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권- 19장. 두 번의 기회. (20/30)

목차

19장. 두 번의 기회

20장. 내가, 당신이 바라는 내가 아니더라도.

21장. 네 품에서 잠들고 싶어

19장. 두 번의 기회.

나름 엄청난 각오로 참모실 앞에 섰다. 사실 말만 엄청난 각오지 따로 할 건 없다. 할 수 있는 건 이미 다 했기에 여기서는 그저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면 되었다.

조금씩, 훈수도 두고?

차라리 이게 낫다 싶기도 했다. 눈앞에 유지한을 두고 대화할 용기는 도저히 낼 수가 없었으니.

드르륵―

한숨을 쉬면서 문을 여는데, 웬 쓰레기가 나를 보며 대놓고 인상을 구겼다.

“……누가 멋대로 허락도 없이…….”

안 그래도 더러운 기분에 오물을 끼얹는 소리였다.

딱 봐도 비 각성자. 거드름을 피우는 무례한 태도로 모자라 권력을 향한 욕망을 얼마나 꾸역꾸역 처넣었는지 궁금할 정도로 튼실한 복부.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두 눈이 아찔해지는, 살아 있는 부정부패의 표상이었다.

“아오. 안 그래도 기분 더러운데 왜 이런 걸…….”

짜증을 못 이겨 나도 모르게 그만 필터링 없이 말이 나가고 말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그래봤자 저 인간이 뭘 어쩌겠는가. 딱 봐도 욕심만 많은 무능한 인간 같은데.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이제 일코 그냥 아예 놔 버린 거냐고…… 뭐 어떠냐고. 네게 저런 시각 공해를 안겨 주니, 바로 그냥 치워 버리자고 똑같이 눈살을 찌푸리며 바람을 넣습니다.]

나름 용기를 내어 이 참모실까지 온 거였다고는 했지만, 사실 용기가 아니라 한낱 치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스스로도 혼란스러워하던 찰나였다. 그 상황에서 저런 똥이 투하되니 일코고 나발이고 그냥 다 그만둬 버릴지 진심으로 고민이 되었다.

그때, 누군가 눈치 빠르게 병신과 나 사이에 끼어들었다.

“지호 씨. 어서 오시죠!”

바로 저번 청문회에서 인사를 나누었던, 노이람의 비서이자 유예의 참모. 우민호였다. 대놓고 내 소개를 해 주듯 큰 소리로 말하며 우민호가 끼어들자, 그제야 내 정체를 알아본 멍청한 놈의 부하들이 제 상사의 트롤 짓을 무마시키기 위해 서둘러 말했다.

“윤지호 님. 안내하겠습니다.”

“이쪽으로.”

그들이 안내한 자리는 바로 가장 상석의 자리였다. 청문회 때 갑자기 게이트가 터져서 거기서 내가 만들었던 위상은 전부 사라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원티드가 여기 있는 길드 중 가장 네임 밸류가 높긴 했지만 그렇다고 비 각성자 참모에게 이 자리를 순순히 내어 줄 만큼 힘이 있…… 을 턱이 없었으니.

힘만 있고 권력은 없는 길드. 속으로 한숨을 쉬고 있던 참이었다.

“……원티드가 가장 마지막이군요.”

자연스럽게 안내해 준 자리에 앉자, 그제야 내가 누군지 깨달았는지 말투가 존대로 바뀌어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자신에게 한 말은 기억하는지 비꼬듯 건네는 말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물론 나는, 들은 척도 않고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군복을 입은 걸 보아하니 국방부 쪽 인간인 것 같은데 가장 기본적인 정보도 숙지를 안 하다니. 적어도 참석할 인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니던가. 저런 놈이 지휘를 했다가는 애먼 군인들 싹 다 죽이기 딱 좋았다. 하다 못해 정치라도 어떻게 좀 잘하려면 정보는 기본 중에 기본이건만.

쯧―

“뭐야. 웬 카메라가…….”

“저쪽에서 가져온 겁니다.”

“누구를 찍는다는 겁니까? 우리를요?”

초상권 침해로 소송 걸어야 하나. 날뛸 수 있는 아주 좋은 건수였다. 사전 동의 없이 촬영한다는 것만으로도 한번 정신을 차리게 해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더했다.

“저희가 보고 있는 레이드를 실시간으로 공개한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여론이 빗발치고 있어서 그리 결정했다 하네요. 더불어 참모실 상황도 중계를 한다고 합니다. 말로는 어떠한 개입도 없이 투명하고 공정하게 잡음 없이 레이드를 진행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

그럴 턱이 있나. 눈앞이 아찔해지는 헛소리를 듣고 예의 그 인간을 돌아보니, 어떤 놈인지 그제야 눈치챌 수 있었다.

인맥과 약을 쳐서 국방부 장관을 꿰어 찬 쓰레기.

지금이 어떤 상황이던가.

대한민국 모든 헌터들이 국가와 세계의 명운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집결해 있다. 그런데 국방부 장관 아들이라는 인간은 B급 헌터씩이나 되면서 그동안 온갖 특혜를 누리며 인생을 날로 먹다가, 이번 징집 대상에서도 제외되어 여론의 몰매를 맞고 있었다.

그렇게 빠질 수 있었던 게 누구 덕이겠는가. 그 쓰레기의 아버지이자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국방부 장관이라는 또 다른 쓰레기의 덕이겠지.

그런데도 꿋꿋이 잠수를 타는 것을 보면 그 아들이 보통 놈이 아니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부전자전이라고 했다. 아버지를 보면 아들을 알 수 있다는 말이지만, 다른 말로 아들을 봐도 아버지를 알 수 있다. 그러니 국방부 장관이라는 저 작자가 자신은 1할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 이 자리에 꿋꿋하게 있는 이유도 알아챌 수밖에.

‘자신의 지휘로 무사히 국가와 세계의 위기를 넘겼다.’라는 타이틀과 자신과 아들의 부정에 대한 면죄부를 얻는 동시에, 지지기반을 다져 더 높은 곳으로 발돋움을 하고 싶은 것이다.

정말, 가소롭고 어처구니가 없어 기절하다 못해 돌아가실 거 같았다.

다 뒤지면 그 권력도 끝이건만, 그건 전혀 생각지도 않는 꼴이 그리도 우스울 수 없었다. 당장 뒤집어엎어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은 저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에 저건 내일의 쌈닭에게 넘기기로 하고 지금은 눈앞의 사건에 집중했다.

“이제 시작인가요?”

“네. 아. 받으시죠. 무전 역할을 해 줄 이어폰입니다.”

“아. 고마워요.”

철저히 놈을 무시하고 우아하게 이어폰을 착용하자, 장관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오뚜기로 변모했다. 별로 눈이 즐거운 광경은 아니라 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에, 유지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호 씨.”」

“……네. 유지한 씨.”

‘길드장님.’이라고 답할까 하다가 그러면 깨지기 쉬운 유리 같은 이 남자가 상처 받을 거 같아, 차마 그렇게 매정하게 선을 긋지 못했다. 그런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유지한이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오신 겁니까.”」

오지 말아 달라고, 그리 부탁을 했는데.

하지 않은 뒷말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 숨겨진 뒷말마저 너무 유지한다워서 나도 모르게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그러려고 했는데, 저도 원티드라 혼자 집에서 TV 보고 있을 수가 없겠더라고요.”

어차피 실패하면 집에 있든 여기 있든 다 죽는 거.

물론 세상 모든 인간이 죽어도 주책맞은 성위님을 둔 덕에 나는 그럴 일이 없을 것 같았지만 시치미를 뚝 뗐다.

「“…….”」

유지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이어폰 너머에서, 어떤 말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차오르는 설렘을 주체할 수 없어하는 남자를. 그 벅차오르는 마음이 혹여라도 반사적으로 튀어 나갈까 봐 그저 꾹 참고 마는, 사랑에 빠진 남자를.

우스운 일이었다.

“다치지 말아요. 유지한 씨 말고 원티드 전부에게 하는 말입니다. 손톱만큼만 다쳐도 정하나 특제 회복 포션 원샷 하게 시킬 겁니다.”

장난스레 너스레를 붙이자, 이어폰 너머로 기분 좋은 웃음소리들이 들려왔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실장님.”」

「“그거 아직 폐기 안 하셨어요?”」

「“그건 모쪼록 길드장님 다루는 용도로만 쓰셨으면 좋겠는데…… 악―!”」

「“말이 씨가 되는 소리 자체를 꺼내지 마. 니가 먹을 거야?”」

「“죽어도 안 마시도록 하겠습니다.”」

유쾌한 다짐을 듣고 무전을 마친 후 각 길드들의 참모를 쭉 돌아보았다. 아까의 유쾌한 다짐을 같이 들은 듯,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던 참모들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나 있었다.

“부디 무사히 지나갔으면 좋겠네요.”

“물론입니다.”

부드럽게 분위기를 품과 동시에 시스템 창을 띄워 주는 마력 석판에 화려하게 알림이 올라왔다.

【‘화룡왕 드라키스’가 현신했습니다.】

【‘화룡왕 드라키스’의 최종등급은 SSS급입니다.】

【세계 최초의 SSS급 게이트입니다.】

【인위적인 게이트 발동으로 ‘화룡왕 드라키스’의 행동에 제약이 걸려있습니다.】

【활동 시간 6시간. 휴식 시간 18시간입니다.】

【제약은 3번입니다.】

【휴식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활동이 시작됩니다.】

【게이트가 해금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기회는 1번뿐입니다.】

【행운을 빕니다.】

드디어, 레이드의 시작이었다.

* * *

레이드 시작 5분 전.

이제 여유롭게 준비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준비란 본래 아무리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이라지만, 막상 시간이 이렇게 코앞으로 다가오니 다들 긴장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미 여러 번의 역경을 딛고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온 그들은, 전부 헌터였다.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도, 굴하지 않는.

헌터.

“모두, 긴장의 끈을 놓지 말도록.”

마음을 다잡고 각자 자신의 무기를 힘주어 잡았다. 그 순간, 시작의 알림이 울려 퍼졌다.

【‘화룡왕 드라키스’가 현신했습니다.】

【‘화룡왕 드라키스’의 최종등급은 SSS급입니다.】

【세계 최초의 SSS급 게이트입니다.】

【인위적인 게이트 발동으로 ‘화룡왕 드라키스’의 행동에 제약이 걸려있습니다.】

【활동 시간 6시간. 휴식 시간 18시간입니다.】

【제약은 3번입니다.】

【휴식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활동이 시작됩니다.】

【게이트가 해금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기회는 1번뿐입니다.】

【행운을 빕니다.】

알림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끼이이이이오―!

쿠아아아아앙―!!!

“……!”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와 함께 화룡왕이 내뿜은 브레스가 빠른 속도로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화려한 서막이었다.

“각자! 지시 받은 위치로!”

“유예 소속 술사들의 호위들은 절대 방심하지 말도록. 결계가 세워지지 않으면 모두가 끝이다!”

“절대 놈을 이곳에서 나가게 두면 안 되니 명심하도록.”

“예!”

계획은 아주 어려우면서 간단했다. 아득히 우위에 있는 적이었기에 오히려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더 많지 않았으니. 때문에 그들은 간단하지만 어려운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일반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전투 범위를 한정하는 것이었다. 최후에, 만약 그들이 이 전투에서 패배하게 되더라도, 조금이라도 민간으로 향하는 피해를 늦추기 위해. 부질없는 짓이라 하더라도,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이 최선이었다.

술사들의 집단. 유예가 결계를 맡아 뿔뿔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결계를 설치하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한 술사 당 각 길드의 전투원 최소 다섯이 따라붙었다. 어차피 그들이 있는 곳이 전투의 최후 방어선이기도 했기에 그 정도 인원이 함께하는 것은 당연했다.

해당 ‘호위’들은 모든 길드에서 의무적으로 차출되었지만 원티드에서는 아무도 차출되지 않았다. 그들은 전부 최전방에서 싸워야 하는 이들이었다. 소수지만 모든 멤버가 네임드였으니. 이 고급 인력들을 고작 호위나 하게 전선 최후방으로 보낼 미친 자들은 없었다.

물론, 원티드 길드원들도 결국은 흩어지기는 할 것이었다. 그 정도 고급 인력들이 한곳에 뭉쳐 있어도 전력 분배에 균형이 안 맞을 테니 그건 안 될 일이었다.

