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5장. 당신이 나빠요.(1)
16장. 당신이 나빠요.(2)
17장. 성녀. 루치아 라이블리.(1)
18장. 성녀. 루치아 라이블리.(2)
15장. 당신이 나빠요.(1)
“대체 이게 무슨…….”
서걱―!
끼이이익―!!
촤아아악―
유지한이 눈앞에서 몬스터를 베어 죽여, 몬스터의 피가 바닥에 낭자하다 못해 내 발치까지 흐르고 있음에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바로 앞의 그 풍경보다는 더 멀리, 영화의 한 장면에서나 볼 법한 리얼 블록버스터 현장에 더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으니까.
진짜, 실제로 처음 봤다. 불타서 모든 게 녹고, 무너지고, 짓밟힌 도시를.
그렇게 보면 대한민국은 참 살기 좋은 나라였다. 2N년 평생을 사는 동안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테러라든가, 미사일이 어디 섬에 떨어져서 난리가 났다는 등의 뉴스를 듣기는 했어도 직접 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전부 남의 이야기였다.
그 정도로 대한민국은 거의 늘, 이런 것에 대해선 매우 평화로웠다. 때문에 이 같은 풍경은 영화에만 있을 것이라 은연중에 생각했나 보다.
이렇게 놀라운 것을 보면.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놀란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제 얼른 일어나 대처를 하라 걱정하며 닦달합니다.]
넋 나간 나를 좀 봐주고 봐주다 더 이상은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는지 득달같이 일으키는 목소리에 비로소 조금 정신이 들었다. 역시 나를 깨우는 건 분노해 방방 뛰는 성위님이 최고였다. 뇌에 다이렉트로 찡찡거리니까.
“길드장님.”
“…….”
챙―!!
일단 상황 파악을 위해 우리의 주인공님을 부르는데, 그는 내게 다가오는 몬스터를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는 듯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나를 지켜주려 하는 거니 이해하는 것이 당연…… 은 개뿔. 급박한 상황이다 보니 마음에 여유가 없어졌다. 그래도 상대가 유지한이니만큼, 나름대로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며 다시 그를 불렀다.
“유지한.”
그럼에도 차가운 기운이 낭낭한 목소리는 다행히도 그의 귓가에 꽂혔는지, 전투 도중임에도 반사적으로 그가 휙―!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호 씨?”
아니. 이 호구야. 답을 재깍하는 건 좋은데, 눈앞에 있는 건 처리해야지. 한심함에 절로 한숨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옆에 굴러다니는 돌을 주워 곧바로 있는 힘껏 던졌다. 날아간 돌은 때마침 유지한에게 덤비려는 몬스터에게 적중했다.
꿰엑!
고작 돌멩이가 무슨 큰 타격을 줄 수 있겠나 싶겠지만, 예상치 못한 공격은 언제나 방심을 유발하는 법.
단 1초 만이라도 멈추게 하면 충분했다.
서걱―
끼에에엑―!!!
“……진짜 이래서 혼자 어디 내보내겠어요?”
그 뒤는 곧바로 상황을 알아챈 유지한이 처리해 줄 테니까.
아직은 일코를 포기할 생각이 추호도 없기에 그에게 막타를 넘기고, 나는 정신이 없어 보지 못했던 알림들을 서둘러 확인했다.
【게이트가 출현했습니다.】
【게이트에 진입하셨습니다.】
【게이트를 파악 중입니다.】
【‘화룡왕 드라키스’가 현신했습니다.】
【‘화룡왕 드라키스’의 최종등급은 SSS급입니다.】
【세계 최초의 SSS급 게이트입니다.】
【인위적인 게이트 발동으로 ‘화룡왕 드라키스’의 행동에 제약이 걸려있습니다.】
【활동 시간 6시간. 휴식 시간 18시간입니다.】
【제약은 3번입니다.】
【완전히 게이트가 해금되기까지 앞으로 7일입니다.】
【행운을 빕니다.】
눈앞이 아찔한 알림들이었다. 너무 많아서 읽기조차 힘든데, 하는 얘기마저 아주 가관이었다. SSS급이라니. 아직 그게 등장하려면 분명 한참 멀었을 터인데.
아직 유지한이 2차 각성을 하기도 전이다. 2차 각성을 완전히 끝내고 그 힘을 다루는 게 익숙해졌을 때쯤 등장하는 SSS급 게이트가 왜 지금…….
설마 나 때문인가? 내가, 유지한의 운명에 개입해서?
“그러게나 말입니다.”
가장 가능성 있는 가설이라 절망스러워지려는 찰나, 마치 그런 나를 알기라도 한 듯 유지한이 트레이드 마크인 멍청한 미소를 지으며 반쯤 진심이었던 내 말에 화답했다.
푸핫―
“뭐예요, 뒤늦게.”
대답마저 참 유지한스러워서, 정말 웃을 상황이 아닌데도 웃음이 터져 버렸다.
내 모든 고민들과 걱정은 이 멍청한 미소 앞에서는 전부 하잘것없게 느껴졌다. 참 이상한, 아니, 참 대단하신 주인공님의 위력이었다.
SSS급 게이트가 터질 때, 소설에서의 그는 이미 많은 시련을 거쳐온 터라 그 앞에서도 덤덤하고 견고했다. 하지만 그건 그만큼 풍파를 맞을 대로 다 맞아 깎여나간 나머지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정의심과 희생정신으로, 자신을 영웅이라 불러 주는 이들을 위해 억지로 나아가는 모습은……. 정말 사람을 빡치게 했었다.
그에 비해 지금 유지한은 어떤가. 설령 길을 잘못 들었긴 했어도, 그때보다 훨씬, 아니 비교조차 할 수 없게…….
꼬집―
“……아파요, 지호 씨.”
행복해 보이니까.
그래. 그것만으로도 내겐 의미가 있었다. 그러니 내가 앞으로 할 일은, 절망과 삽질이 아니라 앞날을 개척하는 것이었다.
갈 길을 정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응. 아프라고 하는 거예요. 일단…….”
“……?”
“상황 설명부터 정확히 해 줄래요?”
안 되면 되는 다른 사람 불러와요.
* * *
“윤지호―!”
“실장님!”
“다행이다. 무사하셨군요!”
유지한이 안내한 곳으로 따라가자, 익숙한 안면들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격한 환영을 해 주었다. 전원이 다 모인 걸 보면 아무래도 이번에도 또 내가 꼴찌인 모양이었다.
알 수가 없네. 이중에서는 내가 최고로 센 부동의 1위인데 왜 맨날 마지막으로 나오는지. 최강자 특권인가? 아니, 보통 제일 강한 사람이 가장 먼저 나오는 거 아닌가? 시스템이 내 일코를 도와주는 것은 아닐 테고…….
이런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날 두고 이제야 게이트에서 나오셨다는 지한의 설명을 들은 호구들이 너덜너덜한 얼굴로 해맑게 외쳤다.
“제일 늦게 나오셔서 천만다행이에요!”
뭐래.
월랭 1위가 가장 늦게 나와서 다행이라는 세계 최고의 헛소리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래, 아무것도 모르니 그럴 수 있지. 아니었다면 이게 미쳤나 싶었을 거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모든 건 다 님 뜻대로지만, 일코 일코 그렇게 외치더니 이제는 때려치울 생각이냐며 귀를 후비고 심드렁하게 혀를 찹니다.]
아. 맞다. 일코.
너무 생소한 광경을 봐서 그런가, 표정 관리와 감정 제어가 되질 않았다. 조금의 감흥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내가 나를 너무 몰랐나 보다. 아직도 눈앞에 펼쳐졌던…… 불타는 하늘과, 뜯어먹힌 시체들이 눈에 선했다.
물론 그들에게 동정심이 일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는 나는 여전히, 인간으로는 무언가 결여되어 있듯 개개인의 사정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그저 드는 건 혐오감과 불쾌함. 난생처음 겪어보는 풍경에 대한 생소함과 생경함뿐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맛보고 싶지 않은.
오죽했으면 그냥 일코를 해제해 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겠는가. 지금 당장에라도 일코고 나발이고 다 쓸어 버리면 더 이상 이런 꼴은 안 볼 수 있을 텐데.
특히 나보다 먼저 도착해 곧바로 전투에 합류한 탓에 있는 대로 꾀죄죄해진 이들을 보니 더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중에서도, 얼굴만 빛나는데 온몸이 피로 뒤덮이고 너덜너덜해진 옷을 입고 있는 호구를 보니까 혈압이 올라서 제가 미쳐가는 것 같았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께서 일단 몰래 구입해서 포션이라도 뿌리는 것이 어떻겠냐 조심스럽게 첨언합니다.]
