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장. 네 품에서 잠들고 싶어.
“아아. 아주 세기의 영웅이셔. 일반인 먼저 챙기고. 아니, 헌터의 정석인가.”
처음 보는 이가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에는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이유 없는 적대를 받는 게 처음도 아니었고, 국민적인 명성과 유하다고 알려진 제 성격 때문에 원망할 상대가 필요한 이들이 자신에게 화살을 돌리는 경우가 왕왕 있었기 때문에.
아마 이번에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렇게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막연한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건 맨 처음뿐이었다. 분명 더 의심할 것도, 뭔가를 더 알게 된 것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등골에 소름이 끼치면서, 이유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마치 내가 감추고 있는 비밀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하하…… 이래서…… 그 새끼가…… 하하…… 그래…… 그런 거였어―!!”
다른 사람도 아닌 지호를 보면서 그리 말하니, 더 그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었다.
“하하. 당신도 놈에게 당한 피해자인데……. 그 사실도 모르다니. 그 의도대로 잡혀 있는 당신이 안타깝네요. 무명.”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는 ‘내’가 고개를 들었다. 정확히는 내가 묻어 두고, 스스로 나오지 않으려 했던 ‘내’가 일이 잘못되어 가는 걸 참지 못하겠다는 듯 분노를 터뜨렸다.
‘……빌어먹을. 이런 부작용이 터질 줄이야.’
아직, 아직인데.
‘……대체 무엇이?’
알 수 없는 소리의 향연이었다.
불현듯 무언가를 알 것도 같지만, 그러한 직감 자체를 부정해야만 했다. 그가 말하는 ‘나’의 행적은, 절대. 윤지호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짓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사랑받기 위해 허덕이는 남자는, 자신이 버림받을 수 있다는 조금의 가능성도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왜일까.
저놈의 말이 사실이며, 그가 말하는 ‘진실’을 절대 그녀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나도 모르는 ‘내’가 토하는 분노가 전부 사실처럼 느껴졌으며, 그 모든 것들이 정당한 감정인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어야 함에도.
그런 나를 보며, 또 다른 ‘나’는 마치 잘하고 있다는 것처럼 웃었다. 내 행동이 무척이나 만족스럽다는 듯.
‘당연히 그래야지.’
너는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듯.
‘……그게 무슨 뜻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불쾌함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녀를 향한 이 감정은 오로지 자신의 감정이었다.
‘나’라고 하더라도 넘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넘겨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독점욕마저 자신다워서 마음에 든 듯, ‘내’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번의 ‘나’라면 성공할 것 같군.’
……이번의?
마치 처음이 아니라는 것 같은 말.
‘이제 너도 알 필요가 있겠지.’
‘……무엇을?’
내가 물었다. 하지만 다른 ‘나’는 대답 대신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피하지 마.’
……뭐?
그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갑자기 머릿속에 엄청난 기억들이 밀려 들어왔다.
“……허억―!”
세계의 정점에 서고, 모든 고난을 이겨 내고, 소설이라면 이제는 행복이 찾아와야 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정작 모든 게 끝난 뒤의 내게 행복 따위는 없었다. 이제는 힘든 일도, 자신을 얽매는 족쇄도 없건만. 그동안의 고난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전부 잃어버린 것처럼. 나라는 존재는 완벽한 무(無)였다.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
‘사랑해.’
내 평생의 아군이자, 오랜 친구가 하는 고백에도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을 만큼.
유라가 오래도록 품고 있던 마음을 전했으나 놀랍도록 아무런 감정이 일지 않았다. 예상을 못 했으니 당황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그런 나를 보며 유라는 자신의 고백이 무시당한 줄 알고 분노를 터뜨리려고 하다, 완벽히 비어 버린 나를 보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 그녀를, 달래 주지도 못했다. 분명히 그 정도는 능숙하게 해 줄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그것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사라져 있었다.
그 뒤로는, 하나둘씩. 곁에 있던 사람들이 떠나갔다. 어차피 내가 지켜야 했던 사람들. 목숨을 나눈 전우이자 가족 같은 존재였지만, 마음 편히 대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떠나갈 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할 만큼.
아니, 그건 이미 내 감정이 사라졌기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모두가 떠나가고, 세계를 가진 것과 다름없었음에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밖을 나가지도, 쇼핑을 하지도, 연락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집안에 틀어박혀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우두커니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히키가 왜 자신만의 공간에 스스로를 가두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그것마저 착각이었지만.
얼마를 그렇게 보냈을까. 결국 정신이 들어서 한 생각은 그런 것뿐이었다.
‘그냥 죽어도 좋을 것 같은데…….’
삶의 모든 의지가 사라졌다. 그에 행동 역시도 충동적이고 재빨랐다.
콰앙―!
세계의 힘으로 이 세계에 틈을 만들자, 득달같은 알림음이 울려 퍼졌다.
【세계의 틈을 비집습니다.】
【경고합니다!】
【틈 안으로 들어서게 되면 세계의 미아가 되어 영원을 헤매게 될 수 있습니다.】
【영혼이 말소될 수 있습니다.】
틈을 만들자마자, 내가 무슨 짓을 할지 알아차린 듯 시스템이 살벌하게 경고했다.
하지만 역효과였다. 자신으로서는 그런 게, 오히려 환영이었다. 망설임 없이, 틈 사이로 뛰어들었다. 신박한 자살행위였다.
그렇게 정체된, 그리고 텅 비어 버린 공간을 나아갔다.
나아가고 또 나아가, 잊히고 사라지기 위해.
‘헐. 미친…….’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하자, 내가 모르는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로렌스 경! 뭐 하는 건가!’
마치 여러 판타지 장르를 합쳐 놓은 것 같은 시대들이 배경처럼 주르륵 지나갔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다른 세계들이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아예 분리된 시간선. 그러다, 한 세계에 문득 시선이 고정되었다.
‘……한국.’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똑같은 세계. 하지만 달랐다.
그 세계는 너무나 평화로워 보였다. 몬스터도, 헌터도 없었다.
‘으아. 지각이다!’
‘엄마. 내 아침!’
‘여기 빵.’
‘아. 엄마아!!’
지독히도 평화로운 세계였다. 자신이 아는 것과 매우 다른.
그러다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서유라. 남친 만남?’
‘어. 그러니까 꺼져.’
‘와. 저 빠순…….’
‘죽을래?’
유라를 비롯한 다른 길드원들의 얼굴. 그들은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지독하게 행복해 보여, 한참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세계에는 ‘내’가 없었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모든 게 평화롭기만 한. 그래서 내가 없어도 충분히 잘 돌아가는 세계. 그런데 어째서인지 막상 바라던 것을 눈앞에서 확인하니 허탈감이 밀려왔다.
그래서였을까. 저도 모르게 금기를 범했다. 그 세계를 침범하고 마는.
손을 장면 안으로 넣자, 빨려 들어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지한은 마주할 수 있었다.
“어……. 뭐지. 이건. 드디어 야근하다가 돌아 버린 건가.”
“……!”
자신이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던, 그녀를.
“……씨발. 좆같은 부장 새끼.”
그게 윤지호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래서. 너님은 누구신가요? 설마 내가 이미 잠들어 있고, 내 꿈속에 나타난 건 아니죠?”
모든 세계를 ‘포함해’.
* * *
“……음, 벙어리인가.”
‘……아니, 어떻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상식적으로 자신이 이곳에 나타난 것 자체가 정상이 아니었지만, 그만큼 눈앞에 있는 이 여자도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방금 막 씻고 나온 듯,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났다. 머리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져, 물이 쇄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만으로도 치명적인데, 옷차림은 더 가관이었다. 물론 잘 때까지 격식을 차리고 자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녀의 옷차림은 너무 허물이 없었다.
실크로 된 재질의 잠옷이었지만, 이게 셔츠 상의만 입은 건지 아니면 원래 저렇게 출시된 원피스인 건지. 길이가 과하게 아슬아슬했다. 거기까지만 했어도 이 상황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설명할 근거는 이미 차고 넘치건만. 상의 단추까지 몇 개 풀려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보여야 하는 속옷이 없……!
‘……정신, 정신 차리자.’
급하게 염불이고 애국가고 있는 대로 다 외워가며 정신을 차리려 했지만…… 그게 될 리가―!
평생 살면서 이렇게 직접적으로, 코앞에서 여자의 몸을 본 것은 처음이었기에, SSS급 보스 앞에서도 평정을 유지했던 멘탈이 사시나무 떨리듯 흔들렸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이미 옛날에 사라져 버린 줄 알았던, 날 것 그대로의 감정. 그게 당황스러움이어서 좀 어이없기는 하지만.
탁―!
“……아―!”
사실 그간 자신이 견뎌 왔던 아픔 축에는 낄 수도 없는, 미약한 고통이었음에도 너무 놀라 나도 모르게 소리가 나갔다. 다 정신이 제 주인을 배신한 탓이었다.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나간 소리에 저가 놀라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지는데, 정작 제 입에서 그런 소리를 나게 만든 장본인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태연한 것을 넘어, 아주 나를 분석하고 있었다.
“……오…… 벙어리는 아니네.”
만져도 지고.
반쯤 감기고 나른한 눈으로 평온하게 분석까지 하고 있는 여자를 보며 나는 생전 알지 못했던 감정에 휩싸였다.
눈앞에 있는 이 여자는 대체 어떤 사람인 것인가.
얼굴만 봐도 그녀는 매우 인기가 많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나이쯤 되면 남녀 간의 관계에 대해 모를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생전 처음 보는 남자가 제 방에 있는데, 놀라기는커녕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분석이나 하고 있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혼돈의 카오스였다. 눈앞이 팽팽 돌아가는데, 그런 나는 보이지도 않는지, 나를 가만히 지켜보던 그녀가 갑자기 하품을 했다.
“……아. 몰라.”
“……?”
그리고 더는 생각도 하기 싫다는 듯, 내게 다가오다…….
털썩―
“……?!”
내 옆에 있는 침대에 벌러덩 누워 버렸다.
“……무. 무슨―!”
너무 놀라서 심장이 벌렁거렸다. 단언컨대, 진짜 이런 여자는 처음이었다. 뭐가 이렇게 대범하고, 태연한 것인지!
나름 세계 최강자의 자리를 거머쥐기까지 했는데, 그녀는 도무지 답을 낼 수 없는 난제와도 같았다.
그럼에도 왜일까. 평생 본 적 없는 타입의 사람이었기 때문일까. 심장이 울렁였다. 안 하던 짓을 하고 싶어만 질 것만 같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그렇게 태평하게 잠을 잡니까.”
해서, 그냥 도망치듯 나오면 될 것을, 답지 않게 물었다. 순수한 궁금증이었는지 뭐였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냥 묻고 싶었다.
그런 내 말에, 그녀가 침대에 얼굴을 묻은 상태에서 천천히 닫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흐음…… 무슨 짓을 할 생각이었어?”
짓궂은 대답과 보기만 해도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치명적인 미소. 거기에 제대로 홀려 버린 것 같은 느낌에 순간 머리가 멍해졌으나 불굴의 의지로 돌아와 빽―! 소리를 질렀다.
“……무…… 무슨 소리야!”
“헐… 자기가 먼저 말해 놓고는….”
격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손사래를 치는 내 모습에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 행동이 웃긴 것인지, 나지막이 웃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때의 내 모습은, 그녀가 웃을 만했을 것이다. 얼빠진 행동도 행동이었거니와, 얼굴도 분명 홍당무처럼 붉어져 있었을 터였으니.
그때 나는 내가 진짜 미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모습에 나조차도 적응이 안 되어서 돌아버릴 것만 같은데, 그 와중에 그녀의 웃음소리가 너무나 예쁘게 들려서. 그게 좋게 느껴져서.
그런 내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무정한 여자가 다시 눈꺼풀을 천천히 내렸다.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면서.
“글쎄. 당신은 그런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그 얼굴로 봐서는 환영인 것 같기도 하고.
“……?!?!”
그 말을 듣는 순간, 진심으로 안도했다. 그녀가 눈을 감았다는 사실에.
정말 다행이었다. 만약 그녀가 눈을 감고 있지 않았다면, 제 표정을 전부 보아 버렸을 테니까. 마치 사랑에 빠진 것처럼, 심장이 철렁인 한 남자의 모습을.
“뭐. 나는 유연하고 너그러운 사람이니까, 특별히 옆에서 자는 건 허락해 줄게요. 잘하면 안고 자 줄 수도 있고?”
……거짓말.
새삼 다시 들으니 어이가 없었다.
네가 유연하고 너그러운 사람이라니.
세상에서 너만큼 무정하고 잔인한 여자가 또 없을 것인데.
그럼에도 그런 네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던 건, 그걸 감수할 만큼……. 네가 너무나 달콤했으니까.
비록, 그게 한 철의 변덕이라 할지라도. 그 변덕마저 너무나 달콤해서.
“……내가 궁금하지 않나?”
“……아…… 생각하기도 귀찮아서……. 만약 한숨 자고 일어나도 당신이 있다면.”
“…….”
“그때는 나도 제정신일 테니, 그렇게 되면 제대로 통성명하자.”
아직은 당신이 꿈일 거 같기도 해서.
직접 만져 보기까지 했으면서 왜 아직도 꿈이라도 생각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정말 잠이 들어 버렸다. 너무나 황당하게도.
“위험천만한 여자네.”
처음 보는 데다, 일면식도, 이름도, 그 무엇도 알지 못하는 남자를 옆에 두고.
“……그러면 안 돼. 이 여자야.”
남자는 다 늑대란 말 몰라?
물론 내가 생각해도 그동안 나는 그 말에 해당되지 않았던 것 같지만, 지금만큼은 이상하게도 스스로가 평소와 사뭇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쿡―
조심히 그녀의 코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생생한 체온이 느껴졌다. 이렇게 자세히 보니, 다크서클도 짙었고, 얼굴에 회색빛이 돌았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피로가 한계까지 쌓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저렇게 정상적이지 않은 행동을 한 걸지도. 인간이 한계에 몰렸을 때 무슨 미친 짓을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지 않던가.
사라지고 싶어 세계를 깨부수고 제 발로 세계의 틈 속에 들어왔으면서 다른 세계를 본 순간 눈을 돌리지 못하고 손을 뻗은 자신처럼.
“……남 말할 처지가 아니었네.”
이렇게 보니, 그녀의 정상적이지 않은 행동 정도는 애교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아무렴. 세계에 틈을 내 영원히 사라지는, 세상에 둘도 없을 방법으로 자살을 행할 미친놈이 얼마나 될까.
이미 미친놈이 된 김에 조금 더 미친 짓을 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여기서 조금 더 얹는다고 해도, 티도 안 날 것 같고.
“……네가, 허락한 거다?”
사락―
조심히, 그녀의 옆에 몸을 눕혔다. 누군가와 함께 자 본 적도 없고, 여자의 옆에 누워 본 적은 더더욱 없어서. 뻣뻣하고 어색하기 그지없는 몸짓이었다.
만약 그녀가 깨어 있고, 제정신인 상태였다면, 그런 나를 보며 어이없어하리라.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웃겠지. 내가 정신을 놓을 만큼, 매력적인 얼굴로.
풀썩―
힘겹게 옆에 누웠다.
사이즈가 싱글 침대도 아니었는데 눕는 동작 하나가 이렇게까지 힘들 일인지. 넓디넓은 퀸 사이즈 침대에 내가 옆에 누울 공간은 정말 많았음에도.
“……후우.”
옆에 눕고 보자, 그녀의 얼굴이 더 가까이, 선명하게 보여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그럼에도 정말 이상한 건, 그 얼굴을 계속 마주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계속 보고 싶었다.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 낯선 감정에, 사라지고 싶고, 죽고 싶단 마음은 어느새 저 멀리로 사라져 버렸다.
그녀가 궁금했다. 그녀를 알고 싶었고.
그녀와 함께할 나날을, 너무나 느껴 보고 싶어졌다.
스륵…… 포옥―
개구쟁이 같던 그녀의 말대로, 정말 끌어안고 잘 용기는 없어서(물론 매우 매혹적인 제안이긴 했지만), 품에 파고드는 대신 살포시 그녀의 손에 제 손을 포개었다.
꽈악―
“……!”
그에, 반사적인 움직임이었는지, 아니면 알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손을 꼬옥― 마주 잡아 주었다. 힘주어 잡은 손에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소리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웃어 본 것이 언제였을까. 아마 지금이 태어나 처음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지금 자신이 짓고 있던 웃음은 너무나 행복해서 절로 나오는 미소였다.
“새액― 새액―”
고르고 평온한 숨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날 나는 정말 오랜만에,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다디단 잠에 취할 수 있었다.
“……잘 자.”
희미해지는 정신 속에서도 생각했다. 눈을 뜨면, 제정신이 된 그녀는 분명 기겁을 할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녀가 잠결에 내뱉은 말대로 그런 그녀와 제대로 통성명을 나누고 싶었다.
내 이름은 유지한이라고.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냐고.
당신이 궁금하다고.
【세계가 이상 현상을 포착했습니다.】
【현 세계의 코드와 맞지 않는 존재입니다.】
【세계가 당신을 이물질로 인식합니다.】
【당신을 추방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신은 제 편이 아니었듯.
간절히 바랐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 * *
“……아.”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집이었다.
내 집이 아니고, 내가 지호에게 준…… 윤지호의 집.
벌떡―!
“……!!”
너무 놀라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갑작스럽게 기상을 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새액― 새액―
옆을 돌아보니, 지호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내 손을 꼭 붙잡은 채로.
아마 내가 손을 놓지 않아 그대로 데리고 온 모양이었다.
“정말…… 뭘 믿고…….”
당신에게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남자가 바로 나일 텐데.
기억이 전부 돌아오니, 이제는 보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다. 이로운은 새 발의 피였다. 흔히 당신이 표현하던 대로, 내가 정말 최악의 쓰레기이자, 쌍놈이었다. 당신에게는.
당신의 모든 걸 가지는 걸로 모자라, 세계까지 바꾸고 싶어 하는 남자이니.
더욱 최악인 건, 나는 정말로 그걸 실행해 버렸다는 거다. 원했지만 결국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한 이로운과 다르게. 당신은 그래도 나는 해냈으니 내가 낫다고, 평소처럼 대범하게 칭찬을 할까.
“……그럴 리가.”
그렇게 말하고, 박수까지 쳐 준 뒤, 그다음에는 차갑게 돌아서겠지. 그리고 단호하게, 그게 당연하다는 듯 날 지나쳐 갈 것이다. 마치 처음부터 날 알지 못했던 사람처럼.
아. 그제야 과거의 내가 왜 기억을 봉인하는 선택을 했는지 이해가 갔다.
지금의 내게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너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잔인한 여자였고. 설령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한들. 네 그런 성격은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예외 없이 적용되겠지.
망설임 없이 나를 버릴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사실을 숨겨야만 한다는 것도 그 당시의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태생적으로 거짓말에 능숙하지 못했다.
네 앞에서는 더더욱 그랬고.
그러나 나와는 정반대로, 너는 내 어설픈 거짓말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눈치가 빠른 여자였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무언가를 숨기기엔 최악의 상대.
굳이 은근하게 ‘나 비밀 있소.’라고 드러내지 않아도, 뭘 숨기고 있냐고 물으며 그걸 실토하게 만들 재주가 넘치는 여자에게 나 같은 허술한 사람이 무엇을 숨길 수 있을까.
그뿐일까.
의도치 않게 실수를 할 수도 있었다. 아니, 나라면 분명 그럴 것이다. 그리고 만약 나도 모르는 새 네게 조금이라도 진실의 편린을 이야기해 버린다면…….
일어날지 어떨지 모를 불상사까지 전부 감수하기에는, 나는 너무나 겁쟁이였다.
그랬기에,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최고의 선택이었다.
나 스스로의 기억을 지우면, 그렇게 한 다음에는. 그 어떤 죄책감도 없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순진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바보 같기만 한 남자로. 네가 사랑하는 남자의 모습으로, 네게 다가갈 수 있으니까.
이미 모든 것에 있어서 정상을 찍고, 허무와 상실을 겪고, 남은 건 껍데기뿐인 남자를 네가 사랑할 리 없으니까.
기억을 지운다는 선택이 내게는 그 무엇보다 완벽한 수였음을, 감히 부정할 수 없었다.
어찌 부정할 수 있을까.
새액― 새액―
같은 목표만을 바라보고 있는데.
기억을 되찾고 나니, 너를 향한 마음은 더욱더 짙고 선명해졌다.
자신이 한 짓이 얼마나 쓰레기 같은 짓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처음 보는 그 남자가 그토록 제게 분노하는 이유도 충분히 납득이 갔다.