대충 누가 어디로 갈지는 정해졌지만, 정작 지한과 함께 갈 이는 정해지지 않아, 유라가 물었다.

“유지한하고 누가 붙어야 할 거 같은데, 누가 할래?”

그래도 길드장이니 혼자 둘 수는 없어 하나는 가야 한다고, 누가 갈 거냐고 정당한 질문을 던졌지만, 돌아오는 건 길드원들의 난색이었다.

“아…… 시른데요.”

“길드장님이랑은 왠지…….”

지한과 합이 잘 맞지 않는 이들은 애초부터 아무 소리도 않는 걸로 진작 발을 뺐고, 도움이 될 만한 포지션들은 싫다는 티를 대놓고 냈다. 몸이 고생하는 문제를 떠나, 마음까지 고생할 게 훤히 보였기 때문일까.

“차라리 회사원 아저씨랑 할래요.”

레쓰비가 자신의 앙숙까지 지목하며 거부를 완곡히 표현했다. 그에 순간 할 말을 잃은 유라가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쩍 벌렸다.

이것들이 길드장을 앞에 두고 못 하는 말이 없어!

지한이 ‘윤지호’의 여파로, 레이드가 시작했는데도 정신을 다 차리지 못해 그 말들을 듣지 못했다는 게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이랄까. 그걸 확인한 유라가 지한 몰래 레쓰비에게 꿀밤을 때렸다.

“아앗―! 선배!”

왜 때려요!!

레쓰비가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그래서, 누가 한 명 가긴 가야 한다니까.”

그러니 싫어도 얼른 정해. 시간 없어.

유라의 말에 싫은 티를 팍팍 내며 레쓰비가 투덜댔다.

“유라 선배가 가…… 면 안 되는구나. 아 씨.”

만약 그게 되었다면 애초에 말도 안 꺼냈다. 하지만 유라는 특성이 얼음이기 때문에 선택권 따위는 없이 무조건 한강 쪽 전투에 합류해야 했다. 그 전투는 유라 없이 성립 자체가 힘들었으니까.

그 이유를 뒤늦게 떠올린 레쓰비가 욕을 삼켰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지한이 싫은 게 아니었다. 지한과 함께 싸우는 전투가 싫은 건 더더욱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자기 자신이 싫은 것이었다. 월등히 뛰어난 그에게 짐이 될까 봐.

아니, 짐이 될 것은 확실하니 차라리 짐만 되면 나았다. 그보다 더 걱정하는 것은 하나였다. 자신들의 부족함으로 지한을 다치게 할까 봐.

아무리 긴박한 순간이더라도 길드원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제가 입는 피해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달려올 길드장이었기에 그들은 더 자원할 수가 없었다. 저번 군단장과의 전투 때처럼, 레쓰비를 위해 망설임 없이 제 몸을 던졌던 길드장은, 모두에게 똑같이 그럴 것이니.

그 꼴을 보는 건 제가 죽는 것보다 더 끔찍했다. 모두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나서지는 않는데, 그 사이에 누가 불쑥 손을 들었다.

“제가 갈게요.”

“……너―!”

그 사람은 바로, 공간술사. 히키코모리였다.

원티드에서 가장 존재감이 없고, 사람들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헌터.

사실 그가 이곳에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원티드 길드원들을 놀라게 하기는 충분했다. 세상이 망한다 하더라도 제 공간 속에서 홀로 갇혀 있을 놈이었으니까. 교류하는 건 그나마 원티드뿐인 그이니 아무리 국가적 위기라고 해도 나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본인도 헌터고, 원티드임을 증명하듯, 후드 모자를 굳게 쓰긴 했지만 이곳에 나타난 그를 모두가 대견하게 생각했다. 그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그런데, 최전방에, 그것도 길드장과 가겠다니.

평소의 히키라면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너 히키 맞지? 아니, 역시 믿을 수 없어. 얼굴 가리고 다니니까 다른 사람이 대신 와서 히키인 척하는 거 아니야?”

“후드 좀 벗겨 보자. 우리 히키는 이런 애가 아니야!”

오늘 이미 한계 이상의 기적을 봐서 더는 믿을 수 없는 길드원들이 히키의 금기인 모자를 벗기려 달려들었다.

그럼에도 히키는 순순히 당해 주었다. 평소라면 기겁을 하고 도망쳤을 텐데 말이다.

드러나는 얼굴은, 여자라고 해도 믿을 법한 아주 예쁜 미형의 소년이었다. 밖에 얼마나 안 돌아다녔는지를 여실히 증명하는 새하얗다 못해 귀신처럼 투명한 피부가 더 그리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미 그런 히키의 얼굴을 알고 있는 길드원들은 그 미모에 놀란 것이 아니었다. 순순히 모자를 벗기게 둔 것으로도 모자라, 흔들림 없는 눈으로 지한을 올곧게 바라보고 있는 그 모습에 놀란 것이지.

“공간술사이니, 제가 다른 길드원들보다 길드장님을 서포트 하는 데 더 적합할 겁니다.”

맞는 말이었다.

실드라면 한순간에 깨져 의미도 없을 테지만, 공간은 이야기가 달랐다. 공간술사가 사용하는 실드는 실드가 아니라 말 그대로 그 공간을 단절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번 전투에서는 꽤 쓸모가 있을 것이었다.

“……너.”

하지만 등을 떠민 것도 아니고 그가 스스로 나설 것이라 누가 생각했을까. 심지어 안전을 조금도 보장할 수 없는 이번 전투에.

한참 넋이 나가 있던 지한도 놀란 것인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런 지한의 반응에도 번복은 없다는 듯 시선을 돌리지 않고 답을 기다리는 히키의 모습에 지한은 말했다.

“내가 신경을 써 줄 수는 없을 거야.”

그를 지켜줄 자신이 없었다. 이번 전투는, 자신에게도 무척 벅찰 게 분명했으니.

그 말에, 히키는 분명한 어조로 답했다.

“나도 헌터입니다. 길드장. 길드장에게 매번 지켜지는 존재가 아니라.”

마치 처음 원티드에 자신을 넣어 달라고 찾아왔을 때와 꼭 같은 눈에, 지한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게 맞지. 이번 전투에서는 네가 가장 필요할 거고.”

“결정됐네요.”

히키가 웃으며 지한이 내민 손을 잡았다. 결정이 끝났으니 이제 꾸물거릴 시간은 없었다.

“가자.”

지한의 말과 동시에 유라가 선언했다.

“모두, 신나게 날뛰어 봐!”

“앗싸―!!”

활기찬 외침과 함께 각자 뿔뿔이 흩어졌다. 원티드답게 자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승리의 검, 세이라가 계약자의 바람에 반응합니다.】

이번이 마지막 인사가 되지 않길, 아무리 작은 길이라도 당신에게 승리의 길을 내어줄 수 있길…….

【세이라가 계약자와 공명합니다.】

유지한은, 그 존재만으로도 모든 이들의 사기를 드높였다.

“유지한―!”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공간술사가 공간 단절을 시도합니다.】

【아득히 높은 존재를 향한 공간단절에 성공하였습니다―!】

【스킬이 성장합니다!】

【하나, 스킬이 유지되는 건 수 초입니다.】

【시전자의 마력이 단절된 적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길드장님!”

수 초.

있으나 마나 한 시간일지 모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스킬: 오러 블레이드(S)를 발동합니다.】

촤악―!

“크아아아악―! 감히―!”

날카로운 검격이 화룡왕의 단단한 피부를 뚫고, 왼쪽 팔에 큰 상처를 그었다. 단순한 상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화룡왕이 울부짖으며 분노를 표출했다. 엄청난 분노에 위압감이 숨이 짓눌렸지만, 모두가 미소를 지었다.

시작이 좋다는 뜻이었다.

“하. 좋아. 시작하자고!”

【광전사가 광기를 포효합니다.】

가능성이 보였다.

“카밀라를 선두로 밀어붙인다―!”

【성기사가 심판의 검(S)을 발도합니다.】

이 레이드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 * *

콰과과과광―!!

성기사가 스킬을 발동해 검을 휘두르자마자, 엄청난 마력이 응집해 화룡왕에게로 향했다.

이미 앞서 유지한의 공격을 맞은 탓에, 화룡왕 드라키스는 맥없이 공격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크아―! 이런 버러지 같은 것들이―!!”]

연속으로 포효가 터져 나왔다. 위협적인 소리에 겁을 먹을 법도 하건만, 그들의 얼굴에 피어난 건 공포가 아닌 희열이었다.

“밀어붙여!”

“절대 이 틈을 놓치면 안 돼!”

“놓치면 다 끝이라고 생각해-!”

“예―!!”

최전방에서 싸우는 월드 랭커들이 먼저 발돋움을 시작했고, 그 뒤를 이어 원거리 헌터들의 공격이 쉴 새 없이 날아들어 드라키스를 밀어붙였다.

“……이야.”

실로 장관이었다.

스펙터클 블록버스터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광경을 이렇게 볼 줄이야.

장비는 또 최신으로 써서 중계하는지 현란한 사운드와 4K OLED화질로 보니 어지간한 영화관에서 관람하는 것 저리 가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무리 그래도 영화관 사운드 기기만큼의 음질은 따라잡지 못했는지 소리는 그것보다 못했지만 실시간 라이브 생방송으로 보고 있어 긴박감은 영화관보다 훨씬 더 나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긴박함 속에서 거침없이 나아가는 헌터들을 눈에 담았다. 저 화면에 잡히는 그 누구도 자신보다 훨씬 강한 상대가 분노를 토하고 있음에도 겁을 먹거나 주춤하지 않고, 오히려 기쁜 얼굴로 돌진하는 게 참 신기했다. 그런 존재들이라는 걸 이미 너무도 잘 알고는 있었지만.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역시 헌터라는 생물은 평범한 인간과 질적으로 다른 것인가. 같은 각성자라고 해도 그동안 저런 일을 겪어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그러나 앞으로도 내게 저런 상황이 닥칠 일은 없을 테니, 난 저런 행동을 평생토록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이로운 멋있죠?”

순수하게 감동하고 있던 내 옆으로 어느새 유해한이 다가와 불쑥― 개소리를 던졌다.

저게 뭐라는 거야.

멋있긴 했다. 저기 있는 모두가.

물론, 당연하게도, 저기서 이로운은 내 시야 밖에 있었다.

“카밀라 레토가 제일 멋있는데요.”

현재로선.

솔직하게 내 감상을 말하자, 침묵이 감돌던 회장에 웃음이 터지며 너도나도 굳게 잠겨 있던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 인정이요.”

“솔직히 방금 명대사였죠.”

유지한도 멋있었지만, 그 뒤 바로 초절정 명대사를 날려 준 카밀라는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을 만큼 강렬하기 그지없었다. 그 뒤로 날아드는 성기사의 일격과 각 길드 수장들의 용기 있는 외침까지.

명대사가 주르륵 나오는데, 시기에 맞춰서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한 이로운이 눈에 띌 리가 없었다. 오히려 유해한의 말을 듣고 열심히 이로운을 찾아보고 난 뒤에야 그가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놈이 그걸 노리고 이런 어그로를 끌었나 싶었다.

“그래도 걱정했던 것보다는 순조롭네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헛소리하는 놈을 제외하고, 잠깐 저마다의 감상에 빠졌다 현실로 돌아온 참모들이 자신들의 본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사계절은 원거리 헌터들만 남고, 근접전이 주력인 헌터들은 외곽으로 돌리겠습니다. 오히려 전투에 방해가 되는 거 같네요.”

“아. 그 편이 손실이 없을 거 같군요.”

“유예는 외곽 결계를 담당하는 술사들을 제외하고 전부 최전방에 밀집시키도록 하겠습니다. 흩뿌려 놓는 것보다 한데 모아 크게 공격을 행하는 게 더 유리하겠어요.”

“좋은 아이디어네요.”

“그럼 녹음 쪽은 이렇게 하는 편이…….”

“수용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그럼 이대로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세세하고 꼼꼼하게 세운 작전이 아니었기에 참모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눈앞의 싸움에 임하면 시야가 좁아질 수밖에 없으니. 그리고 각 길드의 중추들답게 그들은 완벽하게 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물론.

“……원티드는…… 할 게 없네요.”