거지도 저보다는 좋은 꼴을 하고 있을 것 같은 꼴을 보고 있자니 무신경한 성위님도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는지 내게 이런 제안까지 해 왔다. 내가 일코 한다니까 나보다 더 적극적으로 막아주던 분까지 이러니 이들의 꼬라지는 알 만했다.
보기만 해도 속 터지는 몰골이라, 더 보기도 짜증 나 나는 후딱 화제를 전환했다. 마침 지금은 공격도 전부 물러갔기에 가능하기도 했다.
“그래서, 일단 누가 현재 상황 좀 알려 줄래요?”
저 호구는 제대로 설명 안 해 줄 테니 빼고.
얼른 말해 보라고 하자, 자연스럽게 길드장을 뒤로 물린 이들이 하나둘씩 설명을 해 주려 했다.
“다행히 저희가 도착했을 때는 막 게이트가 열렸던 참이라 바로 응전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랭커들도 뒤이어 속속들이 도착했고요. 하지만. 문제는…….”
“그래도 그거론 턱도 없었다는 거군요.”
어찌 보면 매우 당연했다. 아무리 대한민국이 헌터 강국이라지만, 지금 현재의 수준으로는 절대 당해낼 수가 없다. 아직 아무도 2차 각성을 하지 않은 이 단계에서 무슨 수로 SSS급 게이트를 감당한단 말인가. 전 세계 모든 헌터들을 끌어모아도 자신할 수 없었다.
아, 물론 일단 내가 없다는 전제하에.
사실 나도 처음인지라 SSS급 게이트를 클리어 할 수 있다는 자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왠지 여전히 질 것 같지 않았다. 아직까지 한 번도 제 실력을 백 프로 써 본 적이 없다 보니.
“그래도 조금만 더 하면 어떻게 될 거 같아요!”
“맞습니다. 공격이 점점 먹히고 있어서.”
“…….”
아마 그건 솜방망이 공격이라 그냥 맞아 줘서 그런 걸걸.
이래서 초보가 젤 무섭다고 하나 보다. 아무리 기감이 발달해도 경험이 없다 보니 판단을 너무 쉽게 하니까. 역시 뭐니 뭐니 해도 경험은 인정해 줄 수밖에 없었다. 모든 헌터들이 랭킹만이 힘의 척도라고 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고.
어쨌든, 이들이 이만큼 엉망이 될 때까지도 게이트를 막지 못했다는 것은 꽤나 심각한 문제였다. 시스템의 알림으로 보아 이건 SSS급이라도 아직 완벽한 게 아닌 것 같던데.
보스가 힘의 제약이 생겼다는 건, 산하 부하들도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제약을 보아 힘의 반 이상을 못 쓰는 상태인 거 같은데, 지금 거의 대한민국의 모든 네임드 헌터를 끌어모아 왔다고 할 수준의 인원으로도 막는 것조차 못하다니.
그렇다는 건 거의 전 세계의 네임드 헌터를 끌고 와야만 겨우 상황이 반전될 기회가 있다는 것인가.
심각하게 머리를 굴리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썩을 것 같은 멍청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여간 헌터란 것들은……. 필요할 때는 없고, 기껏 와서도 제대로 막지도 못하고 말이야! 나라의 안전을 위해서 헌신이란 걸 할 줄도 모르고……”
단어 하나하나에서 아주 썩은 내가 진동했다. 가까이도 가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하고, 말을 섞기도 싫어지는 악취였다. 돌아보니 정부 관계자인지 양복을 입은 이 하나가 거만한 자세로 서 있었다.
“……저걸 뚫린 입이라고…….”
유라가 이를 가는 것이 들려왔다. 나는 상대하기 싫다는 내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보다 완벽한 선택을 했다.
“괜찮아요. 어차피 저런 놈이 젤 먼저 뒤질 거. 귀찮게 상대하지 말죠.”
입에 악취가 물들면 어떡해요.
“…….”
“……? 왜요?”
나는 분명 곱게 잘 표현했다 생각했는데,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영문을 몰라 왜 그러냐고 순진무구하게 묻자, 세상 할 말이 많은데 그걸 전부 잃은 사람들처럼 모두가 나를 바라보다 이내 아니라고 말하며 얼버무렸다.
괜스레 억울해졌다.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고럼고럼, 울 화신이 당연히 옳다고. 뭐 저런 걸 상대하냐며 당신을 지지합니다.]
봐 봐. 성위님도 이러는데! 성위님 말을 보여줄 수도 없고. 뚱해져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지한이 앞으로 나섰다.
“현재 피해 규모는 파악되셨습니까.”
참으로 정중하고 바른 물음에 탄복해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아니지 이 호구야. 이럴 때는 ‘뭐 어쩌라고. 니 일이나 했냐, 쓰레기야.’라고 하면서 지금 누가 갑인지 모르냐는 식으로 찍어눌러야 한다고!
저런 타입은 정중하게 대해 줄수록 날뛴다는 것을 매우 잘 아는 나로서는 탄식할 수밖에 없었지만, 애초에 그런 걸 저 호구에게 기대하는 것도 무리가 매우 많이 있긴 했다. 짜증 나지만.
아니나 다를까, 정중한 요구에 아주 기세등등해진 개진상(이라 쓰고 폐기물이라고 읽을) 쓰레기가 아주 살판이 났다.
“파악은 무슨 파악!! 지금 꼴 안 보이나! 이렇게 완전히 난장판이 됐는데!”
응. 그러니까 일도 안 하고, 숨어 있다가 책임 전가하려고 나타나신 거라고.
진짜 상대할 가치도 없는 미물이었다. 정말 상대하기 싫었지만, 내버려 뒀다가는 유지한 혼자 혼자 아주 옴팡지게 다 뒤집어쓸 것이 뻔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네. 그러니까 현재 피해 규모 파악이 전혀 안 되셨다는 건가요.”
“……자넨 뭔가?”
“어머, 고위급 인사 분은 아니신가 보네요. 절 모르시다니.”
역시 일을 못 하는 만큼 지위도 허접하신가. 만찬회에 초대된 사람 중 하나를 모르다니.
그딴 만찬회였지만, 어쨌든 좌석을 받는단 건 정부가 나라의 핵심이 되는 이들이라 여긴다는 의미니만큼, 고위급 인사는 물론 웬만큼 중요 자리에 있거나 정보가 빠삭한 이들이라면 나를 모를 리가 없을 터였다.
그 증거로 만찬회에 참석했을 때, 아무도 처음 보는 내게 왜 여기에 있냐거나 신분을 묻거나 하지 않았다. 도리어 신중하게 주시하는 시선. 나를 모르는 이가 전혀 없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이놈은 그게 아니니…….
“가서 책임자나 좀 불러주시겠어요?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는 분이 필요할 거 같네요.”
이름도 알 가치도 없는 피라미는 좀 빠져라.
그래도 나름 상처받지 않게 사회생활 만렙 스킬로 조곤조곤 이야기해 줬는데, 진짜 이 정도조차 알아들을 대가리도 없는 건지 쓰레기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내 주변의 헌터들을 의식했는지, 다가오진 못하고 ‘저, 저―!’라며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다 뒷목을 잡았다.
누구한테 손가락질이야. 손가락 분질러지고 싶나.
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난 마음이 넓은 사람이니까 거기까진 참아 줬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내 화신은 이럴 때는 왜 이렇게 너그럽냐며, 어서 내게 사이다를 내놓으라 아우성을 칩니다.]
성위님이 그냥 시원하게 분지르라 종용했지만, 그럴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뭐 저런 거에 내 손을 더럽혀. 어차피 갈릴 거.
【성위에게 선물을 보내시겠습니까?】
【‘톡톡 튀는 사이다’를 구매하셨습니다.】
【해당 물품을 성위 ‘이매망량’ 님께 전달합니다.】
옛다, 사이다.
성위에게 시답지 않은 유머러스함을 보여주며 느긋하게 콧노래를 불렀다. 나의 이 여유로움은 근거가 있었다.
왜냐.
퍽―
“악―!! 헉! 총리님!!”
“이런 미친 새끼가 어디서……!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이제 막 선출된 의원이라 아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미숙한 모습을 보여드려 송구합니다.”
“아. 알아서 처리해 주시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 * *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아. 그래. 이게 맞지. 진짜.
