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장. 성녀, 루치아 라이블리.(2) (19/30)

18장. 성녀, 루치아 라이블리.(2)

한편, 잠든 지한은 꿈을 꾸고 있었다. 아주 잠시임에도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심지어 원래 꿈을 좀처럼 꾸지 않았기에 더 기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습게도 지한은 이 꿈을 조금 더 오래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윤지호! 아 이게 진짜……!”

“아. 사 줘도 지랄이야.”

네가 나오니까.

분명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지만, 내게는 잘 보여 주지 않는 모습을 많이 보여 주니까.

친구들과 있는 너는 입도 더 험해지고, 더 많이 투덜거리기도 하지만, 그 행동들에서 안정감이 느껴졌다. 내게는 보여 주지 않는 편안하고 시원스러운 미소와 함께.

“어, 윤지우다.”

“오. 윤지우 능력자야? 옆에는 여친?”

“그럴 리가 있나. 분위기 봐라.”

정말 의아하긴 했다.

이 꿈은 정말 자신이 바라던 것을 보여주는 건지. 내가 알지 못하는 네가 나왔으니.

더욱 신기한 건, 고작 꿈으로 보는 너는 환상임이 분명한데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생생하다는 점이다. 내 망상이나, 기억에 의존하는 꿈일 게 분명한데 분위기부터 얼굴에 있는 점 하나까지 완벽했다. 꼭, 진짜로 너를 보는 것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너의 모습을 꿈이라는 창구를 통해 엿보는 것처럼.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말이다.

“어? 저기 네 남친이다.”

“응? 어디?”

남친……?

무척이나 생소한 단어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절대 지호의 입에서 나올 소리가 아니었으니 생소할 수밖에 없긴 했다. 내가 아는 윤지호와 남친이란 단어는 거리가 매우 멀었으니.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 단어가 현재 거리가 있다 한들, 그 단어를 본인이 사용한 적이 있다는 것을.

‘이로운.’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친구가 가리키는 곳을 돌아봄과 동시에 가증스러운 얼굴이 나타났다.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꿈이라 한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을.

“……이로운!”

그를 보고, 네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으니.

반갑지는 않지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아. 너는 네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저런 얼굴을 해 주는구나.

누가 보아도 상대를 반기는 미소와 손짓에 이로운이 세상을 다 가진 듯 미소 지으며 걸음을 서두르다 이내 거의 뛰다시피 달려왔다.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이라도 그랬을 테니까. 네가 이렇게 애정을 주는데 어찌 그러지 않을까. 네가 이렇게…… 내게도 그래 준다면 더한 것도 할 수 있는데.

“……으악. 내 허리. 잘못되면 책임질 거야? 누가 달려오래.”

“책임지게 해 줄 거야?”

질게. 당장.

흔들림 없는 행복한 목소리를, 꿈이라도 질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런 기회도 받지 못한 것이 나였으니까.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대충 생각해도 그녀가 자신, 그러니까 유지한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너무나 많아 일일이 따질 수도 없었다.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랭커.

대한민국 대표 헌터.

굴지의 길드. 원티드의 수장.

국민 영웅.

이런 자신의 연인이라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감내해야 할 것이 어느 정도일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에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다며 원망할 처지도 되지 못했다. 자신을 선택하지 않는 건 너무나 당연했으니까.

단순히 호감으로 감내하기에는, 엄청난 핸디캡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호감은커녕 쳐다보지도 않을 스펙들이었다. 연인이 대단한 남자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거나 우월감을 느낄 수도 있겠으나, 애석하게도 제가 사랑하는 윤지호는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

그랬기에, 사랑했을지도 모르지만.

다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포기를 하지 못해, 이기적으로 계속 붙들었던 것이었다. 제 이기심을 알면서도 동정인지 모를 마음으로 그녀는 그저 붙잡혀 준 것이었지만.

동정이라도 좋았다. 기꺼이. 오히려 감사했다. 그렇게라도 너를 잡아 둘 수만 있다면.

“얼씨구. 그래서 내 허리를 뽀사 놓겠다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밤에는 진심일 텐…… 읍―!”

“그…… 그…… 아니야―!”

아니. 진짜인 거 같은데.

황급히 틀어막는 손이 불만인 듯 불손한 눈길을 보내면서도 미소는 지우지 못했다.

장담했다. 저 때의 이로운은,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행복감에 너무 젖은 나머지, 결국 행복을 제 손으로 박살 냈지만. 그러고도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했을 만큼. 그녀와 함께하는, 함께했던, 모든 나날을 사랑했을 거라 자신할 수 있었다.

누가 봐도 부러울 만한 광경이었다.

원망과 질투를 참기 위해 애꿎은 주먹만 쥐다 보니 결국 주먹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고작 이런 상처에 신경을 쓸 정도로, 순탄한 삶을 살아오지는 않았기에.

“알았어. 밥은?”

“……아직.”

“헐. 안 먹고 뭐 했어?!”

서러움과 질투가 범벅된 얼굴로 그들을 지켜보다, 불현듯 깨닫게 되었다.

지금 이 광경을 지켜보는 건 나이면서, 내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내가 맞았지만, 다른 ‘나’의 시각에서 보고 있었다. 지금의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또 다른 나 자신.

그 사실을 인식하자 이유는 모르겠지만 본능적으로 다른 것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헌터 유지한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

눈앞의 그녀 또한,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세상의, 윤지호라는 사실을.

“……!”

그 순간,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내가 서 있었다. 나와 똑같으나, 내가 아닌. 유지한이.

그 유지한이 입을 열었다.

“한순간도, 잊지 마.”

“……무엇을.”

“저 광경의 주인공이 나였으면 한다는 마음.”

어떠한 순간에도. 세상보다, 지켜야 할 것보다, 그 마음을 우선시하라는 이기적인 말에 공감은 하면서도 머리에 새겨진 양심으로 힘겹게 반박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 거지?”

“나는, 그리고 너는. 이미 두 번이나 실패했지.”

“……?”

무엇을?

그가 하는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유지한은 내 이해 따윈 중요하지 않다는 듯 흔들림 없이 말했다.

“반드시 기억해. 이번이 우리의 마지막이야.”

“…….”

“다음은 없어.”

그러니까, 대체 무엇을.

이런 불친절한 경고가 어디 있는가.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경고가 가슴에 틀어박혔다.

그게 기억의 마지막이었다.

* * *

“헉-!”

갑자기 번쩍― 눈을 뜨며 벌떡 일어나는 지한의 모습에 너무 깜짝 놀라 마시던 술을 조금 쏟았다.

“엄마야. 깜짝이야. 악몽 꿨어요?”

식은땀까지 줄줄 흘리는 모습에, 일단 마시던 술을 내려놓고 황급히 유지한을 살폈다. 금방 일어날 거 같아서 내버려 뒀는데 대체 무슨 꿈을 꾼 건지.

“숨 쉬어요! 대체 뭘 꿨길래…….”

“헉……. 허어억……. 지호 씨?”

“그래. 나예요.”

내 집에 나 말고 누가 있다고?

꿈에서 깼음에도 왜 여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이렇게 떠는 것인지. 아직도 겁에 질린 눈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더 너스레를 떨었다. 다 개소리인 걸 알면서도 언제나 내 그런 모습에 안심하는 너니까. 그저 좋다며 행복하게 미소 짓는 너니까. 그게 나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두려움에 떨기보다 웃는 네 모습이 더 보고 싶었다.

“……그렇죠.”

그리고 역시나. 예상했던 것처럼 이런 내 너스레에 그제야 현실로 돌아온 지한이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또 안쓰러워 마음 편한 척 마주 웃어 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는 그 반대였지만.

속이 시끄러웠다.

내가 그 마음을 기만하고 있어서. 나로서는 감히 그 마음을 가질 수 없어서. 다 내가 문제라는 것을 알기에 더 속이 시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정말 나답지 않았다. 갖고 싶은 건 어떻게든 가져야 하는 지랄 맞은 성미인지라, 한 번도 내가 갖고 싶은 걸 포기해 본 전적이 없는데, 시작해 볼 생각도 하지 못한다니.

답지 않은 두려움이었다.

이미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고, 이 소설의 히로인까지 바꿔 버렸으면서 잘못될까 두려워하다니. 누가 들어도 비웃을 개소리였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요?”

“다 갔죠. 이제 너님도 집에 가실 차례랍니다.”

꼬집―

“앗…… 죄송해요.”

