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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장. 성녀. 루치아 라이블리.(1) (18/30)

17장. 성녀. 루치아 라이블리.(1)

“……음냐…….”

“그만 자.”

“……자는 것까지 뭐라 그래…….”

인간의 3대 욕구 중 제일 큰 게 수면욕이라는 거 몰라?

눈은 제대로 뜨지도 못한 채로 칭얼거리며 어떻게든 눕고 싶어서 몸이 뒤집어지려 했다. 머리만 떨어지면 곧바로 잘 의지가 충분하다는 것을 몸소 말하듯 베개까지 끌어안고 얼굴을 기대고 있는 게 아주 가관이었다.

그러나 어떤 의미로는 당장 재워야 할 것 같은 파격적인 귀여움을 자랑하는 모습이기도 했다.

원래 평소 귀여움과는 거리가 먼 행동 때문에 지호를 귀엽다기보다 멋있다는 이미지로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지금 이 행동들이 매우 희귀한 모습이어서 더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실제로 원래의 제대로 얼굴을 200% 쓰는 장면이었기에 치사율이 어마어마하기는 했다.

“하. 이 화상이 진짜…….”

그러나 모두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든 치명적인 모습에도 나이 먹고 뭐 하는 꼴깝이냐는 듯, 시니컬하게 혀를 차고 계시는 건.

“저. 성녀님. 일단 진정하시죠.”

“그렇습니다. 몸이 상하실까 염려됩니다.”

바로 인자함과 자애의 대명사. 성녀님이셨다.

측근조차 난생처음 보는 성녀의 모습에 적응이 되지 않는 건지 당황한 티가 역력했다.

한쪽은 답지 않은 귀여운 면모에 놀라고, 다른 한쪽은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 난장판 속에서 지호는 백 년 치 잠을 몰아 자는 사람처럼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투덜거렸다. 잠에서 깰 생각은 전혀 없는 것처럼.

“……웅……. 넌 꼭 사람 잘 때만 오더라…….”

하는 말에마저 잠이 흠뻑 묻어있었다.

너무 졸려서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것인지, 아니면 상대가 자신의 친구인 것을 알아서 여유로운 것인지. 어쨌든 제집에 사람을 이렇게 들였는데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은, 참 범상치 않아 보였다.

한편, 윤지우는 그런 지호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윤지호가 저런 모습을 보인다는 건 누적되었던 스트레스와 피로가 폭발했다는 의미다. 그녀는 1년에 한 번 정도, 평소 참아왔던 것들을 단번에 터뜨려 모두 리셋시키겠다는 기세로 며칠 동안 어마어마하게 자곤 했다.

그때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심지어는 휴가를 내는 한이 있더라도, 일주일을 내리 잠만 자는 모습에 응급실로 끌고 가야 하나 고민을 몇 번이나 했던가. 밥도 안 먹고 자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그게 하필 지금인 모양이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평생 겪을 파란만장한 일을 최근에 아주 몰빵으로 다 받지 않았는가. 이러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더불어, 이제야 저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얼굴이 누구인지 떠오른 지우가 성녀를 말렸다.

“말자 누나. 일단 진정해.”

“……누가 말……! 아, 너 윤지우구나?”

그제야 지우를 알아본 성녀, 말자가 눈을 끔뻑였다.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지우를 못 알아본 듯했다.

사실 자신도 그랬으니 할 말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친구이니 윤지호와는 몇 번 다시 봤을지 모르지만, 지우로서는 그녀를 다시 볼 일이 전혀 없었다. 따지고 보면, 10년 전쯤, 어쩌다 누나를 만날 때 함께 있길래 우연히 본 누나 친구를 알아보는 게 평범한 일은 아니지 않나.

그리고 지우도 말자라는 이름이 하도 특이해 그 이름 정도만 기억하고 있었지, 자세한 것은 전혀 몰랐다. 굳이 알고 있는 정보를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제 누나가 고등학생이던 시절에 미국으로 유학을 간 친구. 정도?

