 것 같다. 할 거 다 해 놓고 그걸 굳이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특히 유지한이라면 그 말이 어려워 못한다 쳐도 나는 아니었다.

나는 나를 잘 알았기에 단언할 수 있었다. 사귀는 게 무슨 세상이 달라지는 중대한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고작 그 정도에 지레 겁을 먹거나 큰 의미부여를 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

저기 있는 ‘내’가 보이는 것처럼 저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저 즐거움만을 가볍게 즐기고 싶어서 딱히 관계의 변화를 원치 않거나, 혹은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신기루님 안 하면 뭐가 하고 싶은데?”

“…….”

왜 신기루라 불리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신기루’라 불리는 저 남자가 신기루 외에 다른 호칭으로 불리길 바라면서도 망설이고 있거나, 혹은 피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남친’이라는, 어찌 보면 참 별것도 아닌 두 글자에, 매일 들어도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볼을 붉히며 행복해하는 남자를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모습은 꽤나 의아하게 다가왔다.

실제로 저기 저 답을 끌어내고 있는 여자는. 만약 그가 남친이 되고 싶다고 한다면 기꺼이 들어줄 것이다. 누가 봐도 그리할 거라는 게 보였고, 나는 고작 그 ‘남친’이란 단어에 엄청 대단한 의미를 두지는 않았기에 원한다면 주지 못할 리 없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면.

그러니, 저 마음에 쏙 든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는 ‘내’가 상대를 거절하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막말로 마음에 드는 수준으로 봐서는 당장 내 거라고 이름이라도 쓰고 남았을 것 같은 태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

답을 재촉하지도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부드럽게 돌아섰다.

실망도, 무엇도 하지 않고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돌아서는 그녀의 태도에 오히려 상처받은 얼굴을 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답을 거부한 남자였다.

……대체, 저 커플이 마땅히 밟아야 할 단계를 밟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마치 그게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을 것 같았다.

궁금증이 깊어지는데, 마치 그런 내 궁금증을 눈치챈 듯, 갑자기 장면이 바뀌었다.

‘……!!’

아무리 나라도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마치 먼지처럼, 유지한이 사라지고 있었으니까.

웬만한 일은 겪을 대로 겪은 지 오래이기에, 어지간한 거에는 눈썹 하나 흔들리지 않는 나조차 당황을 감추지 못하는데, 내 앞에 있는 다른 ‘나’는 마치 익숙하다는 듯 여상하게 말했다.

“아…… 또네.”

하도 많이 봐서 이제 그러려니 한다는 듯 하품까지 하며 말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 한두 번이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모습에, 유지한이 다급하게 말했다.

“금방 다시 올게.”

하지만 별로 그렇게 와닿지 않는 말이었는지, ‘나’는 연신 하품을 해대고 졸리기까지 한 것처럼 눈까지 반쯤 감은 채 당연한 것을 말하듯 답했다. 마치 ‘오늘 뭐 먹을래?’라고 식사 메뉴를 묻는 것처럼.

“그래. 말한 대로는 꼭 지키는 남자지. 이번에는 얼마나 걸리려나. 어차피 잊고 있을 테니 상관없나?”

“……상관, 내가 있어.”

그에 절박해지는 건, 유지한이었다.

절박한 얼굴로 유지한이 ‘나’를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팔은 실체가 사라진 후였다. 그런 자신의 팔을 보고 더욱 절망적인 듯한 얼굴로 유지한이 뭐라 외치려 했지만, 이제는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말을 해도 닿지 않는 상황에 유지한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다른 건 이미 익숙하게 봐서 그러려니 해도 그 눈물에는 좀 약해진 듯 ‘나’는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다녀와.”

기다려 줄 테니까.

라고 말하는 미소를 마지막으로 유지한은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잠시 눈이 감긴 ‘나’는 금세 다시 눈을 떠 크게 하품을 했다.

“하암…… 언제 여기서 졸고 있었대…… 들어가야지.”

아까 말했던 것처럼 정말 유지한에 대해서 싹 다 잊어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지?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눈살을 찌푸리는데 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왜, 어째서…….”

믿을 수 없다는 듯. 쫒겨난 그가 절망을 토해내고 있었다. 왜 갑자기 튕겨져 나왔는지 머리로 납득이 가지 않는 듯했다.

【세계가 당신이란 불순물을 인식했습니다.】

【세계가 당신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걸 원치 않습니다.】

【세계가 당신을 추방합니다.】

“……어째서…… 제대로 대가를 지불했는데……!!”

절망을 넘어서 이제는 분개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째서 신기루님이라 불렸는지.

왜 한두 번이 아닌 것 같은 얼굴을 해 보였는지.

실제로 그랬을 테니까.

갑작스럽게 나타나, 갑작스럽게 사라지고. 그렇게 잊혀졌다 돌아오고의 반복이었을 것이다.

세계에 간섭을 할 수 있을 때부터 너무나 쉽고 자연스럽게 들어오든 세계에 대한 정보들이 내게 알려 주었다.

자신이 사는 세계와 다른 세계를 간섭하려면 그만한 자격이 있어야 하거나, 아니면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그냥 그 세계에 들어가는 것 정도는 세계에 큰 간섭을 하는 정도까지는 아닐 수 있었지만, 유지한은 한 세계의 메인 중추와도 같은 인물이었다.

그 세계의 정체성.

절대 사라져서는 안 되는 심장.

그랬기에 그가 다른 세계에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간섭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원하는 세계에 다른 뒤틀림을 줄 수 있고, 그가 원래 있어야 할 세계 역시 그의 부재로 인한 뒤틀림을 틀림없이 겪게 될 터이니까.

대가를 뭐로 지불했는지 모르겠지만, 유지한이 지닌 그런 특성 때문에 다른 이들이 같은 것을 시도할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엄청난 대가를 지불했을 것이다. 그 대가도 영구히 그 세계에 머무를 수 있는 자격이 아닌 한정적인 시간이었을 것이고.

또 다른 나에게서 기억이 지워진 이유 역시 간단했다. 그 세계에 존재해서는 안 될 이의 기억이었기에 지워진 것이다.

기억이란 너무나 하찮은 것 같으면서도,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 기억이, 인물에 대한 존재감을 만들어내는 것이니까. 어떤 인물이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기록이 되는 것이다.

흔히 만화들을 보면, 신들이 자신을 기억하는 신도가 사라지면 소멸한다는 설정이 있지 않은가. 그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자신을 기억하는 이가 없으면 그 세계에 존재할 수 없는.