“하하. 이미 완벽하십니다.”

“원티드가 모든 전선에서 선두를 맡고 있으니 저희 쪽에서 움직이는 편이 이득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나는 할 일이 하나도 없었다.

자유를 사랑하는 소수 정예 네임드 길드 원티드답게, 30명도 채 안 되는 인원이었지만 각자 자신의 전투 위치에서 앞장서고 있는 그들에게 저런 세세한 지시는 필요하지 않았다. 원티드를 중심으로 다른 헌터들이 움직이는 것이 훨씬 빠르고, 효율도 올려 주었으니까. 저들처럼 일일이 세세하게 지시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영화 한 편 감상만 편하게 하면 될 정도였다.

그렇다고 물론 할 일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고딩. 들려요?”

「“아. 네! 실장님!”」

“회사원님 있는 쪽에, ‘타락으로 이끄는 길’ 한번 가능해요?”

「“어…… 어떻게 그걸…… 물론 가능합니다. 지금 바로요?”」

“아니요. 제가 신호 주면요.”

같이 전투를 함께 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자신의 기술을 알고 있냐는 듯 고딩님께서 조금 놀란 듯했지만, 금세 정신을 차리고 내 지시에 따랐다.

고딩님께 예고를 마치고 나는 태블릿을 들어 각 길드원들을 비추는 드론의 영상을 확인했다. 대체 무슨 드론을 쓰는 건지, 각 카메라로 길드원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중계하며 각 길드 태블릿에도 그 모습을 연결해 보여 주었다. 물론 원티드는 전원이 전투의 핵심인 데다, 인원도 많지 않기에 전부를 비춰줄 수 있었던 것이고, 나머지 길드는 메임 멤버들만 중계해 주는 듯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었다.

덕분에 이쪽은 좀 더 세세히 전황을 확인하고 이끌 수 있었으니 이득이었지만. 이토록 편리한 참모실의 상황에 대한 감상을 그만 멈추고, 회사원의 카메라를 클릭해 화면을 키웠다.

멀리서 히피 무더기가 날아오고 있었다. 지상에 있는 트롤들과 수천 마리의 고블린 떼를 상대하고 있던 이들이 바짝 긴장하며 하늘을 주시했다.

그리고 마침내. 히피 무리들이 회사원이 있는 곳 상공에 도착하는 순간이었다.

“지금.”

【타락한 음악가가 ‘타락으로 이끄는 길(A)’을 연주합니다.】

【타락한 음악가가, 타락한 자들을 지옥으로 유혹합니다.】

【타락한 이들이 매혹됩니다.】

보기만 해도 빨려 들 것 같은 아름다운 보랏빛의 선율이 회사원이 있는 상공으로 뻗어 나갔다. 선율은 곧바로 히피 무리들을 덮쳤고, 매혹에 속절없이 당한 히피들은 반격할 겨를도 없이 힘없이 늘어졌다.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회사원이 자신의 메인 스킬을 발동했다.

「“역시, 실장님이야.”」

【마탄의 사수가 ‘백 개의 탄환(A)’를 발동합니다.】

타다다다다다당―!

1초에 몇 발이나 난사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착 10초 정도 연사했을까. 수십 발,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많은 탄환들이 히피들의 가슴을 정확히 관통했다.

“……와아―”

피이이이이―!!

너무나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난 일이라 관통상을 당하고도 피는 한 박자 늦게 터져 나왔다. 제 가슴에 탄환이 관통했던 줄도 몰랐던 것인지, 출혈이 터지자 그제야 고통을 알아차린 히피들의 요란한 비명 소리가 허공을 메웠다. 한 발에 히피를 몇 마리나 사냥한 걸까. 백 마리는 족히 넘을 히피 떼들이 단번에 지상으로 추락했다.

콰앙―!

꾸에에에엑―!

히피 자체도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기에 엄청난 굉음을 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 난리에 지능이 낮은 고블린들까지 깔려 죽은 건 덤이었다. 엄청난 광경에 혼을 빼놓고 있을지라도 생존 감각만큼은 최상인 헌터들은 재빨리 발을 빼 아무도 타격을 입지 않았다. 히피를 처리하며 고블린 떼들까지 단번에 처리했으니. 그야말로 일거양득이었다.

“미친. 참모 하나 있다고 이렇게 간단할 줄이야.”

제가 해 놓고도 놀란 듯 회사원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소수였고, 모든 멤버들과 전투를 해 익숙하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싸우는 체계에서는 아무리 팀워크가 좋아도 완벽하게 딱딱 맞추기는 힘들었다. 눈앞에 닥쳐오는 각자의 싸움이 있었고, 거기에 집중하다 보면 본인의 리듬에 맞춰 힘을 쓰게 되니까. 그래서 아무리 팀워크가 좋다고 해도 처음부터 콤비로 오래 함께 활동하지 않는 한 정확하게 합을 맞추는 건 어려웠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길드는 레이드를 나갈 때 참모를 꼭 채용했다. 애석하게도 원티드는 그럴 인력이 없었고, 그렇다고 새로 참모를 하기에는 너무나 문턱이 높아, 다들 그냥 오래 알고 지낸 이력을 활용해 대충 싸웠다.

그러다 난생처음 참모를 이용하니 이런 신세계가 없었다. 왜 이 좋은 걸 지금까지 안 했나 싶었다.

「“끝나면 길드장한테 항의한다.”」

이 좋은 걸 없이 그냥 살았다니. 돈은 참아도 이건 참을 수 없었다. 회사원이 다짐을 굳히자, 마찬가지로 같은 광경을 본 고딩이 화답했다.

「“미투요.”」

두 길드원의 굳은 다짐이 다 들렸지만, 그보다 눈앞에 싸움에 집중한 나는 그건 미래의 유지한에게 토스하기로 하고 이후의 전투 방향을 지시했다.

“네. 좋은 다짐은 뒤로 미루고 회사원님은 그대로 고딩에게 합류합니다. 나머지는 잔챙이 처리이니 다른 헌터들만으로도 충분할 거예요.”

「“알겠습니다.”」

이쪽은 처리했으니 이제 다른 쪽을 처리하고자 태블릿으로 화면을 전환하는데……. 갑자기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할 말이라도 있으신가요?”

고개를 드니 모든 참모들이 넋 나간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할 말이 굉장히 많은 것 같은 얼굴이라 여상히 묻자, 몇 번 금붕어처럼 끔벅거리던 이들이 말했다.

“……아닙니다.”

……뭐야, 아닌 거 같은데? 할 말 많다고 얼굴에 쓰여 있는데?

기존 참모들이 길드원들의 스킬까지 세세히 지시하지 않는다는 걸 전혀 몰랐던 나는, 대체 왜 저러나 싶으면서도 묻는다고 대답해 주지도 않을 것 같아 더 캐묻는 것 대신 다시 태블릿으로 시선을 돌렸다. 만약 그 사실을 알았다면 절대 그렇게 어그로를 끄는 짓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이 버러지 같은 것들이―!!!”」

화룡왕 드라키스가 짐승같이 울부짖으며 모든 힘을 개방했다. 어마어마한 마력 방출에, 열심히 공격을 퍼붓던 모든 이들의 다리가 꺾였다. 공격의 주축이 되는 헌터들은 간신히 버텼지만, 그들도 서 있는 게 고작이었다. 뇌를 강타하는 마력과 두개골을 울리는 포효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공간, 깨집니다……!”」

그에 결국 스킬 유지력이 흐려진, 히키가 신음을 삼키며 상황을 전달했다.

말하기가 무섭게 공간 결계가 깨졌다. 그리고, 그동안 공간 결계가 막아내고 있었던 마력까지 한 번에 폭발했다.

「“윽―!”」

엄청난 마력 방출에 헌터들이 자동으로 뒤로 밀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외곽에 쳐놓았던 결계까지 흔들렸다.

“……유예! 결계 유지하는 술사들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확인 중에 있습니다. 아직 정신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복구 가능합니다―!”

“바로 복구 부탁드립니다. 헌터들 상태는……!”

위험 상황을 알리는 경고등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켜졌다. 참모들은 이어폰으로 각 길드원의 상태를 확인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몰론 나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원티드! 각각의 상태는?!”

「“……윽― 회사원 괜찮습니다. 고딩도 잠시 흔들렸을 뿐입니다.”」

「“누나. 나도 괜찮아…….”」

「“저도 괜찮습니다. 지호 씨.”」

「“저도 이상 없습니다.”」

“유지한! 유지한은……!”

길드원들의 보고가 들어왔지만, 정작 길드장인 유지한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기다릴까 했지만, 절로 조급해진 마음에 의지와 별개로 말이 튀어나왔다.

다급한 목소리로 얼마나 그를 불렀을까. 뒤늦게 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괜찮습니다.”」

「“저도 아직 싸울 수 있습니다.”」

유지한의 곁에 있었는지, 스킬 파괴의 반동으로 힘들 것이 분명함에도 히키가 다부진 목소리로 답해 왔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쉬게 하고 싶었지만, 이미 그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냈다.

이번 레이드는, 그가 핵심이 될 것이었다.

“……엘릭서 있나요?”

「“엘릭서…… 아니…….”」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든 엘릭서가 있을 리가 있나. 히키가 구하기에는 벅찬 아이템이었다.

「“저 있습니다.”」

“유지한 씨? 하지만, 유지한 씨는….”

그럼 유지한이 쓸 게 없어지지 않은가. 빌어먹을 상황에 입술을 질근― 씹었다.

왜 난 엘릭서를 구해 두지 않았을까.

지금 당장 마켓으로 선물해 줄 수도 있긴 했지만, 그럼 커밍아웃의 위험성이 너무 커졌다. 지금 이 레이드가 세계로 생중계가 되고 있으니 더더욱.

“혹시 엘릭서 보유하고 있는 헌터 분 있으십니까?”

“저희도 전달해 드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원티드도 못 구하는데, 다른 길드라고 있을 턱이 있나. 있다고 한들 생사를 오가는 이 전투에서 그건 헌터들의 마지막 보루와도 같았다.

“일단, 마력 포션이라도 마시고…… 버텨 줘요.”

커밍아웃을 한다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었지만, 그것만큼은 최후의 최후까지 남겨두고 싶었다.

「“물론입니다.”」

이런 내 이기심은 꿈에도 모를 두 사람이 걱정 말라는 듯 화답했다.

“……고마워요.”

나 스스로의 이기심에 환멸이 날 것 같았다.

「“……일단, 어떻게든 해 볼게요.”」

힘겨운 목소리가 이어폰 너머로 들려왔다. 스스로의 무력함을 향한 분노와 이 빌어먹을 상황에 대한 자책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어떻게든 해 본다니. 그거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돈이 있어도 못 구하는 엘릭서다. 국내 랭킹 1위라는 유지한도 구하기 쉽지 않을 정도로. 물론, 자신이라면 어떻게든 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묘한 확신이 들었지만, 구할 수 있다고 한들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것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불가능했다.

블랙 마켓을 이용하면, 거래하기를 통해 선물하는 방식으로 전달할 수 있긴 하지만, 그녀는 대외적으로 비 각성자였다.

무명이라는 위치를 활용해 슬쩍 구한 뒤 다른 헌터에게 전달을 요청할 수도 없다. 비 각성자이면서 어떻게 구할 수 있었는지 설명하는 것도 난관인데다, 중간 다리 역할을 할 헌터를 과연 믿을 수 있을까. 대부분의 헌터들이 드라키스 전에 차출당한 상황에서, 어렵사리 믿을 만한 사람으로 고르고 골라도 엘릭서라면 중간에 이기적인 마음을 먹어 가로챌 법한 물건이었다.

정말 아무런 방법이 없는 건가. 히키의 덤덤한 목소리가 더 제 속을 아프게 찌르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할 수 있다’고 그 누구도 진심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마음을 품었다는 것만으로도 히키에게는 충분히 감사했고, 쓸데없는 사족을 붙여 그 다짐마저 날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지한의 마음 역시 같았기에 지호에게 괜찮다고 말하는 대신 히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더 할 수 있겠어?”」

「“포션도 마셨고, 물론이에요.”」

저도. 원티드니까.

