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유지한은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어느 날, 그녀가 말했다.
“……솔직히 고백해요.”
지금 자수하면 봐줄게요.
매우 진지하고 묵직한 목소리에 지한은 심장이 철렁였다. 시시때때로 채워지는 기억 속에서, 저 목소리에 버림받은 적도 있었고, 상처받은 적도 수없이 많았기 때문에.
트라우마 수준인 기억에, 철렁인 심장을 지한은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그 많은 기억 속에서 보았다시피 윤지호는 한 번으로 아웃을 시키지 않았다. 자신이 선택한 만큼 책임을 지려 했고, 어느 정도는 용인도 해 주었다.
지금 ‘현재’로서는 걸리는 것도 없었고, 무언가 걸렸다고 해도 처음일 뿐이었다. 그러니 아직은, 그녀에게 버림받을 만한 건더기가 없었다.
그러니 진정하자. 그렇게 열심히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몇 번이고 거절당하고 버려졌던 지난 트라우마가 이미 가슴속 깊이 새겨진 탓일까, 한 번 놀란 가슴은 쉽사리 진정이 되지 않았다. 말을 듣지 않는 심장을 들킬까, 그걸로 의심을 살까 무서워 지한은 손을 말아 쥐었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러니 이렇게 또 다른 빌미를, 치부를 들켜서는 절대 안 되었다. 감춰진 치부도, 버림받을 이유도 넘치는 남자는 불안감보다 공포심을 더욱 크게 느꼈기에 간신히 입가에 미소를 유지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예? 갑자기 무슨…….”
그런 지한을 전혀 알 리 없는, 지호는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지한을 향해 말했다.
“내 음식 취향부터, 어떻게 일어나는지, 심지어 내가 뭘 하고, 뭘 입을 건지 취향을 다 꿰고 있어요?”
심지어 본인 취향은 1도 모르는 절대 둔치 호구 주제에!
두 눈이 확고한 불신으로 빛났다. 그것을 보며 지한은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아니, 저도 제 취향쯤은……. 아니 지호 씨 취향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는 보면 보이지 않…….”
“됐고. 빨랑 불어요. 내 뒷조사했죠. 대체 어떤 놈이 내 뒤를 캔 거예요?”
……믿지 않으시는군요.
불신으로 가득한 단호한 눈동자에 지한의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그러면서 지난날의 자신을 조금씩 돌아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그렇게…… 신뢰가 없었나.
열심히 머릿속을 뒤져 보았지만, 확실히 저가 그렇게 눈치 빠르게 행동한 적도, 누구의 스타일이 달라져도 눈치채는 모습을 조금도 보여 준 적이 없었다는 것만 떠올라 딱히 변명할 거리가 없다는 것만 깨닫게 되었다.
미리미리 밑밥 좀 깔아 놨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가 닥치긴 했지만, 제 진심이자 할 수 있는 변명이 유일하게 하나 있긴 했다.
“내가 당신을 모를 리 없잖아요. 처음부터 얼마나 열심이었는데요.”
불행과 같이, 이건 처음부터. 언제나 같았기에.
“…….”
“어떻게 당신에 대해 몰라요.”
어떻게 당신을 봐 왔는데.
‘처음’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당신의 눈에 들기 위해 처절하게 굴었던 게 이렇게나 선명한데.
* * *
처음 세계에서 튕겨 나왔을 때, 다시 당신을 만나러 가겠다는 일념 하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한 번 세계가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고 난 뒤였기에, 세계가 또다시 쉽게 허용해 줄 리 없었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어 발버둥치다, 그는 비로소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이 가진 것을 하나 희생한다면 잠시지만 세계에 틈이 생긴다는 것.
그렇게 그는 한 가지를 포기하고 그녀의 앞에 다시 당도했다.
“뭐야. 또 왔네.”
자신과 ‘서유라’와의 인연과 운명. 기억을 내어놓고.