정상인의 정상적인 소리를 들으니 십 년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것 같았다. 역시 사람은 대화가 통하는 사람과 대화를 해야 한다.
“다시 뵈니 너무나 반갑네요. 총리님.”
“저도 그렇습니다. 실장님을 포함해 모든 헌터 분들이 귀환하셔서 어찌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초기에 합류하긴 했지만, 이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게이트가 열린 상태여서 그전에 이미 벌어진 극심한 피해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것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던 총리는 헌터들이 하늘에서 극적으로 내려왔을 때, 정말 천사나 구원자가 내려오는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급히 지하 대피소로 숨어들었던 국회의원들이 현재 원성을 피하기 위해 여론을 열심히 조작 중입니다. 최대한 막고 있긴 하지만 아마 전부 막아낼 수는 없을 겁니다. 죄송합니다.”
“아아……. 그건 어쩔 수 없죠. 이해합니다.”
물론 가만히 두지는 않을 거지만.
권력의 최상층에 올라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렸던 이들이다.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고 가진 걸 조용히 내려놓을 수 있을 리가 없지. 가질 만큼 가졌으면 이제 발악은 기본 옵션 아닌가. 너무 진부해서 놀랍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이걸 그냥 넘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나는 총리의 상황 정리를 들으면서 조용히 할 일 리스트에 그들의 처분을 슬쩍 올려놓았다.
“기세가 잠잠해진 걸 보니 최초 발생으로부터 6시간이 지났나 보군요.”
“그럼 현재 우리가 이미 게이트 공략 기회 한 번을…….”
“네. 이제 저희에게 남은 기회는 두 번입니다.”
알고는 있지만 확인 사살을 당하니 기분이 더러웠다. 중간 단계 없이 점프해서 SSS급이 나올 거였으면 난이도라도 좀 낮춰 주든가. 진짜 양심이 없었다. 이 미친 노답 밸런스에 격하게 별점 테러를 하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래도 제약이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냐며 당신을 다독입니다.]
아. 그건 그래. 진짜 그것조차 없었으면 당장에 챙길 거 챙겨서 튀었을 거다. 이것저것 전부 다 희생해서 이 나라를 지킬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으니.
“그럼 현재 전투 가능한 지원 인력은 어떻게 되죠?”
“그건 내가 설명할게.”
이젠 아예 이런 식으로라도 눈에 띄려고 작정했는지 이로운이 다가왔다. 빌어먹을 로판 게이트에서의 일로 이놈에 대한 일말의 정까지 모두 떨어져 나간 상태라 반사적으로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이제는 익숙해지기라도 한 건지 이로운이 내게 덤덤히 말을 건넸다.
“녹음의 경우 최정예들은 손실이 거의 없어. 하지만…….”
“하지만?”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먼저 게이트를 상대하고 있던 메인 특공대 밎 주력 헌터들이 모두 중상이야.”
“……!!”
“다들 목숨에는 지장이 없지만 한동안 안정을 취해야 해. 다음 활동 시간부터는 전력이 되지 못할 거야.”
“……빌어먹을.”
절로 욕이 쏟아져 나왔다.
사감은 던져두고, 녹음은 아주아주 중요한 전력이었다. 원티드가 가장 이름을 날리고 있긴 하지만, 현재 이 대한민국에서 ‘쓸모 있는’ 헌터를 가장 많이 데리고 있는 건 바로 녹음이었으니까.
따져보자면 마법사와 연금술사 집단으로 이뤄진 유예가 길드원 수는 가장 많고 녹음보다 덩치도 크지만, 전력으로 쓰기에는 아직 부족한 이들이 대다수여서 전력이 되지 못했다.
총리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대한민국 모든 헌터를 끌어모아 와도 자신할 수 없는 싸움인데, 메인 전력에 이다지도 큰 구멍이 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현재 녹음은…….”
“활동할 수 있는 건 나와 유해한, 장하리, 폭검, 씹선비까지야.”
“거참 좋은 소식이네.”
와. 망했다. 진짜 시작부터 제대로 망트리였다. 진짜 다 갖다 버리고 확 튈까.
짜증 나서 생각이 온갖 데로 튀어 오르는데, 그런 내 마음이 훤히 보이는지, 뭐 감추려 하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그런 나를 보고 불안한 얼굴이 된 총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녹음이 그렇다 해도 다른 분들이 아직 많이 남아 버티고 있으…….”
“남지 않았습니다. 총리.”
누구도 총리를 도와주지 않으려 작정한 듯, 연이어 국방부 장관이 나타나 말을 끊었다.
“현재 국군의 각성자 중 20%가 중상을 입어 전투 불능 상태입니다. 센터의 헌터들 역시 피해가 막심하더군요.”
계속 상황을 파악하고 있지만 피해 규모가 점점 늘고 있다고 보고한 국방부 장관이 갑자기 우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현재 가장 피해가 적은 건 원티드인 것 같더군요.”
“…….”
어쩌라고.
나를 내려다보는 눈길이 무척이나 더러워서 순간 쏘아붙일 뻔했다. 본능적으로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저 뒤에 나올 말은 분명 매우 기분을 잡치게 할 개소리일 것이 뻔하다고.
뭐, 기분은 이미 잡치긴 했다.
피해가 적어 보이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우리가 몇 명이나 된다고.
애초에 원티드는 게이트가 터질 때 국내에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기본이 네임드 천지이기 때문에, 전력의 대부분이 만찬회에 참여해 있었으니까. 그래서 소수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게 무슨 피해가 가장 적다는 거냐. 애초에 그냥 적은 거지.
그리고 전투에서도, 기껏해야 열 명쯤 되는 우리 애들이 잘나서 잘 때리고 잘 피한 건데, 그게 그렇게 못마땅해서 지금 저런 소리를 하는 건가?
아니나 다를까, 이어 나오는 말이 가관이었다.
“해서, 이번 게이트 공략은 원티드가 메인으로 나서야겠습니다.”
“…….”
맡겨 놨나. 누가 보면 우리가 그 자리 맡아놓은 줄 알겠네. 너무 어이가 없어 순간 말을 잃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인지 넋 빠진 얼굴로 망할 새끼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당연히 희생해야 한다고 말하는 당당함에 격하게 명치빵을 날려주고 싶었다. 심지어 정치적 수작질이 훤히 보여 더 빡이 쳤다.
수작질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원티드가 메인으로 선다는 걸 발표만 해도 여론은 그쪽으로 쏠릴 것이고, 자신들을 향한 원성을 잠재우기엔 이것만 한 게 없을 것이다. 잘 되면 거기에 플러스로 감투만 더 씌우면 되니까.
이른바 ‘원티드 몰빵, 우리 모두 해피’ 작전이었다. 매우 죽여버리고 싶었다. 자연히 그를 향한 내 대답도 건방져졌다.
“우리가 왜요?”
“그야 당연히 헌터 아닙니까. 헌터는 국민을 지킬 이유가 있습니다.”
누가 그러든?
진짜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도 이게 제일 이해가 안 갔다. 모든 소설이 하나같이 그렇게 말하는데, 헌터는 왜 국민을 지켜야 하나. 국민이 헌터들에게 무엇을 해 주었다고.
심지어 이곳은 헌터들 대우도 최악이었다. 열등감 덩어리들이 만들었으니 뻔했다. 적어도 그런 대우를 해 놓았으면, 혜택을 받을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다 닭대가리들인지. 이참에 진짜 싹 다 죽어버렸음 싶었다. 망할 화룡인지 뭔지 하는 놈이 이것들 먼저 안 죽여 주나.
“지호 씨. 진정해요.”
풀풀 피어오르는 살기가 보이는지 지한이 내 어깨를 붙잡고 나를 달래왔다. 대체 왜 이런 때까지 호구인 걸까, 이 남자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지한의 말이 맞았기에 침착하게 살기를 잠재웠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난다는 얘기는 아니다.
“국방부 장관이시면 국민의 녹을 먹고 사시는 분인데 먼저 모범을 보여도 모자랄 판에 이런 소리나 하시다니. 대한민국의 미래가 암담하군요.”
“뭐! 난 나라를 위해……!”
“아. 그러고 보니 장관님 아들도 각성자셨죠. 분명 대기업 길드에 들어가서 억대 넘는 연봉을 받으면서도 게이트 하나 클리어하지 않는다고 말이 많던데…….”
