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권-22장. 늦지 않게 버스에 탑승하세요. (23/30)

목차

22장. 늦지 않게 버스에 탑승하세요.

외전. 유지한은 많은 것을 알고 있다.

23장. 나를 위해, 제 전부를 내던진 사람이 있었다.(1)

22장. 늦지 않게 버스에 탑승하세요.

또다. 또.

빌어먹을 박탈감에 유지한은 이를 악물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입 밖으로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직은, 아니 앞으로도 평생 다른 이들에게 이런 모습을 들키지 않아야 하기에 속으로 간신히 꾸역꾸역 삼키고 있었지만, 금방이라도 터지기 직전이었다.

이래서 불안했던 것이다. 그토록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한 게 이 때문이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너는, 롤러코스터 같은 사람이었고 또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어느새 저 멀리로 가 버리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항상 너를 쫓아가기 급급한 나는, 차라리 네가 어디로도 가지 못했으면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꿈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그저 곁에 붙어 다니기라도 하고 싶었다.

물론 ‘나도 내 생활이 있지 않겠어요?’라며 부드럽게 자신을 밀어낼 그녀를 알지만, 그래도 또 내가 막무가내로 떼를 쓰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어지간하면 내 뜻대로 하게 해 줄 그녀를 알고 있었기에.

그저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너무도 벅찬 나는 걸음을 맞추기 위해서는 생떼를 써야만 했다.

나를 싫어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나를 귀찮아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만약 그대로 앞으로 나아가게 두면, 뒤를 잠시 돌아봐 주기는 하겠지만 그뿐일 것이다. 다시 내게서 등을 돌려 나아갈 그녀를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라도 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게는 너를 붙잡을 방도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너는 그런 나를 비웃듯, 홀연히 내가 모르는 사이 날아가 버렸다. 자신의 멍청함에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언제나 그런 식이었는데…….’

이런 적이 한두 번 있었던 것도 아닌데, 또 속아 넘어갔다.

이렇게 될 것임을 분명 알고 있었으면서도.

처음 당하는 거라면 몰라도, 매번 이렇게 번번이 물을 먹는데도 여전히 또 그녀를 믿고 뒤통수를 맞고 있다니.

안이한 자신의 모습에 신물이 났다.

“……유지한?”

“……어……?”

“길드장님. 삐지신 거 같은데?”

“근데 뭐. 잠깐 나갔다 온다는 건데 뭐 그렇게 세상 무너지는 것처…… 윽―!”

“낄끼빠빠하자.”

이번에는 절대 실수하면 안 되는데.

조금이라도, 틈을 만들어서는 안 되는데.

왜 이렇게 멍청하게 또 틈을 허용해 버리고 마는 것인지.

“……어……. 운다―!”

“너 때문이잖아!!”

이럴 때만큼은 그녀에게 항상 지고 마는, 연약한 내가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럼…… 가라. 동생군!”

“아니 나더러 뭘 어쩌라고요!”

“그래도 동생이니 우리보다 나을 거 아냐.”

“내가 윤지호도 아니고 그게 무슨 의미인데요?!”

사랑하게 된 뒤로 언제나, 수백 번 그 사실을 후회하곤 했다. 이렇게 눈물만 찔끔거리는 게 아니라, 네 앞에서 소리 내서 울어 본 적도 있었고. 제발 내가 바라는 대로 해 달라며 어린애처럼 떼를 쓰기도 했다.

지난날의 기억까지 합하면 흑역사만 수백 개였다.

【세계의 통로(S)를 발동합니다.】

“……!”

그럼에도 또 이렇게 금세 잊어버리고, 당해 버리고 마는 것은…….

“……지호 씨―!”

언제나 이렇게.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으로, 너는 내 지난 후회, 고뇌, 슬픔. 모든 악감정을 한 번에 날려 버리곤 하니까.

“짠―! 내가 먼저 마중 나왔어요.”

그렇게, 다시 날 설레게 하니까.

* * *

“우와. 뭐야. 왜 바로 밑에 다 있었던 거에요?”

그대로 깔아 버릴 뻔했네.

맞는 표현이긴 한데, 윤지호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듣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던 탓에 윤지우가 질겁했다.

“갑자기 하늘에서 자기가 나타나 놓고 무슨 개소리야!”

그리고 세계관 1위이자, 세상에 제 밑에 아무도 없는 안하무인 최강자는 그런 동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넌 왜 갑자기 급발진이야?”

“……말을 말자.”

왜, 저런 게 내 누나지?

덤비지도 못하고 윤지우는 그대로 제 동료들의 품에 뛰어들어 위로를 받았다.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한 거라고는 물은 대로 솔직하게 대답한 죄밖에 없는 나로서는 굉장히 억울한 일이었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윤지우를 토닥이는 길드원들을 보니, 내가 누나인지 저들이 은혜 모르는 저 동생 놈의 형과 누나인지 살짝 분간이 안 되기 시작했다. 내 동생이 남의 동생이 된 것 같은 구슬픈 기분을 느끼고 있는데, 갑자기 가슴팍에 있는 인간의 부비부비가 느껴졌다.

누가 봐도 날 좀 봐 주세요. 하는 몸짓이었다. 그에 고개를 돌려 내 품에 있는 인간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내려올 때는 내가 그의 품에 안긴 모양새였는데, 어느새 포지션이 바뀌어 버렸다. 내가 그의 품에 안착하자마자 바로 내 품에 제 얼굴을 묻어 버린 남자 덕이었다. 뭐 이런 점이 이 남자의 매력이고, 귀여운 점이라 아기자기한 마음으로 지한을 내려다보는데…….

“응? 뭐야. 왜 울었어요?!”

빨개진 눈가와 눈두덩이에 맺혀 있는 그렁그렁한 눈물방울.

누가 봐도 운 게 자명한 얼굴이었다.

“뭐야? 누가 울렸어?!”

감히 우리 애를 울리다니.

걸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분노 어린 목소리에 윤지우가 진짜 가지가지 한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너요. 너님이요.”

“……응? 나?”

“네. 너예요.”

너 아니면 누가 저걸 울려요.

그새 유지한을 어느 정도 파악한 건지, 윤지우가 말 같은 소리를 하라고 보란 듯 혀를 찼다.

의외로 예리한 대답에 납득을 당해 고개를 돌려 유지한을 바라보자, 유지한이 그 말이 맞다는 듯, 눈가에 눈물을 더 그렁그렁 달고 내 품에 고개를 묻으며 말했다.

“어디 안 간다면서요…….”

그리고 그 대답에, 내 정신은 안드로메다로 향했다.

그니까, 운 이유가 이거라고?

이동을 차로 한 것도 아니고, 순간이동을 사용해서 이동 시간도 사실상 얼마 없었다. 중간에 방황을 좀 했다고 해도 내 외출 시간은 고작해야 1시간이 채 지날까 말까였다.

누가 보면 내가 혼자는 산책도 못 나가는, 주인 동반 외출만 허용되는 반려견인 줄 알 것이다. 물론 집에 있겠다 했지만, 보통 그래도 잠깐 마트 갔다 오거나, 카페만 갔다 금방 집에 온다는 뜻도 포함되어있지 않나? 내가 모르는 사이 대한민국의 암묵적 의사 표현이 달라졌나 의심까지 들었다.

그런 나를 보며 같이 정신이 안드로메다로 향했던 성위님이 말씀하셨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지금까지 오냐오냐한 게 이제야 돌아오는 모양이라고. 이참에 한 번 교육의 필요성이 있다 강하게 주장합니다.]

……매우 합리적이고 끌리는 건의 사항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사람이고, 남친이자, 내가 위로 끌어올려야 할 주인공님인데 진짜 강아지 교육시키듯 앉혀 놓고. 이건 아니에요. 이런 건 나빠요. 안 나빠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알았죠?! 라고 설명을 하고 있자니 그것도 또 나름대로 엄청난 현타가 찾아올 것만 같아 망설여졌다.

그래서 나름대로 회유책으로 말을 돌리는 걸 택했다. 일단 그래도 처음이니까 나름대로 상냥하게.

“외출이 여기 오는 건데?”

“……거짓말.”

이런 안 통하네.

그래도 나름대로 심통이 제대로 났는지,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며 고개를 푹 파묻은 채 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 말하자마자 바로 안 지켜서 속상한 것은 이해해 보자면 꽤 이해가 되긴 했다. 내가 남친을 사귀는 건지, 애를 키우는 건지 살짝 분간이 안 갔을 뿐.

“어머. 우리 유지한 씨가 심통이 많이 났네.”

그것조차 우습고, 재밌고, 또 귀여워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다른 새끼가 했다면 이 새끼가 돌았나. 하고 정색을 하고도 남았을 일인데, 이게 귀엽게 느껴지다니……. 진짜 나답지 않은, 찐사랑이긴 한 듯했다.

그런 내 웃음소리를 들으며, 또 그것에 기분이 풀린 것 같은 호구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거 알았지만…….”

그래도 속상해요. 싫어요. 나빠요. 라는 투정에 말 대신 녀석을 꼭 안고 머리를 잔뜩 헝클어뜨렸다. 말로는 오글거려 차마 하지 못하는 내가 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애정표현이었다.

우리 호구는 그런 나를 알아서 좋다고 웃었다. 맹목적인 강아지를 보는 것 같았다. 그게 예뻐 또 잔뜩 부비부비해주고 있는데, 뒤에서 짜게 식은 윤지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정 행각 하려면 집에 가서 해.”

속이 울렁거려.

다른 사람도 그런데, 혈육 메이트의 닭살 행각은 더더욱 보기가 힘든 윤지우가 보란 듯 닭살을 긁어내리며 진저리를 쳤다.

그 와중에 눈으로 ‘저건 무슨 남친을 개 다루듯 하고 있어. 근데 그 남친은 또 아주 좋다고……. 천생연분이다. 진짜.’라고 말하고 있어 반사적으로 웃음이 터질 뻔했다. 피붙이는 확실히 맞는지 의외의 곳에서 우리는 생각하는 게 참 똑같았다.

어쨌든 그런 윤지우의 의견을 반영해서 순순히 유지한의 위에서 내려왔다. 유지한이 노골적으로 아쉬운 얼굴을 해 보였지만, 그렇다고 내 움직임을 막을 수 없었기에 조심히 내가 내려오는 것을 도와주었다.

“근데 여긴 왜 왔어?”

설마. 진짜 마중이야?

아니라는 것을 100% 확신하는 눈을 하고 있으면서 설마하는 목소리로 윤지우가 물었다.

내 성격을 너무나 잘 아는 녀석은, 내가 아무리 상대를 좋아한다고 해도 아무 이유 없이 먼저 마중 나오는, 그런 오글거리는 짓을 할 리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겸사겸사면 또 몰라도.

어차피 어쭙잖은 변명이 통할 혈육 메이트가 아니었기에, 그냥 가감 없이 본색을 드러내기로 했다.

“당연히…….”

“당연히?”

“너 포함 다른 사람들까지 전부 다. 슬슬 레벨업 해야지.”

계속 그대로 있다가는 그냥 개죽음 몰살 확정이다?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100% 팩트인 말에 모두의 얼굴이 숙연해졌다.

“그럼, 저희의 성장을 도와주시겠단 말씀이십니까?”

“……버스를 태워 주겠다고?”

네가? 월랭 1위가?

윤지우의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에, 나는 짓궂게 미소를 지었다.

당연한 말씀을.

“나도 원티드 일원인데 이 정도 특전은 줘야지.”

“헐…….”

다른 사람도 아니라 무려 월드 랭킹 1위가 태워 주겠다는 버스에, 모두가 넋이 나갔다. 믿을 수 없는 건지, 상상도 하지 못한 기회를 얻어서 실감이 나지 않는 건지 헷갈리는 얼굴들이었다.

그 얼굴들을 향해, 특별히 윤지우의 눈높이에 맞춰 친절하고 쉽게 다시 한번 선언해 주었다.

“원티드 특전 버스입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에요?”

안 타실 분은 없죠? 머저리가 아닌 이상.

눈높이에 딱 맞는 문구였는지 말이 끝마침과 동시에 모두가 일어섰다.

“지금부터 합니까?”

“장비! 나 수리 맡겼는데……! 1분만요! 사 올게요! 아니 창고라도……!”

“같이 가!!”

“바로 준비됐어요. 전!”

“새치기냐!”

“인생은 선빵이지!”

“그거 이럴 때 쓰는 말 아니거든?!”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아니. 나는…….”

이미 내 버스를 맛보기로 타 봤던 윤지우 놈이 슬금슬금 발을 뒤로 뺐다.

물론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행각이었다.

네놈한테 이게 가장 필요할 텐데 어딜.

“거기 윤지우. 스톱.”

다른 놈들은 다 도망쳐도 되지만 이놈만은 안 된다. 한 방에 나가떨어져 뒤질 것 같은, 여기서 제일 연약한 놈이 어딜 가.

“아아아아! 난 왜! 이미 받았자나―!!”

슬금슬금 뒤로 빠지는 놈의 뒷덜미를 단번에 낚아채자, 잡힌 물고기가 아우성을 쳤다. 그 아우성을 들으며, 나는 보란 듯 혀를 찼다. 기껏해야 맛보기 중 맛보기만 본 놈이 뭘 안다고 이러는 것인지,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우리 중 젤 약골인 이 녀석은 필수니까, 도망가려는 눈치 보이면 몸빵을 해서라도 가둬 놔 주세요.”

“옛썰!”

다른 버스도 아닌 월랭 1위가 태워 주는 특급 버스에 탄다는 사실 하나로 몹시 충성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는 이들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욕심이 없다는 원티드도 이런 거는 욕심 만빵인 모양이었다.

동료들의, 처음 보는 세속적인 모습에 적응이 안 되는지 윤지우가 눈을 땡그랗게 뜨고 당황해했다.

“아니. 뭘 그렇게 즉답해요?!”

“어허. 우리 신입이 뭘 모르네. 이런 건 거절을 하는 게 아니라 무릎 꿇고 절까지 해 가며 빌어야 하는 거야.”

“이런 기적이 얼마나 일어날 거 같니.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은 조용히 입 닫고 있으렴?”

“아니. 여러분이야말로 뭘 모르는 것 같은데, 저거 지옥행 탑승 열차거든요!?”

환호하면서 탈 게 아니라고요!!

맛보기여도 지옥을 진작 보고 온 듯 윤지우가 열변을 토했지만, 이미 레벨업이라는 미끼에 눈이 먼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원래 레벨업이라는 건 피나는 고통과 죽음의 시련 속에서 이룰까 말까 한 것이지.”

“맞아. 고통 없인 어떠한 것도 쉽게 얻을 수 없는 법.”

맹목적인 신도와도 같은 빠꾸 없는 답에, 윤지우는 넋을 놓았다.

“다들 돌았어……. 윤지호! 무슨 짓을 한 거야! 너 세뇌 스킬 썼지?!”

“그딴 거 없…….”

없다고 당연하게 말하려다, 나도 다 보지 않은 스킬창에 확신이 없어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있어도 굳이 이 상황에 쓸 필요가 있어?”

마력 아깝게?

나는 그런 생산적이지 않은 일 따윈 하지 않는단다. 동생아.

인생에 쓸데없는 일은 1할도 하지 말자. 라는 내 신조를 잘 알고 있는 녀석은 그런 나를 또 너무 잘 알아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금붕어처럼 입만 끔뻑이다 이내 ‘아오!’ 하며 분통을 터뜨렸다.

손쉽게 녀석을 잠재우고, 나서 나는 산뜻하게 고개를 돌려 사랑스런 내 강…… 아니 남친님을 바라보았다.

“지한 씨도 가야죠?”

“……네? 저도요?”

“무슨 그런 얼빠진 소리를.”

“……아. 관리를…….”

“매우 당연하지.”

네가 제일 중요해.

* * *

“자. 활기차게 훈련 시작합시다.”

“우오―!!”

마치 신도들을 거느린 주교처럼 선언하자, 내 신교들이 우레와 같은 환호성을 날려 주었다. 흡사 사이비 종교와도 같은 그 모습에 정하나가 소리 없이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이야. 다들 활기 만땅이구만.”

말에 어폐가 있는 것 같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정하나. 공간 가동이나 해 줘.”

“예이. 왕님.”

알아 모십죠. 하며 정하나가 과도하게 굽신거렸다. 평소와 너무나 똑같은 그 모습에, 괜히 나 역시 장난기가 불쑥 솟았다.

“오우. 다른 사람이 하면 겁나 오글거렸는데, 네가 하니 괜찮은데?”

“당연하지. 내가 종종 해 줬잖아.”

“어……. 그건 그러네?”

생각해 보니 저 녀석이 중학교 때부터 종종 저런 소리를 하고는 했었다. 저 녀석이 저러면 다들 따라서 ‘어이구. 우리 왕님.’하고 맞장구를 치면서 놀렸지.

내가 지난날을 추억하고 있자, 본인도 마찬가지였는 듯 정하나도 미소를 지었다.

“태생부터 왕님이셨지. 우리 윤지호는.”

말도 안 되는 첨언을 하면서.

【게이트, 기동합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마석이 발동하며, 공간이 뒤틀렸다.

“이번 테마는 사막인가.”

딱인데? 역시 정하나 센스.

영화에 나올 것 같은 광활한 사막을 보며 감탄했다. 영화를 보면서 언젠가 사막에 가 보고는 싶었는데, 미친 더위를 몇 날 며칠간 견딜 자신이 없어 곱게 접었었다. 그런데 이렇게 버킷리스트를 하나 이루게 되다니.

마력 덕분인지, 실제 사막을 재현한 듯 살갗을 찌르는 듯한 햇살과 더위가 분명히 느껴지긴 했지만 이상하게 조금도 덥지 않았다. 땀도 나지 않았고, 햇빛에 피부가 따갑지도 않았다.

이럴 때 보면 새삼 내가 정말 이제 평범한 인간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곤 했다.

뭐. 그게 사실이지만.

“자. 그럼 이제 무대도 마련이 됐고. 시작할까요?”

활기찬 내 말에, 오늘 이제 아주 삐딱선을 타기로 작정한 듯 윤지우가 투덜거렸다.

“네가 혼자서 우리 다 상대하게?”

머저리 같은 소리였다.

“야. 그럼 훈련이 되겠냐.”

그냥 밟히고 땡이지.

물론 상대는 충분히 가능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냥 일방적인 폭행이었다. 이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여기 있는 이들이 전부 한꺼번에 덤벼도 내가 상대할 수준이 아니었다. 레벨업도 상대가 비등비등해야 깨달음을 얻으며 성장이 가능한 것이다. 수준이 맞지 않는 상대는 오히려 사기만 상실할 뿐이다.

“뭐야. 그러면 어떡하게.”

“1:1 맞춤 수업할 거야.”

“…모르는 사이에 분신술이라도 배웠어?”

닌자야?

참으로 제 또래 애들 같은 말에 진짜 순간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백번 양보해서 평범한 대딩이면 저럴 수도 있겠지만, 깍두기긴 해도 나름 이 바닥에서 볼 거 다 보고 겪을 것도 어느 정도는 겪은 헌터일 텐데.

진짜 내가 졸라 과보호를 한 것인가.

새삼 깨달으며, 이번에는 기필코, 어미 사자가 되기로 다짐했다.

자고로 어미 사자란.

“걱정 마. 너한테 맞춤 선생 이미 찾아 놨어.”

“어? 맞춤 선생?”

“응. 너한테 아주 딱이지. 때마침 올 때가 되기도 했고 말이야.”

“……?”

아기 사자를 절벽에서 떨어뜨려 자립심을 키우게 하지 않던가.

뭐? 아니라고?

아님 말고.

【라이브러리가 펼쳐집니다.】

【저장된 라이브러리 중 한 인물의 스킬 사용 허가를 요청합니다.】

【‘망자의 귀부인’의 권능을 일부 현현합니다.】

콰과과과광―!

“뭐. 뭐야!”

“뭐가 나타나려는 것 같은데?”

“마력이…… 큭……. 이 정도 중압감이라니…… 마왕이라도 나타나?”

【당신의 권속이, 당신의 명령을 이행하고 당신에게 돌아옵니다.】

당신의 명을 충실히 이행한 당신의 종에게, 찬란한 키스를.

그리고 그런 나의 충실한 종이, 내가 준 모습 그대로 내 앞에 나타나 한쪽 무릎을 꿇으며 손등에 입을 맞추어 경의를 표했다.

“사랑스럽고 잔인한. 나의 주인. 당신의 명에 따라.”

“…….”

“전부 이루고 왔어.”

처음 내게 종속되었을 때처럼, 더없이 매혹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그에, 나 역시 녀석을 따라 더없이 아름다운 미소로 화답을 해주었다.

“어서 오렴. 데이모스.”

더없이 아름답고, 위험한. 나의 첫 번째 종에게.

* * *

“자. 여기 네 선생님.”

데이모스와 간단한 인사도 끝냈겠다.

이제 본격적으로 윤지우에게 내가 초빙한 최고의 선생을 소개했다. 나름 매우 고심해서 뽑은 최고의 선생이구만, 그런 대단한 선생을 소개받은 윤지우의 소감은 아주 짧았다.

“누나. 이런 미친.”

“그래그래. 좋지? 엄청나지?”

네가 나 아니면 어디서 이 정도 선생을 구하겠어. 암.

일부러 완벽하게 반어법으로 알아들은 척 말을 하자, 이제는 아예 질린 얼굴로 윤지우가 소리쳤다.

“미친년아! 지금 이거 살인이지?! 그런 거지? 너 이거 고소할 거야!!”

친족 살해야. 이거!

그래도 천치는 아닌지 데이모스와 자신의 격차를 느끼고, 자신은 상대조차 될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나 보다.

매우 다행이었다. 그 정도 눈치는 있었구나.

“뭐라니. 데이모스. 내 동생이야. 죽이면 안 돼. 알았지?”

“호오. 적당히 가지고 노는 건 된단 말입니까?”

“그래. 저기 우리 특급 힐러님 계시니까 어디 팔다리 하나 잘려도 바로 붙일 수 있어.”

그러니 걱정 마.

내 말에 윤지우가 아주 질겁을 했다.