자신의 행동 때문에 운명이 뒤틀린 것이겠지. 바라던 것을 잃었을 거고. 아마 그의 집단은 그런 그와 같은 이들이 함께하는 것임을 쉽게 유추해낼 수 있었다. 운명이 뒤틀렸다면, 그런 이들은 하나뿐이 아닐 테니까.
그게 이 세계의 섭리였다.
“……사랑해.”
그럼에도, 나답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이 겪었을 절망은 조금도 중요치 않게 느껴졌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소각당해도 할 말 없는 쓰레기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세상 전부를 적으로 돌려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드디어.”
네 곁에 있을 수 있었으니까.
처음부터 소원은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 소박한 소원마저 이뤄지지 않았고, 무작정 기적을 바라기에는, 나는 신에게 버림받은 어린양과 다름이 없었다.
[나와 계약하지.]
그랬기에, 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동원해야 했다.
‘…당신은 누구지?’
[글쎄. 그런 게 중요한가.]
‘중요해. 당신이 후에 어떻게 할지 알고.’
[흠……. 예리하군. 하지만 반쯤 잘못 짚었어.]
‘……무엇을?’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네가 성공해야 하니까.]
‘…….’
[분발해 주길 바라. 아니, 죽음 힘을 다해라. 바지 자락을 잡아서라도 매달려. 그녀가 널 버릴 수 없도록.]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야.’
[좋은 대답이군. 무운을 비네.]
다른 존재의 손을 빌리는 일까지도.
그렇게까지 해, 수없이 많은 실패로 만들어 낸 마지막 기회.
마침내 얻어낸 꿈 같은 시간이었다. 그녀와 보낸 모든 날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할 수 없었다.
‘……성위.’
그리고 아마 그것은, 기어이 바라던 바를 이룬 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의 보이지 않는 지원이 지금까지 존재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니, 제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였다.
꽈악―!
네가 알아차리기 전에, 그들이 너에게 진실을 폭로하기 전에, 한발 앞서 그들을 제거하는 것. 그들을 제거하는 순간, 나는 네가 좋아하는 남자가 아니게 되겠지만. 그래도 해야만 했다.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그 모든 행위들보다, 너를 포기하는 것이 내겐 더 힘겨운 일이었으니까.
“…으음…….”
처음 자신이 삶의 의지를 잃었던 나날보다 더 고통스러운 절망이 몇 번이고 내 앞길을 가로막았어도.
* * *
“흠흐흠휘우~”
윤지우가 괴상한 콧노래를 부르며 제 애검을 손질하고 있었다.
제 누나가 세계관 최강자. 월드 랭킹 1위의 ‘무명’인걸 알아차릴 때는 그렇게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이 굴더니.
저건 또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아직도 심란한 원티드 길드원들의 눈에는 그가 드디어 미친 건 아닐지 의심이 되었다. 그냥, 월드 랭킹 1위인 것만으로도 인생 망했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그 뒤를 따르는 장렬한 키스신과 고백신까지. 물론 언젠가 있을 것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길드원들마저 늘 호구 같던 길드장의 대범한 행동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이거 생방송 될 텐데……?!’
물론 그런 생각은 저 멀리 내다 버린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현실을 직관적으로 봤을 때는 놀랍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심지어 그걸 같이 봤다. 친동생이라면 자신들보다 더 기겁하면 기겁했지 결코 덜하지 않을 것이라 그들 모두 확신했다.
오히려 누나가 월드 랭킹 1위라는 것보다 길드장하고 사귄다는 것에 더 놀라 길길이 날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렇지 않다고?
저 시스콤이?
아무도 그가 시스콤이라는 사실에 반박하지 않았다.
그만큼 윤지우의 시스콤은 길드 내에서 유명했다. 윤지호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윤지호가 모르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한번, 지호가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꿈같은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그 타이밍을 노린 듯 유해한과 이로운이 길드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 유해한은 다른 길드원들에게 조금의 관심조차 없다는 티를 팍팍 내며 오로지 윤지우만을 향해 말을 걸었다.
‘우와. 동생이구나? 닮았네.’
‘와…… 그쪽은 하나도 안 닮았네요.’
‘뭐야. 내 이야기 들었어?’
‘대충요.’
물론, 알아서 말해 주는 성격은 아닐 터이니 있는 대로 졸라서 간신히 들었을 테지만. 자존심도 있고 성격도 기본적으로는 차가운 윤지우가 시니컬하게 답했다.
윤지호는 아마 관심도 없을 것 같지만, 저게 윤지우의 본모습이었다. 윤지호가 말하길, 윤지우가 맹하고 순해 늘 걱정이라고 하지만, 그건 어찌 보면 맞고, 어찌 보면 틀린 말이었다.
윤지우가 맹하고 순박한 것은 맞다.
제 사람들에게는.
물론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건 천성이었지만, 기본적으로 윤지우도 제 사람 외에는 그렇게 관심이 없었다. 친절하지도 않았고.
‘제 사람’의 범위를 더욱 좁게 보면, 윤지우에게 제일 중요한 건 제 누나고 다른 이들에게는 언제나 알 바 아니라는 태도를 고수했다. 친하게 지내도 그뿐. 그 이상은 없었다.
물론 제 누나의 앞에서는 누구에게도 그냥 세상 순박한 놈이었다. 누나가 제 걱정을 하기를 바란다는 듯.
남매가 어떻게 보면 참 다르면서 똑같았다.
‘그럼 볼일 보고 가세요.’
어차피 원하는 건 별로 못 얻을 거 같지만.
마치 태생적으로 그를 윤지호가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임을 알아차린 듯, 의미심장한 뒷말을 남기며 윤지우가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조금 당황한 듯한 얼굴의 유해한이 물었다.
‘어이. 지호 님 동생. 여기 그래도 녹음 대표는 내가 아니라 이쪽인데.’
‘……옆에 누가 있다는 거죠?’
‘……?!’
그 말을 듣는 순간 유해한은 마치 ‘내가 지금 사람이 아니라 유령을 데리고 왔나.’라는 얼굴을 해 보였다. 물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제 눈에 똑똑히 보이는 이로운을 투명 인간 취급하다니.
단체로 눈이 잘못된 건가, 눈을 비비기도 했다.
그때, 때마침 구원자처럼 차지혁이 헐레벌떡 달려 나왔다.
‘뭐야! 왜 왔어!’
……환영 인사는 결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기랑 이야기하자며 급히 등을 떠미는 게, 유해한을 도와주려고 어떻게든 안간힘을 쓰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발버둥도 무색하게, 유해한이 참지 못하고 빈정거렸다.
‘아니, 저기 새파랗게 어린 루키가 우리 랭커 길드장님을 투명 인간 취급하는 신선한…….’
유해한의 빈정거림에 황급히 몇이 나서서 윤지우를 달랬다.
‘……그래. 지우 군. 뻔히 보이는 걸 왜 그렇게…….’
지금은 빈정거림에 불과할 수도 있었지만 문제가 커진다면, 길드 간 문제로, 더 커지면 헌터계 전체에 도전장을 내미는 것이 될 수도 있었다.
오로지 힘이 전부인 헌터계는, 비록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군대보다 상하 관계가 더 엄격한 편이었다. 랭커 앞에서는 함부로 말 한마디 못하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런 세계에서 지금 윤지우는 고작 국내 랭킹 100위 안에 드는 아슬한 위치로 국내 탑 랭커를 무시한 거다. 이건 자칫하면 헌터들 전부에게 지탄을 받을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윤지우는 당당했다.
‘윤지호한테 버림받고 끝난 놈을 뭐하러 신경 쓰나요?’
그런 귀찮은 일 안 해요.
마치 그게 당연한 것인 듯, 태연하게 하는 말에 순간 다들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걸 꼬투리 잡으려던 유해한마저도.
그런 윤지우를 알고 있었던 차지혁만 이마를 칠뿐이었다.
‘그러게 도와줄 때 가라니까…….’
‘……와, 저 남매 원래 저래?’
‘윤지호가 키운 놈이야. 윤지우한테는 윤지호가 하늘이라고.’
그런 윤지호에게 아웃당한 놈을 윤지우가 거들떠나 볼 것 같아?
차지혁의 한숨과도 같은 짜증에 유해한이 입을 떡 벌렸다. 남매가 쌍으로 저건 뭐냐는 반응이었다.
뭐, 원티드 길드원이라고 반응이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건, 당사자인 이로운이었다.
‘……너는 예전부터 나를 싫어했었지.’
‘뭐. 피차 마찬가지이지 않나? 동생한테도 질투하던 속 좁은 남친이셨잖아. 내 이름도 몰랐으면서.’
헐. 레알?!
그건 또 몰랐던 새로운 사실에 다들 눈을 땡그랗게 떴다. 그런 이들은 보이지 않는다는 듯 윤지우가 여상히 말을 이었다.
‘아. 기억도 안 하려고 했으려나. 대놓고 윤지호한테 티를 낼 수는 없었을 테니까.’
만약 그랬다면 곧바로 아웃이었을 테니.
제 누나를 잘 알아도 너무나 잘 아는 말에, 모두가 속으로 박수를 쳤다.
저렇게 신박하게 이로운을 엿 먹일 수 있다니! 세상에서 제일 재수 없는 남자가 속절없이 당하는 모습은, 솔직히 말해서 꿀잼이었다. 그동안 당한 게 있으니 더더욱.
‘……그렇게 날 싫어하면서 헤어지라고 하지는 않았지.’
‘응? 무슨 소리야.’
세상에 별 헛소리를 다 들어 보겠다는 듯 윤지우가 웃었다.
‘윤지호가 선택한 거에, 내가 토를 달 이유가 어디 있어.’
너 같은 인간이나 거기에 대고 구시렁거리지.
‘…….’
너무나 맹목적인 말에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그런 말을 남기고 남들의 표정 따위는 조금도 알 바가 아니라는 듯 홀연히 안으로 들어가 버린 윤지우에게 나중에 원티드 길드원들이 쫓아가 물어보니, 헤어진 날 좋아서 바로 윤지호 앞에서 샴페인을 땄다고 했다.
그런 동생이, 유지한에게는 그러지 않을까?
솔직히 이로운은 등급을 매기자면 최상급의 남자긴 했다.
아. 성격 빼고.
그 ‘이로운’도 그런 취급이었는데, 저 윤지호 한정으로 에베레스트 같은 눈에 유지한이 차긴 할까. 티도 안나긴 하지만, 엄연히 제 상사인데?
아무도 그것을 단정할 수 없었다.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 정신이 아예 완전히 나간 것일까?!
차라리 이쪽이 더 신빙성 있었다.
다들 너무 물어보고 싶었지만, 무려 월드 랭킹 1위의 동생님이셔서 함부로 물어보지 못하고 있던 때, 뒤늦게 들어온 고딩님이 거침없이 말을 건넸다.
“뭐예요. 저번만 해도 죽상이더니, 오늘은 또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이제 권력의 맛을 느끼신 건가?
그 말에 그제야 윤지우가 고개를 들어 고딩님을 바라보았다.
“아. 권력 맛이 어딨어요. 윤지호가 그런 걸 퍽이나 쥐여 주겠어요.”
“다른 사람이 열심히 쥐여 줄걸요? 동생이 원하지 않아도.”
그래도 윤지우보다 훨씬 더 오래 헌터계에 몸을 담그고, 세상의 온갖 안 좋은 면을 일찌감치 본 선배로서 고딩님이 날카롭게 지적했다. 하지만 그래도 윤지우는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그런 놈들 있으면 알아서 먼저 윤지호가 치울걸요?”
“……!!”
슥삭 할지, 그냥 묻어 버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도 그 말을 그냥 우스갯소리로 듣지 못했다. 예전이었다면 그냥 웃으며 흘려들었겠지만, 지금 그녀는 그것을 충분히 실행하고도 남을 힘이 있으니까.
심지어 정체를 밝힌 탓에 전 세계가 소란스러운 이때, 분명 분란을 일으키려 드는 불씨들이 난립할 것이다. 오래도록 가지고 있었던 자신의 권력과 힘을 지키려는 이들이 특히. 딱 본보기가 필요할 시기기도 했으니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심지어 정체를 본격적으로 밝히기 전에, 그녀가 직접 나서 본보기를 보여 준 수준이 어떠했는지를 다들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 소름이 끼칠 수밖에 없었다.
“너무 일리 있어서 소름이 돋는다.”
“세상에서 윤지호가 젤 싫어하는 게 귀찮음인데, 그런 걸 일일이 상대하느니 그냥 치워 버리겠죠. 심지어 이제는 정체를 숨길 필요도 없으니 뭐 꺼릴 게 있겠어요.”
윤지우의 소름 끼치는 말에 고딩님이 좋다고 박수를 쳤다.
“우와. 다 망했네? 하긴. 이제 좀 사릴 필요가 있지. 그것들은.”
“그럼요. 떽떽거리는 순간 옆에서 구경할…… 아니, 졸라 무서울 거 같으니. 그냥 누나 뒤에 숨을래요.”
매우 현명한 대답에 고딩님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그러네? 난 레쓰비 선배 잡고 도망가야겠다.”
“적극 추천드립니다. 윤지호 빡돌면 눈에 뵈는 거 없어서 휘말릴 수 있어요.”
“오. 그런 고급 정보를! 아. 그래. 그럼 권력 때문도 아니고 왜 기분이 좋은데요? 솔직히 다른 것도 아니고 우리 머저리 보스랑 연애해서 더 죽어 있을 줄 알았거든요.”
그제야 본래 해야 할 질문을 떠올린 고딩님의 말에 윤지우가 모든 걸 그냥 모든 걸 내려놓은 얼굴을 했다.
“따지고 보니 누나한테 개기는 건 원래 불가능이고, 누나가 길드장님까지 꿀꺽했으니, 저는 앞으로도 쭉 누나 하나 눈치만 보면 되잖아요? 다른 거 신경 싹 다 안 쓰고 누나 눈치만 보면 되니 오히려 편하죠.”
원래도 그렇게 썩 신경을 쓰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제 진짜 하늘 위에 울 누나 빼고 뭐 없음. 심지어 직장 상사까지 꿀꺽― 했으니 눈치 볼 상사 하나가 없어진 셈이기도 했다.
오히려 이득이지 않냐는 말이, 매우 설득력이 있어 다들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래도 그것을 순순히 인정하기 싫었는지 고딩님이 필사적으로 반박했다.
“그래도, 길드장님이 리드할 수도 있잖아?”
“……진심이세요?”
“아니. 그냥 한번 말해 봤어.”
물론 바로 철퇴를 먹었다.
리드는 얼어죽을.
남한테도 못하는 걸, 제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그것도 그 윤지호에게 유지한이 할 수 있을 리가. 원티드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꿈을 애초부터 꾸지 않았다.
“그럼 우린 이제 1위 밑에 있네? 우와. 최고인데?”
“더 이상 호구 취급 안 당해도 되는 거야?”
“우리도 권력 좀 휘둘러 보자!”
그래서 그들은 곧바로 기운차게 현실적인 생각으로 다가올 장밋빛 미래를 그렸다. 매우 현실적인 생각이고, 좋은 일이었지만, 윤지우는 그 생각에 100% 동조하지 못했다.
“그 권력 휘둘러 보기 전에, 앞으로가 문제 아니에요?”
“응?”
궁극적인 전제가 빠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전국적으로 키스신이랑 고백신 다 나가고, 정체까지 다 까발려졌는데. 윤지호가 집 밖으로 나오겠어요?”
“……!!”
그랬다. 아무도 그건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예상은 했지만, 상상 이상으로 세상은 떠들썩했다.
『하이라이트 명장면! 예상치 못한 원티드의 교합(?)』
― 시발. 내눈.
― 아니, 저거 뭥미…;;
― 형…진심이야…? 아니, 왜 굳이… 아니 존나 허들 미쳤어….
└ 응. 심지어 성공했어….
└ 유지한이자나… 뭐 그럴 수 있지….
― ㅎㄷㄷ. 돌았네.
― 그니까 1위 2위 다 원티드? 드디어 원티드가 다 해먹겠다는 포부인가… ㄷㄷ
└ 이분도 현실도피 오지시네
└ 그렇게라도 해야지. 저거 나만 뇌절옴?!
└ ……ㅅㅂ 우리 좆됨. 일단 유지한 멱살 잡이했던 머저리들 전부 대가리 박아라.
― 국회의사당 인간들 일단 전부 가서 석고대죄부터 시작하자.
『제목: 무명이 원티드 흑막실세인거 실화임?』
― 썅;;;이미 좆된나라. 굿바이. 인류.
└ 아니, 아직 그래도 안끝났어…;;
└ 끝난거나 마찬가지지 우리나라가 유지한한테 한 짓 모름? 님 혹시 문맹이셈?
― 우리나라가 각성자 박대로 유명한 모지리로 유명하더니, 이제 결국 사고 제대로 터짐.
― ㅅㅂ. 이러니까 내가 진작 헌터 대우 개선하라니까!!!!!
― 구라즐. 니가 언제.
― 무명님! 이놈이에요! 이놈이 젤 먼저 유지한 깠어요!
― 야. 이 씹쌔들아!!
『제목: 다들 다음생을 기다립시다.』
이번생 그냥 좆됨. 다들 사요나라.
얼른 유언 써… 아니 써도 전달 안되는구나.
그냥 남은 인생 후회없이 살도록.
젠장. 무명이 누구라도 우리나라는 그냥 좆된건데, 그 무명이 원티드? 심지어 그 무명 남치니가 유지한?
그냥 속편하게 다음생을 기립시다… 시바… 눈물이….
― 젠장..뼈때리지 말라고!
― 아니. 우리는 대체 왜 이렇게 산거야.
― 그러니까 누가 유지한한테 그러지 말라고 했을 때, 안했으면 좋았자나… 흐엉… ㅜㅠㅠ
― 응. 그거 소수. 다 묵살됨.
― 그니까. 그 소수말 좀 들으라고.
『제목: 내가 좀 미친거 같은데…』
이 와중에 ㅁ무명 개 씹존예…;;;
역시 우리의 존버는 승리했다.
심지어 고백하는 사람 유지한.
ㅅㅂ 키스신이 무슨 영화찍는줄.
SSS급 영화 한 편 공짜로 봄.
설레서 돌아가시는 줄 알았음.
― 네. 그래서 뒤지셧군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와. ㅅㅂ 존나 너무해 ㅋㅋㅋㅋㅋ
― 근데 진짜 졸라 예쁘긴 함. 학교 여신 기본 옵션으로 깔고갈 스타일.
― ㅇㅈ. 완전 솜사탕 같이 생겨서 다 한번씩은 봤을 분.
― 나. 저분 알아. 중고딩대까지 졸라 유명했음.
― 오? 알려줘! 알려줘!
― 인기 진짜 개 졸라 많았음. 동네에서 진짜 유명함. 근데 본인이 얼굴과 다르게 엄청 무심하고 차가워서 웬만한 남자는 플러팅도 못함. 동생도 잘생겼는데, 우애도 좋아서 더 유명했음.
― 아. 동생 윤지우였지. 차세대 존잘랭킹 루키.
└ …뭔가 순서가 바뀌지 않았어?
― …뭐여. 그 남매구성은. 소설임?
― 왜 나한테서 다 뺏어갔어! 미모 조금은 나눠줘도 되자나-!! 폭리다!!
― 응. 그래도 돼. 월랭 1위자너. 굽신굽신. 왕님. 전 아무말도 하지 않았사옵니다. 그러니 부디 ―놈만 족치고 노여움을 푸소서….
― 아. 저언니. 심지어 전남친 이로운임.
― ……오우 쉣. 신이시여.
― 뭐라고요? 그 미친놈이여? 언니 대체 정체가….
└ 응 월랭 1위. 최강 킹… 아니 퀸이지.
소문의 온상지라 불리고 짜라시의 발상지라 읽는 인터넷 댓글창을 나는 대체 왜 확인하고 있는 것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굳이 내 손으로 찾아가면서까지 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확인은 해야 했으니 결국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 예상과 한 치도 다를 바 없이,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이런 걸 보고 있는 내 모습에는 여태껏 느꼈던 그 어느 것보다 심한 자괴감이 밀려 들어왔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나를 좌절시켰던 건…….
“와…… 진짜 다 털렸네…….”
이 빌어먹을 네티즌 수사대.
역시나 했지만.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이상한 데서 어마어마한 능력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사람들답게 정보력도 어마어마했고, 이걸 퍼 나르는 것도 5G보다 더 빨랐다.
뭐가 이렇게 빠르냐고. 요즘 5G 잘 터지지도 않더만! 니들도 느리면 좀 덧나나!
끝내주는 키스를 할 때부터 대충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약간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역시나 그런 기적은 일어날 턱이 없었다.