제 인생에 있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는 친구를 영원히 포기하기까지 하며 왜 그토록 그녀를 만나고 싶었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쭈욱―
“……?”
“뭐야. 꿈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네?”
하지만 그 의문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제 앞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남자를 보고 놀라기는커녕, 너무나 쉽게 손을 뻗어 볼을 늘리며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여자 때문에.
또, 태어나 처음 겪는 황당한 경험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세상에 이런 담대하고 특이한 여자는 처음이었다.
“이젠 놀라지도 않네.”
“정신줄 놨을 때, 이미 한 번 봐서 그런가. 생각보다 그냥 그러네.”
“……경각심 안 가져?”
“음. 그러기에는 뭔가 촉이 딱 와.”
“……촉?”
“당신은 절대 나한테 해를 끼치지 못할 거 같다는 거?”
허.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그 촉이 틀렸다면 어쩌려고 그러는 것인지.
원흉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럼에도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러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감을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것 같았다.
“……남자는 다 늑대라는 말 안 들어 봤어?”
해서, 답지 않게. 오히려 그녀가 경각심을 가지면 안 되면서도 그런 말을 내뱉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지금의 자신이 하면 지독히도 맞지 않는 말이었다.
그에, 그녀는 그런 나를 보며 ‘뭐 저런 게 다 있을까.’ 하는 한심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이내 눈이 짓궂게 빛났다.
“늑대는 맛있지.”
“……어?!”
“기본적으로 난 늑대를 잡아먹는 쪽이지, 먹히는 쪽이 아니라서. 흠. 그쪽이 늑대라면 관점을 달리 봐야 하나.”
이 여자는 지금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아는 건가.
너무 놀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런 나를 보며, 그녀는 이제 아예 작정한 듯 나를 뜯어보았다.
“흠. 얼굴은 나쁘지 않고. 몸도 괜찮아 보이고. 이쪽 사이즈만 괜찮으면 잡아먹을 맛 나겠는데.”
“어. 어딜 보는 거야!!”
시선이 아래로 쭉 내려가자, 반사적으로 그곳을 가리며 소리를 질렀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소리를 질러 본 적은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여자한테. 그것도 이렇게 노골적인 희롱 역시 당해 본 적은 처음이라 도저히 아무렇지 않게 굴 수가 없었다.
“오. 반응도 좋은데?”
“무. 무슨……! 뭐 이렇게 대놓고 말하는 거야! 부끄럽지도 않아?!”
절박한 내 외침에, 그녀가 심드렁하게 귀를 후볐다.
“뭐.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그랬던 거 같은데.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서 새삼? 무조건 사랑하는 사람이랑만 해야 한다는 뭐 그런 로망도 사라진 지 오래고. 스물일곱이나 먹고 뭐 불장난 정도는…….”
“저. 정도가 아니거든!!”
아직도 그건 사랑하는 사람과. 라는 로망을 신념처럼 간직하고 있는 29세 남자가 외쳤다. 무, 무슨 사람이 이렇게 저돌적이고 야한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심지어 가장 충격인 건, 저런 소리를 정말 담백하게, 식전 수프 먹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고지식한 건지, 자신이 본래 있던 세계와는 달리 이 세계가 개방적인 건지. 아니면 눈앞에 있는 이 여자가 원래 이런 사람인 것인지 대혼란이 왔다.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져 눈이 팽팽 돌아갔다. 그런 나를 보며, 그녀가 피식 웃었다.
“아이고. 어린아이셨네. 요 어린이.”
슥슥―
머리를 쓰다듬는 게 영락없이 아이를 다루는 모습이었다. 그 무례하면서도 묘하게 다정함이 느껴지는 손길과 미소에 나는 그제야 놀림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해.”
“오구. 그래. 누나가 나빴어요. 옹옹.”