“놔! 나는 이 미친 곳을 떠나야겠어!”

“얼씨구. 다행으로 알아. 실전에서는 네가 이렇게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아?”

“……뭐―!”

“넌 여기서 도를 넘은 강자랑 마주한 적이 가장 적지. 아니, 사실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해. 파우스트가 아니라 그 밑의 따까리만 마주해도 너는 온몸이 얼어붙어 아무것도 못 하다 그냥 목이 잘리겠지.”

“그럴 리 없―!”

가차 없는 팩폭에 윤지우가 그냥 현실을 부정하는 건지, 아니면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건지 바로 반박을 하려 했다.

하지만 지금 하는 모습만 봐도, 그 말은 개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도 봐. 데이모스가 죽일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도망치려고 하는 놈이 무슨.”

“……!”

“누구든 지키고 싶다며. 누구든 지킬 수 있는 방패가 되고 싶은 거 아니었어? 탱커의 기본도 안 된 놈이 무슨. 누굴 지키긴커녕 그 앞에서 몸빵이라도 할 수 있을 거 같아?”

단언컨대, 백프로 몸이 얼어붙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거나, 반사적으로 도망칠 것이다. 자신이 의도한 게 아니라고 해도 인간의 본능이란 게 결국 최후에는 자기 자신을 위하도록 세팅되어 있으니까.

그걸 이겨 내는 것이 진정한 ‘자신의 의지’였다.

“지호 씨. 말이 너무 심하…….”

“맞아요. 지우 군은 아직 어리고, 각성한 지도 얼마 안 되었고…….”

그래도 팩트 폭력이 너무 심하다 여긴 것인지 길드원들이 살며시 만류를 해 왔다. 나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나라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는가.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녀석은 그냥 죽게 될 뿐이었다.

“내가 쟤보다 더 늦게 각성했어요.”

“……!”

“……아……!”

“그러게. 내가 처음부터 말렸지. 헌터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나는 분명 몇 번이고 만류했었다. 이런 일이 언젠가 벌어질 걸 알고 있었으니까.

세상은 저 녀석이 생각하는 것처럼 꽃밭도 아니고, 스스로가 생각하는 만큼 윤지우 본인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 애석하게도.

“선택은 네가 한 거야. 그러니 네 선택에 책임은 져야지. 난 적어도 널 그렇게 가르치며 키웠어.”

그럼에도 선택은 녀석 본인이 한 것이다.

돌이킬 수도 없는 것.

녀석은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했다. 더 이상 내 뒤에 숨어도 되는, 어린아이가 아니었으니까.

“……그래. 내가 선택했지. 너는 내가 여기서 멈추면 분명 실망할 거고. 어디 강가에 안 버리면 다행이겠네. 길드장님도 너 이런 거 알지?”

“글쎄? 일단 넌 여기서 도망가면 굴다리에 내다 버릴 거야.”

“졸라. 나빠.”

“새삼. 원래 살면서 팔다리도 한번 잘려 보고 해야 성장하는 거지. 그래도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너는 완벽히 고쳐줄 힐러가 뒤에 빵빵하게 대기하고 있잖아? 얼마나 축복받은 일이야?”

이런 기회가 어디 쉽게 오는 줄 알아?

A급은커녕 S급도 쉽게 얻을 수 없는, 성장에 최적화된 천금 같은 기회였다. 본인도 그걸 아는지, 장비를 손에 쥐며 전투를 준비했다.

“아주 눈물 나게 고맙네.”

입은 사나웠지만.

그래도 그게 저 녀석 나름의 애정표현인 걸 알고 있었기에 기꺼이 달큼하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럼. 잘 부탁해. 데이모스.”

“당신의 뜻대로.”

데이모스가 그대로 내 앞에서 사라져, 윤지우의 앞으로 이동했다.

“……!!”

황급히 윤지우가 방패로 막기는 했으나, 동작이 한 템포 느렸다.

콰아아앙―!

공격의 충격으로 윤지우가 저 멀리 날아갔고 데이모스가 그 뒤를 빠르게 뒤쫓았다. 그렇게 두 사람의 전장이 멀어져 다시 우리만 남았을 때, 다른 길드원들도 후딱 처리하기 위해 다음 차례를 불렀다.

“자. 그럼. 본인이 키우고 싶은 능력 한 사람씩 말해 봐요.”

완벽한 1:1 맞춤 선생을 매치해 줄 테니까.

* * *

“오호. 버러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쓸 만한데?”

“……큭―! 사람을 뭐로 보고……!”

“그래. 내 주인의 피붙이면 이 정도 기개는 보여 줘야지!”

콰과과광―!!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모래가 파도처럼 일어나 두 인영의 모습을 완전히 덮어 버렸다.

그 장대한 전투를 모두가 숨죽여 바라보고 있었다.

꿀꺽―

아득하기만 한 상대. 누가 보아도 격이 맞지 않는 전투였다. 하지만 격이 한참 높은 상대를 상대하는 것만큼 빠르게 실력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 증거로, 윤지우는 살기 위해 시시각각 더 빠르고, 더 자유롭게 마력을 운용하고 있었다.

제 주인의 명이 있으니, 죽을 위험은 분명 없을 터인데도.

죽음이 문 앞에 있는 것 같은 압박감과 살기는 아무리 그 사실을 머리로 알고 있다고 해도 목숨을 건 줄다리기를 하는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게 했다.

그랬기에 윤지우는 동작 하나하나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차츰 변해갔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저 존재는, 그녀가 고심해서 고른, 윤지우에게 딱 맞는 최고의 선생이 맞았다.

더 높은 존재와의 결투를 랭커들이 왜 갈망하겠는가.

그리고 윤지호는 그런 헌터들의 생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그냥 높은 존재가 아닌 격이 다른 존재를 선생으로 붙여 주었다. 고작 한 단계 도약하는 정도로는 제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이.

분명 목숨의 위협도 있을 것이다. 제 주인의 명을 따른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본질은 몬스터. 살생이 본능인 그들이 싸움에 정말 집중하면 주인의 명보다 본능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우리에게는 힐러가 있다.

그것도, 갓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이 세계 최고의 힐러가.

더없이 완벽한 조건이었다. 그리고 이건 그 어떤 값비싼 대가를 치른다고 해도 얻을 수 없는, 천금 같은 기회이기도 했다.

모두의 얼굴이 기쁨에 상기되었다.

“기적님! 저는 속도랑, 체력! 강력한 원딜 스킬을 배우고 싶습니다!”

“여신님! 저는 마력 컨트롤이여!”

호칭까지 ‘지호 씨.’, ‘실장님.’에서 완벽히 승격했다.

그뿐 아니라, 급기야 싸움까지 벌어졌다. 1초라도 먼저 하고 싶다는 마음에 치열한 순서 싸움을 벌이는 그들을 어떻게 달래야 하나, 싶어 가만히 지켜보는데, 한 사람이 단호하게 서열 정리에 나섰다.

“이 자식들이! 순서 지켜! 내가 먼저야!”

“우리가 직급 이런 게 어디 있어요?!”

“길마 부길마는 있잖아! 나 부길마다?!”

“권력 남용이다!”

“평소 이 길드 안 망하게 갈고 닦은 게 나야! 난 이 정도 받을 자격 있어!!”

꼬우면 니들이 해 봐!

유라가 광역기를 발동했다.

엄청난 광역기에 다들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그뿐일까.

아주 먼저 지나가라고 길을 비켜 주면서 손으로 방향은 저쪽이라며 안내까지 해 주었다.

특등급 서비스였다.

더불어 아무도 유라가 하던 개고생은 하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괘씸했지만, 그래도 어쨌든 1순위를 차지한 서유라는 지금 자신이 누릴 수 있는 혜택에 집중하기로 했다.

“기적님……. 아니, 지호 씨 저는.”

와. 봐라. 이분까지 호칭을 헷갈려하시네.

확실히 일코 해제를 해서 그런가, 내가 그냥 윤지호로만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레벨업을 시켜 줄 기적으로 보여서 그런가.

뭐 어쨌든 막상 피부로 와 닿으니 조금 씁쓸하긴 했다.

물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물론 알져.”

“네?”

서유라 특별 대우를 설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잊을까.

“얼음에는, 얼음 아니겠어요?”

철컥―

솨아아아―

【‘이매망량의 문’을 개방합니다.】

【이매망량의 권속이 주인의 부름을 받듭니다.】

【‘설녀’ 마유가 주인의 부름에 기뻐합니다.】

“……!”

딸랑― 딸랑―

존재감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방울 소리가 그녀가 발걸음을 뗄 때마다 맑게 울렸다. 사막에 눈을 뿌리며 허공에서 내려온 그녀는, 사뿐히 제 발에 닿은 모래를 얼려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며 내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언제나, 항상. 당신의 부름을 고대하고 있었답니다. 사랑스러운 나의 주인이시여.”

내 권속은 하나같이 다 이랬기에, 이제는 익숙해졌다.

“그래. 마유. 해야 할 일은 알고 있지?”

“당신의 뜻인데요.”

어찌 그걸 모르겠나요.

마유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유라를 향해 정중히 인사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주인님의 지인이시니, 성심성의껏 임하겠습니다.”

그 정중한 인사에, 유라가 기쁨에 가득 찬 얼굴로 화답했다.

“아. 나야말로. 분에 넘치는 영광이야!”

【빙설의 검을 개화합니다.】

【‘빙설의 꽃(S)’를 발동합니다.】

【스킬을 중첩합니다.】

【‘얼음의 로드(A)’를 개방합니다.】

“처음부터 전력으로 간다!”

촤아아아악―!

“바라는 바입니다.”

사막에서 펼쳐지는 얼음과 눈의 대결은, 그야말로 부자연스러움 그 자체였지만, 그랬기에 더욱 장관이었다.

적당히 감상하고, 나는 다른 길드원들의 매칭 상대를 마저 정했다.

레쓰비에게는 ‘허수아비 술사’를.

회사원에게는 ‘유령총사’를.

최민현에게는 ‘부러진 신념의 검사’를.

고딩님에게도 ‘지옥의 지휘자’를.

그 외 기타 등등 길드원들에게도 저마다 알맞게 권속들을 붙여 주고 나니, 어느새 유지한과 나. 둘만이 남아 있었다.

게이트가 넓어서 참 다행이었다. 그 많은 인원이 일대일로 전투를 하는데도 공간에 부족함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하도 널찍널찍하게 싸우고 있어 각각의 특색에 따라 따로 게이트를 판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것도 중앙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빙 둘러서 싸우는 모습이… 이게 바로 360도 전방향 관람인가.

각각 다른 것을 보니 재미가 꽤 쏠쏠했다.

“오. 다들 잘 싸우네요.”

다들 꽤 선전하고 있었다. 지옥을 넘나드는 것 같긴 하지만.

숨조차 편하게 못 쉬는 것이 훤히 보일 정도이니, 이번 한 번의 경험만으로도 다들 현저한 성장을 보여 줄 것 같았다.

원래 성장이란 극한의 위기 속에서 피어나는 법. 길드원들을 위해 고심해서 상대를 골라 준 만큼, 최선을 다해 임하는 그들의 모습이 만족스러워서 뿌듯해하는데, 지한이 말을 걸어왔다.

“이제 저입니까?”

“그러게요. 가장 중요한 메인 디시. ‘유지한 님’이 남은 거죠?”

“……지호 씨.”

너무 놀렸나 보다.

얼굴을 붉히면서 뾰로통하게 볼을 부풀리는데 장난은 이쯤 해야 할 듯싶었다.

“알았어요. 근데 유지한 씨가 중요한 건 진짜예요?”

“……읏……! 네. 그럼 저는 누구와 합니까?”

결국 이번에도 나를 이기는 것을 포기한 유지한이 체념한 얼굴로 자신이 상대해야 할 적은 누구냐 물었다. 그 질문에, 나는 순간 살짝 고민했다.

분명 엄청 반대할 거 같은데.

아니 3000%.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3000%가 아니라 그냥 ALL이지. 선택지 없는 노빠꾸 놈에게 뭘 기대하는 거냐고, 포기할 건 적당히 포기하라고 혀를 찹니다.]

‘……역시 그렇지?’

음, 어떻게 해야 좋게좋게 풀어 나갈까. 고민이 되었다.

그러나, 고민만 한다고 뭐 나오는 게 있나.

인생은 역시, 선빵이지.

“유지한 씨의 상대는…….”

“……상대는?”

“무려…… 짜잔―!”

“……?”

“바로 ‘저’랍니다!”

위후― 박수 한 번 주세요!

일부러 발랄하게 외쳐 봤는데, 씨알도 안 먹혔다.

어이구.

기겁하는 게 말하지 않아도 다 느껴졌다. 입을 떡 벌리고 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뜨고 있는데 그 기분을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이 바보였다.

아. 이 작전은 실패인가. 입맛을 다시고 있는데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듯한 유지한이 육성으로 아주 비명을 질렀다.

“무. 무슨 소리입니까!!!”

“으악―!”

우와. 얘도 이렇게 소리를 지를 줄 알았네.

그것도 나한테?

그동안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알아낸 것에 나는 소리 없이 감탄했다.

“뭐긴 뭐예요. 솔직히 강한 몬스터는 웬만큼 다 상대해 봤잖아요? 그럼 안 상대해 본 쪽으로 가야죠.”

그것도 본인보다 압도적인 인간이 더 효과적이지 않겠어요?

뒷말까지는 그의 자존심을 구길까 봐 말하지 않고 표정으로만 보여 줬다. 그러나 역시 멍청하진 않아서 뒷말까지 찰떡같이 알아들은 유지한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안 됩니다. 저를 위해 지호 씨가 위험을 감수해야 할 이유는 없…….”

“핫―!”

아. 뭐야. 그걸 걱정한 거야?

귀엽다고 해야 할지, 가소롭다고 해야 할지 몰라 반사적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무 어이없는 소리여서 표정 관리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관리가 되질 않았다.

헐. 내가 힘 쓰는 걸 다 봤으면서 아직도 저런 소리를 지껄일 줄이야. 내가 그 정도로 얕보인 것인지, 아니면 그저 순진한 이 남자의 천성인 것인지.

“진짜 다치실 수 있습니다. 지호 씨가 저보다 강하긴 하지만 전투에서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요.”

어느 쪽인지 모르겠지만, 저 망할 생각은 슬슬 좀 짓밟을 필요가 있었다.

“하. 내 걱정하는 건 예쁜데, 쓸데없는 걱정은 말고 집중이나 해요.”

“―!!”

【스킬: 수백 개의 가면(S)을 발동합니다.】

【라이브러리가 펼쳐집니다.】

【시전자가 바라는 힘에 걸맞은 가면이 선정됩니다.】

“나는 각성한 지 얼마 안 된 햇병아리라, 힘 조절이 그렇게 썩 잘 되는 편이 아니거든요.”

【‘대제. 가이아’가 선정됩니다.】

【‘가이아’의 가면을 씁니다.】

[‘모든 대지는 나의 지배를 거스를 수 없으니.

대지에 기생하는 모든 생명체 역시 전부. 나의 발아래 고개를 조아릴지어니.’]

물론 마력 컨트롤이 아니라, 내가 얼마만큼의 힘을 써야 상대에게 적당한 공격 수준인지를 모른다는 것이지만.

굳이 설명하진 않았다.

“잘못하면, 죽어요.”

어차피 곧, 몸으로 알게 될 테니.

오래된, 마치 세계가 말을 하는 것 같은 목소리에 모두가 놀라 전투를 중단하는데, 곧바로 대지가 흔들렸다.

쿠구구구궁―!

“……어?”

“으악―!!”

마치 대지가 갈라질 것만 같은 진동과 울림에 모두가 놀라 반사적으로 이 사태의 원인으로 보이는 곳을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뭐야. 저건.”

시선의 끝에는 자신들이 전혀 모르는 자가 있었다. 자신이 상대하는 이들 역시, 아득히 강한 존재였지만. 그런 존재들보다도 아득히 우월한 존재였다.

격이 다른 마력이었다.

눈치채자마자 알 수 있었다. 단지, 존재감을 드러낼 뿐인. 의도적으로 방출한 마력이 아닌, 자제하지 않아 본인이 무의식적으로 방출하는 마력에 불과한데도 몸이 덜덜 떨려왔다.

“허억―!”

“……큭…….”

인간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는 공포가 엄습해 왔다.

전의 같은 것은 추호도 생기지 않았다. 어쭙잖은 호승심이 생길 틈조차 없었다. 오로지 머릿속에 든 생각은 단 하나였다.

‘절대. 절대 눈에 띄지 말아야 해. 도망쳐야 해.’

상대하기는커녕 마주 볼 수조차 없는 존재. 머릿속이 온통 공포로 물드는 것 같았다. 그건 그녀의 권속인 이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윽―!”

“……큭…… 주인님…….”

모습이 달라졌다고 주인을 못 알아보는 천치는 아닌지 그들은 단번에 제 주인을 알아보며, 몸조차 가누지 못하면서도 본능적으로 애타게 제 주인을 가장 먼저 찾았다.

“……큭…… 지호 씨……!”

그런 이들 사이에서, 그 마력을 가장 가까이에서,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유지한은 한쪽 무릎을 굽힌 채 간신히 몸을 가누며 지호를 불렀다. 그런 지한의 부름에 답 대신,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맨발.’

아무것도 신지 않은 뽀얀 발은 모래를 밟고 있음에도 조금의 흙먼지조차 묻지 않았다.

마치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 공포를 없앤 건 선명하게 드리워지는 그림자 덕이었다. 순간 덜컥― 인 공포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지한은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그 어떤 흉도 없는 뽀얀 다리.

낡은 건지, 찢어진 건지, 닳은 건지 알 수 없는, 거적처럼 너덜너덜한 누더기가 그녀의 옷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슬하게 가운데가 벌어져 최소한의 가림새 용도인 듯한 치마와 튜브탑처럼 가슴을 묶은 천. 허리까지 내려온, 전혀 관리가 안 된 듯 윤기가 하나도 없이 부스스하고 흩날리는 생머리.

노출이 많이 선정적이라 할 수도 있었지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사막의 부랑자와 같은 모습이랄까.

그럼에도, 조금도 초라해 보이지 않았다.

손에 든 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호화로운 왕관도, 휘황찬란하게 고급스러운 옷도. 그런, 오히려 거리의 거지보다 못한 차림으로 그녀는 누구보다 위대하고 완벽한 왕처럼 보였다.

왕임을 증명하는 것이 자신의 차림새가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듯 그녀는 아무것도 갖추지 않았음에도 완벽했다.

“……가이아.”

대지의 여신. 최초의 신.

대지의 어머니이자, 모든 신들의 어머니.

그 이름처럼, 그녀는 대제였다.

대지에 살아가는 모든 것의 지배자.

자신의 이름을 부른 이에게 화답하듯,

“가진 힘을 전부 내보이는 게 좋을 거다. 100%. 아니, 그 이상을 내뱉어. 그래도.”

내 발끝 하나에라도 닿을지 의문이니.

【대지가 자신의 주인의 뜻에 따릅니다.】

솨아아아아―

“……!!”

말과 동시에 모래가 일어나더니, 파도가 되어 유지한을 덮쳤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지한은 눈을 크게 뜬 채 자신을 덮쳐 오는 모래 파도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모래 폭풍에 피해를 보는 건, 단연. 유지한 뿐만이 아니었다.

“……어―!”

“……이런…….”

“이런 미친, 윤지호 또라이야!”

갑작스러운 모래의 움직임에 금방이라도 쓸려갈 것 같아 모두가 마력으로 몸을 방어하며 자신의 몸을 지탱했다. 그래도 조금은 밀려나긴 했다.

개중에 마력 활용에 가장 취약한 윤지우는 나름대로 노력을 하긴 했지만 움직이는 자연에 세세하게 맞춘 마력 컨트롤은 당연히 불가능했으므로 결국 데이모스의 도움을 받았다. 물론, 그러면서도 아주 악을 써댔다. 그 소리를 브금 삼아 흘려들으며, 나는 눈앞에 유지한에게 집중했다.

모래 파도가 코앞까지 닥치는데도 내가 정말 자신을 진심으로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 것인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볼 뿐,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정말 공격하는 순간마저 이러다니.

저걸 어떻게 교육시킬지 골치가 아파 왔다. 내 남친인데도 그 모습이 너무나 꼴 보기 싫었고, 맹한 태도 같은 건 용납 자체가 불가능한 ‘가이아’의 가면을 썼기에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을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우습나 보군.”

까딱―

손가락으로 한 번 까딱한 것과 동시에 모래 파도가 유지한을 그대로 완전히 덮어 버렸다.

“―!!”

“유지한―!!”

“길드장님!!”

모래가 그대로 유지한을 덮는 모습에 모두가 진심으로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아무리 다른 모습,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어도 그녀는 결국 윤지호였다. 어떻게 해도 유지한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그들 사이에 암묵적으로 있었다. 그녀가 그동안 무명으로서도, 윤지호로서도 보여 준 모든 행동들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모두가 착각하는 게 있었다.

무명도, 윤지호도.

필요하다고 여기면 얼마든지 유지한을 해칠 수 있었다. 제 마음이 어떻든. 머리가, 그리고 그녀의 이성이 필요하다 여긴다면.

그건 유지한을 버리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 마음이 아프고 나발이고, 나는 필요하다면 그것조차 단호하고, 가뿐하게. 해낼 수 있는 여자였다.

그랬기 때문에 당신이 항상 불안에 떨었던 것 아닌가. 가볍든, 무겁든, 그 무게가 내 결정에 그리 큰, 핵심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날 잘 알고 있었으면서 어째서 내가 진심을 담아 공격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못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필요하다면. 당신이 떠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당신을 떼어 놓기 위해 공격을 할 수도 있는 사람인데.

이걸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그냥 현실 도피를 하고 있는 불쌍한 놈으로 봐야 할지.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래도 그건 좀 많이 불쌍하지 않냐고. 저렇게까지 널 좋아하는 거라고 그냥 좋게 해석하라고 권유합니다.]

[그래도 저렇게 강아지처럼 너만 맹목적으로 보는 놈인데 연민이 생기지 않냐 묻습니다.]

‘그래도 머저리라는 것은 변하지 않지.’