이런 한심한 모습조차 예쁜 너라서. 너를 갖지 못하는 게 화가 나서.

내 손으로 모든 걸 바꿨지만 나를 향한 너의 마음이 언제, 어떤 억지력으로 인해 바뀔지 알 수가 없어서 두렵고 짜증이 났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본래 그런 법이라지만, 가능성이 확실한 것과 확실치 않은 것이 어떻게 같을 수 있을까.

빙의물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지 않던가. 소설의 억지력이 강제로 등장인물들의 관계나 감정을 바꿔 버리는 일.

지금까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나라는 변수에 따른 대가인지 모든 난이도가 급격히 올라갔고. 메인 스토리들이 무시무시하게 빠른 속도로 흘러갔다. 내가 알고 있던 내용과는 전혀 다르게 바뀌는 걸 눈앞에서 보고 있는데, 나중에 감정도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고는 도저히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이런 내 염려들은 전부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당신을 도와 잘 되게 해 주고 싶었던 거지, 망치고 싶지 않았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 뒤로 좋은 일이 있었던가.

‘……있었을 리가.’

그래서, 나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면 했다. 고작 이런 여자 말고, 정말 좋은 여자를 만나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전말자도 괜찮고. 원작의 성녀가 실제로 히로인이기도 하니. 아. 그럼 희대의 호구 커플인가. 이런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지한이 입을 열었다.

“지호 씨.”

“응.”

마치 고백이라도 할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래서 존대를 그만두고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무슨 말을 해도 괜찮다고.

내 미소를 보며, 그가 말했다.

“이번 드라키스전에……. 지호 씨는 근처에 없었으면 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아니, 사실 그가 그런 말을 하는 게 영 뜻밖인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그의 눈에 나는 민간인처럼 보일 테니까.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물론, 근처에 있을 생각도 없긴 했다. 있으면 나도 모르게 튀어 나갈 것만 같아서.

이번 던전은 그동안의 그 어떤 것보다 위험하다.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헌터들이 모두 참전한다 해도 생사를 보장할 수 없는, 아슬아슬한 전장이 될 테니. 그리고 만약 눈앞의 이 남자에게 그런 상황이 닥친다면…….

나는 ‘민간인 윤지호’라는 사실을 잊고 ‘무명’으로 나서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느니, 아예 따로 있는 편이 나았다.

“왜요?”

그래도 물었다. 알면서도 물은 것이다. 확실히 말하는 게 듣고 싶어서.

“만약, 저희가 패배한다면. 지호 씨가 위험해지니까요.”

……그건 어디든 마찬가지 아닌가?

뭐, 그래도 최전방에 있는 것과 이곳에 있는 것의 위험도에는 차이가 확실히 있긴 했다.

“그리고…….”

“그리고?”

또 뭐가 더 있어?

하고 묻는데,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것인지 계속 뜸만 들이고 머뭇거리면서 말을 하질 않았다. ‘60초 뒤에 공개하겠습니다!’ 뭐 이런 것도 아니고, 왜 이리 뜸을 들이는지. 체감상 60초는 한참 전에 지난 것 같았다.

결국,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쳐 얕디얕은 인내심이 바닥나 말할 거면 얼른 말하라고 재촉하려던 찰나.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게 그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만약 성공한다면…….”

“……성공한다면?”

“그때는, 솔직하게 말해도 되겠습니까?”

“……!”

주어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건, 유지한 식의 고백이었다.

그와 같은 마음을 품고 있을지라도 물러서서 거절할 나를 알아서. 겁이 많은 나를 배려해 그가 건네는 호소였다. 지금은 감히 전하지 못하는 이 마음을 그때는 전해도 되느냐고.

“……그…….”

바로 답하지 못했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음에도, 답을 할 수 없었다. 단 한 마디인데 무엇이 그리 어렵다고. 평소 질리도록 하는 말이 아닌가. 그럼에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보며, 그가 갑자기 훅―! 다가왔다.

“……읍―!”

갑작스러운 키스에 순간 숨이 턱 막혔다. 혀가 들어온 것도 아닌, 거의 입술 박치기 수준의 어린애 같은 키스였음에도 말이다.

소설을 읽었기에 알고 있었다. 이게 유지한 인생에서 첫 키스라는 것을. 그랬기에 머리가 하얘졌다. 자신의 첫 키스를, 이렇게 내게 줄 줄은 몰라서.

슬며시 입을 뗀 그가 불을 붉힌 채 수줍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제가 받고 싶은 응원이라면…… 때리실 겁니까?”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목소리. 내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모든 것. 완벽한 나의 패배였다.

아. 그래. 이제는 확실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박.”

“그…….”

이 남자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고작 이 정도로 되겠어요?”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갖고 싶다.

“순수한 당신은 이 정도로 만족하겠지만, 나는 지저분한 어른이어서요.”

획―!

“……지호……!”

아아. 술을 마시는 게 아니었다.

* * *

“……아. 머리야…….”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월급이 들어온 통장을 보고 신나서 루이 13세를 지르는 게 아니었다. 어차피 장식용으로 집에 두기만 할 거라며 결제하던 과거의 나는 어디로 갔던 건지.

“왜 마셨지…….”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익숙하게 후회를 했다.

하지만 지르면 꼭 마시고 싶어진단 말이야. 그리고 사실 안 마실 거면 지를 이유도 없지 않은가. 과거와는 다른 맥락으로 합리화하다 문득 당연한 의문이 떠올랐다.

근데 취할 정도로 마시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뭐지?

앓는 소리를 내는데, 성위님이 말하셨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숙취로 깨지는 머리통을 부여잡는 건 좋은데 일단 네 옆 좀 보지 그러냐며 혀를 찹니다.]

‘……응? 옆?’

성위님의 잔소리는 당연한 것이지만, 예상과는 사뭇 다른 내용에 대체 왜 옆을 보라는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일단 옆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허억……. 미친…….”

거짓말 안 하고 그대로 침대 밑으로 떨어질 뻔했다. 기함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옆에 잠들어 있는 건, 유지한이었다.

아니, 거기까진 놀라지 않았다. 가짜지만 결혼도 한 사이고, 마음을 알았다곤 하지만 옆에서 자도 아무런 이상 없을, 세상에서 가장 무해한 남자였으니까.

놀랐던 이유는, 그가 옷을 입고 입지 않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리고 목을 비롯해 가슴 쪽에 보이는 울긋불긋한 흔적. 누가 봐도, 나 알차게 잡아먹혔소. 하는 모습이었다.

‘……서……, 설마…….’

촤악―!

황급히 이불을 들춰 보았다.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알몸에 허벅지 안쪽에 보이는……. 그대로 눈을 찔끔 감았다.

“돌았나 봐…….”

살다 살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안 취한 줄 알았는데, 취하긴 했나 보다.

그것도 아주 제대로.

새액― 새액―

술이 아니라 내 옆에서 행복하게 잠들어 있는 이 남자에게.

“……미치겠다. 진짜.”

머리가 아니라 허리가, 아니. 온몸이 아팠다.

* * *

“……후우.”

어디 갈 곳이 없을 때는 집이 최고다.

그 명언을 적극 수용해, 나는 집에서 윤지우 침대를 뺏어서 누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넌 뭐 하는 년이냐는 외침과 함께 맘스터치가 날아들었다. 오랜 경력으로 융통성 있게 피한 뒤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직장인의 고충을 연기하면서 단잠에 빠져 있는 윤지우를 발로 치우고 누웠는데도 기분은 여전히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이 정도로 소란스러운 사건을 겪었는데도 아직도 심란한 기분 그대로라니. 이럴 때마저 이 시끌벅적한 집안은 도움이 안 됐다.

그런 나를 보면서 처음에는 떽떽거리던 윤지우도 급격히 조용해지더니 보란 듯 혀를 끌끌 찼다.

“아니. 무조건 집에서 쉴 거라면서 호언장담하고 뻗더니 왜 집 와서 한숨질이야.”

“집 맞잖아. 우리 집.”

누가 보면 여긴 내 집이 아닌 줄 알겠다?

한동안 집 좀 나가 있었다고 바로 나를 이 집 구성원에 빼 버리는 매정함에 눈을 흘기자, 윤지우가 그건 좀 머쓱하긴 한지 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아니. 네 집이요. 이 집보다 2배는 큰 너의 펜트하우스.”