매우 당연했다. 하나뿐인 외동아들, 게이트에서 잃으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는 머저리 같은 아버지 밑에서 너무나 편하게 살아와 고생 한 번 안 한 놈이 뭐 다를까. B급 각성자라고 떵떵거리면서 남을 짓밟을 줄은 알아도 힘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할 폐기물이었다.
실제로 성추행 사건만 셀 수 없고, 폭행 사건에 강간 미수도 부지기수였다. 대단한 아비를 둔 덕에 다 막아 줬겠지만.
“공익자의 아들이 모범을 보일 때가 되었네요. 아드님은 이번 게이트 클리어에도 당연히 참가하시겠죠? 무려 국방부 장.관. 님의 아들인데.”
나라의 녹을 먹고 그 정도로 컸으면 진짜 헌신해야죠. 국민들이 키워 준 거나 다름없는데. 안 그래요?
소식을 듣자마자 내가 죽을 자리를 왜 나가냐고, 당장 이민 가겠다면서 도망갈 머저리를 훤히 알았기에 있는 대로 신나게 비꼬았다. 장관은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부들부들 떨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 맞는 말이었으니 당연했다.
“제 아들은…… 고작 B급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번 공략에는 큰 도움이…….”
“되겠네요! B급이면 충분히 산하 몬스터의 발을 묶을 수 있을 실력자니까요!”
한마디로 길을 내기 위한 몸빵으로 충분하다는 말에 위대하신 장관님이 분노에 차 있는 대로 흉통을 키웠다. 물론 전혀 무섭거나 하지 않았다. 고작 저런 쓰레기에 겁먹으면 월랭 1위의 이름이 울었다. 어디 쪽팔려서 말이나 하겠나.
“이……! 이……!!”
아주 분노로 말도 안 나오는 듯 씩씩대는 머저리를 생글생글 웃으며 즐겁게 바라보는데, 총리가 슬쩍 상황을 중재하기 위해 끼어들었다.
“물론 대한민국의 헌터라면 이 게이트 공략을 위해 전부 동원될 겁니다.”
“글쎄요. 별로 믿음이 가지 않는데요.”
저기 아들 끔찍하게 여기는 인간이 쏙 빼낸다, 에 돈도 걸 수 있었다. 저놈에게 국민은 언제든지 갈아도 좋은 존재지만, 거기에 제 아들은 해당 사항이 없을 것이니.
실제로 각성자 자식을 둔 수많은 권력자가 그리할 것이다. 제 자식을 사지로 기꺼이 보내는 부모는 없을 테니까. 가진 게 없는 이들만 어쩔 수 없으니 보내는 것뿐. 나라를 위해서라는 좋은 핑계를 대며.
대놓고 그 사실을 지적하자 총리가 침음을 흘리며 답했다.
“이번에는, 기필코 반드시 모든 헌터가 동원될 겁니다. 사안이 사안이니까요.”
전부 다 죽어 나갈 수 있음을 알면서도, 이번만큼은 그런 여유가 용납되지 않을 것이라는 굳은 총리의 목소리에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정확히는 총리하고도 다툴 마음은 없었기에 적당히 여기까지 해 준 것이었다. 나는 목소리를 바꿔 진지하게 말했다.
“그것만으로는 턱도 없어요.”
“예?”
“전국에 있는 헌터를 끌고 와도 이번 게이트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겁니다. 전 세계의 헌터가 모여도 클리어를 확답할 수 없다는 건 총리님도 이미 알고 계실 텐데요.”
그런데도 왜 우리나라 헌터들만 이야기할까. 단호하게 운을 떼자 급격히 굳어지는 얼굴이 아주 가관이었다.
알 만했다. 타국에 쉽게 손을 뻗을 수는 없었겠지. 헌터 강국으로 이제까지 그렇게나 많은 견제를 받아온 대한민국이었으니. 이걸 기회로 무엇을 요구할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그것도 그것이었지만, 무엇보다 전 세계 최초 SSS급. 손을 뻗는다고 해도 선뜻 도와준다고 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전부 이해는 간다. 하지만…….
“나라가 망하게 생겼는데 참 태평하시네요.”
“그건…….”
“도움을 요청한다고 다 되는 줄 아나! 이래서 뭘 모르는 것들은……!”
“응. 거기 쓸모없는 놈은 좀 닥치고.”
그럴 때가 아니었다.
“우리가 실패하면 이제는 다른 나라입니다.”
“……!!”
“이 게이트는 비단 우리가 멸망하고 끝낼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한국이 게이트 공략을 실패해서 나라가 망하면 끝인 줄 아나.
저건 드래곤이었다. 그것도 화룡의 왕. 저 왕이 고작 한국에 만족할 것이라고 누가 그러는가. 아마 전 세계로 손을 뻗을 것이다. 목표가 이 조그마한 땅덩이 하나일 리가 없으니.
“연락 전부 돌려요. 너네가 그다음 차례가 되고 싶지 않으면 협력하라고.”
협상이 무리면 협박이라도 해.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 * *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었다.
더 할 말도 없었고, 한시가 급한 사안이었으니만큼 그 외 다른 것들은 지금 나눌 필요 없는, 언제든 뒷전으로 미뤄도 될 쓸데없는 이야기였으니까.
눈앞의 이 사태를 해결하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도 전부 희망적인 개소리에 불과했다.
어쨌든 결론이 났으니,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국방부 장관이 제 할 일을 하러 서둘러 걸음을 나섰고, 다들 앞으로 다가올 공략을 대비하기 위해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나도 마찬가지여야 했고. 특히 말을 끝맺은 건 나고, 평소 내 성격상 여기서 가장 먼저 몸을 일으켜야 했다. 그러나 나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물론 몸을 일으키긴 했다.
“아, 먼저 가요.”
“네? 지호 씨는…….”
“전 아직 볼일이 남았어요.”
조금 더 편한 자리로 옮기려고 잠깐 일어선 것뿐이지만.
“예? 무슨 볼일이요?”
“여자의 비밀은 함부로 물어보는 거 아니에요.”
아. 물론 이들은 다 보내고 나서.
궁금해하는 이들에게 조용히 더 묻지 말라고 미소로 압박을 준 후 얌전히 먼저 돌아가라 눈짓했다. 그러나 이런 건 정말 칼같이 말 안 듣는 윤지우가 태클을 걸었다.
“밖에서 기다리면 안 돼?”
“응. 너도 집에 가서 엄마나 좀 달래 줘.”
분명 그 소녀 감성에 있는 대로 호들갑은 다 떨 테니까. 그래도 챙길 건 다 챙겨야 하니 동생에게 사뿐하게 토스했다.
“아. 나 무사하다고도 전해 주고.”
“직접 해. 아줌마.”
“오구오구, 착하지 우리 브라더?”
좋게 말할 때 말 들어라?
매우 상냥하게 웃으며 말해 줬지만, 이미 이 정도는 학습이 되어 있는 윤지우는 무서워하며 얼른 꼬리를 내렸다. 그게 조용히 닥치고 얼른 가라고 하는 협박임을 찰떡같이 눈치챘나 보지.
댓 발 나온 입을 하면서도 순순히 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척 봐도 삐쳤다.
‘아, 저거 달래려면 귀찮은데.’
살짝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쪽이 먼저였다.
“우린 따로 해야 할 이야기가 있지 않나요?”
“…….”
“그렇죠? 총리님.”
고작 총리가 아닐 이 남자와.
* * *
쪼르륵―
고요한 가운데 커피 내리는 소리가 우아하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뒤이어 진동하는 짙고 풍부한 향. 아주 제대로 즐기는 듯 갖춰진 다기가 본격적이었다.
거기다 그냥 맡기만 해도 매우 고급스러운 커피 향이, 결코 합리적이지 않을 커피 원두의 가격을 암시하고 있었다.
“커피 향이 참 좋아요.”
“말씀 감사합니다. 요즘 공들이고 있는 취미거든요.”
꽤나 고상한 말씀이셨다. 뭐, 총리기도 하니, 이 정도 정적인 취미 하나쯤은 당연한 건가. 나는 그를 슬쩍 훑었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그동안 권력을 탐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실 누구보다 야욕 있고 진취적인 인물이었다.
내 진짜 현실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이야기지만, 여기가 소설인 만큼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 증거로, 이 남자는 무려 34세의 나이로 지금의 총리 자리에 오른 이 나라의 2인자였다. 최연소로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밟아 온 이가 몇이나 될까.
그동안 약한 모습을 보였다고 해서, 그가 만만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평생을 여기에 바친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자신의 나이, 경험 등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눌러버린, 그야말로 모든 악조건을 달고도 승리한 남자였으니까.