전투에서 그런 약해 빠진 마음은 독이었다.

세상에 사연 없는 적이 얼마나 될까.

세상에는 진정한 선도 악도 없다. 개개인의 인간이 각자의 신념으로 결정하는 문제다.

각자의 신념과 각오로 자신과 맞지 않는 상대를 적으로 규정할 뿐. 그런 적에게 자비는 필요치 않았다. 그건 오히려 패배로 향하는 지름길에 불과하다.

일부러 내가 그를 상대하는 이유도 이것이었다.

나는 그가 이것을 깨닫기 바랬다. 인간에서, 타락해 버린 존재. 파우스트는 그가 상대하기 가장 까다로우면서, 그가 연민을 느끼기 가장 좋은 존재였으니까.

감화되지도,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도 않을 그 빌어먹을 천재의 고집을 고작 저딴 호구가 어떻게 하겠는가. 나라면 개소리는 지옥에 가서나 하라고 개무시를 하며 망설임 없이 죽일 텐데, 그는 절대 그러지 못할 것이다.

세상 모든 슬로우 스타트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 느리면 느릴수록, 쓸데없는 걸 괜히 알게 될 확률만 높아질 뿐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가 거기에 끌려다니지 않길 바랐다

“고작해야 방어…… 그것조차도 완벽하지 못하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선, 아무래도 특단의 조치가 필요할 듯했다.

“……지호 씨……!”

“형편없어.”

“……!!”

캉―!

모래 파도로 날아간 그를 향해 빠르게 달려가 발차기를 날렸다. 가볍게 선전포고로 던진 공격이었음에도 유지한은 가까스로 막아냈다. 심지어 완벽히 막지도 못하고 결국 날아가는 그를 보며 확실히 깨달았다.

“정신 교육이 많이 필요하겠네.”

내 손으로 그냥 반 정도 죽여 놔야겠다.

“……어우.”

어차피 저기 힐통도 빵빵하게 있으니.

퍽―! 팍― 휘익―!

“윽―! 잠깐……!”

“전투 중에 그런 말을 한다고 순순히 멈춰 주는 머저리가 있나?”

한 번은 주먹, 주먹을 막으면 그와 동시에 곧바로 다리가 날아왔다.

콰앙―!!

“커억―!”

제대로 옆구리를 걷어 차여 저 멀리 날아간 유지한이 짧은 단말마를 토해 냈다. 그런 그의 앞으로 바로 달려간 윤지호가 유연한 다리로 유지한의 턱을 차올렸다.

“억―!”

그 공격을 허용하고, 그대로 턱이 올라가며 떠오른 몸에 윤지호가 바로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랭커라 한들 바로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의 공격이 정통으로 들어갔다. 복부가 심각하게 푹 파이며 유지한이 심각한 산소 고갈과 고통에 입을 벌렸다.

강한 한 방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런 유지한에게 제대로 어퍼컷을 넣은 윤지호가 쓰러지는 유지한에게서 바로 몸을 뺐다.

털썩―

유지한이 배를 부여잡고 그대로 바닥에 엎드렸다.

“컥―! 허억―! 콜록―!”

유지한의 입에서 흐르는 침이 모래를 적셨다. 황급히 숨을 몰아쉬며 헛구역질을 하는 모습이 가엽기 그지없었다.

보는 자신도 이럴진대, 심지어 제 연인인데도.

유지한을 바라보는 윤지호의 얼굴은 매섭고 차갑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다른 인물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알맹이는 본인일 텐데 저런 무자비한 공격과, 하찮은 것을 보는 듯한 얼굴이라니.

말자는 새삼 제 친구가 참 무자비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뭐, 저렇게 차갑게 구는 것도 이해가 갔다. 아무리 자신의 연인이라 제대로 전투가 안 될 수 있다 한들, 유지한의 태도는 연인을 떠나 전투를 하는 상대방에게 무례나 다름없었다.

연속적으로 퍼부어지는 무자비한 공격이었지만, 틈은 분명 있었다. 심지어 일부러 만든 것처럼, 전투계가 아닌 말자의 눈에도 대놓고 보이는 틈이. 어서 들어오라고 재촉하는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지한 역시 그것을 훤히 보고 느꼈을 터인데도 그는 조금의 공격도 하지 않았다. 그 틈을 보고도 훤히 흘려 보내며 방어에만 전념할 뿐이다. 그 방어조차 강하게 한다면 지호의 몸에 타격이 갈까 봐 거의 몸만 강화해서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공격 자체를 튕겨 내는, 근접전에서 아주 유용한 방어 스킬이 있을 터인데도.

그러니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윤지호의 손속이 과감해질 수밖에.

말자가 볼 때, 저거 분명 빡쳤다. 자기 같아도 남친이고 나발이고, 빡칠 것 같긴 하다. 심지어 상대해 주는 이가 자기보다 훨씬 강한데, 저따위 행동이라니.

저런 행동은 자신이 강자일 때나 부릴 수 있는 여유라는 것을 모르는 건가.

말자의 눈이 절로 곱지 않게 변했다. 저건 윤지호를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심지어 전력을 다해도 발끝도 따라가지 못 할 수준으로 저런 고집을 부리고 있으니 정말 가소롭고 우습지 않은가.

그런 말자와 마음이 같았는지, 지호가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으며 그대로 다리를 휘둘렀다.

휘익―!

“억―!!”

옆구리를 그대로 강타해 사이드로 날아가 모래 바닥에 구르는 유지한을 지호가 고요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머리가 나쁜 것인가.

이 정도 살기를 띄고 공격을 했으면 그래도 조금은 깨달았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너무나 멍청했다.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혀를 차며 미간을 구기는데, 황급히 숨을 고르며 아직 입은 산 유지한이 말했다.

“……커억―! ……아무리 그래도…… 내가…….”

“…….”

“당신을…… 어떻게 공격합니까…….”

……안 하느니만 못한 소리였다.

‘가이아’로서도 ‘윤지호’로서도 열이 오르지 않을 수 없는 헛소리였다. 어떻게 저렇게 상황 파악이 안 될 수가 있나. 아니 저 정도면 주제 파악이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전에 분명히 얘기한 적 있었던 것 같은데.”

“……?”

“그런 말은 네가 나를 뛰어넘고서 하라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강자일 때나 가능한 거라고.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이고 말한 것 같은데, 아직도 저렇다니.

이젠 사람 말을 발로 듣나 싶었다.

“나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지호 씨…….”

“감히, 너 따위가 내게, 그런 말을 할 주제가 된다고 보나.”

【대지가 주인의 명을 받듭니다.】

【대지의 족쇄(S)가 발동합니다.】

촤르륵―

“……!!”

모래 속에서 튀어나온 사슬이 순식간에 지한의 사지를 묶었다. 완벽히 구속된 지한의 앞에 도착해 손으로 그의 턱을 올려붙였다.

“정말, 갱생이 안 되는 건지. 아니면 그냥 가망이 없는 건지.”

“……지호 씨……?”

이제는 그냥 내 이름만 부르는 앵무새 같은 모습에도 빡이 쳤다.

그냥 진짜 포기하는 게 빠른 것인가. 다 때려치우고 싶어졌다.

“전말자.”

“아. 왜애애. 아. 치료하라고?”

“어. 그 김에 뭐 하나 묻자.”

“엥? 뭘?”

“밀리언 지금 어디 있어?”

“……밀리언?”

갑작스럽게 내 바로 밑, 월드 랭킹 2위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말자가 갑자기 그놈은 왜 찾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이었다. 그녀는 눈치가 빠지면 시체인, 눈치의 귀재. 전말자였다.

“헐. 상대 바꾸게?”

“이쪽이 가망이 없으면, 재빨리 포기하고 다른 쪽으로 바꾸는 게 합리적이지.”

뭘 굳이 가망도 없는 걸 계속 붙잡고 있는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콩쥐 같은 짓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시간도, 노력도 아까웠다.

단호하고 자비 없는 내 말에 전말자가 감탄했다.

“뭐. 그건 맞는 말인데……. 이야. 너 진짜 하나도 안 변했네. 남친이라고 봐주는 거 없구나?”

“뭔 소리야. 졸라 달라졌지. 내 남친 아니었으면 진작 포기하고 갖다 버렸어.”

안 그랬음 내가 이런 데에 힘 써가며 노력했겠어?

나는 그런 생산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도 봐라. 이렇게 빡치는데 갖다 버릴 생각은 안 하고 있지 않은가.

그냥 포기하고 더 나은 쪽을 강하게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지, 남친으로서의 유지한을 포기할 생각은 조금도 않고 있었다.

이 정도면 엄청 유해진 거지. 옛날이었으면 남친이고 나발이고, 그냥 저 인간 자체가 꼴 보기 싫어서 버렸을 테니까. 그런 나를 알고 있는 전말자가 재빠르게 수긍했다.

“하긴. 내가 보기에도 좀 빡칠 만했지. 사슬이나 풀어 줘. 치료하게.”

전말자의 말에 지금은 쳐다도 보기 싫어, 고개를 돌린 그대로 스킬을 해제했다.

【대지의 족쇄(S)를 해제합니다.】

털썩―

족쇄가 풀리자 그대로 주저앉은 유지한의 앞에 선 전말자가 세밀하게 유지한을 살폈다.

“어이구. 그 짧은 시간에 곤죽으로 만들어 놨네.”

아주 골고루 균일하게 적당히 팼어. 이것도 아주 재주라고 유지한의 상태를 보며 전말자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뭐, 감탄은 짧았고, 실리적 속물 성녀답게 본업으로 돌아와 재빨리 치료를 시작했다.

“세계의 희망 중 하나에게, 아버지의 자비가 깃들기를. 어떤 장애도 없이, 세계를 위해 힘을 쓸 수 있도록 모든 것이 그대가 힘을 발휘하는 데 있어 문제가 없기를.”

【‘순례자의 기도(S)’ 가 발동됩니다.】

솨아아아―

따스한 빛이 유지한을 감싸는 것을 느끼며, 나는 정하나를 불렀다.

“정하나. 들리지?”

「“오냐. 다 들었고. 밀리언 쪽에 연락 넣으라고 차지혁한테 말해놨어. 바로 연락한대.”」

“어. 바로 약속 잡으라고 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받자마자 바로 튀어오려고 할걸?”」

이미 완벽히 세뇌당한 것 같더만.

쓸데없는 뒷말은 그냥 흘려듣고, 머릿속으로 계획을 다시 짰다.

어차피 세계적으로 모여서 싸워야 할 판이니, 이미 일정 수준 이상의 경지에 올라 성장이 더딜 수밖에 없는 월드 랭커들보다 원티드의 전력부터 엇비슷한 수준으로 높이는 게 더 이득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계획을 수정해야겠다.

원티드 전력부터 키우고, 주인공이 유지한이니 유지한만 레벨업 좀 시켜도 전체적인 전력이 확 올라갈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게 맞기도 했고. 그렇지만 이렇게 시작부터 막히니 그 계획은 철폐해야겠다.

그냥 월드 랭커들 위주로 겁나 굴려서 조금이라도 그들을 강해지게 하는 게 더 빠르고 효과적일 거 같…….

“……?”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내 발목을 잡아챘다.

뭐지? 하고 고개를 내려 보니, 유지한이었다.

“……뭐야. 왜.”

모래사막을 하도 굴러다녀서 그런지, 꼴이 아주 가관이었다.

그런 형편없는 모습으로 엉금엉금 기어 와 발목을 잡고 날 올려다보는 모습이, 딱 구걸하는 거지꼴이었다. 내가 지금 열 받은 상태여서 그렇게 보이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어이. 그거 네 남친이라고. 거기다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그러는 건 너무 잔인한 행위라고 곱게 어휘를 가다듬길 요청합니다.]

맞는 말이었다.

성위님 말대로 ‘거지꼴’이라는 문구는 좀 너무 팩폭이긴 했다. 그렇다고 대체할 말을 찾자니, 영 생각나는 것이 없는 게 문제였다. 내 생각을 훤히 읽고 있을 텐데도 아무 말 없는 것을 보니, 성위님의 생각도 같았나 보다. 결국 적절한 표현 찾기를 포기한 나는 그냥 조용히 이 주제를 스킵했다.

어차피 내 생각은 성위님 말고 아무도 모르는데 뭘.

직접 말로 꺼낸 것도 아니고.

하지만 말로 꺼내지 않아도 표정으로 드러난 건지, 유지한은 잔뜩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젠장.

아무리 나라도 그건 꽤 미안함이 들어, 가이아의 얼굴 때문이라고 스스로 변명을 하며 유지한에게 물었다.

“거기 드러누워서 사람 발은 왜 잡아.”

진짜 부랑자 거지도 아니고.

무려, 내 남친씩이나 되지 않는가.

다 잡은 물고기인 줄 알고 혼자 아주 염병을 하며 지 잘난 맛에 취해 나다니는 것은 당연히 사절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완전히 저자세를 취하는 것도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많은 걸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쯤은 패기가 생겼으면 했다.

이 ‘내’가 선택하지 않았나. 감히 내 선택을 받아 놓고 왜 이리도 자존감이 바닥을 찍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조금, 내 자존심이 구겨졌다.

그런 나를 보며, 성위님이 소리 없이 박수를 쳤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하늘을 찌르는 당신의 자존심에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이럴 때 보면 진짜 성좌들보다 더 오만하고 콧대 높은 자존심, 아니 자존감인 거 같다며. 역시 내 계약자. 라고 엄지를 치켜듭니다.]

‘칭찬 감사.’

시니컬하게 화답하면서도 가감 없이 조소를 내보였다.

인생에서 남에게 부끄러울, 아니. 딱히 남에게 꿀린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이 살아오기를 2N 년.

더불어, 안 그래도 높던 나의 그런 자존감을 하늘 저 높이까지로 올린 당사자가 저리 말을 하니 우습지 않을 리 없었다. 어쨌든 이런 조소를 자신에게 던지는 줄 착각했는지, 유지한의 입술이 아주 새파랗다 못해 새하얘졌다.

“……자…… 잠깐…… 잠깐만…….”

단기간에 안색이 저렇게 확확 바뀌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평소였으면 진작 다정히 달래 줬을 테지만, 기대에 못 미치는 수준을 떠나, 아예 기본적인 자세도 되어 있지 않은 태도에 잔뜩 짜증이 난 상태였고, 무엇보다 지금은 윤지호가 아닌, 가이아의 가면을 썼기에 드러나는 행동은 내가 아니라 가이아의 것이었다.

오로지 제 몸 하나로, 대제의 자리에 오른 위대한 제왕은, 기본도 하지 못하는 자에게 어쭙잖은 자비를 내려 줄 정도로 다정하고 상냥한 자가 아니었다.

“말해.”

음. 확실히 이건 좀 너무했나.

의도한 건 아닌데, 가이아의 성격이 원래 좀 그렇다 보니 나가는 말이 혹한의 칼바람보다 더 매서웠다. 제가 아는 유지한이라면 당장 눈물을 쏟아 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물론 의외로 유지한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뭐라든, 자신을 어떻게 대하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게 내게까지 적용될 리가.

모습은 다른 사람이라도 어쨌든 나는 나였다. 그가 영향을 받지 않을 리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매서운 말에 그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마지막 발악인 것인지, 아니면 그마저도 내 눈에 좋게 비치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인지, 눈가에 고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을 뿐. 볼을 타고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 상태에서 유지한이 떨어지지 않는 입을 힘겹게 열었다.

“……잘할 수 있어요.”

……뭘?

순간 반문할 뻔했다.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저렇게 주어를 떼놓고 이야기하니, 다 알고 있으면서 순간 주제가 헷갈렸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스탑. 거기 지저분한 어른! 전연령 수위를 지켜달라 말하며 옐로우 카드를 집어듭니다.]

‘응.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들은 지저분한 어른 2.’

[헉. 순수한 나를 어떻게 그렇게 매도할 수 있냐고.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러냐는 듯이 비련의 남주인공처럼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가슴을 부여잡는 시늉을 합니다.]

‘응. 연기 즐.’

너님 발연기야.

흑심으로 따지면, 나 곱하기 따따따블인 놈 주제에 무슨 순수를 찾고 난리인가. 개그하는 것도 아니고.

그 소리를 정말 농담으로 받아 주기에는 애석하게도 나는 그에 대해 아는 게 너무 많아졌다.

“잘할 수 있어요. 잘할게요.”

상념을 깨우는 건, 역시나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목소리였다.

“뭘 잘해요.”

반사적으로 윤지호의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진짜 누가 들으면 오해하…… 이런 빌어먹을.

벌써 전말자 저건 무슨 해외 토픽감을 보는 것처럼 입까지 틀어막으며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진짜 짜증 지대로였다.

누가 보면 내가 쟤 갖다 버리는 줄 알겠다. 그런 생각은 전혀 없이 그냥, 실컷 쥐어 팬다는 계획만 내다 버릴 생각이었던 나는 너무 억울해져서 진짜 이놈이고 저놈이고 싹 다 갖다 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이놈도 이놈이었다.

이미 기회는 숱하게 줬는데, 넝마 다 되고 나서, 이제 와서 뭘 잘할 수 있다고.

신빙성이라고는 약에 쓰려고 해도 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정작 본인의 생각은 많이 다른 듯, 절박한 얼굴로 포기하지 않고 매달렸다.

“저도, 할 수 있어요.”

“글쎄. 그렇게 얻어맞았는데도 똑같은 거 보니 다시 해도 결과는 같을 거 같은데.”

솔직히 좀 많이 봐주긴 했지만, 그 정도도 녀석에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힘이나 능력 면으로 엄청나게 봐준 거지, 손속을 봐주진 않았으니까.

그건 물론 입 터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폭력보다 입 터는 것이 오히려 더 큰 타격으로 와닿았는지, 크나큰 충격을 받은 듯 유지한의 눈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아니에요. 다시 해 볼게요. 잘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누가 보면 진짜 버리는 줄.

신파극 한번 제대로 찍고 있었다.

애처롭게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눈빛과 잔뜩 얻어맞아 거지꼴인 몰골이 어우러진 와중에도 얼굴만은 완벽하게 지킨 건지 예쁜 얼굴이 도드라져 만들어내는 아주 환상적인 연출에 진심으로 넋이 나가려 했다.

너무 어이가 없어, 어디, 어디까지 하나 지켜볼 요량으로 가만히 이어지는 말을 기다리는데 정말 완벽한 타이밍에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다른 사람 몫까지 전부 제가 다 할게요.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제발…….”

웬만한 대한민국 미남 배우는 싹 다 저리 가라 할, 주인공 급 빛나는 미모. 감미롭고 애절한 목소리. 거기에 또르르 떨어지는 눈물까지. 미친 삼합이었다.

심지어 ‘밀리언’이라는 이름을 꺼내면 본인이 질투한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조차 자신을 싫어하게 될 요소가 될까 봐 말하지 못하는 그 모습까지. 처연함의 정점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너무나 완벽해서 뭐라고 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윤지호. 나쁜 년.”

겉으로만 유지한을 위하는 척하며, 아까까지만 해도 속으로 내 편을 들고 있었을 게 분명했을 전말자조차도 그의 연기에 감화되어 가자미눈을 하며 나를 비난했다.

실리적인 걸 따지기로 둘째가라면 누구보다 서러워할 인간이 보내는 비난의 눈초리에 나는 진심으로 억울해졌다.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딱히 한 것도 없는데 욕이란 욕은 다 먹는 기분이어서 굉장히 억울했다.

거머리처럼 나한테 달라붙은 내 남친만 홀랑 집에 던져 놓고 다 엎어 버릴까 고민을 하는데…….

“세이브! 바로 달려왔습니다!”

이 와중에 연락받자마자 텔레포트라도 한 건지, 내가 부른 인간 포함 초대하지 않았던 인간들까지, 무더기로 우르르 등장하셨다.

“얘 혼자 부르는 건 치사하죠. 반칙입니다.”

“우리도 정당하게 빌붙을 자격이 있어요!”

그리고 당당하게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했다.

귀찮아서 하나만 불렀는데, 하나 곱하기 하나도 아닌, 플러스 알파 알파 무더기가 달려왔다. 이 상황 자체가 어처구니가 없어 소리도 못 지르고 그저 속으로 질색을 하는데. 그런 내 눈치를 보는 건지, 아니면 상상 이상의 어휘력 때문인지, 루이스가 질린다는 얼굴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던 카밀라를 향해 말했다.

“……넌 뭔 소리야. 언어 패치 제대로 된 거 맞지?”

“그러는 너도 그냥 따라왔으면서. 괜히 점잖은 척 발연기 사절.”

“……패치 졸라 완벽하네.”

“칭찬 감사.”

“칭찬 아님.”

……아주 잘 놀고 계셨다.

심지어 이것들만 잘 노는 게 아니었다.

“와. 수준이……. 흥. 나도 마음만 먹으면 이 정도는 그냥 만들거든?”

“돈 지랄은 이렇게 하는 거지.”

“나도 할 수 있지만, 안 하는 거야. 이런 걸로 1위님 환심을 살 수는 없을걸?!”

기껏 부른 놈도 나 모르는 사이 유아 퇴행이라도 한 것인지, 유지한에게 무작정 시비를 털고 있었다.

차라리 좀 봐줄 만한 싸움이면 끼어들어 말리는 척이라도 하겠는데.

그 수준이 너무 낮아 왈가왈부하기도 싫어서 나는 그냥 무시하는 걸 택했고, 엎어져서 내 다리에 줄곧 달라붙어 있던 유지한은 그 와중에도 껌딱지에 빙의하기로 작정했는지 여전히 내 다리에 매달린 채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댕청미의 표본이었다.

“거기, 스톱. 멈춰!”

“그래. 흑역사는 이미 많이 만들었다. 밀리언.”

그런 우리 둘을 대신해서 밀리언의 폭주를 말린 건, 같은 무리에 껴서 대신 쪽팔림을 느끼는 다른 인간들이었다. 그래도 이런 것들이라도 껴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저 쪽팔림은 내가 감당해야 할 거 같았으니까.

“악―! 뭐……!”