당연했다. 아무도 기억하는 이가 없으면 세계가 그를 기록할 필요가 없어지니까.

그렇기 때문에 ‘내’ 기억이 지워진 것이다.

이 세계가. 유지한을 기록하기를 원치 않기에.

유지한이 있기를, 바라지 않기에.

“괜찮아…… 다시…….”

그리고 그건 저 남자를 절망케 하기 충분했을 것이다. 저렇게 스스로를 다독이지만, 얼굴에 드리워진 절망을 거두지는 못하는 모습을 보면.

본인도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대가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 펑펑 쓸 수 있을 만큼 영원하지 않다. 심지어 그가 지불한 대가는 보통 이들의 상상을 초월할 것이니. 대체 얼마나 지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조만간 동이 날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더 이상 그가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세계는 그를 허용해 주지 않을 것이다.

처음 정도야 요행으로 가능하다 할지라도, 이미 몇 번이고 인식한 존재를 세계가 곱게 눈감아 줄 턱이 없으니까.

그래서 그렇게 망가진 것인가.

지금 내게 보여 주는 유지한의 한없이 낮은 자존감과, 사소한 것에도 벌벌 떨며 두려워하는 이유를 조금 알게 된 느낌이었다.

무수히 추방당해 잊혀지고, 망가져 그게 집착이 되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게 과연 좋은 일이라 할 수 있을까.

저 집착은 끊어야 옳은 것이 아닐까.

더 망가지고, 더 상처받기 전에.

현재를 보면 그 반대로 행했던 것이 뻔했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내가 대체 뭐길래.

“……절대 다시…… 나올 수는 없어…….”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남자가 독기를 품었다. 그리고,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통해 세계에 틈을 만들어냄과 동시에 제약을 걸었다.

자신이 절대 튕겨져 나가지 않도록.

세계가 자신을 눈치채고 추방하지 못하도록.

그게 가능하다니. 괜히 주인공이 아니었다. 그 천재성을 여기다 사용하는 것이 어이없었지만. 어쨌든 그는 그 믿을 수 없는 기적을 일궈내었다.

“……됐어―!”

마침내 해낸 그가 기쁨에 찬 환호성을 내지르는 것이 보였다.

……그걸 잘했다고 칭찬해 줘야 할지. 대단하다고 박수를 쳐 줘야 할지. 아니면. 저 미친놈이 돌았나. 라고 해 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저걸 이루기 위해 바친 대가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인연이었던 것을 보았기에 더더욱.

나로 인해 벌어진 일이기에 울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아, 울지도. 그렇다고 웃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기적을 일궈냈음에도 불구하고.

신은 잔인하게 그를 배반했다.

“……누구?”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그를 기억할 자가.

털썩―

“어…… 어? 뭐야. 갑자기 왜…… 괜찮으세요!?”

그가 가장 기억되고 싶은 자가.

“……어째서…….”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 * *

“……구원자?”

지한이 나서면서 자연스럽게 뒤로 빠지게 된 이들이, 비로소 보게 된 유지한의 최종 타이틀에 넋이 나간 얼굴로 알림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어떤 이들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고.

다른 어떤 누군가는 믿을 수가 없다는 듯 눈을 비볐으며.

또 다른 어떤 이는 정말 가지가지 한다는 듯 혀를 찼다.

“……진짜 가지가지 하는군.”

그 중 밀리언은 제일 후자였다.

살다 살다 저렇게 재수 없는 새끼는 진짜 처음이었다. 물론 여기서 ‘재수 없다’는 양쪽의 의미 모두 다 포함된 이야기였다. 믿을 수도 없고 가지가지 하기도 하고.

그래서 더 짜증 나는 놈이었다. 차라리 한쪽으로 치우치면 모를까.

세상에 저렇게 불쌍한 놈이 어디 있을까.

세계는 너무나 당연하게 유지한을 특별하게 만들고, 그에게 많은 것을 쥐여 주며 높은 자리에 그를 올려놓았으면서, 신기하게도 좋은 것은 그에게 하나도 주지 않았다.

보란 듯 그를 조롱하는 것처럼, 희생을 강요하고 의무를 던져 주면서 보상이랍시고 준 것들 중에서 유지한이 진정으로 바랐던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앞으로의 또 다른 의무를 위해 필요한 보상은 줄지언정, 그가 바라는 것을 준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그런 삶에 환멸을 느껴 모든 걸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만들어 주었으니까.

‘아. 짜증나.’

아무리 생각해도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는 인생.

그렇게 살지 말라고 윽박을 지르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세계가 그것을 바라지 않았고, 밀리언 또한 유지한이 한 모든 희생의 덕을 본 사람이었기에.

어떻게 보면 유지한은 월드 랭커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유지한이 아니면 다음에 그 의무를 이어받게 될 것은 그들 자신일 테니까.

따라서 그들에게는 유지한을 나무랄 자격이 없었다.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어 그를 차마 무작정 외면할 수도 없어, 배척하고 화를 내었다. 무관심보다는 그래도 그게 낫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며.

아주 조금의 자격지심도 있었다. 도대체 너는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그런 것을 버티며 사는 것이냐고. 네가 뭐가 그리 특별한 사람이기에.

직접 본 유지한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너무나 평범하고, 작디작은 소망을 품고 사는 보통의 존재였기에 그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도망치라고. 넌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 아니니 도망쳐도 된다고.

아무도 그를 원망할 자격을 갖추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일부러 모질게 대한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형편없는 취급을 받는 사람을 눈앞에서 본다면, 누구도 그를 함부로 원망하지는 못할 테니까.

하지만.

그런 그들의 복잡한 마음은 조금도 관심 없다는 듯. 그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구원자’라는 타이틀을 달며 세계가 바라는 대로 전장에 섰다.

그 위대하고, 쓸쓸하고. 머저리 같은 등을 보며 밀리언은 욕설을 날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개자식.”

사람 마음은 정말 쥐뿔도 몰라주고.

그런 밀리언의 마음에 보답이라도 하는 듯.

유지한이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세계의 ‘구원자’가 자신의 권위를 드러냅니다.】

【당신의 ‘구원’에는 언제나 찬란한 빛이 머물 것입니다.】

찬란하게 산화하며 유지한에게 스며드는 빛들.

유지한이 ‘구원’을 이루기 위해 세계가 힘이 되어 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세계가 바라는 결말을 위해.