처음부터 이 남자를 존중한 이유 또한 바로 이것이었다. 내가 판단하기에 현재 이 세계 정치계에서 가장 유의해야 할 인물이 바로 이 남자였다.
석연찮은 것들이 너무 많은 남자.
그리고, 아까 강압적인 내 명령에 따르던 행동을 보고 나는 비로소 확신했다.
달칵―
“자, 그럼 커피도 다 준비되었겠다. 기회를 줄게요.”
나는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커피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나지막이 명령했다. 완벽히 그를 내 아래로 보는 행동이었다.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이유는 당연했다. 그렇게 해도 되니까.
아니나 다를까, 내 태도를 보고도 조금도 분하거나 못마땅한 태도를 보이기는커녕, 덤덤한 표정을 짓는 총리였다. 그는 자신이 내린 커피로 목을 축이고는 입을 열었다.
“윤지호 씨도 알다시피 나는 이 나라의 총리입니다. 이 나이에 여기까지 올라오는 건 제가 아무리 발버둥을 친다고 해도 무리가 많이 있죠.”
“그렇죠.”
34세 총리. 드라마도 아니고 현실에 그게 가능할 리가. 단호한 내 말에 그가 웃음을 흘렸다.
“네. 그게 이 나라의 현실이죠. 나이 많은 기득권 계층이 모든 걸 쥐는 현실. 젊은 층은 아무리 노력해도 간판에 내걸릴 수조차 없습니다.”
“…….”
“아무 능력도 없지 않는 한.”
총리가 덤덤하게 커피잔을 내려놓고 다시 한번 자기소개를 했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윤지호 씨. 랭킹 비공개 각성자, 이 총리입니다. 특성은…….”
“…….”
“‘꿰뚫어 보는 자’입니다.”
아하. 이제야 이해가 갔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뭐야, 저게 왜 저기서 나와. 호들갑을 떨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합니다.]
성위님이 뜻밖의 흥미진진한 정체에 흥분했다.
당연하기도 했다. 꿰뚫어 보는 자란 곧 주시자. 모든 진실을 파악할 수 있는 왕의 힘을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당연하게도 이 능력을 가진 사람은 전 세계에서도 매우 손에 꼽았다.
가장 유명한 것은 월드 랭킹 14위. 기적의 예지자. 크리스틴 레이블이었다.
예지자라 하는 이들이 미래를 엿볼 뿐, 꿰뚫어 보는 힘을 가진 이가 많지 않은 걸 보면,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매우 희소가치가 높은 인재였다.
하지만 그래도 의문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흠. 그래도 말이 안 되는데.”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지금까지는 어떤 말을 해도 초연했던 남자가, 자신의 능력을 부정하는 말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듯 바로 반박을 해 왔다. 그 능력을 써서 불가능하다 여겨진 자리까지 올라온 남자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다.
하지만.
쿵―!
“……!!”
쨍그랑―!!
그건 상대가 내가 아닐 때의 이야기였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이제야 처음 맛보는 일코 해제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우리 윤지호 하고 싶은거 다 해!’ 플래카드를 흔듭니다.]
‘응. 안 그래도 그럴 예정이야.’
이미 나를 알고 있는 이에게 굳이 정체를 감출 이유는 추호도 없었으니까.
한 발자국은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오로지 마력만을 개방했을 뿐인데 총리가 무릎을 꿇었다. 고작 마력의 기세에 견디지 못하고 엎드리는 것이었다.
좀 본격적으로 풀어내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주 다 푼 것도 아닌데. 특성상 체력이 뛰어나진 않은가 싶었다.
“네가 ‘꿰뚫어 보는 자’라 한들 나를 읽을 수는 없을 텐데.”
고작 너 정도에 읽혀도 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덤덤하게 그를 내려다보며 나른한 사자처럼 평을 내리자, 필사적으로 마력을 견디며 그가 입을 열었다.
“당연히 제 능력으로는 당신의 한 줄도 읽을 수 없었습니다.”
“흠?”
“그랬기에 눈치챈 것입니다.”
밀도 높은 마력의 압박에 숨도 편히 쉬기 힘들어하면서도 그는 꿋꿋이 말을 이었다. 그 역시 허투루 이 흙탕물에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국내 랭킹 2위, 월드 랭킹 7위인 유지한도 다 읽히지는 않지만 아주 안 읽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단 한 글자도 보지 못했습니다.”
“…….”
“처음에는 당신이 특이 대상자인가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이쪽이 더 가능성이 높았죠.”
“오호.”
“머리를 조금만 굴리면 알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해 원티드를 쥐고 개혁을 하던 당신. 조금도 읽을 수 없는 것. 그리고 마찬가지로 어느 날 혜성처럼 등장해 1위를 거머쥔,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왕.”
“…….”
“‘이매망량의 주인’을 뵙습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당연하게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을 보며 나는 진심으로 탄식했다. 괜히 진짜 최연소 총리가 아니었다.
“어쩐지 처음부터 깍듯하더라니.”
“당연한 일이지 않습니까?”
“글쎄. 기본적으로 정치인들은 그 ‘당연’을 당연하게 개무시해서.”
소설 속이라 특히 그런 점은 극극극대화 됐는지, 하나같이 다 폐기물이었다. 그 덕에 진작 정치인 쪽은 포기했다. 여차하면 싹 다 쓸어버릴 생각도 하고 있었다. 어차피 빈자리는 금세 채워질 테니까.
이미 사공이 많아도 너무 많아, 빈자리 몇 개쯤 생긴다 해도 나라 돌아가는 데는 문제가 없을 테고.
뭐, 이렇다 보니, 처음 총리가 내게 깍듯하게 굴 때는 정말 매우 신기했다. 이 미친 판에 그래도 정상인은 있구나. 싶어서.
그게 설마 내가 누군지 알아서 그런 줄은 몰랐지. 그렇다 해도 애초에 쓰레기는 아닌 거 같긴 했지만.
“뭐. 나쁘진 않네. 오히려 좋아.”
“…….”
“정계 쪽에 내 사람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고.”
다는 안 죽여도 되겠네.
그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그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영광입니다.”
“글쎄, 영광은 아닐걸?”
마력을 거두면서 다시 평소처럼 돌아온 나는 장난스럽게 웃음을 흘렸다. 그제야 편히 몸을 일으킬 수 있게 된 총리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를 향해 내 작은 소망을 들려주었다.
“나는 유지한이 나를 넘어서 줬으면 좋겠거든.”
“……아아.”
그 말에 총리가 미소를 지었다.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선한 그 남자가 짓밟히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정도는 같은 듯했다.
“뜻은 잘 알아들었습니다.”
“눈치는 특성이 아닌 선천적인 거지?”
귀신보다 빠른 눈치에 순수하게 신기했다. 그렇게 열심히 교육시켰는데도 한정적인 눈치밖에 가지지 못한 윤지우와, 죽도록 가르쳐도 여전히 눈새인 주인공님을 보다가 이 남자를 보니 신세계였다.
그런 내 마음을 익히 읽은 듯 그가 하하 웃었다.
“정치판에서 이런 눈치는 기본 소양입니다.”
이런 거라도 없으면 어떻게 살아남겠습니까.
맞는 말인 건 알지만 나는 그 의견에 부정적이었다.
“다들 눈치 밥 말아 드신 거 같은데.”
“그러니 그들이 한철이거나, 곧 가시는 거죠.”
당신의 손이나, 다른 이들의 손에. 냉철한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한가지 궁금한 게 있어.”
“네. 말씀하십시오.”
내 충성적인 부하를 자처한 남자가 깍듯하게 답했다.
“‘꿰뚫어 보는 자’는 대부분 방관자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각성자지.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이 대부분일 텐데, 왜 너는 정치인이 되었어?”
이렇게 들키기 쉽고 세상에 얼굴을 내보이는 직종을, 어째서? 그저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그 물음에 그가 부드럽게 미소 지어 주었다.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겉으로 드러날수록 더 숨기기 좋다고.”
“……아.”
“그것도 있지만, 좀 바꿔 보고 싶었던 철없는 욕심도 있었습니다. 제 인생도. 이 나라도.”
더할 나위 없는 훌륭한 답변이었다.
* * *
『단독! 이례적인 결정. 세계는 함께여야 한다.』
『한국 정부, 게이트 부산물 양도 조건으로 전 세계 헌터에게 협력 요구.』
『이번 게이트는 비단 대한민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 세계 랭커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 절대 사. 랑. 해.