내가 인상을 팍 쓰며 손가락으로 머리를 짚자, 내 기분을 바로 파악한 카밀라가 손을 뻗어 밀리언의 얼굴을 내 뒤로 멀리 밀어 버리고, 주변 일행들에게 저거 얼른 치우라고 눈짓을 주었다.

목적이 칼처럼 분명한 이들은, 이럴 때만큼은 그녀가 지시하는 바를 기가 막히게 잘 알아듣고, 즉각 밀리언의 입부터 막았다.

“욱―! 읍읍―!!”

“조용히 있자. 좀.”

중간중간 100% 막지 못해 추잡한 소음이 있긴 했지만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얼핏 들려오는 소음 사이로 카밀라가 급한 제 성미를 여과 없이 드러내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소리쳤다.

“무명 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어떻게 날 이렇게 배신할 수 있어? 라는 것 같은 원망이 켜켜이 묻어 있는 말에, 순간 어이를 상실한 나는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뭘?”

아. 이것들이 오늘은 단체로 신파극을 찍으려고 작당하고 미리 모의라도 했나.

이쯤 되니 그것조차 의심될 지경이었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누구 하나 빠짐없이 사이좋게 신파를 찍은 덕에 어이가 다 털려서 그런지 이제는 의심까지 샘솟으며 슬슬 짜증이 나려 했다.

심지어 여기는 아직까지(?) 예쁜 내 남친이라지만, 이것들은 뭐란 말인가.

이번에는 그런 내가 보이지 않는 모양인지 카밀라가 섭섭함을 토해내었다.

“뭐. 슬쩍 조언을 해 주거나, 잠깐 잠깐 도움을 주는 건 이해할 수 있어요. 원티드와는 원래 친분도 있고, 친동생도 소속되어 있으니 아무래도 신경 써 줘야 할 테니까. 하지만……!!”

“…하지만?”

“이런 황금 같은 특혜는 아니지요! 부당한 처사에요! 항의할 거예요!!”

…어디다?

진심으로 물어볼 뻔했다.

내 입으로 할 말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내가 보여 준 행동과 권위. 그리고 태도는 아무리 대한민국 정부가 병신이라고 해도 다른 헌터들 대하듯 나를 함부로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병신이라고 해도 제 목숨은 소중할 터이니.

뭐. 병신이다 병신이다 하고는 있지만, 유지한한테 하던 노답 짓을 정말로 나한테 하면, 나는 대한민국 정부를 통째로 갈 용의가 충분했다.

여론에서 먹는 욕? 알 바야? 고작 그깟 욕 하나에 설설 기며 그들이 원하는 바를 위해 순순히 이용당해 줄 만큼 나는 관종도 아니고, 사랑이 고프지도 않으며, 성격이 여리지도 않았다.

그걸 그동안 그렇게 어필을 해줬는데도 그걸 까먹었으면, 진짜 그들이 숨 쉬며 들이마시고 내뱉는 공기조차 아까웠다. 그런 나를 알기에 지금 이렇게 다들 내 눈치만 보고 있는 거 아닌가.

여기, 내게 매달려 있는 유지한은 스스로의 가치를 쥐뿔도 몰랐지만, 나는 유지한과 다르게 내 가치를 너무나 잘 알았다.

세계의 1위.

세계관 최강자.

그 타이틀을 다른 이도 아닌 성위님이 내게 달아 준 이상, 나는 무슨 짓을 해도 되는 존재였다. 모든 것이 용납되고, 허용되었다. 그래도 된다고, 다른 누구도 아닌, 이 세계로부터 허락을 받았으니까.

그건 아무것도 하는 것 없이 나이만 처먹으며 남을 짓밟고, 올라선 병신들이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아마 어디다 항의한다고 해도, 그 항의가 직접적으로 내 귀에 들어올 날은 없을 것이다. 그 누구도, 내 분노를 사고 싶지 않을 테니까.

“네. 항의는 잘 받았어요.”

뭐, 그래도 당사자가 이렇게 내 눈앞에서 당돌하게 항의하는 건 나쁘지 않았다.

저 당당함과 뻔뻔함이 오히려 매력적으로 느껴져 귀엽게까지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따지고 보면 이건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저. 정말요? 그럼……!!”

하나보다는 여럿이 덤비는 게, 그래도 전력이 크게 상승할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한꺼번에 다 같이 와서 이러는 게 나로서는 시간도 단축시킬 수 있고 효율도 챙길 수 있어 딱 좋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특별히, 기대로 상기된 저 얼굴들이 바라는 대로 들어주기로 했다.

“그럼. 이제 여기 껌딱지도 일어나고.”

유지한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다독이자, 그제야 유지한이 천천히 내 다리를 놓았다. 그걸 보며,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한꺼번에 다 덤비도록. 그래도 다수이니 봐줄 필요는 없겠지.”

“……!”

“이제 좀 재밌겠어.”

윤지호로서가 아닌, 대제 ‘가이아’가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인생의 모든 역사가 투쟁으로 이루어지고, 그 투쟁으로 모든 걸 지배한 그녀였다. 인생의 모든 것이 투쟁으로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그녀에게는 드디어 제대로 해 볼만한 전투가 눈앞에 펼쳐질 예정이었으니 기쁘지 않을 리가.

“부디, 배워갈 수 있는 것이 있길 바라지.”

일방적인 압살은 기껏 상대해 주는 의미가 없지 않은가.

즐거운 싸움이 되기를 바라며.

【대제. ‘가이아’가 대지에게 명령합니다.】

[‘나의 뜻대로, 내 앞에 있는 적을 짓뭉개라.’]

가이아가 움직였다.

* * *

“으악―!”

“뭐야! 미친 거 아냐?!”

“이게 가능하다고?!”

대지가 주인의 명대로 갈라지며 높은 원형의 기둥이 만들어졌다. 단순히 몇 개가 아니라, 몇십 개, 아니, 몇백 개는 되는 기둥들이 들쑥날쑥하게 올라가고 내려가며 시야를 비좁아지게 만들었다.

상황 파악조차 쉽게 되지 않게.

그것만으로도 까다로운데, 웃긴 건 이 기둥이 휘기도 하고, 사라졌다 밑에서 내려오기도 하며 제 주인의 뜻대로 진짜 짓뭉개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전투에 카밀라는 황당함을 그대로 내보이며 소리쳤다.

“밀리언! 케이! 이런 대지 마법 있지 않아?!”

그에, 기둥에 힘겹게 매달려 있던 케이가 악을 쓰며 소리쳤다.

“야! 말 같은 소리를 해! 어스웨이크랑 비슷한 거 같지만 수준 자체가 다르다고!”

“알고는 있었지만, 대체 마력……. 단순 어스웨이크도 마력을 미친 듯이 잡아먹어서 최상위 마법사도 이렇게 넓은 면적으로는 펼치지 못하는데…….”

밀리언이 넋 나간 얼굴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단순히 땅을 뒤집는 어스웨이크도 강도 높기로 유명한 다른 공격 마법에 비하자면 거의 그 두 배로 마력을 잡아먹어 웬만한 마법사들을 시도도 하지 않았다. 마력은 그렇게 잔뜩 잡아먹으면서 면적을 넓게 하지도 못하면 다른 공격 마법 대비 효율이 떨어지니까.

그런데 지금. 그들의 눈에 보이는 면적만 봐도 그 한계를 측정하기 힘들었다. 다른 쪽에서 싸우고 있는 이들조차, 이 공격에 휘말려 대지 기둥 사이로 싸우고 있었다.

확연히 올라간 난이도에 다들 미친 듯이 욕을 하는 것이 정확히 들리지는 않아도 느껴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예 이 공간 전체에 마법을 건 것 같았다.

미친 마력이었다. 심지어 이런 걸 발휘했으면서도 지치는 기색이 조금도 없다니. 되레 하품까지 하는 모양새가, 이 정도 마력 소모는 그녀에게 조금의 타격도 입히지 못한다는 것을 여실히 말해 주고 있었다.

“저거 사기야! 사기라고!”

그 모습을 보며 케이는 악을 썼다.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 있냐고.

그러거나 말거나. 그동안 하품을 하며 가만히 있었던 것은 그들이 이 환경에 적응할 수 있게 여유를 주는 거였다는 듯. 어느 정도 시간을 주었다 생각한 것인지 기둥 위에 고고하게 앉아 심심한 듯 발을 구르던 그녀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이런 젠―!”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는 것을 인지하자마자, 그 신형이 사라졌다. 그것을 깨닫기도 전에, 어마어마한 공격이 밀리언의 복부를 강타했다.

“커헉―!”

단순한 발차기였음에도, 버텨낼 수가 없었다.

기본적으로 헤실거리며 빈틈을 잔뜩 보여도 밀리언은 항상 닥쳐올 일에 대한 준비를 하는 스타일이었다. 늘 몸에 방어막을 두르고, 옷 역시 인챈터가 방어력을 가공한 옷만 착용했다. 심지어 아무리 그녀가 불렀다고 해도 원티드에 오는 거라, 방심할 수 없었기에 온갖 방어 아이템을 착용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아무리 방심하고 있었다 한들 그녀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단 한 번의 일격에 모든 방어막이 박살나며 날 것 그대로의 공격이 복부를 강타했다.

콰앙―!!

그대로 날아가는 밀리언을 받쳐 준 것은 그녀가 만들어낸 기둥이었다.

“쿨럭―!”

실상, 그냥 기둥에 처박힌 것이다.

밀리언은 짧게 피를 뱉어 냈다.

내상을 입었음이 자명했다. 하지만 그녀는 밀리언이 제 상태를 제대로 확인할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땅에서부터 솟아오른 기둥이 자비 없이 곧바로 공격을 해 왔다.

“……!”

실상 목숨을 건 전투는, 내 몸 상태를 가다듬을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 맞았지만 진짜 곧바로 이렇게 할 줄은 몰랐기에 황급히 몸을 숙여 기둥을 피하며 밀리언은 그녀의 무자비함을 다시 한번 각인했다.

다수여서 백 번 다행이었다. 1대 1이었으면 어땠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이런 공격이 1초도 쉬지 않고 연타로 올 걸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지금만 봐도 제게 향했어야 할 시선이 루이스에게 돌아가서 조금이나마 숨통을 틀 틈이 있지 않은가.

……물론 대신 루이스가 죽어갈 것 같지만.

저 검 성검이라고 한 거 같은데…… 부러지는 거 아니겠지?

아니 대체 왜 검으로 발을 막았는데 발이 아니라 검을 걱정하게 된 거지?

자신도 나름 상식을 많이 파괴하고 다니는 사람이었는데, 무명을 만나게 되고, 자신의 상식조차 아득히 뛰어넘는 영역에 감탄보다 한숨이 먼저 새어 나왔다. 다른 사람들이 그동안 자신을 볼 때, 이런 기분이었나 싶었다.

“흠. 딴 생각할 틈이 있나 봐.”

물론 그런 상념도 오래가진 못했다. 금세 루이스를 잠깐 KO로 결판을 낸 그녀가 다시 코앞으로 다가왔으니까.

“억―! 잠깐……!”

텔레포트를 한 것도 아닌데, 뭐가 이리도 빠른 것인지.

진짜 이제는 기가 질릴 것 같았다.

가까스로 주먹을 피하자, ‘가이아’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오호…….”

쓸 만한데?

말하지 않아도 뒷말이 들리는 것 같아 밀리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원초적인 공포가 뇌를 자극했다. 사냥꾼에게 잡힌 사냥감의 기분이었다. 너무 무서워 반사적으로 스킬을 발동시켰다.

【빛의 화살(A)를 발동합니다.】

전방위 공격에, 위력을 떠나 틈새 공격을 완전히 잡아내기 힘들어 가이아가 몸을 뒤로 뺐다.

“파아―!”

거리가 벌어지자, 밀리언이 참았던 숨을 한 번에 몰아쉬었다. 그리고 곧바로 본격적으로 공격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상대가 자신이 호감을 가진 상대여도 그는 공격을 전개하는 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자신이 가진 최강의 스킬로도 그녀의 발끝에 닿을 수 있을지 의문인데 무슨. 그딴 짓을 하는 건 제 주제 파악을 더럽게 못 하는 천치나 하는 짓이었다.

【빛의 가호(S)가 몸에 깃듭니다.】

【빛의 선율(S)를 발동합니다.】

“루이스!”

“알아!”

【성기사가 ‘성기사의 포효(S)’를 발동합니다.】

성기사가 스킬을 발동하며 점프를 하자마자, 신호를 보냈다.

“케이!”

“준비됐어!”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답이 날아오며, 연금술사 케이가 준비된 마법을 시전했다.

【연금술사가, ‘우로보로스의 족쇄(S)’를 시전합니다.】

“카밀라!”

“가자고!”

【광전사가 ‘광기의 집결(S)’을 발동합니다.】

“호오.”

솔직히 나름 감탄했다. 다들 안면을 트고 있는 사이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실제로 합을 맞춰 같이 전투를 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일 것이다.

같은 국가 출신이라면 합동 레이드를 뛴 적이 있긴 하겠으나, 월드 랭커 급의 헌터를 타국에 돌리는 정부는 없을 테니까.

당장 우리나라만 해도 유지한이 한 번 해외 나간다고 하면 언론까지 들쑤셔서 난동이란 난동은 다 피워댔다.

유지한은 뭐 해외 여행도 못 가나.

실제로 우리나라가 헌터에 대한 예우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기에 해외 여행을 갔다가 그대로 이주해 버리거나, 거기서 다른 나라들의 귀빈급 대우를 받고 이민을 가는 경우도 흔했기 때문에 유지한 정도 되는 네임드 랭커의 경우,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다 써서라도 방해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럴 노력으로 그냥 대우를 개선하면 될걸. 멍청한 놈들끼리 모여서 생기는 최악의 시너지였다.

덕분에 유지한은 해외 여행도 못 갔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어쨌든 그 정도로 월드 랭커의 국외 출국은 매우 민감한 문제라 실제로 합을 맞추는 건 이번이 기껏해야 두 번째일 터인데, 전투는 안 해도 워낙 안면을 트고 지내와서 그런지. 사이가 안 좋은 것과 별개로 마치 오랫동안 합을 맞춘 것처럼 호흡이 완벽했다.

“연금술사가 바인딩에 전방위 공격과 이중 근접 공격이라……. 급조한 것치고 밸런스도 딱인데?”

꽤 괜찮은 연계 공격이라 마음에 들었다.

물론.

“어. 족쇄가……!”

그렇다고 해서 그냥 당해 줄 생각은 없었다.

먼저 가볍게 우로보로스의 족쇄를 피하고 그 위에 올라서 발로 깨부수자, 그대로 역관광을 당한 연금술사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소리치다 그대로 피를 토하며 지상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그걸 알아채기 전에 먼저 빛의 선율을 손으로 잡아채 그대로 끌어당겼다. 상상도 못 했던 행동이었는지, 밀리언이 선율과 함께 그대로 끌려왔다.

“흐억―!”

“아니 저걸 어떻게 손으로 만…… 커엌―!”

“악―! 이 도움 안 되는 것들!”

그리고 그걸 보며 기겁하는 루이스와 카밀라를 향해 방향을 틀어 내게 끌려오는 중이던 밀리언으로 공격을 가했다.

“악―!!”

장렬하게 부딪쳐 두 사람이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추락했다. 물론 밀리언은 내가 잡고 있어서, 그냥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이렇게 충격을 받았으면 스킬이 취소될 법도 한데, 사라지지 않고 선명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아직 정신을 잃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의외로 이 와중에 마력은 흔들리지 않는 건지 꽤나 견고하게 유지되어 있어서 새삼 이놈을 다시 보게 되었다.

“꽤 쓸 만하군.”

그래봤자 요 정도 감상이 전부이긴 하지만.

“꾸엑―!”

더 볼 일이 없어 선율을 놓아 버리자 그대로 바닥에 추락한 밀리언이 괴성을 질렀다. 그런 놈의 소리를 깔끔히 무시하며, 나는 이제 남은 단 한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흠. 아직도 그런 자세인가…….”

“…….”

“잘할 수 있다며?”

말한 바는 지켜야 하지 않겠어?

그 말에 그제야 결심을 한 듯 유지한이 검을 손에 쥐었다. 그걸 보며 나는 그제야 진심으로 기분 좋게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역시 다른 이들을 받아들인 게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전력도 맞는 말이었지만, 사실 궁극적인 목적은 이것이었다.

다른 이들을 보며 조금이라도 깨닫는 바가 있기를.

다른 사람은 다 앞으로 나아가는데, 당신만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을 테니까.

예상이 적중해서 아주 기분이 좋았다. 굳이 유지한의 상대를 나로 한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그가 나를 이길 것이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 없었다.

【승리의 검 ‘세이라’가 아득히 높은 벽의 기로의 선 계약자를 위해 노래를 부릅니다.】

그럼에도, 당신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검을 겨누기 힘든 사람일 내게 검을 겨눈다면, 당신은 그 어떤 상황이 닥친다고 해도 지금처럼 망설이지는 않을 테니까.

【정의의 수호자가 ‘정의의 실현(S)’을 발현합니다.】

그에게 더없이 잔인한 것을 알고 있음에도 선택을 강요하고 종용한 이유가 이것이었다.

“하하. 바로 이거야.”

당신이 성장하길.

“좋아. 어디 한번 해 보자고!”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망설이지 않고, 검을 들어 살아남기를.

“그냥 전력으로 쏟아부어!”

“이미 그럴 생각이야!”

세상도, 수많은 사람들도, 넘치는 재물도, 값어치 있다는 그 어떤 것보다.

【대제, ‘가이아’가 ‘지배자의 광기(S)’를 드러냅니다.】

당신이 더 중요했으니까.

* * *

“……괴…… 괴물…….”

“저…… 저게 어떻게 사람이야…….”

“……망할…….”

털썩―

유언이라도 남기듯 장렬히 패배해 스러진 이들의 정 중앙에서 나는 쌍욕에 가까운 그들의 감상평을 들으며 유유히 가면을 해제했다.

【가면을 벗습니다.】

【수백 개의 가면을 해제합니다.】

솨아아―

가면을 벗고, 자유로운 윤지호의 모습으로 돌아와 기분 좋게 기지개를 쭈욱 켰다.

“끄응. 아. 간만에 재밌게 놀았다.”

즐거움이 가득한 내 소감에 널브러져 있는 인간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듯한 얼굴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얼굴들을 보며 오히려 내가 조금 어이가 없었다. 내가 진짜 죽을 만큼 힘들게 임했던 것도 아니었고, 고생은커녕 적당히 돌아다니기만 했는데 나로서는 ‘놀이’에 가까웠다는 게 당연하지 않나?

아. 물론 월드 랭커라는 인간들의 수준에 좀 실망하긴 했다. 거의 평생이라고 할 정도로 인생에서 대다수의 시간을 강자로 살아온 그들은, 자신보다 아득히 높은 강자와의 싸움에 취약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습관이라도 들어 버린 것처럼 꼭 큰 거 한 방으로 싸움을 끝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 마지막 일격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게 당연하다는 듯. 그래서 그 결정타를 위한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며, 전투 내내 소극적으로만 행동하다 필살기 한 번 날리는 전형적인 패턴.

단순하다 못해, 전략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싸움 방식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은, 그들의 힘 자체가 다른 이들을 아득히 뛰어넘는 강자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전투 습관은 그들이 줄곧 강자였기에, 강자여야만 버릇 들일 수 있는 패턴이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그동안은 그렇게 적들과 비등비등하게 싸울 수 있었겠지만, 지금부터는. 아니 앞으로도 그들의 본 실력보다 아득히 높은 존재들과 싸워야만 할 테니. 지금 이런 식으로 싸우면, 솔직히 까놓고 말해 그 망할 놈의 ‘강한 한 방’을 날리기도 전에 죽기 십상이었다.

그게, 내 총평이었다.

“일단 전투 실력부터가 다들 너무 수준 이하라. 교육이 많이 필요할 거 같네요.”

정신 개조 교육도 포함해.

평생 강자로 살아오다, 약자의 싸움법이라고 생각할 법한 복잡한 싸움 방식은 주제 파악을 전혀 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그들의 고고한 자존심이 허락지 않을 것이 뻔하니.

아니나 다를까. 언제 시체처럼 드러누워 있었냐는 듯, 상체를 벌떡 일으키기까지 하며 여기저기서 항의가 날아들었다.

“아니. 우리가 그 정도 수준은 아닙니다!”

“당신한테 비하자면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우리도 제법 알아주는 강자들……!”

“이죠. 물론. 세계에서. 하지만 다들 잊으셨나 봐. 돌대가리인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그렇게 다 홀라당 까먹은 것인지.

생각보다 더한 금붕어 대가리들에게 다시 리플레이 해 주기가 너무나 귀찮아서 미간을 찌푸리는데.

“무슨……! ……아……!”

가차 없는 내 막말을 들은 이들이 분노 어린 얼굴로 항의를 해대다, 무언가를 퍼뜩 깨달은 듯 아차 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래. 우리가 싸울 상대는 파우스트지. 나조차도 승리를 확신할 수 없는.”

“……!!”

그것까지는 생각지도 못한 것인지, 아니면 설마 그래도 내가 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건지, 모두의 눈이 튀어나올 만큼 커졌다. 그런 그들의 한심함에 나는 진심으로 혀를 찼다.

“내가 뭐 하러 한 달이라는 유예기간을 만들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건…….”

이건 진짜 바보들의 향연인가.

너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정말 아무도 이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니.

그래도 처음이니까 전력 파악부터 하려고 적당히 해 준 게 후회가 되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덤벼든 거였다는 걸 알았으면 일단 대가리부터 후려쳐 뇌를 주무르고 시작했을 텐데.

몰론 나 혼자 싸우면 될 일이긴 하다. 이길 거란 확신은 없었지만, 질 거란 확신도 없었으니까.

아마 비등비등하게 싸울 것이다. 그리고 만약이라는 가정하에, 내가 장렬하게 죽게 되더라도 그놈은 같이 끌고 갈 수 있으리라는 건 자신했다.

하지만…… 내가 왜 그래야 하는가?

나 하나만 희생하면 해결될 일이라고 해서 그걸 내가 꼭 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한 사람만 희생하면 다수가 살 수 있다고 해서 그 한 사람이 꼭 희생해야 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다수가, 내게 대체 무슨 가치가 있지?