“누나는 유학 가서 각성했구나. 전혀 몰랐어.”

“몰라야지. 너희들 모르라고 열심히 감추고 살았는데.”

안 그럼 무슨 보람이 있겠냐고 혀를 차는 모습은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이렇게까지 마음을 써주고 있건만, 이런 참된 친구는 보이지도 않는 건지 여전히 수마를 헤매고 있는 이 빌어먹을 기집애가 성녀, 루치아 라이블리는 이보다 더 얄미울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를 향한 애정은 여전했다. 윤지호는 여전히, 자신이 성녀가 아닌,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있을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잠을 얼마나 안 잤길래 이 모양이야.”

“……전말자……. 진짜 양심…… 쿠울…….”

“얼씨구. 야. 그리고 나 개명한 지가 언제인데. 이제 루치아 라이블리거든?”

“…뭐야, 그 버터 듬뿍 바르고 허세까지 폭발하는 이름은.”

드디어 머리에 뽕 맞았어……?

인생 흑역사 새로 쓰려고 하냐는, 가차 없는 무자비한 막말에, 루치아 라이블리. 아니 원래의 이름. 전말자가 지호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듯 안고 있는 배개를 빼앗았다.

“아오. 이게 진짜! 내 이름이 뭐 어때서! 말자보다 훨씬 예쁜데!”

“……말자가 더 잘 어울려.”

“오냐. 너 오늘 한번 죽어 보자.”

이름이 인생 최대 콤플렉스였던 여자는 지호가 자신의 역린을 건드리자 그 기대에 부응하겠다는 듯 기꺼이 베개를 들어 지호를 후려쳤다.

“아 왜 때려어어어―!!”

“넌 맞아도 싸!”

퍽―! 퍽퍽―!

돈 주고도 볼 수 없을 진풍경이었다.

그냥 봐도 무척이나 생소한 장면이지만, 한쪽은 자애의 대명사 성녀이고, 다른 한쪽은 최근 대한민국을 열심히 주무른, 헌터계의 떠오르는 혜성이었다.

두 사람 다 난다 긴다 하는 대단한 인간들이었지만, 이렇게 보니 평범한 20대 소녀들 같았다. 그래서 다들 저걸 말려야 하나. 고민하면서도 선뜻 말리지 못해 눈만 데구르르 굴리고 있는데 그래도 진짜 친구는 맞는지 구타는 금세 끝났다.

구타가 끝나자, 그제야 잠이 좀 깬 듯 지호가 맞은 곳을 쓰다듬으며 생기 있게 말했다.

“아오. 전말자 성격 여전하시구만.”

나이 먹고 유해졌다면서?

몇 달 전에 이제 화를 다스리는 모든 법을 터득했다고 자랑하던 년 어디 있냐고, 지호가 그분을 찾아보려는 듯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성녀가 코웃음을 쳤다.

“지랄.”

거참 성녀다운 답변이었다.

가차 없는 언변에 도무지 적응할 수 없는 이들이 하염없이 눈치만 살피고 있는데, 오히려 이 모습이 매우 익숙한 듯한 지호는 태연하게 여랑이 주는 얼음물을 받아 마셨다. 천연덕스러운 행동에 말자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언제는 헌터 발끝도 가까이 가지 않겠다더니?”

그렇게 질색할 때는 언제고 가사도우미까지 헌터로 두고 있냐고 성녀가 투덜거렸다.

보조 전문이지만, 그만큼 마력과 사람의 본질을 더 잘 꿰뚫어 보는 말자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얌전한 고양이처럼 다소곳하게 굴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몸에 흐르는 마력 자체는 난폭함 그 자체였다.

처음에는 가사도우미가 아니라 경호원인가 싶었을 정도다.

아마 보이는 것 이상의 강자일 것이라고, 성녀는 확신했다. 대체 어디서 저런 인재를 얻어 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윤지호이기 때문에 그리 이상할 것도 없었다. 언제나 사람에 한해서는 인재를 무섭게 끌어들여 오는 윤지호였으니.