히키가 쿨하게 남은 마력 포션을 원샷하고 내던지며 자신감 있게 답했다. 분명 아까의 반동으로 체력은 반 토막이 나다 못해 내상도 꽤 입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몇 번, 몇십 번, 몇백 번을 그렇게 당할 것임을 뻔히 알면서. 그리 말한 것이다.

모든 각오를 굳히고.

평소였다면 정말 괜찮냐고, 계속해서 물으며 더 할 수 있다고 고집을 부려도 그만해도 된다고 달래며 눈앞에 있는 이 소년을 만류했을 터이지만, 그러지 못했다. 지금 이 소년이 꼭 필요했고, 그리고 이미 모든 걸 각오하고 건넨 대답을 물거품으로 만들 용기가 그에겐 없었다.

「“가 보자. 만약 안 된다 하더라도…….”」

「“우리 실장님이라면 최후의 보루 하나는 준비해 놨을 거 같아요.”」

이번 말고 앞으로 1번의 기회가 남았는데 이번 한 번에 모든 걸 걸지는 않았을 거라고, 히키는 왠지 모르게 확신이 들었다.

그 추진력 넘치고 냉정한 여자가, 꿈과 희망이 가득한 상황만 상정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녀라면 모든 가능성을 생각해 두었을 테니까. 물론 최선을 다해 만반의 준비는 했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마지막의 마지막 그것까지 준비했을 것이다.

그런 여자였으니까.

히키는 특유의 존재감으로 원티드에서 거의 유령 인간처럼 지냈기에 그 누구보다 더 주목을 받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며 냉정히 지호를 볼 수 있었다. 그랬기에 히키는 자신했다.

“하하. 맞아.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마 100%일걸요.”

그녀가 당신을 잘못되게 두지 않을 테니까.

무슨 짓을 해서라도.

“왜 그렇게 확신해……?”

“지켜봐 온 것이 있어서요.”

설령, 온 세상을 적으로 돌린다 한들.

* * *

“……엘릭서, 제작 성공한 회사가 있던가요?”

입술을 곱씹으면서 물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내 곁에는 정하나가 있었다. 현재 헌터 관련 신기술 분야에서 선두를 달리는, 센터의 천재라 불리던 정하나가.

그런 정하나가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 또라이를 믿지는 않았지만, 그 실력만큼은 믿었기에 그녀조차 엘릭서를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더욱 절망적이었다.

마켓에 가뭄에 단비 내리듯 올라오는 그걸 구하는 것도 충분히 힘들었는데 그걸 분석해서 실험하려면 대체 얼마나 많은 양을 구해야 하는가. 없는 게 당연했다. 현 상황에서 만들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지금은 그런 것에라도 기대고 싶었다.

무명으로서는 도와줄 수도 없고, 도와서도 안 되는 지금 자신에게 남은 건 어리석다는 걸 알면서도 품을 수밖에 없는 희망뿐이었다.

‘빌어먹을…….’

왜 엘릭서 챙겨 줄 생각을 안 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스스로가 머저리 같아, 반사적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엘릭서를 와장창 챙겨 주면 대체 이 귀한 걸 어디서 이렇게 구했냐며 의심을 사게 될 거라고 생각해 주지 못했는데, 지금 그런 사유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망할, 소설.’

커밍아웃이든, 이다음 단계가 있어서 이 정도에 주저앉으면 인류는 나아갈 수 없다는 이유든. 전부 다 핑계였다. 더는 스스로도 모른 척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한, 핑계.

실은 그냥 두려운 것이었다. 어찌 되었든 소설과 달리 자신의 개입으로 난이도가 이렇게 뛰어 SSS급이 등장했다. 여기서 자신이 본격적으로 개입한다면 앞으로 또 어떤 결과가 펼쳐질지 알 수 없었다.

처음으로 소설의 강제성이라는 것을 조금 실감했다. 주인공에게 꽃길 한 번 깔아 주려다 이런 후폭풍을 맞았으니.

정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처절하게 머리를 쥐어뜯는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이 든 건지, 참모들이 침음을 삼키며 굳이 밝힐 필요는 없었던 고급 정보를 뱉었다.

“……사계절은 보유하고 있는 엘릭서가 없습니다. 최근에 한 개를 구하기는 했으나…….”

썼겠지.

이미 알고 있었다.

사계절의 길드장에게는 연인이 있었다. 한때 전도 유망한 루키였으나, 루키 시절 감당할 수 없는 적을 만나 마력을 한계까지 개방해 마력 회로가 다 뒤틀린, 비운의 루키. 제대로 개화도 하지 않은 신인이 한계까지 마력을 개방하면 그건 폭주나 다름없었다.

그 일로 뒤틀린 마력 회로는 현재 그 어떤 방법으로도 회복이 불가능했다. 환상의 포션이라고 하는 엘릭서를 제외하고.

가뭄에 콩 나듯 블랙마켓에 풀리고, 던전 클리어를 했을 시 기적에 가까운 확률로 떨어지는 엘릭서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 마력 회로가 뒤틀린 뒤 영영 깨어나지 못한 연인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사계절의 길드장은 미친 듯이 엘릭서를 찾아 헤맸다. 그러다, 엘릭서를 구입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 만든 게 지금의 ‘사계절’이었다.

소설에서 나온 이야기였다. 실제로 업계에서 잘 알려진 이야기이기도 했고.

덕분에 길드장이 국내 랭킹 최상위의 네임드가 아님에도 사계절은 많은 길드원을 보유하며 인망 있는 길드로 성장했다. 그리고 최근에 사계절이 드디어 엘릭서를 구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다른 이가 엘릭서를 구했다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어떻게든 뺏기 위해.

하지만 사계절이 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모두가 한마음으로 축하를 해주었다. 자그마치 7년 동안 오로지 단 한 명의 연인만을 위해 제 인생을 전부 건 남자를, 축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 어렵사리 구한 엘릭서가 없어 아쉬운 것이 아니었다.

세계 랭킹 1위라는 자리와 성위님의 빽 덕에 블랙마켓에 있는 모든 물건들을 무료로, 가장 우선적으로 구매할 수 있는 블랙마켓의 최상위 회원. 성좌들이 이용할 수 있는 마켓까지 이용할 수 있는 내게, 엘릭서는 물처럼 구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조금도 써먹지 못한다니.

죽 쒀서 개 준 꼴과 뭐가 다른가.

있는 대로 인상을 구기고 있는데, 나 혼자만의 빌어먹을 상황이 아님을 그제야 인지한 건지, 다급한 얼굴로 다른 참모진들의 입이 열렸다.

“저희도 있다면 당장 드리고 싶지만…….”

“녹음은 혹시 없습니까?”

“유예는요?”

지금 이 레이드의 공략은 히키에게 달린 것과 다름없었다.

드라키스의 움직임과 공격을 1초라도 정확히, 그리고 완벽히 막을 수 있는 건 그가 유일했으니까. 고작 1초지만, 고작 그 1초가 전투의 판도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절박한 얼굴로 숨겨 놓은 거라도 다 털어놓으라고 다급하게들 서로에게 이야기했다.

“아니. 엘릭서가 하늘에서 튀어나오는 것도 아니고…….”

“유예는 길드원들의 아이템을 체크하지 않습니다. 개인의 연구템이니까요. 일단 확인은 해 보겠습니다.”

그 다급한 목소리를 뒤로하고, 나는 히키를 확인했다.

처음이라 마력 포션으로 어떻게 버텨 보고 있는 것 같지만 아마 그것도 최대 3번이 한계일 것이다. 마력 포션과 회복 포션은 내성 때문에 포션 중독에 걸려 제 기능을 금세 하지 못할 터이니. 연속으로 그걸 세 병씩이나 마셔대면 포션 중독에 걸릴 게 분명했다.

조금쯤은 도와줘도 되지 않을까.

‘이래서 아예 안 보려고 했는데…….’

입술을 짓씹었다.

굳게 다짐한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 * *

지호가 입술을 쥐어뜯고 있을 무렵.

“공간술사가 회복할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

“공간술사 한 명이 한 일을 몇십 명이서 못할 리가 없어. 우리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마력 포션을 원샷 한다고 마력이 바로 차오르는 건 아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일단은 대기하고 있는 히키의 앞에서 어마어마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공간술사 자체가 매우 희귀한 직업인 만큼, 히키처럼 공간을 차단하는 것은 아무도 할 수 없었지만, 공간 마법은 분명 존재했다. 닥치는 대로 연금술사와 마법사들을 끌어모은 끝에 히키가 한 것과 비슷하게 공간을 분리해 드라키스를 가두는 데 간신히 성공했다.

물론 완벽한 공간 절단은 당연히 아니었지만, 비슷하게라도 만든 것이 어디인가.

아니, 미친 짓이었다. 미리 연구를 해서 계획한 것도 아니고, 오늘 처음 모인, 급조한 팀이 비슷하게라도 이걸 완성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우리나라에 천재가 이렇게 많았군요…….”

새삼 대한민국의 천재들의 위상을 맛본 히키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마력 포션이 돌려면 마시고 난 뒤 3분은 지나야 했다. 그때까지 히키는 다른 이들로부터 지켜져야 할 패 중 하나였다.

크아아아악―!!

파지직―!!

하지만. 완벽한 공간 결계조차 수 초를 견디지 못하는데 완벽하지 못한 결계가 그만한 시간을 벌어줄 리 만무했다. 드라키스의 포효에 결계에 금이 가며 생긴 틈이 부서져 내렸다.

“……안―!”

반사적으로 히키가 손을 뻗으려 했다.

“움직이지―! 쿠엑―!!!”

하지만, 그 손은 바로 뒤에서 입에서 엄청난 피를 뱉어내는 이의 손에 의해 저지되었다. 역반동의 여파를 견디지 못한 이가 쏟아 낸 피가 히키의 바로 앞에 흩뿌려졌다.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많은 피를 입으로 한 번에 쏟아낼 수 있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마법이 파괴될 경우 시전자에게 쏟아지는 역반동이 엄청난 줄은 알고 있었지만, 히키는 단 한 번도 이렇게까지 된 적이 없었던 데다 본 적 또한 없었기에 반사적으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뒤로…… 빠져―!”

“멀쩡한 이들은 얼른 틈 메꿔―! 쉴 틈 없다고!!”

“쿨럭…… 아직 마력 남았……, 어―!”

“큭……. 술사님은, 마력 조금도 쓰지 마세요……!”

고작 이런 데서 쓸 마력이 아니라고, 한 톨이라도 아껴 상황을 반전시켜 달라고.

간절히 느껴지는 바람에, 아직 다 회복하지 않은 마력을 끌어모으려 했던 손이 떨어졌다. 제 몸을 버려가며 남기는 이 간절한 바람을, 어찌 저버릴 수 있을까.

털썩―!

콰앙―!!

“기절한 술사들은 서둘러 옮겨―! 그리고 아직 괜찮은 자들은 앞으로 나와 들이부어!”

술사들이 하나둘씩 스러져갔다. 그 많던 술사들이 어느새 눈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줄었지만. 그런데도 그들은 의지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역반동으로 쓰러진 이들조차, 의식을 잃기 직전까지 마지막 마력 한 방울을 전부 다 짜내고 스러졌다.

어마어마한 집념이었다.

술사들은 보통 최전방에서 싸우는 이들이 매우 드물었기에 약고 치사한 데다 허세를 부리기 좋아한다는 평이 많았다. 맞는 말이기도 했다. 전투보다 연구를 즐기는 그들은 전투로 명성을 쌓는 것이 아니니.

세간의 주목을 근접전 헌터보다 적게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렇기에 그들이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건 마력과 지식뿐이었다. 각성자라 한들 전투계가 아니기 때문에 육체는 평범한 수준이었고, 회복력조차 평범한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니 겉보기에 그들이 어떻게 보여지겠는가.

원티드의 술사들처럼 이름이 널리 알려진 네임드의 경우는 얘기가 좀 달랐지만, 보통의 술사들에 대한 이미지는 그랬다.

때문에 술사면서 보통의 술사와 궤를 달리하는 삶을 살았던 히키는 그제야 그들이 제대로 보였다. 아니, 사실 원티드를 제외한 모든 인간관계의 문을 닫고 히키코모리로 살던 그에게는 이제야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아무것도 보려 하지 않았으니까. 소년은 이미 모든 것에 환멸이 났고, 가족 같은 원티드가 자신이 허용할 수 있는 마지막 선이었다.