자기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을 것이 뻔하면서 영락없이 어린 동생을 다루는 듯한 투의 놀림에, 억울하기도 하고 서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보다 더욱 컸던 건, 어리석게도 기댈 수 있다는 안심과 어리광이었다.
“진짜 나빠. 정말 열심히 해서 만나러 온 건데…….”
“응? 어째서?”
굳이?
그 말은 좀 이해하지 못하겠는 듯 그녀가 맥주 한 캔을 손에 쥔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얼굴 한 번 조금 본 것이 전부.
이름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그리 열심히 해서 만나러 올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자신이 생각해도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몰라. 그냥, 당신이 한 번 더 보고 싶었어.”
정말 그게 전부였다.
사소하고도, 충분한 설명도 안 되는 이유. 고작 저런 충동 하나에 자신의 몇 없는 인연을 대가로 바치고 왔다는 것이 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가장 우스운 것은, 지금도 여전히 그것을 후회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담고 고집을 부리는 아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는데, 맥주를 마시고 있던 그녀가 갑자기 조금 곤란한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이제 와서 수상해 보이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부담스럽기라도 한 걸까. 점점 더 서러워지는 생각에 눈가에 눈물이 크기를 키워갔다.
그런 내 앞에 그녀가 다리를 굽혀 눈높이를 맞추었다. 이윽고 그녀가 내뱉은 답은, 내 생각과 사뭇 다른 답이었다.
“저기…… 술 마신 사람한테 그런 소리 함부로 하면 안 돼.”
“……?”
“확 잡아먹는 수가 있다?”
화아악―!
생각지도 못한 말에 얼굴이 타오를 듯 불타올랐다.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무, 무슨…….”
“진짜 꿈 아니지? 뭐 이리 내 취향의 얼굴로 이렇게 취향을 저격하는 말을 해.”
사람 꼴리게.
솔직하게 툭툭 튀어나오는 필터링 없는 말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게 바로 어른의 연륜이란 것인가.
이런 쪽으로는 조금의 연륜도 없는 햇병아리가 생각했다. 그런 나를 보며 그녀는 살짝 내 이마에 딱밤을 놓았다.
딱―!
“아……!”
“고러니까, 그만 집으로 돌아가시죠. 어린이. 진짜 내가 잡아먹기 전에.”
“내 이름도 뭐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살며시 반항을 해 보았다. 제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순수한 궁금증이기도 했다.
그에, 그녀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환상이 엄청 많으신 분이네. 고작 몸 좀 맞대는 건데 뭐 그리 많은 게 필요해.”
“…….”
“얼굴 내 취향이고, 몸도 괜찮고. 성격도 귀엽고. 무엇보다…….”
“…….”
“내가 끌리면 끝 아닌가?”
뭐 그렇게 많은 의미를 부여하냐고, 그녀가 어린아이를 보듯 웃었다.
그런 것 하나에 인생이 바뀌고, 세상이 바뀔 것이라고 생각할 나이는 지나지 않았나.
그녀의 사상이 엿보이는 미소였다. 그 미소에 나는 진심으로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네 집에 멋대로 침입한 침입자한테 어떻게 그런 생각이 들 수가 있어…?”
그녀에게 섹스가 고작 그런 의미여도, 지금 이 상황에는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지 않나.
가택 침입범을 잡아먹다니. 그 가택 침입범 본인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구구절절 맞는 말에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그래. 그럼. 맞지. 원래의 나라면 벌써 두드려 패고 경찰 신고 각이지.”
“근데 왜…….”
“음. 술 처마셔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참 이상하게…….”
“…….”
“넌,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안 들어.”
드디어 내가 미친 건가.
라며 맥주를 들이키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를 보고 문득 한 가지 가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 세계에 무단 침입한 침입자.
아예 이 세계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평소 가지는 관념도 비튼 것이 아닐까 하는. 세계에 속하지 않았기에 세계의 법에 속하지 않으며, 어떤 사고에도 속하지 않을 테니까.