세계가 택한 가장 훌륭한 장기말.

“하. 그 여자의 자신감이라고 하더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군. 세계가 택한 가장 훌륭한 꼭두각시라니. 세계를 간섭할 수 있는 그녀의 자신감을 대변할 만해.”

너는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며. 단번에 유지한의 위치를 자각한 파우스트가 감탄을 금치 못하며 박수를 쳤다.

진심으로 감탄해 마지않으며 내뱉는 조롱에도, 유지한은 침착했다. 그것들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

오히려 곰곰이 고민하는 듯하다 조롱에 참 유지한답게 진심으로 맞붙었다.

“세계가 택한 가장 훌륭한 꼭두각시라…… 아닐 텐데. 나는 분명한 실패작이거든.”

“……실패작이라?”

본인이 본인 스스로를 칭하는 형편없는 칭호에 파우스트가 호기심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런 파우스트를 향해 비릿하게 웃으며 유지한이 답했다.

“그래. 결말은 세계가 바라는 대로 들어주었을지 몰라도, 결국 난 세계가 바라는 대로, 그대로 있기는커녕, 세계가 열심히 그려 놓은 것들을 전부 망쳐 놓았거든.”

“…….”

“아마 세계는 날 갈아 마시려 할 거야.”

그 말에, 파우스트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런 것치고, 너는 여전히 세계의 선택을 받은 생명체가 아닌가.”

모순이 지나치게 심한데?

세계의 미움을 샀으면 세계가 너에게 그런 힘을, 그런 권한을 주었을 리 없지 않겠냐고. 파우스트가 합당한 질문을 던졌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파우스트가 모르는 한 가지가 있었다. 그리고 그 한 가지를 지한은 정확히 자각하고 있었기에 가차 없이 비소를 터뜨릴 수 있었다.

“아아. 그게 내게 가장 큰 엿을 먹일 수 있는 방법이라는 걸. 세계는 너무나 잘 알고 있거든.”

정말 빌어먹게도 말이야.

처음부터 유지한이 원한 건 너무나 소박하디 소박한 소망이었다. 애초에 처음부터 특별했기 때문에 윤지호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지만, 정작 윤지호와 함께하기 위해 필요했던 건 특별함이 아닌, 처음부터 그랬듯. 아무도 자신이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는.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삶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나를 세계는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조금의 자유 의지도 없다는 것처럼.

내 자유 의지는 오로지 세계가 허락하는 선 안에서만 이룰 수 있는 한정적인 것처럼.

그런 건 조금도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부 가져가도 좋으니 단 한 가지만 들어달라. 애원도 했다. 평생을 너희들의 개처럼 살아도 좋으니, 그것 하나만 들어달라 빌고 또 빌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애원이 무색게도, 세계는 언제나 철옹성 같았다.

분노해, 세계가 바라는 모든 것을 부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돌아오는 것은, 자신이 바라는 것만큼은 절대 들어주지 않을, 세계의 단호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런 세계는, 제게 부여한 사명과 준 특별함을 걷어가는 것이 자신이 세계에게 바라는 유일한 소망임을 소름 끼치도록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그가 발버둥 친다고 해도, 세계는 그에게 하사한 특별함을 거둬 갈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고문인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는, 그것을 원망하고 증오하면서도 이용하기로 했다.

“거 참. 아주 불쌍한 인간이구만. 원망이 아주 악마보다 더 깊고 어둡네. 악마들이 아주 환장하겠어. 그들에게 인간의 어둠만 한 별미가 없으니까.”

“뭐. 그렇겠지.”

자신이 더 이상 그저 선하기만 한 빛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자각하고 있는 유지한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원망이 깊고 어두운 건 맞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빛이었다.

세계가 선택한, 세계가 칭송할 빛.

그렇기에 이 세계에서 가장 뒤틀린 빛이었다. 먹으면 죽을 것을 짐작하면서도 악마들이 환장할 수밖에 없을 만큼 매혹적인 존재였다.

“세계로 인해 비틀린 채로 태어나 비틀리고 계속 비틀리고 뒤틀려서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된 너를 이 세계의 그 누가 받아줄까.”

“…….”

“이참에 나와 함께 이 세계를 없애 버리는 건 어떤가?”

그리고 마찬가지로 타락해 악마가 되어버린 파우스트의 역시 악마임을 부정할 수 없는 듯 눈에 이채가 어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세계의 간섭이 없는, 네가 세계가 돼서 너를 위한 세계를 만드는 거지.”

“…….”

악마의 유혹다운 다디단 유혹이었다.

알고 그러는 것인지, 모르고 그러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바라는 세계를 만들지 못해, 한없이 세계를 뒤튼 남자에게는 정말 더없는 유혹이었다.

“악마가 맞긴 맞군. 아. 인간이었던 악마인 만큼 더 인간의 속내를 잘 꿰뚫는 건가.”

어찌 이리, 심장이 저릿할 정도로 달콤한 말인지.

새삼 눈앞에 있는 남자가 악마임을 여실히 깨달으며, 지한은 쓰디쓴 미소를 흘렸다. 정말 귀가 솔깃하다 못해, 영혼까지 매료될 제안이었다.

지한은 그 점을 여실히 인정했다. 저 제안을 미치도록, 영혼이 찢어지도록 울부짖으며 갈구한 날도 있었으니까. 멀리 갈 것도 없이. 전 세계의 자신이라면 바로 넘어갔을 것이다.

더 내걸 것도, 더 할 수 있는 것도, 무엇도 찾을 수 없어 절망하던 자신에게는 제 편인 척하면서 단 한 번도 제 바람을 들어주지 않던 신보다 저 가능성이 더 위대하게 다가왔을 테니까.

그때는 정말. 이딴 세계. 다 찢어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었다. 사소한 제 바람도 이루지 못하게 온몸으로 가로막는 세계 따위. 원망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러지 못한 건, 결국 단 하나.

‘고작, 그 정도도 못 하면서…… 감히 내 곁에 있을 수 있다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름답고 절망적인 선혈을 뿜으며, 네가 했던 단 한마디 때문이었다.

“넘어가고 싶은데, 애석하게도 넘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어서.”

네가 했던 말은 무엇이든, 나 같은 것을 옭매었다.

‘너는 스스로가 이미 대단히 잔인하고 이기적이게 됐다고 생각하는데. 너는 일단 천성이 그래도 착해 빠져서.’

피가 흐르고 있음에도.