이런 재밌는 걸, 흥의 민족이 안 파헤칠 리가. 만약 내가 저 관전자들 중 하나였다면 나였어도 궁금해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들처럼, 전형적인 한국인이니. 그래서 더는 뭐라 할 수가 없었다.
“……후우.”
물론 예상 내였다.
충동적으로 무명인 걸 밝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산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앞으로의 계획과 행동 역시 전부 정해 놓은 터였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런 게 있었어? 뭔데? 라고 묻습니다.]
‘뻔하지.’
이럴 때는 뻔하고, 당연한 전략으로 가는 게 가장 편하고 효과적이었다. 물론 상대방이 생각하기에는, ‘설마 진짜 그걸 하겠어?’라고 생각할 만한 전략이긴 했지만 그걸 해내야 진짜지 않은가.
그리고 꿈과 기대에 부풀어 있는 어떤 이들에게는 애석한 일이지만, 나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들도 그동안 나를 봐온 게 있으니 모르지 않겠지만.
적당히 죽일 놈들은 솎아 내는 게 현 총리에게도 편리한 일일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오로지 내 밑에서 나를 도울 그가 제 뜻을 펼쳐야 내게도 좋을 테니. 물론 내가 정체를 밝힌 지금도 충분히 편하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걸러내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기에 하기는 해야 했다.
온갖 지랄과 잡음이 일긴 할 테지만, 그렇게만 된다면 상황은 더없이 유리해질 것이다.
그건 그런데…….
“……그냥 칩거할까.”
전 국민에게 팔린 키스신은 내 철판이 아무리 두꺼워도 태연하게 넘길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새액새액―
그 와중에 이 모든 흑역사의 원인은 옆에서 아주 행복하게 자고 계셨다.
세상에서 지금만큼 행복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온몸으로 드러내듯 아이 같은 미소를 입가에 곁들인 것으로 모자라 내 허리가 삼신 할매 동아줄인 줄 아는지 꽉 끌어안고 놓지 않는 모습이……. 아주 귀여웠다.
그래. 귀엽고 예쁘게 보여서…… 괜히 울컥― 짜증이 솟았다.
누구는 너 때문에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데, 그 원흉은 세상 행복해하며 자고 있는데 억울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짜증나.”
휙―
홧김에 허리에 감겨 있던 팔을 치워 버렸다.
작은 심술이었을 뿐이다.
어차피 슬슬 움직이기도 해야 했으니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이놈은 그 조그마한 심술도 납득할 수 없는 듯, 다시 내 허리 위로 턱― 팔을 올렸다.
몇 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엄청난 반사 신경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게 아니면…….
‘이 새끼……. 깨어 있는 거 아니야?’
매우 신빙성 있는 의심에 놈을 이리저리 뜯어보다……. 훅―! 그 얼굴 가까이에 내 얼굴을 가져다 댔다. 이런 행동을 하면, 예상하고 있었어도 깜짝깜짝 놀라며 얼굴을 붉히는 유지한이었으니까.
하지만 움츠리지도,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다. 움츠리지 않는 건 불굴의 의지로 어떻게 해낼 수 있어도, 얼굴을 붉히는 건 제 맘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의심이 가긴 했지만, 미심쩍은 얼굴로 결국은 의심을 거두었다.
“……에휴.”
혼자 의심하고, 혼자 의심을 거두는 내가 문득 처량하게 느껴졌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어째 유지한을 만난 뒤로 헛짓이란 헛짓은 혼자 다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 이게 사실인가….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헉… 언제부터 내 계약자가 이렇게 현실 직시를 잘 했냐고 놀람을 금치 못합니다.]
아이 씨.
불난 데 아주 기름을 부으며 성위님이 존재감을 피력했다.
내 주변은 왜 다 이따위지?
급격한 회의감이 찾아들어, 짜증을 내며 그대로 벌러덩 다시 누워 버렸다.
꽈악―
그대로 드러눕자, 짐승 같은 직감으로 내 움직임을 알아챈 것인지 그가 더 힘을 주어 나를 꼭 안아왔다. 그게 꼭 버림받지 않기 위해 매달리는 강아지 같아서, 천생얼빠답게 나는 또 이 호구에게 져 주고 말았다.
“……후…… 니가 다 해…….”
난 진짜 아무것도 안 할 거야.
물론 진심이었다. 인간 특성상, 그럴 수 없을 것이 뻔했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정말, 일면식도 없는 이들의 바람과 기대를 충족시켜 줄 생각 따위 없었다.
나는 그래도 된다고, 성위에게 약속 받은 존재니까.
그렇게 핑계를 대며 유지한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조금이라도 나 스스로를 위한 변명거리를 찾는 것처럼.
“……응…….”
그리고 우습게도, 잠에 잔뜩 취한 것이 분명한데도 그 역시 자연스럽게 나를 마주 안으며 웅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대답이 꼭, 전부 자신이 다 하겠다는 말처럼 들려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네가 누굴 지켜. 넌 너나 지켜. 제발 좀.
수십 번 이야기하는 말인데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 멍청한 유지한다웠다. 심지어 내가 자기보다 훨씬 강하다는 걸 알면서, 왜 저리 당당하게 말하는 건지.
정말 어쩔 수 없는 놈이었다.
“……머저리.”
……그래서,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고.
순간적으로 차올랐던 억울함이나 분노가 전부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누가 듣는다면 이게 도대체 무슨 모순이냐며 몇 번이고 되묻겠지만, 유지한을 곁에 둔 것을, 그리고 내가 유지한의 곁에 있기로 한 것을 후회하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비록 그 속셈은 도통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내가 죽을 때까지 내 곁을 지켜 줄 성위님이 있는 데다, 또 너를 가졌으니까.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스러운 너는 그럴 가치가 충분히 있었으니.
……뭐, 약간의 심술을 곁들이자면. 그게 언제까지 갈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하암…….”
스르르 잠이 몰려왔다.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 * *
“……음? 헐…….”
벌떡―!
번개처럼 침대 위에서 튀어 올랐다.
대체 얼마나 잔 거지?
하늘을 보니 시커먼 게 벌써 한밤중이었다. 후다닥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시간이 벌써 8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제부터 쭉…… 거의 내리 36시간을 잔 것이다.
나 인간 맞냐.
기절한 환자가 아닌 이상에야, 아니 환자도 이렇게 자지는 못하겠다.
잠귀신이라도 붙었나.
보통 아무리 푹 자도 중간중간 깨서 먹을 거 다 먹고 놀 거 다 놀고 자는 인생을 25년째 살아온 사람으로서 지금의 이 상황은 충격적이기 그지없었다.
물론 힘의 봉인이 풀렸을 때는, 36시간이 아니라 72시간 이후로는 계산해 본 적 없을 정도로 죽자고 잠만 잤지만, 그건 엄연히 사유가 있었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은 뭐지?!
돼지의 환생인 것처럼 최소 하루에 2끼 이상은 처먹어야 하는 몸이 아프지도 않은데 먹을 걸 원하지도 않다니…….
일주일 가까이 잠만 처 잤을 때도 중간중간 깨서 성위님이 강제로 손에 쥐여주는 온갖 영양제와 엘릭서, 포션을 닥치는 대로 마셔댔다. 안 마신 걸 찾으라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그것들 싹 다 맛없다고 안 먹는다고 욕했더니 천상의 과일을 갈아서 만든 주스 같은 것도 줬었지. 아. 그건 진짜 맛있었는데…. 무슨 과일이더라?
어쨌든 덕분에 평소 밥 먹어서 에너지를 보충하는 것보다 훨씬 쌩쌩했었다. 어설픈 영양소 섭취보다 더 효율이 좋아서 얼굴에는 윤기가 좔좔 흘렀지. 그런데 지금은 하루 고작 넘게 잤다고…….
“헐. 내 피부!”
다다다다닥―
벼락처럼 침대에서 뛰쳐 내려가 얼굴을 확인했다. 어쩐지 얼굴이 더럽게 땡긴다 했더니……. 얼굴이 쩍쩍 갈라지다 못해 가뭄이 들어 아주 흰 가루가 날아다녔다.
아니 하루 좀 넘게 잤다고 이러면 반칙이지. 내 피부야!
“뭐. 뭐야……!”
다다다닥 침대에서 내려오는 소리에 유지한이 벌떡 일어나 내게 달려왔다.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 줄 알았는지 표정에 당황이 가득했다.
그 얼굴을 보니 갑자기 서러움이 엄습했다.
“내…… 내…….”
“내?”
“내 피부! 이게 뭐야! 왜 이래!”
내가 서러워서 반사적으로 막 소리를 질러대자, 울망거리는 내 눈망울에 당황을 금치 못한 유지한이 황급히 내 얼굴을 살폈다.
몇 초간 내 얼굴을 뜯어보고선, 영 자신 없는 얼굴로 물었다.
“……어디가?”
“야―!!”
사람은 서러운데 이 새끼가―!!
서러운 마음이 존중받지 못하자 이젠 빡이 쳤다. 미리 말하건대, 내가 뒤집어질 이유는 충분했다.
기본적으로 어마어마한 건성으로 타고난 몸. 악건성이긴 하지만, 건성은 어릴 때는 영 태가 잘 안 난다. 당사자만 실컷 느끼지.
학창시절에는 여드름 하나 안 달고 뽀얀 피부를 유지하며, 건성 특유의 그 느낌 때문에 끈적한 뭘 바르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그래서 어릴 때는 내 피부가 좋은 줄 알고 살았다.
뾰루지 하나 안 나는 얼굴. 그걸 막 믿고 로션도 잘 안 바르고 살았던 피부였으나. 어느 순간 ‘아. 좆됐다.’라는 것을 느낀 건 사회 생활을 하며 매일 같이 화장을 하고 다닐 때였다. 그때까진 몰랐지. 화장을 매일 하면 피부가 한 방에 가신다는 것을.
그 이후 관리의 필요성을 느끼고 그렇게 열과 성을 다했는데……!
몇 년의 보람이 한 번에 사라진 박탈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씨…… 너 때무니야!!”
“……윽―! 응…… 내 탓이야. 그러니까 일단 진정하고…….”
나중에 와서야 든 생각이었지만, 얼굴 다 텄다고 달려온 놈 멱살을 잡은 나도 나지만 죄 없이 잡혀 놓고 자기 탓이라고 인정하는 놈도 참 놈이었다.
“힝…… 내 피부…….”
또 간단히 시인하며 나를 달래니, 순순히 풀이 죽을 수밖에 없었다.
아. 진짜…… 이 피부 언제 어떻게 돌리냐…….
당장 마스크 팩이나 비싼 앰플을 들이부으면 효과가 좋기는 하지만, 그 효과는 6시간뿐임을 너무나 잘 알기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 와중에…….
“……배고파.”
“……어?”
사람이 먹고는 살아야지.
“밥 먹자.”
지랄도 일단 먹고. 힘내서.
* * *
밥 먹자는 건 내 나름의 화해의 제스처였다. 이제 그만 이 사건을 일단락시키자는 의미기도 했고. 너무 착하게 반응하니 빽 소리를 지른 게 살짝 미안하기도 해서, 돌려서 표현을 한 것이었다.
그 속뜻을 모를 정도로, 내가 많은 것을 포기하고 마침내 얻어낸 내 남친이 멍청하지는 않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니, 이 상황은 분명 내 의도와는 무관했다.
“……직접 하게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설마 저거 내가 상상하는 그거인가?!
엄마가 내게 안겨 준 커다란 트라우마가 지금 이 순간, 내 본능적인 경계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증명되지 않은, 혹은 내 기준에 미달하는 것들은 가차 없이 버리게 되어 버린 한 사람으로서, 내 눈이 유지한을 앞에 두고 사시나무 떨리듯 흔들렸다.
누구보다 예뻐했던 최애이자, 이제 막 내 것이 된 순수하고도 푸릇푸릇한 남친이라고 해도 내 트라우마 앞에서는 평등했다. 나는, 제아무리 유지한이라고 해도 그가 만들어 낸 정체 모를 요리를 보고 웃으며 맛있다고 이야기해 줄 자신이 없었으니까!
아니 어떻게든 해 줄 수는 있을 것도 같다. 딱 그거까진. 하지만, 음식을 입에 가져갈 자신은 1도 없었다.
딱 봐도 요리라고는 1도 안 해 봤을 도련님이 무슨 요리는 요리! 심지어 유지한은 온갖 산해진미를 갖다 바쳐도 패스트푸드랑 똑같이 취급하며 먹을 정도로, 미식과는 거리가 먼 인간 아닌가!
그런 내 마음은 눈곱만큼도 모르는, 머저리 같은 남친이 너무나 예쁜 미소로 내게 말했다.
“가만히 앉아 있어요. 아무것도 안 해도 돼요.”
아니. 하게 해 줘…… 제발…… 안심이 안 돼…….
이런 내 간절한 마음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지, 세상에서 제일 천치 같은 놈이 기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자기도, 뭔가를 보여 줄 수 있다는 그런 기쁨이 엿보이는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보니 차마 ‘꺼져. 주방은 나의 신성한 구역. 나 외에는 누구도 침범 못함―!!’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이래서 좋아하면 질 수밖에 없다고 하나 보다.
결국 할 수 있는 건 억지 미소를 지으며 탁자에 앉는 것뿐.
안 그런 척하려 열심히 애를 썼지만, 입가가 경련이 오듯 덜덜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 이놈의 PTSD.
진짜 이 순간만큼 내 유일한 트라우마가 원망스러운 적이 없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무슨 남친이 해준 밥을 사약 기다리는 중전처럼 비장하게 취급하며 덜덜 떠냐고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이게 평범한 반응일 것이다. 실제로 음식이 맛이 없으면 얼마나 맛없다고 이렇게 떨겠는가. 아무리 내가 입맛이 까다로운 편에 속한다 한들, 그 정도일 리가 없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엄마의 음식을 뺀다면.
도무지 인간이 만든 요. 리. 라고 생각할 수 없는 그 음식을 한평생 보고 살아 봐라.
다 나처럼 될 것이 분명했다.
보통 그러면 어느 정도는 미각을 포기한다고 하지만, 나는 반대로 미각에 집착을 하게 된 케이스였다.
음식점 가서 한 입 먹자마자 별로면 바로 미간을 구기고 수저를 내려놓는다. 그리고 손도 대지 않아, 가게 직원이 달려와서 음식이 별로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물론 차마 대놓고 이걸 먹으라고 내놨냐고는 할 수 없어 보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래도 표정으로 내 심정이 느껴졌는지 일부 고급 레스토랑에서는 내 기호를 물어보고 음식을 교체해 주는 서비스까지 받은 적이 있다.
다행히 그때 그 음식이 유난히 별로였던 것인지, 아니면 그 뒤로 주방장이 혼신의 힘을 다해 요리를 한 것인지, 그다음 음식은 제법 괜찮아서 꾸준히 단골로 찾고 있었다.
어쨌든, 내 입맛이 그 정도인데 아무리 유지한이라고 해도 그가 만든 괴식을 보고 내가 욕을 안 할 수 있을까?
꿀꺽―
그래도 최대한 노력하자. 욕만은 안 하는 거야. 뭐 그래도 상처받겠지만 대놓고 쌍욕을 하는 것보다는 낫잖아!
그렇게 필사의 다짐을 다지는데, 마침내 결판의 시간이 다가왔다.
“자요. 다 됐어요.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떨리는 눈으로 그가 내민 음식을 확인했다.
“……오므라이스?”
“있는 재료로 만들 수 있는 게 한정되어 있더라구요.”
뭐. 그건 그렇겠지. 장을 안 봤으니.
장은 물론 냉장고에 뭐가 든지도 모르는 집주인이 막연히 생각했다.
그나저나 모락모락 나는 오므라이스가 제법이었다. 집에 데미그라스 소스가 있었을 리도 없고, 그렇다고 그걸 만들 시간도 없었을 테니 케첩을 뿌린 듯했다. 쓸데없이 이것저것 넣어 이도 저도 아닌 데미그라스 소스보다는 차라리 케첩이 낫다는 파라 이건 환영이었다.
밥을 감싼 계란이 찢어지지도 않은 채 타원형으로 잘 말려 있었다.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렇게 하는 건 절대 초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덕분에 아까의 걱정은 조금 걷어내고 편하게 수저를 들 수 있었다.
“잘 먹을게요.”
그리고 먹어 본 맛은…….
“……! 대박!”
완전 반전의 반전이었다.
“뭐야! 왜 이렇게 맛있어요―!!”
단언컨대 내 입에 100% 딱 맞는 오므라이스였다. 여기에 제대로 된 데미그라스 소스만 가미된다면 블루 리본 맛집에 버금가는 비주얼과 맛일 것이다.
아까는 케첩이라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막상 맛을 보고 나니 시중에 판매하는 케첩 특유의 싸구려 맛이 너무 아쉬울 정도로 안에 있는 밥과 계란이 환상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나 모르게 요리 수련이라도 받아요?”
아니면, 마력으로 스킬을 얻어 만들기라도 한 것인가.
도무지 그냥 천성적으로 잘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소설에서조차 유지한이 음식을 먹는 부분은 나오지만, 음식을 하는 부분은 단 한 부분도 나오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부잣집 도련님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사용인조차 집에 두지 않는 유지한이 요리는 무슨.
차라리 호텔에서 배달시켜 먹었을 확률이 더 컸다. 그걸 볼 때마다 그냥 호텔 최상층에 살지 뭐하러 오피스텔에 사나 싶었다. 알아서 다 치워 주고 음식도 대령해 주고 딱일 텐데.
더군다나 요리는 천재성이 아무리 있다 한들 노력이 받쳐 줘야 할 수밖에 없는 분야였다. 아무리 재능이 있다고 한들 숙달되지 않으면 요리는 빛을 발하지 못하니까.
“솔직히 말해 봐요. 나 몰래 뭐 하고 다녔어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지한을 추궁하자, 지한은 그런 나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입에 맞아서 다행이에요. 자신 없었는데.”
“거짓말.”
어디서 그런 말 같지도 않은 구라를.
자신이 없었으면 애초에 내게 선보일 생각도 하지 못할 유지한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단언할 수 있었다. 단호박 같은 내 반박에, 유지한이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흘리며 이실직고했다.
“……연습했어요. 집에서.”
언젠가. 당신에게, 한 번이라도 해 줄 수 있도록.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말하는 남자의 모습에 괜스레 내 얼굴이 다 붉어질 것 같았다.
“……소원 성취했네요.”
“그러게요.”
다정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는 남자를 잠깐 넋 놓고 바라보았다.
내 것임에도 내 것인 게 실감이 나는 것처럼.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
“유지한 씨 것도 있죠?”
“……어…… 아…… 네.”
“나 혼자 먹게 둘 거에요? 빨리 와서 앉아요.”
“…하하. 네. 그럼요.”
그 뒤로는 오붓한 식사 시간이었다. 따로 뭐 엄청 거창한 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제 막 서로를 제대로 알아가기 시작해 아직은 어색한 연인들이, 그것도 밥을 먹으면서 무슨 이야기를 엄청나게 하겠는가.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나와 이 남자에게는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마주치고, 웃고만 있어도 행복하고, 이 시간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어쩌면 얼마 가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밥 다 먹으면 배도 채웠겠다. 뭐 할까요?”
“음…… 뭐가 하고 싶으세요?”
“아. 이렇게 떠넘기기인가.”
“……아…… 그…….”
뭐. 어쩌면.
“뭐. 정 할 거 없으면……. 어른의 일이나 한번 즐겨 볼까요?”
“……!”
아무 말도 안 하진 않긴 한가?
* * *
“……으으…… 물.”
이제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깨는 것에 익숙해질 것 같았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그대로 물을 찾아 나섰다. 뭐 하나 걸치지 않았지만, 어차피 이미 다 보여 주다 못해 물고 빨고를 다 한 몸.
내외를 하기에는 체력이 부족했다. 아니. 젠장. 내가 저거보다 힘 자체는 좀 오버해서 표현하면 10배 이상 셀 텐데, 왜 내가 저놈보다 체력이 안 좋은 것 같지?
문득 매우 억울해지는 사안이었다.
물론 억울해 해 봤자, 따지고 보면 내가 꼬셔서 할 말은 없지만.
“……몇 시야.”
하늘을 보니 아주 새카맸다. 한 9시쯤 저녁을 먹고 그 뒤로 몇 시간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쭉 했으니까…….
아. 그냥 생각을 포기하기로 했다.
일일이 다 계산하기에는 아무리 나라도 낯짝이 뜨거워질 것 같았다. 한기가 느껴져 다시 침대로 돌아와 이불 안으로 쏙 들어가 유지한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올려다본 유지한의 얼굴을 보니 새삼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낮져밤이는 이런 걸 말하는 건가.”