유령을 경찰에 신고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그것처럼 지금 내 존재는 세계에 유령과도 같은 이물질에 지니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에게 어떤 악의도 사지 않는. 아니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갑자기 등골에 소름이 끼쳤다. 그럼 지금 이 이상한 호의는 그녀가 그 이질감을 깨닫는다면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는 것이었다.
잠시 동안이면 자각하지 못할 수 있었지만, 언제 어떻게 그것을 깨닫고 그녀가 정신을 차려 자신을 거부할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첫 만남부터 그가 보기에도 이질적인 것투성이었다. 정신을 차리면 달라질 것이 분명했다.
그 순간 분명하게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자리를 잡았다. 어떤 것을 바치게 된다고 해도, 지금 이 호의를. 올곧게 나를 바라보며 웃는 저 눈을… 포기할 수 없었다.
촉―
“……!!”
무슨 미친 짓을 해서라도. 후에 그녀가 정신을 차려도, 자신을 거부할 일이 없게.
자신이 벌인 일이니 그저 받아들이게.
“……잡아먹는다며.”
그런 것에는 몸정만한 것이 없지 않을까.
본인이 맘껏 취하면, 취했다는 기억은 남을 터이니 쉽사리 나를 매도하지 못할 것이다.
“핫…… 네가 미친 건지. 아니면 내가 미친 건지.”
그렇게, 처음으로 약은 생각을 했다. 나는 나를 내주었으니, 나를 버리지 말라고. 애원할 핑계라도 갖고 싶어서.
“후회하지 마라?”
그렇게 내가 처음 만난 것은, 27살의 윤지호였다. 스물일곱에, 내가 도무지 감당할 재간이 없는 당돌하고 매력적인 윤지호.
몸이 가면 마음도 간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하암. 이번엔 안 사라졌네.”
“열심히 잡아먹혔는데 사라지면 억울해서 못살아.”
“얼씨구. 하룻밤 사이 많이 컸네.”
사랑에 빠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난…… 유지한. 네 이름은?”
처음 느껴 보는 사랑이란 감정은.
“……하암. 윤지호.”
“……윤지호.”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달콤한 맛이 났다. 무슨 짓을 해도, 그 무엇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만큼.
* * *
바친 대가가 꽤 커서일까. 다음날이 되어서도, 해가 중천이 되어서도 이 세계에서 튕겨 나가지 않았다.
“흐아암…….”
“그만 자지?”
“날 졸리게 만든 놈이 그러니 겁나 얄미운데.”
그러니 적당히 하고 자지 그랬어?
물론 하루밖에 안 되는 시간에 저 놀림까지 적응이 될 리는 없었기 때문에, 타오르는 얼굴을 조절하지 못하고 그녀에게 웃음을 선사했지만, 그것까지 너무나 좋았다.
행복했다.
“……치킨!”
“……18시간 자고 치킨은 좀 아니지 않아?”
“괜찮아. 육식녀라.”
“아니 그 문제가 아닌 거 같…….”
“음. 오늘은 뿌X클이다!”
“…뿌X클?”
덕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맛의 치킨을 알게 되고.
“BXC는 뿌X클이고, BXQ는 황금X리브지. 그리고 교X은 별로 안 좋아하고. 아. 지X바도 좋은데. 흠…… 갑자기 말하고 보니 고민되네?”
네 치킨 취향을 습득했다.
물론 줄줄이 외는 치킨 종류를 한 개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하나하나 꼼꼼하게 기억했다.
네가 좋아하는 거니까.
“짠―!”
“……짠.”
좋아하는 맥주는 하이X켄.
같이 치맥을 먹고 마시며, 이유 없이 서로를 마주 보며 웃으며.
“아. 이래서 뿌X클을 끊을 수가 없어.”
“……애들 입맛.”
“뭐가 어째? 감히 뿌링클을 비하하다니. 죽어랏!”
