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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장. 당신이 나빠요.(2) (17/30)

16장. 당신이 나빠요.(2)

“어이. 이든. 그 예쁜 아가씨 껌딱지 자처하는 것처럼 굴더니 어디다 두고 혼자 왔어?”

월드 랭킹 2위. 빛의 술사 밀리언이 지한을 보고 반갑게 아는 체를 했다. 짓궂은 질문은 어떻게 보면 자신을 비하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었지만, 지한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무덤덤하게 답했다.

“지금 일어날 시간이 아니니까.”

무엇보다 지한은 게이트에서 많이 고생했을 그녀를 억지로 깨우고 싶지 않았다.

덤덤하게 대답하는 그 모습에 밀리언은 ‘그럼 그렇지.’라며 혀를 찼다.

언제나 다정하고 배려 넘치는 유지한이지만, 밀리언은 알고 있었다. 그건 다 만들어낸 겉모습일 뿐, 실상 그는 텅 비다 못해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무심한 남자라는 걸. 그렇기에 그렇게 희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놈이 온갖 감정을 다 드러내고 한 여자만 졸졸 따라다니며 껌딱지를 자처하는 모습이 매우 놀랍고 신기했다. 다채로운 표정에 그사이 좀 변했나 싶었는데, 그건 아닌 듯했다. 이렇게 보니 여느 때와 완전히 똑같지 않은가.

아니, 변하긴 변했다.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 그 여자 하나가 존재하게 되었으니.

“평생 놓치지 말아야겠어. 이든.”

그 여자 없어지면 그 전의 인생으로 돌아갈 수 있겠어?

장난기 가득하지만 뼈 있는 말에, 지한이 시리도록 차가운 얼굴로 답했다.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야.”

방해한다면 당장 자신을 죽이기라도 할 기세에 밀리언이 손을 들며 항복을 선언했다. 자신이, 그들이 싸워야 할 무대는 지금 여기가 아니었으니까.

“그럼 1차 대책안을 짜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저희가 파악한 바로는 화룡왕 드라키스 아래 그 측근이라고 하는 4군단장이 있습니다. 그들만 해도 등급은 SS급 보스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어우, SSS급 등장에 SS급 보스 넷? 죽으라고 아주 고사를 지내는 거나 다름없네.”

노이람이 가차 없이 비소를 날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SS급이 넷이면 SSS급이나 다름없었다. SSS급 하나를 상대하려고 전 세계 헌터를 다 끌어와도 모자랄 판이었는데, 지금 전력은 너무나 부족했다.

모두가 봐도 불가능에 가까운 게임이었기에 센터장도, 그 휘하 직원들도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특히나 이미 그들에 대해 조사한 이들은 누구보다도 확실히 이미 공포를 몸소 실감하고 있었으니.

“다들 유언장이나 미리 먼저 써놓자고.”

“써놓으면 전달은 된대?”

싹 다 뒤질 판인데.

장하리의 냉소적인 판단에 월드 랭킹 9위. 광전사 카밀라 레토가 무슨 그런 시대착오적인 소리냐며 혀를 찼다.

“인터넷이라는 좋은 신문물이 있는데 뭘 걱정해?”

“유서를 인터넷으로……. 그래. 나쁘지 않겠네. 어떻게든 전달은 되겠네.”

따라갈 수 없는 블랙 조크에 센터 직원들은 그냥 침묵하고, 랭커들은 있는 대로 야유를 날렸다.

그럼에도 그들이 존경스러운 것은, 아무도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싸우기로 결정한 것을 철회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는 듯이.

그들은 인류의 마지막 보루이자 희망인 헌터들이었다. 절대 죽을 자리를 피해 도망치지 않았다.

“자. 그럼 각자 자리 정하자. 어느 쪽으로 갈래?”

“난 그럼 서쪽에 있는 놈. ‘분노의 피오레’였나?”

“그럼 나는 ‘희생의 율라’로 하지.”

“난…….”

죽을 수도 있는 길임을 뻔히 알면서도, 아니, 죽을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을 알면서도 덤덤히 전력을 나누고 있는데, 그들의 모든 계획을 철회하고도 남을 알림음이 그들의 머릿속으로 울려 퍼졌다.

【축하드립니다!】

【화룡왕 드라키스의 권속. 4군단장 중 한 축인 ‘율례의 마드라’가 처치되었습니다.】

【드라키스의 측근, 마드라의 던전이 클리어됐습니다.】

【솔로 레이드 클리어입니다.】

【클리어한 자는 ‘이매망량의 주인’입니다.】

【SS급 던전을 클리어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오우.”

난데없이 울리는 엄청난 소식에 모두가 단번에 얼어붙었다. 호들갑 한 번 떨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 현실을 믿지 못해서이기도 했지만, 그 헤아릴 수 없는 무위에 감탄밖에 나오지 않아서.

그 사이에서, 그래도 이 중에 최강이라고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밀리언이 트레이드마크인 짓궂은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말했다.

“어디 갔냐고 그렇게 욕을 하려고 했는데, 이제는 진짜 욕도 못 하겠네.”

이렇게 멋져 버리는 것도 세계의 왕이 가진 능력인 것인가. 밀리언은 진심으로 자신을 밀어내고 왕좌를 차지한 이가 궁금해졌다. 그게 애초에 그가 한국행을 결심한 이유기도 했다.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과 달리 며칠째 고전하고 있었지만.

【세계 최초로 2차 각성자가 등장하였습니다!】

“뭐?!”

그리고 그 인물은 이 틈에 그 누구도 닿을 수 없는 아득한 곳으로 다시 한번 올라가 버리고 말았다.

밀리언은 정말 오랜만에 승부욕이 활활 불타올랐다. 오래전에 사라졌던, 그 감정이.

“2차 각성이라는 게 있단 말이야?”

“이거 흥미롭군.”

“역시 랭킹 1위는 뭐가 달라도 다른가 본데.”

주위의 모두는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이며 한마디씩 했다. 좀 전까지 차갑게 굳어 있던 공간이 묘하게 들뜨기 시작했다.

짝짝―!!!

“아, 뭐야!”

“깜짝이야!”

“좋아. 다들 정신 차렸군. 그럼 얼른 시작하자.”

“뭘?!”

“우리 왕님께서 이렇게 판을 쉽게 깔아주셨는데, 숟가락이라도 얹어야 하지 않겠어?”

최소한 먹칠은 하지 말아야지. 볼 낯이 없어지잖아.

그 말에 모두의 눈이 빛났다. 그들도 어디서 승부욕으로는 지지 않는 세계의 최강자들이었다.

* * *

랭커들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난데없는 소식에 소란스러워졌다.

『[속보] 클리어에 더한 걸음. 소식 없이 움직인 1위의 행보!』

댓글 13,434

― 가슴이 웅장해진다.

― 아직 신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음.

― 밀리언이 왔으니 나오지도 않는 월랭 1위 나오라던 밀리언 빠새끼들 다 튀어나오셈.

└ 안나와. 너같으면 나오겠냐.

└ 단신 솔로레로 ss급을 해치웠는데 쫄아서 나오겠냐.

― 오늘부터 팬클럽 바꿈. 무조껀 우리에 노네임 님만 찬양하며 살겠음.

└ 같이가셈.

└ 빠던 아이돌 탈덕하고 일로 갈아탄다.

└ 와…빠순이들까지. 존나 미쳤네… 나도간다.

― 월랭 1위씩이나 하면서 왜 급박한 이때 나오지 않냐며 쌍욕하던 것들 다 어디갔니. 아 쪽팔려서 못 나오는구나.

└ 못나오지. 나오면 순살행열차 탈텐데.

└ 다시 월랭님 들어가시면 전국민이 저주할 거임.

└ 저주만 하겠어? 난 칼들고 사시미 뜨러간다.

└ 동참하겠습니다. 그냥 다같이 모이시죠.

└ 좋은 생각입니다. 혹시 서울대?

― 진짜 사람들이 이기적인 소리 잔뜩 늘어놓으면서 흉봤는데 진짜 소리없이 중간보스 혼자 쓱싹하시고 오신 당신은… 그저 빛…

└ 여기 무명빠 1 탄생

└ ㄴㄴ 무슨 개소리임. 한 13493201번째쯤 되실 듯. 우리 무명님 너무 무시하시는 듯? 님 주소가 어떻게 되십니까.

└ 국뽕 너무 들이마시셨음.

└ 워워. 거기까지 가세요.

└ 님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지 마센.

― 유일한 2차 각성자. 세계 넘사벽이 되었는데 무서워서 누가 건들겠음…누나 나랑 결혼해요!!!

└ 무슨 미친소리… 내가 할 거야!!!!

└ 어허. 선수를 지켜주세요. 내가 할거임.

└ 개솔 오지네. 원래 오빠래. 우리 유지한이 그랬음. 그러니까 다들 못해. 그러니… 내가 할 거임. 오빠. 나랑 결혼해요. 평생 손에 물 한방울 안묻히게 해줄게!

└ 와우… 각오보셈.

└ 지렸다.

└ 프로포즈는 이렇게. 배우고 갑니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자신을 완벽히 각인시키는 것도 모자라 순식간에 모두의 선망의 대상이 된 세계 최초 2차 각성자는…….

“아우……. 인생 진짜 왜 이래…….”

자괴감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진짜 착하게 사는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을……. 이런 건 제발 나 말고 유지한을 주라고!! 2차 각성해도 나를 넘어설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는데……. 왜 나만 더 최강 먼치킨을 만드는지…….

뒹굴뒹굴. 신세 한탄을 하며 아주 땅바닥을 굴러다니는데, 그런 나를 보며 성위님이 진짜 가지가지 한다는 듯 쯧쯧 혀를 찼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이쯤 되면 ‘유지한 1위 만들기’는 포기하는 게 좋지 않겠냐며 쯧쯧 혀를 찹니다.]

[이렇게 스트레스 받을 바에야 그냥 시원하게 포기하고 일코 열심히 해서 모른 척 살아가기로 목표를 바꾸는 게 어떠냐며 나름 합리적인 목표변경을 제의합니다.]

매우 합리적이지만, 그럼에도 세상에 둘도 없는 개소리에 나는 펄쩍 뛰었다.

“무슨 소리야!! 절대 포기 못 해―!!”

그럼 지금까지 내가 한 건 다 뭐가 돼!! 그 개고생이 아까워서라도 절대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물론 이게 쓸데없는 아집인 걸 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지금껏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억누르고 있던 방파제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해서 나는, 어리석고 유치하지만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불합리한 고집을 부렸다.

“주인님. 아직 그렇게 움직이시면 안 돼요.”

그때, 내가 자유분방하게 몸을 굴리는 것을 보던 여랑이 걱정된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넝마가 된 내 꼴을 봤을 테니 이해는 충분히 가지만, 그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던 건 2차 각성의 영향 탓이 가장 컸다. 지금은 2차 각성을 완료한 상태이니 아주 멀쩡했고.

“괜찮아. 괜찮아.”

멀쩡하다뿐일까. 여랑의 치료 덕분인지, 아니면 2차 각성의 영향인지, 그냥 느끼기만 해도 근육 자체가 훨씬 단단해졌고 몸이 가벼워졌다. 전신엔 가벼운 흉터 하나 없었고, 아무리 움직여도 지치는 기색 또한 없었다.

여랑의 눈이면 이런 것쯤 훤히 들여다보일 터인데도 뭘 그리 걱정을 하는 건지.

“그래도 이 여랑은 걱정이 되는걸요.”

이해할 수 없는 맹목적인 애정이었지만, 그래도 그런 감정은 언제나 불쾌하지 않았기에 나는 인자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럼 당분간은 네가 여기 있을까?”

“……네?”

그래도 되나요?

내게 조금도 밉보이고 싶지 않은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눈에서 피어오르는 환희는 감출 수 없었다. 그 어린애 같은 모습에 웃음이 튀어나올 뻔했다. 있어 봤자 부려먹기만 할 텐데 뭘 그리도 좋아하는지.

“응. 어차피 네가 계속 해 줘야 할 일도 많고.”

사실 눈 뜨자마자 주위의 모습에 기겁을 했다. 내 집이 내 집이 아니야……. 돼지우리가 순식간에 모델하우스가 되어버린 광경을 보고 나는 정말 진지하게 여랑을 평생 옆에 끼고 살까 고민했다.

“좋아……. 너무 좋아요!!”

“……!”

와락―!

무엇이 그리 기쁜 것인지, 여랑이 와락 나를 끌어안았다. 예고 없는 스킨십에 살짝 당황했지만, 행복함이 넘쳐흐르는 듯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미소가 나와 떼어내기보단 살포시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여랑이 진짜 잘할게요! 열심히 할게요!!”

“안 그래도 돼.”

진짜로. 여기서 뭘 더 열심히 해. 이미 충분히 차고 넘치는데. 여기서 더 의욕적이면 오히려 무서웠다.

이런 무심한 내 목소리에도 그저 좋은지 여랑이 여우 귀를 쫑긋 드러내고 마구마구 흔들었다. 그게 너무 귀여워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럼 난 다녀올 테니 집 잘 지키고 있으렴. 아, 미리 처리는 해놓을게.”

스마트폰을 들어 지한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은 좀 쉴게요. 어차피 내가 할 일은 별로 없고. 내일 오후에 있을 마지막 작전 확인 때는 갈게요.」

결전의 날이 바로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 전에 반드시 4군단장을 모두 처치해야 했다.

“그럼 다녀올게. 여랑아.”

【스킬: 수백 개의 가면(S)을 발동합니다.】

【라이브러리가 펼쳐집니다.】

【시전자가 바라는 힘에 걸맞는 가면이 선정됩니다.】

【‘밤의 지배자. 하울’이 선정됩니다.】

【‘하울’의 가면을 씁니다.】

아직 처치해야 할 것들이 셋이나 남았다. 그래도 4군단장 중 리더 격인 마드라를 미리 치웠으니 다른 군단장은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착하게 있으렴.”

“뀨우~!”

“아. 이번에는 하람이도 여기 있어.”

들킬지 모르니까.

* * *

이번에는 하람이를 데려올 수 없었다.

물론 하람이가 나서 준다면 나는 편하고 하람이도 강해지고 일석이조였지만, 하람이와 내가 함께 있으면 분명 누군가는 의심을 할 것이다.

마주치지 않으면 괜찮다 해도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판단했다. 그야…….

“밀리언! 밀지 마!!”

“아니. 흥분되잖아.”

“일단 대열이나 지키고 기분 챙기라고. 제발.”

그 알림창을 본 랭커들이 호승심을 가지고 토벌에 박차를 가하지 않을 리 없으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건 랭커가 아니었다.

나처럼 별수저라 단박에 자리에 오르지 않는 한, 모두 치열한 싸움과 시련을 넘어 그 자리를 차지한 인간들이었다. 호승심이 생기지 않을 리가.

설령 호승심이 아니라 한들, 제가 할 일을 깨닫기는 했을 것이다. 내 공략 성공 메시지는 분명 이대로 있을 수 없다는 위기감에 힘을 실어줬겠지.

어쨌든 딱 봐도 보통이 아닌 기운들을 느끼고 나는 바로 깨달았다. 이 던전은 솔플 하긴 글렀다고.

근데, 저것들 지금 뭐 하냐.

“아. 나 먼저 튀어 나가면 안 돼?”

광전사. 카밀라 레토.

“작전 잊었냐…….”

연금술사 K. 제이 모렌토.

“애초에 우리한테 뭔 작전이 필요해. 우리 정도 수준이면 작전이 오히려 방해야.”

빛의 술사. 레이 밀리언.

“맞는 말이지만, 우리는 힘을 비축해야 돼. 그러기 위해선 작전에 따르는 게 중요하고.”

성기사. 루이스 오르비앙.

딜러, 탱커. 힐러 및 방어. 마법사까지. 누가 짰는지는 몰라도 완벽한 조합이긴 했다.

……포지션만 보면.

“아. 그냥 가자! 나 빨리 가고 싶다고!”

“나도 좀 동…….”

“닥쳐. 레이 밀리언.”

“아 옙. 딱딱한 성기사님.”

저거 진짜 누가 짰냐.

화합은 개나 준 엉망진창 팀을 보며 나는 진심으로 실소했다. 힘을 합쳐 싸우기는커녕, 팀킬을 시전할 최악의 팀워크였다. 이번 상대가 ‘희생의 율라’인 걸 감안하면 진짜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 광경이었다. 사이좋게 다같이 희생당할 판이었다.

“일단 얼른 그만 싸워. 다들.”

그렇게 한숨을 쉬고 있는데, 무언가를 눈치챈 건지 밀리언이 갑자기 중재에 나섰다.

“응? 갑자기 무슨 소리야.”

“니가 젤 앞장섰거든?!”

맞는 말인지 밀리언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긴 한데, 일단 추태는 보이지 말아야지.”

“뭐……?”

“우리의 왕께 처음으로 인사 드리는 자리인데.”

“……!!”

모두의 시선이 밀리언을 따라 움직여 그들의 위에 있던 내게 향했다. 눈이 튀어나올 듯 동그래지는 게 꽤 볼만한 장면이었다.

그 사이에서 자기 혼자 멋들어지게 미소를 지으며 밀리언이 말했다.

“미천한 천민이 왕을 뵙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무명’.”

과한 환대에 절로 웃음이 피어나왔다. 살다 살다 저런 헛소리를 들어볼 줄은 몰랐다.

“개소리가 과하군.”

월드 랭킹 2위. 헌터 보유 강대국 1위인 미국에서 1위인 밀리언이 미천한 천민이라니. 세상의 누구라도 어이없어할 기만이었다. 네가 천민이면 다른 이들은 갯지렁이냐.

그 생각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인 듯, 밀리언의 말을 지켜보던 이들의 표정이 다 썩어들어갔다. 그래도 지금 중요한 건 레이 밀리언이 아닌 나였기에, 그들은 금세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무명은 여자 아니었어?”

“이든이 그랬잖아. 모습이 바뀐다고. 특정할 수 없어.”

“그게 진짜일 줄이야.”

저런 반응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생각해도 휙휙 변하는 모습과 성격은 적응이 안 되긴 했으니까.

지금 내 모습은 누가 봐도 남자에 가까웠다. 물론 남자치고 매우 여성적인 선이긴 했지만, 그래도 틀림없는 남자였다. 종아리까지 오는 긴 청보라색 머리와 수많은 화려한 액세서리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것과 별개로, 정식으로 차려입은 검은색 제복은 여리하긴 해도 틀림없는 남자의 몸을 드러내고 있었으니.

그렇다고 눈앞에 사람을 두고 저렇게 수군대는 건 좀 그랬다.

“음……. 그렇게 대놓고 평가하는 건 기분이 별론데.”

“앗, 죄…… 죄송합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벼락같이 사과를 해오니 또 화내기는 뭐해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나저나, ‘희생의 율라’ 레이드 원정대인가?”

“예. 옛!”

“무. 물론입니다!”

“그냥 돌아가지.”

가서 힘이나 좀 비축해 두지. 진심으로 이건 좀 짜증이 났다. 니들 힘 아끼겠다고 내가 이 개고생을 하고 있는 건데, 왜 사서 고생하겠다고 나서는 건지. 이럴 시간에 잠이나 더 자고, 최종 보스 쓰러트릴 준비나 철저하게 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쪽을 먼저 쓰러뜨려야 최종 클리어에 유리해집니다.”

성기사가 특유의 고지식함을 그대로 드러내며 내게 반박했다. 너 말 한번 잘했다.

“그래. 그렇지. 그러니까…….”

“……?”

“내가 할 거야. 전부.”

그러니까, 돌아가지?

깔끔한 미소로 그들을 밀어내자 그들의 얼굴이 이상해졌다.

“혼자서…… 말입니까?”

“뭐가 문제지?”

늘 그랬는데?

누가 있으면 그쪽을 신경 쓰느라 오히려 귀찮았다. 하물며 내 말에 절대복종하는 권속도 아니고, 이 떨거지들을 달고 레이드라니. 지키다가 짜증 나서 다 갖다 버려버리고 싶어질 것이다.

이미 이들의 개성은 충분히 보고 난 후였기에, 더더욱 이들을 끌고 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런 내 생각을 눈치챘는지 모두의 표정에 승부욕과 불쾌함이 어렸다.

“우리도 랭커입니다. 무명.”

“충분히 알고 있는데?”

“어디 가서 절대로 걸리적거릴 인력이 아니란 말입니다.”

“물론 그렇겠지.”

어디 가서 이런 취급을 당해 봤을까. 오면 다 어서 옵쇼, 굽신굽신이 기본일 텐데. 하지만 애석하게도 난 아니었다.

“그럼…….”

“하지만, 너희처럼 개성 넘치는 것들은 통제가 안 되지.”

“……!”

“본인이 랭커인 만큼 힘도 있으니 더더욱 그렇고.”

“…….”

“레이드는 힘만으로 되지 않지. 하물며 통제가 안 될 정도로 힘만 센 것들은 오히려 방해란 말이야.”

발목만 잡지 않으면 다행일 돌쇠들을 데려가서 무슨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줄 알고. 그런 일은 사전에 차단하고 싶었다.

“그래서, 난 너희들을 데리고 갈 생각이 없다. 그러니 돌아가.”

내가 좋게 말할 때. 모처럼 나서서 니들을 위해 이렇게 고생하는데, 물거품 만들지 말고 제발.

한숨을 쉬며 퇴각을 권유하는데 성위님이 말해왔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렇다고 저 꼴통들이 좋게 말을 알아듣겠냐며 혀를 찹니다.]

아. 그런가.

매우 일리 있는 말에 절로 탄식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밀리언이 말했다.

“우리도 랭커로서 자존심이 있습니다. 무명.”

“……자존심?”

“당신께 다 맡겨놓고 뒤에 숨을 생각은 추호도 없단 말입니다.”

그래? 다른 놈들 생각은 좀 다를 텐데. 어쨌든 마음은 좀 기특했다.