그렇게 문을 닫고,

그렇게 살고 싶었고,

그렇게 살았다.

그렇지만 지금, 이곳에서는.

“이제, 비켜요.”

【포션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마력을 회복했습니다.】

그런 세계 속에서만 살다, 굳은 다짐과 함께 새로이 맞이한 세상은.

예전 그가 느꼈던 것과는 사뭇, 아니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이 세상은 그가 느껴 보지 못했던 세상이었다.

【공간술사가 벽을 허뭅니다.】

【넘지 못한 선을, 닿지 못한 공간으로 발을 내딛습니다.】

【타이틀이 변동됩니다.】

【공간술사가 진의를 터득하고 ‘공간의 반려자’로 단계를 올라섭니다―!】

바람에 후드가 벗겨져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보석 같은 보라색 눈이 찬란하게 빛났다.

【랭킹이 변동되었습니다.】

【현재 히키코모리, 전정국 님의 국내 랭킹은 ‘9위’입니다.】

【벽을 넘은 당신에게 찬란한 광휘가 깃들기를―!】

그렇게 소년은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이제 내 차례입니다.”

공간술사, 히키코모리. 2차 각성 완료.

* * *

히키가 각성하기 전.

성녀. 루치아 라이블리. 전말자는 자신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눈을 떴다. 분명 레이드에 합류하려고 준비를 하던 말자는 풀무장을 한 채 집을 나섰다. 그리고 목적지로 이동하려고 차에 탄 후…….

기억이 끊겼다.

힘겹게 눈을 뜨며 주변을 살폈다. 헬리콥터 안이었다. 왜 지금 자신이 여기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레이드 장으로 이동하고 있는 건가?

어떻게든 상황을 파악하려 머리를 굴리는데, 보이는 얼굴을 보고 그제야 말자는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자신에게 벌어진 상황을.

“……지금 뭐 하는 거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건, 다름 아닌 제이슨이었다. 그녀의 측근이자, 그녀의 절실한 신봉자.

내 안전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결국 마지막에는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이고 편협적인 내 신봉자님께서 지금 나를 납치한 것이었다.

“……성녀님을 그런 위험한 곳에 보낼 수 없습니다.”

내 안전을 핑계로.

“지금 그걸 말이라고…….”

“저곳에는 성녀님이 아니어도 수많은 헌터들이 있고, 또 그들은 전부 충분히 강합니다. 굳이 위험을 자처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도……!”

“성녀님이 안 계신다면, 성녀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저희는! 어떡하란 말씀이십니까……!”

스스로의 보신을 위한 이기심이라는 걸 모르지 않는데.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기가 막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저들이 실패하든 성공하든 바퀴벌레만큼 많은 인류는 결국 살아남을 테고, 거기서도 또 계급은 매겨질 것을 제이슨도, 그리고 그녀도 알았다.

그러나 열렬한 신봉자의 안중에 지금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들은 조금도 없었다. 레이드의 결과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레이드 이후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몰염치함.

레이드는 그들이 알아서 해 주겠지. 라고 당연하게 여기며.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개소리 작작 해.”

“……성녀님―!”

“내가 왜 너희들의 인생을 책임져야 하지? 너희의 인생은 너희의 것이니, 구하는 것도 스스로 하도록 해. 제발―!!”

나한테 그만 뜯어 가라고.

진절머리가 난다는 심정을 그대로 표출하며 소리치자, 제이슨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말자는 그런 것마저도 너무나 끔찍했다.

성녀로 산지 어언 십몇 년.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시선이었지만, 끔찍함만큼은 조금도 변하질 않았다.

“제이슨 밀러.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 마.”

“……그런!”

“난 성녀이기 이전에 헌터야.”

그러니, 내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었다.

촤아아악―!

“성녀님……. 윽―!”

헬리콥터의 문을 열어젖혔다. 어마어마한 바람이 강렬하게 몸을 한 번 스쳐 지나가고 나서야 비로소 밑이 보였다.

다행이었다. 마침 타이밍 좋게, 현재 위치는 레이드 최전선의 최상공이었다.

말자. 성녀 루치아 라이블리는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다.

“성녀님―!!!”

찢어질 듯이 울려 퍼지는 제이슨의 외침을 무시하고 성녀는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운 얼굴로 신을 외쳤다.

“만물을 다스리는, 상공에서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계실, 찬란한 나의 아버지. 나의 신이시여―!!”

【성녀의 외침이 신에게 닿습니다.】

【성녀. 루치아 라이블리가 제2의 성흔을 개방합니다.】

【성녀가 자유를 얻으며, 비로소 신에게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성녀를 넘어 신의 선택을 받은, 신의 ‘계시자’에게 환희의 찬송을―!】

천사들이 부르는 환희의 찬송가가 상공에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성녀의 베일이 떨어져 내리고 백금발이 하늘에서 찬란하게 빛났다.

“그대는, 나의. 나는 영원한 그대의 종이 되어. 그대를 대신할 찬란한 빛이 되리라.”

【계시자가 계시록의 첫 페이지를 기록합니다.】

【광역 회복 방어 스킬. ‘계시자의 순례(SS)’가 발동합니다.】

“루치아 라이블리―!”

성녀, 아니, 이제는 계시자인 그녀를 반기는 외침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후우. 나이스에요. 카밀라. 아직 늦지 않았죠?”

“아주 환상의 타이밍이야.”

드디어 모든 인원이 비로소 한자리에 모였다.

루치아 라이블리. 2차 각성 완료.

* * *

상공에서 무서운 속도로 한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처음에는 너무 멀리서 떨어져 그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떨어지는 것이 사람이고, 그 사람이 자신들이 아는 이라는 걸 알아챈 건 그녀가 내뿜는 찬란한 빛 때문이었다.

“그대는, 나의. 나는 영원한 그대의 종이 되어. 그대를 대신할 찬란한 빛이 되리라.”

【계시자가 계시록의 첫 페이지를 기록합니다.】

【광역 회복 방어 스킬. ‘계시자의 순례(SS)’ 발동합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상공에 울려 퍼지고, 환하게 빛이 터지며 모두의 몸이 빛으로 물들었다.

그와 동시에 알림이 울렸다.

【‘계시자의 순례’ 스킬의 효과가 적용됩니다.】

【피로의 지친 몸이 회복됩니다.】

【마력 회복이 가속화됩니다.】

【사기가 상승합니다.】

“……대박…….”

“뭐야 이 사기 스킬은…….”

거의 처음 시작했을 때와 비슷한 몸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느끼며 모두가 얼이 빠졌다. 성녀의 회복 스킬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으니까.

그 순간, 성녀가 집착적으로, 어느 곳에도 매이지 않고 돌아다니는 이유를 모두 납득했다. 그 정도로 하지 않았더라면, 외딴 곳에 갇혀 힐 셔틀로 평생 살았을 것이다. 어떤 인간이든 욕심이 나지 않을 수 없는 힘이었으니.

“루치아 라이블리―!”

순식간에 회복되는 힘에 정신을 놓고 있을 때, 반대로 스킬의 효과로 광기에서 빠져 나온 카밀라 레토가 재빨리 떨어지는 루치아를 받았다. 완벽한 타이밍에, 정확히 카밀라 레토의 품에 안착한 그녀가, 그동안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얼굴로 미소 지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후우. 나이스에요. 카밀라. 아직 늦지 않았죠?”

“아주 환상의 타이밍이야.”

굽이치는 찬란한 백금발.

자유를 마침내 손에 넣은, 사랑스러운 얼굴.

그런 표정을 짓는 성녀를 난생처음 보았는데도 카밀라는 그런 생각을 했다.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얼굴이라고.

광전사인 자신은, 각성한 뒤로 줄곧 광기에 시달리며 살아왔다. 조절해 보려 죽을 듯 노력해 보았지만, 그렇게 있는 힘껏 발버둥 쳐서 월드 랭커까지 됐음에도, 고작 이 정도 조절이 그녀에게는 최선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드디어 제 광기를 조절해줄 수 있는 이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이렇게 기적 같은 타이밍에. 누구보다 찬란하게.

카밀라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정말로 그녀가 신이 보내준 사자 같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신이, ‘자신’에게.

“카밀라……?”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밖으로 드러났다. 그에 성녀가 갑자기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럼에도 카밀라는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난생처음 느끼는 해방감이다. 평생을 벗어날 수 없다 여겨 왔던 이 지긋지긋한 광기에서 해방될 수 있는 희망이 생겼는데 이 기쁜 마음을 어떻게 숨길 수 있겠는가.

“내 여신님. 날 도와줄 수 있어?”

이제야 자유를 거머쥔 이 여신과 함께라면, 자신은 아마 광기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며 누구보다 강한 헌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마음을 알아챈 건지, 아니면 그저 상황에 답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여신은 더없이 아름다운 미소로 화답했다.

“물론이죠.”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좋아. 그럼 내 등을 부탁할게.”

【광전사. 카밀라 레토가, 일평생 자신과 함께할 광기를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습니다.】

【광기가 당신의 각오와 사념을 읽습니다.】

【광기가 당신의 마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생각했다.

【광전사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벽 앞에 다다릅니다.】

【당신의 새로운 걸음에 축복이 있기를―!】

“제대로 다시 가 보자고―!”

그녀는 이 벽을 반드시 넘어설 것이라고.

* * *

「“제대로 다시 가보자고―!”」

「“와아―!”」

광전사가 우렁찬 포효와 함께 광기를 있는 대로 뿜어내며 달려 나가자, 사기가 높아진 헌터들 역시 지지 않고 전투에 몸을 던졌다. 그 사이로, 성녀. 아니 ‘계시자’의 목소리가 아름답게 울려 퍼졌다.

「“나의 이름 아래. 나의 아버지의 아름 아래. 당신은 분명 내게 사랑을 받을 자일지니―!”」

【계시자가 ‘계시자의 가호(SS)’을 선언합니다.】

【계시자의 가호를 받는 동안, 신의 가호가 당신과 함께합니다.】

“……전말자.”

감탄할 수밖에 없는 위용을 만천하로 드러내는 저 빌어먹을 친구를 보며 나는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흽싸였다.

성녀의 합류는 일행에게 엄청난 전력이 될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었다.

거기에 2차 각성까지. 랭킹에 변동이 없었지만, 그건 원래 그녀가 보조계 직업이기 때문이지, 결코 그녀가 강해지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 보라. 풀 힐을 저렇게 광범위하게 펼치다니.

누구도 가능하다고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조금도 힘들어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대단했다. 그뿐 아니라 그녀는 쉬지 않고 다른 스킬들도 사용하고 있었다. 광역 힐을 하는 중이건만. 가장 기본적인 수준이 이 정도라는 의미인데, 그럼 대체 필살기는 어떤 스킬일지.

무서울 지경이었다.

아군이라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든든했다.

하지만 ‘성녀’의 존재 가치와 별개로, 친구로서는 그걸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친구의 시선에서 보자면, 사지로 제 몸을 던지는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까. 이렇게 만천하에 스스로의 이용 가치를 드러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더욱이 전투 스킬이 아닌, 힐이니까.

어떤 병이든 치료할 수 있는 치유사는, 누구라도 손에 넣어 좋을 대로 이용하고 싶어 할 것이 자명했다. 힐이 주 스킬이면 전투 스킬은 자연히 힐보다 달릴 수밖에 없으니 제압하기도 어렵지 않겠지.

버러지 같은 것들이 먹잇감으로 탐낼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본인도 그것을 알기에 그리 도망 다녔던 것이 아닌가.

베일까지 쓰고.

근데 대체 무슨 심정으로 한 몸같이 여기던 베일까지 벗고 만천하에 얼굴을 드러낸 채 저러는 것인지.

“성녀가…….”

“한국인이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훤히 드러난 얼굴에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국적은 미국이고, 세계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니면서도 정작 한국은 거의 온 적 없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누가 봐도 한국, 아니, 동양인의 얼굴을 하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아니. 한국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동양계 얼굴이지 아직 어느 쪽인지는 확정이…….”

“만약 한국이라면 국적에 변동이 생길 수도…….”

“그럼 세계적으로 반향이 엄청날 겁니다.”

“그녀의 의사도 중요합니다. 그녀가 국적 선택을 새로이 할지…….”