└ 밀리언?
└ ㄴㄴ. 절대 아서. 내사랑.
└ 빛의 존잘 아서라니. 뭘 좀 아는 분이시군요.^^
└ 뭔 개소리야. 빛의 술사는 밀리언이거든?
└ 아서의 존잘을 이길 수는 없음.
└ ㅅㅂ. 너 나와.
― ㅎㄷㄷㄷ. 저기 쌈판 난 거 보소. 전쟁나겠는데?
― 아니 지금 이 상황에서도 저러고 싶냐고…. 물론 난 그러고 싶음. 내가 간다! 루치아!
└ 미친놈 빨리 격리시켜
└ 신성한 성녀님께 무슨 못볼꼴을 보이려고!
└ 경찰아저씨 여기에요!!!
― 이번에는 정부가 왠일로 현명한 결정을 했대. 딱봐도 우리나라 헌터들로 될 사이즈 아닌데도 우길 줄 알았는데.
└ 정부 종특.
└ 이번만큼은 다르지.
└ 지들도 다 뒤지면 의미없다는 것정도는 알고 있자너.
└ 지들 아쉬워서라도 하는 듯.
― 와. 이번에는 찐으로 우리 이번생 망했다. 다들 쿨하게 미련 접고 다음생을 걸어보자. 할판이었는데… 스케일 지렸고요. 우리 기대해도 됨?
└ 다 영끌중이니 해도 되지 않을까.
└ ㄴㄴ 영끌에도 sss급임 장담할 수 없음.
└ ㅅㅂ 영끌해도 안되는 건 부동산 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 근데 우리집 월랭 1위는 이러는대도 안나오는거야?! 아니 미친거 아니야?
└ 너같은 놈들 천지인데 나오겠냐.
└ …그러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쌉인정 보소.
아주 뜨거운 실시간 댓글 창들을 보며 그 속에서 은연중 욕을 먹고 있는 월랭 1위가 평했다.
“아주 다 신났네.”
그 와중에 ‘우리 집 월랭 1위’ 진짜 안 나올까 봐 욕은 차마 못 하고 은근슬쩍 말만 던지는 것까지 아주 압권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 얍삽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무심히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있는 대로 비소를 뿌리는데 우리의 호구가 나를 향해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세계 랭커들이 한자리에 모일 일이 좀처럼 없으니까요.”
“그건 그렇죠.”
각국 정부에서 그렇게 놔둘 리 없었다.
랭커들은 좋든 나쁘든 서로를 끌어당기고, 또 영향을 끼치기에 어떻게든 파장을 불러왔다. 그러니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그걸 반길 리 만무했다. 변화를 가장 혐오하는 집단이 바로 정부였으니까.
진취적인 국가나 보수적인 국가나 그건 다 똑같았다. 그들은 자기네가 나라의 중심이 되고 싶어 하니까.
“근데…….”
“……네.”
“저 사람들이 이렇게 찬양받을 만큼 그렇게 대단한 존재는 아닌 거 같은데요.”
“…….”
가차 없는 신랄한 평에 유지한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럴 만했다. 그도 눈과 귀가 있는 이상, 눈앞에 있는 이것들의 작태가 안 보일 리 없으니.
“오. 신수 훤해졌…… 아니, 안 씻었어?”
“어머. 여전히 땅꼬마네. 우유 먹으라니까.”
“야! 나 이미 서른이야! 크긴 뭘 더 커!”
“아니야. 희망을 잃지 마. 넌 할 수 있어!”
“진작 닫힌 성장판에 대고 저게 막말하네.”
“……죽여도 돼?”
“응. 게이트 클리어하고.”
대체 다들 왜 한국말을 겁나 잘하는 건가. 랭커 패치인가.
센터에서 마련한 공간. 센터에서 준비한 간식들이 허공을 날아다니면서 춤을 췄다. 추가로 중간에 끼어 날아다니는 사람까지. 아주 개판이었다. 말린답시고 끼어든 이들이 쥐어터지는 것도 가관이었다.
이 와중에 가장 황당한 건, 그렇게 날아다니는 간식들은 바닥에 하나도 떨어지지 않고 다 누군가의 입에 쏙쏙 들어간다는 거다.
“악!!”
“웁쓰. 쏘리.”
그 과정에서 사람이 밟힐지언정.
“……저것들 진짜 랭커 맞죠?”
랭커란 게 원래 그렇게 썩 정상이 아닌 놈들이라는 것 정도는 이미 뼈저리게 느끼고 포기한 부분이지만, 지금까지 내가 봤던 것은 양반이었다.
아. 우리나라 랭커들은 순한 거였구나. 어쩐지 별 같잖은 것들이 드럽게 날뛴다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성위님이 말씀하셨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아직 안 늦었으니 그 생각 얼른 취소하라고 말하며 기대감에 폭소를 터뜨립니다.]
뭐야. 갑자기 왜 쪼개.
“지호 씨?”
“응?”
순간 표정 관리가 안 됐는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유지한이었다. 재빨리 시치미를 뚝 떼면서도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야, 성위님이 이렇게 쪼갤 때는 분명 나한테 썩 좋지 않은 뻘짓이 벌어지니…….
쾅―!!
“와, 씨. 깜짝이야!”
“뭐야! 뭔데?”
갑자기 문이 쾅―! 열린 탓에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킨 이가 위풍당당하게 걸어 들어왔다.
“……뭐야, 쟨.”
“사람이야. 꽃이야?”
“뭐 몸만 한 꽃다발을 들고 있어?”
아니, 정확히는 사람이 아니라, 꽃이 걸어 들어왔다. 상체부터 머리까지 뒤덮을 정도로 정말 어마어마한 꽃다발이었다. 누군지 얼굴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용케 잘 걸어오는 게 참 신기했다.
정확히 내 앞으로 다가와 멈춰선 꽃다발 맨이 내게 말을 걸었다.
“아. 안녕하세요. 지, 지호 씨.”
“……아, 네.”
……댁 때문에 안녕하지 못한데요.
진짜 쏘아주고 싶은 걸 꾹 참아냈다. 대체 이건 뭐고, 이 꼴은 뭐고, 왜 내 앞에 서서 인사하고 지랄이야.
온갖 내적 번뇌에 휩싸였지만, 나는 헬조선의 유교걸이었기에 내게 건네진 인사는 힘겹게 받아주었다. 그런 나를 보며 랭커인지 푼수인지 분간 안 가는 것들이 뒤에서 신나게 떠들었다.
“뭐야. 뭐야. 고백 타임?”
“저 정도 꽃다발이면 레알 개진심인데.”
“크면 클수록 사랑이 큰 거라지만, 저건 진심 에바 아니야? 로맨틱이 다 죽은 것 같은데.”
“혹시 알아? 여자 쪽에서도 이런 걸 좋아할지.”
아니다. 개새들아.
꽃은 돈도 안 되는 거 하등 쓸모없다 생각하지만, 주는 마음이 좋아 받는 걸 좋아는 했다. 한 송이 정도만. 마음을 전달하기엔 그 정도만 해도 충분했다.
“야. 그건 대체 언제적 소리야. 요즘 저런 걸 누가 좋아해.”
“노이람이 방구석에 처박혀 연구만 하다가 돌았나 봐. 왜 저래?”
“연구만 하다가 시류를 캐치 못 한 건 아니고?”
……진짜 니들은 외국인이냐. 한국인이냐. 무슨 토종 한국인처럼 인터넷 용어까지 써가며 완벽한 언어를 구사하는 게 누가 봐도 우리나라 사람이었다. 자국의 정체성은 다 어디로 간 건지.
어쨌든 덕분에 좋은 정보는 하나 얻었다. 꽃다발 맨……. 너는 노이람이구나. 고매하신 대마법사가 대체 뭘 잘못 먹었기에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내 황당함은 보이지도 않는지 성위님은 아주 신나게 폭소하셨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저 정도 꽃다발을 들고 오는 미친놈은 처음 본다고, 저게 무슨 쌍팔년도식 대시냐고 방바닥을 구르며 폭소합니다.]
‘그만 쪼개.’
남의 일이었으면 같이 쪼갰겠지만, 내 일이라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니까 처웃지 마.
“……노이람. 이건 무슨 짓입니까.”
이 와중에 유지한은 미친 꽃다발이 무슨 위험 무기라도 된다는 양, 내 뒤에서 나를 안아 제 뒤로 물리며 경계태세를 취했다.