“후. 그래. 그럼 따라오든가.”

“……네!!”

“단, 방해하면…… 재미없을 거다.”

아마…… 인생이?

매혹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경고를 날리고 앞으로 먼저 걸음을 옮겼다. 졸지에 저것들에게 던전 구경을 시켜 주게 생긴 판이었다.

* * *

피이―! 피이―!!

첫판은 불을 뿜어내는 요상한 히피들이었다. 수십 마리의 히피들이 공격을 쏟아내니 보이는 거라곤 완전 불바다에 불쇼였다. 하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우아하게 걸음을 옮겼다.

“으악!”

“제이! 방어 안 돼?”

“간단한 실드 정도야 바로바로 되지만, 그 정도 수준으로 커버될 불이 아니야.”

“무슨 초반부터 이딴 난이도야!”

또각또각―

뒤에서 펼쳐지는 아수라장 사이에서 또각또각 우아한 구두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게는 불 따위 아무런 타격도 줄 수 없었기에 이 정도는 공격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밤은 존재하되 항상 존재하지 않는 존재였다. 이런 불 따위가 해를 끼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저 걸어갈 뿐인 나를 불들이 자연스럽게 피해가거나 통과해 갔다.

“뭐야. 나 꿈꾸냐.”

“저거 뭐야. 저게 가능해?”

“……일단 가능한 사람들이 있으니 이상한 건 아니지.”

“미친 거라고! 저거 반칙 아냐?”

그런 나를 경외감 어린 시선으로 보면서 믿을 수 없다고 외치는 관객들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자기들은 초장부터 죽어나는데, 누구는 한번 맞지도 않고 유유히 빠져나가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태연히 제1 공간을 통과한 나는 조금은 지켜볼까, 하는 마음에 팔짱을 끼고 그들을 지켜보았다. 여기서 멈춰 선다면 애초에 거기까지인 것들이었다. 드라키스 앞에서 고기 방패 외의 용도로는 써먹을 수 없을 것이다. 포기할 건 가뿐하게 포기할 생각이었다.

그런 내 생각을 눈치챈 건지 그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야. 장난 여기까지 하자.”

“그래. 왕님이 두고 가실라.”

【성기사의 포효(S)가 발동됩니다.】

【빛의 성례(S)를 발동합니다.】

【광전사가 광기 어린 검을 발도합니다.】

【골렘(A)을 소환합니다.】

성기사가 포효하자 히피들의 공격이 잠시 멈췄다. 그 순간 밀리언의 빛의 성례가 길을 내며 히피들의 움직임을 막았고, 광전사가 날아올라 히피들을 한칼에 베어버렸다. 그런 광전사를 보조해 연금술사의 골렘이 광전사가 베지 못한 히피들을 손으로 짓뭉갰다.

끼이이이―!!

찌르는 듯한 울음소리와 함께 수십 마리의 히피가 한 번에 전멸했다. 그걸 보며 나는 평가를 수정해야 했다.

“흠. 아주 못 쓸 것 같지는 않네.”

팀킬을 부를 팀워크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팀워크가 나쁘지 않았다.

“마음에 드셨습니까?”

만족스러워하는 나를 향해 밀리언이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의기양양하게 물었다. 그 모습에 나는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희망이 보이네.”

“좋은 평가 감사드립니다.”

정말 다행이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 정도면 기대해 봐도 되겠어.”

“네? 그건 무슨…….”

“난 드라키스전에는 참전할 생각이 없거든.”

“……!!”

“그게 무슨……!!”

어라. 이것들 봐라.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아니면 내가 왜 애써 다른 군단장들을 직접 쓸러 왔겠나?”

내가 해 줄 수 있는 배려는 딱 여기까지였다. 나는 절대로, 유지한에게 나를 들킬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에게 윤지호는 그냥 일반인 윤지호이고 싶었다. 그게 오만이라고 해도.

“자. 그럼 마저 출발하지. 시간이 없다 보니.”

이거 말고 앞으로 두 개나 더 있거든.

* * *

또각또각―

제일 앞에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왕의 뒷모습을 보며 뭐에 홀린 듯 따라가던 그들은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 듯 서로의 몸을 꼬집어댔다. 상상을 초월하는 통증에 광전사 카밀라가 비명을 질렀다.

“Fuck! 졸라 아파!”

“넌 정체성 하나만 해라…….”

뭔 놈의 미국인이 원어로 욕을 하면서 한국어 비속어까지 완벽하게 섞어 쓰고 난리인지.

대체 어디서 배워온 거냐며 제이가 투덜거리자, 아프게 꼬집힌 부분을 연신 쓰다듬던 카밀라가 너 설마 모르냐는 얼굴로 제이를 쳐다보았다.

“나 레쓰비 여행 다닐 때 맨날 같이 가잖아.”

그래서 웬만한 한국어는 전부 가능함!

자신 있게 꺼내지는 이름에 모두가 아연실색했다.

레쓰비는 국내에서도 유명하지만 사실 해외에서 더 유명했다. ‘그 보석에 미친 놈’, ‘통제 불가능한 놈’으로.

어떻게 얻어낸 스킬인지 몰라도, 그가 사용하는 텔레포트는 수준이 남달랐다.

보통 텔레포트는 반경 10km 정도까지만 가능했다. 이제껏 텔레포트에 대한 국제법이 제대로 규정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이 탓이었다. 죽도록 힘써봐야 국내가 거의 한계였으니까.

그런데 레쓰비는 국가 단위로 날아다녔다.

물론 월드 랭커 중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이들은 차라리 직접 움직여 이동하는 편이 쓸데없는 마력 소모를 하는 것보다 나았다. 게다가 일단 주위의 이목도 신경 쓰이고, 그 후가 귀찮기도 하고.

그렇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남들 이목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다니는 건 레쓰비밖에 없었다. 어차피 그 좋은 재능으로 하는 거라곤 보물찾기뿐이니 다들 내버려 두는 편이지만.

그런 반면 그는 보석에 대해선 아주 용의주도해서, 증거도 남기지 않고 아주 은밀하게 연달아 보석을 갈취해 각국 정부의 뒷목을 잡게 한 또라이였다.

언제는 한 나라가 남의 사유재산을 마음대로 탈취해 간다고 항의해 온 적이 있었지만, 그는 대뜸 가운뎃손가락을 날리고 잠수를 탔다. 너네들도 그런 게 있었던 줄 몰랐으면서, 어차피 헌터가 아니면 얻지도 못할 건데 생색내지 말라는 비웃음과 함께였다.

한국은 어쨌든 레쓰비의 보석이 늘어갈수록 국익이 늘어나는 것이기에 입을 싹 닫고 증거 있냐고 모르쇠를 하는 중이었다. 이럴 때만 참 합이 잘 맞았다.

덕분에 레쓰비는 현재 광산을 보유한 모든 나라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인사였다.

그 제멋대로 인간과 세계최강으로 이성의 선이 없는 여자가 함께 다니고 있었다니……. 이 정도면 그냥 테러리스트 아닌가?

이거 단속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다른 이들이 활발히 눈짓 교환을 하는데, 카밀라가 그런 시선은 느껴지지도 않는지 경외 어린 얼굴로 제 앞에 있는 사람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내 특성상 곧바로 덤벼도 모자랄 상대인데…….”

“…….”

“덤빌 생각이 조금도 안 드네.”

이길 수 있겠단 생각이 손톱만큼도 안 들어서 그런가.

강한 상대일수록 투지가 불타는 광전사의 특성이 무색했다. 각성한 후로 처음 있는 일인지라 매우 새롭다는 듯한 카밀라의 설렘 가득한 얼굴에 모두가 제대로 질린 얼굴을 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전부 카밀라의 ‘묻지마 칼뽑힘’을 당한 전적이 있는 사람들이니 당연했다.

하지만 더욱 억울한 건, 그들 역시 그녀의 말을 뼈저리게 이해하고도 남았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무슨 짓을 하든 눈앞의 저 절대자에게 손 한 번 제대로 닿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득히 멀어…….’

손끝은 닿을까. 자신할 수 없었다.

그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음에도, 오히려 그렇기에 더 두려웠다. 그 존재만으로 단박에 그들을 누른 그 권위가. 우리 따위는 짐덩이로밖에 보지 않는 그 위대함이.

살아생전 그런 걸 느껴본 적이 없는 이들이었기에 그들은 이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다.

[“내 영역을 침범한 아련하고 안타까운 이들이 그대들이구나.”]

“흐음…….”

“……!!”

그 순간, 낯선 목소리가 울리더니 허공에 거대한 무언가가 ‘있었다.’ 아직 중간 보스도 최종관문도 거치지 않았는데 곧바로 최종 보스가 등장한 것이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나타났는지라 언제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숨을 압박하는 위압감에 모두가 숨을 삼켰다. 이 정도의 위압감인데 어떻게 이렇게 근처에 다가올 때까지 눈치를 못 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두 조심……!”

“물러서!”

그렇기에 모두는 다급히 경계를 올렸다. 그리고 긴장 상태를 유지하며 ‘희생의 율라’를 바라보았다.

“……천사?”

마치 천사의 모양새를 한 것 같은 그녀의 모습을.

“예쁘네.”

눈만 깜박이며 서 있던 무명이 태평하게 율라를 보며 감상평을 던졌다. 틀린 건 아닌데, 상황에 맞지 않는 참 얼빠진 소리긴 했다. 하지만 그게 여유에서 나오는 말임을 알고 있었기에 아무도 어이없다고 여기지 않았다.

쏴아아―!!

“무명―!!!”

“무명 님!!”

무명의 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율라가 곧바로 그를 향해 직진했다.

파앗―!

천사가 강림하는 것처럼 화려하게 날개를 펴고 순식간에 날아 내려오니 모두는 어찌할 새도 없이 당황한 얼굴로 무명을 부르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무명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팔을 벌려 제 품을 향해 달려오는 이를 마주 안아 주었다. 그런 그의 행동에 율라가 싱그럽게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멋진 인간이 칭찬해 주다니. 기분이 너무나 좋네요. 품도 따듯하고요.”

“영광이군요.”

마치 소설 속 한 장면처럼 완벽하고 환상적인 포옹 신이었지만, 모두는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 가득한 얼굴로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평소였으면 휘파람을 불거나, ‘꼴값 떠네.’라고 비웃거나 실컷 즐겼을 이들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상대가 문제였다.

하나는 세계관 최강자. 다른 한쪽은 최종 보스의 최측근. 조금만 경계가 흐트러지면 어느 한쪽의 목이 날아갈 것이다.

대체 어쩌자고 저러는 것일까.

비록 최종 전투에서 그는 나서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계최강이라는 전력을 상실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다들 긴장감 어린 얼굴로 무기를 거머쥐는데, 정작 그런 걱정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세계관 최강자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으로 아슬아슬 매혹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내가 무섭지 않나요? 내가 당신을 이대로 공격할 수도 있잖아요.”

어쩜 이렇게 망설임 하나 없이 마주 안아줄 수 있죠? 물론 너무나 좋지만, 그래도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지 않냐며 율라가 물었다.

사람도 아닌 몬스터의 상식적인 물음에 무명이 즐겁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핫. 네. 전혀요.”

“전혀요?”

“나는 밤이니까요.”

……?

모두가 무명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이들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무명은 ‘밤’이라는 제 선언답게 나른하고 고용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반대죠. 율라. 당신은 나를 잡을 수 없어요. 상처입힐 수도 없고요. 나는 당신이 가장 무서워해야 할…… ‘밤’이니까.”

“……!!”

쏴아―!!!

그 말이 끝나자마자 어둠이…… 아니, ‘밤’이 율라를 덮쳤다.

그러나 한발 앞서, 이곳에 있는 이들 중 가장 먼저 그 말의 진의를 깨달은 율라는 재빠르게 무명의 품에서 빠져나와 하늘로 도망쳤다. 그 덕에 가까스로 ‘밤’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었다.

“후우. 무서운 남자였네요.”

“당신에게는 세상 그 어떤 이보다 더더욱이죠.”

이미 ‘희생의 율라’에 대한 파악이 끝난 듯 무명이 진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의 진의를 알아차린 율라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긴장감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녀에게는 수가 있었다.

“당해낼 재간이 없네요. 매력적인 남자는 어쩔 수 없는 걸까요?”

“그리 말씀해 주시니 영광이군요.”

“후. 언변마저 청산유수군요. 정말 나빠요. 하지만…….”

“……?”

“당신 외의 이들에게는 저도 그렇게 보일 것 같답니다.”

“……!!”

그녀의 말에 무명의 표정이 처음으로 변했다. ‘희생의 율라’는 그 얼굴을 보며 즐겁게 웃음을 터뜨렸다. 만약 오늘이 제 마지막이 된다 하더라도 저 얼굴을 봤으니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가 볼게요. 부디 즐거운 시간이 되시길.”

나의 마지막을 즐겁게 해 주길.

* * *

‘이런 빌어먹을―!’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러게 저 떨거지들을 왜 데려왔냐 투덜거립니다.]

[레이드 팀은 힘이 고만고만한 것들이 하는 거지, 오히려 한쪽이 월등하면 다른 것들은 방해만 된다고 있는 대로 투덜거립니다.]

‘나도 알아!!’

그래서 처음에 열심히 떨구고 오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결국 데리고 온 건 실력 확인 겸, 가능하면 레벨업을 시켜 주고 싶었던 인자한 마음 덕이었다.

“미쳤어? 카밀라―!!”

“늦었어. 이미 지배당했어. 모두 물러나!”

어느 정도 귀찮아질 거라는 것 정도는 예견하긴 했지만, 진짜 이렇게나 귀찮아질 줄이야…….

“도…… 도망쳐…….”

“젠장! 카밀라 레토―!”

하필 걸려도 광전사가 걸렸다. 아니, 알고서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름으로 미루어보아, 이 ‘희생의 율라’가 가장 더럽게 싸우는 이였을 테니.

“예상대로 싸우는 방식은…… 아름답지 못하군요.”

“힘없는 여자가 싸우는 방식이지요.”

글쎄.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졸라 개소리로 들렸지만, 지금 상황만 따지면 그럴듯했다. 실제로 그녀가 군단장까지 올라간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인 거 같았고.

나는 별다른 말을 하는 대신 그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레이 밀리언.”

“네……. 네!”

“동정심 넣어두세요.”

“……네?”

“이건 여러분의 감정을 이용하는 싸움입니다. ‘희생의 율라’의 이름에 붙은 ‘희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제 다들 알아들었을 거라 믿어요.”

“…….”

여기까지 와서 모르는 인간이 있을까. ‘희생의 율라’를 클리어하려면 반드시 희생이 필요했다. 지배당한 이를 쓰러뜨리고, 율라가 새로 조종할 이를 찾기 전에 곧바로 그를 쓰러뜨려야 했으니까. 그 순간을 놓치면 또 다음 기회를 노려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1명 이상이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지금 지배당한 상대는 광전사였다. 광기에 몸을 맡기면 팔을 베여도, 다리를 베여도 상관없이 숨이 멎을 때까지 싸우는 존재.

온건하게 그녀를 저지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려면 죽음에 가까운 영구적인 상처를 입혀야만 했다.

레이 밀리언이 이를 악물었다. 자유로운 원정대 분위기를 유지했기에 위엄은 딱히 없었지만, 그가 이 원정대의 리더였다. 그는 선택을 해야 했다.

“전원! 전력으로 카밀라를 상대한다! 필요하다면… 숨통을 끊는 것도 허용하겠다.”

사실상 죽이라는 뜻.

제 원정대 중 한 사람을 향해 이런 명령을 내리는 게 쉬울 리 없었다.

이제껏 많은 레이드를 거쳤어도, 반드시 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으면서도 이 순간 밀리언은 도저히 앞으로 나서기가 어려웠다.

이런 선택을 하게 만든 무명을 조금 원망하기도 했다. 그가 도와주면 달라질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내 냉혹하게 생각을 굳혔다. 그들은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었다. 이런 연약한 감정에 휘둘려서는 앞을 걸어갈 수가 없었다.

“다들 정신 차려!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그런 리더의 마음을 눈치챈 이들이 감정을 갈무리했다. 그들은 동료기도 했지만, 이루어야 할 것이 있었다. 동료의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시작은 연금술사였다.

【연금술사 4계급 조립 스킬: 대지의 방패】

그 뒤는 성기사.

【성기사 고유 스킬이 발동합니다.】

【광역 스킬입니다.】

【성기사가 지목한 이들에게로 성기사의 가호(S)가 적용됩니다.】

【성기사가 정의를 위해 검을 발도합니다.】

【성기사의 발도(S)가 발동합니다.】

극 딜러가 없으니 성기사가 힐러를 자처함과 동시에 보조 딜러를 맡았다.

【빛의 선율(S)이 연주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레이 밀리언을 지금 이 자리에 오르도록 만든 아름다운 스킬이 발동되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합이었다.

“오. 진짜 예쁘네.”

레이 밀리언이 전 세계에 사랑받는 이유는 저 스킬이 발동될 때의 그가 너무나 아름답고 강력하기 때문이다.

금빛 선율과 함께 머리색이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로 변하고, 금색이 어른거리는 눈을 들어 빛의 선율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은 확실히 매력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촤악―!!

“밀리언! 살살해! 정말 죽일 셈이야? 일단 해 보는 데까진 해 봐야지!”

“미안. 아직 조절이 100% 완벽하게는 안 돼.”

“제기랄……!”

모두가 진지하게 전투에 임하는 가운데, 어쨌든 이쪽은 걱정이 없었다. 그들의 등을 떠밀긴 했지만 정말로 그 가혹한 길을 걷게 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또각또각―

【밤의 지배자가 밤이 올 것을 선언합니다.】

【밤이 공간에 물들기 시작합니다.】

여유롭게 걸으면서 밤을 스며들게 했다.

밤이 물든다는 것은 곧, 그 공간이 밤의 지배 아래 놓인다는 것이다. 영원히 잠들게 할 수 있는…… 아늑한 밤에.

“오라. 나의 밤이여. 너는 언제나 고요하고 아름다운 나의 레이디일 것이니.”

나의 레이디에게 불멸의 키스를.

“뭐……!!”

갑자기 어두컴컴한 밤이 발밑에 펼쳐지자 모두가 당황을 금치 못했다. 단순히 어둠이 덮친 것이었다면 그리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그런 게 아니었다.

“……이건.”

“균형을 유지할 수가 없잖아.”

마치 공간을 새로 창조하는 것과도 같았다. 주위의 풍경도, 그동안 몸을 지탱하고 있던 땅도 모두 어둠에 묻히니 마치 우주 속에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 순간 빛의 술사는 깨달았다.

“이게 진짜 밤이라는 거군.”

그동안 자신들이 알았던 밤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고작 어둡고 칙칙한 것, 무섭고 음습한 그늘 같은 게 아니었다.

이토록 찬란하고 빛보다 더 우아하고 아름다운 밤이라니. 경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빛의 술사로서, 빛과 가장 맞닿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계약성 ‘빛을 소망하는 자’ 님이 감탄할 만하단 건 알겠는데, 그래도 빛의 술사 체면이 있지 그렇게 밤에 빠져드는 건 좀 그렇지 않냐 첨언합니다.]

그의 성위가 불편한 심기를 훤히 드러내는데도 계속, 넋 놓고 그저 감상할 수밖에 없었다. 제 생에 언제 이런 걸 또 마주하겠는가. 레이 밀리언은 이 순간이 아마 자신에게 주어진 최고의 행운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또각. 또각.

그 사이에서, 홀로만 바닥이 있는 듯 똑바로 올곧게.

밤의 지배자는 그의 신위를 증명하듯 우아하게 걸어 카밀라의 앞에 섰다. 그녀의 지배는 아직 풀리지 않았지만, 밤에 집어삼켜져 잠깐 전투 불능이 된 상태였다.

“흠. 착한 아이네.”

“……예?”

카밀라의 뺨을 살짝 건드리며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듯 인자한 미소로 칭찬을 던지자, 방금 전까지 광전사의 광기에 대항해 목숨 걸고 싸우던 이들이 절로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 순간이었다.

“도…… 도망쳐……. 나, 나는…….”

아무도 죽이고 싶지 않아.

뒷말은 다 맺지 못했지만, 그것을 알아듣지 못할 어리석은 자는 지금 이곳에 없었다.

늘 전투의 선두에서 적을 죽여야 하는 광전사의 운명을 타고났으면서 이토록 여린 심성이라니. 무명이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그녀가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밤은 착한 아이에게 상냥하지.”

“……도…… 도…… 망…….”

“걱정 말고 잠들거라, 아가.”

밤이 너를 지켜줄 터이니.

풀썩―!

“카밀라!!”

카밀라는 눈을 감자마자 그대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루이스와 제이가 황급히 다가가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고 그녀를 들쳐업었다. 동료애 넘치는 모습을 보며 무명이 의외라는 듯 웃음을 흘렸다.

“흠. 화합이 하나도 안 돼서 팀워크도 엉망일 거 같았는데……. 완벽하네.”

“처음부터…….”

“도와줄 수 있었지만, 내가 없을 때 너희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봐야 했으니까.”

이런 도움은 처음부터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도움을 받게 되면 보통 사람은 나태해진다. 그러다 보면 본인이 해결할 생각은 안 하고 애원하지. 도와달라고. 당신은 도와줄 수 있지 않냐고.

그렇기 때문에 무명은 그들을 시험했다. 그들이 도와줄 가치가 있는 사람들인지.

밀리언이 실소를 흘렸다.

“참으로 잔인하고 무심한 왕이십니다.”

어떻게 보면 원망하는 것 같은, 질책하는 것 같은 말이었지만 무명은 덤덤하기만 했다.

“왕이기에 그래야지.”

너도, 유지한도. 전부 실패했지만.

폐부를 찌르는 말에 밀리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유지한만큼은 아니지만, 그 역시 왕의 자리에 있으면서 지탱하지 못한 자였으니까.