밤과 낮의 얼굴이 이렇게 다를 줄 누가 알았겠어.
물론 얼굴은 여전히 낮의 얼굴이다.
……다른 데가 안 그래서 그렇지.
‘뭐. 정 할 거 없으면…… 어른의 일이나 한번 즐겨 볼까요?’
아까도, 사실 나는 그냥 장난을 좀 쳐 본 것이었다.
당황해하면서도 혹여나 점수가 깎이기라도 할까 어떤 말도 쉽사리 꺼내지 못하는 그를 위해.
분명 화들짝 놀라면서 얼굴을 붉히겠지.
그 정도로만 생각했다. 물론 예상대로긴 했다. 그 뒤에 곧바로 별생각이 없어 보이던 오므라이스를 미친 속도로 흡입하고 내게 달려들었던 것만 빼고.
진짜 예상하지 못했다.
‘엄마야?!’
갑작스럽게 덮쳐 오는 거구에 놀라 유지한을 바라보는데, 유지한이 나를 꽉 안으며 말했다.
‘……책임져 줘야 해요.’
이렇게 다 가져가 버렸으니까.
‘…….’
그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거부할 수 있을까. 그 나름의 어리광인 것을 알기에 받아줄 수밖에 없었다.
나름, 기쁜 어리광이었고.
며칠을 내가 독점했으니 이제 세상을, 그리고 본인을 위해 보내 줘야 하는 게 조금 아쉬울 정도로.
어떻게 보낼지도 막막하긴 했다. 내가 여기서 움직이지 않는다 해도, 그놈들의 말을 믿는다 해도. 나를 두고는 쉽사리 발을 떼지 못할 유지한이 훤히 보여서.
나중에 눈을 뜨면, 그런 그를 위해 분명하게 말해 줘야겠다.
‘……여기 있을 거야.’
네가 돌아올 곳이 되어 주겠노라고.
* * *
“……싫어요.”
“어허. 왜 이러실까.”
아니나 다를까. 거센 저항에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싫어요. 왜 그래야 하나요.”
“그야. 당신은 나가서 해야 할 게 많고, 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어서?”
“그럼 나도 지호 씨랑 같이 있을래요.”
“아니 그게…….”
“아무것도 안 해도 돼요. 옆에만 있어 줘요.”
다른 것에는 군말 없이 내가 하자는 대로 전부 따를 강아지였지만, 심각한 분리 불안증을 겪고 있는 이 강아지는 조금이라도 곁을 떠나면, 자신이 버림받을까, 혼자 남겨질까 겁에 질려 한시도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으니까.
“그것만으로도 내가 움직이는 거예요. 내가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집에 있는다니까요?”
“그럼 안 갈래요.”
“아놔…….”
어쭙잖게 달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동안 상황만 괜찮아지면 언제든 내가 자신을 떠날 거라고 생각했던 탓인지 내 말을 믿기는 하지만, 그것과 행동은 별개라는 듯 돌부처처럼 움직일 생각을 좀처럼 하지 않았다.
아니 그래도 이 정도 분리 불안증은 좀 심한 거 아닌가?
내가 그동안 그렇게 심하게 대했나?
그래도 나는 나름대로 인생 최대로 잘해 줬다고 생각하는데?!
억울한 마음이 새삼 샘솟기 시작했다. 물론 이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내가 버린 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이건 좀 과민 반응 아냐?!
그런 내 내적 서러움을 감상한 성위님께서 귀를 후비적거리며 말씀하셨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동안 개새끼 다루듯 얄팍한 애정만 줘서 그런 거 아니겠냐고. 다 자업자득이니 적당히 포기할 건 포기하라고 팩폭을 던집니다.]
아놔, 이쒸…….
부정할 수 없다는 게 제일 거지 같았다. 하지만 그래 봤자 뭐 어쩌겠는가. 이미 일은 돌이킬 수 없고, 나는 여전히 나였다.
즉, 썅년은 어쩔 수 없는 썅년이었다.
마음으로도 머리로도, 내 눈앞에서 불안에 떠는 강아지가 너무 귀엽고 예뻐 덮치고 싶을 정도였지만, 말 안 듣는 강아지는 훈육이 필요했다.
“네가 여기 있으면, 내가 떠나야 해.”
네가 모르는 곳으로.
“……!”
이 세계의 주인공은 너였다.
나로 바뀌는 기미가 보이긴 했지만, 아직. 이 세계의 주인공은 여전히 너였다. 그런 너는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세계에 스며들어야 성립이 되는 존재였다. 네가 주인공으로서의 모든 의무를 포기하고 집구석에 틀어박히는 것을 운명이 그냥 방관할까.
그게 아니라도, 나와 너. 둘 다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는 세계에 스며들어야 했고, 우리 둘 중 하나를 고르자면 그건 너여야만 했다.
애초에 나는 이 세계에 부자연스럽게 끼고 만, 이방인이었으니까. 성위님과의 계약으로 이 세계에 둥지를 틀고, 한 축을 차지하긴 했지만, 여기서 더 세계의 주목을 받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미지수였다. 그런 불확실한 확률에 나를 걸 정도로, 나는 열정적인 사람이 아니다.
주목을 받는 것 자체도 좋아하지 않고. 일코 해제를 함으로써 받고 있는 이목만으로도 나는 이미 차고 넘쳤다. 바라는 것은 그저 조용히, 누구도 섣불리 나를 건드리지 못하고, 나를 그저 위에만 둔 채 나라는 존재를 배제하며 살아갈, 세계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주인공님을 이제 독점하지 말아야 했다.
조금, 가슴이 쓰리긴 하지만.
스르륵―
“……어…… 어째서……?”
어째서 그런 잔인한 말을 하냐는 듯, 잠깐의 넘칠 듯한 행복이 전부 꿈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처럼 절망적인 얼굴로 주저앉아, 그가 내 다리에 매달렸다.
있는 힘껏, 온 힘을 다해 매달릴 힘도 없는 것인지, 아니면 그러면 미움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인지, 힘없는 손으로 내 다리를 잡고 있는 남자가 너무나 애처로워 하마터면 반사적으로 끌어안을 뻔했다. 하지만, 뻗어 나가려는 손을 막아야만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그게 아니라도 장기적으로, 네가 나만을 바라보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었다. 넌 이 세계의 주인공이니.
“내가 안 할 거면, 네가 해야 하니까.”
“…….”
단호한 내 대답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그럼에도 마음은 따라주지 못하는 남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남자와 무릎을 굽혀 눈을 맞추고 살며시 입술에 입을 맞춰 주었다.
촉―
“잘 다녀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약간의 달램의 불과했다. 하지만 그래도 효과가 있었는지 그가 떨리는 몸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은 여전히 원하지 않았지만, 완강한 나를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듯.
잔인한 선택지였던 건 인정한다. 가면, 여기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가지 않으면 버림받는다. 고작 이 잔인한 두 가지 기로만을 내어주고 선택을 종용했으니.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떨리는 몸짓에 마음이 약해졌다. 그러나 여기서 약해지면 안 됐기에, 나는 애써 태연한 얼굴을 가장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난 다시 자야겠어.”
어제 누구 씨가 열심히 괴롭혀서 온몸이 찌뿌둥하거든.
목을 꺾어 소리를 내며 투덜거리자, 그제야 그가 나를 돌아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런 그를 향해 짓궂게 미소를 지으며 언제나 똑같이 짓궂은 장난을 쳤다.
“그러게 누가 사람을 열심히 괴롭히래?”
그가 웃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미소로.
첫 배웅이었다.
* * *
“우와. 유지한이다.”
“미친. 나오셨네요?”
완전 꿀단지에 코 박고 절대 안 떨어질 것 같았는데?
길드에 납신 유지한의 모습에 모든 길드원들이 놀람을 금치 못했다. 어찌나 놀랐는지, 사회생활의 기본인 표정 관리조차 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윤지우의 선언으로 윤지호가 집에 꽁꽁 틀어박혀 진짜 안 나올 것 같아 한동안 계속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세계관 최강자가 은둔 히키코모리가 되겠다는 것만큼 절망적인 사안은 없긴 했지만, 어찌 보면 적으로 안 돌아선 게 다행이었다.
문제는 유지한이 그 세계관 최강자와 붙어 있고 싶다는 이유로 둘이 같이 칩거하면 어쩌나였다.
세계관 최강자가 표면에 나서 인류를 위해 싸워주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태에서, 유지한이라는, 매우 희소한 데다 초초초초 우수한 전력인 랭커가 빠지는 것은 그냥 다음 생을 기약하자는 말과 같았다.
무려 세계 랭킹으로 손에 꼽히는 강자가, 그것도 앞으로 더 강해질 놈이! 거기다 잘하면 세계관 최강자도 끌어낼 수 있는 놈… 아, 이건 확실치 않으니 그렇다 치고. 어쨌든 그런 놈까지 칩거하면 온 인류가 죽을 날 받아 놓은 것과 무엇이 다른가.
“후. 다행이다. 어때. 몸은?”
대놓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유라가 익숙하게 안부를 물었다. 그에 지한이 무심히 답했다.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어.”
“아니. 너 말고 지호 씨.”
“…….”
너는 지호 씨가 다 고쳐 줬을 게 뻔한데 네 걱정을 왜 해?
단호박 같은 유라의 말에 지한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전부 맞는 말이었기에, 짧게 한숨을 쉬며 지한이 무심히 물었다.
“후. 현재 상황은?”
“어떤 거부터?”
“현재 전력.”
세간의 혼란과 의문은 관심조차 없다는 듯 지한이 차갑게 답했다. 세상이 뒤집어지는 거야 뻔한 것이기도 하고, 여론에는 하도 몰매를 맞아서 그런지 크게 관심을 주지 않는 유지한이어서 냉랭한 반응이 외려 더 당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평소와 미묘하게 다른 느낌에 유라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지한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유라의 행동에 다른 길드원들도 지한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러다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뭐야. 왜 삐졌어?”
“그니까. 왜 퉁퉁 불은 얼굴이에요?”
“아. 쫒겨났구나? 나 대신 일하라고?”
유지한과 윤지호.
두 사람 모두 알고 있는 이들이었기에 척하면 척이었다. 아주 귀신같이 알아차린 그들이 보란 듯 지한을 찔러오자, 지한이 부루퉁한 얼굴을 그대로 내보이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뭐야. 왜 다 알아.”
“뻔하잖아.”
“……그럼 할 거 없다고 빨리 말해 줘. 돌아가게.”
아주 여기 오는 것도 지옥이 따로 없었다는 듯, 귀중한 걸 뺏긴 어린아이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대답을 종용하는 모습에 모두가 반사적으로 웃음이 튀어나올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그 유지한이 이렇게 어리광 부리는 건 그들도 바라는 바였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은 그의 어리광을 받아 줄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다.
“응. 안 돼. 미안하지만 네가 지호 씨 남친이라는 것까지 다 쫙 퍼져서 할 일이 너무 넘쳐.”
“어지간한 건 저희 선에서 처리하기는 했는데…….”
“닭대가리 같은 것들이 직접 말해 줄 때까지는 믿지 않겠다면서 떽떽거려서 일이 진척이 안 돼.”
우리나라에 닭대가리에다 답 없는 꼰대 새끼들이 많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지호 때문에 한동안 안 당하고 살아서 그런 것인지 간만에 당하니 끔찍했다.
실상 모든 국민들이 지한이나 지호를 끌어내기 위해 아주 혈안이라, 이 광기는 그들 선에서 해결이 불가능했다.
“……그래. 알았어.”
그 부분은 지한도 포기한 듯 한숨을 쉬며 납득했다. 대신 후다닥 해치워 버리려는 듯 걸음을 옮기는 그의 등을 재빨리 따라붙으며 조심스럽게 유라가 물었다.
모든 인류가 궁금해할 물음을.
“……지호 씨는…… 어쩐대?”
그에 지한이 슬쩍 유라를 돌아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앞으로 나아가며 답했다.
“이미 도움은 넘치도록 받았잖아.”
“……그렇지.”
더 물을 필요가 없는 확고한 답이었다.
* * *
“……나 모르게 요리 수련이라도 받아요?”
날카로운 질문에, 순간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지호의 의심대로 그는 태어나서 요리라는 것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저 혼자 쌀 한 번 씻어 볼 일이 없었던, 요리에 한해서는 무지렁이었다.
‘이번 생’에선.
그런 자신이 이렇게 지호를 감탄시킬 요리를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지난 삶의 기억 덕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맛있는 요리는…… 남이 해 준 요리!’
물론 우리 엄마 요리는 제외.
하지만 이미 그녀의 요리실력을 잘 아는 내가 물었었다.
‘……에…… 요리 잘하면서……?’
‘잘함과 귀찮음이 공존해서 그래.’
장난스러운 말이었고, 사실은 그녀는 요리를 꽤 좋아하는 편이어서 혼자서도 나름 잘 해 먹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 줌의 정보도 간절했던 지난날의 나는 필사적으로 요리를 배웠었다.
처음에는 정말 끔찍한 결과물이 나와서, 그냥 시도도 하지 말아야 하나 고민할 정도였지만 그래도 열심히 했다.
언젠가 그녀에게 선보일 날을 위해.
‘요즘 대세는 요섹남이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하는 그 말조차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한없이 비루한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으니까. 그래도 노력은 보답을 받는다고 어느 순간부터 꽤 그럴듯한 결과물이 나왔다.
이번 생에서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어 기억이 있어도 잘 나오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나를 받아 주긴 했지만, 그게 100%가 아닌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조금이라도 점수를 잘 받기 위해 충동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시도도 안 해 보고 이렇게 급하게 그녀에게 선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체까지 밝혀가며, 나를 구해 주고 나를 받아 줬음에도 왜 전보다 불안해하는지. 더 아등바등하는지. 기억을 찾지 못한 나였다면 결코 이해하지 못할 행동이었다. 하지만, 기억을 전부 찾은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못을 박고 나를 받아 준 너라도. 심지어 이제 막 시작했기에 나를 배려해 주고, 자신의 결정에 책임감이 넘칠 시기의 너라도.
“네가 여기 있으면, 내가 떠나야 해.”
“……!!”
단호하게 나를 끊어 버릴 수 있으니까.
내가 그것을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필요하다면, 망설임 없이 행할 사람이었다.
제 기분이 좀 찝찝해도. 마음이 쓰리다 해도.
가슴보다 머리가 먼저인 이성적인 성향은 그녀의 매력적인 면이긴 하지만, 그렇기에 잔인하기도 했다. 그런 여자를 사랑한 것이 어쩔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고작 말뿐인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심장이 내려앉았다. 만약 여기서 그녀가 바라지 않는 답이 나온다면 그 고작 말뿐인 것을 실천으로 옮길 테니까.
결국 답은 정해져 있었다.
“…….”
꽈악―
사실은 목이 터져라 소리치고 싶었다.
나도 너처럼 세계고 인류고 그딴 거 다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인류가 멸망하든 세계가 무너지든 그게 다 내게 무슨 의미냐고.
오히려 방해만 되는, 해충 같은 인간들 따위, 멸망해도 별로 상관없다고.
나도 너랑 같으니, 곁에 있겠다고.
“잘 다녀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행동하는 건, 이렇게 네가 애정을 줄, 네가 사랑을 줄. 유지한이 아니었으니까.
이미 실패를 겪고 또 겪은 나는 더 이상 네가 사랑하는 순수한 남자가 아니었지만, 그렇게 연기라도 해야 했다.
너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네 사랑을 받기 위해서라면 연기가 아니라, 인생 자체를 바꿀 수 있는 남자는 그렇게 본성을 숨겨야만 했다.
이제 더 이상의 기회는 없었기에 더더욱.
조금의 실수도 없어야 한다. 조금의 의문도, 조금이라도 그녀의 눈 밖에 날 짓도, 해서는 안 됐다.
그럴 짓이라면 이미 넘치도록 했기에 더더욱.
이미 낭떠러지 직전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데, 여기서 더 가게 된다면 정말 끝장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남자는 피가 철철 흐르는 심장을 감내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전부.
“그러게 누가 사람을 열심히 괴롭히래?”
너 하나만을 갖기 위해 시작한 여정이었으니.
* * *
“후. 치우기 완료.”
아. 진짜 힘들었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거셌던 반발에 정말 진땀을 뺐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리 절절한 사랑인 것인지. 그랬기에 더 발목이 묶이고, 시선을 끌며, 마음을 주게 된 것이었지만, 이럴 때는 정말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무자비한 나를 보며 성위님이 혀를 끌끌 차고는 말하셨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래도 너님 남친이신데 무슨 골칫덩이 치우듯 이야기하냐며 누군가를 향해 측은한 눈빛을 보냅니다.]
그 소리에 살짝 양심이 찔렸지만, 곧이어 나는 보란 듯 코웃음을 쳤다.
“그거랑 이건 별개거든?”
[그궈라아라이거느는벼개거든! 이라고 혀짧은 말투로 말을 그대로 따라하며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보란 듯 비꼼을 시전합니다.]
아이 씨. 저 망할 성위 새끼가…….
너무 보란 듯 유치하게 비꽈서 더 빡이 쳤다.
고급스럽게 지랄하면 반대로 화도 안 날 텐데.
하지만 그래도 이러나저러나 내가 평생 함께할 성위. 넓은 아량을 베풀어 주기로 하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순간 열 받아서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 생각나기도 하였고. 그래서 오히려 승자의 미소를 마음껏 흩뿌릴 수 있었다.
“뭐야. 호랑이가 쥐 생각해?”
수많은 의미가 숨어 있는 대꾸에 성위님이 조용히 입을 닥쳤다.
“……으아―!”
그렇게 성위님의 입을 곱게 닥치게 하고 나는 쭉 한번 기지개를 켰다. 그에게 말한 대로 곱게 집에만 정말 있어 주고 싶었지만, 딱 한 가지. 나가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내가 오래전부터 외면해 왔던 문제. 이제 인류의 정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이 시점에 와서야, 더는 피하지 못하고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아. 그전에.
“전말자. 그건 새로운 특기야?”
이 기집애 먼저 해치워야지.
“에이. 들켰네?”
이제 나와도 된다는 듯 부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전말자가 허공에서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뭐가 ‘들켰네.’ 야. 그 정도도 눈치 못 채면 월랭 1위 내려와야지.”
어디서 그런 어쭙잖은 수작을.
“뭐. 그것도 그러네. 그래도 매달리는 거밖에 안 봤어.”
“……다 봤네.”
뭘 그거밖에 안 봐. 그거 외에 볼 게 뭐가 더 있는데?!
기가 막힌 헛소리에 헛웃음을 터뜨리자, 그런 나를 보며 전말자가 나름 진지한 얼굴로 반박했다.
“19금은 안 봤잖아?”
상상 이상의 말에 진짜 정신이 가출할 거 같았다.
이 기집애가 지금 뭐라는 거야?!
진짜 뒷목 잡고 쌍욕을 하고 싶었지만, 나는야 불굴의 지성인. 내가 흥분해 날뛰는 게 저 망할 년이 바라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넌 바로 고소.”
주거침입죄. 관음죄. 아 또 뭐 있더라. 이것저것 뭐 다 갖다 붙이라면 알아서 다 갖다 붙이겠지. 공주인이.
나름 합리적이게 짱구를 굴리고 있는 나를 알아차렸는지 전말자가 얌전히 꼬리를 말았다.
“쳇, 치사한 년.”
“나중에 똑같이 해 줄까?”
이게 지가 똑같이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리지.
도끼눈을 뜨며, 만약 그래도 된다고 말한다면 진심으로 그렇게 해줄 용의를 가득 담은 채 녀석의 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진지하게 생각을 해 본 전말자가 순순히 제 잘못을 시인했다.
“……잘못했어.”
지가 생각해도 끔찍했는지 지가 상상해 놓고 아주 진저리를 쳤다.
이래서 사람은 직접 겪어 봐야 한다. 자기 일이 아닐 때는 쉽게 생각하다 자기 일이 된 순간 길길이 날뛰니까.
그나저나…… 저거 성녀인데, 그게 가능한가?
물론 타이틀이 ‘성녀’라고 해도 중세 시대의 의미와 완전히 같지는 않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헌터들이 타이틀에 어울리는 힘과 제약을 모두 가지고 있었기에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굳이 묻지 않았던 까닭은.
왕년에 자신은 꼭 첫사랑과 고것을 하겠다고 꿈을 꾸던 소녀를 기억하고 있어서.
아……. 쟨 소설을 너무 많이 봤어.
물론 그걸 같이 돌려 보던 인간이 할 소린 아니긴 했다.
“그래서, 넌 왜 옴?”
“……와. 진짜 너무하다.”
“뭐가. 왜 갑자기 나타나서 원망질이야.”
내가 너한테 뭘 했다고.