그런 성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그냥 아직도 졸려서 별생각이 없는 건지 지호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건 저놈이 각성하면서 싹 접었어.”

“누구? 아. 지우. 뭐. 그래. 그건 그럴만하네.”

아마 엄마 아빠보다 소중한 게 윤지우일 것이 분명한 윤지호니 단박에 이해가 됐다.

“그럼 저쪽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이번에는 여랑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묻자 지호가 이제는 슬슬 귀찮은 듯 머리를 쓸어 올렸다,

“와. 간만에 만났는데 취조만 하네. 쟤가 알아서 왔다. 왜.”

“알아서 왔다고 니가 그냥 받아주는 년이냐.”

똑바로 말해.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 말자는 진지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집에서 같이 생활하는, 윤지호와 가장 가까이에 있을 자였다.

그것만으로도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이유는 충분한데, 더불어 각성자이기까지 하니 어떤 사람인지 더더욱 꼼꼼히 살펴보아야 하는 게 당연했다.

이 업계는 어떻게 얽혀, 어떻게 화를 당할지 알 수 없으니.

그런 마음을 알아는 주는 건지, 지호가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예상 밖의 것이었지만.

“예뻐서 받아 줬는데?”

“……뭐?”

어처구니없는 답변에 성녀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누가 들어도 상황 회피 용의 개소리가 아닌가.

“……어머나.”

그런데, 그런 게 분명했는데. 빈 잔을 받아 들던 여랑이 멈칫하며, 볼을 발그레하게 붉히지 않는가.

“……부끄럽사와요.”

당사자가 저렇게 좋아하니 진짜인 것 같기도 했다. 정말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딱 보아도 지호에게 애정이 넘쳐 보였고 그녀에게 해를 끼칠 만한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으니.

그리고 말자는 사실, 어떤 의미로는 조금 안심했다.

누군지도 모를 헌터에게 애꿎은 해코지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두 배가 되었지만, 그래도 헌터에 대한 거부감은 없어진 것처럼 보여서.

물론 윤지호라면 자신이 헌터가 되었다고 처음부터 밝혔어도 태도가 달라진다던가,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삶 전체를 통틀어 말자를 말자로, 아니, 나를 나로 받아들여 주는 장소를 흔들리게 할 용기는 없었다.

“근데 넌 뭘 했기에 그렇게 체력이 다 바닥났어?”

아까부터 계속 신경 쓰였지만, 일단 바로잡을 걸 바로 잡고 나자 더 자세히 지호의 상태를 확인한 말자는 얼굴을 찌푸렸다.

마력은 지호가 완벽히 감췄기 때문에 아무리 말자라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속 안에 가득 쌓인 피로는 눈에 훤히 보였다. 저 정도 피로라면 며칠을 내리 잠만 자도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대체 뭘 해야 피로가 이렇게나 쌓이는지.

단시간에 펄펄 널을 뛰며 다녔던 던전 공략 탓인 건 알 리 없는 말자가 순전한 궁금증을 가지고 묻자, 지호가 갑자기 세상 다 산 노인처럼 무게를 잡았다.

“……하아. 인생이란 참…… 스펙터클하지.”

많은 감정을 축약한 힘없는 울림에, 말자는 그냥 질문을 포기했다.

【성녀 고유 스킬을 발동합니다.】

【‘천사의 가호’가 내려집니다.】

【‘천사의 요람’이 곁에 머무릅니다.】

솨아아아―

“응?”

갑자기 제 몸에 내리는 백색의 빛 세례와, 곁에서 지켜주겠다는 듯 꼭 붙어 있는 동그란 빛 하나가 나타나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지호가 눈을 끔뻑였다.

“뭐야. 너 힐러 됨?”

“오냐. 옛날부터 됐다.”

“와. 헌터계의 귀족인 힐러씩이나 됐으면서 가난한 소시민을 그렇게 뜯어먹은 거임?”

님 양심 어디 감.