왕은 많은 것을 가졌기에 모두들 그가 가진 것을 뺏으러 온다. 그걸 쳐내면서, 군림해야 하는 자가 왕이었다.

어렵다는 건 안다. 밀리언 역시 한때 일개 인간이었고, 곧바로 군림한 것이 아닌, 천천히 관계를 쌓아가며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간 것이기에 그 모든 것이 쉽지 않았을 터다.

“당신이 특별한 겁니다.”

밀리언이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당신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아무것도,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누구를 짓밟지도 않고, 그저 별의 선택만을 받아 어떤 시련도 겪지 않고 올라선 당신이기에. 나는 그렇지 않아서, 그래서…….

비난하는 건지, 질책하는 건지, 아니면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는 건지. 생각을 하면 할수록 밀리언은 알 수 없어졌다. 그에 더 분하고, 스스로가 초라하고 비참하게 느껴져 입술만 짓이기는데, 그런 그를 무명은 그저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 모습에 밀리언은 소리치고 싶었다. 그렇게 보지만 말고 무슨 말이라도 하라고. 하지만 감정에 못 이겨 소리치는 순간 스스로가 더욱 초라해 보인다는 것을 알기에 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 고뇌를 모두 꿰뚫어 봤다는 듯 무명은 웃었다. 더없이 오만하고, 그래서 경외심이 드는 당당한 미소를.

“당연하지.”

내가 평범한 줄 알았어?

앞서 자신이 쏟아 내려 했던 열등감과 비참함을 한 번에 날려버리는 소리였다.

“……하하.”

복잡했던 머릿속이 깨끗해졌다. 제가 고민한 모든 게 다 쓸데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당신은 정말로 특별한 사람이었으니까. 자신 같은 것보다 더.

괜히 처음에 스스로를 천민이라고 지칭한 게 아니었다. 다들 그 인사가 장난이고 비꼼인 줄 알았겠지만, 심지어 무명도 그렇게 들었겠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자신보다 아득히 저 위에 있는 그를, 그는 경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 그럼 레이 밀리언.”

“네. 무명.”

“아까 보니까 쓸만한 거 같은데, 이참에 레벨업이나 하지.”

“……예?”

“그 선율. 익히긴 했지만 조율도 꽝. 힘 조절도 꽝이더군.”

“윽.”

느닷없는 팩폭이 폐부를 찔러왔다.

무명의 말이 전부 옳았다. 그의 최강 스킬이자 지금의 그를 만들어 준, 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빛의 선율은 성능 면에서 매우 대단한 스킬임을 부정할 수 없지만, 그만큼 통제가 어려웠다. 조절이 안 되면 마력이 필요 이상으로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필요 이상일 뿐일까. 거의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빠져나간 적도 부지기수였다. 그때마다 아무도 모르게 집에 틀어박혀 몸살을 앓는데 죽다 살아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자기 건데 자기가 못 쓰다니. 쯧.”

맞는 말이지만 발끈할 수밖에 없는지라 밀리언이 결국 말대꾸를 내지르고야 말았다.

“댁만 인생 편하게 사는 거죠! 보통은 이게 정상입니다!”

‘라고 정상인이 아닌 놈이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걸 느끼지 못했는지 밀리언이 씩씩댔다. 귀엽기 짝이 없는 모습에 무명이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개소리 잘 들었어.”

음. 알긴 아는군. 제이와 루이스가 격하게 동조했다. 정상이라는 단어조차 모르는 줄 알았는데. 맞는 말이긴 했지만 네가 할 소린 아니지.

“너네는 누구 팀이냐?”

밀리언이 그런 제 동료들을 너무하다는 얼굴로 노려보는데, 무명이 화제를 전환했다.

“잡담은 이쯤하고. 이젠 안 기다려 줄 거 같으니까. 시작하지.”

“……!!”

무명이 만들어낸 우아하고 여유로운 분위기에 휘말려 잊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목숨을 건 전투 중이라는 것을.

시선을 돌리자 마법이 강제 해제된 여파로 꽤나 타격을 입은 듯, 율라가 숨을 허덕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군단장까지 올라간 위세는 어디 가지 않는지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투덜거렸다.

“너무하시네요. 절 기다려 주시는 건 줄 알았더니.”

“기다려 주는 거였습니다.”

아니. 왠지 날 기다려 준 거 같은데. 밀리언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자, 레이 밀리언. 앞으로.”

“예. 예?”

“상대는 군단장 중 최하위. 저 지배 스킬 하나로 군단장에 오른 여자예요. 저 정도는 어떻게 해 봐야 앞으로를 도모하죠. 쫄지 말고 앞으로.”

“……아니……. 그…….”

“내가 보이지 않나?”

내가 있으니 걱정 말라는, 한없이 가벼우면서도 무거운 말이 밀리언의 심장에 박혔다.

저 허무맹랑한 말이 이렇게 와닿도록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정말 드물 것이다. 그는 그럴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믿음이 갔다.

해서, 밀리언은 손을 들었다.

【빛의 술사가 빛의 선율(S)을 발동합니다.】

빛이 현란하게 춤을 췄다.

* * *

‘진짜 예쁘긴 하네.’

나도 이런 거 있던가.

현란하게 춤을 추는 빛의 선율은 진짜 몇 번을 봐도 감탄이 나올 것 같은 아름다움을 뽐냈다.

그런데…….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저거 진짜 월랭 2위 맞냐고. 순위 잘못된 거 아니냐고 진심으로 이의를 제기합니다.]

숨 쉬듯이 새어 나오는 마력이……. 진짜 낭비 개쩔었다. 막상 바로 코앞에서 제대로 보니 월랭 2위의 이름값이 아까웠다.

상상 이상의 스킬이어서 이런 가성비인 걸까, 아니면 쟤가 바보인 걸까. 어느 쪽이든 얼척은 없었다.

눈치껏 후자 같긴 한데……. 기본 마력 운용에 대한 이해도 없는 건가. 오죽하면 성위님도 저런 말을 할까.

“밀리언. 평소 마력은 어떻게 다루지?”

“네? 보통 제어식으로……. 원하는 만큼의 마력만 절제하는 식으로 씁니다.”

아. 저래서 저따위였구나.

“절제, 하지 말아 봐.”

“네? 하, 하지만…….”

“빨리.”

다음 순간, 밀리언의 몸에서부터 마력이 터져 나오듯 퍼졌다. 아까까지가 시냇물 정도였다면 지금은 폭포수 정도.

“역시…….”

저 정도의 폭발적인 마력의 흐름을 인간이 제어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나는 처음부터 가진 마력이 엄청나서 그런지 한 번도 이것들을 제어하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마음대로 다루고 싶을 뿐.

그게 뭐가 다르냐 싶지만, 마력은 변덕스럽고 난폭하며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어느 정도의 마력이라면 밀리언의 말대로 통제식으로 제어하지만, 도를 넘는 마력을 다루려면 그다음 단계의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왕, 왕 님…….”

뭐, 나는 처음부터 후자 쪽이어서 전자는 윤지우 놈 보고 알았지만.

‘아오. 그건 대체 언제 자라냐.’

만년 A급 진짜. 다시 생각나는 빡침에 이젠 저거 헌터 언제 관두나 싶었다.

문득 윤지우를 생각하니 이 밀리언이 윤지우를 닮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불쌍하게 나를 쳐다보는 눈동자라든지.

그러자 갑자기 그에게 약간의 상냥함이 생겨났다. 나는 윤지우에게는 언제나 상냥하니까.

“진정해. 밀리언.”

“하…… 하지만…….”

생명이 빠져나가는 수준으로 마력이 빠져나가니 그의 손이 덜덜 떨리는 게 보였다. 아까는 그래도 리더니까 좀 참더니, 이제는 내 앞이라고 감정 표현이 아주 거침없었다.

뭐 나쁘지 않긴 했다. 솔직한 게 더 귀엽긴 했으니.

“마력을 통제한다고 생각하지 마. 함께한다고 생각해. 이 마력이 네 의사를 존중해 줬으면 좋겠다고 부드럽게 생각해 봐.”

“그게 무슨…….”

“마력은 그저 힘이 아니야. 알고 있을 텐데?”

“…….”

그 순간, 넘실대던 마력이 변했다. 밀리언의 부드러운 회유에 마력이 응해 준 것이다. 난폭했던 마력의 움직임도 잠재워졌고, 더 이상 터져 나오는 것 없이 온순하게 마력이 그의 뜻에 집중했다.

“……이게……!”

난생처음 겪어 보는 현상에 밀리언이 놀람을 금치 못했다. 이해는 가는 반응이지만, 지금은 그럴 틈이 없었다.

“거기서, 생각해. 이 마력이 어떻게 움직였으면 좋겠는지. 그리고 그 생각과 마력이 연결되었다고 상상해. 그럼 네 생각을 따라 마력이 움직일 거야.”

“이건…… 당신의 방식입니까?”

이놈이 쓰잘데기없는 질문을 한다.

“그럼 누구 방식이겠어?”

세상에 이런 방식을 쓸 만큼 방대한 마력을 가진 인간이 나밖에 더 있나. 웃기는 소리였다.

“자. 궁금한 거 끝났지? 그럼 이제…….”

“…….”

“네가 하고 싶은 게 뭐지?”

말이 끝마치는 순간, 밀리언의 눈이 변했다.

파아아앗―!

푸욱―!

“꺄아아아―!!”

순식간에 빛의 선율이 날카롭게 쏘아져 나가 그대로 율라의 가슴을 관통했다.

【‘희생의 율라’가 처치되었습니다.】

【드라키스의 4군단 중 한 명인 ‘희생의 율라’를 처치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클리어한 자는…… ‘빛의 술사. 레이 밀리언’입니다.】

【축하드립니다! 두 번째 2차 각성자가 나타났습니다.】

“흠. 이제야 좀 쓸만 하겠어.”

그리고, 밀리언이 한 단계 나아갔다.

“와아아…….”

모두의 입에서 진심 어린 감탄이 터져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생전 이런 광경을 언제 보겠는가. 경이로운 밤과 그 사이를 수놓은 금빛 선율이라니.

그리고 매우 재수 없지만, 그 아래 금빛 선율을 찬란하게 감싸고 있는 남자 역시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마치 신화 속의 인물이 튀어나온 것만 같았다.

‘뭐, 그렇게 따지면…….’

저 남자 옆에 있는 사람 같지 않은 인간이 1등이긴 했지만.

분명 이 자리에 실존하고 있음에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마치 허상처럼, 존재가 없는 자가 잠시 현신한 것처럼. 그런 모습이었다.

밀리언이 ‘와. 신으로 업글한 거 같다.’, ‘남신 같다.’ 정도라면,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그냥 부정할 수 없는, 아득한 저 위에 고고하게 앉아 있는 신이었다. 범접할 수가 없었다.

“저기. 둘이 나란히 놓고 보니까 저기 머리 빈 놈이 싸구려처럼 보이는데 나만 그래?”

“응. 알지만 조용히 하자.”

상처받잖니.

그 마음은 백번 이해하지만, 상처받을 밀리언을 위해 우리 조용히 하자고 루이스가 제이를 다독였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다 들리거든?!”

여기 있는 이들 모두 평범한 사람의 귀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득달같이 고개를 돌린 밀리언이 쏘아붙이자, 루이스가 멋쩍게 웃었다.

“아. 그랬어?”

“난 알았어.”

“……저걸 그냥……. 확…….”

새침한 제이의 깐죽거림에 밀리언이 뒷목을 잡았다. 같은 국가의 랭커여서 자주 보는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하는 짓이 그 옆의 프랑스산 중세 매니아 꼰대보다 더 얄미워 패주고 싶었다.

그래도 지성인인지라, 자기보다 어린 애를 진짜 후려치진 않았다. 밀리안은 곧 마음을 진정시키고 제 안의 마력을 능숙하게 갈무리했다.

“……이런 기분이군.”

생애 처음으로 느끼는 감각이었다. 마력이 내 몸의 일부인 것처럼 전신을 감싸며, 그야말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고양감. 정말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만큼 행복한 감각이었다.

그리고 그걸 알려준 건…….

“마음에 들어. 그럴듯해졌네.”

저런 무례한 말을 해도 전혀 무례하게 들리지 않는 저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런 감각을 느꼈을 사람.

그래서 밀리언은 그를 더욱 이해하지 못했다. 이 정도 힘을 가졌으면 응당 처음 각성했던 헌터들이 그렇듯, 저세상 자신감에 차서 패악을 부리고 다녀도 모자랐다.

그럴만한 힘도 있었고, 안 그럴 이유도 없었다. 그야말로 전에는 할 수 없던 모든 것을, 전부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것은 막 각성한 헌터들이 한 번은 겪는 현상이었다. 힘이 작든 크든 모두가 그랬다.

그러고 그 결과는 항상, 자신의 힘으로 안 되는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 다음 얌전히 현실에 순응하는 것으로 끝이 났고.

하지만 이 사람은 처음부터 줄곧,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오만하긴 했지만 자만은 아니었다. 마치 모든 게 다 부질없고 의미 없다는 것처럼 그렇게…….

딱―!

“아―!!”

“잡생각이 많아. 풋내기 주제에.”

아니 누가 풋내기……. 맞네. 풋내기.

다행히 자아성찰을 잘하는 밀리언이었기에 두 번째 망신은 면했다. 2차 각성을 끝낸 이후의 자만심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도 그럴 게, 이미 2차 각성을 끝냈고, 각성 전에도 계속 이런 경지였던 사람 앞에서 고작 이 정도가 대수일 리가 없을 테니까.

2차 각성 이후 마력이 더 커지고 힘이 크게 늘어난 것이 느껴진다. 무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전에도 어마어마했던 사람인데, 더 강해지면 어느 정도인지. 하찮은 그로선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그는 자신할 수 있었다. 무명이 보인 무위는 그의 실력의 발톱만치도 못할 거라는 걸. 그가 보여 주는 자신감과 아우라만 봐도 누구든지 알 수 있었다.

“왜…… 드라키스전은 참전하지 않으려 하십니까?”

당신은 이토록 강한데, 어째서. 왜. 당신만 있다면 금방…….

아.

답을 듣기도 전에 밀리언은 떠올려버리고 말았다. 그 말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소리며, 진저리치면서도 결국 자신을 옭아매게 만들던 소리라는 걸.

그리고 밀리언이 자신이 한 말을 깨달았을 때, 그가 고개를 숙여 밀리언과 시선을 맞춰왔다.

“내가 왜?”

꼭 맡겨놓은 것처럼 구네.

상냥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냉정했다. 반문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단호하고 오만한, 차가운 미소에 밀리언은 고개를 숙였다.

인간은 그에게 그 무엇도 요구할 가치가 없었다. 그 눈만 봐도 답을 알 수 있었다. 고작 미물을 보고 아무런 자비심도 들지 않는 것 같은 눈동자.

“……실언했습니다.”

“좋아. 착한 어른이.”

쓰담쓰담.

“……”

하지만, 쓰다듬는 손이 너무나 인간미가 넘치고, 따뜻해서.

“자. 그럼 일단 나가자고.”

실감이 나지 않았다.

“……너 뭐하냐.”

“……그냥.”

그의 손이 떠난 뒤에도 밀리언은 손이 있던 자리를 하염없이 만졌다.

“부상자 먼저 나가자.”

“예. 무명.”

마치 그 온기가 사라지지 않길 바라듯.

* * *

“클리어 축하드립니다!!”

“2차 각성자라니요! 세계의 복입니다!”

“이로써 보스 클리어에 더욱 한발 앞서게 되었군요!”

던전을 빠져나오자마자, 미리 대기 타고 있었던 듯한 센터 직원들과 기자들로 입구가 아주 득실득실했다. 클리어한 순간 안전지대가 되어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었던 것 같았다.

그나마 센터 직원들은 부상자를 받아주고, 빠르게 랭커들의 상태를 체크했지만…

“클리어 소감 한번 말씀해주시지요!!”

찰칵찰칵―! 찰칵찰칵찰칵―!!

“…….”

인생에 다시 없을 특종을 마주한 듯 아주 카메라 마사지를 제대로 시켜주시는 파리떼들 덕분에 진심으로 여기를 다 쓸어버리고 싶었다.

호들갑도 정도껏이지. 플래시가 무슨 초특급 정상 연예인 시상식 때보다 배는 터진다. 앞이 안 보일 지경이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자, 밀리언이 내 앞을 가로막으며 대신 플래시를 받아내 주었다. 그 점은 좀 기특했다. 쫘식― 그래도 업글 시켜준 보람이 있구나.

나름대로 만족스러워 하는데, 앞에서는 역시 파리답게 뇌를 안 거치고 나오는 것 같은 소리를 또 해댔다.

“밀리언 헌터! 무명을 제외하고 처음으로 2차 각성자가 되셨는데요, 현재 심정이 어떠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응. 졸라 실례야. 그딴 걸 왜 처물어 봐. 진짜 같은 한국인인 게 쪽팔렸다. 같은 나라로 엮이고 싶지도 않았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진짜 저것들 지능은 언제 좋아지냐고, 지루한 클리셰에 한숨을 내쉽니다.]

성위의 투덜거림에 당당하게 소신을 밝혔다.

‘난 파리가 싫어.’

특히 인간 파리. 파파라치. 기자들.

저것들 때문에 진짜 절대, 결코, 일코를 풀고 싶지 않았다. 일코해제하는 순간, 바로 내 사생활부터 캐고 다닐 거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저것들이 늘 그래왔듯. 그게 제일 싫었다.

대놓고 진저리를 치자, 그런 나를 보고 밀리언이 서둘러 상황을 중재했다.

파사삭―! 팟―! 퓨수수슉―

“……!!”

“내 카메라가!!”

“이게 무슨……!”

“소란은 자제해 주십시오.”

기특하다는 거 다 취소다. 이 새끼가 젤 개새끼였다. 너 저거 기물 파손이야. 순식간에 잘려 나간 카메라의 일부들이 바닥에 굴렀다.

“……이게 무슨 짓이십니까. 밀리언!”

“랭커가 이렇게 언론을 위협하는 건……!”

“왕의 앞입니다. 주제는 파악하셔야죠.”

“……!!”

‘씨발.’

나를 숨겨 주는 게 아니라 화려하게 어그로를 끌고 아주 광고를 시켜 줬다.

아니. 난 그냥 조용히 살고 싶다고.

그리고 그런 기대를 철저히 배반하듯, 자신의 인생에 다시 없을 기적 같은 특종을 감지한 기자들이 아우성쳤다. 그들은 번개보다 빠른 순발력을 발휘해 망가진 카메라를 과감하게 바닥에 던져버리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호구 같은 한국 랭커들 때문에 기본적으로 랭커를 깔보는 머저리 같은 놈들인지라 처음 받아보는 대우에 발끈할 줄 알았는데, 특종이 본능을 이겼다.

“무…… 무명……!!”

“이…… 이쪽 한 번만 봐 주십시오!”

“말 한마디라도……. 아니, 그냥 이쪽만 봐 주세요!!”

찰칵―! 치즈~ 브이~!

‘…….’

대체 언제 적 인간들이 섞여 있는지, 웬 쌍팔년도 소리까지 섞여서 진짜 가관이었다. 질색하며 옆에 선 원흉 새끼를 노려보자, 그래도 양심은 없지 않은 듯 그가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신은 나를 사랑하는 건지, 곧 죽을 밀리언 놈을 사랑하는 건지 손수 파리들을 강제로 걷어 주셨다.

“지원 요청입니다!”

“……뭐?”

참 거지 같은 소리였지만, 덕분에 파리들이 드디어 손을 멈추었다.

찰싹―!

“앗!”

파리들의 손이 내려가자마자 나는 잽싸게 밀리언의 뒤통수를 한 대 후려쳤다. 하울로서가 아닌 윤지호의 힘으로. 한 대는 때려줘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밀리언이 억울하단 얼굴로 나를 바라봤지만 개무시했다.

그때, 귓가에 빌어먹을 소리가 들려왔다.

“원티드 팀입니다! 지금 현재 레쓰비가 이탈해 지원을……!”

“……제기랄.”

“무명?”

어차피 다 돌 거긴 했지만, 하필 내가 가기도 전에……. 안 그래도 조급한 마음이 더욱 조급해졌다. 심지어는 있지도 않던 불안감까지 엄습했다.

아직 유지한에게는 많이 무리인가. 잘못되었으면 어쩌지. 어디 다치기라도 했으면…….

“……왜 그러십니까? 무명!”

“…….”

썩어도 준치라고, 호들갑을 떠는 녀석 덕에 정신을 좀 차렸다.

그래도 마음이 급한 건 변하지 않아, 가면을 쓰고 있음에도 감정조절이 안 된 나머지 하울이 아닌 윤지호가 튀어나왔다.

“너, 시간 많지?”

“예……. 예?!”

“그럼 나랑 같이 가지.”

“어…… 어딜……!”

내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밀리언의 목덜미를 붙잡고, 그대로 밤의 로드를 열었다.

【지배자의 로드를 개방합니다.】

【오로지 이 깊고 고요한 밤의 로드를 걸을 수 있는 건, 밤의 지배자와 그의 지배 아래 놓인 자뿐입니다.】

【언제나 당신을 위해 열릴 길입니다. 지배자시여.】

“뭐. 뭐야……!”

“대박…….”

“은하수 같아…….”

감탄하는 목소리들이 이곳저곳에서 터졌다.

밤의 로드는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로 만들어놓은 길 같았다. 밤하늘의 별을 모아놓으면 이런 느낌일까. 목덜미를 잡힌 밀리언에게서도 감탄사가 흘러나왔지만, 나는 그럴 새가 없었다.

“가자.”

“잠……!”

탁―!

밀리언을 손에 쥐고 뛰어올라 그대로 로드 위에 올라타고는 빠르게 달려 나갔다.