수명이 꺼져가고 있음에도.

너는 언제나 그렇듯 환하게 반짝이며, 너무나 잔인하게 이내 네 모든 것을 내 망막에 새겼다.

‘미안한데.’

“아. 그녀인가.”

그래. 네 말이 맞았다.

“나는 평생 그녀를 이겨 본 적이 없거든.”

‘내가 너보다 몇 수 위야.’

나 따위가 너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이미 수십 번은 깨달아, 진작 알고 있었던 것이라고 했던 그 오만을 지난 삶에서야 나는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 시작하자고.”

그랬기에 다시 검을 든 것이었다.

“……아쉽군. 정말 아쉬워.”

세계도.

인간도.

내가 아끼는 사람도.

“거짓말인 건 이미 알아.”

“……호오. 어째서 그리 생각하지?”

심지어 너도 아닌.

아마 네가 언젠가 바랬을지도 모를…….

“이미 질리도록 들었으니까.”

나의 ‘구원’을 위해.

* * *

내가 가차 없이 뒷걸음질을 치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누구시죠?”

감히 나를, 함부로 아는 척하는 희미한 불쾌감과 함께.

너무나 나다운 행동이었다.

사실 이게 정상이었다. 그동안이 신기할 정도로 이상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내 집에서 지내다 갑작스럽게 사라지다 다시 나타나는, 정체도 밝힐 수 없는 남자에게 그 정도의 애정을 보일 리가 없으니까.

그것도, 천하의 내가.

뭐에 씌어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라, 친구들은 분명히 말하리라. 나도 그런 나를 잘 알고 있기에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당연한 내 태도에 한 남자는 발밑이 무너져 내린 듯한 절망적인 얼굴을 해 보였다. 정말 조금도 이런 상황은 예상치 못했는 듯.

‘……바보인가.’

그렇게 펑펑 대가를 지불할 때도, 자기가 추방되면 늘 홀라당 기억을 잃었는데. 어떻게 이런 상황이 언젠가 닥치게 될 것이라고 단 한 번도 예상치 못했던 것인가.

충분히 가능성이 다분했는데.

이 세계는 너를 반기지 않으니까.

세계가 반기지 않는다는 것은, 곧 세계로부터 어떤 요행도, 어떤 힘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까짓 거, 좀 안 받아도 어떤가.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당신이 평소 살아가는 모든 나날이 세계에 받은 혜택이니까.

밥을 먹고, 누군가를 만나고. 행복한 일이 있고, 가끔은 재수가 좋은 일까지. 모든 것이 세계가 당신에게 하사한 안배였다. 그 안배가 사라진다는 것은, 언제나 당연하게 누렸던 모든 것 역시 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누군가에게 받을 법도 한 호의도, 악의도 사지 못한다. 그저 잠시 마주치면 희미하게 불쾌감과 배척감을 받을 뿐. 그조차도 금세 잊혀 그 사람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세계의 그 누구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유령과도 같은. 그러면서 세상 온갖 불행 또한 당연하게 붙을 것이다. 바라는 것은 하나도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고, 절망만 켜켜이 쌓여 갈 것이다.

그러니 일을 저지를 때마다 세계는 분명하게 경고했으리라.

그 경고를 보았을 텐데도, 정말 한 번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인지. 너에게 가장 큰 절망을 안겨줄 것이 이리 훤한데, 세계가 그걸 모를 줄 알았던 것인지.

이상한 데서 보여지는 순진함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머저리.’

병신같기도 하고, 빡치기도 하고, 또 그러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안쓰럽기도 한 복잡한 감정에 혀를 차는데, 유지한의 표정이 변했다.

그제야 본인의 실수를 눈치챈 듯했다.

처음부터 목적이 나와 함께 하는 것이었다면, 너는 세계와의 거래를 다르게 해야 했다.

이 세계에 속하게 해달라, 가 아닌. 나와 함께하게 해달라로.

과연 세계가 그것을 용납해 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네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렇게 거래를 청해야 했다.

세계가 이 거래에 허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으니까.

눈앞에 가질 수 있는 것에 집중했던 너는 몰랐겠지만.

“……하…… 하하…… 빌어먹을…….”

자신이 완전히 당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유지한이 차갑게 분노했다.

처음 보는, 얼음같이 차갑게 분노한 유지한의 모습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리고, 유지한은 자신을 기만한 세계와 이제는 거래를 할 생각도 없는 듯. 직접 스스로 세계를 비틀었다.

“……뭐…….”

“……이따, 다시 봐.”

그때는 달라져 있을 테니까.

당황해하는 ‘나’에게 그가 희미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그 후, 세계는 뒤틀렸다.

이미 유지한이 치른 수많은 대가는 세계에 흡수된 상태였기에 세계에 편입된 자신의 대가를 이용해 세계를 주무르는 그의 위대함에 절로 감탄이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지금 세계의 온갖 사랑을 한 몸에 받고, 힘을 가진 나 역시도 저렇게 세계를 통째로 주물러, 입맛대로 바꿀 자신은 없었다.

설마 그렇게 호구처럼 퍼주던 게, 너의 큰그림이었나.

두 눈으로 보고서도 믿을 수 없는 위용이었다.

절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이뤄낸,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뭐 좋은 꿈 꾸고 있었어?”

“……아니. 다신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절망스러운 꿈.”

“악몽을 참 길게도 말하네.”

그가 그토록 바라던 행복이 눈앞에 있었다.

* * *

하지만 그 행복은 언제나 그랬듯, 오래가지 않았다.

세계가 자신의 뜻을 거스른 유지한을 용서해줄 턱이 없었으니까.

“……어? 누구?”

“……뭐?”

“……아…… 미안. 갑자기. 왜 이러지.”

“…….”

처음에는 기억이 간혹 사라지는 것부터.

“……피곤해.”

갑자기 차가워진 ‘내’가 유지한을 귀찮아하기 시작했고.

그런 자신의 급격한 변화를 ‘내’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고, 당연히 자신에게 일어난 이변을 그냥 넘길 생각도, 납득할 생각도 없는 ‘나’는 내게 이변을 생기게 만든 이를 제거했다.

그게 가장 쉽고, 간단한 일이었으니까.

“이제 널 봐도 아무렇지가 않네.”

“……뭐?”

“애정이 식는 건 진짜 한순간이야. 그렇지?”