그러자 더욱 흥미진진해졌다는 듯 이쪽을 지켜보는 관중의 시선에 나는 진심으로 쌍욕이 나올 것 같았다. 내가 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온갖 현타가 찾아온 나는 보이지도 않는지, 얼굴도 보이지 않는 노이람이 말했다.
“여자분들은 꽃 좋아하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응. 좋아하는 사람이 주는 거 한정이지. 뭐, 좋아하는 사람에게서는 뭘 받아도 좋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포인트를 콕 집어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그것조차 피곤했다.
“제가 받기에는 너무 크네요. 죄송해요.”
일단 저 미친 꽃다발을 들다 허리가 나갈 생각은 추호도 없어, 곱게, 그러나 단호하게 미친 사이즈의 꽃다발을 거절했다.
그 말에 그제야 내가 일반인이라는 것을(아니지만) 깨달은 노이람이 서둘러 꽃다발을 없애 버렸다.
“그 생각을 못 했네요.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걸 잘 모르다 보니…….”
응. 넌 니 여친 선물도 다 부하 시키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리고 너는 몸만 가져가자.
진심이었다. 누가 사 온 선물이든, 어차피 저 얼굴만 못 할 테니. 꽃은 없앴는데 그 뒤에 또 웬 꽃이 있나 했네.
선물은 센스 있게 다른 놈이 사 오고, 본인은 제 얼굴을 내세우기만 하면 딱일 것 같았다.
“마음만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전형적인 거절 문구를 내뱉었지만, 이놈의 방구석 대마법사는 그걸 또 직역해 알아들었는지 꽃다발의 일부인 걸로 추정되는 꽃 한 송이를 내밀었다.
“제 마음입니다. 이 정도는…… 괜찮으시죠?”
“아……. 뭐…… 네.”
그래. 미친 꽃다발보다는 낫지.
무슨 꽃인지 모르겠지만, 예쁘긴 더럽게 예뻐서 홀리듯 손을 뻗어 받으려 하는데…….
탁―!
“……응?”
“어?”
갑자기 웬 손이 튀어나와 꽃을 쳐서 떨어뜨렸다.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아무도 막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꽃이 가련하게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고,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어 그 손의 주인을 돌아보았다.
뒤를 돌아보자, 사태의 원흉 역시 자신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는 듯 매우 당황한 얼굴로 넋이 나가 있었다. 그 표정을 보자니 노이람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노이람은 당황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하의 유지한이 저런 행동을 할 줄이야.
“호오.”
“헐. 대박.”
“이런 빅 재미가 숨어 있었다니.”
“은근슬쩍 나는 빼돌리려고 하는 놈들 개무시하고 먼저 입국하기 잘했어.”
그런 우리를 보며 관객들이 기쁨의 팝콘을 씹어댔다.
불쑥 현기증이 찾아왔다. 이런 것들을 데리고 SSS급을 클리어해야 한다니. 벌써부터 암울했다.
그리고 저런 태평하고도 어이없는 반응을 들은 센터장 또한 이마를 짚었다. 아무래도 그 ‘먼저 입국’ 건으로 자신이 당해야만 했던 일들에 대해 분노가 치밀어오른 듯, 그는 화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밀리언. 아서. 유안. 잔. 네 분 말고 다른 분들은 내일 입국하실 겁니다. 정.식.으.로.”
그렇다. 이들은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지원을 요청하자마자, 각국 정부의 승인이 나기도 전에 그냥 쑥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처리는…… 저기 센터장이.
눈물이 절로 나는 일이었다. 물론 나 말고 센터장이.
“성녀는, 옵니까?”
내가 물었다.
사실 나는 그녀가 오지 않길 은연중에 바라기도 했다. 그녀는…… 그의 연인 후보 중 하나였으니까.
어느샌가 그가 다른 여자들과 관계를 갖는다는 걸 생각하기가 싫어졌다. 이래서 오래 함께하지 않으려 한 건데.
이제는 어느 정도 체념하고 있었다. 이미 제법 줘 버린 마음. 주워 담으려면 못 담을 거 없지만, 그냥 주고 싶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어쨌든, 이런 사감은 뒤로하고 이번 공략에는 반드시 그녀가 필요했다. 이 힘든 싸움에 힐러가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니까.
“내일 입국하기로 하셨습니다.”
“다행이네요.”
남은 제약은 이제 두 번. 게이트를 공략하기까지 앞으로 3일.
“그럼 저는 먼저 실례할게요. 할 일이 있어서요. 각자 전투 준비하도록 하고 내일 작전을 짜죠.”
할 일이 많았다. 예를 들어…….
【진 ‘화신’ 스킬: 수백 개의 가면(S)이 전개됩니다.】
【라이브러리가 펼쳐집니다.】
【시전자가 바라는 힘에 걸맞는 가면이 선정됩니다.】
【성위 고유 스킬임으로 제한 시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스킬: 얼음의 심장(S)이 시전자의 안위를 위해 자동적으로 발동합니다.】
【스킬의 반작용으로 감정 조절이 미숙해질 수 있습니다.】
“호오. 이건 뭐지? 그분이 아직 깨어나시기 전이라 발악해 보려는 건가? 미련하군. 어차피 죽음은 예정되어 있는 것을…….”
“아. 자기소개 고마워.”
【화룡왕 드라키스의 힘을 내려받은 측근이자 4명의 수문장 중 한 명, ‘율례의 마드라’를 마주하셨습니다.】
“건방지도다. 감히 내 앞에서.”
“아. 응. 얼른 덤빌래? 나 바쁘거든.”
【‘종말의 마법사’가 선정됩니다.】
【‘종말의 마법사’가 라이브러리에 저장됩니다.】
보다 수월한 공략을 위해, 골칫거리들을 미리 치워 놓는다거나.
* * *
몇 시간 전. 지호의 아파트 앞.
“안녕히 주무세요.”
“아무 생각 말고 그냥 푹 자요. 알았죠?”
“지호 씨도요.”
할 일이 태산인 와중에도 유지한 단속을 잊지 않자, 유지한이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야 뭐 말해 뭐한 소리였다. 늘 잘 잤으니까.
다만 오늘은, 적어도 지금 이 시각에는 바로 잘 예정이 없었기에 그냥 미소로 때우고 호다닥 집 안으로 들어갔다.
띡띡띡띡― 띠리릭. 철컹―! 탁! 띠리리링―
“……후우.”
문이 닫히고 잠기자마자 나는 문에 기대듯 쓰러졌다. 할 일이 태산인데 꼼짝조차 하기 싫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게이트에서 돌아오자마자 폭풍 같은 하루를 보냈지 않나.
솔직히 평정을 유지하는 것만도 벅찼다. 아무리 무신경한 나라도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으니까. 사상초유의 SSS급. 아무도 2차 각성을 하지 않은 상태. 백전백패를 예견할 자신이 너무나 넘쳐서.
그리고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이렇게 된 데에는 자신의 공이 없지 않은 것 같아서.
나는 이 세계로 와서 너무나 많은 것을 바꾸었다. 유지한이 겪어야 할 모든 시련을 날려 버렸고, 멍청한 정부가 답도 없는 병신 짓을 하며 시간을 질질 끌어대는 걸 과감히, 최대한 빠르게 끊어냈다.
누가 보면 지금 이대로도 이미 충분히 느리고 지루하게 흘러간다 할 수 있지만, 이 답도 없는 것들치고 어마어마하게 빠른 변화인 거다.
단편적인 예로, 고작 몇 달만에 정·재계 유력인사 중 내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다 하면 말 다 한 거 아닌가. 괜히 눈도장을 찍은 게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온갖 관종 짓을 다 하고 다녔지만, 태생 아싸는 모든 게 피곤하기만 했다.
귀찮고 지치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잠이나 잤음 싶었다. 거짓말 안 하고 48시간은 내리 푹 잘 자신 있었다. 그 정도로 지금 나는 피로 그 자체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정황상 결국 제가 뿌린 씨앗.
‘지호 씨!’
지키고 싶은 게 있으니까.
조금 우습기는 했다. 평생을 보고 자란 엄마도, 평생을 키운 윤지우도 소중하기는 했지만, 가장 지키고 싶은 것이 그 미소라니.
내가 굳이 일코를 필요 이상으로 열심히 한 건, 지나친 관심과 희생을 당당히 요구하는 것들이 짜증 나서도 있었지만, 어쩌면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괜찮아요……?!’