그 좋은 집 두고 왜 여기 와서 남의 슈퍼싱글 침대를 탐내냐고 타박을 주자, 짜증이 솟구쳤다. 그 좋은 집. 지금 다른 간악한 놈이 사용 중이시다. 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는 괴로움에 의거한 감정이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왜 간악한 놈이냐 묻습니다.]

이럴 때마다 어김없이 나서는 눈치 없는 성위님께서 물으셨다.

‘…….’

물론 그놈을 덮친 내가 간악한 년이었고, 그냥 덮쳐졌을 뿐인 순진한 체리보이는 아무 죄도 없었지만, 내 마음을 심란하게 한 죄목이 있다고 뒤집어씌우기로 했다.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하려 했지만, 덮친 것도 나, 그로 인해 심란해진 것도 전부 제가 원인이었기에 완전히 실패했다.

입에서 오만 쌍욕이 튀어나오려고 할 판이었지만, 이걸 윤지우한테 들킬 생각은 없었으므로 최대한 태연하게 시치미를 떼며 너스레를 떨었다.

“와. 이 무식한 놈 봐라. 고급 오피스텔이면 다 펜트하우스인 줄 아나.”

“……아니야?”

“……어?”

……그, 그러게?

그렇게 물어보니 갑자기 나도 헷갈린다. 펜트하우스가 그냥 고급 아파트를 얘기하는 건가? 고층에 있는 고급 아파트를 얘기하는 거긴 한데…….

현재 내 집은 19층. 전체가 21층인 걸로 따지면 거의 최상층이라 할 수 있긴 했다. 그리고 웬만한 재력으로는 엄두도 못 내는 오피스텔. 재력뿐만이 아닌, 온갖 다양한 심사를 통과해야만 들어올 수 있는, 서울 최고의 안전을 자랑하는 거주 구역. 이렇게 설명하고 보니, 펜트하우스라는 고급 단어도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그런 집을 유지한은 망설임 없이 바로 내어 준 것이다. 그것도 바로 옆집을.

따지고 보면 거기서 눈치챘어야 했다. 세상 어떤 호구 사장이라 한들, 일개 직원에게 그런 고급 오피스텔을 내어주지 않는다. 그것도 바로 옆집으로.

사적인 감정이 없는 한.

“……그때 잡았으면…….”

뭐가 달라졌을까…?

적어도 이 심란한 마음에, 지금보다 편하게,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한심한 후회를 조금 했다. 그때, 조금이라도 더 당신과 함께하고 싶은 욕심으로 눈을 감고 모른 척했던 것이 이렇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줄 몰랐으니까.

만약 그걸 알았다면, 단칼에 그를 버렸을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답을 내리지 못했다. 이미 품어 버린 감정이 문제인지, 아님 인정해 버린 진실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이 했을 게 분명하기에.

그러한 점까지 확신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이 상황과 마음을 인정할 수 없는 까닭은, 내가 겁쟁이이기 때문이었다. 내 마음 한 줌 주기 아까워하고, 나 자신에게는 조그마한 생채기가 나는 것도 싫어하는, 지독한 이기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왜, 길드장님은 역시 안 되겠어?”

“……?!”

한창 사색에 잠겨 있는데, 옆에서 믿을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두 귀로 똑똑히 들었음에도 믿을 수가 없어, 잠이 확 달아난 눈을 천천히 옆으로 돌리는데…….

여느 때와 같은 멍청한 얼굴이 아닌, 진지한 얼굴의 윤지우가 눈앞에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

나지막이 묻자, 윤지우가 살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하는 얼굴이었다.

“나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티를 내고 다녔으면서?”

“응. 넌 모를 줄.”

모쏠이 알아 봤자 뭘.

당황한 것을 티 내지 않으려 열심히 빈정거렸다. 결코 세상의 모든 모쏠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안 그런 척은 엄청나게 하지만, 저 츤데레 시스콤은 평생 제 누나만 보고 산 탓에 연애와는 백만 년만큼의 거리가 있었다. 그러니 그쪽으로는 둔해 빠졌다는 걸 잘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해서, 미친 듯 티 내고 다녀도 저 녀석은 절대 모를 줄 알았다. 평소 내가 스킨십이 많고 능구렁이 같은 스타일이라, 원체 다들 잘 모르긴 했지만.

“야. 너님 티 안 내려고 노력도 안 했잖아.”

내 합리적인 의심을 읽은 윤지우가 코웃음을 쳤다. 그에 나 역시 보란 듯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응. 넌 그래도 그동안 한 번도 눈치챈 적 없었잖아.”

거기에 관해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는 윤지우가 순간 말문이 턱―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이 녀석에게는, 내 전 남친들을 직접 보지 않는 한 한 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전적이 이미 있었다.

아, 한 놈은 보기도 전에 눈치채긴 했다.

이로운.

“야. 그건 네가 남자 만나도 하나도 티를 안 내잖아! 뭐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으면서……!”

네가, 길드장님처럼 좋아했으면 나도 그때마다 바로 알았어―!

“……이게, 이런 거는 또 눈치가 빠르네.”

윤지우의 날카로운 반박에, 이번에는 내가 할 말이 없었다. 정답이었으니까.

살면서, 유지한처럼 나를 고민하게 만드는 남자가 있었을까. 윤지우를 제외하고 내가 그렇게까지 신경 썼던 놈은 단언컨대 한 명도 없었다. 내가 내 역대 전 남친들한테 지금의 반만 했어도, 그놈들이 내게 서러움을 토하지 않았으리라.

아. 물론 이로운은 내게 할 말이 없다. 이미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자부할 수 있으니. 유지한 만큼이라고는 자신할 수 없지만, 가장 엇비슷하게 받았던 놈이었다.

그랬던 주제에 무슨 할 말이 있어. 자신 있게 말하건대, 그놈은 그냥 양심을 밥 말아 먹은 거다. 단 한 방으로 3년을 말아 먹은 놈이 무슨 염치가 있어서.

끊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여자는 그렇게 칼같이 그를 향한 모든 감정을 잘라 버렸다.

그런데…….

“아. 난 왜 이렇게 유지한한테 약하지?”

왜 유지한한테는 그게 안 될까. 고작 소설로 그의 일상을 엿보고, 실제로 만났을 뿐인데.

생각해보면 이것도 말이 안 됐다. 자신이 고작 그걸로, 진심으로 마음을 줄 리 없었으니까. 마치 운명인 것처럼. 마치 그런 운명을 누가 짜 놓은 것처럼.

내가 이렇게 고심하는 반면, 윤지우는 고뇌하는 나는 보이지 않는 것인지 흥미가 떨어진 듯 제가 사 놓았던 과자봉지를 뜯으며 말했다.

“뭘 그렇게 고민하고 있어.”

“야. 당연…….”

“당연히 유지한은 누나, 너님 스트라이크 존 한가운데에 있는 남자잖아.”

네가 마음에 드는 게 당연한 거 아님?

파삭― 파삭―

짭짤한 나쵸를 거침없이 음미하며, 윤지우가 말을 이었다.

“누나 너님은 원래 그런 인간들에게는 한없이 약하잖아.”

이로운이랑 오래 만났던 이유도 그거고. 물론 그건 연기였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던 건…….

“세상에서 너만 바라보고, 호구면서도 지랄 맞게 올곧은 성격이기까지 하는, 제일 피곤한 스타일한테 원래 맥을 못 추잖아.”

왜 그런 귀찮은 취향인지.

파삭―!

윤지우가 고개를 절레 저었다.

“……하…… 하하……. 그러네.”

지금까지의 고민이 바보 같을 정도로, 명쾌한 해답이었다.

“그러니까, 땅 그만 파고 집에나 가.”

“아. 그건 싫어.”

“아 왜―!!”

“뺏은 침대 최고로 사랑함.”

역시 내 것보다는 남 게 더 좋은 법이지.

옆에서 신나게 떽떽거리는 윤지우를 뒤로 하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귓가에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내가, 당신에게 선물이 됩니까?’

그날 밤, 입을 맞추는 내게, 세상에서 가장 기뻐하는 것 같은 남자의 목소리가.

‘하하……. 웃기는 소리야.’

‘…….’

‘당신이 내게, 선물이 아닌 적이 있긴 했던가?’

술에 취한 건지, 아니면 눈앞에 있는 이 남자에 취한 건지, 잔뜩 취해 쏟아낸 진심과 함께.

“……미쳤어. 윤지호.”

이대로 세상이 멈춰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틈을 타 이 마음을 완전히 묻어버릴 수 있게.