위치는 이미 알고 있다. 비록 내가 다 처리하겠다 생각하고는 있었어도, 설마 유지한이 어디로 싸우러 가는지 정도는 체크하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전속력으로 달려가고 있는데, 밀리언이 물었다.

“……무명.”

“왜.”

“왜 이리 급하십니까?”

이건 당신과 상관없는 이야기지 않습니까.

참 맞는 말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도무지 모르겠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너도 구해줬는데 이쪽이라고 못 구해줄 이유 없고. 어차피 할 거기도 했거든.”

이건 변명. 나를 위해 마련한 핑계.

“그래도…….”

“이해 안 되지. 나도 그래. 하지만…….”

그리고 진심은…….

“내가 지켜 주기로 했거든.”

“……”

약속했으니까.

“유지한이, 나를 뛰어넘는 그 날까지.”

당신이 나를 치고 올라올 때까지.

* * *

“뭐야. 우리 팀 분위기 왜 이럼?”

우중충한 팀 분위기에 서유라가 어이없다는 듯 한소리 하자마자, 멤버들이 보란 듯 한숨을 쉬며 더욱 늘어졌다.

“아아…….”

“아니 그냥…….”

“이것들이 빠져가지고!”

목숨 걸고 싸우러 가는데, 뭐 하는 거야 지금―!

버릇없이 나태해진 것들을 보다 못한 유라가 가차 없이 응징에 나섰다.

퍼억―!

“악!! 서유라가 사람 친다!”

“이 폭력배야! 그만 때려―!!”

아까까지 다 죽어가던 사람들은 어디 가고, 맞으니까 펄펄 날아다니는 모습에 유라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맞을 짓을 했잖아.”

“그게 폭력의 이유냐―!”

동료들이 억울함을 열변했지만, 유라는 뭔 개소리냐는 듯 태연하게 답했다.

“당연한 거 아니야?”

“…….”

너무나 당당한 발언에 모두가 할 말을 잃어 금붕어처럼 뻐끔거리고 있는 그때, 한쪽에선 그 상황을 중재해 줘야 할 보스가 혼자 아주 땅을 파고 있었다.

“보스. 뭐해?”

“응…….”

‘맛이 갔네.’

근데 얘 왜 이래?

다른 이들처럼 의욕이 극도로 저하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애꿎은 돌멩이만 발로 차는 모습에 레쓰비가 민현에게 눈으로 물었지만, 민현은 대답 대신 깊은 한숨을 토로했다.

그 모습에 무슨 이유에서든 이미 답이 없다는 걸 알아차린 레쓰비는 깔끔하게 등을 돌렸다. 말려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

“…….”

주위에서 자신을 보고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지한은 지금 평생 관심도 없던 휴대폰이 무슨 웬수라도 되듯 계속해서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지한이 띄워놓은 화면에는 뭔가 대단한 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메시지. 게다가 짧디짧고 별말도 아니어서 이렇게나 오래 하염없이 붙들고 있기에도 민망했다.

「오늘은 좀 쉴게요. 어차피 내가 할 일은 별로 없고. 내일 오후에 있을 마지막 작전 확인 때는 갈게요.」

나름 늘여 쓰려고 노력한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결국 한마디 통보밖에 안 되는 짧은 메시지. 고작 그게 뭐라고, 목숨을 걸러 가는 길에서도 놓지를 못하는 건지. 이미 옛날에 그 마음을 눈치챈 민현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도 짝사랑을 하고 있지만, 지한처럼 이렇게 맹목적이지도, 간절하지도 않았다. 저는 너무 오래 했고, 지한은 이제 시작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서로 자라온 환경과 사정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일까.

민현은 유라를 사랑하긴 했지만, 그녀만큼 소중한 것도 있었고, 유라가 없어도 살아갈 수 있었다. 당연하지 않나. 사랑 그게 뭐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고, 괴롭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 감정 역시 내 것이라며 순응한 지 오래였으니.

하지만 지한은 그런 나태한 자신과 전혀 달랐다. 티는 전혀 나지 않았지만 민현은 오랫동안 지한을 봐 왔기에 알 수 있었다.

지한은 오로지 윤지호밖에 보지 않았다. 애초부터 소중한 게 없고, 우리가 매달려 지킬 것만 있는 유지한의 감정은 오늘에 이르러 그 모든 것이 윤지호로만 움직였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기 자신은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 오로지 윤지호로 일희일비했고, 윤지호를 따라 움직였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지한이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도, 사실은 정말로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이가 없다는 것을 알았어도, 민현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이 인간을 알 수 없는 것인가.

민현은 체념하면서도 자신도 그처럼 사랑을 했다면 뭔가 변했을지를 생각해 보았다.

여전히 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분노의 피오레’의 던전에 입장하셨습니다.】

【화룡왕 드라키스의 4군단 중 한 축입니다.】

【던전 클리어 시 연계된 게이트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무운을 빕니다.】

“……선배. 이제 앞을 보셔야 할 때예요.”

“……어.”

민현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한은 드디어 휴대폰을 내려놓았지만 머리는 여전히 온통 메시지 생각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메시지였다. 지호가 보낸 것이 분명한, 퉁명하고 용건만 간단한 문장. 다른 사람이 보냈다고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하지만 그랬기에 지한은 불안했다.

물론 두 줄이나 되는 길이는 평소 다른 사람들에게 보내는 것보다는 길었고, 그 덕에 아직은 제게 관심과 애정이 식지 않았음을 알 수는 있었지만, 한 톨의 애정도 잃을세라 전전긍긍하는 지한을 불안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지호는 단 한 번도, 제게 이런 통보식 메시지를 남긴 적이 없었다.

언제나 제게 주어지는 애정에 전부는 못하더라도 최대한 돌려주려고 노력하는 윤지호인지라 늘 제게 다정하게 대하고 맹목적일 만큼 신경을 써 주었으니까.

그리고 제가 한 번도 그것을 소홀히 한 적이 없었기에, 윤지호는 제 뜻대로 결정하고 행동하더라도 항상 제게는 부드럽게 할 일을 말해 주었다.

이렇게, 통보하듯, 답장도 안 해도 된다는 듯 하지 않았다. 이렇듯 무신경하게…….

[당신의 계약성 ‘승리를 걷는 자’ 님이 도를 넘는 도돌이표 리플레이 삽질에 참다못해 상을 엎습니다.]

[아니 솔직히 게이트에서 그 개고생을 했는데, 체력 굿바이로 피곤해서 메시지 쓰고 바로 뻗었을 수도 있지 않냐고 뭘 그리 부풀려서 혼자 땅을 파고 지…… 비속어를 황급히 숨기며 암튼 그만하라고 나무랍니다.]

‘……나도 알아.’

다 맞는 이야기였다.

머리로는 안다. 당연하지 않은가. 이번 게이트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지호였다. 다른 랭커들은 그저 들러리, 체스말의 말에 불과할 정도로 그녀는 훌륭한 지략을 펼쳤다.

전투다운 전투가 없었다 한들, 지략도 훌륭한 전투였다. 거기서 그녀는 완벽하게 승리를 거뒀다. 안 그런 척했지만 항상 긴장하고 있는 상태였을 것이고, 또 불안했을 것이다. 클리어하지 못할까 봐. 오래 이곳에 갇히게 될까 봐.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랭커도 그랬는데. 일반인인 그녀가 아무리 대범하다고 해도, 꽤나 큰 스트레스와 압박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피로는 당연한 것이었고, 웬만한 일반인이라면 한 일주일은 쥐죽은 듯 잠만 자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걸 전부 아는데도…… 그래도 불안한 것이었다.

항상 곁에 있었기 때문일까.

옆집인 덕분에 휴일도 항상 곁에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녀 없이 살아온 세월이 몇십 배는 많았음에도 그녀가 없는 하루를 견딜 수가 없었다.

아주 하루도 아니었고, 그냥 한 번 얼굴을 못 보았을 뿐이었고, 집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으로 진짜 잠을 자는 거라는 걸 알고 왔음에도 그랬다.

잠깐 깨서 걱정할까 이런 메시지라도 보내준 것을 감사해야 했지만, 간사한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메시지보다 얼굴을 보여 주었으면 했다. 이런 메시지 하나만으로도…… 버림받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 분명, 이렇게 간단하게, 메시지 하나만으로…….

‘……불안할 수밖에.’

자신을 홀가분하게 정리할 사람이니까.

“그거 들었어? 밀리언 쪽에 무명이 나타났대.”

“으악, 아깝다……. 1/3의 확률이었는데…….”

“나도 그쪽으로 갈 걸 그랬나 봐.”

사상 최대 난이도의 던전을 클리어할 생각은 눈곱만치도 안 하고 제 사랑에만 미쳐 있는 보스를 아는지 모르는지, 길드원들이 수군거렸다. 그들의 해이한 정신 상태를 참다못한 유라가 일갈했다.

“……다들 진짜 빠져가지고. 우리 목숨 걸러 가는 거거든?!”

“아니. 아는데, 사실 무명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생각했는데…. 저쪽에 왔다잖아!”

“맞아! 이왕 죽으러 가는 거 지구 최강자는 영접하고 가고 싶다고!”

“이 정도 욕심은 부려도 되잖아!!”

“이것들이 진짜―!!!”

……누구?

예상치도 못한 이름에 유지한은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왔다.

무명이라니.

예상치 못했던 일이 아니었다. 마드라를 처치했단 시스템 알림 문구를 보았을 때, 다른 곳에도 올 거란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들 서둘러 목표를 정하고 움직인 것이 아니었던가.

어디든 그가 나타나는 건 거의 기정사실과 같았다.

그런데도 왜 이리 당혹스러운 건지.

뭐, 실감이 나지 않긴 했다. 무명이 나타나고부터, 제 곁에 그 이름이 따라다니지 않은 날이 없었음에도.

“……무명이 나타났어?”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음에도 정말로 나타난 게 믿어지지 않는지 지한이 당혹스러운 심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묻자, 이 소식을 전달한 원흉, 레쓰비가 조금 의아해하면서도 일단 제가 들은 정보를 전달해 주었다.

“밀리언 쪽에 나타났대요.”

“…….”

“완전 쌔끈한 남자 모습으로.”

세상에 그렇게 잘생긴 사람 처음 본다고 하던데요?

그 말에 또 다른 이들이, ‘뭐야. 얼마나 잘생겼다는데?’, ‘저번 여신 수준만큼 남신이래?’, ‘이정도면 무명 자체가 졸라 미인 빼박캔트다.’ 라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그런 말들은 지한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왜, 그쪽으로…….’

어리석은 생각이 자꾸 솟구친다.

왜 이쪽이 아니라 그쪽이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번 공략은 모두 갑작스럽게, 즉흥적으로 정해서 온 것이었고 무명은 알 방도가 없으니 모르는 게 맞을 텐데, 왜 당연하게 제 쪽으로 올 것이라 생각했는지. 스스로가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생각은 자꾸 그쪽으로만 흘렀다. 자신은 분명 무명을 그리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왜 이러는 것인지.

감정만으로 따지자면 그는 제 인생에서 이런 적이 얼마나 되나 싶을 정도로 거부감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지켜 줄게.’

……왜 그런 말을 해서.

정말로 당신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왜 그런 말을 해. 왜 그런 말을 해서 안 그러려고 해도 사람을 기대하게 만들고…….

당신의 존재 하나로 일희일비하게 해.

이미 그런 존재는 하나로도 차고 넘쳤기에 이 감각이 지한은 너무나 불쾌했다.

‘당신은 윤지호가 아니잖아.’

이런 모든 감각은 윤지호로만 느끼고 싶은 욕심 많은 남자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마저도 진저리를 쳤다.

게다가 희미하게 떠오르는 기억 때문에 더욱더 이 감정이 싫었다. 아직 정확하게는 무엇인지 모를 기억이었지만, 본능이 강하게 말하고 있었다. 함부로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하지만, 제 인생을 뒤바꿀 정도로 중요한 것이라고.

‘다음에는…… 반드시. 당신을…….’

“……!!”

사실 어느 정도 이미 예상이 갔다. 이건 내가 당신에게 평생을 숨겨야 할, 아니, 숨겨야 해서 스스로 봉인시킨 진실이라는 것을.

당신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 반드시 감춰야 하는 것이란 걸. 어떤 내용인지 몰라도 그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힌트를 주었으니까.

‘넌, 기억해서는 안 된다고.’

바로 나 자신이.

“길드장. 이제 정신 차려 줘. 도착이야.”

“물론이야.”

그래서 그는 기억하고 싶기도 했고, 기억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분노의 피오레’의 던전의 마지막 방입니다.】

【문을 여는 순간 최후의 시험이 시작됩니다.】

“가자.”

“예. 보스.”

부정하고 싶다. 조금이라도 무명. 당신이란 존재에게 의지하고 싶었던 것 같던 자신을.

증명하고 싶다. 당신에게.

“[세이라].”

나의 가련한 계약자를 위해.

상처뿐이더라도 그대에게 승리를…….

【빛의 검, 세이라가 계약자를 위해 승리를 노래합니다.】

나는 고작, 지켜질 존재가 아니라고.

당신에게는 하잘것없을지 모르겠지만, 조금이라도 한발씩, 당신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빙속의 기사가 선언합니다.】

“다들 살아 돌아가자고!”

또한.

【적에게 영원한 빙하의 안식을!】

“물론입니다!”

【보석술사가 블루 다이아몬드를 제물로 내어놓습니다.】

“나 먼저 간다!”

“야. 잠깐……! 저게 진짜!”

“가죠.”

【무한의 사수가 탄을 장전하며 게임을 선언합니다.】

【신속의 검사가 신으로 향하는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우리 원티드는, 결코 약하지 않다고.

* * *

타다다닥―!

고요한 적막 속에서 빠른 스피드로 달리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달리는 곳도 평범하지 않은데, 심지어 그 달리는 소리마저 사람 같지 않아 너무 이질적이었다.

초당 거의 수십 km를 건너뛰고 있는데도 발소리는 크지 않았다. 아주 고요하고, 도저히 달린다고 생각할 만한 기척이 아니었다. 그저 유유히 걷는 느낌이랄까.

혹시 이 길이 에스컬레이터 같은 거 아닐까?

밀리언은 합리적인 의심을 하며 바닥을 보았지만, 미친 스피드를 체감하고 있어서인지 알아보기 어려웠다.

결국 포기한 그는 다시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선명히 보였다. 자신을 들고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달리는 자의 뒷모습이.

‘……유지한이랑…….’

그런 약속을 했다니.

말하지 않아서 몰랐다. 들은 사람도 없어서 몰랐다. 알고 있는 사람도 없어서 몰랐다. 정작 알고 있는 사람은 절대 입을 열지 않을 테니 당연한 것이기도 했지만, 불쾌한 마음이 싹텄다.

왜, 말해 주지 않았지? 쪽팔려서 말하지 않은 건가? 지켜진다는 게 싫어서?

아니. 유지한이 그럴 리 없었다. 그런 자긍심 같은 게 있었으면 애초에 그렇게 당하고 살았을 리 없었다. 그것조차 없는 빈껍데기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혼자만 간직하려 한 거야?’

이 사람에게 관심을 받았다는걸? 왜? 사람들이 괴롭힐까 봐?

그럴 수도 있긴 하겠다. 멍청한 것들이 알지도 못하는 것까지 캐물으며 괴롭힐 것이다. 하지만 왜일까. 밀리언은 자꾸 유지한의 속내는 그것이 아닐 것만 같았다.

이런 사람과의 기억과 저를 향해 온 관심은…….

‘나였으면…….’

독차지하고 싶을 것이 당연했으니까.

자신이었어도 그랬을 터이기에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유지한이 3할 정도는 싫어졌다.

“왜…… 유지한이에요?”

아. 이런. 꺼내서는 안 될 속마음이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정말 오늘 되도 않는 실수를 너무 많이 해 버려 밀리언은 입을 악물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부터 간절히 묻고 싶었던 말이었다. 당신의 바로 밑이라면 나도 있는데…….

왜, 내가 아니라 유지한이냐고.

밀리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명은 뒤조차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말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듯, 달리는 속도조차 줄어들지 않았다.

자신은 이를 악물 정도로 자존심이 상하는 물음이었는데, 돌아오는 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를 무관심이라 더 기분이 진창으로 처박혔다.

그럼에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뒤는 돌아보지 않으면서도 그가 답은 해 주었다는 것이다.

“글쎄?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호구라?”

일단 난 한국인이기도 하고.

“…….”

한국인같이 조금도 안 생긴 인간이 덤덤하게 국적 커밍아웃을 했다.

할 말이 없어지는 대답이었다. 그야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헌터’ 하면 유지한을 떠올리는 건 당연했고, 미친 호구긴 했지만 그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으니까.

물론 밀리언도 나름대로 빼앗기면서 살고 있긴 하지만 유지한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렇게 따지면 눈에 띄는 건 당연히 유지한일 수밖에 없기도 했다. 일반론으로 따지면.

다만 눈앞에 있는 이 인간은 아무리 봐도 그런 일반론으로 누구에게 동정심을 느낄 인간이 아니었다.

“사기 치지 말고요.”

“……티 나니?”

“네.”

어디서 되도 않는 낚시질을 하려고.

밀리언의 적나라한 비난에 무명이 나지막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솔직함이 마음에 들었던 건지, 아니면 이런 질문을 받는 스스로를 어이없어하는지 모를 웃음이었다.

“멀리서 볼 때 유지한은 호구긴 하지만, 나랑 아무 상관도 없어서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았지.”

“…….”

“솔직히 내 사람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야?”

내가 그렇게 오지랖 넓은 사람도 아니고.

내가 그런 사람이었으면 진작 정체 까발리고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 되었을 거라고 말하는 무명은 더럽게 재수 없었지만, 전부 다 맞는 말이었다.

부정할 수 없었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밀리언이고 유지한이고 아무렇지 않게 제친 다음 유일무이한 영웅이자 신이 되었을 거다. 그럴 능력이 충분하니까. 밀리언 본인이어도 그랬을 것이다. 물론 무명과 마찬가지로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하지만, 아마 유지한은 아닐 것이다.

“근데 막상 실제로 보니, 정말 호구도 그런 호구가 없어. 보기만 해도 속이 뒤집어지는 놈은 그게 처음이야.”

“…….”

어느 누가 그 정도로 호구겠어?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기에 자신을 내던질 정도로 희생할 수 있는 자가 있을 리 없었다. 그건 유지한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성녀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이조차 그렇게는 하지 못했다. 성녀, 루치아 라이블리가 그렇게 유지한에게 잘해 주려고 노력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그녀는 성녀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그렇기에 더욱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마냥 희생하고 아낌없이 퍼주고 하는 이타적인 태도와는 거리가 매우 멀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유지한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만큼 유지한을 아꼈다.

‘그는 그럴 만한 대접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에요.’

이해가 되긴 해도 퍽 인정하기 싫은 말을 하면서.

그 훤히 보이는 편애에 불만을 표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결국 성녀의 말을 반박하지는 못했다.

유지한은 그런 존재였다. 자신을 깎아 먹으면서까지 희생하고 그에 따른 대접 또한 받지 못하지만, 스스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이. 모두가 그걸 알기에, 유지한을 위한다는 이유가 들어가면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그는 호구지만 누구도 끝까지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누가, 지금 이 무명처럼 나설지 아무도 알 수 없으니까.

도의를 넘어가는 희생은 결국 그 빛으로 인해 누군가를 끌어들이니.

“근데, 눈부신 건 부정할 수가 없었어. 나는 절대 그렇게 살지 못할 테니까.”

바로 이렇게.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변수는, 그렇게 나타난 존재가 현재 이 세계의 최강자라는 것.

“……그래서, 오지랖이라도 생기신 겁니까.”

“하하, 오지랖. 그래. 오지랖이긴 하지. 하지만 내가 그렇게 안 하면 언제 어디서 아무도 모르게 비명횡사할 것 같았는걸.”

“…유지한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죠.”

“풋. 역시 사람 생각하는 거 다 똑같아.”

‘…….’

무명의 혼잣말 같은 대답을 들으면서 밀리언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무명이 자신을 지켜줄 거라는 전제가 깔렸다 한들, 자신은 유지한처럼 살 수 있었을까?

대답은 당연히 NO였다.

유지한처럼 산다는 건 상상 이상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당장 물질보다 자신이 깎여나가니.

그러니 질투도 가당치 않았다.

“타이밍 딱이네.”

“네?”

“도착이야.”

쿠우우웅―!!

“오우. 화려하네. 다들 열심이라 번쩍번쩍 아주 눈이 아플 지경인데?”

“한창 전투 중이네요.”

유지한이 무엇을 가져도 질투를 해선 안 되는 거였다. 밀리언을 비롯한 그 누구도.

그리고 이제까지 밀리언 또한 그럴 자신이 넘쳐났었고.

파앗―!

【보석술사가 특수보석 달리아의 심장(S)을 대가로 바칩니다.】

“다들 전방 조심해―!”

“당빠지. 다들 근접전 빠지고 원거리로!”

【스킬이 발동됩니다.】

【얼음의 구속(A)이 ‘분노의 피오레’를 구속합니다.】

【스킬 유지 시간은 구속 대상에 따라 다른 점 숙지해주시기 바랍니다.】

“얼마 못 버티는 거 알지?!”

“충분해!”

유지한이 SSS급 보검을 얻었어도 밀리언은 조금의 질투 없이 ‘와. 드디어 너도 인생에 복이라는 것을 받는구나!’ 하며 박수를 쳐 주었을 것이다.

“다들 꽤 하는데? 안 나서도 될 거 같은데.”

“레쓰비는 전선 이탈이라고 하더니 다시 합류한 모양입니다.”

“음. 그래서 상황이 좀 괜찮은 건가.”

“그는 좋은 딜러니까요.”

“그렇군. 그나저나, 유지한은 어디 있으려나. 다친 건 아니겠지?”

“……”

하지만, 처음으로 이것만은 부러웠다. 그 누구도 받지 못하는 관심을 한 몸에 받는 그가.