남들에게는 무엇보다 어렵다고 하는 그 일이, 내게는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절절한 사랑을 했더라면 모르겠지만, 그런 감정을 아예 모르는 나는 어느 정도의 미련이 있어도, 찝찝함과 아쉬움이 남아도, 그것을 끊는 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언젠가, 전부 사라질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설령 그게 절절한 사랑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할 자신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서 그게 가장 어려운 남자는 너무나 칼 같고 무심하게 자신을 끊어내는 나를 마주하곤 절망에 허우적거렸다.

이미 그렇게 수많은 절망에 허우적거렸으면서, 내가 주는 절망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 듯 그는 지치지도 않고 절망했다.

“……다시, 다시 시작하면 돼.”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는 다시 세계를 뒤틀었다.

기억을 가지도록 욕심을 부렸던 것이 문제인 것 같아, 전부 다 깔끔하게 처음부터 시작했다.

나를 사랑하는 것은 넘치도록 자신 있었고, 처음부터 다시 노력하는 것이 절망하는 것보다 훨씬 나았으니까.

그리고 그런 너는 정말 우습게도 언제나 성공했다.

“……내가 좋아하는 거 알고 그렇게 행동하는 거지?”

어쩜 그렇게 똑같은 사람을 몇 번이고, 한 번도 틀리지 않고 마음에 들어하고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것인지.

보면서 새삼 ‘내’가 정말 신기했다.

내가 아는 나는 정말 그런 사람이 아닌데.

사랑에, 정확히는 남자에 한해서는 감정의 변덕이 죽 끓듯 한다는 것 정도는 자각하고 있었기에 확신할 수 있는 주제 파악이었다.

내 취향이 이렇게 일관적이었나?

세계가 손을 쓸 수 없도록 자신에게 유리한 어떤 판도 짜지 않았음에도 유지한은 언제나 나와 사랑에 빠지는 데는 성공했다. 정말 기적적인 재능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랬기에 너는 언제나 절망에 빠졌다.

오로지, 나로 인해.

“……일 안 해도 돼?”

세계에 배척당하는 남자가 사람들과 섞일 수 있을 틈이 없는데도, 그걸 모르는 나는 여상히 물었다.

사람들과 섞일 수 없으니 기존에 가지고 있던 능력과 재화를 이 세계로 치환해 쓰고 있던 유지한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이미 세계를 구한 구원자인 만큼 돈은 대대손손 10대가 놀고먹고 해도 문제없을 정도로 충분히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더불어, 그는 내가 아무리 돈이 많다 해도 계속 일하지도 않으며 내 집에 머무르는 것을 언제까지 눈감아 줄 것이 아님을 그동안의 연애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돈 많은 백수를 언제나 부러워하기는 하지만, 돈이 많다고 해서 일을 하지 않는 백수를 매우 싫어했다.

그 나태함을 꼴 보기 싫어하는 이중적인 사람이었다.

나는.

“……당분간은, 너한테 집중하고 싶어서.”

그랬기에, 그는 이렇게 얼버무렸고. 그 순간은 용케 잘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연인 사이에서는, 굳이 세계가 끼어들지 않아도 위기의 순간이 너무나 많았다.

그것은 우리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다녀왔어…….”

시즌이 되어 야근이 잦아졌고, 집에 안 들어오는 날도 수두룩했으며 거의 새벽에 퇴근해서 현관에 들어오자마자 기절을 했다.

한창 회사를 다닐 때 시즌마다 겪는 일이었기에 그 행태는 나 역시 대단히 익숙했다.

빌어먹을 이슈가 터지면 거의 반년에 걸쳐 저런 생활을 해야 했다.

물론 빠방한 월급으로 보답받긴 했지만, 빡치는 건 별개다.

어쨌든 그런 생활이 지속될수록, 우리의 대화는 사라져갔고. 자연스럽게 거리가 생기게 되었다.

다른 건 전부 버텨도 유지한은 그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자신이 한 짓이 있으니, 자신이 치른 대가가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일, 그만두면 안 돼?”

하지만 그걸 내게 알아달라고 하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내가 그걸 모르고 있기에 더더욱.

설령 알고 있다고 해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고작 그 하나만으로도 천년 묵은 사랑도 단번에 식을 수 있는 썅년이었으니까.

“……뭐?”

역시나 ‘나’는 저건 또 웬 개소리냐 라는 얼굴로 눈썹을 치켜들었다.

심기 불편한 티가 팍팍 드러나는 모습에 잠시 움츠릴 뻔했지만, 이번에는 내 눈치를 보는 것보다 자신의 억울함이 더 컸기에 멈추지 않았다.

“몸도 축나고, 스트레스도 많아지고. 우리 같이 있는 시간도 적어졌잖아.”

“…….”

“돈은 내가 있으니까 푹 쉬면서…….”

그렇게 그는 가장 해서는 안 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래서. 네 돈이라도 쓰라고?”

“네가 펑펑 써도 전혀 문제없어.”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렇게 한가하게 오로지 내게 헌신하는데 그것을 전혀 몰랐을까.

하지만 한 번도 네 돈을 요구한 적 없는 나를, 너는 들여다보았어야 했다.

네가 돈이 많은 것과 별개로 내가 버는 돈의 가치를 내가 어떻게 여기는지. 그게 내 어떤 자존심인지.

“……말을 왜…… 그냥 나는 너를 생각해서…….”

“그건 네 돈이지. 나도 내 돈 다 있고, 내가 다 버는데 무슨 상관이야.”

“일을 그만두면…….”

“내가 왜 그만둬야 되는데?”

너는 내 고고한 자존심을 너무나 얕봤다.

“지금 너, 3달째 나랑 밥 한 번도 같이 못 먹은 거 알아?”

“…….”

그리고 나는, 네 외로움과 헌신을 얕봤다.

오로지 나만 보며 살아간다는 건, 반려견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내가 오길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과 같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너는 개가 아니라 사람이고, 얼마든지 밖에 나갈 수 있고 교류를 할 수 있으며, 내가 전부인 것처럼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실제로 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내게 100% 올인하는 남자를 바란 적이 없었으니.

“그래서. 너랑 안 놀아주고, 너랑 함께 못 있고, 함께 잘 있지도 못해서.”

“…….”

“고작 그런 이유로, 내 삶에 간섭하는 거야? 지금?”

하지만 너는 그것을 바랬고, 나는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의 다른 점이었다.

“왜, 그러면 안 돼……?”

“…….”

“나는 너한테 전부 다 바쳤는데, 너를 위해 뭐든지 했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는데, 그것조차 바라면 안 돼?”