* * *

[당신의 계약성 ‘승리를 걷는 자’ 님이 이제 그만 일어나는 게 좋지 않겠냐며 혀를 찹니다.]

[신나게 잡아먹히고 여운에 젖어 깊게 잠든 건 좋은데, 지금이 그럴 때냐고. 이래서 사랑에 빠진 남자는 상종하면 안 된다는 소리가 나온 거구나. 하고 깨달음을 얻으며 한숨을 푹푹 내쉽니다.]

“…….”

스르륵―

한편, 지호와 마찬가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하는 마음으로 잠을 청한 지한은 성위의 다그침에 천천히 눈을 떴다.

끔뻑끔뻑―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저의 것과 같으면서 다른 느낌의 천장이 보였다. 그걸 나른하게 바라보며 지한은 어젯밤의 일이 꿈이 아닌 것을 확실히 상기했다. 그리고, 반쯤은 그럴 것이라고 알고 있었으면서도 옆을 짚었다.

“……역시.”

역시나, 옆에 지호는 없었다.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취한 거예요.’

분명 그녀의 입으로 못을 박았으니.

‘취해서, 내일 당신이 없을 수도 있어서, 지금. 한 번만. 당신을 갖고 싶어.’

‘……한 번입니까?’

어째서?

난 한 번으로 만족할 수 없는데, 한번 허용하면, 분명 자제하지 못한 마음이 튀어나올 텐데.

하지만 내게 당신을 거부할 힘이 있을 리가. 그럴 힘도 없고, 그런 마음도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오히려 더 내어 주고 싶은 욕심뿐이었다.

하나, 그런 나를 이미 알고 있다고 시인하듯, 그녀는 웃었다.

‘응. 그러니…….’

‘…….’

‘당신을 내게 줘.’

아아. 얼마든지.

당신이 바라는 것이면 무엇이든. 설령 당신이 바라지 않는 것까지도. 무엇이든 내줄 수 있는 남자는 그대로 홀리듯 입을 맞췄다.

옷가지가 떨어져 내리고, 그녀는 상냥하게 웃어 주며, 단 한 번도 제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동안 그토록 피했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어떤 것도 기꺼이 받아 주는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 하룻밤뿐인 기적임을 알면서도, 속없는 남자는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했다.

“……꿈이 아니었네.”

그 기억이 아직 생생한데도 여전히 믿을 수 없어서 지한은 침대 밑바닥에 발을 내려놓으며 그 밑에 떨어져 있는 옷가지들을 확인했다.

그녀의 성격상, 아침에 일어나서 머리를 쥐어뜯었을 게 분명했고, 분명 간밤의 증거물을 쳐다도 보기 싫어했을 터이니, 당연히 모든 게 그대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는 보기 싫은 물건들일지 몰라도, 지한은 솔직하게 기뻐했다.

그 밤이 거짓이 아님임을 확인할 수 있어서.

비록, 그녀에게는 좋은 의미가 아니라 하더라도.

[당신의 계약성 ‘승리를 걷는 자’ 님이 레이드는 뛸 수 있냐고 묻습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성위님이 제게 물어왔다.

“물론입니다.”

그런 선물을 받았는데, 괜찮지 않을 리 있겠는가.

분명 체력을 꽤 썼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몸 상태는 그 어느 때보다 좋았다. 최상의 상태로 결전을 치를 수 있을 것이리라, 자신했다. 지금으로서는 못할 것이 없게 느껴졌다.

단 하나를 제외하고.

“……그래도,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분에 넘치는 욕심임을 알지만, 그래도 한번 입 밖으로 내 보았다.

한 번도, 말할 수 없었으니. 혹여나 내게 오는 걸음을 멈출까 싶어서.

흑심 있는 쪽은 언제나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설령 오늘이 마지막이라 하더라도, 지한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평생 기억할 추억을, 받았으니.

* * *

“후우…….”

엄마가 아닌 아빠의 밥을 든든하게 먹고 비장한 얼굴로 문 앞에 섰음에도 선뜻 문을 열고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아니, 남의 집 문도 아니고 내 집인데 뭐가 이리도 힘든 것인지. 이미 그는 나가고 없을 것임을 잘 알면서도 계속 망설여졌다. 혹시나 있으면 어쩌지 싶어서.

사실 없어도 문제였다. 들어가는 순간, 그날의 기억을 떠오르게 만들 흔적들이 가득 보일 테니까.

그 성격상 분명 잘 정리해 놓고 갔겠지만, 그렇다 해도 선명하게 남아 있을 그 사람의 흔적을 모른 체할 자신이 없었다. 그게 가장 괴로운 점이었다.

이래서 집에 남자를 데려오면 안 된다. 쓸데없는 모든 걸 추억하려 하니까.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이미 손에 떡하니 반지까지 껴 놓고 뭘 그리 내외하냐고 혀를 끌끌 찹니다.]

“……반지?”

뭔 반…… 아아.

그간 하도 정신없는 일이 많았던 나머지, 완전히 잊고 있었다.

바로 전 게이트에서 유지한과 결혼식을 올리며 꼈던 그 결혼반지였다. 서로 나눠 낀 이 반지를 뺄 생각도 하지 못했을 정도로 시간이 정신없이 흘러서 기억에서 지워진 채로 있었는데, 이제야 떠오른 것이다.

“다시 봐도 예쁘네.”

시야에 들어오는 반지를 가만히 응시하다, 고저 없는 목소리로 덤덤하게 평했다.

중세 분위기를 사랑하지만, 개인적으로 반지만큼은 현대의 디자인이 200% 더 예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음에도. 아무래도 판타지라 그런가.

예뻤다.

중세 특유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는 적당히 살리고, 깔끔하고 예쁘게 현대적으로 디자인한 것이. 거기다 그 세계는 금을 비롯해 다른 신기한 광물 자원도 충분했으니 같은 비용으로 이곳에서 만들고자 하면 엄두도 못 낼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안 예쁠 수가 있을까.

웃긴 것은 벨로아 루체로 살면서 귀족 영애 행세를 하겠다고 플렉스한 다른 것들은 전부 다 사라졌는데 이것만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때 입었던 웨딩드레스도, 면사포도, 부케도. 게이트를 클리어 함과 동시에 전부 다 허상이라고 말하듯 사라져 버렸는데, 왜 이건 그대로인지.

심지어 클리어 보상 중 하나로 획득한 아이템이라는 설명도 없었다. 근데 어째서 이렇게 떡하니, 내 왼손 약지에 있는 것일까. 다른 것이 이 손가락을 차지하는 일만큼은 절대 허락 안 하겠다는 듯이.

“반지 주인하고 다르게 자기 주장 쩌네.”

빼려고 할 의지도 못 느끼게 하는 반지라니. 대체 무슨 마력이 들어 있는 것인지.

이거의 반만큼 유지한이 자신감이 넘쳤으면 고생도 별…….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방금 그 말 진심이냐고, 가자미 눈을 하고 화신을 흘기며 찬찬히 기억을 다시 더듬어 보라고 충고합니다.]

‘……아. 방금 말 취소.’

유지한도 나에 한해서는 자기 주장 쩔지.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보통 사랑에 아무리 깊게 빠져도 자신을 먼저 돌아보던데, 그는 자기 자신의 감정에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는 건지. 그게 아니면 대체 어떻게 그 정도로 맹목적일 수가 있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썅년인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철컥― 끼이익―

고민 끝에, 문을 열고 비장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나를 반기는 건 싸늘한 빈자리였다.

“역시, 없네…….”

있을 턱이 있나.

목숨을 걸 레이드를 뛰러 가야 하는데, 그놈이 아무리 나에게 미쳐 있어도 지금까지 하염없이 나를 기다릴 리 없었다. 준비라면 아무리 해도 모자를 터이니.

내가 괜히 기를 쓰고 아등바등 4군단장을 미리 처리하고 다닌 것이 아니었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드라키스전 준비에, 4군단장 처리에. 정신이 없어도 이만저만 없을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와. 그 와중에 집 다 치워 주고 갔어.”

지가 무슨 우렁 총각이야……?

내 옷은 쳐다도 보기 싫었고, 그의 옷을 어디다 어떻게 둘지 몰라 그냥 모든 걸 그대로 두고 내뺀 나를 대신해 아주 모델 하우스를 만들어 놓고 갔다. 제 옷은 그대로 입고 나갔다 치지만, 지가 벗기고 내가 벗은 속옷들은 어떻게 한 거지……?