“어, 저기 있다……. 다쳤나?”

“……그런 거 같네요.”

“빌어먹을.”

처음으로 질투가 났다.

“내려가자.”

“네?”

“먼저 엄호해. 합류할 테니.”

턱―

“자…… 잠깐……. 으아악!!”

너무나 싫었다.

“사람을 던지는 게 어디 있습니까!”

“편하잖아.”

자신은 가지지 못하는 관심을, 너무나 가볍게 손에 쥔 그가.

하지만 그럼에도…….

“밀리언. 죽으면 용서 안 할 거야.”

“……누구더러 하시는 말입니까.”

“그래. 너. 어쨌든 유지한보다는 쓸만하니 안심이 돼.”

당신은 유지한이 빛이 난다 했지만, 내 눈에는 당신이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빛이 나서, 결국 당신이 원하는 바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당신은 정말 나쁩니다.”

【빛의 술사가 빛의 선율(S)을 발동합니다.】

“레이 밀리언!”

“지원이다!”

당신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 * *

【빛의 술사가 빛의 선율(S)을 발동합니다.】

쏴아아아―!

황금빛 빛이 하늘에서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전투 중이어도 넋 놓고 볼 정도의 아름다움에 모두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와. 대박…….”

“쟨 진화했다더니, 천사로 진화함?”

“그런가 봐. 와…… 빛이 몬스터를 진정시키는 광경을 볼 줄이야.”

화려한 외관과 그에 결코 지지 않는 능력에 더더욱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성력도 아니면서, 그저 빛일 뿐인데 몬스터를 진정시키다니. 평생 가도 보지 못할 진풍경이었다.

“저거 공격 스킬 아니야?”

“힐러로 전직한 듯.”

최고의 힐러인 성녀라 한들, SS급 몬스터를 지금 눈앞의 광경처럼 얌전히 잠재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하물며 이 스킬은 분명 그들이 알기로 공격스킬이었다. 물론, 그들이 알던 것에 비해 너무 많이 진화해서 같은 스킬인가 싶지만.

더불어, 그런 빛 사이를 헤치며 유유히 내려오고 있는 놈의 모습은 무슨 신이 강림한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정말 재수 없게.

“레이 밀리언. 존나 오글거려.”

“와. 구해주러 왔는데, 너무하네.”

“네 의사냐? 끌려온 거 아니고?”

유라가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레이 밀리언이 겉으로는 착하고 합리적인 척하지만, 속은 이기적인 애새끼인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유라가 핵심을 정확하게 찔러오자 밀리언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할 말이 어디 있겠는가. 전부 맞는 말이었으니까.

“뭐야. 바로 맞혔네?”

“니가 그럼 그렇지.”

밀리언이 깔끔하게 시인하자, 유라가 그럼 그렇지, 라며 쯧― 혀를 찼다.

뭐, 안 봐도 뻔했다. 무명이 시키니 쫄래쫄래 따라왔겠지.

비록 제가 무명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한 번 본 것만으로도 레이 밀리언이 환장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런 오만한 당당함은 쉽게 거부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리고 사람을 부리는 데 익숙해 보이기도 했으니, 그가 레이 밀리언을 부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으리라.

“그래도 타이밍 잘 맞췄네.”

겉으로 보기엔 꽤 잘해 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사실 꽤나 한계인 상태였다.

몇 시간 전, 처음 보스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분노의 피오레’를 마주하게 되었다.

[“어리석은 인간들이, 드디어 나를 찾아와 주었구나.”]

‘……!!’

‘나의 보석에게 소원을 비나…… 커억―!’

[“흠. 하나.”]

‘레쓰비!’

‘빌어먹을―!!’

공격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딜러 레쓰비가 초반에 중상을 입고 리타이어했다. 그러나 그는 리타이어 즉시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눈을 감고 통신을 시도했고, 그가 전투 불능에 빠지자 팀 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부상을 입은 몸으로 능력을 쓴 레쓰비의 걱정도 있고, 무엇보다 전투에서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페이스를 저쪽에서 가져갔기 때문이다. 상황이 열세에 치달았다.

‘젠장……. 딜러만 무사했어도……!’

‘길드장님은?!’

‘초반부터 세이라를 불러들였어. 하지만 그나마도 버티는 게 고작이야. 무엇보다 위력이 큰 스킬을 쓰려면 준비가 필요한데, 그동안에 시선을 끌어주며 버틸 인력이 없어.’

젠장. 유라는 입술을 곱씹었다.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임팩트 큰 마법들을 연달아 사용하며 적의 시선을 끌면서 최대한 오래 버틸 수 있는 이는 레쓰비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가 중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레쓰비가 전선에서 빠지면서 유지한은 너무 많은 마력과 체력을 소비했다. 이제는 아마 큰 스킬을 쓸 체력도 간당간당할 것이다.

[“더 나를 즐겁게 해주지 않는 것이냐.”]

‘……X발.’

상대는 존재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짓눌리게 해 체력을 깎는 몬스터였다. 앞에 서기만 해도 체력 소모가 어마어마한데, 나름대로의 전략도 있어 답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로 인한 이쪽의 사기 침체까지. 아주 가지가지였다.

그때, 유지한이 움직였다.

‘잠깐, 시간 좀 벌어줘. 1분이면 충분해.’

‘뭐? 야―!’

1분은 누구 개집 이름이냐!

본인한테야 쉬운 이야기이긴 했지만, 이쪽에는 버겁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유지한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았기에 끝까지 말릴 수 없었다. 그의 생각대로, 지금은 그것이 최선책이었으니까.

‘들었지! 1분이다!! 설마 이 정도도 못 버티면 원티드의 이름이 울지 않겠어?’

‘당연하지.’

‘우리도 이 나라에서 손꼽히는 랭커야. 무시하지 말라고.’

그래도 희망이 보이니 모두의 사기가 올랐다.

1분은 짧디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 긴박한 열세의 전투 속에서 고작 1분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을 수 있는지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느 한 사람 망설임을 보이지 않았다. 모두, 괜히 역경과 고지를 넘어온 랭커가 아니었으니.

‘막아!’

‘다 막을 필요 없어! 유지한과 레쓰비 쪽만 막으면 돼! 다 받지 말고 버릴 거 버려.’

‘정면에서 받지 말고 반 이상 흘려보내! 아니면 두 번째 리타이어 된다!’

그간의 짬밥과 능숙한 팀워크로 1분은 무리 없이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정도로 그들의 연계는 완벽했다. 단 한 치의 실수 없이 이어지는 팀워크에 구멍은 없었다. 절대 뚫릴 일이 없다는 것이다.

상대가 SS급 몬스터. 잠정적으로 SSS에 가까운 몬스터가 아니었다면 1분이 아니라 1시간이라도 무리 없었으리라.

[“흠. 쓸만하군. 어중이 떠중이들은 아닌 모양이야.”]

‘당연하지. 만만하게 보지…… 말라고!’

그래. 상대가 그 같은 몬스터가 아니었다면.

[“호오. 그래. 지켜보지. 과연 내 분노를 받을 수 있는지.”]

‘뭐…….’

쿵―!

‘……!!’

순식간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분노에 몸이 짜부라진 것은.

‘커억―!’

‘컥……!’

난생처음 겪는, 심장을 후벼파는 깊고도 무거운 분노에 모두 바닥에 처박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적응하려 하면 할 수 있었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다들 최대한 이 분노의 압박감에 익숙해지려 노력하며 황급히 지한 쪽을 바라보았다.

‘후우…….’

다행히도 유지한은 자신들과 달리 제대로 상체를 세우고 있는 걸로 봐서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는 한발 앞서 레쓰비의 곁으로 가, 엘릭서를 그의 몸에 뿌리고 먹인 후였다. 엘릭서의 효과가 발동 중이기 때문에 레쓰비 역시 영향을 받지 않았고.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섣불리 판단하면 안 됐다.

[“흠. 이 분노를 받다니. 그럴듯하구나.”]

‘……!!!’

푸욱―!

[“허나, 빈틈을 보이면 안 되지.”]

‘……안 돼―!’

살을 가르는 소리가 소름이 끼쳤다. 레쓰비를 지키느라 방어하지 못한 지한의 입에서 피가 흘렀다.

팟―!

‘컥―!’

지한의 배를 뚫고 나온 창이 무자비하게 빠져나가자, 그대로 몸에 균형을 잃은 유지한이 쓰러졌다.

‘유지한!!’

그 순간 유라는 기적처럼 분노를 이겨내었다. 다른 이들도 거의 동시에 분노를 이기고 피오레에게 달려들었다.

[“동료애 하나는 훌륭하군.”]

위협을 느낀 건 아닐 테지만, 동시에 모두가 달려들자 그 동료애가 갸륵하기라도 한 듯, 그는 선심 쓰듯 뒤로 물러나 주었다.

더불어 비꼬는 것이 역력한 감탄이 들려왔지만, 그 개소리보단 이쪽이 먼저였기에 유라는 이를 갈며 회복 포션을 꺼냈다. 엘릭서는 워낙 귀한 포션이기에 아까 레쓰비에게 쓴 게 전부였다.

‘제발. 제발…….’

회복 포션을 뚫린 배에 들이부으면서 하늘에게 빌었다. 제발 들어달라고. 지한은 이미 잦은 회복 포션 사용으로 내성이 생겨 포션이 잘 듣지 않았으니까.

유라는 속으로 오만 쌍욕을 했다. 그러게 포션은 왜 그리 많이 처먹어가지고!!

아니, 이건 지한을 뭐라 할 게 못 됐다. 애초에 먹을 일이 없었으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간 무리하게 계속 한시도 쉬지 않고 게이트에 투입이 됐으니.

이 빌어먹을 것들. 나가면 다 발라버릴 거야.

진짜 무사하기만 하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은 심정으로 유라가 초조한 마음을 삼켰다. 아. 왜 내가 그 회복 포션을 안 가져왔을까! 지호가 들고 있던 그 지옥의 회복 포션까지 생각날 지경이다.

보통 회복 포션은 붓자마자 피부 정도는 거의 바로 회복되는데, 기대만큼 살이 올라오지 않자 마음이 더 초조해졌다.

전 재산을 투자해서라도 매물이 있으면 무조건 구매하겠다는 일념으로 전투 중에 미쳤다고 마켓을 띄워 뒤지기까지 했으나, 그 귀한 엘릭서가 나올 리 없었다. 유라가 플래티넘 등급도 아니니 더더욱.

‘……난, 괜찮아…….’

‘너……!’

그때, 드디어 회복 포션의 효과가 나타난 듯 지한이 정신을 차렸다. 배를 보니 피는 멎고 상처가 조금 지혈되긴 했지만, 제대로 다 아물지 못해 일어서기조차 버거워 보였다.

결국 유라는 필사의 결단을 내렸다.

‘넌 이대로 빠져.’

‘하지만……!’

자신이 없으면 안 그래도 어려운 클리어가 아예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아는 지한이 반항했다. 물론 옳은 소리였다. 애초에 지금 이 팀은 모두가 있어야 간신히 클리어를 노려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을 고기 방패라도 하라고 내던질 만큼 유라는 무정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

‘누가 계속 빠지래? 마켓창 보고 있다 엘릭서 뜨면 바로 써서 합류해.’

우리만 고생할 거 같아?

유라가 되도 않는 너스레를 떨었다. 누가 봐도 발연기였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라도 해야 조금의 위안이 된다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그 사이로, 그제야 정신을 차린 레쓰비가 끼어들었다.

‘그래. 보스. 일단 쉬고 있어. 덕분에 나 지금 컨디션 만렙이야.’

‘너…….’

자신의 부주의로 인해 이렇게 됐다고 책임감이라도 느끼는 듯, 레쓰비는 평소의 유들유들한 얼굴이 아니었다.

‘그러니 좀 느긋하게 회복하고 나와. 보스는 그래도 돼.’

그리고 지금이었다.

잘 버티고 있었지만, 상황을 뒤집을 타개책이 없을 때, 기적처럼 밀리언이 등장했다. 그들이 가장 바라던, 하지만 그들을 구해주지 않을지도 모를 구세주와 함께.

유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의 끝에는, 언젠가 자신이 보았던 모습과 너무나 다른 이가 지한의 앞에 서 있었다.

진짜 그냥 보면 누군지 알아보지도 못하겠다. 볼 때마다 모습뿐 아니라 마력까지 전부 바뀌니.

하지만 이제는 유라의 눈에도 보였다. 지한이 왜 무명을 알아보는지. 아무리 모든 것이 바뀌었다 해도, 존재 자체가 뿜어내는 아우라는 완벽히 변화시킬 수 없었으니.

그리고 그 깨달음은 다른 원티드 팀원들 역시 마찬가지로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 이 전투에 있어 최강의 치트키는 이런 이들의 마음은 조금도 관심이 없는지 한숨을 내쉬며 보란 듯 혀를 찼다.

“흠. 너덜거리네.”

정말 가지가지 한다는 듯.

그 소감에는 동감이었다.

* * *

“흠. 너덜거리네.”

말은 나름대로 기품있고 태연하게 했지만, 속은 아주 부글부글 끓었다. 걸레짝이 되었는데도 제 몸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듯, 놀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얼굴이 참 기가 막혔다.

밤의 지배자, 하울이 화 한 번 내지 않는 유들유들한 성격의 소유자라서 다행이었다. 저번처럼 종말의 마법사였다면 제 성질대로 온갖 샤우팅을 날렸을 터였다.

그도 그럴 게, 배에 구멍이 이렇게 뚫렸는데 고작 한다는 말이…….

“왜…….”

이딴 소리밖에 없으니, 속이 터지지 않는 게 이상했다. 진짜 저놈의 호구 성질은 언제 버릴 수 있을까. 이를 갈면서 마켓을 열어 엘릭서를 구매해 너덜거리는 배에 냅다 들이부었다.

“……!”

제 배에 부어지는 게 뭔지 알긴 하는 듯, 지한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마저 참 애처롭고 어리석어 나는 조금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런 꼬라지를 하고 있을 거 같아서.”

안 올 수가 있어야지.

이때껏 국내 랭킹 1위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었으면서, 왜 이런 것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해 이 꼴일까. 고작 이 엘릭서 하나가 뭐라고.

정말 너무 속상하고 짜증이 났다.

부글부글―

“……윽.”

“소리 내도 됩니다.”

아픈 게 당연하지.

엘릭서가 만능이라 불리지만 정말 만능은 아니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이렇게 뚫린 배가 곧바로 메워져 가고 있긴 해도, 갑작스러운 세포증식으로 인한 고통까지 없애주진 못했다.

고통은 익숙하다 못해 질리도록 맛봤을 유지한조차 아픔을 숨기지 못할 정도로.

그럼에도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인지, 그냥 습관인지 모르겠지만 아주 피가 날 듯 이를 악무는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괜찮다고 기껏 말해줬음에도, 아니 말해서 더 싫은 것인지 유지한은 꿋꿋이 신음을 참아내었다. 진짜 미련 곰탱이였다.

그나저나…….

“……엘릭서로도 안 된다고?”

꽤나 고통스러운 대가를 치르게 해서 그렇지, 엘릭서의 치료 효과는 거의 100%였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유지한의 상처는 완전히 깨끗하게 아물지 않았다.

정확히는 아물긴 아물었으나 딱 움직일 수 있는 정도였고, 세포가 재생되어 생긴 새 살이 정돈되지 못하고 그대로 튀어나와 울퉁불퉁 보기 흉한 모습이었다.

……뭘 더 해야 하지?

엘릭서는 결국 마력의 정수와도 같은 것이니, 엘릭서가 여기까지라면 마력으로 인한 치료는 거의 안 된다고 봐야 했다.

엘릭서로 안 되면 성력으로는 되나?

그러면 성녀에게 보여야겠지만, 하도 정신없이 달려온 터라 성녀가 지금쯤 한국에 도착해 있는지, 어디 있는지 알지를 못했다.

정말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는데, 그런 나를 보며 유지한이 되도 않는 변명을 했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해요.”

“…….”

아니, 백퍼 아닌 거 같은데. 종이에 손가락만 베여도 온갖 개짜증을 부리는 인간이 단호하게 그 말을 부정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진짜 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저건 꼴에 남자라고 지금 허세 부리는 거냐고, 정말 가당치도 않다는 듯 혀를 찹니다.]

‘미 투.’

세상 모든 허세를 다 부려도 되지만 이런 허세는 안 부렸음 한다. 진짜로.

그때,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내 눈치를 보던 유지한이 회복 포션을 꺼내 제 배에 부어버렸다.

[‘이매망량’ 님이 저거 지금 뭐 하는 거냐고 어이없게 바라봅니다.]

매우 동감이다. 엘릭서를 부었는데 거기다 회복 포션을 또 들이붓다니. 이 정도면 진짜 포션 중독 아닌가.

포션 맹신도 정도껏 해야지. 회복 포션의 최상위 격인 엘릭서를 썼는데 일반 회복 포션이 들을 리가.

언뜻 중첩이 될 것 같지만, 최상위 포션인 엘릭서는 워낙 효과가 뛰어나다 보니 그 하위 격인 회복 포션은 거의 아무런 효과도 주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한 소리 해 주려던 차에, 유지한이 갑자기 남은 포션을 손에 묻히더니 상처 부위에 대고 문질러 바르기 시작했다.

“……뭐 하는 짓이지?”

진짜 묻고 싶지는 않았지만, 하는 행동이 너무나 황당해 물을 수밖에 없었다.

“…….”

하지만 지한은 대답하지 않고 여전히 손을 놀리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뻘짓인가, 하고 혀를 차는데 눈앞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상처가…….’

상처가 평평하게 펴지고 있었다.

급속재생되다 도중에 중단돼 흉한 살들이 조금씩이지만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렇다고 해서 완벽히 정리가 된 건 아니었기에 기분 나쁜 느낌은 그대로였지만, 그래도 아까 전만큼은 아니었다.

포션에 이런 효과가 있다는 것은 듣지 못했다. 심지어 이걸 개발하고 있는 정하나에게서조차.

넋이 나간 내게 유지한이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많이 쓰다 보면 이런 것도 알게 됩니다.”

아니, 그게 자랑이냐.

그것보다…….

‘이런 건 진작 보고를 하라고!!’

정하나가 알았다면 당장 유지한의 멱살을 틀어쥐고 고문 의자에 앉혀서 아는 거 다 불라고 할 터였다. 그 정도로 이건 엄청난 정보였다.

이 정보의 가치도 모를 만큼 이놈은 천치인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나는 쿨하게 가르치기를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안 되는 일에 더 이상 힘을 빼기는 지쳤다.

“한 번도 말한 적 없습니다…….”

다행히 그래도 정보의 가치를 알긴 아는지 녀석이 머쓱한 얼굴로 볼을 긁으며 변명을 했다.

“아무래도 이런 건 상처 치료는 아니니까……. 포션이 꼭 필요한 사람에게 돌아갔으면 해서…….”

그래. 다행이다. 그거라도 잘해서.

안도는 했지만, 표정은 유지한이 보기에 썩 좋진 않았나 보다. 남의 얼굴을 보고 왠지 모르게 억울한 표정을 짓는 건 또 뭔가 싶었어도, 웃겨서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알았어요. 착하네요.”

쓱쓱―

“……?!”

앗. 이런. 반사적으로 윤지호로 돌아와 손이 나갔다. 이래서 습관이 무섭다더니. 하지만 이제 와 황급히 손을 떼는 건 ‘나 누구입니다.’라고 광고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어디 나뿐일까. 내가 요즘 하도 쓰담쓰담을 해서 그런지, 반사적으로 가만히 있다가 뒤늦게 눈치챈 듯 당황해 눈을 땡그랗게 뜨는 놈도 웃겼지만.

웃음을 꾹 참으며 일단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때, 이번에는 신이 도우셨는지, 아니면 저놈에게 타이밍의 신이 내리셨는지, 웬일로 밀리언이 도움이 되는 짓을 했다.

“아. 일 좀 하시죠!!”

4군단장은 해결해 준다면서!!

분명 몇 시간 전까지 왜 드라키스는 안 되냐며 뭐라고 했던 놈인 거 같은데. 빠른 태세 전환에 감탄해야 할지, 아니면 참 이용을 잘해 먹는 놈이라고 혀를 내둘러야 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덕분에 더 이상 놀고만 있을 수는 없게 됐다.

“합류하죠.”

“네.”

내 선언에 유지한이 바로 검을 들었다.

【빛의 검 세이라가 주인을 재인식합니다.】

다시 도전하는 그대에게 광영이 있기를…….

【빛의 검 세이라가 빛을 발합니다!】

촤아아악―!!

지한이 검을 휘두름과 동시에 찬연한 빛이 검기가 되어 피오레에게 향했다. 위험을 감지한 피오레가 그사이 빛의 선율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움직임으로 지한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그리고 드디어 위기감을 느꼈는지, 일방적이던 승세가 알 수 없게 되었음을 느낀 것인지 피오레는 즐겁게 웃음을 터뜨렸다.

[“흠. 복병이 여기들 있었군.”]

적이 자신과 대등해진다는 것이, 그리하여 본격적으로 제대로 싸울 수 있다는 것이 기쁘기 그지없다는 듯.

그런 피오레를 올려다보면서 지한이 물었다.

“무명. 현재 사용하시는 스킬은 어떤 것들입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같이 싸우려면 가장 먼저 숙지해야 할 것이었기에 순순히 답을 해 주었다.

“지금의 나는 밤의 지배자. 타이틀 대로 밤을 다스리는 스킬이죠.”

그 말에 유지한이 난색을 표했다.

“아. 난감하군요.”

“……어째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스킬이 현재 전투에 가장 적합하다 여겨 정해준 인물이다. ……물론 아까 다른 놈을 상대할 때 정해준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인과성이 있으니 아주 안 통하진 않을 거다. 일단 하울의 능력은 어마무시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유지한이 매우 뜻밖의 사실을 전해 왔다.