솔직히 나는 이대로 세상이 끝난다 하더라도, 내가 나설 생각은 없었다. 내게 이 세상은 내가 움직일 정도로 가치가 있지 않았다. 가치가 없는 일에 굳이 사서 생고생을 하며 희생하는 건 유지한 같은 호구니까 하는 거다.

내가 한 달이라는 유예를 둔 건.

그래. 너희들이 지겹도록 말하는 인류를 위해. 준 자비와도 같은 것이었다.

한 달.

짧다면 짧고, 긴다면 긴 시간. 남은 생을 적어도 마무리 짓거나, 즐기는 것 정도는 해도 문제가 없는 시간이었다. 내가 나설 생각이 없기에, 인류를 위해 선택지를 쥐여 준 것이었다.

한 달 동안 인생을 즐기며 남은 생을 마무리해도 괜찮고, 그게 싫다면 제 실력을 키워서 이 시련을 이겨내 보라는 선택지. 혹자는 이걸 어떻게 선택지라고 하냐 할지도 모르지만, 그 순간 그대로 세계가 바로 망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난 진심으로 그리 여겼다.

“당신들이 강해지지 않으면, 인류 전체를 고기 방패로 써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거야. 그래서 나는 당신들에게 강해질 시간을 벌어준 거고.”

“…….”

“그러니 잔말 말고 일어나. 너희들이 1초라도 목숨을 벌고 싶다면 그 같잖은 자존심은 한강에 던져버리고.”

시간은 무한하지 않으니. 그 귀한 시간 낭비하고 싶으면 여전히 그러고 망연자실하게 있던가.

“전말자. 치료.”

“오케이.”

주저앉아 있는 이들을 강제로 끌어 일으켜 내 훈련을 따르라고 강요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망설임 없이 전말자에게 맡기고 그대로 등을 돌렸다. 그러자,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아니. 우리는 당신의 힘을 얼마나 끌어낼 정도의 수준입니까?”

자신과 나의 격차를 묻는, 목소리였다. 결의를 다지는 목소리에 나는 기분 좋게 등을 돌렸다. 그래도 내가 한 노력이 헛수고는 아니었으니 기분이 솟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기분 좋게 답변해주려고 하다가, 난관에 부딪혔다.

“어. 그러니…… 어?”

“……?”

그걸 쉽게 대답을 해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대답 자체는 해 달라면 해 줄 수 있지만, 그건 분명 막말 팩폭이 될 것이 분명하니, 좀 세분화해서 가늠을 해 보려고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데, 내 머리 굴리는 소리가 들리기라도 한 것일까.

“……설마……?”

모두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기함을 하는 그들에게, 결국 적당한 답을 떠올리지 못한 나는 머쓱한 얼굴로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숨 쉬는 것을 어떻게 계산해요?”

일단 난 해 본 적이 없어서.

내가 말하고도 굉장히 재수 없는 발언이라 부끄러워 볼을 긁적였다.

하지만 사실인 걸 뭐 어쩌겠는가.

숨 쉬는 걸 칼로리로 계산해 봤자 사람마다 너무나 다르고, 일단 사람이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행위라 계산을 매길 수 없는 것처럼, 이들을 적당히 상대하는 것 역시 내겐 마찬가지였다. 물론, 무한대의 마력이라도 큰 힘을 쓰거나, 저번처럼 세계를 닫을 때는 꽤 큰 힘이 빠져나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이번처럼 고작 이 정도 논 것으로는 내가 마력을 썼다고 느낄 수조차 없었다.

잠깐 쓰기만 해도 내가 썼다는 것을 느끼기보다 다시 마력이 채워지는 속도가 더 빨랐으니 언제 그걸 느끼고, 기억하고, 계산하고 앉았는가.

적어도 나는 불가능했다. 그렇게 기감이 예민하지도 않았고, 성격 자체도 그다지 꼼꼼하지도 못했다.

“……와……. 진짜…….”

“진짜 사람인가…….”

“솔직히 이야기 해 줘요. 사람 아니죠? 성좌가 지구로 현신했다거나 뭐 그런 거 아니에요?”

지금 밝히면 전부 이해해 줄게요.

아예 내가 성좌라고 확신하고 묻는 것 같은 카밀라의 목소리에,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답했다.

“그럼 나한테 성위가 왜 있겠어요?”

“없는데 있다고 거짓말하는 걸 수도 있잖아요! 성좌란 걸 밝혀 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

[어이. 어이. 버젓이 있는 성좌 없는 성좌 취급하면, 성좌 서러워서 하겠냐고.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자신의 존재를 주장합니다.]

“어. 음……. 지금 내 머리에서 겁나 시끄럽게, 자기 여기 있다고 소리 지르는데요?”

“안 꾸며내셔도 돼요!”

“와. 이걸 보여 줄 방법도 없고. 미치겠네.”

아예 내가 성좌여야만 납득을 할 것 같은 광신도의 모양새에, 진짜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일단 저건 제쳐 두고 다른 것부터 하기로 했다.

“오우. 이쪽도 다들 열심히 배웠나 보네.”

아주 골고루 곤죽이 다 됐는데?

그럼에도 실력이 향상된 게 한눈에 보여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며, 윤지우가 악마를 보았다는 듯이 부르르 떨었다. 평소였다면 그 행동과 함께 빽빽 소리를 질러왔을 텐데, 소리를 지를 체력도 없는 듯했다.

“그래. 그래. 열심히 했네.”

열심히 한 동생을 솔직하게 잘했다 칭찬해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그래도 칭찬은 좋은 듯 녀석이 얌전히 있었다.

그렇게 동생 놈을 달래 주고 몸을 일으키자 내 시선 한 줌만이라도 바랬던 녀석들이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몰려들었다.

“주인님!”

“주인.”

“주인이시여.”

마찬가지로 내 칭찬을 바랄 녀석들에게, 미소를 흩뿌리며 말했다.

“다들 고생했어. 아주 마음에 들어.”

“앗……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분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인의 명이라면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기쁨으로 고양된 대답들을 들으며, 나는 문을 개방했다.

【‘이매망량의 문’을 개방합니다.】

“수고했어. 한동안 자주 부르게 될 거야.”

“더없는 영광일 것입니다.”

자주, 한동안 계속 부를 것이라는 말에 상기된 얼굴로 부복을 하며 다들 문 안으로 사라졌다.

“나도 가?”

한 놈만 빼고.

“데이모스.”

“난 저기 안 들어가도 여기 있는 데 전혀 지장 없어. 마력도 감출 수 있고.”

생각지도 못한 반항에, 이걸 어떻게 할까 순간 고민에 휩싸였다.

그냥 찍어 누른 다음에 처넣는 것도 가능했지만, 그래도 나는 문명의 지성인.

일단 대화로 풀어 보기로 했다.

“그래도 널 여기, 어디서 키우니.”

“주인 옆에 얌전히 있을게. 수발 다 들어 줄게.”

명백히 개 취급을 했음에도 조금의 거리낌 없이 날아오는 칼 같은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도발을 하려는 듯한 마지막 말은 귀엽기까지 했다. 내가 솔로였다면 재밌어서 그러라고 했겠지만, 지금의 나는 공교롭게도…….

‘…….’

분리불안증 말기 강아지를 하나 키우고 있었다.

“곱게 갈 생각 없니.”

“어차피 주인은 남 수발 받는 거 익숙하잖아. 여랑이 지금도 일 다 한다던데? 내가 할게. 그거.”

“야. 그거 어디서 다 듣…… 아니, 됐고. 걔 일을 뺏으면 여랑이 널 가만둘 거 같니?”

가정부가 천직인 듯, 자신의 일감을 하나라도 뺏어가면 털을 곤두세우는 그 애가? 죽이겠다고 달려들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런 내 말에, 데이모스는 뭐가 문제냐는 듯 답했다.

“내가 이겨.”

아. 그래……. 니 똥 굵다.

나는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지지고 볶든, 한 판 뜨든 니들끼리 알아서 해라.

어차피 나는 상관 없는 일이니까.

물론…….

“……네가, 어디에 있는다고?”

“아니. 이건 또 뭐지?”

이것도 알아서 처리하고.

남친과 권속의 기 싸움을 외면한 나는 일단 파장을 선언했다.

“자. 이제 그만 나가죠.”

사막은 이제 좀 질렸다.

* * *

솨아아―

“야. 들어오자마자. 힐링 셔틀 넘 부려먹는 거 아냐?”

게이트를 넘어오자마자, 전말자가 기다렸다는 듯 툴툴댔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 전말자다운 행동이었다.

“힐링 셔틀로 써 달라며?”

“그래도 이렇게 한 번에 몰빵으로 쓸 줄은 몰랐지. 에구구. 혹사당해서 삭신이 쑤시네.”

보란 듯 대놓고 다리를 저는 시늉을 하며, 자신의 고생을 열심히 피력했다. 진짜 상여우의 행동이었지만, 그래도 정은 무시 못 한다고 그게 나름 귀여워 보여 특별히 눈 가리고 아웅 짓에 동참해 주기로 했다.

“바라는 게 뭐야?”

기분 좋을 때 얼른 말하렴.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까닥거려 허락의 제스처를 취하자, 전말자가 아까의 눈물은 다 어디 갔는지 해사하게 웃으며 내게 매달렸다.

“자기야. 나 마정석 하나만.”

“……신성석이 아니라?”

네가 그걸 가져가서 어디다 쓰게?

전혀 예상치 못한 물건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력을 쓰는 대부분의 이들과 다르게, 전말자는 성력을 썼다.

저게 괜히 성녀이겠는가.

성기사인 루이스도 비슷하게 성력 계열인 것처럼 보이지만, 전투를 기반으로 하는 그는 공격적이어야 하기에 성기사 타이틀이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성력이 아닌, 마력을 사용했다. 선을 위해 사용한다고 해서 성기사란 타이틀이 붙었을 뿐이다.

성력은 기본적으로 어떤 것에도 해를 끼칠 수 없는 선한 힘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성력을 가장 고귀하고, 방대하게 가지고 있는 게 바로 성녀였다. 세계에 있는 모든 성력의 80%를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괜히 성녀가 아니었다. 그런 성녀가 뜬금없이 마정석을 달라니.

어느 쪽으로든, 쓰지 못할 것이 뻔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갖다 팔 바에는 차라리 돈을 달라고 하는 게 나았고, 뭔가 거래 조건이라고 하기에는 찝찝했다.

나한테 마정석을 달라고 할 정도면 평범한 마정석을 달라고 하는 건 아닐 테고, 만약 거래의 대가라면 뭔지는 모르겠지만 간단한 거래는 아닐 테니까.

이런저런 의심으로 미심쩍은 눈으로 전말자를 바라보자, 아무리 뻔뻔함의 대명사인 전말자이지만 그런 내 시선을 받기는 힘들었는지 눈치를 보다 짜증을 내며 이실직고했다.

“아. 나도 호위 하나 필요할 거 같아서 그랬다 왜!”

“그래서, 마정석으로 꼬시겠다고?”

……뭐하러?

세상에서 젤 쓸데없는 짓으로 비싼 마정석을 소비하려는 전말자를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세계 최고의 힐러.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최고이자 누구도 넘을 수 없는 힐의 대가.

장담컨대 그녀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 발을 핥아서라도 곁을 지키며 고기 방패를 자처할 이들이 지구 반 바퀴를 채우리라.

멀리 갈 것도 없이 그 지구 반 바퀴를 채우고도 남을 전력이 바로 주변에 있었다. 주변이 아니라 아주 코앞에 두고서도 호위를 운운하는 전말자의 모습에 진심으로 기가 찼다.

제 발로 내 옆에 착 붙었으면서, 내 옆에 붙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조금도 생각지 않았던 건지, 아주 중요한 사실을 하나 망각한 것 같았다.

“야. 전말자.”

“왜.”

“뭔가 잊고 있는 거 같은데, 넌 내 소속이 아니…… 아니, 맞긴 한데. 원티드야.”

“……어?”

와. 이 자식. 진짜 자각 못했나 보다.

“원티드 길드원 계약서 쓴 거 아니었어? 차지혁 이 새끼 뭐 했어?”

이거 내가 확인 안 한다고 일을 발로 하나.

물론, 일단 성격상 눈앞에 일이 있으면 그냥 두지 못하고, 불의를 보면 나서는 본능을 가진 천부적인 일 중독자인 걸 익히 잘 알고 있었기에 안심하고 차지혁을 그냥 내버려 둔 것이긴 했다.

하지만 이런 전말자의 모습을 보니 일을 너무 과도하게 준 건지, 아니면 너무 당연해서 말을 안 한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피어올랐다.

그런 내 불쾌함을 읽은, 전말자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계약서 쓰긴 했는데……. 그래도 난 원티드로 들어왔다기보다는 너로 인맥 타서 들어온 거고…….”

“인맥으로 들어오기 최초 시발자 정하나 저기 있는데, 저거 이제 완전 토종 원티드 됐는데?”

되도 않는 소리에 나는 백 마디 답 대신 훌륭한 예시를 가리켰다.

“와우. 소환술사 이름이 초라해지는데……. 원래 그랬다고요?”

“저런 몬스터는 아니었지만 원래부터 유명했어요. 어떤 인물이 필요하면 그 필요능력치 MAX인 인간을 데리고 나타났거든요.”

오죽하면 요술 주머니라고 불렸겠어요.

누구든 사람이 필요하면 일단 윤지호한테 괜히 달려간 것이 아니었다고, 입담을 털자 장예슬이 감탄을 하며 박수를 쳤고, 주변 연구원들이 아주 팝콘까지 들고 경청할 기세로 옆에 따닥따닥 붙어서 이어질 말들을 기다렸다.

완벽히 이곳에 물든 모습이었다.

“…….”

그 모습을 보고 할 말을 잃은 전말자를 향해 나는 전말자가 간과한 사실을 무심히 집어 줬다.

“저기 평생 센터에 뼈를 묻을 것 같던 차지혁도 지금 정하나만 보고 아예 원티드로 이적해서 열심히 몸을 불사르는 건 이미 봤을 거고. 너도 앞으로 그럴 거야.”

“……그건 네가 시키는 거잖아.”

“그렇게 따지면 여기 원티드 인간들도 마찬가지인데?”

내가 시키는 걸 안 할 거 같아?

굳이 내가 일코 해제를 하지 않았어도 처음부터 그래 왔던 것이었다. ‘무명’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기 전에도 자신이 말하는 대로 착착 따라 주던 이들이 아니던가.

“진짜 이건 눈치만 보다가 습관이 들어 버렸나. 야. 여기 원티드야.”

“알아.”

“그래. 남들이 다 아는 특급 호구. 욕 먹어도 구해 주고. 호구라고 뜯겨도 계속 호구처럼 뜯겨서 별 같잖은 것들이 ‘위선자들 집합체’라고 부르는 원티드.”

“…….”

“굳이 네가 원티드가 아니어도, 성녀가 아니어도. 여기는 널 구하기 위해서 반사적으로 몸을 던질 수 있는 구제불능들 천지야.”

어쩜 다 그런 인간들만 모였는지 신기할 정도로.

열심히 뜯어고치긴 했지만 그래도 천성은 변하지 않는 법이었기에, 그들은 여전히 그렇게 행동했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도 뜯기고 살아 사람을 믿기보다 의심을 먼저 하게 된 멍청한 년만 모르는 것 같은 사실이었다.

탁―!

“아!”

“그러니까 당당하게 도움 요청해. 너한테 바라는 것 하나 없이 분명 언제든, 누구든 도와주러 갈 거니까.”

아직 네 믿음을 사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그 말에 이미 머리로는 원티드와 관련한 모든 정보들을 다 알고 있었어도 진심으로 신뢰하지는 못했던 전말자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왜?”

정말 불쌍하고 멍청한 기집애였다.

너무나 간단한 답이 있음에도 그 답을 믿지 못했으니. 아니. 늘 어디에든 소속되어 있었지만 그저 부품 취급만 받았던 탓에 소속감 자체를 느끼지 못해서 그런 걸지도.

“너도 원티드니까.”

“……!”

“축하해. 이제 너도 이런 구제불능의 일원이야.”

그런 머저리 같은 기집애한테, 늦었지만 길드 실장으로서 말했다.

“원티드에 온 걸 환영해. 전말자.”

언젠가, 내 빌어먹을 주인공님이 나를 수렁으로 빠뜨렸던 말을.

정말 별거 아닌 한 마디.

하지만 자신감이 가득한 태도와 해사한 미소에 모두가 매료되며 압도되었다. 그건 그녀가 무명이어서나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곳에 있던 외지인들은 그제서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왜 이제 막 들어온 여자가 단번에 이 원티드를 휘어잡고, 이 원티드의 기둥이 되었던 건지.

어떤 능력도 없었음에도.

물론 실상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힘 하나 드러내지 않고도 가뿐하게 그것을 해내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울먹거리는 성녀를 멍하니 보며 카밀라가 입을 열었다.

“……시발. 나도 가입할래.”

“……될 거 같냐.”

“왜. 원티드 글로벌 길드라며.”

윤지호의 영입과 동시에 원티드는 길드의 확장을 선언해, 글로벌 길드로서의 모든 사업을 갖춰 놓은 상태이긴 했지만, 아직 어떠한 신 멤버도 받지 않고 있었다.

받을 만한 여력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카밀라가 될 리가 없었다.

“브라질이 유일한 S급 헌터가 국외로 나가는 걸 두고 볼 거 같아?”

“내가 다 부수고 들어오면 되잖아.”

“가능한 일을 이야기해.”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에 연금술사 케이가 일침을 가하자, 카밀라는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떼를 썼다.

“나도 들어가고 싶어. 들어갈래.”

물론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저 모습을 보고, 이미 다른 길드에 소속되어 있는 자도, 국가에 소속되어 있는 자도,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자도. 모두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케이. 자신부터가 그랬으니까.

힘이 아니었다.

화려한 언변도 아니었다.

그저 어떻게 보면 뻔하디뻔한 말일 뿐.

하지만 뻔한, 그러나 진실된 말을 들어 보지 못한 게 언제부터였는가. 아마 이곳에 있는 이들은 전부 기억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상위 랭커라면 대부분 어릴 때 각성을 마치고 그때부터 평범한 인간들과 다른 존재처럼 취급을 받았으니까.

“……별거 아닌데 말이야.”

“하지만 우린 위선으로밖에 갖지 못하는 것이지.”

“그래서, 버렸잖아. 위선보다 짓밟는 게 더 나았으니까.”

“그렇지.”

그게 익숙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은 것도 아니었다.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서 강한 척을 하며 짓눌렀지만, 그것이 진심으로 좋을 리 없었다.

그렇지만 바란다고 해서 이루어질 일인가.

그래서 오래전에 포기한 것이었는데.

그녀는 너무나 당연히 그것을 자신에게 소속된 헌터들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녀는 너무나 당연히 그들을 그냥 평범한 사람 취급을 했다.

그녀가 그들보다 아득히 높은 존재여서, 그저 하찮게 보여서 그랬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머리로 그렇게 의심을 해도 가슴은 그 의심을 사뿐히 지워냈다.

자신이 월드 랭킹 1위라는 자각 자체가 없는 것 같은 그녀는, 지배자답게 그들을 자연스럽게 휘두르기야 했지만 기본적으로 본인이 다른 이들보다 우위에 있어 군림한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하니까.

“정하나! 그리고 다들 내려와요! 점심 먹으러 가자!”

그저 그녀의 눈에는 그들이 그냥 인간으로 보일 뿐이다. 강한 힘을 가졌을 뿐인, 인간.

“나! 나! 파스타!!”

“전 피자요!”

“난 튀김 먹고 싶어!”

“아. 무조건 고기지! 뭔 소리야!”

그런 그녀가 너무나 자연스럽고 강인하게 존재하니, 헌터들이 당연히 그 주위에 몰릴 수밖에. 그렇게 그녀는 그들이 돌아오고 싶은 집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그냥 호텔 뷔페를 통째로 빌리자. 원티드 통으로 가면 통으로 빌리는 게 편하지.”

“비싸지 않아……?”

“헐. 이게 무슨 미친 개소리야. 지금 우리나라에서 돈 제일 썩어나는 게, 원티드거든?”

“그건 그렇지……?”

“그리고, 돈은 원래, 이렇게 쓰는 거야.”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외지인조차 무심코, 저게 자신의 집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 만큼.

“우와. 역시 윤지호.”

“최고다!”

“가자! 가자!”

정말 부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뭐야. 안 따라와요?”

“……우리도 가요?”

“그럼 다 데려가는데, 댁네들만 뻘쭘하게 뚝 떼어 놓고 가요?”

그렇게 몰상식하고 무자비한 사람 아니라고, 얼른 오라고 그녀가 손짓했다.

“……앗싸―!”

“……카밀라 시끄러워.”

그 손짓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을 만큼, 저절로 마음이 들떴다.

“지들도 좋으면서. 그럼 니들은 가지 말던가.”

“안 간다는 소리 안 했다.”

“아이고. 그러셔요.”

언젠가, 기억나지 않던 평범했던 날처럼.

잠시의 꿈같은 휴식이었다.

* * *

“우와! 쩔어!!”

“야! 촌티 나게 안 와 본 티 내지 마!”

“우리 안 와 본 사람 맞는데.”

“우리가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은 가 본 적 있어도 이런 데 와 본 적 없잖아.”

사람들 시선 때문에 신경 쓰여 다 같이 뷔페 같은 건 꿈도 꿔 보지 못한 인간들이 아주 단체로 신이 나 뷔페를 뛰어다녔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등 뒤에서 내 발끝도 쳐다보지 못하는 지배인에게 여상히 인사를 건넸다.

“무리한 부탁이었을 텐데, 수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냥 뷔페도 아닌, 호텔 뷔페였다.

그것도 요즘 가장 핫하다는 페어몬트 호텔 뷔페.