내가 뭐 무슨 말을 했다고 그렇게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얼굴을 하는지 진심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내 얼굴을 보며 전말자는 아예 제대로 신파를 찍었다.
“흑…… 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내가 뭘 했는데.”
어디까지 하나 보자. 라는 심정으로 장단을 맞춰 주자 전말자는 아주 작정한 듯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빙의해 손에 얼굴을 묻었다.
“너 하나만 믿고……. 측근이고…… 다 버리고…… 성장까지 해서 왔는데……. 그렇게 찾아온 님이 발뺌이나 하면서 나를 버리려 하다니……. 흑…….”
얼씨구. 포즈까지 아주 제대로였다.
성격 안 맞게 성녀로 살아오면서, 성녀의 성격으로 물든 줄 알았더니 연기만 잔뜩 는 듯했다.
‘오스카 여우주연상 급인 듯.’
저 성격 어떻게 감추고 성녀 짓을 했을까.
새삼 눈앞에 있는 이 녀석은 진로를 잘못 정해도 한참 잘못 정한 것 같다. 이 눈부신 연기력으로 왜 성녀를 하는가. 그냥 배우를 해서 편하게 꼴리는 대로 살고 떼돈이나 벌지.
여상히 박수까지 쳐가며 감탄을 금치 못하는데 어느새 집 나갔던 성위님이 돌아와 같이 감탄을 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저 성위가 왜 쟤를 성녀로 만들었냐며. 희대의 배우로 만들었어야지! 저 재능을 두고! 라며 탄식을 금치 못합니다.]
‘그치? 성위님이 봐도 그렇지?’
역시 눈은 다 똑같다.
웬만한 사람들은 다 홀딱 홀려 넘길 희대의 명연기였지만, 애석하게도 내게 저 주인공은 십년지기 찐친이었다. 이제 와 눈물을 짜내며 열심히 연기를 펼쳐도, ‘저게 또 갑자기 웬 꼴값이냐.’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패시브를 장착하고 있단 말이었다.
“구라 즐. 버릴 각 겁나 재고 있으면서.”
어딜 은근슬쩍 포장하려고.
소설에서 본 성녀의 추종자. 그녀를 호위하는 측근들은 전부 성녀에게 심취해 있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성녀’에게 심취해 있는 것이었다.
성녀가 된 어린 소녀가 아니라.
그런 인간들이 하는 짓은 다 뻔하지 않은가.
무교의 입장에서 신 같은 걸 믿는 것들은 다 너무나 빤했다.
스스로 노력해서 앞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신의 힘을 가진 ‘성녀’ 같은 이를 떠받드는 척만 하고 실상은 자신들의 전유물인 양 휘두르기 바쁜 이들이었다. 신이 내려주신 은총이라 곱게 포장하면서.
진짜 제대로 꼴값이었다.
물론 세상에는 이로운 종교인들도 있고, 그런 분들이 세상에 종교를 전파한 것이겠지만, 세상에 그런 종교인들만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게다가 소설 속 성녀의 추종자는 내가 딱 질색을 하는, 뭐 같은 종교인의 모습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병신들이었다.
‘성녀님! 성녀님이 어째서 이런 걸 하셔야 합니까……! 이딴 것보다는 좀 더 인류를 위해…….’
‘인류를 위한 일이에요.’
‘하지만, 저희에게는 이로울 게 없는 일입니다!’
‘…….’
전말자의 곁에 딱 붙어 있는 걸 보았을 때, 보자마자 그 지긋지긋한 인간들만큼은 변하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바로 알았던 것이다. 저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저들이 원하는 성녀가 되길 원하며, 강요만 하는 그들을 전말자가 진심으로 믿고 품을 리도, 또 앞으로 쭉 함께할 리도 없다는 것을.
자신을 보호해 줄 힘과 세력이 필요했기에 불가피하게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지 언제나 늘 그들로부터 벗어날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성녀가 아닌, 온전한 자신을 받아 줄, 자신의 둥지를.
내가 원티드를 점령하고 있다는 것으로도 녀석은 한 줄기 희망을 보았을 것이다. 원티드가 정치적으로 매우 약세긴 하지만, 보유하고 있는 힘 자체는 진짜.
제 길드원 하나를 희생시킬 정도로 무정하지도, 약하지도, 의리가 없지도 않았다.
원티드는 바보들의 집합체니까.
심지어 실세는 친구인 나.
녀석에게는 그 누구보다 믿을 수 있을 둥지로 보였을 것이다. 거기에 내가 무명이라는 것까지 알아차렸으니 아마 그 순간 전부 다 결론을 내렸을 것이 뻔했다. 그걸 알았기에 나 역시 미리 준비를 해 놓았고 말이다.
……미리 말하지만 일코 해제가 준비는 아니었다.
물론 결론만 놓고 봤을 때는 그게 전말자를 위한 최고의 준비가 되긴 했지만.
“이런. 들켰네?”
핵심을 정확히 짚은 내 말에, 아까의 눈물은 그새 증발한 듯 녀석이 연기를 깔끔히 포기하고 평소의 전말자로 돌아왔다.
“그것도 모르면, 네 친구겠냐.”
“쳇. 그것도 그러네. 암튼. 본론.”
“어. 빨랑 말해.”
나 할 거 많아.
안 그래도 무슨 짓을 해서라도 빠르게 돌아올 유지한을 생각하면 시간이 부족했다. 여기서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다. 말할 거면 빨리 말하라고 재촉하자, 전말자가 군말 없이 본론을 던졌다.
“나 원티드 넣어 줘.”
“어. 그래.”
“……어?”
바로 칼답이 날아올 줄 몰랐는 듯 전말자가 답지 않게 얼빠진 얼굴을 했다. 이미 제 가치를 넘치게 증명해 놓고 의외로 자신은 없었던 듯했다.
아, 내가 그런 복잡한 문제와 엮이는 걸 질색해서 그런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영 이해하지 못할 반응은 아니었다.
“……뭐야. 원티드에 넣어 달라는 건 네 밑으로 들어간다는 거야. 근데 왜 이리 쉽게 받아 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맙긴 하지만 호기심이 더 우세했는지 전말자가 물었다. 내 입장에서는 뭐 그딴 걸 물어보냐고 할 소리였지만.
“넌 이미 내 소속 아니었어?”
옛날부터 그런 줄 알았는데?
내 친구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도 않으면서, 하도 뺏기고 사니 어느샌가 그런 것조차 당연하게 여기지 못하게 된 모양이었다. 그토록 뻔뻔하게 굴었으면서, 참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만든 놈들에게 분노가 샘솟을 정도로.
“……하하…… 맞아…… 그랬네…… 그랬어…….”
그리고 그걸 이제야 다시 깨달은 전말자가 웃었다.
미친년처럼. 행복하게.
평소라면 거기에다 대고 ‘왜 갑자기 미친년처럼 처웃어.’라고 했을 테지만, 전말자의 마음을 모르지 않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원티드에 정하나도 있어. 그리고 차지혁도. 차지혁한테 가서 내가 오케이했다 그러고 소속 밟아. 그럼 처리해 줄 거야.”
“……뭐야. 언제 원티드 윤지호 밭 됐어?”
내가 아는 인간들 머지않아 다 보이겠는데?
핵심을 찌르는 말에 순간 찔끔했다.
근데 내가 운영하니까 내 인맥을 이용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찔끔하는 마음을 무심하게 숨기고 시치미를 뚝 뗐다.
“정하나가 먼저 협박했어. 그리고 정하나 오면 차지혁은 뭐…….”
“아……. 세트지……. 그거 아직도 그대로지?”
“직접 봐라…….”
“응…… 욕할 거 같은데…….”
“해도 돼.”
가서 시원하게 씨부려. 그래봤자 그대로일 거 같긴 하지만.
그걸 이미 잘 아는 전말자가 혀를 끌끌 차는 거로 모든 말을 대신했다.
“지금 당장 달려가야지.”
‘결정이 곧 실행이다.’가 모토인 전말자가 부리나케 일어났다. 그리고 바로 이동하려는 녀석을 잠시 붙잡았다.
“아. 그럼 가서 유지한 만나면 전해 줘.”
“응? 뭘?”
“일찍 돌아온다고.”
혹시 모르니까, 미리 얘기는 해 두는 편이 낫겠지.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글쎄. 아닐 거 같은데. 라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합니다.]
……뭐, 아님 말고.
* * *
“짜잔! 등장! 나 왔어―”
원티드 길드 중심 상부.
메인 길드원들과 메인 연구원 중 하나인 정하나가 파우스트 레이드 분석 및 현 길드원들의 실력 향상과 그 방향 분석을 하며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그런 진지한 분위기를 한순간에 변모시킬 인간이 쳐들어왔다.
“……!!”
“……성녀……?”
솔직하게 놀람을 금치 못했다.
세큐리티 통과는 어떻게 한 것이며, 대체 어떻게 된 게, 여기에 오기까지 그녀가 만났을 수많은 사람들 중 한 사람도 그녀를 막지 않은 것인지.
아. 막을 생각이 없었던 건가.
상대는 성녀. 인간에게 해를 절대 끼칠 수가 없는 능력의 힐러계 원탑이었다. 그래서 그냥 편하게 생각한 건가. 아무리 그래도 말이 안 되었다.
뭐지. 새로운 능력인가?
2차 각성을 마친 자가 어떤 능력과 힘을 가졌는지는 아직 많은 것이 미지수였기에 모두가 열심히 짱구를 굴렸다. 그런 이들 사이에서, 누구 씨의 친구답게 정하나가 심드렁하게 환영 인사를 건네주었다.
“올. 전말자. 방송 잘 봤다.”
“어머. 뭐야. 나 예쁘게 나왔어?”
심드렁한 환영 인사에 보란 듯 징그럽게 맞받아치는 모습을 보며 아직 성녀의 이런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이들은 자기가 헛것을 보나 싶어 눈을 비볐다.
그러나 오히려 대외적으로 드러난 성녀의 모습보다 그녀의 이런 모습이 더 익숙한 십년지기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자에게 다가갔다.
“……이게, 진작 말해 주면 덧나냐!”
“꾸엑―!”
윤지호한테는 못 해도 우리한테는 할 수 있는 이야기였잖아―!!
아주 제대로 거는 헤드락에, 전말자가 요란하게 죽는 소리를 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몇 년을 알고 지낸 친구여서 진심으로 걸 리도 없고, 또 아무리 보조계라지만 월드 랭커인 그녀가 고작 B급 헌터의 완력을 당해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걸 전말자도 알고, 똑똑한 정하나는 절대 모를 리가 없지만 그래도 제 서운함을 이 정도는 보여 줘야 할 것 같았다.
물론 전말자의 선택을 영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친구들이 헌터와 연관되는 걸 워낙 좋아하지 않는 윤지호를 잘 알기에 그녀 자신조차 센터에 다니는 것을 윤지호에게만큼은 숨겼고. 다른 친구들도 윤지호의 걱정을 사기 싫어 서로서로 쉬쉬해 주었던 전적도 있으니, 월드 랭커 ‘성녀’로 각성한 사실 자체를 비밀로 한 전말자를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렇지만, 친구이지 않은가.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감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늘 다른 문제였으니.
자신을 비롯한 다른 이들에게까지 꽁꽁 숨긴 게 섭섭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성녀라는 타이틀을 달고 어떻게 살아왔을지가 뻔히 보여서. 나름대로 사춘기에 같이 자라고 커 오며, 다들 각자의 커리어와 능력을 견고히 다져 어딜 가든 꿀리지 않는다고 자신했기에 더더욱.
윤지호만큼 단단하게는 못 지켜준다 해도. 조그맣게나마 힘 정도는 그녀에게 충분히 되어 줄 수 있었다. 오히려 짐이 되지 않을 자신이 넘쳤다.
그런 친구의 마음을 모를 리 없는 말자는 목이 졸리는 상태에서도 배시시 웃으며 정하나를 끌어안았다.
“와. 이제 진짜 사람으로 사는 기분이야.”
역시 친구들이 최고야. 그렇지?
가볍게 툭 던지는 말.
하지만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모를 이들은 그곳에 없어, 모두가 입을 꾹 다물었다.
“어쭈. 누가 보면 그동안은 사람 아니었던 줄 알겠네.”
“음…… 비슷하지 않나?”
뭐 어때.
얼마나 포기하고 살았던 것인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체념에 정하나는 쌍욕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그때, 문이 열리며 차지혁이 안으로 들어왔다.
“전말자 왔다며? 어. 진짜 여기 있네.”
“차지혁. 하이루.”
안뇽!
전말자의 발랄한 인사에 차지혁이 드럽게 여전하다는 얼굴로 전말자의 이마를 콩―! 때렸다.
“내가 니 친구냐. 오빠인 건 또 까먹었지.”
“윤지호도 그렇게 부르자나!”
“그건 윤지호고.”
너랑 걔가 같냐. 걔는 그냥 넘사벽이야.
절대 상대 불가능. 이기기 불가능. 그냥 포기하는 게 빠르다며 차지혁이 당당히 자신의 생존 전략을 공개했다. 너무 당당한 쩌리의 생존 전략에 전말자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런 소리를 왜 그렇게 당당하게 해…….
하지만 상대가 윤지호기에 너무나 공감이 가는 이야기여서 말자는 더 할 말이 없었다. 무명이라는 것이 밝혀지기 전에도, 주변인들에게 윤지호의 위엄은 이 정도였다.
해외에 나가서 무뎌졌다 새삼 느껴지는 위력에 다시 한번 감탄하며 전말자는 더욱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 위력 있는 녀석이 내 편이니, 세상에서 더 이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나, 원티드 들어갈 거야. 등록 절차 밟아 줘.”
“풉―!”
“컥―!”
벽 옆에 딱 붙어 아웃사이더처럼 조용히 커피만 마시고 있던 길드원들이 난데없는 폭탄선언에 마시던 커피들을 일제히 뿜으며 사레들린 기침을 해 댔다.
“콜록―! 뭐…… 콜…… 켁―!”
아주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성녀와 윤지호가 친구 사이라는 것은 이미 전해 들었던 터였으니까.
월드 랭커지만 정작 자신을 지킬 힘은 없는 성녀. 그리고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할 절대 벽 너머에 있는 월드 랭킹 1위. 성녀가 누구의 편에 서며, 누구의 밑으로 들어갈 것인지가 뻔히 보이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어떤 의미로는 오히려 쉽게 예상할 수 없던 일이기도 했다. 세간의 중심에 서 있는 두 사람이 쉽게 함께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오직 그 두 사람만의 문제면 쉬운 얘기였지만, 성녀로 인해 그동안 엄청난 이득을 보며 세력을 키워 온 카톨릭 교인들과, 정부들의 알력 다툼은 개인의 힘이 강하다 한들 쉽사리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으니.
이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윤지호한테 허락받았어?”
딱 한 사람을 제외하고.
그 사람은 그런 모든 문제를 단번에 깡그리 짓밟을 수 있는, 자격과 힘을 가진 사람이었으니.
차지혁의 질문에 모두가 침을 꿀꺽 삼켰다.
나름의 중대사였다. 무명이, 성녀를 포용하기로 했다는 것은.
세상에 나올 의사가 없다는 것은 대충 알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부 손을 놓을 것인지 그래도 지켜는 봐 줄지, 의중을 알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될 테니.
긴장 어린 분위기 속에, 모두가 말자에게서 나올 답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런 이들의 긴장감은 눈곱만큼도 알아차리지 못한 말자가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당연하지. 아니면 내가 너한테 수속 밟는 걸 어떻게 알았겠어?”
그리고, 윤지호에게 허락도 안 받고 이런 짓을 할 정도로 내가 간이 커 보여?
윤지호가 무서워서라도 그런 짓은 못 한다며 당당하게 하는 소리에, 모두의 얼굴이 오묘해졌다. 그건 차지혁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리고 차지혁은 저게 어떤 마음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냥 예의상 한번 물어봤어.”
그럼 그렇지.
윤지호를 알게 되고, 또 함께하고 난 뒤로 평범한 상식은 이미 내려놓고 살았던 차지혁은 이럴 줄 알았다고 손을 내저었다. 윤지호가 굳이 무명이 아니었어도 윤지호의 사람들은 다 이랬다.
자신도 포함해서.
심지어 지금은 월랭 1위.
티끌만큼이라도 그녀에게 점수를 깎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절차 밟아 놓을게. 집은…….”
“없지. 호텔은 가 봤자 포위당하거나 납치당할 게 뻔하고.”
“……지금까지는 어디 있었는데?”
“카밀라랑.”
광전사랑 있는데 개소리를 대놓고 하러 올 간 큰 놈이 어딨어?
말자의 당당한 대답에, ‘역시 이 녀석은 윤지호 친구야.’라고 새삼 감탄하며 무난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럼 당분간 여기서 지내. 여기 방 많아. 넌 어디 안 쏘다니는 게 제일 좋으니.”
“나야 좋지. 그동안 못 잔 잠이나 쭉 몰아 자야겠다.”
“좋네.”
다 처리를 해놓겠다며, 차지혁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드디어 최대 안건이 끝나자 홀가분한 얼굴로 기지개를 펴다 그제야 또 하나 해야 할 일이 생각난 듯, 전말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 유지한 씨. 어디 있죠?”
“……저요?”
그에 일부러 병풍처럼 존재를 숨기고 있던 지한이 고개를 들었다.
“오. 거기 있었네. 잘 됐어요. 안 찾으러 다녀도 돼서.”
볼일도 빨리 끝나고 딱 좋다고 말자가 시원스럽게 말했다. 그런 말자의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지한이 얼빠진 얼굴로 말자를 향해 물었다.
“……저는 왜…….”
“윤지호가 전해 달래요.”
“…? 무엇을….”
본능적으로 무언가 불길함이 엄습했다.
하지만 애써 무시하며 묻는데, 역시나.
“일찍 돌아온다고.”
“……!!”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딱 들어맞기 마련이다.
* * *
“아. 뭘 입어야 하려나.”
전말자가 가고 난 뒤 옷장에 있는 그럴싸한 옷은 다 끄집어냈다. 물론 상대는 내가 명품을 입든, 거적을 입든 조금도 신경 안 쓸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인생은 기선제압이지 않겠는가.
하물며 그 사람은 내게도 무척이나 어려운 존재였다. 어떻게 나올지조차 예측할 수 없는 상대. 조금이라도 책잡혀선 안 되었다.
“성위님. 봐봐. 이쪽이 나아. 아님 이쪽이 나아?”
열성적으로 옷을 추린 뒤, 성위에게 묻자. 이런 내 진중한 마음을 느낀 것인지 성위님도 웬일로 장난은 쏙 빼고 진지하게 답을 해 주셨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나 빼고 모두 다 쓰레기’ 컨셉이면 왼쪽, 정갈하고 조숙한 숙녀를 원한다면 오른쪽으로 가는 게 좋겠다 말합니다.]
“오키. 왼쪽이네.”
뭐. 말은 썩 그렇게 진지한 것 같지는 않지만, 저래 보여도 내용은 내가 들어본 것 중 손에 꼽게 진지한 대답이었다.
“아. 유지한. 더럽게 일찍 오는 건 아니겠지?”
1분만 늦어도 세상 무너진 듯 지랄할 것 같아서 옷에 팔을 끼는 손이 분주했다.
뭐하러 귀찮게 이렇게까지 신경 쓰나, 하는 생각도 살짝 들었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내 눈에는 예쁜걸.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미 그 부분에서는 모든 걸 포기한 듯한 성위님이 아예 다른 방향의 질문을 해 왔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근데 대체 누굴 만나기에 이렇게 신경 쓰고, 너한테 빌빌대는 남친까지 떼어 놓고 가는 거냐고 묻습니다.]
나중에 귀찮을 게 뻔한데.
콕 집어서 지칭한 게 아니었음에도 그 ‘귀찮은 게’ 누군지 너무나 잘 알겠어서, 순간 양심이 찔려왔다.
사실 성위님 말대로 유지한을 안 떼어 놓아도 되긴 한다. 유지한이 만나서 좋을 게 없는 사람이어서, 그리고 나와 그 사람이 나눌 이야기를 유지한이 굳이 알지 않기를 바라서 그런 것이지.
아. 그게 그거인가.
어쨌든. 그래서 그냥 떼어 놓는 것을 택했다. 내가 만나러 갈 상대가 누군지 알면 아마 본인이 먼저 안 간다고 할 수도 있고.
유지한이 제 아비보다 더 꺼릴 존재일 터이니.
[뭐야. 대체 누군데.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 너무 안 알려주고 수수께끼같이 떡밥만 뿌리는 건 죄악이라며 답을 재촉합니다.]
뭐. 말 못 해 줄 건 아니기에, 순순히 입을 열었다.