생각하기도 무서워 그냥 생각 자체를 포기했다.

“읏샤―”

침대에 누워 보니, 아주 침대 이불까지 갈아놓고 가셨다. 새것처럼 뽀송뽀송한 걸로도 모자라 햇살 냄새까지 풍기는 게 낯설 정도였다.

……혹시 가정주부가 꿈인가?

왕년에 가정주부가 장래희망이라고 외치던 정하나를 끌고 와도 죽어도 못한다며 드러누울 짓을 저 혼자 전부 다 하고 갔다. 대체 여기 몇 시간을 있었던 것인지…….

그 순간, 익숙하고도 그리운 무언가가 약하게 느껴졌다. 아. 이것도 마력인가. 왠지 정답인 것 같다. 그의 체온과 향기가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흣…… 윤지호…….’

‘……밤은 아직 멀었어요.’

“아아악―!”

난 술 먹고 뭔 소리를 한 거냐 대체.

관계를 할 때 그렇게 말을 많이 하는 편도 아니건만, 인생에 무슨 대단한 흑역사를 쓰겠다고 저런 말들을 지껄인 건지. 죽을 때까지, 평생, 이불킥 각이었다. 떠오를수록 돌아버릴 것 같았다.

내가 신나게 잡아먹은 건 아주 잘 알겠다. 그러니까, 이런 건 안 알려 줘도 되거든? 왜 나는 필름도 안 끊기냐고 아우성을 치는데, 정말 도움이라고는 쥐뿔만큼도 안 되는 성위님께서 한마디 얹으셨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전연령이라 차마 자세하게 말은 못 하겠지만, 웬만한 19금 로맨스 영화보다 더 짜릿하고 스릴 있고…… 몰입도 최강이었다며 엄지를 치켜듭니다.]

“꺼져…….”

진짜 이젠 화낼 기운도 없었다. 잡아먹은 건 난데, 어째 내 기운이 빠지는 것 같다.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닌가.

【성혼 서약의 반지(SS)】

【벤크로프트 황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으로 제작된 반지.

황가의 핏줄들은 그 오랜 전통에 따라 자신의 하나뿐인 반려를 위해 직접 마력을 담아 반지를 제작한다.

시전자의 마력의 정수를 담아 제작된 이 반지는, 영원히 당신만을 위해 존재하겠다는 약속이자 증표이며, 반지의 소유주들은 서로 각기 다른 마력을 가지고 있어도 공명할 수 있다.

마력전달 가능. (단, 시전자가 가진 감정의 농도에 따라 상이함.)

※오로지 ‘반지 제작자’와 ‘제작자가 처음으로 인정한 반려’만 사용이 가능합니다.

※귀속 아이템입니다.】

“아니. 이런 건 재깍재깍 알려 달라고.”

온갖 쓸데없는 건 획득할 때마다 시끄럽게 알려 주면서 정작 이런 중요한 건 안 알려 주냐. 시스템의 노답 행태에는 갈수록 더 적응이 안 됐다.

어쨌든, 이러니 아마 내 마력은 고스란히 그놈의 체력으로 다 치환됐을 터. 얼마만큼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일생일대를 통틀어 최고의 컨디션일 것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는 그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 주었다.

그러니…….

“……살아서 돌아와.”

앞으로 나는 당신과 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

* * *

레이드 3시간 전.

수많은 헌터들이 집결지에 모여 비장한 얼굴로 자신의 장비를 점검하고 있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더라도 현재의 전력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것으로 추정되는 헌터들 역시 빠짐없이 집합해 힐러들의 케어를 받으며 준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포션까지 미리 먹어 두며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이들 사이에서, 멍청한 인사말이 들려왔다.

그것도 이번 레이드의 최전방에 있을, 주역들을 향해.

“인사드리겠습니다. 이번에 임명된 국방부 장관이자, 이 레이드를 담당하고 지휘할 이병식이라고 합니다.”

“……풋.”

모두가 비웃음을 금치 못했다.

누가, 뭐라고? 뭘 해?

당연한 일이었다. 어디로 보나 현역으로 절대 뛸 수 없을 몸을 가지고 지휘라니. 이게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인가.

나이 때문인지 술 때문인지 모를 두툼한 뱃살이 모두를 훌륭하게 이끌 지혜와 강단을 가져다주었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납득했겠지만, 애석하게도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럴 만한 인재라기에는 부족함이 많아 보였다.

레이드의 경우, 보통은 저렇게 라인을 잘 타서 올라간 비 각성자가 아닌, 가장 앞에서 전투에 임하는 자가 총 지휘를 맡는다.

물론 이번처럼 이례적인 스케일의 대규모 레이드의 경우, 전방에서 전선을 지휘할 자가 모든 구역을 폭넓게 지휘할 수 없기에 뒤에서 상황을 넓게 파악할 수 있는 참모가 보조를 맡기도 하지만, 그 참모도 헌터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자여야 했다.

헌터들의 싸움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모르는 꼰대가 아니라.

“……누구지?”

감히 무엇이기에 내 위에 있느냐는 듯한 목소리로 밀리언이 여지없이 불쾌함을 드러냈다. 그 누구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명을 제외한다면, 자타공인 세계의 최강자가 바로 레이 밀리언이다. 그가 드러내는 불쾌함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여기에서 그가 이병식이라는 인간을 죽인다고 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는 이 세계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고, 그의 심기를 상하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대역죄인이었으니.

사실 죽이면 좀 속 시원할 거 같기도 했다.

“……저…… 저는…….”

월랭 2위가 보내는 시선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위압감에 짓눌려 지휘를 맡았다는 인간은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그뿐일까. 덜덜 떨리기까지 하는 다리를 보니, 그 자리에서 지리지 않은 것이 용했다. 마력을 푼 것도 아닌, 그저 시선만 한번 준 것뿐인데도 어쩔 줄을 모르는 게 참 가관이었다.

물론, 비각성자 치고 그걸 멀쩡하게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마는, 아까까지 신나게 거드름 피운 게 있어서 그런지 그리도 한심해 보일 수가 없었다.

누가 봐도 감상은 비슷한 모양이었다. 공략에 쓸 아이템을 제작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던 연금술사가 때아니게 시간을 버리게 만든 장본인에게 와그작 인상을 구겨 보이며 짧게 명령했다.

“치워.”

지금 이 중요한 시기에 저딴 개소리로 귀한 1분을 날렸다고 핏발 선 눈으로 짜증을 부리는 게 소위 말하는 ‘진상’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무도 그에게 반발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 감정에 백번 공감하기 때문이었다.

다른 때라면 모르겠지만, 여기서의 실패는 한국만의 실패가 아니다. 인류의 존망과 연결될 수 있는 이 전투에서 이런 하잘것없는 것에 신경을 소비할 여유는 없었다.

스윽―

“……뭐, 뭐 하는 짓이야……!”

“가시죠. 장관님.”

딱히 누구를 겨냥해서 시킨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의 뒤에 서 있던 공무원들이 알아서 저들의 지도자를 끌고 갔다.

권력도 목숨이 있어야 의미가 있다.

제 목숨이 달린 상황이라는 걸 파악도 하지 못하고 권력 먼저 챙기는, 다른 말로 권력에 뇌가 절어버린 꼰대에게는 이야기가 또 다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제 상관을 끌어당기는 그들은 이 헌터들에게 밉보인다면 자신들이 언제든 죽을 수 있는 개미 목숨과도 다를 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들의 심기를 조금이라도 어지럽혀서는 안 된다는 것까지도.

장관이 그렇게 끌려가고, 뒤늦게 모든 장비를 가지고 도착한 센터장이 이번 레이드의 최전방에 나설 헌터들에게 하나하나 무선 이어폰을 건네주었다.

“저희 과학부가 최선을 다해 만든, 이어폰입니다. A급 마력석이 내장되어 있고, 겉은 미스릴로 제작되어 있기에 충격에도 대비가 가능합니다. 더붙어 저희 쪽과 헌터들과의 무선 연락 기능이 있으며, 청력 공격까지 어느 정도는 막아낼 수 있으니 도움이 될 겁니다.”

국내 최고의 천재들이 모였다고들 하는 ‘센터 과학원’의 집념이 만들어낸 결실이었다.