무엇도 밝혀진 것이 없으니 조심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한국인답게 벌써 김칫국 한 사발을 드링킹 하고 그 이후 과정까지 이야기하고 있는 이도 있었다.

뭐 그거까지는 괜찮았다. 설레발 정도는 누구나 칠 수 있었고, 또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참모로 활동하고 있는 그들이라면, 마땅히 향후 방향성에 대한 가정까지 세워야 했다.

가장 견딜 수 없는 건…….

“정말 한국인이면 당연히 고국을 선택하겠지요.”

라고 이미 확정을 하며 당장 미국에 전언을 보내라고 손짓하고 있는 머저리 같은 인간이었다.

진짜 머리에 돌밖에 들지 않은 것 같았다. 한국인이라면, 그리고 한국으로 오고 싶었다면 진작 국적을 밝히고 국적 변경 신청을 했겠지만, 그녀는 현재 한국 국적을 말소하고 미국 국적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만 봐도 그녀가 한국 국적으로 살아갈 생각이 없다는 것은 명백하건만. 희망을 갖는 정도라면 모를까,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일부터 벌이려는 멍청한 소리라니.

역겨워서 봐주기가 어려웠다.

물론 더 역겨운 건 저런 짓을 하는 인간이 우리나라 국회에 저놈 하나만 있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대한민국의 미래가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애초에 기대도 안 했지만.

“……쯧.”

“……지호 씨?”

혀를 차자, 옆에 있던 이들이 의아하다는 듯 나를 돌아보았지만, 나는 화답해 주지 않았다. 일단 이 문제는 나중으로 미뤄 두어야 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이 있으니.

「“밀리언―!!”」

「“알았어―!”」

【빛의 술사가 ‘빛의 축포’를 발동합니다!】

콰과과과광―!

「“크아아아―!!!”」

「“유지한! 밑으로 파고들어 다리 한쪽만 노려!! 우리는 팔로 가자!”」

「“오케이!”」

지금은 일단, 이 상황에 집중해야 했다.

* * *

히키가 빠지고 술사들이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해 공격하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히키를 완전히 대신하는 건 무리였다. 그 영향으로 착실하게 체력을 깎아 먹으면서 입히는 공격 유효타 또한 현저히 약해져 전방의 딜러들이 이를 악물고 있었다.

원거리에서 원조하는 헌터들과 달리 근접전 딜러들은 포션을 마실 시간도 부족했다. 때문에 금액이 천문학적인 자동 회복 아이템으로 버티고 있었지만, 그걸로 어떻게 될 수준이 아니었다.

“뒤는 제게 맡겨요.”

그래도 어떻게든 솟아날 구멍이 생기긴 하는 건지, 기적 같은 타이밍에 성녀가 나타나 전세를 뒤집었다.

이 자리에 있는 월드 랭커들은 내심 그녀가 나타나지 않길 바랐다. 지금 이 레이드에서 실력을 발휘해 봤자 더 힘든 길을 살아갈 것이 뻔한 그녀였으니까. 힐이란, 축복이란. 그런 것이라는 것을. 다른 누구도 아닌 월드 랭커들이 모를 리 없었다.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그들도 처절하게 알고 있었으니.

그런 만큼, 승리를 확신할 수 없는 쪽으로 전세가 기울던 이곳에 모든 것을 감수하고 혜성처럼 나타난 그녀가 어찌나 고마운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으리라.

더욱이, 한 단계 나아가 인간에게 휘둘리기만 하는 성녀가 아닌, 인간들의 위에 설 ‘계시자’가 되어 나타났다. 그녀의 선택과 행동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평생을 바쳐도 갚지 못할 빚과 같았다.

“죽어 버려―!!”

계시자의 효과로 한층 성장한 카밀라가 가차 없이 드라키스의 피부에 상처를 냈다.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고, 그 순간을 놓칠 리 없는 헌터들이 미친 듯이 공격을 퍼부었다. 분위기는 완벽히 이쪽으로 가져왔다.

하지만, 월드 랭커들은 알 수 있었다. 결정적인 한 방을 먹이지 못하면 이 전투는 패배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밀어붙여!”

“더. 더! 절대 틈을 주어서는 안 돼!”

“루이스!”

“알았어―!”

【성기사가 ‘심판의 검(S)’을 사용합니다.】

[“버러지 같은 것들이―!! 모두 재로 만들어주겠다―!”]

콰아아아앙―!

“브레스다! 막아! 아니, 피해!”

“우아아악―!!”

“……안돼―!!”

“시체 돌아보지 마! 계속 공격해!!”

“예!”

모두가 치열하게 공격한 덕에 피해를 분명히 주고 있긴 했지만, 쓰러뜨릴 정도는 아니었다. 간신히 맞서 싸우고 있기는 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쪽의 전력만 점점 깎여 가고 있는 상황. 계시자로 2차 각성을 한 성녀라도 드라키스의 자잘한 공격에 전력이 줄어드는 걸 전부 막을 수는 없었다.

결정타가 될 만큼 큰 피해를 입히기 위해서는 1초라도 녀석을 완벽하게 묶어 놓고 그 틈을 노려야 하는데, 완벽하지 않은 결계로는 아무리 애를 써도 그럴 틈을 만들지 못했다.

이렇게 실패하는 건가.

조금씩 낮아지는 승률을 몸으로 느끼며 모두가 속으로 욕을 하고 있을 때, 마치 신이 그들을 돕겠다고 나서는 것처럼 다시 한 번 희망이 찾아왔다.

“합류하겠습니다.”

극적인 타이밍에,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모두가 놀란 듯 뒤를 돌아보았다. 목소리에 놀란 것도 있었지만, 이전과 비교해 너무도 달라진 탓이 컸다. 마력의 농도 자체가, 조금 전의 그와 너무나 달랐으니까. 영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게 만들 정도였다.

그러나 지한을 놀라게 한 건 그의 얼굴이었다.

“정국이…… 너―!”

밖에서는 절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그가, 아예 모자로 얼굴을 덮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들만 알고 있던 미모를 뽐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지한은 그가 2차 각성을 한 것보다 그게 더 놀라웠다. 그런 자신의 가족을 향해 히키, 정국은 듬직한 미소로 답했다.

“네. 이제 더 도움이 될 수 있어요.”

이제 당신과 더 동등하게, 한 발 나아갔다는 기쁨의 미소에 지한은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을 위해서, 벽을 넘고 세상에 나온 그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결국, 해 줄 수 있는 말은 너무나 뻔하기 그지없었다.

“맡길게.”

너무나도 간결하고 하나 마나 한 것 같은 대답.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정국에게는 충분했다.

“물론이에요.”

【공간의 반려자가 ‘공간의 분리(S)’를 발동합니다.】

【지정대상은 화룡왕 ‘드라키스’입니다.】

【시전자보다 아득히 높은 격을 가진 존재입니다.】

【스킬이 완벽하게 발동되지 못합니다.】

【스킬의 유효시간이 1분으로 축소됩니다.】

2차 각성을 했음에도 공간을 완벽히 분리해 내지는 못했다. 고작 1분. 하지만 그 1분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거리낌 없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최고야―!”

1분이면 무엇을 하든 충분한 시간이었다. 모든 랭커들이 저마다 자신의 궁극기를 준비했다.

“만물을 가르는, 신이 하사한 성검이여―!”

【성기사가 ‘엑스칼리버(SS)’를 선언합니다.】

“이 세상에 잔존하는 모든 광기는 나의 몸에, 나의 검에 깃들지어니―!”

【광전사가 궁극 스킬 ‘광기의 집결(SS)’ 발동합니다.】

「“유지한 씨. 준비됐죠?”」

“물론입니다.”

【‘정당한 분노(SSS)’ 자신의 역할을 위해 움직입니다.】

【‘정당한 분노(SSS)’가 발동합니다.】

【‘정당한 분노(SSS)’가 승리의 검, 세이라의 궁극 스킬을 극대화시킵니다.】

【궁극 스킬이 진화합니다.】

【승리의 검. 세이라가 궁극 스킬. ‘승리로 집약된 일격(SSS)’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마력의 준비를 마쳤을 때, 밀리언의 선언이 내려졌다.

“지금―!”

밀리언의 선언과 동시에 모두가 마지막 발동어를 내뱉었다.

“엑스― 칼리버―!!”

“집어삼켜―!!”

“승리를 나의 손에―!!”

【스킬이 발동됩니다.】

【충격에 주의하여 주십시오―!】

“우아아아악―!!”

어마어마한 일격에, 뒤에서 보조를 하고 있던 헌터들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밀려났다.

[“크아아아악―! 비…… 빌어먹을…… 인간 주제에……!!”]

드라키스가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커다랗게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들의 일격은 완벽했다.

“……드…… 드래곤 하트다.”

“……됐, 됐어!!!”

완벽한 삼위일체 공격에 드디어 가슴을 감싸던 두꺼운 피부가 갈라지고, 찬란하게 빛나는 드래곤 하트가 드러났다.

탁―!

궁극기를 쏟아낸 세 사람이, 엄청난 마력의 소모로 검을 땅에 박고 지팡이 삼아 쥐어 몸을 지탱했다. 누가 봐도 이제 한계에 다다른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역할은 이걸로 충분했다. 아니 오히려 차고 넘치게 해주었다. 밀리언이 상기된 얼굴로 소리쳤다.

“계시자―!!”

“내가 정의하는 악에게, 신의 철퇴를―!!”

【계시자가 ‘신의 철퇴(SS)’를 선언합니다.】

“라그나로크!”

【궁극 스킬 ‘라그나로크’가 발동합니다―!】

허공에서 신의 창이 내려와 그대로 드라키스를 내리 꽂았다.

“끄아아아악―!!!”

라그나로크의 창에 꿰인 드라키스는 의식이 채 돌아오지 않았음에도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이제 마지막이야―!!”

【빛의 술사가 궁극 스킬, ‘빛의 창(SS)’을 발동합니다.】

손에 들려진 빛의 창을 그대로 날렸다.

목표는 단 하나. 드라키스의 심장이었다.

“이…… 이렇게…… 빌어먹을…… 버러지들이―!!”

파삭―!

빛의 창이 정확히 심장을 꿰뚫었다.

“아직…… 아직―!”

찬란한 드래곤 하트가 부서져 내리며, 드라키스의 몸이 타올랐다.

그와 동시에 이미 모든 전력을 소모한 그들에게 더없이 찬란한 알림음이 울려 퍼졌다.

【축하드립니다!】

【믿을 수 없는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오랜 세월, 수많은 세계를 멸망시켜 온 드라키스가 기나긴 생을 마감합니다.】

【게이트를 클리어 하셨습니다.】

【보상은 차후 개개인에게 주어질 예정입니다.】

【게이트 클리어에 참여한 이들에게 모두 ‘드라키스의 살해자(S)’ 업적이 부여됩니다.】

【멸망을 막은 인류에게 경외를―!】

알림음이 울리고 나서도 다들 한참을 돌상처럼 굳어 있었다. 눈으로 생생히 보고 있고, 시스템이 확인 사살을 해 주기까지 하는데도, 이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하지만 그건 그리 길지 않았다.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것이 결국 이루어졌는데, 계속 그러고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이런 알림음 뒤에는 역시…….

“……다…….”

“끝났다―!!!”

“우리가 해냈어―!!”

“와아―!!!”

이런 환희의 목소리가 잘 어울렸다.

* * *

한 편의 영화 같은 장면에 모두가 숨이 멎듯, 숨소리도 내지 못한 채 화면에 집중했다. 어떤 참모도 자신의 길드원에게 지시를 내릴 생각은 하지 못했다. 답 없는 머저리가 아닌 이상, 여기서는 지시보다 헌터들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니. 아. 물론 모를 것 같은 머저리도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대단한 말을 생각해 낼 수 있는 머리통도 아니었기에 가만히 잘 닥치고 있었다.

그렇다고 윤지호가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었다.

“유지한 씨. 준비됐죠?”

현실감조차 없을 놈을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녀석을 붙들기 위해, 승리에 확신을 불어넣기 위해.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어서.

말을 걸었다. 그에,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물론입니다.”」

이어폰 너머로 들리는, 기쁨이 스며든 목소리. 분명, 그는 결사의 순간임에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으리라. 오로지, 내 한 마디 때문에.