“예언자.”
100% 스트레이트의 답은 아니었지만.
[……예언자?]
상상도 못 했던 대답이었는지 성위님이 시스템을 통해서가 아닌 진언으로 내게 물었다.
답지 않게 당황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인지 모를 행동이었다. 다만 그 실체를 알지 못했기에 성위님의 그런 모습에 눈을 흘기면서도 별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직은 말을 꺼낼 때가 아니었다.
“어. 아마 어쩌면, 지금 이 세계에, 그리고 ‘나’에 대해 잘 알 사람.”
결코 제 입으로는 말해 주지 않을 너이니, 다른 이를 직접 마주하는 수밖에 없지 않나.
뒤이어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또 도망간 모양이다.
이렇게 발을 빼고 도망가는 것은 그의 특기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어차피 말도 해 주지 않을 거,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이나 씨부리며 떽떽거리는 것보다 이편이 훨씬 좋기는 했다.
“좋아. 가 볼까.”
그렇게 줄행랑을 친 성위님을 뒤로 하고, 나는 공간을 열었다. 위치가 어딘지, 굳이 알아낼 필요도 없었다. 예언자라는 것을 증명하듯, 오늘 내가 올 것을 이미 알고 존재감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솨아아아―
“……드디어 보는군요.”
그렇게 나는, 비로소 ‘나’의 예언자와 마주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역시, ‘예언의 무녀’, 그 명성답네요.”
“…….”
그리고 그런 나의 예언자는…….
“만나서 영광입니다. 이화연.”
내 빌어먹을 애인의, 어머니기도 했다.
* * *
달칵―
이화연이 무심한 얼굴로 내 앞에 차를 내려놓았다. 수행인도 없는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물린 것인지, 그녀가 스스로 차를 내오는 모습은 재벌 회장의 사모님이 보일 법한 모습과 거리가 멀었다.
아. 정부이긴 한가. 물론 유재환 회장의.
“잘 마시겠습니다.”
세간에는 이화연이 유재환의 정부로 유지한이라는 사생아를 낳은 것을 알고 있지만, 실상은 전혀 반대였다.
이 관계의 주체는 200% 이화연이었다. 유재환이 이화연을 정부로 둔 것이 아닌, 이화연이 유재환을 정부로 둔 것이라는 사실을 진실을 알 만한 이들은 전부 알고 있었다.
예언의 무녀. 이화연.
대대로 예언가를 배출하는, 국내 유일이자 굴지의 예언가 가문에서 태어난 독녀.
이 가문은 대대로 한 명의 여자아이만 볼 수 있었고, 그 여자아이는 무조건 예언의 능력을 물려받아 태어났다. 간혹 남자아이가 태어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 가차 없이 죽였다. 그래야 다음을 노릴 수 있으니까.
자신들의 가문에 내려진 ‘예언’ 능력을 이을 수 있는 게 단 한 명의 여아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에게 강력한 예언의 능력을 잇지 못한 아이는 가치가 없었다.
그런 가문이다 보니 대대로 혼인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는 편이 맞았다.
보다 훌륭한 유전자를 배고, 그 아이를 이 가문의 주체로 세우기에 우리나라의 혼인이란 제도는 너무나 거추장스러웠으니까. 아이를 뺏을 정당한 여지를 주는 것이기도 했고, 상대 가문이 자신들을 어떻게 이용할지 알 수 없었기에, 그들은 그들이 주체가 되기 위해 혼인을 하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난다고 해도 아비가 누군지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 여럿과 관계를 가지기도 했다.
누구도 제 아이라 주장할 수 없게끔.
그런 가문의 마지막 독녀.
이화연은 태어날 때 예언을 받았다.
‘이 아이가 우리 가문의 마지막 무녀일 것이네. 그리고 이 아이가 낳은 자식은 세계를 구할 위대한 용사가 될 것이다.’
그 예언에 나라의 기득권들은 난리가 났다. 자신이 그 위대한 용사의 아비가 될 수 있으니까. 자신의 아들이 세계를 구할 용사라면 자신에게 떨어질 이득과 업적은, 그들이 군침을 흘리며 노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하물며 그들 역시 인간이다. 그 누가 자신의 씨가, 자신의 자식이, 보다 우월하고 대단해지길 바라는지 않겠는가.
그렇게, 이화연이 가임기가 되길 학수고대하며 기득권을 가진 수많은 상류 인사들이 자신의 아들을 이화연에게 밀어 넣었다. 단 한 번이라도 선택을 받는다면, 기적의 확률이라지만 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화연은 세계 최고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철벽을 보여 주었고, 아무도 그녀와 교접은커녕 손 한 번 스치지 못했다. 이화연 자체의 매력도 있었지만, 그녀가 가진 능력. 존재감. 고결함은 고작 잘난 아비 밑에서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자란, 병신 같은 꺽다리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친 철벽에 모두가 그녀를 종용했다.
‘무녀님. 어찌 모든 이들을 꺼려하십니까.’
‘인류를 위해 선택을 하셔야 합니다.’
‘아직 어린 나이이시지만 천천히, 미래를 다져야지요.’
세계를 구할 용사를 배출해야 하지 않겠냐고. 혹시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냐고. 인류를 위해서 그건 아니 될 일이라고.
하지만 그런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유유히 살던 이화연이 선택한 건 유재환이었다.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보고, 자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그녀의 개.
유재환은 정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바라지도 않는 모든 걸 안겨 주기 위해 미친 짓도 마다하지 않았고,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버림받는 것까지 전부 감당했다.
그리고 부모의 강력한 협박으로 정략결혼을 치르고 나서야, 비로소 그는 보답을 받을 수 있었다. 그에게는 세상 그 무엇보다 잔인한 보답이었다.
“이렇게 보니…….”
“……네?”
“정말 예쁘네요.”
내 아들이 반한 것도 이해가 가요.
덤덤한 그녀의 말에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별말도 아니었고, 유지한의 어머니이니 이 정도 입발림으로 하는 말은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저런 우아한 미녀에게 진심처럼 느껴지는 덤덤한 칭찬을 들으니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아. 이래서 미인 덕질하나 봐.’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님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지 마오. 컴백! 거기까지 가면 안 돼! 라고 처절하게 절규합니다.]
성위님이 난리 안 쳤으면 그대로 그 강을 조금 건널 뻔했다. 그만큼 눈앞에 있는 여인에게는 정말로, 사람 자체를 홀리는 매력이 있었다.
“그런 말씀을 들으니, 부끄럽네요.”
“전 사실을 말했을 뿐인걸요.”
단순히 미인이라거나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뿜는 존재감, 행동, 미모. 그 모든 것이 마치 그녀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했고, 누가 되었든 그녀에게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그녀만의 매력을 자아냈다.
소설에서 읽을 때는 솔직히 하도 찬양을 하기에, 그 정도인가? 하고 말았는데 실제로 보니 확실히 알겠다. 소설에서의 비유는 최대한 자제를 한 것이라는 것을.
아마 나라의 기득권들은, 그녀가 예언의 무녀라서 그런 것도 있었겠지만, 그녀라는 사람 자체에도 매료돼 그렇게 열을 올렸을 것이다.
단 한 사람. 유재환의 아버지. 창립회장. 유민환 회장만 제외하고.
미신이란 것을 전혀 믿지도, 믿고 싶지도 않았던 유민환 회장은, 예언자라는 존재 자체를 싫어했다. 몰론 그 힘은 인정했고, 이화연의 상황을 딱하게 여기기도 했지만, 그것과 자신의 가족으로 그녀를 인정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에게는 제 아들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필요했지, 세계를 구할 용사 손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게 아주 중대한 사유는 아니었겠지만, 이화연이 유재환에게 그런 잔인한 보답을 한 것에 지대한 공헌을 했을 것임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그리고 평생을 상처받으면서도 그녀 주변을 맴돌고 있는 유재환이.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존경스러웠다.
자신으로서는 정말 꿈에서도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리고, 조금. 심장에 묵직한 돌이 내려앉았다.
유지한도, 그럴까 봐. 제 아비를 똑 닮은 아들이, 그런 것까지 닮아. 똑같이 할까 봐.
어쩌면 그 불안감 때문에 이화연을 만나길 꺼렸던 걸지도 몰랐다.
“복잡한 눈을 하고 있군요.”
“……!”
“당연한가요. 지금쯤이면 전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자신이 알던 것과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을 테니.”
“…….”
“나에 대한 건 진작 알고 있었을 테고, 그 순간부터 이질감을 느꼈을 테니까요.”
전부 맞는 말이었다.
소설과 전개가 다르다는 이질감을 처음 느끼게 된 것은, 바로 눈앞에 있는 이 여자 때문이었다.
사건의 전개야 내 개입이 있고, 내 시선에서 보는 것이었기에 소설과 어느 정도 다른 것이 당연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알고 있던 설정 자체가 다르지는 않았기에 그냥 나 때문이구나, 라고만 생각했다.
계속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화연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않았더라면.
이 소설에서 내가 보고 들은 이들 중 ‘유일하게’ 소설의 설정과 전혀 다른 인물.
심지어 엑스트라도 아닌, 주인공의 어머니였다. 설정이 바뀌려야 바뀔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내가 아는 당신은, 유지한만 보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
그 순간, 처음으로. 뭔가 이상하단 것을 깨달았다.
“유재환에게 주지 못한 모든 사랑을 쏟고, 아들을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자신을 굽히더라도 아들만 잘 자란다면 상관없을… 그런 어머니셨습니다.”
“…….”
“하지만 제가 들은 당신은, 전혀 다른 사람이더군요.”
오로지 세계를 구할 용사만을 낳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듯, 낳고 제대로 한번 돌보지도 않았던 어머니.
그런 그녀에게 목을 맨 유재환이 그녀보다 무정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유지한을 키운 건 유재환이었다. 자신의 아들을 사랑하고, 아꼈다. 이미 다른 자식들도 있지만, 그에게 자식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럼에도 유지한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은.
“대체 왜 유재환에게까지 자식에게 애정을 보이지 말라고 한 것인지, 처음에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이해 못 하는 것은 여전하지만.”
“…….”
눈앞에 있는 이 여자가, 그렇게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는 한, 소설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 내용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당신은 내게 들려줄 이야기가 많지 않습니까. 이화연.”
그녀에게 들어야 할 말이 있었다.
“……역시나군요.”
“……?”
“해야 할 말을 확실히 한다는 면에서, 내 아들과 정 반대에요.”
그 아이가 그렇게 말을 잘 하진 않잖아요?
라고 덤덤하게 말하는 말이 너무나 심금에 울려 순간 소름이 돋았다.
잘 보지도 않는 아들이면서 왜 이렇게 잘 알지?!
진짜 예언가가 다르긴 달랐다. 물론 그녀의 능력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막상 폐부로 느끼니 감회가 남달랐다.
그렇게 잘 아는 아들이면서, 왜 제 아들에게 그렇게 행동한 거지?
그런 매정함에 제 아들이 일일이 상처받진 않지만, 무덤덤하게 곪아 갈 놈이라는 것을 이렇게나 잘 알고 있으면서.
소설에서와 정반대 상황이었기에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세계에서 이화연은 유지한에게 저가 가진 세상 모든 애정을 다 쏟아 주던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그곳에서의 그녀는 유지한의 짐이었다.
혹시 그걸 알아서 그랬던 것일까?
예언자니, 내가 알고 있던 미래를 알고, 제 아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일부러 유재환까지 시켜가며 그렇게 굴었던 것일까.
“아드님이 말을 잘 못하긴 하죠. 그래도 나름대로 잘 컸답니다.”
당신의 보살핌 없이도.
말하면서도 조금 갈등했다.
이게 정답일까?
마치 진짜 감정을 거세당하기라도 한 듯, 얼굴에서 그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는 여자였기에 내 모든 행동이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네요. 당신이 말한다면 분명 그런 것일 테니까. 정말 열심히 지킨 보람이 있네요.”
“……?”
“하하. 말하는 것과 얼굴이 전혀 달라서, 거짓말인 거 같나요?”
알긴 아시는군요.
열심히 지킨 보람이 있다고 말하면서 당장 내다 버려도 시원치 않은 얼굴을 하는데 세상 누가 그 말을 믿을까.
누가 봐도 100% 입에 발린 말이었다. 그냥 막 되는 대로 내뱉는 소리.
바로 그 말에 태클을 걸지 않은 것은, 그럼에도 그녀에게서는 조금의 비꼼도, 아부도 느껴지지 않았던 탓이었다. 저런 얼굴로, 저따위 말을 하면 백퍼 싸우자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내게 그것은 매우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노력했답니다.”
“…….”
“조금 내 얘기를 해 볼까요.”
그런 나의 마음을 읽은 듯, 그녀가 드디어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옛날에,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답니다.”
* * *
“사랑스러운 내 딸. 내 자랑. 내 보물.”
그건 어머니의 입버릇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쭉 들어온 말.
어릴 때 자신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외모가 뛰어나다는 것은 머리가 크기 전에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자신을 보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말해줬으니까. 어딜 가든 자신은 주목을 받았고, 평범한 이들보다 넘치는 대우를 받았다.
거기에 예지의 명가인 이가. 그러니까, 이씨 가문의 유일한 독녀.
모두가 내 앞에서 예의를 갖추었다. 다른 형제가 있는 것도, 이가의 특성상 오로지 직계만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딱히 친척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온 집안의 사랑과 시선을 독차지했다.
어린 나이에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이가(李家)의 무녀는 14세 전후에 각성의 징조가 나타난단다. 그러면 선대 무녀가 다음 대라는 것을 신께 증명하는 의식을 치른다. 그러면 이제 후계가 비로소 확정되는 것이지.”
학교도 가지 않았다. 학교라는 곳을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다음 대 예언의 무녀로 낙인찍힌 내게 다른 길은 없었으니까. 배우는 모든 것은 할머니가 가르쳐 주는 예언과, 무녀로서 행해야 할 일들뿐.
그래도 상관없었다. 모두가 내게 상냥했고, 부족한 것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대부분의 우리 집안 사람들과는 다르게, 아버지도 있었다.
“어이구. 우리 화연이. 왜 그런 얼굴이야?”
“……배고파.”
“아고. 수업 때 졸았나 보구나. 할머니가 간식을 뺏으신 거 보니.”
“아빠. 나 초콜릿.”
“……요놈의 딸내미가 이 아빠를 곤란하게 만드는 재주가 넘쳐.”
“까르륵―!”
엄마를 사랑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름까지 버려가며 함께한 자상하고 맹목적인 아버지가.
완벽한 세상이었다.
내가 14살이 되던 해, 각성으로 인해 후계로서 예언가의 자리를 계승 받기 전까지.
“커헉―!!”
“……!!”
처음 보는 새빨간 피의 웅덩이.
태어나서 처음 마주한 잔인하고 아름답지 않은 광경.
심지어 그 피를 토해낸 이가 엄마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어…… 엄마…….”
손이 덜덜 떨렸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믿기지 않았다. 그런 나를, 할머니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서운 얼굴로 잡아끌었다.
“어서 받거라.”
“어? 하지만…….”
“계승을 마쳐야 한다. 어서!”
하지만, 엄마가 피를 토하잖아.
14살이 될 때까지 좋은 것만 보고 자란 소녀에게는 그따위 계승보다 엄마가 소중했다. 덜덜 떠는 내 앞에 엄마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 손을 내밀었다.
“받으렴.”
하얀 동백꽃.
예언의 무녀를 계승했다는 증표였다. 전대의 힘을 농축시켜 만든 꽃을 받음으로써 전대의 힘까지 흡수해, 보다 강한 무녀가 된다.
“……하…… 하지만…….”
각성 전이었다면 엄마가 받으라고 했으니 뭣 모르고 서둘러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각성을 했으니, 진실을 보고 말았다.
이 동백꽃은 그녀의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강력한 자신과 다르게, 턱걸이 수준으로 간신히 존재하기만 하는 그녀가, 계승을 위해 필사적을 짜낸 힘이었다. 고작 계승을 위한 꽃 하나를 만드는 것도 버거워 할 정도로 그녀의 능력은 너무나 약했다. 이 능력이 빠져나가면 그녀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능력의 대가가 생명이었던 그녀였기에 더더욱.
아무도 말해 주지 않은 진실이었다.
아무도 어린 내게, 그런 것은 조금도 말해 주지 않았다. 그럴 만한 ‘가치’가 없었기에.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단다. 엄마는 괜찮아. 그러니까 화연아. 받으렴.”
“…….”
“사랑하는 내 딸.”
거짓말.
당신이 정말로 날 사랑한다면 이럴 수 있을 리가 없어.
이렇게 내 앞에서, 죽을 수 있을 리가 없어.
그 순간. 세상 물정을 모르던 소녀는 진실을 알았다. 엄마가 늘 내게 해 주었던 사랑한다는 말은, 그녀의 마지막 양심이자, 동정이었다. 이 짐을 나에게 넘길 날이 오리라는 것을 알았기에.
“어서 받아―!”
할머니의 호통 속에, 하얀 동백꽃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허망한 얼굴로 손을 들었다. 손에 동백꽃이 제자리를 찾은 듯 안착되며, 꽃은 그대로 내게 흡수되었다.
“됐어―! 이제 됐다고! 우리의 숙원을……! 비록 내 딸은 비루하게 태어났지만 다음 대를 위한 초석이라 해 못 볼 꼴들을 그간 견딘 보람이 있구나―!”
‘……닥쳐. 제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욕보이지 마.
듣기 싫은 진실 따위. 들려주지 마.
그렇게 소녀는 어른이 되었다.
* * *
힘을 각성하자마자 내가 매일 했던 일은, 엄마의 과거와 진실을 보는 것이었다.
예언은 과거와 미래에서 답을 찾는 것. 엄마가 물려준 힘도 있었기에 과거를 뒤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덕분에 전부 알게 되었다.
엄마가 태어났을 때 할머니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고대했던 딸이 태어났으나, 예언의 눈으로 본 그녀의 눈에는 이미 보였던 것이다.
자신의 딸이 무척이나 보잘것없는 힘을 타고났다는 것을.
할머니는 고민했다. 죽이고 또 다른 딸을 낳아야 하나.
하지만 그녀에게는 남은 시간이 없었다. 이미 몇 번의 실패를 겪었고, 또 앞으로 몇 번이나 될지 모를 출산을 겪기엔, 이미 그녀의 몸은 한계였다. 다시 딸이 태어난다는 보장도 없었고 말이다.
고민하던 그녀의 눈에, 해답이 보였다. 자신의 딸에게 힘이 없는 이유는, 다음 대를 위한 초석이기 때문이었다. 제 딸이 밸 손녀를 위해 운명이 일부러 그렇게 설계한 것이다.
강력한 선대가 있다는 것이 후대에게는 득이 되기도 했지만, 독이 될 수도 있었으니.
그 설계를 깨닫고 화연의 할머니는 희열에 빠졌다.
간혹 이런 경우가 있었다.
다음 대를 위한 초석. 그 경우, 바로 뒷세대에는 반드시 엄청난 무녀가 태어났다.
그 미래를 보고 난 뒤로 할머니는 엄마를 정성스럽게 키웠다. 힘은 가뭄에 단비라고 해도 좋을 만큼 약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녀로 교육시키고, 혹독한 훈련을 강행했다.
후대를 계승해야 했으니까. 그런 할머니 밑에서 자란 내 어머니는 당연히 말수도 적어지고, 우울하며, 순종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자라, 딱 한 번 반항을 했다. 돈만 가진 채, 세상을 사는 법을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가 감옥과도 같던 집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운명처럼 한 남자를 만났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였다.
남자는 자상하고 맹목적이고, 헌신적이었으며, 여자는 그런 남자를 너무나 사랑했다. 그녀는 그에게 세상을 사는 법을 배우며 비로소 자신이 살아있다는 기분을 느꼈으며, 이대로라면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꿈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까닭은, 엄마가 나를 임신하고. 내가 태에 자리를 잡은 순간 느껴진 강력한 힘에 엄마가 나를 가졌다는 것부터 엄마가 어디 있는지까지를 할머니가 전부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자신이 임신한 줄도 모르고 있던 엄마는 할머니의 앞으로 끌려왔다. 새벽에 잠옷 차림으로, 나를 밴 채 가축과도 다름없이 끌려온 엄마를 보며 할머니는 환호했다.
‘드디어 네가 쓸모를 다하는구나―!’
개처럼 끌려와 온몸이 흙투성이였던 데다 반항으로 피까지 흘리고 있던 딸을 보며 환호하던 그 모습이란.
꿈에서도 보기 역한 모습이었다.
그대로 엄마는 나를 낳을 때까지 감금당했고, 아버지는 갑자기 사라진 엄마를 미친 듯이 찾아다니다 이곳까지 다다랐다.