물론 지호가 제 친구에게 쓴 돈을 아까워할 리 없었지만, 돈 없다고 밥 사라며 난리 치던 어느 날의 친구가 떠올라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하자, 성녀는 보란 듯 어깨를 으쓱였다.

“너 아니면 내가 어디 가서 그렇게 뜯어먹어 보냐.”

“왜. 힐러 님인데?”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뜯어먹을 수 있지 않나?

대부분의 소설에서 그렇듯 힐러는 귀족이다. 각성자 중 극소수만 존재할뿐더러, 그 극소수마저 대부분은 그저 외상을 치유하는 정도에 그쳤다.

포션보다 못한 수준의 힐러도 천지였다. 하지만 그런 이들조차 귀족 취급을 받았다. 포션에 비해 효율이 좋고, 곧바로 실제 전선에 투입할 수도 있었으니. 그런 힐러가 어디서 밥 한 끼도 못 뜯어내다니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이런 지호의 생각과 다르게,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이들은 절로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항상 남에게 베푸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성녀가 이렇게 할 수 있었을 리 없으니까.

“와. 근데 이거 효과 진짜 좋다. 피로가 알아서 가시는 느낌이야. 잠도 완전 개꿀잠 잘 거 같은데?”

“괜히 스킬 이름이 요람이겠냐.”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그제야 그들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게 그녀의 본모습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활기차고 시니컬한 여자를, 세상이, 아니 인간이 성녀라는 이름하에 희생시켜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사실 제힘을 이렇게 쓰고 싶었을 것이다. 제게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그런 사실을 전혀 알 리 없는 지호는 여전히 제 곁에 붙어있는 구를 신기하다는 듯 찔러보다 문득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힐러에…… 루치아 라이블리…….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데. 너 좀 날리나 보다?”

상대의 정체를 모르기에 할 수 있는 조크에 성녀가 오만하게 웃었다.

“완전 쥑이게 날리지.”

조크를 팩트로 받는 친구의 모습에, 지호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오. 랭커야? 와우.”

국내 랭킹 몇 위?

지호가 눈을 빛내며 묻자, 드디어 제 성과를 자랑할 수 있게 된 성녀가 제 또래라면 누구나 지을 법한, 신이 난 얼굴로 답했다.

“당연하지. 월드 랭커 8위. 성녀님이시다.”

어때? 굉장하지? 찬양해. 빨리.

칭찬을 바라는 아이처럼 성녀가 칭찬을 종용했다. 하지만 그 말에 지호는 칭찬은커녕 돌하르방에 빙의한 듯 딱딱하게 굳었다.

“……성녀?”

“응.”

“누가요. 너 님이요?”

“나 말고 다른 성녀도 있어?”

내가 알기로 나밖에 없는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답에, 지호는 그대로 넋이 나갔다.

“……헐.”

미쳤다 미쳤다 했지만, 진짜 세상이 미쳤나 보다.

* * *

드디어 세상이 미쳐 돌아가나 보다. 저게 성녀라니. 전혀 생각지 못한 전개에 나도 모르게 말이 필터링 없이 튀어 나갔다.

“아무래도 이번 생 망한 거 같아.”

“뭐. 인마?”

필터링 없이 튀어 나간 내 말에 전말자는 참 성녀답게 가차 없이 멱살을 잡았다.

“아니. 성녀님. 고정하시죠. 일단 이 손은 좀 놓으시고……!”

“그래요. 우리 실장님…… 아니 화가 나셔도 일단 우리 평화롭게 해결하시죠!”

평화를 사랑하시는 성녀님이시잖습니까!

참 성녀다운 행동에 기함한 이들이 황급히 말자 년을 뜯어말리며 온갖 말들을 쏟아 내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아무 소리들이 난무했다. 저들 자신이 뭐라고 하는지는 아는가 싶다.

‘와. 저게 진짜 성녀라니…… 하는 꼴 봐라.’