“제가 아까 여러 방법으로 공격해 본 결과.”

“……?”

“분노의 피오레는, 어둠 속성은 오히려 흡수하더군요. 빛 속성이라야 타격이 있습니다.”

아마 분노 타이틀을 갖고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라고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하는데 순간 욕할 뻔했다. 미리 말해 줘서 참 감사하긴 했지만, 정말 빌어먹을 소리였다.

“좋은 정보. 아주 감사해요.”

이를 아드득 갈며 말했다. 유지한의 잘못은 아니었어도, 짜증이 날 수밖에 없는 탓이었다.

그때, 유지한과 나의 대화를 들은 밀리언이 다가와 ‘돌겠네.’라며 탄식을 했다.

“아, 제 빛의 선율도 효과는 있는 것 같지만, 처음처럼은 아니에요. 내성도 좋은가 봐요.”

…이쪽도 정말 좋은 정보였다.

썩은 표정을 하고 있는데, 여전히 피오레의 시선을 끌고 있는 동료들을 대표해 유라가 곁에 다가왔다.

“방법이 있으신가요?”

없으면 어쩌나, 하는 얼굴이었다.

하긴, 지금까지 내가 이들에게 보여 준 가면이 ‘염라’에 ‘망자의 귀부인’ 정도였고, 그게 모두 암 속성이었으니 걱정하는 것도 이해는 되었다. 그밖에 특성을 더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보통 생각하지 않으니까. 이렇게나 능력이 많으리라고는 더더욱.

뭐. 말해 주지 않으니 당연했다. 말할 필요성을 못 느꼈으니까. 모르는 편이 좋기도 했고. 사실 좀 귀찮기도 하고.

어쨌든, 그렇다면야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바꿔야겠네요.”

“……무엇을?”

뭐긴 뭐야. 내 가면이지.

가면이 좋은 이유는 언제든지 바꿔쓸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설마 하루에 하나만 된다거나, 한번 변신하면 원상태로 돌아왔다 다시 스킬을 발동해야 한다거나 하겠는가.

다른 이라면 몰라도 제 성위가 그런 허접스러운 스킬을 줄 리 없지 않은가.

【라이브러리를 펼칩니다.】

【진 ‘화신’ 스킬: 수백 개의 가면(S)이 가면을 변경합니다.】

“……!!”

【시전자의 상황에 맞는 가면을 재설정 중입니다.】

【‘꽃의 무희’가 선택되었습니다.】

【‘꽃의 무희’ 가면을 씁니다.】

[‘내 춤은 꽃을 피우기 위한 것.

생명의 꽃을 피우는 춤을 영원히 출 것이니.’]

흰색의 표정 없는 가면이 얼굴을 감싸는 것과 동시에 모습이 변한다. 키가 180cm는 넘을 것 같은 슬림 탄탄한 남자의 체격은 저 멀리로 사라지고, 165cm는 될까 의문인 아주 작은 키에 가녀리고 여린 소녀가 나타났다.

“이건……!”

긴 황금빛 머리칼이 흩날린다. 이곳과 정말 어울리지 않는 하얀 복숭아색 피부를 연한 파스텔 핑크의 옷이 뒤덮었다. 얇은 옷이 겹겹이 쌓여 안이 비치진 않았으나, 작은 바람에도 하늘하늘 나부끼는 반투명한 천들은 조금 요염한 느낌을 주었다.

이윽고, 변신을 마치고 비로소 눈을 뜬 그녀가 예쁜 핑크색 홍채를 빛내며 미소를 지었다.

“나와 춤을 추지 않겠어?”

아, 오늘은 즐거운 춤을 출 수 있을 것 같아.

* * *

터벅. 터벅.

맨발에 발찌를 찼을 뿐인 뽀얀 발이 앞으로 나아갔다. 어떠한 무기도 없었다. 오로지 있는 건 몸과 옷가지뿐. 그럼에도 그건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 그녀는 청순한 미소를 지으며 사뿐하게 걸어 나갔다.

“…….”

누가 봐도 죽음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이었으나,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막을 자신도 없었지만, 그럴 정신도 없었다.

그녀가 걷는 걸음걸음마다 꽃이 피고 있었으니까.

밟고 간 곳마다 꽃이 피어나는 광경은 그야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경이로운 것이었다. 오죽하면 ‘분노의 피오레’조차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용인하고 있겠는가.

“……대박.”

살다 살다 몬스터랑 똑같은 심정으로 멍하니 같은 것을 바라볼 줄이야.

그 기이한 경험도 경험이지만, 눈 앞에 펼쳐진 아름다움에는 정말로 순수하게 감탄했다. 어느덧 모두가 목숨을 건 전투를 멈추고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방금 전까지 그들이 알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신한 것도 놀라웠지만, 그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꽃은 생명이라 하지 않던가.

생명이 풍부한 곳에서만 꽃을 피울 수 있다고.

왠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머릿속엔 갑자기 그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녀가 곧 생명이기에 꽃이 피어나는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단순히 꽃을 피우는 게 아니라 생명을 피우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생각은 틀리지 않은 듯, 마침내 피오레의 바로 앞에 선 그녀가 선언했다.

“춤을 추자.”

화려하고 아름다운 춤을.

“……!!”

선언과 동시에, 꽃이 모두 꽃잎으로 흩어져 대기를 가득 채웠다. 그 순간 그들은 깨달을 수 있었다. 바로 이게 그녀의 무기라는 것을.

모두의 놀람 사이에서 그녀는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즐겨 줘.”

내 춤을.

* * *

“이제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거 같아.”

“뭐.”

넋 나간 밀리언의 말에, 마찬가지로 같이 넋이 나갔으면서도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이와 엮이기 싫은 감정을 되살린 유라가 퉁명스럽게 화답했다.

그러나 상대가 불퉁하든 말든, 그 반응이 매우 익숙한 밀리언은 아랑곳 않고 자신의 소감을 밝혔다.

“미쳤어.”

진심.

뭐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지만, 결국 한마디로 귀결되는 감상이었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환상적인 광경이었다.

꽃잎들이 마치 생명을 가지며 의지를 가진 듯 공기를 지배했다. 그러면서도 무명의 손길이 곧 법인 듯, 그 아래 순종하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모두가 전투는 생각도 안 하고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듯 그 광경을 감상했다. 물론 그래도 되었다. 그들의 손은 지금은 오히려 방해였으니까. 전투 만렙인 그들은 분위기 파악도 만렙이었다.

밀리언이 눈치 있게 빛의 선율을 걷었다. 꽃잎에 방해가 될 수도 있고, 필요도 없을 터이니.

그리고 스킬이 거둬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무명이 웃었다.

“음. 그럼 가볍게 가 볼까.”

그리고 그 말처럼 간단하게 손을 휙 움직였다.

“……!!”

그 순간, 꽃잎이 무명의 손을 따라 칼날이 되어 그대로 피오레에게로 날아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어차피 꽃잎이 사방에 퍼져 있었기에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촤아아악―!!!

[“흡―!!”]

가슴 한가운데에 대각선으로 촤악―! 선이 길게 그어졌다.

선명하게 새겨진 자국을, 마치 제가 그린 그림을 감상하듯 바라보며 무명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를 위해 춤을 춰 줘. 피오레.”

나도 당신을 위해 춤을 출 터이니.

“와아…….”

나지막한 감탄이 쏟아져나왔다.

자그마한 소녀의 몸이 점점 공중으로 떠오르며 꽃잎과 함께 아름다운 춤사위가 펼쳐졌다.

가녀린 팔이 움직일 때면 얇은 쉬폰 같은 천이 펄럭이며 춤사위를 더욱 크고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들어 주었고, 발을 움직일 때면 마치 요정의 춤사위를 보는 것처럼 치마가 흩날렸다.

만약 영상을 찍을 수만 있다면 평생 간직하고 싶을 만한 모습이었다.

물론 저 왕이 그걸 허락해줄 리 만무하지만. 마땅히 장비도 없고. 전투에 누가 그런 걸 가져오겠는가. 그러나 지금만큼은 관종이나 들고 다니는 그런 물건이 너무나 아쉬웠다.

“……아.”

그리고 아름다운 춤사위를 바라보던 밀리언은 왜 그, 아니 이젠 그녀가 이 인물로 변신했는지 깨달았다.

촤악―! 촥!

[“으악―!!”]

선율을 따라 움직이는 듯한 꽃잎에 온갖 상처를 입으며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피오레의 모습이 마치 춤을 추는 것과도 같았다. 그렇게 제 마음대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었다.

탁―

“하하. 고마워. 화답해 주는구나.”

그걸 모르지 않으면서, 거대한 어깨에 착지를 하며 그녀는 기쁘다는 듯 웃었다.

자기가 그렇게 만들었으면서.

[“윽……. 이런 미친……!!”]

그리고 이런 굴욕적인 취급을 당하면서도 피오레는 아무런 힘을 쓸 수 없었다. 분노를 힘의 원천으로 사용하는 그에게 생명으로만 가득한 이 공격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존재하며 존재하지 않는 꽃잎을 잡기는 무리였다. 마력도 아닌 것이, 하나하나는 별것도 아니었으나 결국은 모여 물리적인 공격을 일으켰기에 그야말로 피오레에게는 최악인 상대였다.

[“크아아악―!!”]

조금도 힘을 쓰지 못하고 그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

이래서 그녀는 이 스킬을 선택한 것이다. 알고서 한 건지 그저 본능적으로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인물의 선정은 운명이 결정하는 것임을 전혀 알 리 없는 밀리언은 그 사실만으로도 진심으로 무명이 무서워졌다. 상대에 따라 가장 적절한 스킬을 바꿔가며 사용할 수 있는 이만큼 무서운 것이 어디 있을까.

더불어, 계속 바뀌는 모습에 심지어 성별도 바뀌어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할 수도 없으니, 원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특정하기가 어렵다.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그 사실을 바로 마주하자 진심으로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적으로 상대하게 된다면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단언컨대 이자는, 본인이 계속 정체를 감추고 1위를 거부한다 해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고고한 왕일 것이다. 그녀의 모든 것이, 그녀가 바라지 않아도 그녀를 그렇게 만들 것이니까.

“……역시 세상은 불공평해.”

“님이 그렇게 말하니 웃겨 뒤집어질 거 같은데.”

장난해?

세상 그런 헛소리는 처음 들어 봤다는 듯 유라가 쌍심지를 켰다.

물론, 그 말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가 봐도 자신은 세상에서 꽤나 많은 혜택을 보고 사는 사람이었다.

적당히 똑똑한 머리. 준수한 외모. 더불어 세계에서 손꼽히는 힘까지. 남들이 못 가져서 안달인 건 거의 다 가진, 재수 없는 인간이 맞았다.

하지만 그런 자신조차도 저 앞에 서면 한없이 조그마해질 뿐이다.

새삼 다시 깨닫는다. 진정한 성위의 사랑을 받는 이란 저런 것이라는 걸. 그리고 성위에게 저 정도의 사랑을 받으려면…….

“아. 재밌었다. 좋은 춤이었어!”

저 정도의 빛이 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

빛날 수 있는 사람이야 한다는 것.

춤을 마친 그녀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매우 만족스럽다는 듯 두 팔까지 벌려가면서. 대신 피오레는 만신창이였다. 마지막 한 방이면 숨이 떨어질 것 같은.

하지만 무명은 자신이 끝을 내는 대신, 허공에서 천천히 내려와 유지한을 뒤에서 답삭 끌어안았다.

“……!”

마치 연인을 끌어안듯 더없이 다정하고 부드럽게.

유지한의 등에 업히듯 몸을 밀착하고 목에 손을 감아 가깝게 끌어안은 그녀는 즐겁게 웃음을 터뜨리며 지한의 귀에 속삭였다.

“자. 이제 끝을 내야죠.”

“……제가, 말입니까.”

왜 본인이 안 하고, 라며 지한이 눈으로 묻자, 그녀가 눈을 접으며 휘었다.

“안 왔다면 내가 마무리를 지었겠지만, 기왕 왔는데 구경만 하고 가기도 그렇지 않나요?”

적어도 레벨 업은 해야지.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떠먹여 주니 기분이 별로였다. 그녀가 이렇게 하지 않아도 강해질 수 있는데. 지한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지한을 보며, 무명이 부드럽게 지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명백히 호의가 느껴지는 태도라 지한은 뭐라 할 수가 없었다. 제게 주어지는 호의를 거절할 만큼 모진 성격도 되지 못했으니.

그리고…… 그리 거부감을 가졌지만, 무명의 이 행동은 자꾸만 제가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기에 더욱더 이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마치 본능처럼.

결국 지한이 자신에게 넘어온 것을 눈치챈 것인지, 무명이 천천히 팔을 뻗어 그의 팔을 들어 올렸다.

“세이라를 들어요. 그리고 세이라의 한계를 개방하는 거예요.”

그 정도가 아니면 아무리 손을 써놨다 해도 마무리를 지을 수 없어.

단호한 선언에 지한은 검을 꽉 쥐었다.

맞는 말이었다. 평소 자신의 힘 정도라면 아무리 해도 마무리를 짓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세이라의 한계를 해방하는 것은 겁이 날 수밖에 없었다. 제어할 수 없는 힘은, 두려울 수밖에 없었으니까.

언제, 어떻게 나를 잡아먹을지 알 수 없으니.

그 걱정을 꿰뚫어 보고도 무명은 타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검을 쥔 손에 손을 얹어 검을 겹쳐 잡았다. 홀로 그 무게를 지도록 하지 않겠다는 듯.

그리고 귓가에 속삭여왔다.

“걱정 마. 내가 있잖아.”

“…….”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무적의 말이었다. 두려움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본인의 의지도 없이.

“……[세이라].”

【세이라가 계약자의 의지에 귀를 귀울입니다.】

지한은 이 감각을 언젠가 느껴 본 적이 있다.

【다시 한번 기회를 줍니다.】

“번복은 없어.”

【빛의 검 세이라가, 1차 봉인을 해제합니다.】

부디…… 당신에게 승리를 내어주는 길이 되길.

‘내가 해줄 거예요. 내가, 전부.’

아마, 제가 다시 사랑에 빠지는 순간에.

“……윤지호.”

“……!!”

갑작스러운 이름에 제 뒤에 있는 무명이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지한은 앞만 보았다.

이 자가 왜 이렇게 불쾌했던 것인지 깨달았다.

너를 생각나게 해서.

계속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었던 것 같다. 어쭙잖은 오만과 허세였다.

쏴아아아―

【세이라가 시전자와 감각을 공유합니다.】

【지나친 마력의 감쇄를 주의하여 주십시오.】

이 일이 끝나면 말해야겠다. 제 마음을. 어떠한 오만과 허세 없이 솔직하게. 그저 있는 그대로.

상처받더라도, 그것이 너에게 향하는 가장 올바르고 확실한 길일 터이니.

“……흠. 뭔 각오라도 한 거 같네요.”

“알 수 있나요?”

“세이라가 답해 주고 있잖아요.”

그 말에 유지한은 그제야 비로소 세이라를 보았다. 그의 말대로, 그 확고한 마음이 세이라와 연결되어 자신을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그걸 보며 지한은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그녀를 만나고 변한 것투성이였다. 처음으로 강해지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고작 다짐하는 것만으로도 불안을 확신으로 바꾸는 것도.

전부 그녀가 만든 기적이었다.

“세이라. 승리의 노래를.”

【빛의 검, 세이라가 당신을 위해 승리를 노래합니다.】

【단 한 번의 기회(S)가 발동합니다.】

【주어진 기회는 단 한 번뿐입니다.】

시스템이 염려 섞인 문구를 띄웠지만, 정작 본인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절대로 질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까.

만나러 가야 할 사람이 있었기에.

쏴아아아아―!

검을 내리치며 비로소 방아쇠는 당겨졌다.

빛의 검이 빛의 선율을 능가하는 빛을 쏟아내었다. 지한의 모든 마력을 담아낸 빛이 그대로 피오레에게 직격했다.

[“크아아아악―!!”]

그 순간, 다시 한번 세상에 이변이 벌어졌다.

【화룡왕 드라키스의 권속, 4군단장 중 한 축인 ‘분노의 피오레’를 처치하셨습니다.】

【‘분노의 피오레’의 던전이 클리어됩니다.】

【클리어한 자는 ‘정의의 수호자. 이든’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정의의 수호자. 이든’이 새로운 단계로 발돋움을 합니다.】

우르르 울리는 메시지들. 하지만, 이곳의 모두는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곧이어 충격적인 메시지가 떠올라서.

【랭킹이 변동됩니다.】

【국내 랭킹 2위. 변동 없음.】

【월드 랭킹 7위에서 3위로 상승.】

【새로운 최강자에게 환호와 박수를.】

【새로운 단계를 밟은 당신을 응원합니다.】

무명이 곧장 1위로 올라가고, 이후 딱히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기에 별로 크게 바뀐 것이 없던 세계에 변화가 일어났다.

“축하해요. 드디어 올라왔군요.”

“……전부 당신이 일군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깎아내리지 마요. 난 조금 용기를 불어넣었을 뿐이니까. 전부 당신의 힘이에요.”

“…….”

“내 곁으로 다가온 걸, 환영해요.”

새로운 권력의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 * *

【화룡왕 드라키스의 권속, 4군단장 중 한 축인 ‘분노의 피오레’를 처치하셨습니다.】

【‘분노의 피오레’의 던전이 클리어됩니다.】

【클리어한 자는 ‘정의의 수호자. 이든’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정의의 수호자. 이든’이 새로운 단계로 발돋움을 합니다.】

연속으로 우르르 울리는 메시지들에, 그 자리에 있는 이들은 여러 가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첫째로.

“……막판에 친 사람을 클리어 자로 등록했다고?”

“그 말은, 곧. 곤죽을 만들어 놨어도 끝내기는 더럽게 힘들었다는 소리네.”

“그러니 유지한을 클리어 자로 이름을 올렸겠지. 솔직히 무명이 다 요리해 놨는데도.”

보통 클리어에 가장 많이 기여한 자의 이름이 ‘클리어한 자’로 등재된다. 시스템이 정확히 말해준 것은 아니었지만, 모든 전투에서 늘 그런 식으로 최종 클리어 자가 정해졌다. 지금까지 그것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다 해 먹었을 무명은 알 리 없는 이야기였지만.

그런데, 이번 4군단장의 던전은 무명이 전부 도와줘서 유지한은 다 죽어가던 몬스터의 숨통만 끊은 것이나 다름없음에도 클리어 자에는 그의 이름이 올라갔다.

오직 그 마지막 공격을 위해 세이라를 한계까지 개방하는 회심의 스킬을 써야만 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피오레를 무력화시키는 것만큼이나 목숨을 끊는 게 쉽지 않았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들은, 앞으로의 공략에 있어서도 마지막 타격을 가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었다.

“이야. 다들 필살기 열심히 아껴 놔야겠다.”

“안 그래도 어려운 공략이 더욱 하드해지는군. 브라보!”

“……시발. 밸런스 패치 언제 돼?”

“해 주겠냐.”

그 말은 곧, 마무리를 제대로 짓지 못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빌어먹을 정도로 열 받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랭킹이 변동됩니다.】

【국내 랭킹 2위. 변동 없음.】

【월드 랭킹 7위에서 3위로 상승.】

【새로운 최강자에게 환호와 박수를.】

【새로운 단계를 밟은 당신을 응원합니다.】

“레벨 업이 이렇게 쉬운 거였냐.”

“게임인 줄…….”

모두가 아연한 표정으로 알림창을 바라보았다. 랭킹이 너무 한 번에 오른 탓에, 눈앞에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거 버그 아니야?!

국내 랭킹도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건만, 하물며 월드 랭킹이다. 헌터의 시대가 도래한 이래로 가장 변화가 드문 랭킹이란 말이다. 근 5년 동안 월드 랭킹은 한 번도 이렇게 유동적으로 바뀐 적이 없었다.

그래서 무명이 이슈였던 것이다. 지금껏 조금의 변화도 없던 최상위 랭크권에 단번에 진입한 것으로 모자라, 곧바로 굳건하게 왕좌에 올랐으니까.

한국에서 나온 이변이니 한국도 뒤집어졌지만, 사실 전 세계가 난리였다. 아무리 별수저라고 해도 이렇게 압도적일 수 있는 것인가.

시작부터 별에게 선택을 받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성위의 선택을 받자마자 바로 왕좌에 앉은 이는 1세대 헌터들 이후로 처음이었으니까. 그때는 헌터 자체가 별로 없어서 가능한 일이었지, 지금 같은 때는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랬기에 각국의 랭킹 1위이자, 최상위 월드 랭커들에게 온 국가 수뇌부가 다 찾아가는 사건이 발생하는 둥, 난리도 아니었다.

혹시 우리 모르는 사이에 일가견이 있는 자를 알고 있었느냐, 컨택이 가능하냐.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지 그 의중을 파악한 것이 있느냐.

정작 그 질문을 듣는 기존 랭커들도 전혀 모르는 인간이건만, 관계자들은 끈질기게 물었다.

‘무명’, 이렇게 딱 듣기만 하면 전혀 모르지만, 실제로 만나면 사람을 알아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힘을 가진 자들끼리는 운명으로 연결이라도 되어 있는 건지 이미 안면을 튼 상대거나, 친분이 있는 경우가 많았으니.

그게 아니라 해도 헌터는 각성과 동시에 시스템이 헌터 채널을 개방해 주니, 사적으로 연락을 취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 연락을 받냐 안 받냐 하는 문제는 여전히 존재했고, 월드 랭커들은 그런 시스템을 워낙 잘 이용을 안 하다 보니 내로라하는 월드 랭커들조차 무명에 대해서는 조금도 모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알림 설정을 하지 않는 한 뜨지도 않았고. 그런데도 그 난리였으니 무명이 등장했다는 이유만으로 다들 정부 인사들에게 적잖이 시달렸다.