“앗! 가루 날려!”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는 대화를 하며 시시덕거리고 깔깔대는 시간. 평생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그 시간은, 너무나 새롭고 짜릿하며 꿈만 같았다. 저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동안은 그렇게만 생각했던 이 모든 것들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이런 마음이었기에, 이런 기분이었기에, 눈에 보이는 소득이 없어도 사람들이 그렇게 못 가져 안달이었구나. 그래서 이 시간을 손꼽아 기다리는구나.
성인이 되고도, 한참 지난 나이가 될 때까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 내게는 세상 그 어느 것보다 지금 이 순간의 모든 것들이 달콤했다.
“까앗―!”
“어어……!”
그러다 정말 맥락 없이 입이 맞닿고.
그대로 또 속절없이 서로 몸을 맞대고.
너를 사랑하다 못해, 이 시간까지 사랑하게 되는 건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사랑했던 것처럼.
띠리리릭―
“……아. 출근.”
“오늘 출근 날이구나.”
“백수였음 좋겠다.”
돈 좀 많아 봤음 소원이 없겠네.
켜켜이 서린 진심 어린 아쉬움을 토하며, 다리를 질질 끌며 지호가 화장실로 기어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무심히 생각했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 수 있는데.”
세계를 구한 영웅이었는데, 그깟 돈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행히도, 3대는 아쉬움 없이 살아도 될 돈이 통장에 넘쳐났다. 그게 아니어도 나 하나 정도는 평생 아무것도 안 해도 될 정도로 돈은 원래 충분히 많았다. 그 집안의 상속권을 완전히 포기하는 대가로 받은 돈의 액수도 상당했으니까.
아까 보아하니, 이곳은 게이트나 헌터 같은 직종이 없을 뿐. 기본적인 것은 다 원래 자신의 세계와 같았다. 쓰는 돈 역시 마찬가지고.
자신이 가진 돈을 이 세계에서도 쓸 수 있는지 의문이지만, 어쨌든 되기만 한다면 적어도 그녀에게 신세 지지 않으면서 이것저것 해 줄 수 있는 범위가 커질 것이다. 이렇게 그녀에게 나를 어필할 포인트를 하나 또 찾았다.
【세계가, 자신의 세계의 이변의 징조를 감지했습니다.】
【세계가 당신의 존재를 눈치챘습니다.】
【세계가 당신을 추방합니다!】
그 순간, 자신의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세계가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리고는 곧장 자신을 추방했다.
순간 놀라긴 했지만, 처음처럼 절망에 빠지진 않았다. 오히려, 새롭게 안 사실에 기뻐했다. 우연히 들어갔을 때보다, 대가를 바쳤을 때 훨씬 오랫동안 머무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더 가치 있는 것을 희생하면…… 지금보다 조금 더, 그녀와 있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가진 것을 희생해야 함에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제가 가진 것 중 어차피 내게 진심으로 가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것들보다, 네가. 너와 함께 있는 시간을 훨씬 가치 있게 느꼈기 때문에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희생해야 한다는 것도 깨닫지 못할 정도로.
“나 죽어…….”
“어…… 쓰러져…… 야!”
“……나이스 캐치.”
그렇게 망설이지 않고 실행에 옮긴 덕에 퇴근하고 오는 너를 타이밍 좋게 맞이할 수 있었고.
“아침에 나 안 보고 갔지?”
“……아침에 내가 뭘 볼 수 있었어? 대박인데?”
“……눈은 뜨고 다녀.”
“뜨고 다녀. 기억을 잘 못 할 뿐이지.”
“……아니…… 후우.”
둔한 건지, 아니면 세계의 영향력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아침에는 네가 뭘 보고, 뭘 하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원래 반만 깨어 있는 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오구오구. 우리 애긔. 삐졌어용?”
“……놀리지 마.”
“흠. 재밌는데…… 알았어.”