멀쩡한 정신도 가출하게 만들 소리들의 향연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면서 나는 다른 의미로 넋이 나갔다. 온갖 우스갯소리를 생각하며 어떻게든 회피해 보려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머릿속이 어지러워, 진심 토할 것 같았다.

루치아 라이블리가 전말자라니.

제가 읽었던 소설에서 성녀. 루치아 라이블리가 한국인이라는 말은 없었다. 더불어, 그녀의 본명 역시 나오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이었을까. 설마 여기서 내 현실 지인을 이렇게 끼워 넣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원래 극 중 인물이 말자처럼 한국인이었던 것일까. 아니, 그랬다면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었을 것이다. 나름 소설 중요 인물인 히로인 중 한 명을 제대로 소개하지 않을 리 만무했으니까. 아무리 성녀가 베일을 쓴,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랭커라 한들, 이런 대박 정보를 놓칠 리가 없었다. 작가라면, 절대로.

그렇다면 역시…… 나 때문인가? 내가 개입해서, 내가 모든 줄거리를…… 내게 포커스를 맞춰 버려서?

“……호! 윤지호!”

“……어?”

아예 내핵까지 파고들어 갈 기세던 정신을 강제로 누군가 끌어올렸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현실로 돌아와 위를 올려보자, 멱살을 잡히면서 영혼까지 함께 털린 줄 알았는지 심장이 떨어진 것 같은 얼굴로 유지한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가 보면 내가 멱살이 아니라 멱이라도 따인 줄 알겠다.

물론, 머릿속으로는 멱이 따이는 것과 같은 수준의 심각한 사안을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겉으로는 그냥 멱살 좀 잡히고 있던 것뿐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너무나 심각한 과잉반응에 이건 도대체 왜 이러나 싶던 와중에도 내가 마시고 있던 얼음물을 어느새 자연스럽게 마시며 제대로 열 받은 전말자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보고 있던 윤지우가 툭 쏘아붙였다.

“평생 남의 멱살은 잡아봤어도 자기 멱살 잡힐 일이 얼마나 됐겠어요. 처음이라 그래요. 처음이라.”

“…….”

그래. 아아아주. 고맙다. 저건 대체 날 뭐로 보는 걸까?

물론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주 처음인 건 아니거든?!

……맞나?

어쨌든 왠지 처음이 맞는 것 같지만 그럴 리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가자미눈으로 윤지우를 쏘아보자, 위험한 건 본능적으로 알았는지 녀석이 내 쪽은 조금도 쳐다보지 않으려 들며 시치미를 뗐다. 헌터 스킬 좀 키우라고 그렇게 노래를 불렀는데 날이 갈수록 뻔뻔 스킬만 느는 것 같은 망할 동생 놈을 뒤로하고, 나는 일단 우선순위인 지한을 달랬다.

“괜찮아요. 저게 말자 누나가 헌터에, 성녀라는 것에 충격 먹어서 그랬던 거에요.”

진짜 이 세상은 말세인 거 같아요. 유지한을 달래려 떤 너스레였지만, 부가 효과로 전말자가 더 날뛰는 효과만 얻었다.

그래도 뭐 어쩌라고. 라는 특유의 뻔뻔함으로 응수하고 있자, 이제야 평소의 나로 보이는지, 유지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놓고 안심하는 그 모습에, 괜히 가슴이 묘해지는데…….

“더 이상 화 안 낼 테니까 놓죠?”

“……진심이시죠?”

“속고만 살았나.”

응. 유지한은 속고만 살았지. 그래도 굳 잡.

저 녀석이 괜히 성녀는 아닌가 보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혔다.

덕분에 정신이 돌아왔다. 그래. 열심히 땅을 판다 해서, 저 녀석이 성녀가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고. 하도 이런 일이 많아서, 그럴 때마다 땅을 파기도 이제는 피곤하다. 땅 파다 무덤에 들어갈 것도 아니고. 그리 결론을 지으니 머릿속이 한결 편해졌다.