그러나 그들을 더 고생시킨 것은, 다른 사람들의 집착적인 질문 공세보다 그렇게 왕좌를 차지하게 된 이에 대한 개인적인 호기심이었다. 새로운 왕에 대해 궁금증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기에, 그들은 기다렸다. 왕좌를 차지한 이상 어딜 가든 그 존재감이 돋보일 터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소식이 들려올 것이라고.

하지만 어떠한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기껏해야 본인이 게이트에 휘말려 그 게이트를 클리어했다는 것 정도.

그 여유로운 태도에 전 세계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앞으로의 모든 것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생각해도 좋을지조차 말해주지 않았으니. 멋대로 해석하고 움직였다 어떤 화를 부를지 몰랐기에 다들 좌불안석이었다.

성위 계약으로 단번에 왕좌에 앉은 자다. 그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 예측할 수 없던 것은 물론이고, 어떤 인물인지 알 수조차 없으니 그에 맞춰 움직일 수도 없었다. 왕의 비위를 거스를 수 있는 건 왕이 유지한 같은 호구거나, 정부가 더럽게 멍청하지 않는 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짓이었다.

하지만 결국 가장 절대적일 때 나타나 활약하는 무명을 보니, 확실히 느꼈다. 그들 역시 일반인과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랭커임에도, 저기 저 인간의 발끝에도 닿지 못한다는 것을.

다른 이의 한계를 너무나 쉽게 알아채고 그 벽을 넘어설 수 있게 만드는 자다. 본인의 본래 힘은 어느 정도일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아마 스스로도 가늠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이 세계에는, 저 인간이 전력 100% 다 발휘할 수 있는 상대가 없을 터이니.

그렇기 때문에, 남의 계단을 대신 올라주면서도 그녀는 너무나 평화롭게 미소를 지었다.

“내 곁으로 다가온 걸, 환영해요.”

처음부터 본인의 뜻과 무관하게 앉은 왕좌였기 때문일까. 왕좌에는 종이 쪼가리만큼도 의미가 없다는 듯 순수하게 축하를 건네고 있었다. 정말, 일반인으로서는 평생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왕인 것이다.

설령 왕좌를 넘겨준다고 한들, 누구도 그녀가 왕이 아니라며 부정하지 못할.

“자. 이제 나가요.”

아름다운, 이 세계의 왕이었다.

* * *

“……윤지호.”

“……!!”

난데없이 불리는 내 이름에, 그 순간 ‘꽃의 무희’에서 윤지호로 정신이 돌아왔다. 너무도 빠르게 일어난 일이었기에 나 스스로도 정말 놀라웠다.

설마 수백 개의 가면에 이런 약점이 있을 줄이야. 고작 이름을 불린 것 하나로 돌아오다니.

유지한의 등에 업힌 건 평소 비슷하게 많이 하던 짓이었고, 꽃의 무희로서는 딱히 그를 남자로 보고 한 행동이 아니었기에 이상하게 느낄 만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 있지도 않은 자신의 이름을 갑자기 부르는 것은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순간, 덜컥 불안감이 터져 나왔다. 설마 이 남자가 눈치를 챈 건가?

꽃의 무희가 하는 행동이 원래의 내가 유지한에게 했던 행동과 비슷하긴 했지만, 그래도 워낙 성격이나 외모 자체가 달랐기에 이 둔한 남자는 절대 모를 거라 확신했다.

내가 유지한을 너무 우습게 본 걸까?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너를 못 믿냐고, 너라는 걸 눈치챌 구석은 하나도 없었다고 단언합니다.]

[이런 거에 걸릴 거였으면 진작 걸리고도 남았으니 걱정 말라고, 저 녀석이 딴생각을 했을 게 분명하다고 확신합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들킬 만한 구석은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변신과 동시에 몸도 바뀌어서 체온조차 다른데, 알 리가 없다. 무명인 걸 알아보는 건 특유의 이질적인 기운 때문이라고 쳐도 거기까지였다.

쏴아아아―

【세이라가 시전자와 감각을 공유합니다.】

【지나친 마력의 감쇄를 주의하여 주십시오.】

다행히 성위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각오를 굳히는 말이었던 듯, 세이라가 유지한에게 반응하며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아까의 불안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확신이 어려있는 힘이었다.

“세이라. 승리의 노래를.”

【빛의 검, 세이라가 당신을 위해 승리를 노래합니다.】

【단 한 번의 기회(S)가 발동합니다.】

【주어진 기회는 단 한 번뿐입니다.】

노래하는 세이라를 보니 훤히 알 수 있었다. 무슨 각오를 한 건지, 자세하게는 당연히 몰랐다. 내가 유지한도 아닌데 어떻게 알겠는가. 하지만 그 마음은 훤히 보였다.

앞서 유지한이 중얼거린 것처럼, 그가 보여 주는 이 힘은 윤지호에 대한 마음이었다.

내가 제어해 주려고 하긴 했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다. 인간은 분명한 의지가 있으면 해내지 못할 것이 없다 하지 않던가. 그 말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느낌이었다.

쏴아아아아―!

이건 나에 대한 마음이었다. 자기 자신에 관한 마음조차 한 톨도 섞이지 않은.

숨이 막힐 정도로 거대한, 나에 대한 감정.

‘……가슴이 아파.’

가슴이 욱신거렸다.

이게 뭔지, 알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알아줘서는 안 될 마음이 너무나 거대해서, 그 감정을 소화할 수가 없었다.

‘……지호 씨.’

‘윤지호―!!’

사실, 처음부터 은연중에 알고는 있었다. 알고도 내가 상처 입을까 두려워 모른 척했을 뿐. 그걸 이렇게, 도망칠 수도 없게 확인받게 되다니. 아무도 없었다면 머리를 쥐어뜯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챘다는 것을 유지한은 모른다는 점인가.

어차피 모른 척할 건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처음부터 사랑이 담겨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도 아니었는데.

‘유지한.’

그리고, 아마 나도 그랬을 것이다. 나도 그를 부를 때 사랑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게 그가 바란 사랑이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속이 복잡했다. 입안이 씁쓸하고, 가슴이 답답해서 당장 이곳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화룡왕 드라키스의 권속, 4군단장 중 한 축인 ‘분노의 피오레’를 처치하셨습니다.】

【‘분노의 피오레’의 던전이 클리어됩니다.】

【클리어한 자는 ‘정의의 수호자. 이든’입니다.】

대놓고 고백은 안 했을 뿐, 모두에게 제 마음을 고백하는 이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축하드립니다!】

【‘정의의 수호자. 이든’이 새로운 단계로 발돋움을 합니다.】

오로지, 제힘으로만, 아니. 나를 향한 마음으로만 계단을 밟고 올라간 당신을…….

더 이상 피할 수가 없어서.

“……내 곁으로 다가온 걸, 환영해요.”

……도망치고 싶어.

* * *

“자. 이제 나가요.”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꾹꾹 안쪽으로 밀어넣은 채, 간신히 꽃의 무희로 돌아와 미소를 지었다. 그 말에 모두 장비를 들고 던전 클리어로 얻은 부산물들을 챙겨 이동을 시작했다. 그때, 의아함을 느낀 밀리언이 내게 물었다.

“같이 안 가십니까?”

이건 또 무슨 개소린지 모르겠다.

“여기까지예요.”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너희들과 더 엮이나. 같이 나가봤자 대문짝만하게 사진 찍히고, 이상하게 기사 써질 게 뻔한데.

미쳤다고.

“집에 가서 다들 체력 보충하고, 얼른 필요한 거 구해 놔요.”

“……진짜…….”

“이제 12시간 남았어요.”

드라키스가 일어나는 시간까지. 그러니 나한테 신경 쓸 시간에 준비 좀 해. 제발. 쓸데없이 힘 빼지 말고.

단호하게 사실을 지적하자, 밀리언이 우물쭈물 물었다.

“정말, 드라키스 공략에는 참여하실 의사가 없으십니까?”

아이 씨.

같은 말을 또 하게 만드는 것도 짜증나지만 이놈은 정말 눈새인 모양이었다. 원티드 인간들은 안 나오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마는 인간들이라 굳이 말 안 해도 되는 건데.

이렇게 대놓고 물어서 곧이곧대로 대답해 주면 서운한 티를 팍팍 내서 별로란 말이다. 하지만 이미 나온 말. 어쩌겠는가.

“네. 없어요. 아. 이참에 ‘태초의 헤윰’ 쪽에도 지금 연락해서 얼른 철수하고 쉬라고 해 줄래요?”

방해 돼. 거기까지 레벨 업 시켜 주긴 너무 귀찮았다. 레벨 업 할 놈도 없어 보이고.

단호하게 이제 얼른 닥치고 가라고 무언의 압박을 주자, 밀리언이 입이 댓 발 나온 채로 걸음을 옮겼다. 저래도 머리는 좋은 놈이니, 말은 잘 들을 것이다. 실제로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유지한 쪽은 돌아보지 않고 이제 나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솨아아아―

“잠깐……!”

꽃잎과 함께 사라지며 이동을 하려는데, 나를 붙잡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지만, 그 목소리를 무시했다.

지금은, 당신을 돌아볼 자신이 없었다.

* * *

쏴아아아―

한참을 정신없이 달렸다.

목적지에 도착하고 난 뒤에도 대체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달려온 건지 알 수 없었을 정도로.

“……무명!”

“와아…….”

만연한 꽃잎과 함께 등장하자, 미처 철수하지 못한 인원들이 반색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소식이 늦었던 건지. 아니면 내가 너무 빨랐던 건지.

평소였다면 그들을 먼저 탈출시키고 나서 느긋하게 싸움을 시작했겠지만, 미안하게도, 현재의 나는 유지한 덕분에 그럴 여유가 전혀 없었다.

“비켜요.”

“아니…… 잠깐만……!”

촤아아아악―!!

“……와…… 미친…….”

아무리 덤벼도 생채기 하나 내기 어려웠던 상대가 수백 가지의 꽃잎들에 파묻혀 속절없이 상처 입는 장면은 명장면이었다. 급하게 철수해야 함에도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춰서서 감탄할 수밖에 없을 만큼. 평소라면 관람하듯 구경하는 그들을 이해해 줬겠지만, 지금은 일일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더.”

더. 더.

“강렬하게 춤을 추렴.”

아무 생각도 안 나도록. 다 쓸어버려. 꽃에게 한없이 외쳤다.

그런 내 마음에 답하듯 꽃들이 휘몰아치며 토네이도를 만들어 날카롭게 태초의 헤윰을 베어 나갔다.

태초의 헤윰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를 베어야 할지 보지도 않았다. 전투를 하면서 해서는 안 될, 치명적인 짓이었다.

하지만 이미 내 힘은 새로운 단계를 직면했고, 더욱 강한 상대들과 싸우면서 어느 정도로 힘을 풀어야 하는지를 터득했기에 다행히 위험한 일은 없었다. 압도적으로 찍어 누르면 그만이었으니.

촤아아아아―!

솨아아아―!!

얼마나 오랫동안 분을 못 이겨 힘을 뺐을까.

아직 힘은 넘치듯 남았지만, 평정을 잃어버리는 것은 그다지 오래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비로소 조금 정신이 들었다. 소모적으로 감정을 길게 쏟아내기에는 정신이 그렇게 여유롭지 못한 탓이었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숨을 고르고 보니, 그제야 상대가 눈에 들어왔다.

꽃잎들에 의해 피칠갑이 되어 있어 얼굴도 알아보기 힘들었다. 원래는 그래도 사람 같은 형상이었을 텐데, 지금은 봐서 좋을 것 없는 끔찍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오래 두고 볼만한 꼴은 아니었기에, 평소였다면 그대로 끝을 내고 고개를 돌렸을 것이다.

“……!”

그러나 지금 그러지 못한 것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은, 나를 바라보는 그 형형한 눈빛 때문이었다.

그 강렬한 눈빛을 보니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내가 공격하는 동안 저놈이 단 한 번이라도 반격한 적이 있나? 반격은 고사하고, 저항이라도 한 번 하기는 했던가?

아무리 기억을 뒤져 봐도 그런 적이 없었다.

물론 그럴 틈이 없었을 수도 있지만, 4군단장쯤 되는 놈이 한 번이라도 그 틈을 잡지 못했을까. 설령 그게 수포로 돌아갔다고 해도 한 번은 그런 발버둥을 쳤어야 정상이다. 되짚으면 되짚을수록, 의문점이 해소되기는커녕 공격을 순순히 맞고 있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만 머릿속에 떠오를 뿐이었다.

놈은 날아오는 꽃잎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했다. 꽃잎들이 날카롭게 죽음의 춤을 추는데도, 그 춤을 온몸으로 느끼듯 가만히 있었다.

분노로 이성과 지혜를 잃은 내게 시선을 집중한 채.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지?”

갑자기 내가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다. 아니, 명백히 저놈보다 더 밑에 있는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그에 저절로 불쾌한 목소리가 뻗어 나가자, 얼굴에 흐르는 피를 닦아 바닥에 뿌리며 놈이 말했다.

“무슨 짓은 그대가 하지 않았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나에게 그런 질문은 너무 가혹하군.”

촤악―!

바닥에 피가 뿌려지는 소리는 정말 소름이 끼쳤다.

“…….”

물론 그것보다 더 소름 끼치는 것은 저 얼굴이었다.

제 피를 닦아 바닥에 뿌리는 것이면서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감정도 없었다. 자신의 피가 아니라는 양.

굳이 어떠한 감정이 있다면 그건, 그냥 시야가 불편하고 말하기가 불편해 피를 닦는 수고를 해야만 하는 데에서 오는 조금의 짜증스러움일 뿐. 외에는 어떠한 감정도 없었다.

있는 대로 감정을 흩뿌리는 내가 머저리 같게.

“글쎄. 별로 안 그래 보이는데.”

“이런. 너무하시는군. 이 세계의 왕은.”

아놔. 저 자쉭이 뭐라는 거야.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아가는 민주 시민에게 이 무슨 시대를 역행하는 소리인가.

밀리언노무시키가 왕 어쩌구 하는 건 그냥 관용어로서의 ‘으뜸’을 의미한다는 게 훤히 보여 그냥 아 그래, 하고 말았지만 저 몬스터 놈은 진심으로 내가 왕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희대의 개소리였다. 정말 내가 왕이면, 랭킹 1위에 다른 사람이 오르는 순간 왕이 바뀌는 것인가.

무슨 왕이 그렇게 죽 끓듯 바뀌어?

등장만으로 월랭 1위 자리를 죽 끓듯 갈아치운 그 당사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점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현 월랭 1위가 짜증을 냈다. 어디서 멀리 성위님이 혀를 차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깔끔하게 무시했다.

“넌, 사람 같네.”

아까부터 그러긴 했지만 ‘꽃의 무희’가 아닌 윤지호로서 놈을 평했다. 제가 말해 놓고도 다시 생각해 보니 개소리 같았다. 기운부터 인간을 아득히 넘는 흉악함을 뽐내는 몬스터에게 사람 같다니.

유지한이 사람 혼을 빼놔서 드디어 미쳤나 보다. 아니면 이런 놈더러 사람 같다고 평할 리가 없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걸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내 평에 대단치도 않은 말을 들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맞는데.”

“……미친.”

내가 돌은 건가, 저게 돌은 건가. 피부부터 보라색인 놈이 개소리를 한다.

이쯤에서 녀석의 외관을 설명하면, 마치 드래곤볼 같은 만화에 나올 것 같은 비주얼이었다. 사람과 유사한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사람은 절대 가질 수 없는 미친 근육질 몸에 이마에 돋아난 흉측한 뿔. 그리고 시커멓다 못해 짙은 보라색에 가까운 피부. 어디서도 인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외계 생명체면 모를까.

그런 놈이 당당하게 스스로를 인간이라 칭하다니. 지금의 내가 제정신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제정신이었다면 더 이상 들을 가치도 못 느끼고 죽여버렸을 터이니.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다행인 일이 아니라 안 좋은 일인 것 같다. 경황이 없으니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으며 일일이 반응해주고 있지. 애초부터 들을 필요 없는 헛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점에서 최악이었다.

내 이런 생각이 보이지도 않는 것인지, 녀석이 말했다.

“그런 반응은 서운하다고. 물론, 이제는 인간이 아닌 게 맞긴 하지.”

“……뭐?”

그럼. 원래는 인간이었다는 건가?

문득, 갑자기 녀석의 이름이 생각났다.

‘태초의 헤윰’

“―!!”

“두뇌 회전이 빠르군. 그래. 내가 태초였지.”

드라키스에게 도전하고 패배해, 인간일 수 없게 된 자가.

덤덤하게 이어지는 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머리가 돌이 아닌 이상, 저 말의 진의를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가 처음이라는 것은…….

“……네가 태초였다면.”

“내 뒤를 이어, 모두가 생겨난 것이지.”

“…….”

그 뒤도 있었다는 것이니까.

그 순간 머릿속에서 갑자기 어떤 인물들이 스쳐 지나갔다. 모두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인간급의 지능을 가지고 있던 그들이. 지금은 재앙이라 불리는, 자신이 해치우고 온 4군단장들의 얼굴이 왜 갑자기 떠오르는 것인지.

거기까지 들으니 대충 감은 잡을 수 있었지만. 충격에 빠진 나를 보며 그가 진실을 여과 없이 밝혔다.

“그대가 보고 온 4군단장은 모두 드라키스에게 도전한 영웅들이다.”

“……!”

추측에 머물러 있던 생각에 못을 박듯 내뱉은 말은, 넋 나간 정신을 돌아오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드라키스는 이 세계뿐 아니라, 다른 세계까지 넘나들며 재앙으로 살아가지. 그때마다 인류는 영웅을 만들고, 드라키스에게 도전한다.”

“…….”

“봉인에 성공한 케이스도 있었지만, 실패한 경우가 더 무수히 많지.”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드라키스 혼자만으로도 벅찬데, 드라키스가 불러들이는 영향력과 그 군세까지 어마어마했으니.

만약 그가 제대로 깨어났다면 나 역시 드라키스전에 참전하지 않겠다는 생각은 꿈조차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패배한 자 중, 매우 뛰어난 영웅은 드라키스가 놔주지 않는다. 영혼을 속박하고, 제 종속으로 만들지. 그게 드라키스의 저주이자 복수이다.”

“……그럼…….”

“나를 비롯해 모두가 그렇지. 율라는 마음이 여리지만 곧은 성자였기에 희생의 칭호를, 피오레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모든 것에 분노했기에 분노의 칭호를. 그리고.”

“…….”

“자신을 해방시켜 줄 영웅이 제게 내려줄 율례를 기다렸기에, 마드라는 율례의 칭호를 얻었지.”

원래도 고지식하고 곧은 정신을 가진 마드라였기에 그는 자신의 심판을 기다렸다.

계속. 계속.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떠올리고 말았다.

[“……아. 그대가 신이었군.”]

마력 과부하로 쉽게 끝을 낼 수 있었으면서 나를 기다려 주고,

‘시시하게 끝나겠어.’

그 자신에게 동정의 여지를 주지 않도록 화를 돋우는 말을 쏟아내고, 마지막에 그리 끝이 나면서도 희미하게 미소 짓던…….

이상한 놈을.

“……아. 덕분에 의문이 풀렸어.”

자꾸 찝찝하고 더러운 기분이 남아서 서두르기만 했는데, 이제야 왜 그런지 깨달았다.

처음. 스킬을 써 염라로서 보스를 해치웠을 때, 이런 기분이었다. 룰을 벗어나고 싶어했던, 그런 소망을 품은 인간일 뿐이었던 놈을 끝냈을 때. 어쩐지 익숙하면서도 기분이 더럽다 했다.

“그럼 네가 태초인 이유는 처음임과 동시에 모든 삶의 의지를 잃어서이기 때문인가.”

공격을 하나도 피하지 않고, 강제로 존재하기만 하며 그렇게.

이놈도 정말 짜증 나는 놈이었다. 보란 듯 미간을 찌푸리자 놈이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대가 선택된 이유를 알겠군.”

“욕이지?”

“아니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하네. 우리들 중 누구와도 닮지 않은 것을.”

“…….”

“나는 태초의 헤윰. 태초임과 동시에 불사이기에 나 스스로 자신을 놓아 버릴 수도 없고, 어중간한 영웅으로는 내 목숨을 거둬 갈 수 없다. 그렇기에 태초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이지.”

거 참 쓰레기네. 속으로 덤덤하게 평했다.

그 와중에 자신에게 종언을 고할 상대 하나는 정확히 파악한 것인지 헤윰이 후련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드디어 내게도 끝이 왔군. 그대는 분명 나를 데려갈 수 있을 터이니.”

“……대놓고 환영하니 별론데.”

“내게 끝을 주게. 그리고 내 힘을 거둬 가. 분명 그대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4군단장은 드라키스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지만, 도전자에게 드라키스전을 위해 사전에 내려 주는 보상과도 같은 것이니.”

“…….”

“그대의 무운을 비네. 분명 그대는 해낼 수 있을 터이니.”

진짜 이런 것들이 제일 내키지 않았다. 어차피 죽여야 하는 거면 차라리 마드라처럼 대놓고 죽여도 될 존재처럼 굴면 좀 좋은가. 비련의 설명충들은 진짜 질색인데, 왜 자꾸 내 앞에 이런 것들만 나오는지 모르겠다.

[‘원하는 대로 춤을 춰 주자꾸나.’]

솨아아아아―!

수천 개의 꽃잎들이 한데로 뭉쳐 그대로 헤윰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자신을 향해 오는 거대한 꽃의 파도를 보면서도 헤윰은 미소를 지었다. 그토록 바라던 것이 드디어 이뤄지기에.

꽃이 헤윰을 덮치는 순간 그대로 꽃들이 생명을 빨아들였다. 불사의 제일 큰 약점은 바로 생명이었다. 끝도 없이 생명을 빨릴 수는 없기 때문에 애초에 약점일 수 없긴 했지만, 생명의 상징인 꽃들에게만큼은 그런 한계가 없었다.