그리고, 한 가지 아주 유용한 것을 알게 되었다.
의도치 않게 알게 된 것이지만, 그녀는 내가 짓는, 울 것 같은 얼굴에 매우 약했다.
“헐…… 신세계를 알아낸 기분이야.”
“……흑.”
“아…… 알았어. 안 할게. 뚝!”
장난을 치든.
“……너 뭐 하냐. 아. 그거 아니라고!”
“그냥 너한테 해 주려고…….”
“아니. 그래도 이 핵 폐기물을 만들…… 알았어. 좋아. 마음은 예뻐. 예쁘다니까?”
화가 나든.
“……아. 귀찮게 하지 말고 좀 저리 가.”
“……귀찮아?”
“어. 지금은 솔직히 좀……. 아. 안 귀찮아. 안 귀찮다고. 그래. 뭐 해 줄까?”
귀찮아지든.
내 ‘울려는 얼굴’에 매우 약했다.
뭘 하려다가도 내가 울먹거리는 얼굴을 해 보이면 바로 말을 바꾸며 나를 달래려 했다.
내 얼굴이 취향이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냥 그런 얼굴에 약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처음으로 내 얼굴에 감사했다. 어떤 얼굴을 하든, 이 얼굴이 그녀의 마음에 든 것은 분명했으니까.
이 얼굴이 쓸모가 있을 줄이야. 생각지도 못했지만, 기꺼웠다. 네 마음에 드는 것이 뭐 하나라도 있으니까.
언제든지 네 눈앞에서 사라져 버릴 수 있는 자신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자신을 너무나 쉽게 잊을 너를 잘 알았기에, 그것은 무척 기쁜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노력하며, 열심히 얼굴을 써먹었다.
사실 내게 신경 써 주는 네가 좋아서 더 그랬던 것도 있었다.
“아. 씨. 너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잔뜩 들뜨는 마음에 너무 자주 써먹어서, 눈치를 챌 정도였지만 효과는 언제나 만점이었다. 그녀가 얼빠임에 가슴 깊이 감사하는 순간이었다.
“……어? 너 몸이…….”
“……어?”
“유지한―!!”
【세계가, 자신의 세계의 이변의 징조를 감지했습니다.】
【세계가 당신의 존재를 눈치챘습니다.】
【세계가 당신을 추방합니다!】
그렇게 행복에 흠뻑 젖어있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세계는 그녀의 눈앞에서 다시 나를 추방시켰고.
자신은 망설이지 않고 다시 대가를 지불했다.
처음에는 서유라와의 관계.
그다음은 성녀와의 관계.
또 그다음에는 원티드 길드원들과의 관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완전히 남이나 다름없는 아버지와 형제들의 관계까지 대가로 인정이 되었다. 망설임 없이 전부 쏟아부었다.
그렇게 추방과 다시 진입을 몇 번이나 오갔을까. 이제는 그런 나를 모를 수 없는 그녀가 내게 말했다.
“몇 번을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지. 혹시 내가 모르는 슈퍼 히어로세요?”
“……비슷할지도?”
일단 일반인은 아니니까.
그렇다고 여기에 있지도 않은 헌터 같은 걸 말해 봤자 더 황당해할까 봐 멋쩍게 웃으며 답을 무마했다. 그에 마주 웃어 주면서도 그녀가 시니컬하게 말했다.
“그것보다 유령이랑 비슷하지 않나. 아니 신? 아 둘 다 비슷한가. 현신했다 힘 다 떨어져서 사라지고, 힘 생기면 다시 현신하는 느낌이란 말이야?”
“…어.”
무척이나 예리한 말이었다. 내 의지로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눈으로 보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차마 다른 세계에서 왔고, 추방당했으나 대가를 바쳐 몰래 침입하고 있다는 것을 뭐라 설명할 수 없어, 고민하다 입을 다무는데, 마치 그런 나를 알고 있다는 듯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다만, 내게 한 가지 사실을 알려줄 뿐이었다. 그녀 나름대로 고민을 하다 알려주는 진실인 듯한 얼굴로.