그리고 그게 매우 만족스러운 나는 역시, 미친년이었다. 자괴감을 느끼며 씁쓸하게 남몰래 미소를 흘리는데, 마침내 그들이 그토록 열망하던 알림음이 울려 퍼졌다.

【축하드립니다!】

【믿을 수 없는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오랜 세월, 수많은 세계를 멸망시켜 온 드라키스가 기나긴 생을 마감합니다.】

【게이트를 클리어 하셨습니다.】

【보상은 차후 개개인에게 주어질 예정입니다.】

【게이트 클리어에 참여한 이들에게 모두 ‘드라키스의 살해자(S)’ 업적이 부여됩니다.】

【멸망을 막은 인류에게 경외를―!】

알림음이 뜨자마자, 처음 반응은 다들 비슷했다.

숨 막히는 침묵.

「“와아―!!”」

그리고 헌터들의 환호성이 들리자, 참모실의 분위기도 후끈 달아올랐다.

“해냈어……! 해냈다고……!!”

“우리가……! 해냈습니다!”

“결국…… 이겼어!!”

어찌나 기쁜 것인지 들려오는 말들이 전부 어린아이가 할 법한 것들이었지만, 모두가 개의치 않았다. 너무 기쁠 때 나오는 말은 의외로 너무나 하찮고 단순하다는 것을, 이제는 전부 알고 있을 사람들었으니.

그 사이 홀로 아무 말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기분은… 혼자 왕따가 된 기분이었다.

물론 기쁘긴 했다.

한 번의 기회를 더 써야 하나. 그런 생각까지 했는데 이렇게 손실 없이 클리어 하다니. 물론, 술사들의 피해가 엄청났고, 앞으로 용아병들을 비롯한 잔당 처리가 잔뜩 남긴 했지만, 전멸도 각오했던 전투였던 만큼 이 정도면 손실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최후에 월드 랭커 몇몇만 살아남아도 감사하다고 여겼을 정도로 승리할 확률이 극도로 낮은 레이드였다. 거기서, 모두가 예상외의 성과와 함께, 기적을 이루어냈다.

감격스러워하는 게 당연했다.

‘……뭐지.’

왜 이렇게 마냥 기뻐할 수 없는 걸까.

왠지 모르게 찝찝했다. 너무 쉽게 끝난 느낌이랄까. 원래라면 이렇게 쉽게 끝날 게 아닌데, 이상하리만치 순조롭게 끝나 괜히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몰랐다.

아무리 물밑에서 돕긴 했지만, 소설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이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이 정도 피해에 그칠 것도 아니었고. SSS급이라는 건, 애초부터 이렇게 쉬운 게 아니었다.

시스템이 왜 SSS급으로 책정을 했는데.

물론 그에 맞게 레벨업을 시켜 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갓 레벨업 한 인간들 몇 있다고 넘어설 수 있는 급이면 SSS급이라고 하지도 않았겠지.

그러나 어쨌든 전투는 끝났고, 시스템이 그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만 마음을 편히 놓아도 되는데도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그냥 내가 걱정이 많은 것인가. 이제 와서 의심병이라도 도진 건지.

찝찝한 마음을 뒤로 보내고, 시간이 지나도 변화가 없으니 괜한 생각이리라.

“축하드립니다. 지호 씨.”

“아니. 축하는 제가 받을 게 아니죠.”

아니. 왜 나한테 축하를 해.

영문 모를 축하에, 황당해 저도 모르게 본 성격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격한 기쁨 때문인지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원티드가 가장 활약한 팀 중 하나이고, 손실이 없지 않습니까?”

“소수 정예이긴 하지만, 모든 멤버가 최전선에서 싸우는데 이렇게 손실이 없기도 드물죠. 원티드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번 레이드로 원티드의 위상은 더더욱 높아지겠군요.”

“아…….”

그제야 이해했다. 아. 그 얘기였구나.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다. 눈앞에 레이드에 온 신경이 다 쏠린 탓에 이다음에 일어날 일을 예측하기도 벅찼다.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위상 같은 사소한 것을 생각할 여력이 조금도 없었던 게 당연했다.

확실히 이번 일로 원티드는 이미 최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좋았던 길드 이미지를 원탑으로 찍었다.

부상자도 1도 없음.

생중계된 완벽한 팀워크와 연계.

보여준 힘.

그리고 2차 각성한,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공간의 반려자와, 월드 랭킹 최상위권에 속해 있는 승리를 걷는 헌터.

뭐 하나 모자라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아. 하나 있긴 했다.

호구력.

아무리 명예와 지위를 얻는다 한들 바뀔 인간들이 아니었으니까. 그건 좀 바뀌어도 되는데 말이다.

‘정화수라도 떠 놓고 빌어야 하나.’

원래대로라면 그들처럼, 나 역시 이런 걸 먼저 생각했어야 했다. 앞으로의 변화와 반향, 헌터와 관련된 사회의 움직임. 이미 끝나 버린 전투가 정말 끝난 것이 맞는지 하염없이 의심하고 고민하기보다, 거머쥔 승리에 기뻐하고 미래를 생각하고 있어야 했는데. 그럴 수 없었다.

나라고 긍정론을 믿으며 왜 웃고 싶지 않겠는가. 나 역시 다른 이들처럼 그러고 싶었다. 정말. 승리에 순수하게 기뻐하며, 걱정 하나 없이 축하의 말을 건네고 싶었다.

하지만 너를 지키는 건 생각보다 너무 어려워서. 너무 어렵고 겁이 나서 자꾸 걱정만 늘어갔다.

네가 조금이라도 잘못될까 봐.

“그러고 보니 카밀라 레토는 국적이 브라질이지만 따로 길드는 없죠?”

그사이 딴 얘기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영입하려고 혈안이 되겠군요.”

“브라질도 필사적일 겁니다. 그동안에도 엄청나게 스카웃 제의를 했다고 들었지만, 광기를 극복하고 2차 각성을 눈앞에 둔 광전사를 탐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길드들뿐만 아니라 여러 국가들도 탐을 낼 겁니다.”

“근데 브라질은 워낙 헌터로는 약소 국가라……. 아무래도 유명무실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유일한 월드 랭커가 카밀라인데 쉽게 포기할 리가 없죠.”

“발악이란 발악은 있는 대로 다 할 겁니다.”

“국제 사회에도 호소를 할 거고, 그럼 여론에서는 어느 정도 이득을 보긴 할거고요.”

“뭐, 그녀의 의사에 따라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말입니다.”

“그거로 따지면 성녀가 제일이죠.”

성녀? 말자?

카밀라 레토까지는 대강 흘려들었지만, 그 이후는 그냥 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 나를 알지 못한 채, 기다렸다는 듯이 여러 사람들이 대화에 살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럼요. 보아하니 측근들과도 결별한 거 같고.”

“자세히 확인을 해 보아야 하지만 국적이 한국이 확실하다면 정부 쪽에서도 강력한 어필을 할 테니 국내 길드들도 주목해야 할 겁니다.”

성녀를 뺏긴다는 건, 그야말로 그 길드의 전력을 뺏긴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녀의 존재는 길드 순위 자체를 흔들어 버릴 수 있는 엄청난 치트키였다. 성녀를 넘어, 계시자가 된 그녀는 국적 불문으로 모든 인류가 탐을 낼 수밖에 없는, 아주 유용하고 빛이 나는 존재였다.

아주 빌어먹게도.

“그래도 아직 확실한 건 없으니 말을 아낍시다.”

“맞습니다.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

지들끼리 아주 북 치고 장구 치면서 속으로는 어떻게 해야 스카웃을 할 수 있을까 머리 굴리는 게 선명히 보였다. 더 웃긴 건, 참모총장이라 나서며 별소리를 다 했던 거머리는 벌써부터 전말자 하나 잡겠다고 그 육중한 몸을 이끌고 서둘러 나가 버렸다는 것이다.

인사 한 마디 없이.

참 자칭 ‘참모총장’ 다운 행세였다.

‘……아주 지랄들을…….’

그 속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속으로는 잘들 한다, 라는 말이 맴돌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을 이성은 있었다.

여기서 말을 해 봤자 좋지도 않았고.

‘전말자. 양아치.’

속으로 헛웃음을 금치 않았다. 이 망할 영악한 년이 또다시 이런 숙제를 던져줄 줄이야. 정의롭고 착한 년은 맞지만, 영악하기도 한 년이 여기까지 계산을 안 했을 리가 없다.

내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으리라는 확신.

그리고 내가 자신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을 것이라는 계산.

아주 영악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걸 더 말도 못 꺼내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인 게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한 대 확 쥐어박았으면 싶었다. 계시자로서 그녀는 ‘어서오십시오.’라고 플래카드를 걸어 놓고 훌라춤을 추며 환호할 정도로 내가 원하는 전력에 완벽히 부합했지만, 친구로서는 웬수였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래도 데려올 거지 않냐며, 뭘 그렇게 열을 올리냐고 묻습니다.]

물론 그럴 것이다. 성녀가 계시자가 되고, 측근과 결별한 순간부터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아마 전말자도 내가 원티드와 함께하는 걸 알고 이번 레이드에 참여한 순간부터 마음을 굳혔을 것이 분명하다.

‘왜. 내 친구는 다 이따위지…….’

하나같이 골치 아픈 것투성이었다. 진짜. 내 취향 무슨 일이야.

암담한 현실에 머리를 쓸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뭐야. 다들 즐거워 보이네.”

열심히 준비한 사람 섭섭하게.

“……!!!”

갑자기 내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모두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낯선 여자가 나를 마주 보며 미소를 지어 줬다. 여자가 아니라 소녀라고 해야 어울릴 이미지였다. 고작 열여덟이나 되었을 법한 소녀의 얼굴은 아주 앳되고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그 미소로 알 수 있었다. 아주, 많이. 뒤틀려 있는 아이라는 걸.

“아주 화끈하게 우리의 계획을 망쳐 놨어.”

“……계획……?”

“뭐. 인류가 우리 생각보다 만만하지 않았나 봐.”

멍청한 대한민국 정부가 뻗대지 않고 월드 랭커들부터 끌어모을 줄을 몰랐는데 말이야.

하긴, 거기서부터 예상과 빗나가긴 했지.

소녀가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듯, 작게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혼잣말인 척하며 그녀는 내게 말을 걸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모든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도록 만들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반면, 다른 이들은 소녀의 묘한 어조보다 이번 재앙이 인위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대체 왜…….’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처음부터 시스템이 친절하게 말해 주지 않았는가. 인위적으로 발생한 게이트라고. 그렇기 때문에 봉인이 완벽히 풀리지 않아, 3번의 기회가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역시 사람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동물이라서 그런지, 다들 앞에는 싹 다 까먹고, 3번의 기회만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거참 자랑스러운 이 나라의 브레인들이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래, 아주 냉정한 분석 다 좋은데, 일단 거기서 떨어질 생각 없냐고, 짜증스럽게 묻습니다.]

그리고 안전불감증인 내게 잔뜩 짜증이 난 성위님이 어서 한두 보 앞으로 나갈 것을 요구했다. 매우 정당한 요구였고, 그 마음은 감사했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고작 저 정도에 당할 거 같지도 않고, 일단 그녀의 정체를 파악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분명 그녀가 머리일 리는 없을 테니까.

목적도 중요했고.

무엇보다 여기서 내가 움직인다면 그게 바로 시발점이 될지 몰랐다. 눈앞의 이 소녀가 본격적으로 움직일 시발점. 사실 여기 있는 누가 뒈져도 상관은 전혀 없지만, 그래도 쓸데없는 손실은 금물이었다.

아직.

“……왜, 그런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거지?”

오. 나이스.

이럴 때만 타이밍이 끝내주는 유해한이 내가 물어보고 싶은 질문을 대신해서 던져 주었다. 유해한의 질문에 모두가 긴장된 얼굴로 침을 꿀꺽 삼키며 들려올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돌아오는 말은, 모두의 예상과 비슷하면서 사뭇 다른 것이었다.

“알려 줘도 상관없으니까? 그리고 원래 초대를 하려면 먼저 솔직해져야 하잖아?”

“……초대라고?”

“그래. 우리 보스가 너희들을 데리고 오라고 했거든.”

“……뭐―!”

누군가 말을 다 뱉기도 전에, 검은빛이 우리를 덮쳤다.