그 뒤는 익숙한 이야기였다. 아버지는 모든 걸 버리고 이곳에 있는 것을 택했다. 할머니는 마땅치 않아 했지만, 그가 없다면 엄마가 아이를 낳기도 전에 숨이 넘어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마지못해 승인했다.
내가 그들의 재앙이었다.
소박하고, 바라는 것도 없이, 그저 서로가 함께하며 행복을 느끼는 부부에게 나는 너무나 큰 짐이었다.
내가 그들을 전부 망쳤다.
모든 사실을 안 뒤로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런 나를 보며 아버지는 웃었다.
“네 엄마가 늘 얘기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너를 살리기 위해서, 너를 위해서 네 엄마는 망설이지 않았어.”
“…….”
“자기보다 네가, 더 불행한 운명을 타고났음을 알고 있었으니까. 네 할머니가 그렇게 무시했지만 그래도 명색이 예언의 무녀였단다. 딸의 운명 정도도 못 볼까.”
봤으면 도망이라도 가지.
참 머저리 같은 부부였다.
“앞으로 세상이 너를 이용하려고 할 거야. 화연아. 그 누구도 믿으면 안 돼. 할머니조차도. 네가 조금이라도 방심하는 순간, 네 모든 것을 송두리째 앗아가려고 할 거야.”
“…….”
“자유롭게 살렴. 내 딸. 엄마랑 아빠는 못 했지만 너는 그럴 수 있는 힘이 있어. 뭐하나 부족한 게 없는 내 딸인데,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지.”
“…….”
아니. 정정한다.
정말 빌어먹을 부부였다.
“아빠 말 잘 알아들었지?”
“……응.”
“착하다. 내 딸.”
“…….”
“사랑해. 예쁜 ‘우리’ 딸.”
거짓말쟁이들.
입으로는 사랑한다고 말하며, 너무나 쉽게 나를 두고 떠나간다.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그토록 잔인할 수가 있는 것인지.
그 말을 끝으로, 아버지는 조용하게 잠에 들며 숨을 거두었다.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이.
나를 남겨 두었으면서.
* * *
“나를 진심으로 위해 줄 두 사람을 잃었을 때, 나는 남들보다 무척 어렸지만 어른이 되었지요.”
“…….”
“세상이 내게 손을 뻗었던 것도 그때부터였구요.”
나이 14살. 초경을 시작할 나이.
아버지까지 그렇게 가버린 충격이었던 건지, 아니면 그저 예정된 일이었는지. 아버지의 임종을 지킨 직후 바로 터져 버렸다.
아직도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한다. 내 다리 사이로 흐르는 피에 넋이 나가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고 쓰러질 것만 같았는데 그걸 보며 눈을 빛내는 기괴한 눈들을.
그중 으뜸은 단연 할머니였다. 초경을 겪은 소녀가 으레 그러듯 미열과 함께 낯선 고통에 침대에서 몸부림치는데 할머니가 기뻐하며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 초경의 아픔을 딛고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내게 쏟아졌던 것은, 수많은 선물꾸러미였다. 대체 누가 보냈는지 알 수도 없을 정도로 방대한 양.
이미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소녀는 딱히 그런 선물들을 보고 감동하지 않았다. 그 선물이 궁금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가장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으로 오히려 대체 무슨 꿍꿍이지, 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 속셈을 알게 된 것은 방대한 선물꾸러미가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 너무…… 아, 소개가 먼저군요. 제 이름은 하동우라고 합니다.”
거의 금남의 구역이라고 할 수 있는 이가에 들어온, 젊고 훤칠한 사내.
그리고 나를 보며 정신이 나간 듯 넋을 놓으며 횡설수설 제 소개를 하는 남자를 보며, 나는 곧바로 그 빌어먹을 선물꾸러미의 진의를 깨달을 수 있었다.
하. 고작 이제 초경을 시작한 어린애한테 벌써 짝짓기를 하라고 이렇게 선을 보이는 것인가.
단순히 사내의 부모의 뜻만으로는 이곳에 들어올 수 없었다. 들어오려면, 이 집안에 결계를 친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아니면 그 결계를 가볍게 무시할 정도의 실력자거나.
기록물들에는 2010년에 게이트가 열렸다고 되어 있지만, 그건 정식으로 게이트가 출현했을 때를 말하는 것이고, 자잘한 게이트를 비롯한 이변은 이미 그 훨씬 이전부터 발견되고 있었다. 그랬기에 지금의 각성자처럼 강하지도, 수가 많지도 않았지만, 그때도 게이트의 파동으로 인한 마력 때문에 이능이 발현된 실력자는 여럿 있었다.
지금은 대부분 고인이 된, 시스템으로 각성한 1세대 각성자들의 스승들이 그런 인물들이었다.
“……저…… 그……. 만나서…… 정말 영광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남자는 그 정도의 실력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빌어먹을 노친네가.
“……저…… 저기―!”
“돌아가시지요. 전 나눌 말이 없으니.”
서슬 퍼런 눈으로 그 남자를 돌려보내자, 그런 나를 할머니는 고요히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전쟁의 시작이었다.
엄마에게 계승을 받은 이후, 힘이 완벽히 각성함과 동시에 할머니는 이미 아득히 뛰어넘었기에, 할머니를 짓밟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집안의 최고 어른이자, 지금껏 이가를 책임져 오며 정재계를 비롯해 사회 각계각층에 손을 뻗쳐 있었기에 함부로 끌어내리지 못했을 뿐이다.
정재계의 인물들은 내게 얻어 낼 것이 있었기에 내가 너무 많은 힘을 가지지 않길 원했다. 그럼에도 나는 차곡차곡 힘을 길러갔으며, 그 후에도 찾아오는 모든 이들을 거절하며…… 그렇게 나이를 먹었다.
“이제 무녀님의 나이가 성인이 되셨습니다.”
“이제는 어서 짝을 고르셔야지요.”
“짝을 고르시지 않더라도 후계를 준비하셔야 합니다.”
성인이 되고, 저런 같잖은 압박들이 쉴 새 없이 들어왔지만, 전부 무시했다.
어차피 세계를 구할 용사가 될 후계는 내가 직접 선택해, 내가 직접 힘을 물려줘야 할 만큼 선택받은 핏줄이어야 한다.
강제한다고 한들 무녀는 능력의 특성상, 강력하게 거부하면 상대가 무슨 짓을 해도 임신이 되지 않았고, 다음 대에 가장 강력한 의무를 타고난 나는 당연히 누구보다도 그 능력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기에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다.
다들 발을 동동 굴리며, 뭐라도 해야 하지 않냐고 조급해하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지만, 그들의 바람을 이루어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세계를 구할 용사가 다 무슨 소용인가. 설령 내가 아이를 갖는다 해도, 내 아이만큼은 그런 고된 운명 속에서 살아가지 않길 바랐다.
이런 빌어먹을 운명에 휘둘리는 사람은 나 하나면 족했다. 내 핏줄에게까지 이런 걸 물려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서슬 퍼런 할머니의 시선을 보면 무언가 슬슬 저지를 것도 같았지만, 이미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그녀에게는 더 이상 무슨 일을 저지를 힘도 남아 있지 않았기에 그냥 내버려 두었다.
모두가 바라지 않는 일이겠지만, 나는 그렇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살다가 오래지 않아 세상에서 스러질 생각이었다. 그런 내 생각을 완전히 바꾼 건, 할머니의 저주였는지. 아니면 정말로 운명이라는 것이 있는 건지…….
“고작 이런 애가 위대한 용사를 탄생시킬 최강의 무녀라고.”
운명처럼 나타난 단 하나의 이변 때문이었다.
* * *
“다짜고짜 나타나서 이게 무슨 소리신지……?”
내가 가문 바깥에서 어찌 불리고 생각되고 있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놓고 이렇게 입으로 듣는 건 처음이었다.
뭐야. 이 또라이는?
여기까지 강제로 끌려오기라도 한 건지, 새가 집이라도 지은 것처럼 산발이 된 머리에 여기저기 전투의 흔적이 남은 옷을 입은 채 들어온 남자는 있는 대로 얼굴을 구기며 헛소리부터 날렸다.
너무 어이가 없고, 태어나 처음 받는 취급에 황당해, 나도 몰래 늘 유지하던 가면을 쓰는 걸 잊어버리고 내 얼굴을 날것 그대로 보이고 말았다. 말을 한 뒤에 아차 했지만, 제가 뭔 말을 했는지는 알고 있는 듯 남자는 내 말을 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래도 성깔은 있군.”
“……허.”
대체 이놈은 무엇인가.
어느 시대나 부모가 깔아 놓은 길대로 살고 싶지 않은 이들도 있었기에 내게 상당한 반감을 품고 다가오는 남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빌어먹을 운명 때문인 건지, 아니면 그냥 태생적으로 그런 것인지, 내게 반감을 품고 다가온 이들도 나를 보면 그대로 모든 반감을 허물어 버리고는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나를 보고도 여전히 불쾌한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런 남자는 처음이었기에 더욱 황당하고, 난생처음 누군가에게 호기심이라는 것이 생겼다.
“여긴 왜 오신 거죠?”
“납치당해서 끌려왔다. 집안 어른들에게. 우리 집은 아버지가 왕이라고 해도 모든 게 왕 뜻대로 돌아가는 데가 아니거든.”
아. 그 말에 그가 누군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집안사람인지는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정재계인들 중 유일하게 나를 욕심내지 않은 자.
오히려 나를 불쌍하게 여기고 동정하지만, 그와 별개로 자식들을 나와 엮고 싶어 하지 않는 유일한 자.
그는, 그 유일한 사람의 아들이었다.
재성 그룹의 창업자. 유민환.
“유 회장님 뜻을 따르지 않는 종자들이 없을 수는 없지요.”
“그래서, 덕분에 여기 앉아 있는 거지.”
획―!
“……!”
꿀꺽― 탁―!
“그러니, 말 좀 잘해 주지. 네가 내가 더럽게 마음에 안 들어서 쫓아냈다고.”
그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동안 내 이야기를 종종 들었던 건지 다른 사람들이 내게 시끄럽게 캐물어댈 때마다 내가 마지못해 하곤 했던 거절의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심지어는 마시던 차까지 가로채 마시는 무례를 저질러 가며 그는 내게서 어떠한 확신을 받고 싶어 했다.
자신에게 역시 같은 말을 해 줄 거라는 확신을.
그때 알 수 있었다. 어딘가 어색한 지금 이 행동들 전부, 그가 일부러 꾸며낸 것이라는 사실을.
내 ‘눈’으로 보았을 때, 그는 태생적으로 감정이 부족한 사람은 맞았지만 이렇게 처음 보는 상대에게까지 대놓고 무례하게 굴 정도로 무뢰한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난생처음으로 나답지 않은 마음이 생겨났다. 그가 바라는 대로, 순순히 들어주기 싫다는. 내가 생각해도 멍청하고 미쳤다고 생각할 마음이.
하지만 그 순간은 그 마음이 온몸을 지배했다.
“그래요.”
“말이 통해서 다행이……!”
휙―!
“……!!”
촉―
처음 맞닿아 보는 입술은 생각보다 더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몽실몽실한 것이었다. 그가 당황한 것까지 그대로 느껴져 더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내 날 것의 감정 그대로 벌여 본 첫 일탈이어서 그랬던 건지도 몰랐다.
“가서 전해요. 다른 놈들과는 달리 입을 맞추는 쾌거까지는 이뤘는데, 그게 끝인 거 같다며 쫓겨났다고.”
“……너, 너―!”
“뭐 해요? 안 나가고?”
하고도 내가 진짜 돌았나, 하며 속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새빨개진 얼굴로 삿대질을 하며 한 손으로는 입을 가리고 있는 꼴이 너무나 재밌어,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것이 내 인생을 뒤바꿀 첫 만남이었다.
* * *
“……또예요?”
“왜.”
“아니. 아. 어딜 누워요?”
“너도 멋대로 훔치잖아.”
“……이게 진짜.”
그 뒤로 그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지치지도 않고 나를 찾아왔다.
심지어 가문의 사람들을 전부 따돌리고, 몰래.
와서 무얼 대단한 것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커피를 뺏어 마시거나, 책을 읽고 있으면 내 다리를 베고 누워 잠을 자 버리거나, 내가 자고 있을 때 옆에서 따라 잠을 자고 있다던가.
그가 올 때마다 하는 행동들은 전부 내가 겪어 보지 못한 일들투성이였다. 당할 때마다 너무나 황당하고, 이 새끼는 뭐지? 싶었지만 정말 우습게도 그가 오는 것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도록, 은신 결계를 칠 정도였다.
아무도 그가 이곳에 오는 것을 모르도록.
지금 생각해 보건대,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나날이었던 거 같다. 나에게도, 그에게도.
우습게도 그 웃기지도 않은 관계를 끝내게 된 건, 어느 날 예고 없이 나를 찾아온 이 때문이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황스럽네요.”
“그래. 그건 내 잘못이지. 경우 없이 찾아와서 미안하게 됐네.”
“아닙니다. 앉으시죠. 유민환 어르신.”
쪼로록―
정갈하게 다도를 지키며 차를 내리면서도 등 뒤로는 식은땀이 흘렀다.
머리가 열심히 굴러갔다.
상대는 나를 아는 이들 중에서는 나를 가장 꺼려하고 불편해할 인물. 단 한 번 나를 보고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나를 찾아왔단 건, 무언가 이유가 있다는 것. 그것도 저 무심한 사람을 움직일 분명한 이유가.
이제 와서 나를 원한다, 하는 것은 아닐 터이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니 손이 떨릴 수밖에.
상대에게 조금의 틈조차 보이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 사람을 향한 내 마음을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으며, 어느새 그 사람은 그 누구에게도 뺏기고 싶지 않은 단 한 사람이 되었으니까.
애써 표정은 고고하게 유지했지만, 그래도 떨리는 손끝까지는 어떻게 감출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조금의 틈도 가차 없이 간파해 낼 수 있는 남자는 역시나 조금의 배려도 없이 바로 내가 보인 실수를 알아챘다.
“……이미 내가 어떤 말을 하려고 왔는지 알고 있는 눈치군.”
그런 그의 앞에서 거짓말은 소용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당신이 저를 찾아올 일 자체가 없으시지 않습니까.”
새삼 마음이 바뀐 것이 아니고서는. 하지만 만약 이렇게 쉽게 바뀔 마음이라면 진작 바뀌었어야 했다.
괜히 애꿎은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그래. 그동안이 이상했던 것이었다. 애초부터 말이 안 되는 일이었고, 감히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기적같이 잠깐, 일어난 것이었다.
기적은 언제나 한순간이기에, 이제 사라질 때가 온 것뿐이겠지.
그 당연한 사실을 무녀이니만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훗날의 나를 위해서도, 이제 그만 꿈에서 깨 돌아가는 것이 맞다는 걸 알고 있건만, 왜 이리 가슴이 먹먹한 것인지. 뭘 제대로 먹은 기억도 없는데 속이 얹힌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나를 고요히 지켜보기만 하던 사내는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세월을 살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차분한 눈으로 찻잔을 내려놓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처음은 물론 우리 쪽의 실수였지. 머저리 같다, 머저리 같다,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설마 그 정도로 어리석을 줄은 몰랐네. 설마 고작 그딴 것에 욕심을 부릴 줄이야.”
불세출의 영웅을 우리 집안에!
그건 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이들이, 품은 욕심이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이 사랑하는 이가 연관되어 있지 않을 때나 가지는 욕심이기도 했다.
정말 자식을 사랑한다면, 자식이 그런 험한 길을 가길 바랄 수 없으니까.
그런 용사가 집안에서 나면, 사실 가장 떡고물을 집어먹기 좋은 건 그 집안이었다. 그렇기에 집안의 다른 인물들이 내게 유재환을 억지로 밀어 넣은 것이다. 자신의 아들들과 방계의 자식들을 모두 포함해 그들 중 유재환보다 나은 이는 없었을 터이니.
세상에 태어나기부터 잘나게 태어나고, 완벽하게 태어난 아들.
저 무심한 남자가 겉으로는 차갑기 짝이 없는 얼굴을 하지만, 제 아들을, 그것도 늘그막에 낳은 막내아들을 얼마나 총애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차기 회장은 장남이 아닌 막내라고 모두가 확신하는 이유는 유재환의 우수함도 있었지만, 바로 저 유 회장의 총애 때문이었다.
“당신이 그럴 일은 없으시죠. 귀한 아드님께, 그런 흙탕물을 끼얹으실 생각은 추호도 없으셨을 테니까요. 알고 있습니다.”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가 나라는 인간 자체를 비난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내 운명만큼은 그도 비난했다. 그랬기에 나는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눈앞에 있는 이 어른의 앞에 서면 한없이 작아지고는 했다.
“……너는 며느리로 맞기 손색이 없는 아이지. 재색이며, 인맥이며, 능력까지. 뭐 하나 탓할 게 없는 아이다. 재환이가 너를 선택했을 때, 아무 말 없이 허락할 수 있을 만큼. 그 빌어먹을 운명만 아니었다면.”
“…….”
“네 말대로다. 나는 내 아이가 그런 흙탕물 속으로 뛰어드는 걸 바라지 않는다. 이미 너라는 총명하고 불쌍한 아이가 있는 것만으로도 차고 넘쳐. 설마 내 아이가 네게 빠져들 줄은 생각도 못했지만,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기도 하지. 너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매력적인 사람이니까.”
“…….”
“해서, 네게 간곡히 부탁한다. 염치가 없다는 것 알고 있다. 더없이 네게 잔인하단 것도. 네게 이렇게 모질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너보다 내 자식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는 아비를 이해해 주길 바라네.”
……세상을 호령하는 굴지의 재벌가 회장도, 결국 한 아이의 아버지라는 것을 증명하듯. 기꺼이 제 아들을 위해 고개를 숙였다.
나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고, 연장자이니 명령을 했어도 됐다. 호통을 쳐도 되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분노와 명령보다, 간곡한 부탁을 택했다.
내 잘못이 아님을 분명히 알지만 내게 상처 줄 수밖에 없어 미안하다고. 그렇지만, 그래도, 내 아들을 위해 나는 그래야만 하겠다는 간곡하고도 단호한 부탁.
고개를 숙인 그를 보며,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울 수 없어 웃었다.
당신은 내게 명령을 했어야 한다.
당장 내 아들에게서 꺼지라고 호통이라도 쳤어야 했다.
“저한테 고개를 숙이지 마세요.”
“…….”
“저한테 고개를 숙여 부탁까지 할 일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차라리 그랬다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동안이 이상했던 거지요.”
“…….”
“……이제, 원래대로 돌아가는 게 당연한 것을요.”
이렇게 비참한 기분이 들지 않았을 텐데.
“……미안하네.”
“……사과할 일이 아니십니다.”
사과하지도 마.
내가 더 비참해지니까.
그 순간, 처음으로 조금 후회를 했다.
결국, 당신을 마음에 담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지금 내가 이리 비참해지지도 않았을 텐데.
하지만, 후회는 이미 너무나 늦었고. 결국 나는 당신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다는, 그런 사실이 나를 가장 비참하게 했다.
* * *
“……이화연. 너 뭐야.”
정말 쓸데없이 귀신같이 감이 좋았다. 대체 왜, 어느새 이렇게 나를 잘 읽을 수 있게 된 건지.
너무나 쉽게 곁을 내어 주었기 때문이었을까. 그토록 뛰어난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서슴없이 내 곁을 침범하는 당신을 그대로 내버려 둔 내 실책이었다. 그러니, 새삼 이런 것에 가슴이 얹힌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거나, 상처받아서는 안 되었다.
“오늘은 나랑 바둑이나 한판 둬요.”
차 같은 걸 마시면, 내 비루하고도 비참한 마음이 다 드러날 것 같아서.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그걸 눈치채지 못할 리 없어서.
일부러 바둑을 택했다.
상대도 나도, 머리를 쓰는 두뇌 게임.
그래도 차를 마시는 것보다 속내를 더 들키지 않을 것 같아서.
아마, 오늘 당신을 상처입힐 나는.
도저히 맨정신으로 당신을 아프게 할 자신이 없었고, 그렇다고 당신을 정면으로 똑바로 마주할 자신도 없어… 이런 비겁한 방식을 선택했다.
매도당하고, 비난받아도 할 말 없는 선택이었다.
그가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 내 앞에 앉아 돌을 집었다.
탁―
“…….”
탁―
빈 바둑판에 돌이 하나둘씩 채워져 갔다. 흰 돌과 검은 돌이 판의 절반 정도를 채울 때까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깊은 침묵이 무거웠고, 앞으로 내가 꺼낼 말들이 있었기에 더욱 가시방석이었지만 그래도 말을 하는 것보다 안 하는 것이 편했다.