“…….”

“어째서? 내가 너한테 그 정도도 요구하지 못할 정도로 자격이 없어?! 고작 이 정도는 들어 줄 수 있잖아! 이런 하찮은 것 정도는 내 뜻대로 해 줄 수도 있잖아―!!”

유지한이 절박하게 소리쳤다. 단어 선택이 매우 잘못되었지만, 그래도 그 말과 마음이 전부 똑같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함께해 온 시간이 적지 않으니까.

“……내가 너한테 그런 걸 요구한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그 절박함이, 내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음을.

내가 바랐던 방향성이 아니었음을.

그리고 앞으로를 위해서도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이런 면에서는 지독히도 독선적이고 올바른 나는 그것을 깨달았다.

“네가 그렇게 생각되었다면, 너랑 나랑은 맞지 않는 것이겠지.”

“……뭐?”

“나는 뜻을 굽힐 생각이 없고, 너는 그런 나를 보며 계속 이런 감정을 혼자 쌓아 놓을 테니…… 우리는 여기까지 하는 게 맞겠네.”

한순간에 매정하게 모든 것을 끊어내는 ‘나’를 보며 이미 한 번 그것을 겪어 본 유지한은 그제야 퍼뜩―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아. 아니야. 내가 잠시…… 잠시 돌아서 그래…… 요즘 상태가 별로여서. 그래서 실수한 거야. 다신 안 그럴게. 이럴 일 절대 없을 거야.”

황급하게 두서없이 온갖 말을 늘어놓았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진심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진실된 마음이 아닌 것을 알고 있는 ‘내’게 그런 행동은 오히려 결심을 굳히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그가 원하던 것과 정반대로.

“그것 역시, 내가 만든 거겠지.”

“……아니야…… 아니야…….”

“여기까지 하자. 이제 돌아가. 네가 있던 곳으로.”

네가 있던 곳으로.

그 말이 트리거였다.

【세계가 당신을 인지합니다.】

【지표에게 거부당해 세계가 다시 주도권을 쥡니다.】

【세계가 당신이 바쳤던 대가를 모두 반환함과 동시에 당신을 추방합니다.】

【더는 당신의 어떤 것도 허용치 않습니다.】

“……!”

세계를 뒤트는 것도, 세계를 주무르던 지표가 나였기에, 그런 내게 거부당함으로서 세계는 유지한을 추방할 수 있는 권한을 틀어쥐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간섭은 물론 머리카락 한 올까지 허용할 생각이 더는 없다는 듯, 당연하게 그로부터 그간 취했던 대가를 전부 그에게 반환함과 동시에 세계의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절대 그가 들어올 수 없도록.

유지한에게 받았던 대가가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이미 겪었기에 더는 거래에 응할 생각도 없다는 듯.

한순간의 실수로 자신이 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유지한이 털썩 주저앉았다. 세계에서 거부당한 것도 거부당한 것이었지만, 그것보다는 내게 거부당한 것이 무엇보다 큰 절망인 듯했다.

그렇게 그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나 깨우쳤다. 하지만 더 이상 다시 시작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포기는 하지 못했다. 쉽사리 포기할 것이었으면 애초에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뭘 해야 할까.

어떤 방법도 생각나지 않았다.

포기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절망적인 방법조차도 떠오르지 않아, 망연자실해 있는 유지한에게 갑자기 들릴 턱이 없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꼬라지가 아주 볼만하군.]

“……!”

이곳은 세계의 틈.

시스템 외에는 어떤 이도 간섭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절대, 인간이라면……!

그리고 이건 귓가에 들린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였다.

영혼을 울리는 목소리.

진언.

이것이 가능한 존재는, 그가 알기로 단 한 존재였다.

“……성위?”

하지만 어떻게?

누가?

기본적으로 성좌가 이미 정해진 인간에게 다른 성좌는 접근을 하지 못한다. 그게 성위 계약의 룰이자, 성좌들이 서로에게 지키는 예의와도 같은 것이었다.

애초에 어길 이유가 없는 것이지만, 어길 수도 없는 것임을. 이미 완전해, 생을 마감하면 성좌에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가능성을 가진, 반신(半神)에 가까운 남자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그런 모든 룰을 깡그리 무시할 안하무인이거나, 혹은. 그럴 자격이 있는 아득한 신격의 존재거나.

[미쳐도 대가리는 잘 돌아가나 보군. 하긴. 그래야 그 정도 일을 했지.]

“무얼 안다고…….”

마치 자신이 한 일들을 모두 알고 있다는 말에, 지한은 불쾌한 듯한 얼굴이었다.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어떤 걸 걸고 한 일인지 알지도 모르면서, 누군가 아는 척 미주알고주알 떠드는 게 기분이 좋을 리 없긴 하지만.

그걸 보면서 나는 조금 생각했다.

저럴 줄 알면 진작 좀 그러면 좀 좋냐!

저거 하나가 안 되어서 사람 오장육부를 그렇게 뒤집어 놓고 이런 거에는 참 잘만 드러내는 저 모습이 그리도 고까워 보일 수 없었다.

그에게는 무척 대단한 일이었고, 물론 실제로도 어마어마한 일을 저질렀지만. 스케일이 더럽게 큰 데 비해 계기가 너무 하찮아서 그런가.

저 마음이, 저 큰 스케일이. 오히려 와닿지가 않았다. 아니면 그 반대여서 부정하고 싶은 것인가. 고작 나 하나 때문에 이 지랄염병을 떨며 아주 착실하게 망가지고 있는 저 남자를, 인정하기 싫어서.

솔직히, 소설로도 유지한을 봤고, 실제로도 유지한을 보고, 이렇게 과거의 유지한을 보고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유지한이라는 남자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사랑이 이렇게까지 한 사람이 망가질 정도로 대단한 감정인가?

아무리 네 인생에, 네게 가치 있었던 것이 없었다 한들, 너의 인연이. 네가 쌓아온 모든 것들이 나보다 하찮아질 수 있는 것인가?

네 인생에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이 있냐. 라고 누가 내게 묻는다면 나 역시 딱히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사랑 때문에 그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냐 물으면 그건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내가 가진 것들의 가치를 그렇게 느낄 수는 없어도, 나를 이루는 모든 근간이었기에, 세상에서 내가 가장 소중한 나는 그것을 포기할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이란 게 얼마나 쉽게 타오르고, 쉽게 저버리는지 알고 있기에 더더욱.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지만, 가장 영원하기 힘든 그 하나를 위해 모든 걸 내던질 만큼 나는 간덩이가 크지도, 멍청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너는 이런 나와 많이 다른가 보다.