전투 중 귀를 막는 행위의 위험성까지 세심하게 고려해 만든 것으로 모자라, 고작 이어폰에 미스릴과 A급 마력석이라니. 아마 이 이어폰 하나에 천문학적인 금액이 매겨질 것이라고 모두가 확신했다. 그럼에도 센터는 그걸, 심지어 다량으로 제작해, 지급해 준 것이다. 그들의 진심이 드러나는 물건이었다.

“그 외, 기타 기능도 있긴 하지만, 일일이 설명드렸다가는 준비하실 시간이 부족하겠지요. 메인 기능은 그 두 가지이고, 부가 기능은 필요하시면 저희가 드론으로 상황을 보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인걸요.”

오히려 해 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 송구하다고, 그는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각 길드의 작전참모에게도 같은 이어폰이 지급됩니다. 각자 길드원의 특성은 당사자들이 가장 잘 알 테니, 지휘 과정에서 실수하지 않도록 조율하는 역할을 할 겁니다.”

“후우. 다행이군요.”

그에 사계절과, 유예를 비롯한 다른 길드 여기저기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인원 수가 많은 그들은, 공략대의 메인 멤버가 직접 전투를 지휘할 수 없기에 작전참모의 존재가 아주 귀중했다.

유예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길드들은 참모가 전투를 함께 치르지 못했다. 전투 중에는 전반적인 상황파악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작전참모의 역할을 수행하는 동시에 메인으로 선봉에 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건 유해한 뿐이었고, 그건 유해한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니면 원티드처럼 각각의 능력이 워낙 뛰어나 개개인이 알아서 서로의 전투에 방해되지 않도록 싸우거나.

물론 그 점은 원티드가 특별한 것이었다.

그걸 들은 유해한이, 나도 고상하게 앉아서 지시나…… 같은 태평한 소리를 하다가 이로운한테 대차게 까였다. 반면 원티드는 우리는 왜 저런 고상한 시스템이 없냐고 투덜거렸지만 말이다. 정작 그들은 자신들만이 지닌 특별함이 별로인 듯했다.

어쨌든 한결 여유로워진 분위기에 긴장이 풀리며 모두가 조금씩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센터장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무운을 빕니다. 꼭 살아서 다시 뵙길, 간절히 소원하겠습니다.”

그는 진심이었다. 욕심인 것을 알지만, 감히 바란다면, 단 한 명도 죽지 않고 돌아오길.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소망에, 그들은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짧은 말이었지만, 그 말이면 모두 충분했다.

“녹음. 집결.”

“유예 역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잊지 않았겠지?”

“우리는 사계절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반드시 완수한다!”

메인 멤버들이 센터장에게서 등을 돌림과 동시에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함성이 울려 퍼졌다.

그 함성을 들으며, 원티드 역시, 마지막 다짐을 시작…….

“우리 원티드는…….”

“헉헉―! 아직 안 늦었죠?”

하려 했다.

기가 막힌 타이밍에, 마지막 멤버가 도착하지만 않았다면.

“……지우 군?”

모두가 놀랐다. 윤지우가 올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으니까.

각성 직후의 A급 헌터. 현재 국내 랭킹 88위.

분명 도움이 되는 인력이 아닐 수 없었지만, 이제 막 각성한 신입.

힘이 강하다고 전부가 아닌 업계다. 유용한 만큼 희생당할 가능성도 가장 컸기에, 그들 중 그 누구도 지우를 이 전투에 참여시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지호가 그를 보낼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당황하면서도 모두가 재빠르게 그의 차림새를 스캔했다. 스캔할수록 더 믿을 수가 없었다. 어디로 보나 완벽한 정비. 신입이 할 수 있을 정비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단 하나.

지호가 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장비를 풀로 장착시켜 줬다 한들, 정말 제 동생을 보낼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해 보지 못한 지한이 놀란 마음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어째서, 온 겁니까?”

이 상황에서 모두가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그에, 그는 그동안 제 누나 곁에 있을 때는 보여주지 않았던, 의젓한 한 헌터의 모습을 하고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어째서라니요. 길드장님.”

“…….”

“저도 헌터입니다.”

당신과 같이.

눈앞의 위험에 피하지 않는.

올곧은 눈동자였다. 그걸 보고 모두가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도 그를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이런 눈을 한 사람을 어떻게 말리겠는가.

지금의 윤지우와 같은 마음으로 여기까지 온 이들이었기에 더더욱 그럴 수 없었다.

“이야. 장비 봐라. 실장님이 무슨 풀 세팅을 해준 거야. 장난 아닌데?”

“아. 여러분들 것도 있어요. 전해 달라고 했어요.”

“응?”

뭘?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윤지우가 인벤토리에서 뭔가를 주르르 꺼냈다.

“…….”

와르르―

금세 소박한 산처럼 쌓이는 아이템들의 향연에, 길드원들은 우리가 그동안 보수 대신에 받아 와 길드 창고에 처박아 두기만 했던 아이템들을 다 쓸어 온 것이 아닌가, 순간 생각했다.

해답은 윤지우가 주었다.

“더럽게 많죠? 하여간. 윤지호. 걱정은 태산 같아서. 창고에 있던 아이템들 중에서 감정이랑 효능 검증 다 끝난 것들이래요. 여기 프린트에 여러분들이 챙겨가야 할 거 다 적혀 있어요.”

전 죽어도 못 외운다고 하니, 그럴 것 같다면서 주더라고요.

윤지우가 건네는, 프린트라고 말하지만 실은 엄청난 지식이 담긴 리포트나 다름없는 서류를 모두가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대단하다 대단하다 말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 보니 진짜 괴물 같았다.

정부가 그들에게 보수 대신 가지라고 던진 아이템이 범상치 않으리란 사실은 당연했다. 그렇지만 정부의 능력만으로는 그 가치를 제대로 감정할 수 없는 매우 높은 등급의 아이템들. 즉 웬만해서는 쓸 수 없는 아이템이 대다수였다.

감정할 수 없으니 쓸 수도 없다. 그림의 떡이라는 게 꼭 맞는 말이었다. 좋은 아이템이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음에도 그동안 창고에 괜히 처박아 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당연히, 그들도 감정사를 불러 보긴 했다. 다 포기해서 그렇지.

그런 아이템들을 전부 분석하고 결과를 낸 뒤 각 길드원들의 특성에 맞게 분류하다니. 길드원들의 특성을 어떻게 다 알고….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 믿을 수 없는 건, 그동안 필요하다고 생각해왔던 부분들이 전부 그 리포트에 쓰여 있다는 점이었다.

“……어…….”

모두가 뭐에 홀린 듯 자신들의 물건을 황급히 챙겼다. 무슨 정신으로 챙기는지는 몰라도,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윤지우. 넌 그…….”

“전 특훈까지 받고 왔어요…….”

지옥을 보고 왔다고.

윤지우의 얼굴이 그 기억을 떠올리는 듯 급격히 핼쑥해졌다. 리얼한 반응에, 그들은 호기심이 생겼다.

“누구에게?”

그야, 윤지우에게 가르침을 줄 만한 선배들은 전부 여기 집결해 있었으니. 그에 윤지우가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눈을 끔뻑이며 답했다.

“그야 당연히 윤지호죠.”

“응……? 지호 씨?”

비 각성자가 무슨 수로?

합리적인 물음이었지만, 윤지우에게는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주 질색팔색하는 것으로 모자라 손까지 내저으며 말했다.

“아이템 시험해 본다고, 중무장하고 알려줬어요. 마력이나 스킬이 없어서 그렇지 단순히 실력으로만 따지면 윤지호 이길 분 많지 않으실걸요?”

“응? 지호 씨가 왜?”

윤지호의 그 지독함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듯, 여전히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의 물음에 지우는 잠시 머뭇거렸다. 한 박자 늦게 이 사람들이 윤지호 이력을 모른다는 것을 깨달은 윤지우가 말했다.

“아. 윤지호. 그거 검도 전국 1등이자, 우리 할아버지 수제자예요.”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누군데?

입사할 때 가족 정보를 확인하지만, 조부에 대한 정보까지는 확인하지 않았기에 모두가 대체 누구냐고 눈으로 물었다.

윤지우가 담백하게 답했다.

“1세대 검성. 윤철임이요.”

“―!!”

“4년 전에 돌아가셨지만요.”

그거야 모두가 안다. 첫 A급 게이트를 처리하시고 그대로 숨을 거두셨으니까.

모두가 랭킹을 100% 믿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런 탓이었다. 랭킹에 등재되기는커녕, 각성자로 분류조차 되지 않았지만, 이미 몸을 극한으로 키운 이들이, 마력을 몸으로 받아들이며 초인이 된 경우가 존재했으니까.