내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아도 되니까.
아직은……. 그 말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이제 말해.”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먼저 내게 다가왔다. 당연히 들려올 말이었지만, 막상 말을 들으니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토록 쉬웠던, 내가 먼저 끊어내고 모진 말을 쏟아내는 일이 너무나 무서워 단 1초라도 미루고 싶었나 보다.
그런 나 자신의 속내를 그 말을 듣는 순간에서야 알다니. 너무 멍청하고 어리석어 실소가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나름 열심히 쓴 가면에 실금이 갔다.
“뭐야. 알고 온 것처럼 말하네?”
“아니. 몰라.”
“거짓말. 당황조차 안 했으면서.”
마치 내가 할 말을 알고 있다는 듯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고고하게 바둑알을 쥐고 있는 그를 보며 조금 원망을 담아 말했다. 조금 흐트러진 얼굴을 보여 주었다면, 그랬더라면…….
나 역시 소리치고, 악을 쓰며 매달려 보기라도 했을 텐데.
다행스러우면서 조금,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런 조금의 틈도 보여 주지 않는 당신이.
그러나 그런 나는 또 보이지도 않는 건지, 그는 전혀 믿을 수가 없는 얼굴로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당황했어. 오늘 네 얼굴 보자마자.”
“그런 것치고는 처음부터 무슨 일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달려왔잖아.”
그 말에, 그가 갑자기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소리를 들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소리야.”
“……뭐?”
“내가 안 그런 적이 어디 있어.”
“……!!”
갑자기 생각났다.
늘 불쑥불쑥 나타난 그는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갑자기 나타났을 때는 항상 조금 숨에 차 있었다는 것이.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이마에 조금, 식은땀이 맺혀 있던 것이.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지금까지 내가 이 자리에 앉기 전까지 했던 모든 다짐과 억지로 간신히 만들어 낸 가면은 모두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툭―
“……이화연.”
“네가 그렇게까지 해서 문제야. 네가 그러지 않았다면 내가 이렇게 될 필요도 없을 텐데. 진심으로 이 순간만큼 내가 예언의 무녀인 것이 싫었던 적이 없어.”
“…….”
“다 너 때문이야.”
전부 당신 때문이었다. 당신이 조금만 덜, 날 사랑했더라면. 조금만 덜, 내게 그 사랑을 표현해 주지 않았다면.
나는 분명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 조금의 차이로도 나는 당신을 단호하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넌 그런 나를 알 듯, 그 고고한 자존심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날 사랑해 주었다.
그래서, 당신이 너무나 미웠다.
“당신의 여자로 살 수 없는데, 그래서는 안 되는데……. 설령 된다고 해도 당신만 불행하게 할 뿐인데…… 당신의 여자로 살고 싶어지잖아.”
“……너…….”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네 곁에만 있고 싶어지잖아.”
내가 당신을 선택하면 당신이 불행해질 이유가 많아도 너무나 많았다.
다른 이들에게 내 선택은 축복이자, 금광과도 같은 것이었지만, 당신에게 내 선택은 재앙이었다.
나라는 짐을 네게 지우고. 나라는 존재가 네게 불행이 됨으로써, 어느 정도로 너를 괴롭게 할지를 알고 있었기에, 다는 죽었다 깨어나도 당신을 선택할 자신이 없었다.
“가 버려. 내 머리카락 한 올도 마주칠 생각하지 말고. 인생에서 한 번 재수 없는 일 당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뒤돌아 가.”
“…….”
“내가 당신을 정말 놓아줄 수 없게 되기도 전에.”
그래서, 나라는 사람이 한없이 비참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당신을 버릴 것이다. 내가 비참해지는 것보다, 나로 인해 불행해질 당신을 보는 게 더 힘드니까.
눈물이 줄줄 흐르는 모양새가 아무리 나라도 예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눈에 비친 나는 여전히 예쁘기만 할 것 같아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결혼도, 평범한 당신의 아이도, 하물며 조그마한 행복도. 나는 그 무엇도 당신에게 줄 수가 없어. 당신도 알고 있잖아?”
“……내가 언제, 그런 게 필요하다고 했던가.”
“거짓말. 바라지 않았을 리가. 당신 거짓말 더럽게 못해.”
당신이 원했던, 우리가 보냈던, 그 사랑스러운 나날은 그저 잠시의 기적에 불과한 일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소하고 평범한 시간마저 평생을 자신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늘 내 말 안 듣는 척했지만, 항상 뭐든 들어주려고 했고, 정말로 들어주는 당신을 알고 있어서 한 번도 제대로 무얼 해달라 말한 적 없었지.”
“……하지 마.”
“오늘을 끝으로 진짜 ‘끝’인 거야. 뒤도 돌아보지 말고 그대로 나가서. 다신 오지 마.”
“……싫어.”
생각도 하지 않고, 보지 않고, 내 흔적 무엇도 없다면, 언젠가는 분명 잊힐 것이다.
당신도, 나도.
그렇게 믿었다.
그렇게라도 믿어야, 당신을 보내 줄 수 있었으니까.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이 그랬지. 내가 당신이 마음에 안 들어서 차 버렸다고 하라고. 그거, 그대로 해 줄게.”
“……지금 왜 그 말을…….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이화연!!”
“오늘, 내가 당신을 버리는 거야.”
당신을 위해서.
그가 모든 걸 잃은 사람처럼 힘없이 스르르― 주저앉았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잡을 뻔했지만, 잡지 않았다. 그럴수록, 이별이 힘들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무정한 나를 보며, 그가 마치 마지막 동아줄인 것처럼 내 다리를 잡고 매달렸다.
“사랑해…….”
“……하. 그걸…….”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던, 이제야 처음 듣는 사랑한다는 말을 이별할 때 쓰다니.
정말 잔인한 남자였다.
“이 와중에 그 말이 기쁜 나를 보니 정말 미친 거 같네.”
“…….”
“그래도, 미안. 당신을 사랑해서…… 당신을 버릴 수밖에 없어.”
아니, 사실 그 말에 기뻐하며, 잔인하게 그를 도륙내는 내가 진짜 잔인한 사람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어떻게 이렇게 잔인하게 쓸 수 있을까.
내가 뱉어 놓고 스스로에게 놀랐다.
그렇게 나는 당신을 버렸다.
“……안녕…….”
세상 전부를 잃은 것 같은 상실이었다.
* * *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훗날 그 말을 듣고, 그 말에 위안을 삼으며 그렇게 1년, 2년…… 시간을 흘려보냈다.
내가 표면적으로 아무도 선택하지 않자, 이미 누구를 선택한 것인가 내 뒤를 뒤지며, 난리를 치기도 했고, 할머니가 달마다 꼬박꼬박 의사를 데려와 피를 채취하고 임신테스트를 하는 것이 훤히 보였지만, 그냥 고요히 내버려 뒀다.
목표는 이대로 아무에게도 예지를 하지 않은 채, 보고 싶은 미래만을 보며 힘을 쓰다, 소진해 죽는 것이었다. 어차피 이미 힘이 사라진 할머니가 내 다음 대를 예언할 수 있을 턱이 없었고, 내가 그런 걸 본다고 한들 나만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예언의 이 가(家)는 여기서 막을 내릴 것이다.
평온한 마지막일 것이다.
가끔, 아니. 매일.
그가 찾아오던 곳에서 자고 일어나고 움직이며, 가끔 그의 흔적을 더듬고, 기억을 더듬으며……. 그렇게 조용히 생을 마감해도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이제는 그렇게 가슴이 아프지도 않고, 그를 그렇게 보낸 것이 서럽지도 않았다. 이래서 시간이 흐르면 다 괜찮아질 것이란 말이 나오나 보다. 완전히 괜찮아졌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어느새 나 자신을 속일 정도로는 괜찮아진 상태였다.
미래를 보며, 이 세계의 마지막은 이미 지켜보았으니 조용히 때를 기다리면 될 뿐이었다.
그렇게 5년이 지난 어느 날.
“……!”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마치 바람처럼. 불쑥 당신이 나타났다.
그때보다 훨씬 더 남자답고 성숙해진 모습과, 텅 비어 버린 눈을 가진 채로.
5년 만에 처음으로 내 앞에 나타난 남자를 보며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아. 내가 실패했구나.
5년 만에 만난 그를 보고서야, 그날의 내 판단이 오판이었음을, 나의 선택이 장렬히 실패했다는 것을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당신의 그런 눈을 보고 싶어서 당신을 놓아 준 것이 아니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놓아 준 것인데…….
결코 나는.
“……유재환.”
당신의 이런 모습을 바라지 않았다.
“집안이 바라던 여자와 결혼했어.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아 그룹 회장도 되었지. 하룻밤뿐이었는데도 운 좋게 그녀가 아이를 가졌다더군. 그렇게 네가 그토록 말하던 평범한 아이도 얻었어.”
“…….”
하나같이 대단하고, 엄청나며, 자신이 사랑했던, 자신을 사랑했던 상대에게 할 말들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네가 내가 가졌으면 하던 걸 모두 가져봤어.”
지금 그가 내뱉는 말들은, 내가 그에게 가지라고 했던 것들. 그가 갖기를 바랐던 것들이었다.
그것을 보란 듯 나열하며, 네가 바라던 것들을 모두 가졌다고. 그런데도 왜 지금 나는 전혀 행복하지 않냐.
누가 봐도 그렇게 시위라도 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나를 원망하는 걸까. 정말 원망한다고 한다면, 나는 그걸 견딜 수 있을까.
손끝이 떨렸다.
나의 실패한 선택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낳았는지, 마주하기 겁이 나서. 하필 그런 실패한 선택이 당신이라서.
두려움에 떠는 내 앞에서, 여전히 텅 비어 버린 고요한 얼굴로 그가 말을 이었다.
“결국 네가 바라는 걸 모두 들어줬으니. 이젠 내가 원하는 대로 해도 괜찮지?”
“……!”
“그렇다고 말해. 어서.”
“…….”
말하라고 했지만 말할 수 없었다.
사고가 멈춰 버린 기분이었다.
정말 저걸 말해도 되는지, 아니면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침묵하는 나를 보며 공허하기만 했던 그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져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윽고 제 손으로 얼굴을 가린 그가, 그동안의 모든 감정을 쏟아냈다.
“이번엔 내가 미치기 전에.”
“…….”
“제발.”
나는, 나를 위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이뤄주기 위해 완벽히 무너져 버린, 내 눈앞에 있는 이 가련한 남자를 도저히….
더는 저버릴 수가 없었다.
* * *
“지한이 태어나던 날을, 마음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머리로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태어나는 순간의 기쁨을, 세상에 그 아이만큼 더 사랑할 것이 나타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었죠.”
“…….”
“그때, 다짐했습니다. 내 모든 걸 바쳐서라도. 무엇을 해서라도. 설령 내 신념을 배반하는 일이라도 기꺼이 하겠다고.”
“……그 아이는 앞으로 많은 역경을 이겨 내고 세상을 구해야 할 용사였을 테니까요?”
헛웃음이 나왔다.
눈앞에 있는 이 여자를 보자니, 정말 지호는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다. 속이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토할 것만 같이 울렁였다.
이제는 똑똑히 알 것 같았다. 예언의 무녀. 그건 단순히 미래만을 예지하는 것이 아닌, 미래를 컨트롤하는 것 역시 가능하다는 것이다.
본인의 힘으로 미래를 바꾸면 당연히 그의 상응하는 페널티가 따를 것이고, 그 때문에 이 여자는 지금 저렇게 아무 표정 하나 가질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녀가 받은 페널티는 감정.
불행이자 다행인 건, 인간의 감정은 무수히 많다는 것이고, 기회는 매우 여러 번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 지경에 이르렀다는 건, 대체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른 것인가.
유지한의 행복을 위해.
“……나를, 이 세계로 불러들인 건 당신인가요.”
허탈한 내 물음에, 이화연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당신은 지한이가 있을 수 있는 수많은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던 유일한 사람이었죠. 내가 볼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유일하게…….”
“…….”
“당신과 함께하는 지한이가 웃고 있었어요.”
“…….”
“유일하게, 내가 찾은 가능성이었고, 저는 그걸 포기할 수 없었어요.”
설령 당신에게 죄를 짓는 일이라고 해도.
많은 걸 바쳐도 이루지 못했던 미래가 나로 인해 이루어질 것이라 확신을 얻은 여자는 제 모든 걸 바쳤다. 감정은 물론, 바칠 감정이 없어지면 자신의 수명까지도 기꺼이 내놓으며.
정말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대체 그것만 보고 무엇을 믿고.
하지만 눈앞에 있는 여자가 너무나 간절하고, 맹목적이고, 이 여자가 살아온 삶이 너무나 가련해서……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신이 진실만을 말했지만, 100%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 역시 압니다. 말해 줄 수 없거나, 그럴 수 있다고 해도 그럴 생각이 없겠죠.”
“……!”
“당신의 아들을 위해서.”
그렇게 힌트를 줬는데 어찌 눈치 못 채겠는가.
천치가 아닌 한 모르는 자는 없을 것이다.
믿을 만한 놈이 전혀 아니지만, 그렇게 티 나게 힌트를 줬는데.
그러나, 아무 말 하지 않기로 했다.
“……더 이상 능력을 쓰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
“당신의 아들에게 그렇게 바쳤으면, 조금 남은 당신의 마지막 시간 정도는 연인과 함께 보내도…… 좋지 않을까요.”
“……제 아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아직은, 진실을 전부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으니까.
* * *
이화연과 헤어지고, 거리를 걸으며 나는 생각했다.
“……아. 뭐 때려 부술 거 없나.”
파괴 본능이 솟구쳤다.
아까워서 내 집 물건은 못 부수겠고, 내 것만 아니면 뭐라도 좋으니 제발 이 분노를 어떻게든 풀고 싶었다. 사실 물건은 아까우니, 이참에 치워 버리면 좋은 쓰레기(인간)이면 참 좋을 거 같았지만, 그럼 귀찮아질 게 분명하니…… 아쉬운 대로 몬스터라도. 뭐라도 해서 아무런 수확도 없이 얻은 이 찝찝한 마음을 날려 버리고 싶었다.
“근처 던전 없나…….”
살다살다 던전, 아니면 게이트가 열리기를 바라게 될 줄이야.
인생은 진짜 오래 살고 봐야 했다. 허구한 날 예고 없이 게이트에 빠져 쌍욕을 내뱉은 게 몇 번인데, 이제는 이걸 또 찾고 있다.
그런 나를 보며 성위님이 말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구구절절한 로맨스 듣고 와서 왜 던전을 찾고 있냐고 쯧― 하고 혀를 찹니다.]
얼마나 파괴 욕구가 솟구치는지, 이젠 하다하다 성위님도 짜증이 났다.
그래서였을까.
평소라면 시치미를 뚝 떼며 잡아떼는 성위님의 행동에, 언제나와 같이 맞장구를 쳐 주고 아무것도 모르는 시늉을 내며 그냥 지나갔겠지만 나도 모르게 그만 깊게 감추어 놓았던 속내를 내뱉어 버렸다.
“어차피 당신도 내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을 거면서, 그따위로 모르는 척하면 좋아?”
내가 짜증이 난 이유에는 그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 터인데.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성위님으로서는 처음 듣는 직설적인 신랄한 비난 때문이었는지,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며 시치미를 뗄 줄 알았더니, 당황한 것인지 아니면 그래도 양심은 남아 있는 것인지. 변명도 못 해 보고 또 도망간 모양이었다.
“하. 역시나네. 기대도 안 했지만.”
도망은 그의 특기였으니 놀랄 것도 없었다. 다만 놀라울 정도로 언제나 똑같은 그의 행동 패턴에 비소만 터져 나왔을 뿐.
어쩜 이리도 정직한 척하시는 건지.
모든 것이 거짓말이면서 이럴 때는 마치 자기가 정직한 척이고 지랄인 건지. 그게 너무나 같잖아서 입가에 잔뜩 비웃음을 머금는데, 갑자기 세상이 달라졌다.
“…….”
내가 보고 있던 차, 건물, 도로.
모든 것이 사라지고, 바닥도 없는 검은 공간. 그곳에는 유유히 흐르는 것만 같은 별빛뿐이었다. 그것을 보고 나는 당황하기는커녕, 나지막이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그래도 도망이 아닌, 다른 선택을 해 주신 모양이다.
무척이나 기껍게도.
그런 내 앞에, 그가 유유히 내려와 내 뺨을 향해 손을 뻗었다.
[진실을 말해준다면, 받아들일 자신이 있느냐.]
“아니.”
당연한 대답이었다. 감추는 이유가 이제는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는 만큼,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 받아들일 자신은 없었다. 화를 낼지, 용서를 해야 할지. 나는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조차 갈피를 잡지 못했으니까.
[그렇다면 어찌 캐묻는 것이냐. 내가 답을 해 주지 않을 걸 알면서, 왜 나를 도발해.]
그럼에도 그를 이렇게 도발하고, 이제 와 그에게 답을 재촉하는 건.
“나도 당신도. 끝까지 그렇게 모르는 척만 할 수는 없을 테니까.”
언제까지 이렇게 머물러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미 충분히 많은 시간을 배려해 주었다. 당신에게도, 그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되바라지고,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 화신 같으니라고.]
“어머. 칭찬 고마워.”
[하지만, 윤지호. 나는 말해 줄 수가 없어. 아마 그건 네가 답을 요구하는 다른 이도 마찬가지일 터이지.]
내가 그가 숨긴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그 역시 알고 있다는 듯,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정말 그조차도 내 성위. ‘이매망량’다워서 순간 실소가 흘러나올 뻔했다.
이다지도 나를 잘 아는데, 저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 답이나 하고 있다니. 그런 내 마음조차 읽고 있는 듯, 그가 웃었다.
[당연히 이런 말밖에 할 수 없지 않느냐.]
“어째서?”
[너는 네가 갖고 있는 호감이나, 마음과는 전혀 별개로, 네가 결정만 한다면 망설임 없이 모든 것을 미련 없이 저버릴 수 있으니까. 나도 포함해서.]
“…….”
[너를 사랑하는 이들이 그걸 뻔히 알고 있는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너나, 유지한이나. 사람을 너무 다 아는 척해.”
그럴 때면 진짜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고, 짜증스럽게 대꾸하자. 그가 되레 내게 물었다.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나?]
“…….”
우스운 건 또 그 말에 자신 있게 아니라고 답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도 나를 잘 모르겠는데, 어떻게 답을 하겠는가.
그런 나를 보며, 성위가 쓰게 미소를 지었다.
[네가 그런 사람이니 더더욱 말하지 않을 것이다.]
“…….”
[나 역시도.]
단호한 말에,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설령 모든 진실이 밝혀지는 날이 오더라도. 그는, 본인의 입으로 그 어떤 것도 발설치 않으리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미움받을 가능성을, 그는 남길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는 절대, 도박 같은 것을 하지 않는 남자였다.
“짜증나.”
[그런 너까지도. 사랑한단다.]
나지막이 읊조리는 고백과 함께 뺨에 붙었던 손이 서서히 떨어졌다. 온기가 떠나는 것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최선을 다하지 않은 고백에, 답을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 그래야 윤지호지.]
그런 내 모습에, 성위님이 시원스럽게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역시나.
“……허. 참나.”
원래의 세계로 돌아와 있었다.
이 정도로 직접, 나와 만남을 가지려면 엄청난 인과를 대가로 지불해야 했을 텐데, 고작 쓸데없는 말 몇 마디를 하겠다고 그걸 소비하다니.
과소비의 제왕이었다.
하긴, 당신에게는 숨 쉬는 것이나 다름없으려나.
어쨌든 간만의 그의 얼굴을 보니, 다시 신선하긴 했다.
“아. 이참에 한 대 갈기고 오는 건데.”
평소 그렇게 한 대 치고 싶었는데, 막상 기회가 오자 홀라당 까먹어 버렸다. 아쉬움에 발을 동동 구르다,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후.”
성위님의 말대로였다. 내가 그런 인간인 만큼, 아마 성위님도 유지한도, 손톱만큼도 말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나를 도발하던 그 미친 쓰레기의 입으로 듣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들어야 한다면, 유지한에게서 듣고 싶었다.
만약 듣게 된다면, 그 뒤에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내일 내가 뭘 할지도 모르는데, 그런 훗날을 어찌 알겠는가.
“읏샤. 가 볼까.”
하나, 한 가지 지금 확실한 건.
【세계의 통로(S)를 발동합니다.】
“……!”
“……지호 씨―!”
“짠―! 내가 먼저 마중 나왔어요.”
아직은 그를 놓고 싶지 않다는 것.
<랭킹 1위 탈환을 소망합니다> 7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