늘 느꼈지만, 이제야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다.

내가 얼음이라면 너는 불인 수준이었다.

절대 융합될 수 없는.

그렇기에, 서로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었기에 서로에게 끌렸던 것은 어쩌면 자연의 당연한 이치일지 모른다. 본래 끌려서는 안 되나, 끌리고 마는 게 사람의 본능이니.

‘아. 그건 사람만은 아닌가.’

지금 유지한은 고작 대단한 성좌 정도로만 생각하고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저 목소리의 주인을.

자신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네 영원을.]

매일같이. 언제나.

나와 함께하며.

[몸조심 안 하지.]

‘네가 내가 할 걱정까지 몽땅 다 해서 노 프라블럼!’

어쩌면 유지한보다 더.

[이런, 되바라지고 사랑스러운 계약자 같으니.]

내게 많은 목소리를 들려주는 남자였으니까.

아마 성좌 계약을 맺은 다른 이들은 진언을 잘 듣지 못할 것이다. 일단 영혼에 무리가 가기도 하지만, 굳이 성좌들이 자신의 계약자에게 진언을 보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니까.

하지만 이 남자는 정말 매일같이 질리도록 내게 진언을 보냈다.

일상생활을 하다 갑자기 진언을 들으면 아무래도 무리가 갈 수밖에 없기에 시스템을 이용하지만, 내가 혼자가 되거나 잠에 들 무렵에는 항상 내게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내가 자신의 목소리에 익숙해지길 바라는 것처럼.

내게 부담이 되지 않도록, 천천히 횟수를 늘려가며.

그렇게 들어댔던 목소리인데, 그 목소리를 모를 리 없었다.

[이제, 네가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주제에, 그렇게 고까운 태도라니. 섭섭해지는군. 널 도와주러 온 거인데 말이야.]

“그런 말에 넘어갈 것 같은가.”

[흠. 멍청한 건 아니라 이거지. 뭐. 그편이 더 좋지.]

진짜 쌍으로 병신 같은 것들.

욕을 짓씹는데, 드디어 그들이 그렇게 벌벌 떨며 내게 끝까지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던 진실이 펼쳐졌다.

[나와 거래를 하자. 어리석고 초라한 구원자여.]

“……거래?”

[그래. 네가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

“어째서? 네게는 무슨 이득이 있기에?”

대가 없는 호의를 이미 잘 깨우친 듯, 유지한이 의심이 가득한 얼굴로 반문했다.

타당한 반문이었다.

이럴 때만 세상 똑똑하고 합리적인 듯이 구는 게 내게는 아주 개빡침 요소였지만.

그 타당한 반문에, 빌어먹을 놈이 시원스럽게 답을 내려주었다.

[네가 바라는 것에, 내가 바라는 것 역시 포함되어 있으니까.]

그 말에, 직감적으로 무엇을 느낀 것인지. 아니면 그저 1%의 의심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인지 유지한이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윤지호는 안 돼.”

와. 누가 보면 내가 네 거인 줄.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인생에, 사귀어도 너는 너. 나는 나. 혹은 아예 네가 내 거. 라는 생각으로 살아온 내게, 난생처음 듣는 소유욕 가득한 대사는 매우 신선했다. 그걸 다른 이도 아니고, 저 유지한이 해서 더더욱.

이야. 본성 쥑이네.

저런 걸 숨기고 그렇게 벌벌 기는 연기를 했다니.

오스카 대상은 가뿐히 씹어 먹고 남는 연기력이었다. 그리고 저런 걸 받아쳐 주는 놈도 참 가지가지였다.

[그건 걱정 말도록. 네가 바라는 걸 빼앗아 갈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 말이야. 오히려 나는 네가 아주 분발하기를 바라.]

“……뭐?”

[네가 그녀의 사랑을 받아야만 세계가 순응을 할 테니까.]

그러니 제발 분발하도록. 절대 버림받지 않도록.

단순한 당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매우 살벌한 협박이었다. 만약 그렇게 되어서 자신이 원하는 바 역시 이루지 못한다면 절대 용서치 않을 거라는.

그가 바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면서, 그걸 이룰 수 있는 토대를 쉽게 만들어 줄 수 있다 선언할 격을 갖춘 성위의 분노와 저주라니. 그 수준이 어느 정도일지. 아마도 인간이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경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협박이 두렵지도 않은지, 오히려 유지한의 눈에는 한 줄기 희망이 서려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기뻐 보였다.

자신의 사랑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다시 얻었다는 것에.

지독할 정도로 나만 보는, 자신의 사랑만을 보는. 미친놈이었다.

그 눈에 스민 희망을 본 순간 어떤 욕도 내뱉을 수 없을 정도로.

정말 맹목적인 바보였다.

그런 바보를 향해 망할 놈이 물었다.

[자. 한 세계를 구한 구원자여. 너의 소망은 무엇이지?]

그에, 영리한 유지한은 이미 실패한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을 떠올렸다.

어찌 보면 실패를 제대로 학습한, 아주 올바른 대답이었다.

“나와 윤지호를. 내 세계로 보내 줘. 세계의 어떤 간섭도 없이.”

내게 사랑받는 것은 무슨 짓을 해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인지, 아니면 자신의 사랑은 오로지 자신의 것이라 누구의 손도 빌리고 싶지 않다는 우습지 않은 자존심 때문인지.

그는 자신의 사랑을 이루어 달라, 라는 아주 뻔하고, 또 어쩌면 자신의 소망을 가장 간단히 표현할 말을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지금 바라는 것까지. 목적은 그것 하나였으면서.

어쩌면 그리 말하면 제가 바라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아서 그랬을지도 몰랐다.

남의 손을 빌려 이룬 사랑을, 내가.

영원히, 그리고 진심으로 사랑해 줄 턱이 없으니까.

이미 몇 번의 실패로 질리도록 나를 잘 알게 된 너는 그걸 은연중에라도 알고 있을 것이다.

[정답이다.]

그리고 그런 유지한을 향해, 망할 놈은 기꺼이 박수를 보내 주었다.

[행운을 빌지. 구원자여. 부디. 진심으로 너를 응원하네. 이번에는 세계가 아닌 너를 구원하길.]