며칠 전은 물론 몇 주 전부터 예약해도 될까 말까 한 곳이었기에, 예약이 전부 꽉 찼을 것이 분명함에도 전화 한 통에 바로 모든 예약을 취소하고 선뜻 자리를 내 주었으니 이정도 인사는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전화였으니 현재 판도를 보면 ‘아유. 당연히 해드려야죠. 아니, 제발 오십시오. 대대손손 가문의 영광입니다.’ 할 판이긴 했지만 그래도 예의를 아는 지성인으로서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압도적 우위에 있는 내 말이었으니 내 진심이 닿지 않기는 했겠지만, 그래도 이런 단순한 한 마디가 사람에게 어떤 위로가 되는지 모르지 않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런 내 말에 지배인이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아닙니다. 오히려 저희 쪽에 연락을 주셔서 영광입니다. 부디 편하게 즐기시고, 음식이나 서비스에 불편 사항이 있으시면 바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친절에 감사합니다.”

지배인이 식사를 즐기라고 하며 물러나자, 나는 접시를 집어 유지한에게 쥐여 주었다.

“……?”

“자. 먹고 싶은 거 다 담아요.”

음식 천지에요!

그러니 얼른 먹고 싶은 거 실컷 먹으라며 웃자, 멍하게 있던 유지한이 나지막이 웃음을 터뜨렸다.

“네.”

귀여운 미소에 마주 웃어 주고, 음식을 가지러 유유히 떠났다. 그리고 어느 정도 담아 와 즐겁게 식사를 하는데…….

굳이, 밥을 먹고 있는 내 앞에 최악의 매너를 기본으로 탑재한 불청객들이 등장하셨다.

“무. 무명……!”

“오랜만에 다시 인사드립니다.”

아 씨. 밥 먹는 중에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다른 때여도 짜증이 났겠지만, 식사 중이었기 때문에 배로 짜증이 났다.

“…히익―!”

그런 내 기분을 감추지 않고 고스란히 내비치며 미간을 구기자, 대체 왜 달고 온 건지 알 수 없는 인간이 식겁을 하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솔직히 예쁜 언니나, 오빠가 했으면 귀엽다고 쉴드라도 쳐주겠지만 배 나온, 주름 자글자글 진 할아버지 직전의 아저씨가 그러니 미관상 좋지 않았다.

“……저 버러지는 왜 달고 온 거야?”

안 그래도 예쁜 걸 사랑하며, 예쁜 것만 보고 싶은 인간인 나로서는 대단히 불쾌한 모습이었기에 감정을 여과 없이 표출하자 또 지 얘기하는 건 기가 막히게 알아들은 버러지가 발끈했다.

“뭐?! 이런 무례한……!”

“그만. 조용히 계십시오. 상대가 누군지 똑바로 파악하시고요.”

죽고 싶지 않으면.

이 총리의, 아첨이라고는 조금도 담기지 않은, 오로지 팩트 폭력만 담은 기계적인 경고에 그래도 목숨은 아까운 버러지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식사 시간에 끼어드는 건 정말 예의가 아닌 행동이어서 그대로 내쫓아도 되겠지만, 그래도 내가 이런 무례한 행동을 질색하는 것을 알고 있을 이 총리가 이렇게 온 걸 보면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해 일단 자리를 허락했다. 나이프로 의자를 가리키자, 바로 내 허락을 알아들은 이 총리가 의자에 앉으며 근처에 있던 직원에게 주문을 했다.

“커피 한 잔 부탁드립니다.”

물론 버러지에게 주문할 기회 따윈 없었다. 직원이 바로 이 총리의 말에 커피를 가지러 자리를 뜨자, 이 총리는 마치 ‘오늘 아침은 이거였습니다.’ 하듯 아주 자연스러운 태도로 바로 본론을 꺼냈다.

“대통령님께서 서거하셨습니다.”

물론 꺼낸 말은 태도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

찰랑―!

쨍―!

그렇게 큰 목소리가 아니었음에도, 남들보다 몇 배나 청력이 우수한 헌터들이었기에 적당히 흘려들을 것도 다 들어 버려 아주 반응이 제대로였다. 참으로 요란한 반응들이었지만,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아니었기에 조용히 모른 척해 주었다.

그러고도 남을 만한 주제였다. 나조차 마시고 있던 커피를 그대로 뿜을 뻔했으니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삼켜냈지만.

달칵―

“어떤 소식도 듣지 못했는데.”

“오늘 아침 벌어진 일입니다. 게이트에 빠지셨다 빠져나오신 뒤부터 줄곧 상태가 안 좋으셔서 쉬쉬하던 상태였는데, 결국 일이 벌어진 것이죠. 현재는 비밀에 부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곧 언론을 통해 발표가 날 겁니다.”

누군가의 죽음. 그것도 이 나라 수장의 죽음이자, 자신의 직속 상사의 죽음을 말하면서도 이 총리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듯.

비정하다 할 수 있었지만, 애초에 현. 아니 이제는 전 대통령이 된 그 인간은 나라에 딱히 도움이 되는 수장은 아니었다. 기대도 안 했지만 실제로 만나 봤을 때에도 수준 이하의 모습을 보여 주었던 탓에 그나마 남아 있던 일말의 기대감까지 몽땅 털어 버린 나로서는, 그런 이 총리를 비난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후룹―

“그래서, 난 왜 찾아왔는데?”

그게 나랑 뭔 상관이라고?

다시 차분하게 커피를 드링킹하고 있자, 그런 나를 보며 이 총리 역시 도도하게 커피를 마시며 입을 열었다.

“그야 당연히, 당신이 현 대한민국에서, 그리고 세계에서도 가장 강하고 영향력이 있는 분이시니까요.”

능력이든, 여론이든. 어떤 의미로든.

내가 한 마디만 해도 그 여파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에 말도 안 되는 소리는 말라고 일갈할 수가 없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내가 단체로 원티드 회식했다는 것도 이미 알음알음 소식이 퍼져 언론에서는 식사를 방해해 내 미움을 살까 봐 눈치만 보고 있을 것이다.

아마 우리가 여길 나가면 득달같이 기사가 나오겠지.

내가 어딜 가든, 내 걸음 하나하나에 의미를 둘 현 여론은 내게 또 다른 힘을 쥐여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작정 나를 비판해봤자, 내 화를 살 뿐이라는 걸 잘 아는 그들은 전 세계 인간들이 내 눈치를 보고 있는 이 순간에 꽤 유용한 패 중 하나였다.

“그래서? 그렇다고 해도 그게 나랑 뭔 상관이지? 대통령이 누가 되든, 난 별로 관심이 없는데.”

정치 밥 먹는 놈들이 다 그 나물에 그 밥이지 뭐. 얼마나 멍청하나, 연기를 기깔나게 잘하냐의 차이는 분명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정치판 똥물 묻은 놈들은 똥물이 묻는 순간, 다 똥이 된다고 생각하는 정치인 혐오자가 여상히 생각했다.

유들유들한 내 태도에, 대체 왜 따라온 것인지 의문인 머저리가 부들부들하는 것이 보였지만 그 역시 관심 밖이었다. 저런 놈이 부들거리든 말든. 뭔 상관이란 말인가.

오히려 이런 나를 모르지 않을 터인데도 나를 찾아온 이 총리의 의도에 관심이 갔다.

“그래도 대한민국 국민의 일원이기도 하신데, 관심 가지셔야지요. 소중한 투표권을 행사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누굴 지지하는지에 따라 해당 후보를 압승시킬 수도 있는, 당선 치트키 수준이신 분이.

뒷말은 말하지 않아도 선명히 들려왔다. 눈으로 저렇게 대놓고 말하는데 어찌 모를까. 그 순간, 왜 저놈이 나를 찾아왔는지 감을 잡았다. 그래도 쉽게 그렇게 원하는 걸 손에 쥐여 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어차피 선거 치르기도 전에 세상 망할 판인데 뭐 그게 딱히 중요한가.”

있어 봤자 행사하지도 못할 투표권.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쉽게 그럴 수 없는 화제였기에 주변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너스레를 떤 말이었지만 단 하나의 과장도 거짓도 없는 말이었으니 당연했다.

그리고 그 말을 이 총리는 수긍했다.

“맞습니다. 선거를 치를 여력도, 돈도 없습니다. 현재 정부는.”

“……응? 돈은 왜 없어?”

세금 다 어디 갔는데?

매년 꼬박꼬박 세금을 내는 세납자로 쉽게 흘려들을 수 없는 말에 칼같이 반박을 하자, 이 총리가 답했다.

“안 그래도 실패한 정책들이 가득해서 그동안 빚만 수없이 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 나라가 망할지도 몰라서인지 슬금슬금 세금에 손을 댔더군요. 대통령님이 서거하시고 뒤늦게 재정을 파악하니 이미….”

“호오. 어차피 망하면 지구 통째로 망하는데 이 와중에 호의호식은 하시겠다? 대단하십니다, 아주.”

아주 자랑스러워 돌아가시겠네.

그 말을 듣는 순간, 착실히 세금을 내고 있던 한 사람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회의사당을 당장 폭발시키고 싶었다.

거기 있는 인간들 싹 다 뒈져 버리게.

“그래서, 지금 현재 저희는 임시로라도 좋으니 이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지도자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 단호한 현답에 대한 내 감상평은 간단했다.

“폭탄 돌리기 에바인데.”

이건 누가 봐도 폭탄 돌리기였다.

유예기간 한 달. 그 안에 망할 수도 있는 세계. 미래를 기약할 수도, 그릴 수도 현재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 거기서 설상가상으로 당장 가용 가능한 금액은 0원.

전 세계 상황이 이 따위이니 국채 발행 따위가 될 리가 없을 것이고. 당선될 이가 누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은 임시든 확정이든 앉자마자 화려한 빚 잔치를 마주해야 할 터였다.

그 빚을 청산하려면 그동안 세금을 야금야금 빼 먹었던 놈들을 무더기로 잡든, 국민들의 고혈을 짜든 무슨 수를 내야 했으니, 당연하게도 수많은 적이 양산될 것이고. 소리소문없이 암살당하거나, 국민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누가 되든 참 볼만한 구경거리겠다고 생각하며 스테이크를 입에 넣었다. 여유로운 나를 보며, 이 총리가 물었다.

“나설 생각은 여전히 없으시겠지요?”

“알면서 묻는 거 극혐이야.”

굳이 알면서 묻는 저의가 대체 뭘까.

아니, 알고 있기에 더 극혐이었다.

단호박 같은 내 말에, 이 총리가 정말 여전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네.”

“용건이 그거였으면, 이만 가 보지? 아. 밥은 먹고 가도 되고.”

이것이 진짜 본론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지만,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본론이라 서둘러 축객령을 내렸다. 정치판이라는 것은 애초에 발 담그는 거 자체가 인생에 해로운 곳이었기에 거기에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걸치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정치판에서 혼자의 몸으로 굳건하게 살아남은, 이 총리였다.

“제가 하겠습니다.”

“……뭐?”

“당신이 폭탄이라고 했던 그 자리. 제가 하고 싶습니다.”

단호하고 힘 있는 목소리로 내뱉는 폭탄 발언에 여기저기서 반응이 이어졌다.

“……!”

쨍그랑!

“아. 아니. 이건…….”

“대박…….”

이번에는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반응도 줄줄이 사탕처럼 이어지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과 별 차이가 없었다.

“허……. 진심이야?”

“제가 이미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전 제가 호의호식하자고 이 정치판에 발을 들인 것이 아닙니다.”

물론 알고 있었다. 본인이 말해 줬으니까.

오히려 이 남자는 자신이 바라는 목표에 다가설 수 있다면 어떤 고된 일도 마다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만약 누군가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한다면, 그건 간교에 능한 사람이 아니라 이렇게 뜻이 확고한 사람이 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곧은 뜻이, 무조건 올바른 결과를 낼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념이 없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어차피 망할 나라. 간신배가 제 잇속 다 챙기며 사람 뒷목 잡게 할 꼬라지를 보는 것보다 신념을 가진 사람이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다는 게 차라리 더 볼 만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총리는 매우 좋은 대통령감이었지만, 그래도 이 사람의 올바름을 알기에 시원하게 잘해 보라며 등을 밀어줄 수가 없었다.

“가시밭길이야. 썩 추천하고 싶지 않은데.”

괜히 폭탄 돌리기라고 하는 게 아니었다.

원래 대통령 자리라는 게 잘하면 평타. 못하면 욕을 바가지로 먹는 자리다. 심지어 나라의 존망과 직결된 게이트가 터졌고, 대통령이 별세해서 자리가 비워진 틈을 타 날뛰고 있는 기생충들. 거기에 이때다 하고 신나게 빼먹어 0원이 된 국고. 아무리 지도자가 잘하려고 해도 잘할 수 있는 기반 자체가 없는 상태였다.

그 자리까지 기어 올라가는 것은 자살 행위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행동이었다. 정치인 인생 끝장은 확정이니 올라가서 한탕 크게 해 먹고 튈 거 아니면.

그것을 저 똑똑한 놈이 모르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래도 나름 걱정이랍시고 충고를 건넸음에도, 그는 웃었다.

“압니다. 하지만 지금밖에 없습니다. 적만 많은 제가, 위로 올라갈 기회는.”

“…….”

“물론 좋은 기회가 아님을 압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 기회마저 제게는 평생을 바라도 오지 않았던, 기회입니다.”

어떤 빽도 없이 총리가 된 것만으로도 이미 기적이었다. 더한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 뻔했다.

하지만 이 나라를 바꾸고 싶다는 원대한 꿈을 가진 남자는 총리 자리에서도 자신의 꿈을 펼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더 높은 곳을 소망했다. 비록 그 자리가 자신의 마지막이 된다 하더라도.

“참 인생 피곤하게 살아.”

“칭찬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는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뭔데?”

물어볼 때 빨랑 이야기하렴.

모른 척 한 번 튕기면 그대로 끝이라고 생각하며 녀석을 도발했다. 회유의 원칙은 몇 번 시치미를 떼면서 교묘하게 상대에게서 원하는 답을 끌어내는 것이 기본 원칙이니. 하지만 나는 애초에 기회를 여러 번 주는 사람이 아니었고, 그런 걸 꾸준히 듣고 있을 인내심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과연 어떻게 나올까, 조금 기대를 하며 녀석의 답을 기다리는데. 의외로 여기 오기 전에 자존심을 다 고이 접어 땅에 묻어 두었는지 그는 쉽게 고개를 숙였다.

“힘을 주십시오. 무명.”

“…….”

“내가 당신이 선택한 대통령이라는 것을 증명할 힘을. 제가, 당신에게 선택받은 당신의 대리인이라는 증거를.”

“……호오.”

그가 단번에 원하는 것을 구걸해서 첫 번째로 놀랐고. 두 번째는 그 구걸이 아주 영악하다는 것에 놀랐다. 내게 전폭적으로 자신을 밀어 달라고 하면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거절을 했을 것이다.

그 말은 곧, 내게 다 떠먹여 달라는 말과 진배없었으니까. 만약 이 총리가 하고자 했던 말이 그것이었다면 들을 가치도 없었다.

얼핏 들으면 뭐가 다른가 싶겠지만, 미묘하게 달랐다. 내게 떠먹여 달라는 것과 맥락은 비슷했지만, 직접 나서기 싫은 나를 대신했다는 증거를 달라는 것이었다.

그 자체로 증명이 될 나의 이름과, 나의 허락을.

모든 건 자신이 전부 할 테니까.

당신이 바라는 대로.

반드시 내가 원하는 바를, 그리고 자신 역시 바라는 바를 이루어 낼 테니 내가 아니어도 나의 표상이 될 것을 빌려 달라는 말은. 아주 되바라지고 영악했지만, 무척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약간 흔들리는 나를 알아차렸는지, 그가 아예 쐐기를 박았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흠.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면 자결이라도 할 기세였다.

그만큼 이미 각오하고 또 자신의 열망에 확신을 가진 채였다.

사실 이미 마음은 어느 정도 기울어 있었지만, 그래도 시험을 하기 위해 좀 떠보려 했는데 이렇게 원천 차단을 해 버리니…… 참 놀리는 맛이 없었다.

“재미없는 인간 같으니라고.”

“……죄…….”

내 감상평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눈을 굴리다, 이내 조심스럽게 죄송하단 말을 입에 담으려 한 이 총리의 말을 가로챘다.

“죄송할 건 없고. 원래 그런 건 알고 있었으니.”

싫은 것도 아니고.

사실 꽤, 많이 좋아하는 편이긴 했다.

저런 우직한 남자를.

【고유스킬 ‘권속의 증표’를 발동합니다.】

【계약서를 발행합니다.】

【계약서의 서명이 완료되면 자동으로 계약 내용이 실행됩니다.】

솨아아아―

“이건.”

“네가 바라던 거. 자. 사인해.”

계약서의 내용은 별거 없었다.

권속 계약서이지만, 내 대리인으로서 내 마력의 일부를 부여받고, 권속의 증표를 받는 것.

이 계약은 내가 계약을 해지하거나 그가 사망할 때가 아닌 이상 계속 유지가 될 것이며, 대신 권속으로서 주인인 나의 지배하에 놓인다는, 뭐 그런 간단한 내용이었다.

실력으로 총리의 자리까지 오른 남자가 재빠르게 계약서의 내용을 읽어 나갔다. 눈이 밑으로 내려갈수록 점점 눈이 빛나며 그 눈에 환희가 담기는 과정은 제법 눈요기가 되었다.

“감사합니다.”

아직 말을 꺼내지도 않았음에도 본능적으로 마력으로 사인을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 그가 손가락에 마력을 모아 망설임 없이 사인을 하며 말했다.

그 인사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화답했다.

“별말씀을.”

【권속 계약이 완료되었습니다.】

【시스템이 계약을 승인합니다.】

【계약을 이행합니다.】

솨아아―

계약서가 빛을 내며 모습을 감춤과 동시에 이 총리가 테이블에 쓰러졌다.

“커억―!”

“……!”

“뭐. 뭐야!!”

갑작스러운 반응에, 모두가 놀라 이 총리를 보며 당황을 금치 못했지만, 나는 차분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내 마력을 평범한 하급 헌터가 무리 없이 견딜 수 있을 리가.

내가 문제없이 편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마력도 주인 따라가는지 내 마력이 그렇게 썩 착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자각하고 있었다. 적응하려면 아마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그래도 아주 극소량을 시작으로 천천히 채워 넣는 식으로 계약을 진행했는데 이 정도로 격한 반응이라니. 이번만 견디면 그다음은 쉽긴 할 테지만, 그래도 조금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근성 있는 남자인 그는, 역시나 이번에도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금세 몸을 일으켰다.

“오.”

온몸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얼굴은 파리하게 변한 상태.

심장이 괴로운 듯 손으로 심장 부위를 꽉 잡고 있었으면서도 오로지 의지 하나만으로 몸을 일으켜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몸은 나가 뒤지기 일보 직전 같았지만, 그 몸 상태와 정반대로 눈은 화려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축하해. 드디어 네 손으로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얻었네.”

“결코,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겁니다.”

아주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다.

나는 그렇게, 이 나라의 수장을 손에 넣었다.

* * *

“오. 생각보다 더 빠른데?”

처음에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더니. 한 3분쯤 지났을까.

점점 식은땀이 말라감과 동시에 이 총리의 표정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극소량에 불과한 마력이었지만 하급 헌터에게는 작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내 마력은 성질도 더러웠을 텐데, 결국 견뎌낸 것이다.

그가 내게 인정을 받긴 했지만, 내 마력에게 인정을 받는 건 별개였기에 스스로가 가치를 증명해야 했다. 작지 않은 고통 속에서도 그것을 단기간에 이겨내며, 내 마력의 증표를 목에 새긴 남자에게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에, 재능이 아닌, 오로지 의지만으로 그것을 해낸 남자가 자신만만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도 못 하면 당신께 선택받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자격 미달이지요.

오로지 영혼의 강함으로, 운이 아닌 실력으로 인정을 받은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로 드러내는 당당함은 아주 취향이었다.

영혼이 빛이 나는 것 같았으니.

그 말에 기분 좋게 미소를 짓는데, 갑자기 끼어든 난데없는 소음이 훈훈한 분위기를 박살 냈다.

“……이, 이건 말도 안 됩니다!!”

“……?”

……저건 뭐지?

하도 존재감이 없어 잊고 있던 놈이 존재감을 드러내자 모두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놈을 한참 바라보다 뒤늦게 그가 누구였는지 깨달았다. 이 총리를 따라온,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있는 배 나오고 머리가 벗겨진 버러지.

직접 상대하기도 싫어, 당사자에게 묻는 대신 이 총리에게 물었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저건 왜 달고 온 거야?”

진심이 가득 담긴 물음에, 이 총리가 혐오가 가득한 눈으로 버러지를 바라보며 답했다.

“자꾸 달라붙어서요. 할 수 없었습니다.”

“……중간에 갖다 버리지 않고.”

내가 이런 시각 폭력 질색하는 거 뻔히 알면서.

일단 보기만 해도 별로인 미관이라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자, 이 총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시다시피 대통령 자리에 제가 오르는 걸 반기지 않은 이들이 많습니다.”

고작 ‘이들’이라고 표현할 만한 수는 아닐 텐데?

“……전부가 아니라?”

그 답에 대한 오류를 정확히 꼬집자, 이 총리는 부정도 하지 않으며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국회의원 전부이죠. 반기는 이들은, 젊은 의원들뿐이죠.”

“힘이라고는 약에 쓰려고 해도 없는 것들만 지지층이라니. 정치 인생으로서는 그른 인생이네.”

“제 이상이 기득권들에게는 재앙이니 별수 있나요.”

그러함을 전혀 안타까워하지 않는 얼굴로 이 총리가 안타깝다는 식의 말을 했다. 웃기지도 않는 희극을 연기하는 것 같은 어투에, 나보다 버러지가 더 빨리 반응했다.

“우리와 척을 지는 것을 오히려 즐기는 주제에, 웃기는 소리 하는군!”

……와. 진짜 머리 비었다고 지금 자랑하는 건가.

그걸 모르는 인간은 여기서 아무도 없을 텐데, 비난이랍시고 하는 소리가 겨우 저따위 말이라니. 그 멍청함을 믿을 수가 없어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저 텅텅 빈 소리를 들은 다른 인간들도 마찬가지인 듯, 넋 나간 얼굴로 입만 벌리고 있었다.