초인은 일단 헌터가 등장하기 전에 이미 무예를 극한으로 갈고닦은 이들이었기에 쓰는 마력의 질부터 차원이 달랐다. 마력 자체가 유명한 랭커들에 비해 적다고 해서, 그들을 쉽게 이길 수 있다고 랭커들이 자신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네임드인 랭커들조차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은거하고 있는 그들을 찾아내 가르침을 청하는 것이었다.

“……헐.”

이제야 의문이 풀린 기분이었다. 윤철임의 손녀이자 윤철임의 수제자였으니, 각성자인 자신들을 보고 태연하다 못해 그렇게 손쉽게 잡고 흔들었지.

아무리 대범한 이들이라도, 헌터들이 내뿜는 마력에는 기가 죽기 마련인데 지호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그게 매우 신기하면서 대단해 보였는데, 역시 세상에 이유가 없는 것은 없다고. 바로 그것 때문이었나 보다.

까면 깔수록 양파처럼 나오는 이 남매의 특이함에, 그들은 넋이 나갔다.

“제가 왜 윤지호만 보면 설설 기는데요. 괜히 처맞고만 있는 게 아니에요. 강제로 처맞는 거지. 반항해도 의미가 없어요.”

아니. 유리는 네가 시스콤이라 그런 줄 알았지.

말할 수 없는 진심을 속으로 삼키면서 다들 아이템을 하나둘씩 착용했다. 정부도 정체를 알 수 없었던 아이템인 만큼 그들이 챙긴다고 챙긴 아이템과는 급이 달랐다.

“잠깐 시험해 보자.”

“같이 해.”

당장 미리 준비했던 것들을 인벤토리에 던져 버리고 새로 받은 아이템에 열심히 적응하기 시작했다.

잔뜩 들뜬 다른 이들과 다르게 제 몫으로 주어진 아이템을 여전히 손에 든 채 가만히 내려다보던 지한은 지우에게 물었다.

“……지호 씨는…… 괜찮아?”

뭘 괜찮냐고 묻는 것인지.

지난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이들이면 가자미눈을 뜨고 되물을 소리였지만, 그걸 전혀 모르는 지우는 고개를 갸우뚱하기만 했다.

“응? 걔야 뭐 날아다니죠.”

걔가 뭐 잠만 잤지. 아까 저 패는 거 보니 완전 멀쩡하던데요. 라며 투덜거리던 윤지우는 별 대수롭지 않게 그에게 폭탄을 던졌다.

“정 못 믿으시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

“어……?”

직접……?

지금 폰으로 전화라도 하라는 것인가. 하지만 그 뉘앙스가 아닌 것 같은 말에, 지한이 얼빠진 얼굴로 벌떡 고개를 들어 지우를 바라보았다. 그걸 보며, 윤지우는 윤지호를 사랑하게 되는 놈들은 왜들 이렇게 다 뻔해지는지 모르겠다며 속으로 혀를 찼다.

기분은 나쁘지 않았지만. 어쨌든 제 누나 때문에 일어난 변화이니.

“걔 여기 왔어요.”

참모실에서 현장 지휘한다던데요?

“……!!”

지한에게는 폭탄이 아닐 수 없는 소리였다.

* * *

“……너도 가겠다고?”

설마설마했지만, 자신도 출전하겠다는, 철없는 무뇌아 동생의 선언에 순간 머리가 띵했다.

할 거라 예상을 하긴 했다. 윤지우는 그런 놈이었으니까. 하지만 역시 예상한 것과 직접 겪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어쩌면 저놈이 그걸 말해도 하필이면 전투 시작 5시간 전에 말했기 때문에 그런 걸지도. 저놈은 내가 반대할까 봐 그러지 못하게 일부러 시간 맞춰서 이러는 걸지도 몰랐지만, 어느 쪽이든 기가 막혔다.

이 누님이 아찔해지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데, 이 멍청한 동생 놈은 일단 대충 막 사용하라고 준 임시 검과 방패를 들고(물론 그것도 다른 길드에서는 보기에는 매우 상급이었지만) ‘뚠뚠―!’ 웅장하게 선언했다.

“나도 헌터니까.”

장난감 들고……?

월랭 1위 기준, 장난감을 들고 다부지게 선언하는 게 아주 참 그럴듯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래도 저 순수함을 유지하고 성인이 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이건 칭찬해 줘야 할 부분…… 이지만 저 장난감은 참을 수 없으니 얼른 풀세팅을 해 줄 것을 권합니다.]

‘…….’

뭐 하냐. 이게 바로 신종 병 주고 약 주고인가.

윤지우의 눈을 바라보았다.

……말려도 절대 들을 것 같지 않은 눈이었다.

“그래. 너도 헌터지.”

절대 말릴 수도 없는 눈이었지만, 의외로 말릴 생각도 없었다. 그도 앞으로를 살아갈 헌터라면, 거쳐야 할 일이었으니.

“뭐야. 진짜……?”

내가 이렇게 쉽게 허락해 줄 줄은 몰랐던 듯, 윤지우가 얼빠진 얼굴로 진짜냐고 물었다. 그 맹한 모습에 확 무를까 살짝 고민했다.

“왜. 물러 줘?”

“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

격한 반응에 그만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저건 어째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어릴 때랑 하나도 다른 것이 없는지. 진짜 몸만 큰 애다. 그래도 여러모로 순진하기 짝이 없는 동생을 둔 장점도 있긴 있다.

가령.

“진짜, 이걸 어떻게 내보낼까.”

“누가 보면 엄마인 줄. 나이가 몇이심?”

딱―!

쓸데없이 안고 있던, 무거운 생각들을 싹 다 날려 준다던가.

“아악―!!”

“너야말로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인터넷 용어를 쓰고 있어?”

“너도 쓰잖아―!!”

머리로 복잡하게 생각해서 결정한 방식 대로가 아닌, 내키는 대로 행동할 수 있게 해 준다던가.

“그럼 얼른 준비해.”

“다 한 건데?”

“개소리 말고, 장난감 버리고 얼른 따라와.”

“……장난감?”

앗. 실수.

저 장난감 같은 무기라도 제 첫 무기랍시고 나름대로 좋은 거라며 매일같이 광을 내며 애지중지하는 걸 알면서도 그만 진심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처음부터 넘사벽 급의 아이템들만 봐 온 내 눈에는, 저게 제아무리 공산품 중 최상급이라고 한들 눈에 찰 리가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이름 있는 랭커들이라면 저런 건 거들떠보지도 않고, 네임드 대장장이의 제작템 또는 던전이나 게이트에서 획득한 무기를 쓴다. 등급이 같다고 한들, 퀄리티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요즘 기술이 좋아졌다지만, 전투로 사용하는 무기의 베이스 자체는 아직 던전이나 게이트에서 획득한 무기를 따라가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그리고 국내 최강의 길드 원티드에서, 공산품을 쓰는 건…… 이놈뿐이었다. 신입이 이놈뿐이니 당연한 사실이겠지만.

“자. 이 누나가 플렉스 해 줄게. 따라와.”

“어. 어.”

어차피 윤지우가 뒤늦게 나설 줄 알고 다 준비를 해 놨으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그냥 조금, 아주 조오금. 착잡할 뿐이다. 이런 예감은 좀 틀려도 되는데. 제발.

“요. 정하나. 준비는 다 됐어?”

“그럼. 마침 시간 칼같이 끝났어. 니가 안 간대서 내가 가야 하나 했는데, 배달꾼 데리고 왔네?”

“뭐야. 뭘 준비했는데? 내 거?”

그리고 누나의 이런 착잡한 마음은 쥐뿔도 모르는 망할 놈의 철부지 동생은 배달꾼 소리까지 들었으면서 제 누나가 평범한 걸 해 줄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아주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이러니 속이 터지지.

“……응. 네 거.”

활기 넘치는, 나이는 엿 바꿔 먹은 동생을 상대할 체력이 부족해서 힘이 쭉 빠진 목소리로 대강 답하는데도 정하나가 준비해 둔 것에 온 정신이 다 팔린 놈은 그런 나한테는 관심도 없었다. 확 안 줄까 보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애가 그럴 수 있지 뭐. 원래 애들은 다 그런 거라고, 부모들이 다 느끼는 심정이라고 다독입니다.]

성위님이 하는 말이 더 어이가 없었다.