“소원대로.”

형체도 없이 사라진 자리에 한 송이의 장미가 피어올랐다. 아주 예쁜, 보라색 장미였다. 내가 줄 수 있는 마지막 작별 선물이었다.

망설임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등을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 메시지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축하드립니다!】

【화룡왕 드라키스의 권속, 4군단장 중 한 축인 ‘태초의 헤윰’이 기나긴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오랜 염원을 이뤄준 당신에게 축복이 있기를.】

【‘태초의 헤윰’을 영면에 들게 한 이는, ‘이매망량의 주인’입니다.】

익숙하듯 익숙하지 않은 알림들이었다.

흥. 니들이 몬스터를 불쌍히 여기기는 하는가.

포장 오진다. 라고 생각했다.

【드라키스의 4군단장을 모두 클리어하셨습니다.】

【훌륭하게 전초전을 치른 그대들에게 무운을 빕니다.】

【4군단장 클리어 자에게, 각각 군단장의 비기가 전수됩니다.】

그와 동시에 헤윰이 예고한 알림도 떠오르기 시작했다.

【당신은 ‘율례의 마드라’를 클리어하셨습니다.】

【마드라의 비기. 더 높은 자를 위한 율례(SS)가 전수됩니다.】

【당신은 ‘태초의 헤윰’의 영면을 이루게 한 자입니다.】

【헤윰의 비기. 꺼지지 않는 생명(SSS)이 전수됩니다.】

【부디 이 비기가 당신에게 이롭길 기도합니다.】

알림을 보고 든 생각은, ‘마드라 이 새끼가 진짜 나를 기만했구나.’였다. 이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더 높은 자를 위한 율례’라는 건 자신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누르는 드라키스에게 적용할 수 있는 심판이라는 것을.

이걸 내게 사용하지 않다니. 분명 사용할 수 있었을 텐데. 처음으로 굴욕적이라는 감정이 차오를 거 같았다. 이걸 내게 남겨주고 싶었던 마음을 이해하기에 더 굴욕적이었다.

사람을 뭐로 보고 이것들이 진짜.

헤윰은 제 입으로 구구절절 이야기했던 탓에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고, 그래서 놀랍지도 않았다. 그러나 까도 까도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계속 나오는 빌어먹을 마드라 새끼 때문에 아드득― 이가 갈렸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러다 이 다 갈린다고 그만하라 만류합니다.]

“알고 있었어……?”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성위님까지 잡으려 들자, 성위님이 파르륵 날아오르셨다.

[이게 무슨 생사람을 잡고 있냐고. 내가 몬스터의 생각 따위를 알 리가 있을 거 같냐고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억울하다며 가슴을 칩니다.]

성위님이 아주 활기차게 반응해주셔서 조금 진정이 되었다. 맞는 말이기도 하고. 이제는 알림창도 내 눈치를 보는지, 그제야 뒤이어 알림이 울렸다.

【세계 최초로 SSS급 스킬을 획득한 자가 나타났습니다.】

【SSS급 스킬을 획득한 자는 ‘이매망량의 주인’입니다.】

【더욱 높은 계단을 오른 것을, 절대자를 향한 축배를!】

“……아오, 이거 진짜.”

내가 울트라 빡숑 최강자가 되었다는 소리에, 이제는 다른 의미로 실소가 터져 나왔다. 바라던 바는 아니었지만, 어째 우리 주인공님께서 나를 넘어서는 건 불가능에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이러다 진짜 평생 1위 해 먹는 거 아니야?

정말 현실이 될 것만 같은 불길한 가설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쨌든 이렇게 전초전이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본선뿐이다.

“잠이나 자러 가야지.”

그들을 믿어보고, 푹 자야겠다. 제대로 하고 올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이 고비는 그들이 반드시 넘어야만 할 산이었다. 지금 이 관문을 넘지 못하면 앞으로 닥칠 최종 극막에는 오르지도 못할 터이니.

* * *

던전을 빠져나와서도, 지한의 기분은 계속 찝찝했다. 인생에서 호의라는 것을 받아본 역사가 없는 그 ‘유지한’이다. 남이 깔아준 길을 그대로 따라 걷는다는 것은 그의 생 전체를 통틀어 전례 없는 일이었다.

물론 따지고 보면 지호가 열심히 발로 뛰어 길을 만들어준 것이 첫 번째로 있기는 했지만, 그거랑은 또 종류가 달랐다. 아무리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어도, 비헌터로서의 조력과 헌터로서의 조력 사이의 격차는 컸으니까.

밑에 있을 때는 밑에 있는 대로 무시를 당해서, 정상에 올라선 뒤로는 또 그에 따라 당연히 수반되는 시기심에, 헌터 유지한은 늘 홀로 서서 많은 것을 견뎌야만 했다.

그런 인생을 살았으니, 다른 누군가의 도움으로 가로막고 있던 벽을 넘은 일은 처음이었다.

이 상황에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성격상 유야무야 넘어갈 수도 없어, 지한은 아리송한 얼굴로 애꿎은 뒷 목만 하염없이 주물러댔다.

그런 그를 보며 유라가 말했다.

“어휴. 그런다고 적응이 되겠냐.”

“……유라야.”

“그동안 말로만 질리도록 들었지, 진짜로 남이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은 적 없었잖아.”

말은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사실 유라를 비롯한 원티드 일원들은 조금, 아니 아주 많이 속이 쓰렸다. 그들 모두 저 골칫덩어리 남자에 반해서 모인 이들이었다.

유지한을 동경하긴 했지만, 동경하기만 해서 모인 이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유지한 곁에 남은 건, 자신이 유지한에게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 가장 컸다. 힘이 되어주고 싶어서.

그리고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 비로소 이루어진 장면을 보며 모두가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 자신이, 그렇게 해주고 싶었으니까.

다른 이들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지한은 여전히 심란한 얼굴로 잡생각을 떨치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화려한 알림음이 울려 퍼졌다.

【축하드립니다!】

【화룡왕 드라키스의 권속, 4군단장 중 한 축인 ‘태초의 헤윰’이 기나긴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오랜 염원을 이뤄준 당신에게 축복이 있기를.】

【‘태초의 헤윰’을 영면에 들게 한 이는, ‘이매망량의 주인’입니다.】

그 알림이 뜸과 동시에, 부상자 치료와 상황파악을 하던 센터 직원들에 기자들까지 미친 듯이 모여 시장 바닥보다 더 소란스러웠던 아수라장이 단번에 침묵에 휩싸였다. 한참의 침묵 끝에, 하나둘씩 정신을 차리며 가차없이 입을 열었다.

“……돌았다. 진짜.”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는 듯 헛웃음까지 흘려댔다.

고작 이런 것으로 놀라기에는 이미 그인지 그녀일지 모르는 인간이 이미 너무 많은 것을 그들에게 보여줬다.

“그쪽으로 간 지 한 시간은 됐냐?”

“이동 시간도 인간이 아니네. 가는 데만 30분은 걸리겠다.”

“인간 논외로 쳐도 제정신이 아닌데.”

단지, 이제는 무슨 수를 쓴 건지. 또는 대체 어떻게 해치운 건지 그 무용담이 궁금할 뿐. 눈앞에 있어도 묻지 못했을 것이 뻔했지만 말이다. 아니, 물을 생각도 못 하게 된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었다.

【드라키스의 4군단장을 모두 클리어하셨습니다.】

【훌륭하게 전초전을 치른 그대들에게 무운을 빕니다.】

【4군단장 클리어 자에게, 각각 군단장의 비기가 전수됩니다.】

“……비기?”

마력 과소비로 얌전히 휴식을 취하며 헌터들에게 일명, ‘마력 땜빵’을 받고 있던 밀리언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비기라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게 전체 알림으로 떴다는 것이다.

보통, 스킬을 얻었을 때 전체 알림이 뜨는 경우는 두 가지였다. 최초로 높은 등급의 스킬을 따내거나, 혹은 레이드를 같이 한 동료들에게 알림이 뜨거나. 전자는 최초로 S급, SS급 스킬이 뜰 때 이미 증명되었고, 후자는 아마 같이 힘을 합쳐 클리어한 것을 존중한다는 뜻으로 추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기를 전수한다는 것을 전 세계적으로 알리다니.

대체 이건 무슨 의미인가. 자칫하면 모든 이들에게 제힘을 훤히 드러내 결국은 약점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 것을 이렇게 드러내다니. 마치 격려라도 하는 것 같았다.

이런 가능성을 주었으니 희망을 잃지 말라고.

“……드디어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군.”

세계 제일의 연금술사가, 미지를 탐구하면서 가장 현실적인 연금술사라는 족속에 걸맞게 냉소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그 말에 모두가 전적으로 동감했다.

모두의 분위기가 그리 흐르는 사이에서, 지한은 뒤이어 저에게만 울리는 알림을 확인했다.

【당신은 ‘분노의 피오레’를 클리어하셨습니다.】

【피오레의 비기. 하늘을 향한 정당한 분노(SS)가 전수됩니다.】

‘정당한 분노, 라…….’

이름부터가 저랑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분노라니. 해 본 적도 없고, 맛본 적도 없는 것. 역시 나보단 그 사람에게 잘 어울렸다. 애초부터 그 사람이 가져야 할 스킬이었나 보다.

그런데 시스템이고, 무명이고 왜 자격도 없는 제게 이런 걸 선뜻 주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지한에게 한 여자가 다가섰다.

“한층 더 성장하셨겠군요. 축하드립니다. 이든. 아니, 유지한이라고 해야 제게는 맞겠군요.”

그쪽이 더 익숙하니.

여자가 인자하게 미소를 지었다. 때 묻지 않은 깨끗함이 꼭 성모 마리아를 연상시키는 미소였다. 단순한 흰색 원피스 하나 입은 것뿐인데도, 그녀의 모든 것이 그리 보이게 만들었다.

그 순간, 그들은 그녀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성녀.”

“……루치아 라이블리.”

이 시대의 성모 마리아. 아니, 막달라 마리아.

월드 랭킹 8위이자, 최상위 힐러.

성녀. 루치아 라이블리가 그들을 향해 반갑게 인사했다.

“네. 모두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 * *

성녀. 루치아 라이블리.

국적은 미국이었기에 미국에 소속되어 있지만 성녀의 특성상 그녀를 구속하기도 쉽지 않았을뿐더러 그녀를 원하는 이들은 전 세계에 너무나 많았기에 함부로 대할 수도 없었다.

신이 전부를 주지 않듯, 주 능력은 치유에 관한 능력이고, 공격력은 그다지 강하지 않다는 평이 지대했기에, 최고의 헌터들 중에서도 위험에 가장 많이 노출되어있는 각성자였다.

그런 특성상, 그녀는 기본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활동을 하며 세계를 돌아다녔다. 성녀의 타이틀 때문인지, 성격 탓인지 누군가를 계속 구하면서.

그런 그녀가 지한의 몸 상태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상태가 가장 심각하신데, 먼저 치료해 달라는 말도 없으시다니……. 여전하시네요.”

……말을 해도 폄하 당하기 일쑤인 삶에 원체 익숙한 데 더해 무명을 떠올리느라 넋이 나가 그랬다는 설명은 굳이 하지 않았다.

사실 여기 있는 이들 중 가장 부상이 심한 건 밀리언과 지한이었다. 가장 최전방에서 싸우며, 가장 많은 체력을 소모했으니. 그중 술사 특성상 원거리에서 싸우는 밀리언보다 근접전을 주로 하는 검사인 지한이 받은 타격이 더 큰 건 당연했다. 엘릭서를 들이부어 주어 처음에 비해 몰골이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속이 가장 너덜거리는 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 미련함을 훤히 들여다본 루치아 라이블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앉으세요.”

생각지도 못한 상대의 정체 때문인지, 아니면 성녀라 거부할 수 없는 기백을 가진 것인지. 그녀가 앉으라 하자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지한이 다소곳하게 자리를 잡고 앉자, 루치아가 두 손을 모으고 스킬을 시전했다.

“하나뿐인 나의 아버지께. 당신의 딸이 소망합니다.”

“…….”

“부디 이 가련하고 정의로운 이에게 자비로운 안식과 축복을.”

【성녀 특성 스킬. 상위 주문. ‘성녀의 기도’가 발동합니다.】

그와 동시에 백색의 빛이 부드럽게 지한을 감싸며, 순식간에 상처투성이인 몸을 회복시키기 시작했다.

“……!”

순식간에 일어나는 변화에 지한은 진심으로 놀랐다. 아무리 치료를 받아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던 영구적인 흉터들과 내상까지 말끔히 치유되다니. 그간 포션의 내성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던 상처들이 눈앞에서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이건 스킬이 아니었다. 기적이었다.

왜, 그녀가 성녀라 불리는 것인지, 지한은 그것을 몸소 체험했다. 더불어 그녀가 무명만큼이나 베일에 싸여있는 이유도. 이런 능력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순간, 단명할 것이 분명하니.

“……감사합니다.”

“같은 한국인으로서 유지한 씨께는 꽤나 애착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한번은 꼭 이렇게 치료해 주고 싶었어요.”

그렇다고 해도, 한국인이라는 정보조차 몰랐다니. 같은 최상위 월드 랭커였음에도 놀라웠다. 물론 미국의 입장에서는 그녀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밝혀 봤자 좋을 것이 하나 없었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행동이긴 했지만.

“꼭, 보답하겠습니다.”

“하지 마요. 이미 많이 했어요.”

당신은 이제 그만해도 돼요.

인자하지만 더없이 단호하게 성녀가 단언했다. 마치 그녀처럼.

순간 지호를 보는 것 같아, 지한의 입가에 조그마한 미소가 퍼졌다. 생각만 해도 미소가 퍼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으니.

【세계 최초로 SSS급 스킬을 획득한 자가 나타났습니다.】

그 순간, 새로운 알림이 모든 이에게 울려 퍼졌다.

【SSS급 스킬을 획득한 자는 ‘이매망량의 주인’입니다.】

【더욱 높은 계단을 오른 것을, 절대자를 향한 축배를!】

“이제, 신의 길을 걷는군요. 우리의 절대자는.”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우리의 절대자가, 더 높은 경지를 밟으며, 신의 경지에 오르고 있다는. 모두의 가슴을 웅장하게 만들기 충분한 알림이었다. 성녀조차 설렘을 감추지 못했는데 오죽했을까.

그리고 이 중 오로지…….

“루치아 라이블리.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예?”

한 남자만이, 신의 길을 걷는 절대자가 아닌, 다른 사람을 기적 앞에서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 * *

“루치아 님. 어째서 이런 말도 안 되는 부탁을…….”

“저 유지한이 부. 탁. 이란 걸 하는데 어떻게 안 들어줄 수 있어.”

그들은 유지한을 매우 잘 알았다.

직접 가까이서 마주한 적이 없을 뿐. 그와 자신이 같은, 한국인이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상위 월드 랭커 중 가장 남다른 행보를 걷고 있는 지한을 모를 리 없었다.

어떻게 인간이 저렇게 할 수 있나. 성녀로 살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기에 항상 그를 주시했고, 궁금해했다. 자신이란 존재를 마주하기만 해도 그에게는 짐이 될 수 있었기에 그간 자제하고 있었지만.

사실 루치아도 조금 놀라웠다. 그녀가 보아온 지한은 부탁이란 것 자체를 하라고 해도 할 줄을 모르는 인간이었다. 할 수 있는 부탁은 기껏해야 ‘민간인을 대피시켜주세요. 부탁합니다.’랄까.

그런 인간이 부탁이라니. 순간 정말 놀랐다.

‘어떤 부탁인가요?’

혹시나 해서 물었다.

뭐 다른 부상자도 이렇게 치료를 해달라던가, 하다못해 자신의 다른 동료들도 봐 달라는 요청일 수도 있으니까. 그녀뿐만 아니라 모두가 이게 유지한이 할 수 있는 부탁의 전부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아득히 벗어나, 그는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사적인 부탁입니다. 아주 개인적인.’

루치아는 제 두 귀를 의심했다. 이 남자는 제가 뭐라고 하는지 지금 알고나 있는 건가.

완벽한 플러팅 대사에 그녀의 동료가 넋이 나가는 것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그는 루치아의 손을 꼭 잡은 채 말했다.

‘제게는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말하고는 있었지만,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 순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이건 굉장히 사적인 부탁이 맞았다.

한 남자로서, 제가 소중히 여기는 이를 위한 부탁.

그렇기에 그녀는 기꺼이 따라왔다. 대체 저 유지한을 함락시킨 자가 누구인지가 약간 궁금하기도 했고.

그러나 그런 것은 전혀 모르고 지한의 플러팅 대사만 기억하고 있는 그녀의 동료이자, 호위인 제이슨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도착했습니다.”

와중에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얼결에 따라온 레쓰비와 민현, 유라, 그리고 지우는 진짜 옆집을 내줬다는 것에 혀를 내둘렀다. 특히 지한의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는, 민현은 더욱더.

제 보스가 이렇게 철두철미하고 막무가내인 인간일 줄이야. 평소에는 나사라도 하나 풀린 건 아닐지 걱정이 될 정도로 퍼주기만 하던 사람이 이럴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역시 사랑에 빠진 남자는 예측할 수가 없었다.

각자의 복잡한 마음 사이에서, 문 한 번 두드리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 찬찬히 심호흡을 한 지한이 부들부들 긴장한 손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지호 씨. 접니다.”

그래도 말은 떨리지 않고 잘 나오는 모양이었다.

칭찬해 줄 법했다.

원래도 양이었지만 지호 앞에서는 주인을 맞이하는 개처럼 온순해지는 지한의 모습에 저거 왜 저러냐면서 제이슨이 쳐다보는데, 루치아는 낯익은 이름에 귀를 쫑긋 세웠다.

‘지호?’

흔한 이름이었다. 대한민국에 지호만 해도 몇인가.

하지만 기억 속에 워낙 강렬한 지호가 있다 보니 반사적으로 그 생각부터 들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루치아는 조금 전의 생각을 바로 부정했다. 그 ‘지호’가 헌터랑 엮일 리가 없었으니.

친구들이 위험해져서가 0순위 이유였지만, 연락도 잘 하지 않은 이유는 그 탓도 있었다. 루치아가 씁쓸함에 입맛만 다시던 중, 드디어 문이 열렸다.

철컥―!

“누구시죠?”

하지만 나온 이는 지호가 아니라 여랑이었다.

“……누구십니까?”

난생처음 보는 미인에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고, 지한은 기대했던 이와는 전혀 다른 이가 나와 다른 의미로 눈을 크게 떴다.

그 앞에서 여랑은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얼마 전부터 이곳에서 일하게 된 여랑이라고 합니다. 아가씨 지인분들이신가요?”

그 답을 들으며 윤지우는 생각했다.

와. 아가씨래. 윤지호. 대박. 돈 벌면 바로 시녀, 아니 가사도우미부터 고용해서 인생 편하게 살겠다더니.

허언이 아니었구나. 새삼 제 누나의 진심에 놀라며 윤지우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아. 나도 여기 묻어가야 했는데―!!

지호가 알면 기겁할 생각이었다. 그 사이, 지한이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지호 씨는 안에 있습니까?”

“네. 그런데 지금 주무시고 계셔서……. 들어오시겠어요?”

그래도 꽤 친분이 있어 보이는 손님을 내칠 수 없어 여랑이 문을 열어 주었다.

잠든 사람 집에 들어가는 건 예의가 아닌 걸 알지만 성녀까지 끌고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갈 수도 없다. 결국 지한을 비롯해 모두가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집은 아주 정갈했다. 윤지호가 잘 치울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지우는 곧바로 미녀 가사도우미의 실력에 감탄했다. 다른 이들은 지한과 같은 구조이지만 확연히 다른 느낌의 집을 구경하느라 눈을 굴리기 바빴다. 그 중 지한만이 올곧게 침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새액― 새액―

조금만 가까이 가도 깊은 잠에 빠진 듯한 숨소리가 들렸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리는 것 같은 미약한 소리에 지한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생각보다 상태가 나쁘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성녀에게 한번 보여 봐야… 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을 말로 꺼내기도 전에 지한은 말문이 막혔다.

“……헐. 미친.”

방금 전까지 자연스레 구사하던 인자한 말투와 상냥한 미소는 어디 갔는지. 지호를 내려다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굳어있던 성녀가 대뜸 비속어를 시전한 탓이었다.

“……루, 루치아?”

제이슨 역시 난생처음 보는 루치아의 모습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화가 난 것인지, 조급한 것인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루치아는 지호의 앞에 도착해, 그대로 이불을 걷어 버렸다.

“윤지호. 이 기집애가! 여기서 왜 태평하게 자고 있어!!”

상대를 매우 잘 아는 것 같은 행동과 대사에 모두가 깜짝 놀라 말릴 틈도 없었다.

갑작스럽게 이불을 뺏기고 찬바람이 들어오자 반사적으로 튀어 올라 기상한 지호가 아직 다 떠지지 않는 눈을 힘겹게 끔뻑거리며 말했다.

“아이 씨……. 대체 누…… 응……? 말자……?”

상대를 보자마자 튀어나오는, 그러나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킬 정도로 개성 넘치는 이름에, 루치아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야, 그 이름 버린 지 오래거든?!”

자신의 이름이라고 제 입으로 시인하는 대사였다.

그 말에 상대가 자신이 아는 이라는 것을 확신한 지호가 경계심을 풀고 아예 눈을 반쯤 감으며 다시 꾸물꾸물 몸을 눕혔다.

“한번 말자는 영원한 말자…….”

“잠이나 깨고 얘기해. 기집애야.”

“아……. 좀만 더 자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모두가 붕어처럼 눈만 끔뻑였다.

“아이…… 왜 사람 잠도 못 자게 해…….”

“5년 만에 보자마자 그 소리를…… 이 화상이 진짜…….”

대체 이게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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