“그래서인가. 네가 사라지면, 너 자체를 잊어버리는 거 같아.”
“……뭐?”
“단순히 까먹는 게 아니라, 너란 존재 자체가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거 같은 느낌이야. 인생에서 네가 있었던 적 없던 것처럼.”
“…….”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런 나를 보며, 그녀는 걱정 말라는 듯 웃으며 다른 사실 역시 말해 주었다.
“그래도 너를 보면 귀신같이 다 기억나. 아마 네가 있어야만 기억이 유지되나 봐. 그래서 네가 진짜 신인가 싶었지? 보통 드라마나 소설 보면 신들이 딱 이런 페널티 가지고 있잖아?”
그녀 나름대로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는 듯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나는 도저히 그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발밑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너무나 안일했다. 그냥 대가를 바치는 것만으로도 다 될 것이라는 생각을 어찌 그리 쉽게 할 수 있었을까.
세계는 한 번도 제게 우호적이었던 적이 없는데.
자신은 이 세계에 억지로 침입한 불순물과도 같았다. 그런 나를 추방하면서 당연히 이 세계가 불순물과 관련된 모든 걸 치우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는데.
나를 보는 그녀가 늘 나를 기억했고, 언제나와 같이 굴어서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스스로가 바보 같아서 욕이 나올 것 같았다.
더불어, 처음 품어 본 소박한 욕심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는지도. 잠시의 시간에 불과하겠지만, 이 망막에 나를 새기고 싶다는. 그녀의 기억에 남고 싶다는 것은, 나는 소박하다 여겼던 바람이었으나 실은 세계를 뒤트는 것만큼 위대한 소망이었다.
“……유지한? 유지한 님?”
어쩜 이리도 세계는 내게 잔인한가.
누구보다 세계를 위해 충실히 살지 않았는가.
자신처럼 세계가 따르라는 대로 따른 이가 있는가.
그러데, 어째서 이리도 모질고 조금의 자비도 주어지지 않는 것인가.
이럴 거면 너를 보여 주지나 말 것이지.
너를 만날 조금의 틈조차 내어 주지 말 것이지.
“……죽었나? 여보세요? 이대로 승천해? 진짜?”
차라리 처음부터 맛보지 않았다면 욕심조차 내지 않았을 것을.
촉―
“뭐야. 살아 있는데? 그렇게 충격적인 이야기야?”
아니. 그건 자신할 수 없었다.
나는 분명, 어떻게 한다 해도…….
“……당연하지.”
“앗. 살아났다. 내 유지한.”
너를 욕심낼 수밖에 없었으니까. 마치 그렇게 태어난 것처럼.
“……내가 네 거야?”
“음. 내가 먹었고. 나만 기억하고, 나만 보고, 내 곁에 있는데…….”
“…….”
“왜, 네가 내 게 아니야?”
말이 안 되잖아?
언제나 태양처럼 빛나며, 나를 끌어당기는 너를. 나는 어떻게 해서든 발견했을 것이고. 어떻게서든 욕심을 냈을 것이다.
내 앞에서 자신 있게 내가 자신의 것이라 말하는 너를 보며 나는 확신했다.
“그 말 취소 못 해.”
“뭐야. 누가 환불한대? 굳이?”
그래서 유지한은 처음으로 용암처럼 들끓는 욕심에, 처음으로 순응하기로 했다.
“이렇게 예쁜데?”
너무나 당연하게 나를 예쁘다 말하는 네가 너무나 가지고 싶어서.
“평생. 내 평생을, 내가 가진 전부를 다 줄게. 그러니까…….”
“…….”
“넌 나한테 너를 줘.”
그날, 유지한은 처음으로 세계를 뒤틀기로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