더불어, 드라키스전에서 성녀를 가열차게 굴리자. 라는 계획은 고이 접어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치유계 각성자인 성녀는 존재만으로도 치트키라서, 굴리면 굴릴수록 드라키스전의 승률이 대폭 올라갈 것을 알지만. 아무리 나라도 친구를 그렇게 혹사시킬 정도로 냉혈한은 되지 못했다.

“후우. 진짜……. 친구랑 장난도 못 치나요? 다들 이렇게 안 노나 보죠?”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도 사람이에요. 제이슨. 언제나 까먹고 있는 거 같지만.”

“……죄송합니다.”

‘…….’

작중에서 성녀는, 흔히 말하는 힐링 셔틀이었다. 성녀라는 고유 타이틀 때문에 타인에게 늘 자애를 베풀어야 하는 그녀는 그야말로 모두가 이용해 먹기 좋은 인물이었다.

본인은 나름대로 그것을 사전에 막기 위해 베일을 써 본래의 모습을 숨기고 다녔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은 베일 자체가 그녀임을 증명하는 것과 다름없게 되어버렸다. 더군다나 그녀는 특유의 성정조차 다정하고 자애로웠다.

그녀가 그런 삶에 만족했다면 할 말은 없지만, 처음에는 자의로 시작했으나, 결국은 타의가 된 그 삶에 과연 만족할 수 있을까. 아무리 그녀가 자애롭다고 한다 하더라도.

그게 항상 의문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난생처음 그녀에게 치료를 요구하지도 않고, 그저 사람으로 지켜주는 유지한에게 반하지도 않았을 터이니.

작중 유지한이 그녀에게 한 건 정말 별거 없었다. 그저 늘 그랬듯 지켰을 뿐이다. 자신보다 약한 자를, 제가 지켜야 할 자를. 하지만 그것만으로 성녀는 유지한을 눈에 담았고, 맹목적으로 의지했다. 정말 자신의 삶에 만족했다면, 그랬을 리 없었다.

“그리고 윤지호는 조금 뜯어먹혀도 되거든요? 쟤 돈 많아요.”

“와. 마음만 먹으면 세상에서 돈을 제일 많이 쓸어 담을 수 있는 갑부가 헛소리한다.”

“못하고 있자나. 나 거지야.”

“구라 즐.”

“진심. 치료하는 데 돈 안 받으니까.”

알아. 작중 성녀가 그랬으니까.

처음에는 자의로. 나중에는 타의로.

그게 내 친구에게 적용된다니 어처구니없고, 울화가 치밀었다.

“……안 받고 뭐 했어?”

“그러게…….”

내 타박에도 씁쓸하게 웃기만 하는 너를 봐서 더 짜증이 났다. 내가 아는 전말자 역시, 겉으로는 저렇게 행동해도 속은 여리고 착한 호구였다. 나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친구들 앞에서조차 가면을 쓴 채 살고 싶지 않아서. 외려 더 멋대로 행동하는 친구.

엄격한 부모님 밑에서 자라서 그런 건지, 천성이 그런 건지 알 수 없었으나 전말자는 작중 성녀처럼 희생이 일상인 녀석이었다.

그런 너에게 쓰는 돈이 아까울 리가.

다만, 네가 정당하게 대가를 받았으면 싶었다. 타인에게 강요당하는 삶이 아닌, 자유롭게 살았으면 싶었다.

아마, 성녀가 미국 내에서는 그렇게 두문불출하다 틈만 나면 타국을 숨 가쁘게 돌아다니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으리라. 조금이라도, 숨을 트기 위해. 티끌만 한 자유라도 얻기 위해서.

“난 괜찮으니 치료 안 해 줘도 돼.”

“응. 해야 돼. 넌 지금 모르겠지만 너 지금 되게 몸 피곤한 상태야. 해 줄 때 받아.”

“그럼 돈 받……. 알았어. 눈으로 욕하지 마. 밥 사 줄게.”

“좋아.”

아. 이렇게 밥을 뜯기는군. 하지만 밥 한 끼보다 더한 걸 받았으니 지호에게 이득인 폭리였다.