그 길에 나의 소망 역시 존재하니.

퍽. 좋은 놈인 것처럼 포장하는, 토할 것 같은 응원에 미간이 찌푸려지는 순간. 장면이 바뀌었다.

그리고 유지한은 다시 눈을 떴다.

“유지한?!”

“……서유라?”

자신의 원래 세계에서.

* * *

“……유지한? 야. 이거 왜 또 넋이 나갔어?”

“……서유라?”

“오이구. 그래도 친구는 알아보니 다행이네.”

적어도 아직 정줄은 놓지 않았군.

제 눈 위로 손가락을 이리저리 흔드는 유라를 보며 지한은 어색하게 눈을 끔뻑였다.

언제나 보던 행동이었지만, 인생의 초점이 완전히 바뀌었어서 그런지 그 모습조차 너무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괜히 낯설게 느껴졌다.

우스운 일이었다. 서유라와 함께한 이 세계를 30년을 넘게 살았건만. 세계를 리셋한 것을 포함해도 함께한 지 고작 1년이 될까 말까 한 네가 주는 편안한 나날에 벌써 이렇게나 길들여질 수 있다니.

아무리 제 인생에 주도권이 없었고, 함께 보냈던 그 1년은 온전히 내가 길들여지길 기꺼이 원해 그렇게 산 나날이었지만 그래도 우습지 않을 수 없었다.

“서유라. 오늘이 며칠이지?”

언제나 유라야. 라고 불렀기에 성까지 불러보니 완벽한 타인을 부르는 것 같이 무미건조했다. 아마 지금 유라에 대한 지한의 심정이리라.

“……어, 그……. 5월 13일이지?”

그 태도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는 유라가, 갑작스러운 모습에 당황하며 지한을 보았지만, 지금 지한의 우선 순위는 유라가 아니었다.

지한은 서둘러 휴대폰을 찾았다. 항상 머리맡에 휴대폰을 두고 잠드는 습관 덕에 금세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전원을 켜 날짜를 확인했다. 사실 중요한 건 날짜가 아니었다.

“2019년…….”

돌아왔다.

내가 있던 세계로.

그것도. 모든 것이 끝난 직후가 아닌.

본격적으로 S급의 위치에 올랐던 그때로.

세계가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간섭을 하지 않았던, 아직은 평범한. 아니, 그냥 혜성처럼 등장한 새로운 신인일 뿐, 국민 영웅은 아니었던 그때로.

모든 걸 바꿀 수 있게.

이것도 그 정체 모를 성위의 안배일까.

분명 내게 적대적인 것 같았지만 우습게도 호의 역시 보여 주는 그 이상한 성위의 목적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런 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임 많고, 이슈가 따라다니는 남자? 헐. 졸라 소름. 뭘 그게 멋있다고 따라붙어. 십 리 밖으로 튀어야지. 불똥 튈라.’

언젠가, 그냥 연예인을 빗대어 한번 물어본 말에 돌아왔던 서슬 퍼런 진심을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때, 확실히 깨달았으니까.

실제의 유지한이란 남자는 윤지호가 호감을 가질 만한, 아니 그 수준이 아니라, 다가가는 것조차 꺼려할 남자라는 것을.

국민 영웅. 구원자. 세계를 위한 고결한 희생자.

멀리서 보면 좋지만, 가까이한다면 결코 좋은 게 없는 존재.

신랄하지만 현실적인 그 진심을 들으며 다짐했다. 절대, 내 정체를 말하지 않겠다고.

그 세계에서의 나는 국민 영웅 같은 게 아니었기에 해당 사항이 없어 네가 날 안다고 해 봤자 신기루라 부르는, 고작 그 정도에 그치고 그 외에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이 세계에서의 나는 그 ‘해당 사항’에 포함될 것이다.

파앗―!

“……어…… 어! 어디가?!”

일단 이 세계가 자신이 아는 자신의 세계가 맞는지 확인해야 했다.

시간을 돌아온 덕에 뜻하지 않게 많은 시간을 얻어냈다. 무언가를 바꿀 시간은 충분히 있으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현 상황을 보고 계획을 짜야 했다.

빵! 빵!!

“아. 젠장!”

“여기 완전 맛있대!”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거야……?”

밖으로 나오자, 어김없이 시끄러운 도시의 소음이 지한을 반겼다. 그건 이곳이나 저곳이나 한결같이 똑같았다. 같은 한국이라는 기본 베이스는 같아서 그런 건지도.

하지만 아주 크게 다른 점은 역시…….

「“이번 B급 게이트 클리어는 역시 사계절에게 배당이 되었습니다. 현재 녹음과 유예는…….”」

“와. 대박. 이번에 S급 뜬 그 인간 아냐?”

“헐……! 진짜?! 어디?!”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과학이 아닌, 게이트와 헌터.

그리고 발을 떼어 바깥으로 나가자마자 자신을 알아보는 시선을.

세계에 완벽히 속해 있단 확연한 존재감.

황급히 몸을 확인했다. 충만한 마력과 자신을 향한 세계의 관심이 확연히 느껴졌다.

정말로 돌아온 것이다. 내가 주인공인, 내가 주축인 세계에.

절대 추방당할 일 없는, 나의 세계에.

“……어…… 어……!!”

“와. 졸라 빨라…….”

온몸에 희망이 차올랐다. 이번에는 정말로, 드디어……!

소망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은 그 어떤 것보다 달콤하고 사람을 미치게 했다.

전속력으로 너를 향해 달려갔다. 네가 어디 있는지, 알아낼 필요도 없었다. 이미 영혼에 각인되어 있는 너를, 다른 곳도 아닌 네 세계에서. 느끼지 못할 리 없으니까.

지금 만나는 너는, 내가 만나온 너 중 가장 어린 나이였고, 지금까지 내가 만나보지 못한 윤지호였지만. 그런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나이가 다르다 해도, 너는 언제나 너였고. 그 어떤 너라도 나는 미친놈처럼 그 어떤 너를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마치 영혼에 새겨진 것처럼.

“……S…… 헐…….”

“……미…….”

마력을 아낌없이 쏟아부으며, 유지한은 달렸다. 신속으로 달려가는 중 자신을 알아보는 이들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긴 했지만 그런 건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

“……엄마야!”

유지한은 다시 마주할 수 있었다.

“……하아…… 하…….”

“……뭐…… 뭐……. 유지한?”

자신의 세계에서.

“안녕하세요.”

새로운 윤지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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