나는 황당함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이 총리에게 물었다.

“……그래서, 저건 왜 따라온 건데?”

대체, 왜?

멍청함을 증명하려고 온 건가.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는, 어떠한 목적조차 읽어낼 수 없는 멍청함에 저건 대체 뭐가 목적이냐고 이 총리에게 묻자, 오히려 당사자보다 버러지의 목적을 잘 알고 있는 이 총리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답했다.

“제가 무명, 당신을 등에 업고 대통령이 될까 겁이 나니 최소한 제가 당신의 힘을 등에 업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온 겁니다. 당신의 미움을 사는 건 싫으니 직접 나서는 건 싫고, 그렇다고 제가 대통령이 되는 꼴을 보고 싶지도 않아 저들끼리 떠넘기고 떠넘기다 어쩔 수 없이 선정된 자입니다.”

“…….”

한 마디로 가장 덜떨어진 인간이 다른 사람에게 폭탄을 돌리지도 못하고 떠안게 되었다는 소리였다. 저 멍청함을 보아하니 떠넘기지도 못할 만하긴 했다.

“근데, 그러면 네가 계약서에 사인하기 전에 뭔가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다 끝나고 나서 뭐 하는 짓인데?

이의를 제기할 거면 사인하기 전에 할 것이지. 이제 다 끝나서 무를 수도 없는 마당에 뭔 뻘짓인가.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어 헛웃음을 흘리는데, 마찬가지로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이 총리가 굉장히 하찮은 것을 보는 것 같은 얼굴로 버러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끼어들 용기도, 틈을 찾지도 못하고 있다 다 끝나고 나서야 정신 차리고 반사적으로 소리친 거겠죠.”

“이야. 머리 왜 달고 다닌대? 아니, 그전에 저걸 당선시킨 병신들은 누구야?”

단체로 병신이라고 광고하고 다니네.

순수하게 감탄을 금치 못하며 박수까지 쳐 주자, 버러지의 얼굴이 부들부들 떨었다. 그래도 제 목숨 귀한 줄은 아는지 씩씩거리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말을 하긴 했다.

“저도…… 저도…… 정당하게 당선된 사람입니다. 저도 나라의 녹을 먹는…….”

안 하느니만 못했지만.

그 모습이 꼭…….

“……오징어가 날아다녀.”

다소 엉뚱한 소리였지만, 매우 절묘한 타이밍이어서 다들 버러지에게 말하는 줄 알았다. 심지어 버러지도 본인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 모습을 보며 갑자기 동정심이라도 샘솟았는지 내 혈육 메이트께서 나를 나무라셨다.

“누나. 아무리 좀 그런 사람이라지만, 그래도 사람한테 오징어라니. 그런 건 면전에다 하는 거 아니거든?”

결국은 맞긴 맞다는 거잖아. 돌려 까는 네가 더 나빠.

그리고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 대놓고는 안……! ……하지는 않지만 이번에는 아니거든?!

황당함을 가득 담은 얼굴로 헛웃음을 흘리며 나는 친절히 동생의 잘못된 생각을 정정해 주었다.

“야. 그게 아니라. 진짜 오징어가 날아다녀.”

“아니 그러니까 그건 면전에다…….”

직설적으로 말했음에도 이해하지 못하는 머저리 같은 동생을 위해 친절히 설명까지 덧붙여주었다.

“머저리야. 문자 그대로의 의미라고. 창밖을 봐.”

“뭐…… 창? ……헐. 저게 뭐야.”

자동적으로 넋을 놓고 말았다. 두 눈을 아무리 비벼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세계를 살아가며 그래도 몬스터를 좀 봐서 웬만한 것에는 적응이 되었음에도 정말 예상하지 못한 장면이었다.

진심으로, 살아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오징어.”

“……뭐야. 진짜 그냥 오징어.”

“근데 저게 왜 날아다녀……?”

“……그러고 보니 오징어한테 날개가 있긴 하지……?”

“그 날개가 하늘을 날라고 있는 게 아닐 텐데…….”

상식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온갖 진귀한 광경들을 질리도록 본 헌터들조차 믿을 수 없는 광경인지 넋을 놓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 만했다. 몬스터로 변형이 된 것도 아니고, 문자 그대로. 우리가 수산 시장에 가면 흔히 보는 갈색의 기다란 오징어와 똑같이 생긴 오징어가 크기만 커진 채로 펄럭거리며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것도 매우 기분 좋아 보이는 모습으로.

“……대박.”

진짜 살다 보니 별일을 다 겪는다.

* * *

“……내 밥.”

오징어가 상공에 등장한 곳이 밥 먹던 곳이었으니 당연히 식사는 그대로 중단이었다.

직원들이 대피해야 했으니 거기서 그대로 식사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물론 한다면 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도의상 좀 그래서 결국 다들 아쉽지만 마지못해 일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내 뷔페…… 젠장.”

“평생 다시 없을 수도 있는데…….”

그리고 천성이 호구인 원티드 직원들은 자신들끼리라도 호텔 뷔페를 전세 낼 수 있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못하고 아쉬움에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넘치는 게 돈이고, 수백억대의 무기는 쉽게 덥석덥석 사도 인원 자체가 적어 전세를 못 낸다고 생각하는 게 정말 ‘원티드’스러웠다. 그런 불쌍한 중생들을 위해서 너그러운 말로 현실적인 위로를 건넸다.

“오늘 회식 망했으니까 다음에 제대로 다시 하죠. 같은 데는 재미없으니 다음에는 신라 호텔로 할까요?”

상공에 저런 것 안 보게.

1층에 있으니 하늘에 저런 건 안 보이겠지.

같은 실수를 두 번 하지 않기 위해, 이번 실수를 경험 삼아 장소를 선정하자 다행히 길드원들의 표정이 좋아졌다.

“좋네요. 서울 3대 뷔페기도 하고.”

“와. 기대돼요!”

“저 거기 안 가 봤거든요. 좋아요. 좋아요.”

“……우리 중 가 본 사람이 있긴 해?”

“……어…… 없을걸?”

왜, 없어. 있다.

나랑 윤지우.

늦게 각성한 덕도 보았지만, 내가 첫 월급을 탔을 때 윤지우가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떼를 써서 대량 출혈을 각오하고 데리고 갔었다.

물론 코딱지만 한 월급이었기에 가족을 다 데리고 갈 돈은 없었다. 만약 온 가족을 다 데리고 갔더라면 그 즉시 파산이었을 것이다.

윤지우를 사 줬다는 걸 엄마가 안다면 엄마는 당연히 제 몫도 요구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아빠까지 뷔페에 함께해 4명 식사분을 결제하게 될 것이 뻔했다. 그랬기에, 당시 사회 초년생이었던 나는 조용히 윤지우만 데리고 갔다.

나중에 윤지우가 신나게 자랑해서 왜 자기는 안 데리고 갔냐고 서럽다고 엄마가 칭얼대기에 거지라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방어했다. 기껏해야 첫 월급 150에서 4인을 하면 그냥 3분의 1 이상이 날아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소녀 엄마는 나를 이해하지 못해 난리를 쳤지만 아빠는 충분히 이해해 줬기 때문에 넘어갈 수 있었다.

“그나저나, 저 오징어 우리가 처리해야 하나?”

……무보수로? 진짜 싫은데.

지금, 완전한 냉전 상태였기에 저걸 처리해 봤자 바로 보수를 받지 못할 것이 뻔했다.

뻗대면서 돈을 핑계로 나를 끌어내려 별짓을 다 할 것이 눈에 선했기에 정말 내키지 않는 눈으로 오징어를 바라보는데, 상황 파악을 끝낸 이 총리가 내게 다가왔다.

“걱정 마십시오. 이미 사계절이 출발해서 2분 안에 도착이라고 합니다. 저 오…… 징어의 등급은 B+급으로 측정 완료되었고, 그 정도면 사계절에서도 충분히 감당합니다. 굳이 원티드가 나설 필요는 없을 겁니다.”

“다행이네. 그런데……. 갑자기 B+급이라…….”

게이트가 유예된 것이지, 닫힌 것은 아니었기에 대한민국은 현재 게이트가 열린 상태였다. 한 마디로 게이트가 열렸다는 알림음 없이 불시에 몬스터가 출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 한국은 게이트의 무대로 선정되어 이미 필요한 알림을 전부 마친 상태였으니. 하지만 며칠간 조용했던 것이 B+급부터 조용히 기어 나온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호오. 많이 근질거리시나 보네.”

겨우 한 달도 견디지 못해 파우스트가 장난질을 시작했다는 것.

치울 건 미리 치우면 좋고, 심심하니 그냥 벌이는 짓이겠지. 전초전으로.

뭐, 이쪽에서는 좋은 일이긴 했다.

멍청한 놈들에게 경각심을 심어 준다는 게 1차.

그리고 레벨업의 기회라는 게 2차.

“덕분에 우리도 심심하진 않겠네요. 우리도 일단 간만에 구경이나 할까요?”

우리만 레벨업 하면 쓰나.

그리고 고작 B+급은 현재 여기 모인 이들에게는 경험치도 주지 않는 수준 미달의 몬스터였다. 그러니 얌전히 앉아서 팝콘이나 씹으며 구경하자는 내 말에 다들 습관적으로 꺼내 들었던 무기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상점에서 팝콘까지 사, 관람 자세를 마친 이들도 존재했다.

그렇게 우리는 즐겁게, 곧 상영할 헌터물 영화를 기대했다.

“……저게 뭐지.”

그리고, 이윽고 시작한 영화에 나는 눈을 비볐다.

꾸릉―!

“……?”

“……저게 뭔 소리지?”

하늘에서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굉음에 가위바위보에 져서 팝콘과 커피, 맥주, 콜라를 뿌리고 있던 길드원들이 의아한 얼굴로 상공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음식들을 건네받던 이들도 하나둘씩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팝콘 받느라 정신이 팔려, 대부분 그 소리를 그냥 흘려들어, 무슨 소리? 하고 고개를 든 그들은 덕분에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꾸르르릉―!

이라는 괴상망측한 소리를.

저 정체불명의 소리를 듣고, 팝콘을 입에 넣던 레쓰비가 알쏭달쏭한 얼굴로 추측했다.

“……어……. 방귀 뀌는 소리? 억-!”

“개소리는 죽빵을 부른다. 기억해 둬.”

물론 곧바로, 서유라에게 철퇴를 맞았다. 1초의 망설임도 없는, 가차 없는 응징에 레쓰비가 맞은 옆구리를 부여잡고 득달같이 항의했다.

“아. 진짜 그런 소리 같잖아! 뭔 말도 못하냐!”

우리나라는 표현의 자유가 넘치는 민주주의 국가거든!

평소에는 애국심이 있는지 없는지 분간도 안 가게 행동하면서 이럴 때만 애국심이 참으로 투철해지는 레쓰비가 당당하게 주장했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 당당하다 못해 뻔뻔한 태도 때문에 처맞는 말로 들려 모두가 이어 이어질 어퍼컷을 예상하는데, 놀랍게도 맞는 말은 그대로 수용해주려는 듯 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는 말이지. 하지만.”

“……하지만?”

“때와 장소는 가려야지. 레쓰비야. 응? 지금 우리가 누구와 같이 있지?”

얘는 왜 이렇게 TPO를 구분하지 못할까. 눈치 좀 키워야지?

어깨동무까지 하며 웃음으로 하는 무언의 압박에 무서워서 쫄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눈새 레쓰비를 위해 유라는 짧게 한숨을 쉬며 친히 손으로 나를 지목했다.

“……응?”

갑작스럽게 지목당한 내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런 나를 보며 대체 무슨 깨달음을 얻은 것인지 레쓰비가 곧바로 납득했다.

“아. 죄송합니다. 앞으로 입조심에 목숨을 걸게요.”

“좋은 생각이야.”

단박에 정리되는 상황을 보며 나는 어이가 털렸다.

아니, 뭐야. 왜. 나만 이해 안 돼?

내 얼굴을 보고 뭘 납득하고, 상황이 정리되는 건데?!

누군가 동조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는데도 나 빼고 다 납득하는 얼굴이었다.

심지어 눈치라고는 약에 쓰려고 해도 없는 우리의 주인공님까지!

새삼 서러워지려고 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이게 바로 왕. 지배자의 세계! 이쪽 세계로 온 것을 환영한다고 말하며 두 팔을 벌립니다.]

……꺼져!

아무리 내가 내 남친 포함, 그 누구에게도 눈치를 안 본다지만, 이런 상황까지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성위님에게 니킥을 날리고 싶은 마음을 속으로 격하게 표현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그런 나와 달리 내 눈치를 겁나 보는 내 남친님께서 조심스럽게 팝콘을 내밀었다.

“…….”

눈치를 겁나 보면 뭐하나. 하는 행동이 이 꼴인데.

이럴 거면 눈치는 왜 보나 싶었지만, 그래도 멋쩍은 얼굴로 나를 향해 그냥 배시시 웃어버리는 요 망할 남친님이 귀엽긴 해 그냥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런 게 강아지 키우는 맛 아니겠는가. 라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핑계를 덧붙이고.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의 네 남친의 정체성을 그렇게 확정 짓는 건 좀 아니지 않냐고. 물론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네 남친인데 좀 사람으로 대우해 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조심스럽게 묻습니다.]

뭐래. 강아지만큼 나한테 대접받는 생물이 있을 거 같아?

괜히 개팔자가 상팔자라는 소리가 나온 줄 아는가.

무엇보다 본인도 내가 자기를 그렇게 취급하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라 나는 확신했다. 나에 대한 촉감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참 좋은 남자였으니까.

그리고, 이 남자는 내가 그렇게 취급하는 걸 조금도 싫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확신했다. 오히려 그런 취급이라도 받기 위해, 늘 열심인 남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 도착했다.”

“녹음인가?”

“그렇지 않을까? 사계절 아니면 녹음이겠지. 이런 거는 보통 두 길드 중 하나로 결정되니까.”

그러니 그냥 내버려 두라고 성위님께 일갈하고, 나는 곧이어 상영될 블록버스터 영화를 기다렸다.

꾸릉―!

“몬스터 주제에 왜 하늘 날면서 기분이 좋아 보이지?”

“유해하지도 않아 보여. 대체 왤까.”

“천하태평해 보여서……?”

물론 몬스터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아 B급 영화가 될 것이 자명했지만, 그래도 요즘 내가 영화를 찍지, 관람을 한 적이 별로 없어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기로 했다.

다른 이들의 눈에도 익숙하지 않은 헌터들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렇게 대단한 헌터들은 아닌 듯하지만 그런 만큼 꽤 박진감 넘치는 싸움을 보여줄 것이라 기대했다.

“모두 준비! 변신 시간이다!”

“오케이!”

“……응?”

두 귀의 청력이 의심되는 대사와 함께.

파아앗―!

“뭐야. 저 빛은?!”

“진짜 변신……. 어… 저거 설마…….”

멋들어진 포즈와 함께 빛이 터지며 그들이 환복을 마치기 전까진.

“자. 모두 가자!”

“정의를 실천할 시간이다!”

마치 맞춘 것 같은 포즈와 대사.

빛과 함께 바뀐 헤어 스타일과 복장.

그리고 튀어 나가는 모습까지.

마치 어렸을 때 보았던 무언가를 연상케 했다. 그걸 스물다섯 처먹고 다시 볼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잠시 뇌정지가 왔다. 내 주변에 있는 이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와. 저것들 업그레이드 했네.”

“저 효과 하나에 얼마를 부은 거야…….”

“진짜 쓸데없는 노력의 레전드다…….”

저 인간들 나이가 훤히 보이는데, 저 나이에 저걸…….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저것만으로도 이미 충격적인데, 이어지는 공격들이 더 가관이었다.

“사랑과 평화의 이름으로, 용서할 수 없어요!”

응. 나도 용서가 안 된다.

그거 저작권 침해라고! 아니, 명예 훼손이야! 명예 훼손이라고!

이어지는 크리티컬 공격은 월드 랭킹 1위여도 그걸 당해 내는 것은 무리였다. 도를 넘는 공격에 그대로 K.O패 당한 월랭 1위는 제대로 반응도 못 하고 넋 나간 얼굴로 말했다.

“…저게 뭐지.”

내 눈.

블록버스터 영화를 기대했다가, 미친 뽕맛 총집합 대환장 영화를 보게 된 내가 눈을 감으며 말하자, 그런 나를 이해한다는 듯. 유라가 내 어깨를 다독이며 진실을 말해주었다.

“이해합니다. 저들을 처음 보면 아무래도…… 그…… 항마력이 많이 딸리죠.”

살다 살다 현실 광경을 보는 데에 항마력이 필요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정말 믿고 싶지 않은 현실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데, 등 뒤에서도 나처럼 넋 나간 이들을 위한 설명이 이어지고 있었다.

“……저거 항의 안 들어오나?”

진작 들어갔을 텐데?

그건 나도 궁금해지는 질문에, 한숨을 내쉬며 회사원이 답했다.

“진작 들어왔죠. 나라에서도 벌금 물리고 해봤지만, 헌터들이 어디 말을 듣나요. 특히 제 돈으로 저런 짓을 할 정도인데…….”

하긴. 들을 리가 없지.

벌금 그까짓 거, 내면 그만이고.

원티드는 그토록 끈질기게 억압하고 괴롭혔으면서 정작 단속해야 하는 저것들한테는 손도 못 썼다는 사실에 새삼 다시 분노가 치밀었다.

아니, 저것들을 잡으라고!

진짜 없느니만 못하는 것들 같으니라고.

“우와…… 나도 듣기만 했는데 실제로 보니 정말…….”

“저거 외국인들 아니야?”

“……노노. 토종 한국인. 녹음 소속입니다. 녹음의 길드장을 제외하면 헌터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문제아’들임다.”

그 말을 듣고 속으로 기겁을 했다.

저걸 이로운이 살려 뒀다고?

대박.

심지어 살려둔 것을 넘어, 자신의 밑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 믿을 수가 없었다.

“……이로운이 저걸 그냥 내버려 뒀다고?”

“그 미친놈이?”

그 의심은 나만 하고 있던 것이 아닌 듯 여기저기서 의심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에 무척이나 이해가 간다는 참담한 얼굴로 민현이 답을 해주었다.

“저래 보여도 실력은 꽤 좋아서, 레이드 성공률이 무척 높은 팀입니다. 저…… 그. 보시다시피 정의감이 워낙 투철하다 보니 레이드든 게이트든 알아서 재깍재깍 잘 나가 주고요.”

녹음의 나름 알짜배기 수익 팀입니다. 그래서 정부도 어쩔 수 없이 눈 감아 주고, 저작권 뒤처리를 해 주고 있죠.

그래서 유해한이 포기를 하지 못해 지금까지 살아남아 저러고 있다는 설명에 나는 생각했다.

이제 이 나라는 글렀군.

“……난, 여길 떠야겠어요.”

내 얄팍한 항마력으로는 이걸 버틸 재간이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여길 떠야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출하는데, 때마침 연락이 왔다.

“……강남역에 몬스터 출현이요?”

“네? 신촌에도요?!”

“아니…… 신림은 갑자기 또 왜!”

여기만 아수라장이 아닌 듯, 곳곳에서 몬스터가 출현했다는 연락에 나는 광명을 찾은 것처럼 미소 지었다. 오늘만큼 저 연락들이 반가웠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자. 그럼 흩어지죠. 알아서 팀 짜서 흩어지고, 여기 월드 랭커팀만 뭉쳐서 갑시다. 가장 강한 몬스터는 어디에요?”

“강남입니다.”

“그럼 거기로 가죠.”

내 말에, 예상치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레쓰비가 물었다.

“어? 같이 가시게요?”

“실력 확인은 해야죠.”

것보다 일단 그냥 빨리 여기를 떠야겠어.

“이런. 내 망토가……!”

“…….”

진짜 두 번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이들이었다.

* * *

“여기는 티라노사우루스인가.”

이게 파우스트 취향인가?

아니면 그냥 놀리는 건가?

매우 단순하고, 누구도 연상하기 쉬운 몬스터들의 모습에 나는 조금 고민에 휩싸였다. 듣자 하니 신촌에는 정체불명의 거대 거위라고 하고. 신림은 대왕 박쥐라더니.

이 정도면 그냥 보낸 게 아니라, 파우스트가 키우던 애완동물들이 산책을 나온 것 같은 수준이었다. 물론 그 동물들의 등급이 전부 최소 B+이다 보니 그냥 단순한 산책이 아니라 재앙이 돼서 문제지.

“아. 저 티라노사우루스가 여의도에 등장했어야 하는데…….”

작은 아쉬움을 내뱉자, 여기저기서 헛기침과 함께 뭘 뿜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컥……!”

“푸웁―!”

아. 더럽게.

내가 뭘 어쨌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누구든 쉽게 생각할 법한 상상 아닌가?

정치 성향이 어떻든, 일단 국회의사당은 전 국민의 원한을 산 건물이 아닌가. 다들 한 번쯤은 생각해 봤으리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뭐 저렇게 반응들이 요란한 것인지.

다른 사람이 말하면 진담이어도 실현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그들도 웃으며 화답해 줬겠지만, 나는 진심으로 할 것 같아서 그런가.

어쨌든 괜히 억울했다. 내가 직접 부수겠다고는 안 하고, 기왕 터지는 거 거기서 터졌으면 좋겠다고 한 것뿐인데!

내 서러움에 호응해 주는 건 역시 내 성위님밖에 없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아니. 왜 자기들 멋대로 착각하고 지레짐작해서 남의 계약자를 서럽게 하냐고 소리칩니다.]

[내가 저거 국회의사당으로 이동시켜 줄까? 라고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묻습니다.]

역시 내 성위님밖에 없다.

진짜 확 해 버리라고 할까? 하고 순간 진짜 고민했지만 넓은 마음으로 참기로 했다.

“지방 방송 거기까지 하고. 다들 모여 봐요.”

“넵!”

그래도 다들 말은 빠릿빠릿하게 잘 들으니 그건 좀 좋았다.

“자. 다들 이거 받아요.”

“……?”

“이건 왜요?”

난데없이 각자의 손에 쥐어지는 물건에, 모두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에 아랑곳 않고 모두에게 꿋꿋이 물건을 쥐여 주었다.