“근데 나머지는 대체 왜 온 거야?”

전말자랑 윤지우만 와도 충분한데 우르르 대체 왜 온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어 묻자, 그제야 자신들이 대군세로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어쩌다 보니…….”

얼결에 따라온 이들이 자신들도 이유를 말하지 못해 웃음으로 때웠다. 그런 모습을 보며, 이 맹한 인간들이 왜 왔는지 대충 눈치챈 나는 더 묻기도 귀찮아 손을 내저었다.

사실 전말자의 말이 맞았다. 딱히 몸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마력을 지나치게 몸에서 뽑아낸 영향인지 도를 넘은 마력에 취해 헤롱거리는 듯 몸이 축 늘어졌다.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지만,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며칠 내내 여랑이 걱정할 정도로 잠만 잤던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말자가 치료해 주어서 그래도 좀 나아졌지만, 수마처럼 닥쳐오는 피로는 여전했다.

한 마디로, 지금 이들을 상대할 여력이 없었다. 드라키스전에 참가할 생각은 없었지만, 최악의 사태를 대비해서 몸 상태를 정상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친구 간의 회포를 풀고 싶긴 했지만, 지금 체력으로는 그것도 무리였다. 과연 가능할지는 의문이었지만 나중을 기약하고 너도 일단 가라고 눈짓하자, 내 상태를 아는 말자는 군말 없이 동의했다.

“자. 다들 돌아가…… 응?”

그리고 파하자고 선언을 하려는데…….

“아…….”

발견하고 말았다.

어느새 소파에서 곱게 잠이 들어버린, 우리의 주인공님을.

말자의 시선을 따라 그걸 발견하고 나도 조금 어이가 없었다. 제집도 아닌데 이렇게 잠이 들다니. 유지한이 이런 캐릭터였나. 새삼 머릿속으로 소설을 뒤적거렸지만, 역시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런 우리들을 보며 유라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쥐어짜 떠올린 변명을 시도했다.

“……피곤했나 봐요……. 하하.”

물론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였다. 전말자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남의 집에서요……?”

세상 어떤 인간이, 남의 집에, 그것도 이성의 집에서 저렇게 곯아떨어지나. 아무리 피곤해도 유지한이 이런 행동을 보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연인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었다. 유지한같이 예의를 차리면서 사람을 믿지 않는 인간이라면 더더욱.

그걸 본인도 잘 알고 있었기에 유라는 할 말이 없었지만, 그래도 뭐라 옹호는 해 줘야겠다는 생각에 힘겹게 뱉었다.

“……체력적으로 한계였나 봐요.”

안 하느니만 못한 소리였다. 그래도 일리 있는 소리여서 나는 내 옆에 잠들어 있는 유지한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체력이 한계기도 했지만, 스트레스 때문도 있었을 것이다. 그 스트레스의 원인은 자신일 것이 분명했기에 마냥 이 망할 남자를 비난할 수 없었다. 윤지호나, 무명이나. 그가 받고 있는 모든 스트레스의 원인일 것이 자명하고 그 둘은 전부 나였으니.

톡―

조심히 손을 뻗어 유지한의 코를 살짝 건드렸다. 갑자기 이 남자 때문에 잔뜩 심란했던 마음이 떠올랐다. 이 남자는 거의 인생 최대의 스트레스와 심란함을 내게 주고 있었지만, 아마 나도 그에게 그럴 터이니…… 쌤쌤이겠지.

“괜찮아. 두고 가.”

“……뭐?”

“괜찮겠어요?”

“옆집인데 뭐.”

깨면 바로 옆에다 버리면 되지. 유지한이 위험한 사람도 아니니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자, 그가 무해하다는 것만큼은 절대 부정하지 못하는 이들이 속아 넘어왔다. 실상은 내게 유지한이 가장 유해한 놈이었는데 말이다.

“그럼 가 볼게요. 혹시 필요하시면…….”

“연락 드릴게요.”