‘내가 엄마 아니거든?!’

내가 저만한 아들을 두려면, 대체 언제 애를 낳아야 하는 건지. 설령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 해도 저런 아들은 필요 없었다.

진짜로.

그러니 육아는 제발 엄마가 해……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실상 90% 제 손으로 키운 동생임을 본인도 인지하고 있었기에 그 말만큼은 속으로 묻어 두었다. 이런 불만을 이미 숱하게 이야기했지만, 아직도 엄마보다는 여자이고 싶은, 정신 연령 10대인 주책맞은 아줌마는 ‘그래서 오늘 저녁 뭐야?’로 모르는 척 넘어가는 인간이었으니.

“하하. 윤지호. 표정 봐라.”

“시끄럽고, 얼른 내놔 봐.”

“잠깐만.”

정하나가 물품들을 꺼내려 움직이는 동안, 나는 윤지우에게 종이뭉치를 하나 건네 주었다.

“자. 미리 받아.”

“응? 이게 뭔데?”

영문을 모른 채 종이를 받아 들며 눈을 땡그랗게 뜨는 윤지우에게 나는 간단하게 설명을 했다.

“다른 사람들 아이템 리스트. 여기 써 있는 대로 가져가라고 해.”

“응? 다른 사람들?”

“왜. 그럼 내가 너만 줄 줄 알았어?”

내가 그렇게 형평성 없는 사람으로 보였나. 애초에 동생만 챙겨 주면 그건 편애를 넘어 직권 남용 아닌가? 아무리 돈을 부어도 절대 구할 수 없는 아이템들을 내 동생이랍시고 한 명만 챙겨 주면 ‘실장’으로 월급 받는 나는 진짜 뭐가 되겠는가. ‘공과 사는 확실하게 구분하자.’라는 확고한 신조를 가지고 사는 사람으로서 그런 건 도저히 용납이 안 됐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뭐요? 공과 사요? 그건 네가 네 보스 꿀꺽― 해 먹기 전 이야기지? 라고 묻습니다.]

‘아이. 씨…… ㅂ…….’

기껏 잊고 있었는데 다시 되새김질시켜주는 성위님의 복습에 반사적으로 비속어가 튀어나올 뻔했다.

샤우팅으로 시원하게 디스랩을 갈기지 않은 게 어디인가. 그랬다간 나 각성자라고 동네방네 외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처럼 혼잣말을 하면 정신병자가 아니라, 성위랑 계약한 거 아니냐는 생각부터 하는 세상이니.

“물론 그렇지……. 다들 좋아하겠다.”

다행히 그런 나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자란 놈이 잔뜩 기대했다 이제야 조금 수그러진 건지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짜증이 가시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정신은 돌아왔다.

“그러니까 네 인벤토리에 있는 이상한 잡템들 다 뱉어.”

이거 넣어야 돼. 단호박처럼 명령하자, 그 명령에 반발심이 든 듯 놈이 투덜댔다.

“이상한 잡템이라니…….”

“응. 쓰레기들이야.”

적어도 지금은.

안 버리고 잘 보관할 테니 얼른 뱉으라고 재촉하자, 그래도 우선순위는 잘 알고 있는 윤지우가 툴툴 대면서도 인벤토리를 비우기 시작했다.

“…….”

그리고 설마설마했지만. 나오는 것들은 죄다 쓰레기였다.

어리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초코바에 낙서 노트에, 먹다 남은 과자, 볼펜 하나, 어디서 담배 셔틀이라도 하는지 싸구려 라이터 하나…. 더 말하기도 귀찮은 자잘한 것들이 수두룩하게 나왔다. 많이 봐줘서 초코바는 그래도 비상용으로 쓸모 있다 쳐도, 나머지는 그대로 가져다 쓰레기통에 던져 넣어도 문제가 없을 것들이었다.

인벤을 이렇게 쓰는 놈이 진짜 있을 줄이야. 소설에서 보긴 했지만 실제로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것도 제 동생 놈이 그런 놈이라니. 라고 100평이 넘는 초호화 인벤을 가지고도 쓰지 않는 월랭 1위가 생각했다.

“자. 여기. 얼른 챙겨.”

“뭐가 이렇게 많아!?”

무수히 계속 쌓이는 산에 윤지우가 기겁하자, 내가 여실히 답했다.

“혹시 몰라서 쓸모 있어 보이는 거는 몽땅 쓸어왔으니까.”

그리고 인원이 한둘이야? 그러니 얼른 챙기라고 찔러대자, 이제는 해탈한 듯 윤지우가 주섬주섬 아이템들을 인벤에 넣었다. 다 챙겨 가는 걸 확인하며 정하나에게 눈짓했다.

“하여간…….”

정하나가 진짜 짓궂다며 고개를 내저었지만, 세상 최고의 사디인 그녀에게 들을 소리는 아니었기에 조용히 무시했다. 그사이 윤지우가 인벤에 아이템을 다 챙긴 걸 보며 정하나가 어그로를 끌었다.

“네. 윤지우 어린이. 다 챙겼으면 여기 좀 봐 줄래?”

“누구더러 어린…… 어.”

“네 누나가 열과 성을 다해 고른 거야.”

얼른 찬양해. 정하나가 장난스럽게 윙크했다. 하지만 그런 건 이미 보이지도 않는 듯했다.

넋을 놓은 동생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열심히 고른 보람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당장 S급 무기를 받아도 실전에서는 어차피 못 써먹으니까. 아예 다른 방향으로 골랐어. 너와 함께 성장할 무기로.”

“그 말은…….”

“그래. 유지한처럼, 에고소드. 그래도 승리를 위한 검은 아니야.”

“……그럼?”

“지키기 위한 검. 믿음의 ‘모든’.”

딱 너를 위한 무기지 않아?

내 말을 들으며, 윤지우가 넋 나간 얼굴을 하면서도 떨리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마침내 검을 손에 쥐고, 윤지우가 말했다.

“……누나.”

“왜.”

“……나, 진짜, 훌륭한 헌터가 될게.”

누나를 지킬 수 있도록.

그건 내게 하는 말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검에게 하는 맹세 같았다. 역시나, 그 순수하고도 올곧은 다짐에, ‘모든’은 기꺼이 화답을 해 주었다.

파앗―!

빛이 윤지우를 감싸며 윤지우의 손등에 방패 문양이 생겨났다. ‘모든’의 인정을 받았음을 증명하는 표시였다. 정말 못 말리겠다고 생각은 한다. 그래도, 바라지 않았지만 훌륭하게 헌터로서의 제 자질을 증명하는 동생 놈의 모습이 기특하기도 하면서 참 씁쓸했다.

그래봤자 이미 다 늦은 일이었지만.

감성에 젖는 건 이 정도만 하고 현실로 돌아와, 나는 근처에 있는 아무 검이나 잡았다.

“그래. 그럼 시간 없으니 얼른 하자.”

“응? 뭘?”

검을 쥐는 내 모습에 윤지우 놈이 멍청한 소리를 했다. 너무 어이없어 반사적으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제 막 받은 그 검으로 연습도 안 해 보고 그냥 갈 생각이었어?”

아주 죽으러 가겠다고 하지?

그 말에 납득은 한 것 같지만, 워낙 맞아 본 기억들이 강렬해서인지 벌써부터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윤지우가 말했다.

“……그걸 누나가 하겠다고?”

“다른 사람들 다 바빠.”

그러니까, 잔말 말고 빨리 하자.

숙련하기에는 이 시간도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최소한, 기본이라도 할 수 있게는 만들어 놔야 쓸모가 있을 테니 서둘러야 했다. 그런 누님의 갸륵한 마음도 모르고, 망할 동생 놈이 쏘아붙였다.

“누나는 안 바빠!?”

“나도 바쁘지. 당연히.”

“어?”

무심코 내뱉은 말이었는지, 내가 당연하다는 듯 그리 답하자 녀석이 예상치 못한 대답에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에 나는, 어차피 알게 될 일이니 여상히 대답했다.

“나도 갈 거거든. 거기. 참모로서지만.”

사실 마주할 용기는 없었지만, 그래도 동생 놈 덕분에 결심이 섰다.

“……윤지호 미친.”

“응. 이제 와 가겠다는 너부터가 제일 돌았고, 세상은 진작 돌았어. 그러니 빨리 오기나 해.”

피하는 건, 그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으니.

<랭킹 1위 탈환을 소망합니다> 6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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