A급 마정석이었다. 제 손에 쥔 마정석을 보며 카밀라가 말했다.

“우리 마력 지금 만땅이에요.”

한 마디로 난 지금 이게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우호적으로 돌려 말한 것이었다. 카밀라가 입을 떼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말이 튀어나왔다.

“끼니도 해결해서 컨디션도 좋은 상태입니다.”

“며칠 푹 쉬어서 따로 소모될 일도 없었습니다.”

“맞아요. 굳이 안 주셔도 됩니다.”

“심지어 A+등급인데…….”

이어지는 자신감 넘치는 말들을 들으며 난 진심으로 이들의 지능이 의심스러워졌다. 이것들은 진짜 내가 그 사실을 몰라서 이러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놀린 것도 나고, 밥 먹인 것도 난데 굳이 그걸 왜 다시 또 말하는 건지.

내가 설마 헛돈을 쓸 리가 있는가.

단체로 바보가 되기라도 한 건지. 다른 것도 아니고 A급 마정석이다. 하나에 천만 원은 호가하는 이 비싼 돈 덩어리를 내가 허공에 그냥 버릴 리가 없지 않은가?

허공에 뿌려지는 돈은 단돈 1원도 아까워하는 나를 알고 있는 우리의 주인공님만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의도는 몰라도, 괜히 이걸 줄 리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래도 전에 비해 상승한 눈치를 기특하게 여기며 나머지 머저리들을 향해 일갈했다.

“이 비싼 걸 내가 그냥 줄 리가 있나요. 저 그렇게 부자 아닌데요.”

물론 부자가 될 수 있기는 했지만, 설령 부자가 됐다고 한들 이런 헛돈을 쓸 생각은 없었다.

재벌도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하지 않는가.

“저도 돈 아까운 줄은 잘 알고 있답니다?”

“……네.”

그러니 개소리는 거기까지 하고 닥치라고 일갈한 뒤 나는 그들에게 마정석을 준 이유를 설명했다.

“지금부터 본인들 마력은 사용 금지에요. 한 톨이라도 쓰면, 내 눈에 안 걸릴 리 없으니. 안 걸리면 그만이라는 머저리 같은 생각은 일찌감치 마음속에 수납해 주세요.”

빠꾸 없는 단호한 내 명령에, 모두가 단박에 혼이 나간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예?”

“뭘 수납…… 아니 그럼 어떻게 싸웁니까!”

“기본 근력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스킬을 못 쓰면 아무리 저희라도 A+급은 무리입니다!”

그건 당신 같은 괴물이나 가능한 거지―!

라는 뒷말이 생략된 것처럼 느껴지는 건 내 착각이겠지?

직접 대놓고 말을 한 것은 아니고, 눈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는, 99%가량 되는 확신 어린 추측에 불과했기 때문에 말하지는 않았지만, 마음 같아서는 즉각 반박하고 싶었다.

이것들이 내가 무슨 고질라인 줄 아나!!

기본적으로 나는 법사 계열로 들어가는 각성자였다. 그 말은 곧, 근력을 비롯해 기본적인 요소들은 일반인하고 별 차이 없다는 것이었다. 싸울 때 보이는 힘은 다 마력으로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즉, 마력을 안 쓰면 일반인하고 그다지 다를 바 없다는 것.

다만 숨 쉬듯 마력을 쓰고, 또 쓴 만큼 금세 차오르기 때문에 실제로는 물 쓰듯 쓰고 있지만 거의 안 쓰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마력 한 줌 없이 저런 것들을 박살 낼 수 있는 사람 취급하니 굉장히 억울했다.

더 나아가 이걸 굳이 말하지도 않았는데 달달달 말하는 것이 모양 빠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조용히 꾹 참아 넘겼다.

“마력이 왜 없어요.”

“예?”

“내가 방금 손수, 돈까지 써가면서 쥐여 준 건 마력이 아니에요?”

“……아―!”

손수 상기시켜 주자 그제야 내가 왜 이걸 주었는지 깨달은 이들이 제 손에 들린 마정석을 바라보았다.

일일이 하나하나 다 차근차근 알려줘야 하는 병아리 반 선생님이 된 것 같은 착각을 느끼며, 나는 부처의 마음으로 모든 인내심을 가닥가닥 끌어모아 설명충에 빙의했다.

“마력량은 여기 있는 개개인이 다 엄청나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그건 마력이 대단한 거지 너님들이 대단한 게 아니잖아요. 고난 속에 레벨이 오른다. 라는 공식에 철저히 따라 극한에 처하려면 몸을 혹사시키는 것만큼 좋은 게 없죠. 마력 덕을 보던 게 사라지면 개개인의 실력만 남을 테니, 각자 실제 실력을 알아보기도 좋고?”

“……아니, 그래도 이건.”

“원래는 내 마력을 똑같이 나눠줘 볼까, 그런 생각도 해 봤는데 기본적으로 내 마력은 더럽게 난폭해서요. 쥐똥만큼만 줘도 제대로 싸우기도 전에 다 나자빠질 거 같아서 부득이하게 돈을 쓰는 방향으로 할 수밖에 없었어요.”

내가 정말 애석하다고 말을 덧붙이자, 굳이 듣지 않아도 모두의 머릿속에 아까 이 총리의 모습이 스쳐 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 굳이 설명할 필요 없지만, 그냥 TMI로 추가로 덧붙였다.

“뭐, 어차피 내 마력 성질 때문에 그 조금만으로도 저 정도는 그냥 한 방이라 의미도 없고요.”

“……아. 예.”

“……그렇군요.”

뭐야. 그렇게 질린다는 얼굴 하지 말아 줄래?

사실 그게 나름 배려의 의미로 축소한 걸 알면 아주 기겁을 할 거 같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실제로 뭐 저 정도는 이제 마력만 발산해도 바로 터뜨릴 수 있었다. 마력의 냄새만 맡아도 알아서 길 것이며, 성질이 성질인지라 내가 적의를 갖는 순간 내 마력이 그에 응해 바로 세포부터 터뜨릴 테니까.

고작 A+급. 아니, 월랭 1위면 원래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아?! 라고 먼치킨 소설에 길들여진 독자는 생각했다.

물론 말해 봤자 미친 사람 취급 받을 게 뻔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곳이 판타지 소설 속이라는 것을 혼자만 아는 자만의 괴로움이었다.

“자. 그럼 쓸 수 있는 마력은 A급 마정석 딱 하나에요. 추가 안 됨. 그 안에서 열심히 해 봐요.”

“아니. 그래도 이건……!”

“물론.”

그들이 할 변명 역시 이미 파악 완료한 상태였다.

“마정석의 마력만으로 A+급을 상대하려면 적어도 보통 A급 마정석 두 개가 필요하지만, 혼자도 아니고 여럿이고, 무엇보다…….”

“…….”

“그렇게 빠듯해야 훈련이 되지 않겠어요?”

펑펑 써서 잡을 거면 애초에 뭐하러 비싼 돈 들여서 마정석을 사겠어요. 안 그래요?

반론은 받지 않겠다는 빈틈없는 내 태도에, 우리 주인공님을 포함한 지구에서 내로라하는 월드 랭커들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솔직히 나는 좀 보면서 어이가 없긴 했다.

혼자면 솔직히 졸라 개싸움이고, 개고생이지만 여기 인원이 5명인데 고작 A+급. 저렇게 겁먹을 이유가 있나? 우르르 몰려가서 치기만 해도 쉽게 끝낼 텐데.

진짜 능력도 세계 최고봉들이었지만, 엄살로도 세계 최고봉들이었다.

“자. 그럼 피드백은 여기까지.”

이런 엄살 왕들은.

“뭐 해요? 안 가고?”

“…….”

아묻닥이 답이지.

도살장 끌려가는 돼지처럼, 하도 안 가서 꾸역꾸역 강제로 밀어 넣어진 채 그들이 펼친 전투는 예상했던 대로, 역시나…….

“악! 이럴 줄 알았다고!”

“뭐야. 너희들 왜 마정석 쓸 줄도 몰라?!”

“써 본 적이 있어야지!”

“자랑이다!!”

아주 화려한 개판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아주 상상 이상으로 화려했다.

“이거 어떻게 쓰는지 좀 알려 줘!”

진짜 하다하다 마정석 쓰는 법도 모를 줄이야.

원체 강하게 태어나 쓸 일이 별로 없기는 할 테지만, 진짜 제대로 쓰는 법조차 모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라고, 지금까지 마정석을 한 번도 안 써본 최강 먼치킨 월드 랭커 1위가 생각했다.)

심지어 그나마 쓸 줄 아는 인간이 해 주는 말도 아주 가관이었다.

“감이야!”

“야!! 그걸 답이라고…… 억―!”

안 하느니만 못한 답에 분노한 밀리언이 빡침을 그대로 표출하다 그대로 티라노사우루스의 꼬리 풀스윙을 정면으로 맞을 뻔했다. 아슬하게 허리를 숙여 공격을 피한 밀리언이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데, 그런 그를 보며 카밀라가 얄밉게 덧붙였다.

“티라노사우루스는 꼬리 채찍 쩐다?”

“그래. 지금이라도 말해 줘서 아주 고오오맙다?!”

돈 주고도 못 보는 코미디였다.

밥도 제대로 못 먹었겠다. 마침 근처에 롯X리아가 눈에 보여 곧바로 모X렐라인더베X컨 버거 세트를 주문했다.

롯X리아가 갈수록 먹을 게 없어 거들떠도 보지 않게 된 지 오래였지만 유일하게 찾아 먹는 메뉴였다. 다른 곳에 가도 이 맛을 따라올 수 없었으니까.

여긴 진짜 치즈 하나로 간신히 버텼다. 역시 치즈스틱은 롯리가 최고라니까. 그 치즈 스틱이 크게, 버거 안에 들어가 좔좔좔 흐르는 치즈와 기름기를 맘껏 만끽하며 콜라를 쪽쪽 빨며 저 코미디를 감상했다.

완벽한 관람 모드였다.

“악! 루이스! 저 빌어먹을 꼬리부터 잘라줘! 아니 이든 너라도! 누가 저 빌어먹을 것 좀 어떻게 해 봐!”

“아. 네가 해!”

“난 마법사거든?!”

“개솔. 마법사인 네가 몬스터 두 동강 내는 거 한두 번 봤냐!”

아주 지랄 발광을 하는 게, 이 영화의 묘미였다. 그러면서도 마정석의 사용법을 깨닫자마자 서서히 능숙하게 마력을 사용하는 이들을 보며 눈을 빛냈다.

“……그래도 꼴에 월랭이라는 거지?”

마력 낭비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기를 쓰며, 세세하게 마력을 뽑아내는 일이 단번에 가능하다니.

괜히 월드 랭커들이 아니었다. 그렇게 세세한 마력 컨트롤을 익히며 그동안 마력으로 메꿔 왔던 자신들의 불필요한 움직임들을 본능적으로 최소화하는 법을 벌써 익히기 시작하고 있었다.

“악―! 야!!”

물론 중간중간 실수가 있었고, 본능적으로 마력을 발산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정상 참작이 가능했다.

“흐음. 걱정 안 해도 되겠는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이들이었다.

* * *

쾅―!

콰과과과광―!

“아. 좀―!”

“웁스. 쏘리.”

“저게 진짜!”

너 고의지―!!

티격태격하지만 얼추 정리가 되어가는 이들을 보며 나는 그들이 내게 돌아오기전에 내가 먹은 잔해물들을 은근슬쩍 증거인멸을 하고 차지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와이염.”」

“뭐야. 이젠 정하나한테 물들기로 했어?”

전보다 그래도 많이 본다는 걸 이렇게 티를 내내?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틈을 주기에 옳다구나. 하고 덥석 물자,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것과 한 치도 다르지 않게 갓 잡은 생선처럼 펄떡펄떡 뛰었다.

「“뭐. 무. 무슨 소리야―!!”」

오. 아니라고는 안 하네?

이래서 얘를 놀리는 걸 포기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 정보까지 이렇게 바로바로 턱턱 넘겨주니 안 찔러볼 수가 있나.

녀석이 안다면 아주 길길이 날뛸 속내를 삼키고 진정하라는 의미에서 곧바로 본론을 던졌다.

“어. 그나저나 거긴 어때?”

신촌 쪽에 간 윤지우를 비롯해 다른 길드원을 백업하는 역할을 맡은 것은 차지혁이었다. 일단 원래 보는 눈 자체도 좋았는데 정하나 덕에 일취월장해서 이제는 거의 귀신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기에 녀석의 평가는 신뢰할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전화를 건 것을 눈치챈 차지혁이 진정이 됐는지 ‘나쁜년.’이라고 짧게 혀를 차고는 솔직하게 답을 주었다.

「“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이미 옛날에 체념하고 살았지만, 진짜 이젠 이렇게도 사람을 기함하게 하냐는, 어이없어하는 차지혁의 목소리에,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월드 랭커들뿐만이 아니라 이쪽도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도 부각이 안 되어서 그렇지, 사실 따지고 보면 이쪽도 대한민국 천재들만 다 모아 놔서 전국민의 질투를 사는 원티드였다.

단 한 번의 훈련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이미 자신이 앞으로 나아갈 실마리를 얻었는지 한껏 발전한 모양이었다. 물론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되면 아직 멀었다고 느낄 여지는 많겠지만, 그래도 차지혁이 이런 반응을 보여 주는 것을 보면 확실히 눈에 띌 정도로 성과가 있다는 뜻일 테니 그 사실만큼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실마리를 얻었으면 이제 그걸 다듬어 가기만 하면 되니까.

“다행이네. 윤지우는?”

잊지 않고, 현재 제일 트롤일 것이 분명한 동생 놈을 언급하자 아주 이제 질린다는 듯 차지혁이 내 질문에 답을 주었다.

「“네 동생이 제일 미쳤거든? 넌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네 동생을 완전 다른 사람 만들어 놨냐. 난 윤지우 아닌 줄 알았잖아.”」

오. 역시 제일 좋은 놈을 붙여 주길 잘한 듯했다.

다이어트와 비슷한 원리다. 비록 처음에는 시작점이 낮아 조금만 실력이 늘어도 쭉쭉 오르는 것처럼 눈에 띄게 변화가 보이는 것일 뿐. 제 목숨 하나 내 걱정 없이 부지하려면 아직 멀었겠지만, 그래도 그거라도 어디인가.

사실 조금은 너무 강도 높게 시킨 건 아닐까, 하고 불안했는데 눈 꾹 감고 실행에 옮긴 것이 옳았었다.

이래서 강해지라고 어미 사자가 새끼 사자를 절벽에서 떨어뜨리나 보다.

강해지는 데는 역시 모질게 구는 것이 최고였다.

잘해주면 잘해줄수록, 생물인 이상. 자신이 받은 사랑에 나태해져 안주하는 게 자연의 섭리와도 같았으니.

“다행이네. 걱정했는데.”

알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키운 놈인 만큼 결국 애정을 주고, 또 걱정이 되는 것을.

이 빌어먹을 길을 윤지우 본인이 선택하지 않았으면 평생 내가 이런 일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소중히 키워온 동생이니까.

「“아. 그래도 윤지우 맞긴 맞더라. 거위가 크기만 크고 진짜 딱 거위같이 생겨서 귀엽다고 만져보고 싶다던데. 왠지 해코지도 안 할 거 같다고.”」

천성은 못 버리나 봐.

뒤늦게 이어지는 짤막한 감상에, 방금 전까지 잔뜩 차올랐던 애틋한 감정이 전부 휘발되었다.

“아놔. 이런 띠발넘이.”

이 새끼는 진짜 언제 철이 들지.

남자는 죽을 때까지 철이 들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만, 진심으로 그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제발 틀렸으면 싶었다.

만약 그렇다면 평생 저 꼴을 보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평생 펼쳐질지 모르는 육아 지옥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어쨌든, 신림 쪽도 순조롭게 풀리나 봐. 걱정 안 해도 될듯.”」

“오키. 그럼 난 저기 유지한만 수거해서 집에 가서 늘어지게 잠이나 자야겠다.”

「“……일 안 함?”」

“니가 하잖아.”

사랑한다. 친구야. 센터 짬밥 N년차. 서류처리의 달인. 파이팅!

짧고 간결하게 내 의살르 전달하자 전화기 너머로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 씨. 이 나……!”」

뚝―

미리 말하자면, 절대 더 듣기 싫어 먼저 끊은 것이 아니다. 더 있으면 놈이 숨 넘어갈까 봐 배려해 준 것뿐이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고럼고럼. 네 말이 백번 옳다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입니다.]

보아라. 성위님도 이렇게 말을 하지 않는가. 성위님의 동조에 뻔뻔함으로 나를 무장하고 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 나 심심해.”

“……!”

이전에는 없었던 인기척에 놀라 황급히 등을 돌리니, 대체 언제 온 것인지 데이모스가 등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너, 내가 신림에 보냈던 것 같은데.”

왜 여기 있는 거지?

그전에는 인기척이 없는 것을 분명 확인했으니, 아마 말을 건네면서 이곳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그보다 분명 내가 이놈에게 신림으로 가서 길드원들 추이를 살펴달라 말했던 것 같은데 왜 여기 있는 것인지.

물론 저놈이 내게 충성을 하긴 하지만,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내 말을 듣는 것과는 또 별개의 이야기라 100% 다 충성스럽게 따를 거란 기대는 애초부터 하지 않긴 했다. 어째 순순히 간다, 싶었더니. 그래도 그렇지, 뭐 몇 개 명령했다고 벌써부터 어겨?

괘씸한 마음에 손을 위로 뻗었다.

“……암와아.”

“거짓말 치지 마.”

이게 어디서 되도 않는 구라를. 마력을 실어서 당긴 것도 아니고, 그냥 볼을 꼬집은 것뿐인데 네놈이 아플 리가.

얼토당토않은 엄살에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래도 관리를 한 건지, 아니면 원래 그런 건지 뽀얀 볼이 아기처럼 쭉쭉 늘어나자, 조금 괘씸함이 풀려 버렸다.

내 화가 풀린 건 기가 막히게 알아차린 데이모스가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주잉.”

“오냐. 왜.”

손에 힘을 풀어 볼을 놔주며 묻자, 놈이 보란 듯 끼를 부리며 말했다.

“이제 재미없어.”

누가 들어도 알 수 있는 시무룩한 목소리. 처량한 얼굴.

아주 보란 듯 보여 주는 꼴이 가소롭기 그지없으나, 미남에 약한 얼빠는 다 알면서도 그 얼굴에 속아 주고 싶어졌다. 이래서 얼빠가 무서운 것이었다.

사실, 원하는 것은 얼추 얻었고. 굳이 저들을 끝까지 지켜보며 기다릴 필요가 없긴 했다. 무엇보다…… 나도 좀 귀찮았기도 했고.

악마는 괜히 악마가 아닌 듯, 그런 나를 꿰뚫어 보고 이렇게 칭얼대는 것이 분명했다.

“약았네. 데이모스.”

돌리고 돌려서 반쯤 긍정의 말을 내뱉자, 자신의 생각에 자신감을 얻은 듯한 데이모스가 어린애같이 웃으며 내게 들러붙어 왔다.

“주인 안고 굴러다닐래.”

“얼씨구?”

누구 맘대로?

그런 걸 허락해 줄 것 같나. 놈의 도발에 가소롭다는 듯 웃어 보이자 놈이 바짝 달라붙으며 칭얼거려왔다.

“개새끼는 그래도 되잖아.”

“……엥?”

“원래 개들은 주인한테 잔뜩 엉겨 붙는 게 본능인걸? 강아지 안 키워 봤어?”

응. 안 키워 봤는데.

그것보다. 그것도 다, 개마다, 그러니까, 강아지 바이 강아지 아닌가?

설마 이게 내가 안 키워 본 거 알고 사기를 치고 있는 건가.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아서였다. 보통 개들은 제 주인만 충성스럽게 바라보는 만큼 맹목적이며, 주인에게 다가가길, 그 품에 안기길, 주저하지 않지 않은가.

여울림이 키우는 반려견 ‘윌리’ 역시 졸졸 따라다니다 못해, 열심히 쫓아다니며 매일 안아달라 난리이며, 도통 여울림으로부터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울림이 앉아 있을 때는 제 주인 품은 내 거라며 무릎 위에 똬리를 틀고, 잠을 잘 때조차 여울림 바로 옆에 딱 붙어서 잤다. 가장 가까이서 본 반려견 ‘윌리’를 떠올려 보면 정말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유튜브로 보는 강아지들도 그렇고.

“……그래서, 개새끼 하겠다고?”

“이미 주인 개새끼인데?”

계약까지 다 맺어 놓고 그러면 안 되지. 주인.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는 충격이 가득한 얼굴에, 나는 더 따지기를 포기하기로 했다. 사실, 강아지가 내 품에 안기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뭐 큰 강아지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실제로 본인도 그거 하겠다고 했으니 그렇게 대해도 불만은 없을 것이다. 있어 봤자 뭐 어쩌겠냐마는.

“맘대로 해라.”

반쯤 포기 선언을 하는데, 갑자기 어마어마한 굉음이 들려왔다.

쿠에에엑―!

“……?”

황급히 고개를 돌려보자, 예상치 못한 피의 비가 투둑투둑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유지한. 미친.”

“……뭐야. 저거. 할 거면 진작 할 것이지!”

갑자기 어디서 솟아난 건지 모를 불굴의 재능으로 마정석의 마력을 완벽히 파악한 유지한이 그대로 티라노사우루스의 목을 잘랐다.

거의 끝나가고 있긴 했지만 자연스럽게 끝을 냈다기보단, 갑자기 훅 강해진 한 놈이 원킬로 끝낸 것 같은 어정쩡한 모양새에 전투를 하던 이들도 저거 뭐냐는 황당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 순리대로가 아닌 갑자기 훅 벌어진 일에, 황당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다급한 내 강아지가 내게 황급히 달려와 소리쳤다.

“지호 씨! 저 다 끝났어요! 이제 가요!”

주변은 깡그리 무시하는 그 모습에, 나는 다른 의미로 얼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저거 데이모스 때문에 저러는 거 아니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