걱정 말고 얼른 가라고 손짓하자, 진짜 가도 되나 싶어 다들 머뭇거리다 결국 걸음을 떼었다.

그렇게 모두가 나갔는데, 웬일로 전말자는 나가지 않았다.

“……너도 피곤하지 않아?”

왜 안 가냐고 묻자, 전말자는 그제야 모두가 있을 때 하지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까와는 달리, 진지한, 내 친구 전말자이자, 성녀로서.

“레이드 초보라서 모르는 모양인데, 네가 월드 랭킹 1위라고 해도 연속으로 여러 던전을 클리어 하는 건 몸의 무리가 가.”

“……!”

마력은 완벽히 감추고 있었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철저히 감췄고, 실제로 제 곁에 늘 있는 랭커들조차 알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성녀는 역시 다른 건가. 아니면…….

이런 내 의심을 알아차린 듯 전말자가 말했다.

“오해 마. 나 역시 너는 읽을 수 없으니까. 오히려 읽히지 않기에 안 거야. 그리고 나는 성녀야. 헌터들 치료해 본 적이 한두 번인 줄 알아. 몸 상태를 보면 뭐로 인해서 이렇게 됐는지 눈에 훤히 보여.”

그러니 네 능력을 의심하지 말라며 전말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새삼 성녀라는 존재에 대해 방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아는 전말자지만, 그녀는 틀림없는 성녀였다. 세계 최고의 힐러이자 보조계 1인자.

그녀가 상대를 간파하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 특이 케이스거나, 아니면 그녀보다 아득히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헌터를 수도 없이 치료해 봤으니 지금 내 몸의 휴우증이 마력에 의한 것도 금세 눈치챘을 것이다. 이 사실에 기반해 교집합을 찾아내듯 추론하면 당연히 답은 하나밖에 나오지 않았다.

성녀를 너무 얕잡아봤다.

“내 실수네. 너라고 너무 방심했어.”

“나도 반쯤 감으로 때려 맞춘 거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실책이야.”

감조차 눈치채지 못해야 했으니까.

입술을 꽉 깨물 정도로 빌어먹을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속이 후련했다. 무명으로서, 얼결에 1위라는 자리에 앉아버린 인간으로서도, 하소연이라는 것을 하고 싶었으니까.

“아. 어쩌다 인생이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모르겠다.”

“하하. 나도 내 인생이 이렇게 될 줄 알았나. 인생 다들 그렇게 사는 거지.”

전혀 다르면서 비슷한 인생을 살아온 전말자가 웃었다.

“조심해.”

“……나한테 하는 말이야?”

랭킹 1위인 나한테, 세상에 나보다 강한 자는 위에 하나도 두지 않는 나한테?

내가 무명이라는 것을 알고도 이런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다. 정말 진심으로 나한테 하는 소리냐고 어이없다는 듯 묻자, 그래도 전말자는 웃었다.

“나는 윤지호한테 하는 말이야. 나는 윤지호의 친구니까.”

“…….”

“강한 랭커가 무엇보다 조심해야 하는 건, 다른 어느 것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야. 항상 경계해야 해.”

그 누구도 제지할 수 없는 만큼 강한 내게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것은 나일 것이라고. 나보다 먼저 강한 힘을 가지고 살아온, 그렇게 세상과 일찍 직면한 그녀가 뱉은 뼈있는 충고였다.

“세계고 나발이고, 나는 내 친구가 가장 소중해. 그러니까…….”

그리고 동시에, 나를 아끼는 내 친구가 하는 말이기도 했다.

“나서지 마. 네가 나설 만큼 나약하지 않을 테니까.”

너를 제외한, 이 세계의 헌터들은.

자신이 그렇게 만들 거라는, 단호한 다짐에 나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성녀님 말씀이시니 존중해 드려야지.”

이걸 어떻게 이겨.

보란 듯 양팔을 들자, 전말자가 성녀가 아닌 내 친구로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문득 다시 지한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건 어쩌게?”

그 질문에는 나도 그녀와 같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이걸 어떻게 해야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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