충분히 없앨 수 있음에도 나는 그러지 않았다.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 준다는데 거부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너 진짜 너무 나 믿고 사는 거 아니냐고, 툴툴거립니다.]

성위님은 툴툴거렸지만.

이윽고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유지한……?”

“……윤지호?”

현재 가장 보기 껄끄러운 인간의 얼굴이었다.

“……이런……. ㅆ…….”

반사적으로 욕이 튀어 나가 황급히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개 같은 일이.’

당당하게 초대를 하기에 면상을 보여 주는 줄 알고 고대했는데, 예상했던 면상은 없고, 현재 지금 가장 보기 껄끄러운, 그렇지만 반반한 면상이 눈앞에 나타났다. 왜 하필이면 이놈이냐고.

아. 왜 난 두더지가 아닌 걸까. 두더지면 땅굴 파고 들어가기라도 했을 텐데―!!

오죽하면 두더지가 되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겠는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물리적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필요했다. 그 정도로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잘생긴 얼굴은, 엄청난 타격을 주고 있었다.

백 번 천 번 하는 전화보다 직접 만나 말 한마디 나누는 것이 원래 훨씬 어려운 법이다. 이어폰 너머로 대화하는 건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얼굴 보는 것까지 괜찮다는 건 아니었다.

아직, 얼굴을 마주할 용기는 없었다. 언제 그런 용기가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러게. 내가 뭐랬냐고. 내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고. 그냥 그거 당해 주지 말라니까 왜 말을 안 듣냐고 혀를 찹니다.]

진심으로 후회가 됐다.

일코고 나발이고 그냥 뒤로 쓱― 발을 빼던가. 혼자 철벽처럼 빠질걸. 후회가 물밀듯 몰려왔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나를 보고, 영문을 전혀 모르는 것 같은 반반한 면상이 내게 물었다.

“왜 여기에…….”

그러게. 나도 진짜 궁금하다.

누구든 좋으니 딱 한 대만 치고 싶었다. 그러면 이 기분이 어떻게 해소될 것도 같은데. 눈앞에 있는 반반한 얼굴의 주인이든, 아니면 이 상황을 만들어낸 원흉이든.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원흉 찾기 귀찮으니까 그냥 눈앞에 있는 놈 어떠냐며 제안합니다.]

매우 솔깃한 제안이었지만, 그럼 전 국민에게 조폭 마누라로 낙인찍힐까 봐 참았다. 모름지기 폭력은 누가 안 보고 있을 때 해야 하는 법이다.

[‘이매망량’ 님이 너님이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냐며, 당신의 패기에 실망합니다.]

성위님이 되도 않는 헛소리를 날리며 태클을 걸었지만, 깔끔하게 무시했다. 물론 그런 게 정말 신경 쓰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런 거지 같은 별명으로 전국에 얼굴이 팔리고 싶지는 않았다.

“여긴…….”

방금 전까지 생중계로 화면으로 보던 유지한이 눈앞에 있을 때부터 예상을 했지만, 레이드가 펼쳐졌던 장소, 그 한복판에 있었다. 엄청난 전투의 폐해로, 누더기가 되다 못해 까맣게 타버린 땅을 보니 쉽지 않은 전투였다는 게 새삼 실감이 났다.

까만 가루의 잔해가 코끝을 스쳤다. 독한 냄새에 불쾌감이 차올랐다.

“윽…….”

반사적으로 미간을 구기며 소리를 내자 그런 나를 보며 지한이 황급히 손을 뻗어 코와 입을 막아주었다.

“일반인이 맡기에는 독성이 강합니다. 자칫하면 병이 날 수 있어요.”

……그럴 것 같았다.

딱 봐도 유해했다. 물론 나는 일반인이 아니어서 독 때문에 병이 날 일은 없겠지만,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심장이 주체가 되지 않기도 했고, 말을 섞기도 어색해서 가만히 있었다. 때마침, 나와 함께 끌려온 사람들도 하나둘씩 상황 파악을 마쳤는지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여긴…….”

“왜 우릴 여기로 데려온 거지?”

“아까 그 여자는……!”

“그 여자라니 무슨 소리십니까?”

“우리를 데려온 여자가 있습니다.”

“그녀의 무리들이 이 레이드를 유도했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뭐?”

그들이 입을 열자마자 터지는 폭탄 발언에, 순식간에 도떼기시장으로 바뀌어 버렸다. 동료의 희생으로 살아남아 지금 이 자리에 간신히 서 있는 이들에게는 그 어떤 소식보다 충격적인 소식일 터이니 당연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걸 누가 일부러 깨웠다는 거야?!”

그들의 혼란과 분노를 이해했지만, 애석하게도 아는 것이 전혀 없는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찾아야 합니다.”

“누굴……?”

“우릴 데려온 그 여자 말입니다.”

이름도, 나이도, 아무것도 모른다.

그저 여자라는 것과 얼굴만 기억할 뿐.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진짜 미치고 환장할 소리에 이로운이 조용히 유해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유해한.”

“자세한 걸 듣기도 전에 끌려왔어.”

“일단 찾지.”

이로운이 직접 수색에 나선다면 이곳에 있는 이들로서는 이득이었다. 정령사로 최고 레벨에 오른 이로운만큼, 편하고 광범위하게 탐색을 할 수 있는 이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결국, 그럴 필요는 없었다. 이로운이 본격적으로 수색에 나서기도 전에, 그들이 그토록 외치던 ‘여자’가 제 발로 직접 나타나 주었으니.

“어머. 뭐야. 나 찾았어?”

아무리 봐도 찾기보다는 ‘잡아!’ 에 가까운 소리들이었음에도 그녀는 마치 친구가 자신을 찾았다는 듯 여상하게 말했다.

그에, 모두가 넋이 빠졌다. 누가 봐도 정상적이지 않은 태도와, 너무나 어린 외양. 그러나 그에 비해 강대한 마력까지.

심지어 기감이 뛰어난 헌터들은 입을 틀어막기도 했다. 마력에서 피어 나오는 독기를 도무지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입을 틀어막으면서 그들 모두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럴 만했다. 살아생전, 저렇게 온몸의 마력이 독기에 찬 인간을 어디서 보겠는가.

그녀는 외양은 소녀였지만, 정말 소녀인지도 의문스러웠다. 고작 그 어린 나이에, 저만한 독기를 담을 수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터이니.

그 혼란한 와중에 누군가가 어쩌다 이곳에 끌려온 거냐며 한탄하는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같은 마음이었다.

이 모든 일의 주동자 얼굴이나 한번 볼 수 있을 줄 알고 순순히 따라온 것이었지……. 여기 올 줄 알았으면 절대 안 왔어. 다시 한번, 속으로 쌍욕을 하고 눈앞에 있는 여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모든 시선의 주인공은 시선들이 부담스럽지도 않은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왜? 내가 좀 예쁘긴 하지?”

“…….”

눈에 비웃음과 가소로움을 가득 담고서 그런 얘기를 태연하게 내뱉었다. 경멸 가득한 눈동자를 감추지 않으며 마음껏 조롱을 하는 그녀의 모습에도 아무도 화내지 않았다.

그저 고요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미친 여자인 건 이미 판결이 난 거 같고, 아마 가늠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유용한 정보를 뽑아낼 수 있을지. 그게 아니라면 문제가 되니 처리해야 하는지. 다른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야, 나도 같은 생각이니까.

“지호 씨. 눈에 띄면 안 됩니다.”

그러고 싶은 생각은 1도 없거든?

더불어 너한테도 눈에 안 띄고 싶다는 마음을 꾹꾹 눌러 넣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 바보 아니에요.”

어그로를 끌어서 뭐 하게.

시답지도 않은 대답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는지, 유지한이 뒤에서 날 강하게 끌어안았다. 이 상황과 맞지 않게, 조금. 행복이 스며든 얼굴로.

“……행복해 보이는군.”

“……!”

그 순간이었다. 그들 사이로, 정확히는 유지한과 내 앞에, 웬 남자가 나타난 것은.

“…….”

너무 놀라 순간 숨조차 쉬지 못했다. 다른 이도 아닌, 우리 둘이, 다가오는 자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월드 랭킹 최상위권에 있는 나와 유지한이 아니던가. 어지간한 사람의 접근이었다면 접근을 알아채고도 남았을 테지만…….

하지만 남자에게선 조금의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그것뿐이었을까.

이렇게 두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기척은커녕 존재감조차도 그에게서는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분명 이 자리에, 오롯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그에, 불현듯 깨달을 수 있었다.

“……금기를 범했군.”

“…….”

드라키스를 깨운 대가인지, 아니면 그전에 범한 금기들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금기를 범했다는 것을 증명하듯, 생명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그가 바친 대가인 모양이었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고, 유령과도 같은 삶.

그러면서도 눈은 강렬히 살아있었다. 적어도 유지한을 보는 눈빛에 한해서는. 맹렬히 타오르는 분노가, 절절한 원망이, 그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왜 유지한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유지한이 선한 인간이라는 것과 별개로 어떤 이유로든 유지한을 싫어하는 사람이 세상에 없지는 않겠지마는, 적어도 저 빌어먹은 호구가 저렇게 맹렬한 분노와 원망을 받을 만한 짓을 하지는 않았다 자신할 수 있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너무 믿는 거 아니냐며, 그러다 아니면 어쩌려고 그러냐고 묻습니다.]

‘아니면, 내 눈이 동태 눈깔인 거지.’

뭐, 그것도 그거지만,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저렇게 등 돌리고 분노할 사람이 생길 정도로 유지한이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가 있을까?

그 ‘유지한’이?

소설에서도 그랬지만, 실제로 본 유지한은 더더욱 그럴 수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지 않았기에, 절로 호기심이 일었다. 정말 그럴 수 있다면, 아마 나는 그런 그를 또 이해해 줄 것이다. 그가 그런 인간이라고 해도 받아들여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유지한이니까.

“아. 그래. 어느 정도가 넘어 가더니. 이렇게 되더군. 걱정 마. 죽지 않으니까.”

원하는 바를 이룰 때까지.

유지한이 아닌, 다른 이가 한 말이었지만, 마치 유지한이 물은 듯 남자는 오로지 유지한만 똑바로 바라보며 답했다. 너한테 복수하기 전까지는 절대 죽을 생각이 없다고 말하는 것 같은 눈이었다.

글쎄. 뒤지는 게, 네 생각대로 되는 것만은 아닐 텐데……. 라고,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가지고 놀 수 있는 월랭 1위가 생각했다. 물론 그런 월랭 1위를 알 리 없는 남자는 금기의 대가로 절여져 가까이 가기만 해도 불행이 스며들 것 같은 몸을 열며 마치 광대를 자처하듯 말했다.

“제 생각 이상으로 훌륭하셨습니다. 아주 애석하게도요. 변수가 있다면 ‘무명’ 정도라 생각했는데, 무명이 나서지 않고 완벽하게 클리어를 하다니……. 아, 4군단장은 무명이 처리해 주고 몇몇은 버스까지 태워 줬으니, 아주 안 나선 건 아니군요.”

그 말에, 버스를 탄 몇몇이 순간 움찔거렸다. 아무도 관심을 주진 않았지만. 나 역시 관심을 줄 생각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등 뒤에 있는 인간도 티 나게 움찔거려서 모를 수가 없었다. 그사이, 다른 이가 남자에게 물었다.

“그 얘기를 왜 하는 거지?”

지금 그게 중요한 사항이냐고 묻자, 남자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 아니죠. 그냥 한탄하는 겁니다. 나름대로 아주 좋은 수를 놨다고 생각했거든요.”

아주 서글픕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얼굴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아주 즐거워 보였다. 보는 사람 기분 더럽게.

“뭐, 그렇다고 준비한 게 아주 없지는 않으니 안심해도 됩니다.”

나는 차선책까지 완벽하게 세워 놓는 남자라.

“…그게 무슨….”

불길한 말을 내뱉는 남자에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한국말로 하라고 따지려던 누군가의 말은 끝까지 맺어지지 못했다. 끝을 뱉기도 전에, 남자가 말을 잘랐으니까.

“에이나.”

“좋아. 시작할게! 재밌겠다―”

……무엇을?

생각과 동시에, 하늘이 다시 붉게 물들었다.

“……!!”

“……미쳤……!”

“말도 안 돼!!”

게이트의 징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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