나를 향해 지어 보이는 그 미소와 걱정 어린 얼굴을 잃고 싶지 않아서. 자신이 지켜 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아는 순간, 실망과 한탄이 가득할 것만 같은 그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서.
어린애를 키우는 기분이었다. 윤지우를 키울 때도 이랬던가. 안 그랬던 거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쨌든 할 일은 해야지.
“하람아.”
쑤욱―!
“뀨웅―!”
내가 밖을 나갈 때도 늘 함께하고 싶어 하니 외출을 할 때나 게이트에 들어갈 때는 늘 하람이를 ‘이매망량’ 속에 넣어놓았었다. 다행히 다른 이들이 잘 대해 준 듯, 하람이는 어느 때보다 활기차고 상태도 좋아 보였다.
“이번에는 같이 갈까, 하람아?”
너도 레벨 업은 해야 할 테니.
그리고 외출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나는 방 안을 한번 쓱 둘러보았다.
“와. 개판이네.”
할 게 드럽게 많았다. 집에서 뭘 안 해 먹는데도 빨래나 널브러진 물건으로 주변이 한가득이었다. 특히 만찬회 참석을 위해 아침에 정신없이 나간 터라 여기저기 옷이 널려 있었던 탓에 상태는 더 심각했다.
정말 생각지도 않았는데 이럴 때만 매우 이쁜 성위님이 ‘이매망량’ 스킬을 알려줘서 천만다행이었다.
【진 ‘화신’ 스킬: ‘이매망량’】
【통칭 ‘이매망량의 요람.’
이매망량이라는 이름하에 속한 종속들은 전부 ‘이매망량’이라는 요람 안에서 맹목적으로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항상 잊지 마라. 그대가 ‘이매망량의 주인’인 이상, 절대적으로 그들의 사랑을 받을 것이며.
그들은 절대 그대를 배신하지 않을 권속인 것을.
※‘이매망량의 주인’ 타이틀의 고유 스킬입니다.】
이런 스킬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었다. 자기 스킬에 관심 없는 건 진짜 나밖에 없을 것 같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응. 너밖에 없으니 제발 좀 스킬 좀 읽으라고!! 내가 너한테 준 게 몇 개인데!! 라고 개탄합니다.]
“아오. 귀 따가워.”
알아. 알겠다고. 진짜 목청만 커선.
투덜거리며 하람이를 품에 안고 널브러진 집안 꼬라지를 해결할 겸, 내가 집을 비워도 눈치채지 못하게 할 한 수를 꺼내었다.
“여랑.”
마력을 담아 진언으로 바라는 이의 이름을 부르자,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이매망량의 문’이 개방됩니다.】
【대구미호 ‘여랑’이 주인의 부름에 응합니다.】
“주인의 명을 받고 여랑이 주인께 인사드립니다.”
“…….”
“부름을 받기를 고대하고 또 고대했나이다. 나의 주인이시여.”
나의 주인이자, 세계의 주인이시여.
괜히 구미호가 아닌 듯, 손짓, 몸짓, 목소리 하나하나가 유혹적이었다. 같은 여자도 단번에 홀릴 만큼.
애석하게도 나한테는 아니었지만.
“여랑.”
“네. 주인님.”
여랑이 애교 있게 눈을 내리깔며 조신하게 내 명을 기다렸다. 눈앞에서 세상 모든 남자들의 ‘가장 결혼하고 싶은 상대’ 1순위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며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나로 변신해서 여기를 지켜 줘. 누가 찾아오면 나처럼 행동하는 거 알지?”
“물론입니다. 명심하겠나이다.”
“그리고 혹시 괜찮으면 집 정리도 좀 부탁할게.”
뭐. 이건 안 해 줘도 괜찮아. 이거까지 시키는 건 좀 미안한 거 같아 황급히 덧붙였는데, 여랑은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환희에 젖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저…… 정말 제가 만져도 될까요?”
아니. 기껏해야 옷들인데 뭐.
“당연하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어. 그. 그래.”
칼같이 돌아오는 박력 있는 대답에 좀 놀랐다. 미안. 네가 청소 귀신인 줄은 몰랐어.
“그럼 다녀올게.”
현관으로 나갈 수는 없으니, 베란다로 신발을 가지고 나가 신고 그대로 뛰어내렸다.
쉬익―!
세찬 바람이 뺨을 때렸다. 정말 살다 살다 별짓을 다 해 본다 싶었다.
그래도 바람은 상쾌했다.
“성위님. 안내 좀.”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너는 내가 무슨 내비게이션인 줄 아냐고 투덜거리면서도 강남 쪽으로 향하라며 츤데레처럼 말합니다.]
츤데레 성위님은 좀 귀여웠고.
“뀨우~!”
신난 하람이 덕에 텐션도 좀 올랐다. 첫(?) 밤마실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히든 던전에 입장하셨습니다.】
* * *
【‘율례의 마드라’의 성역에 입장하셨습니다.】
【화룡왕 마드리스의 4군단장 중 한 명의 본거지입니다.】
【던전을 클리어하면 연계 게이트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당신의 도전을 응원합니다.】
사람 속을 뒤집는 알림음을 뒤로하고 게이트에 입장하자마자 나는 내 품에 안긴 하람이를 내려놓았다.
“하람아. 뭐 해야 하는지 알지?”
“뀨웅―!!”
“아이, 예뻐라.”
활기찬 하람이의 예쁜 대답을 듣고 나는 하람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기가 무섭게 방해꾼들이 등장했다.
구르르릉―
탁. 타닥―
용아병 세 마리와 트롤 같이 생긴 몬스터 다섯 마리, 처음부터 꽤 몰려왔다.
“음……. 어쩔까.”
그래도 하람이는 전투 자체가 거의 처음인지라 고민이 되었다. 내버려 둘까, 일단 내가 치우고 다음에 차근차근 레벨을 올려 나갈까 생각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당신의 권속. 백호 ‘하람’이 내재된 마력의 봉인을 해제합니다.】
“……하람아?”
경계태세를 갖춘 하람이의 모습이 변하더니, 본래의 거대한 백호의 격을 뽐내며 위협적으로 울부짖었다.
구워어어어―!
“……!”
끼…… 끼긱! 우어어어!!
위협적인 백호의 위엄에 천하의 용아병들이 뒷걸음질 쳤다. 본능과도 같은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그걸 보며 나는 그제야 실감할 수 있었다. 마냥 내가 예뻐하기만 했던 하람이가 정말로 차세대 백호 후계자였다는 것을. 그것도 역대 가장 백호다운 백호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강한 후계였다는 것을.
왜 그 망할 백호가 걱정했는지 이해했다. 이 정도 힘을 가졌는데, 현 백호로서 당연하겠지.
콰아아앙―! 궈어어어!! 콱―!
그래도 저건 내 하람이다. 이후로도 함께 살아가며 평생을 예뻐할.
“우리 하람이 대단하네!”
“구어~!”
“어어. 하람아. 나 넘어질라.”
할짝―
큰 덩치로 변했어도 마치 제가 아직도 어린아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애교를 부려오는, 내 하람이.
“이대로만 가자. 보스 보기 전까지는 쭉 하람이가 상대해도 되겠어.”
“뀨웅―!”
* * *
그러나 가차 없이 보스 이하의 찌끄레기들을 처리하며 하람이의 레벨업을 시켜 주는 즐거운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20분도 안 됐을 것 같다. 얼마 걷지 않아서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람이. 미니 사이즈.”
부피 크면 괜히 피해 볼 수 있으니까 일단 하람이부터 작게 만들었다. 이유도 듣지 않고 내 말에 곧장 원래의 사이즈가 된 하람이를 어깨에 올리고 나는 힘차게 문을 박찼다.
쾅―!
콰과가가강―!
“와. 내구성 쓰레기네.”
대체 뭘로 만들었는지 발차기 한방에 떨어져 나가며 박살 난 문에, 내가 찼지만 좀 당황했다.
그런 나를 보며 성위님이 혀를 끌끌 찼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네 파워에 아직도 니가 적응 못 하면 어쩌냐며 어이없어합니다.]
그건 맞는 말이지만, 아마 평생 적응 안 될 거 같은데……. 살면서 이런 힘을 쓸 일이 얼마나 있을 줄 알고. 게다가 되도록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는 사람으로서 평생 적응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고 있는데, 이 던전의 최종 보스께서 도저히 기다리다 못했는지 딱 끼어들었다.
“호오. 그분이 아직 깨어나시기 전이건만, 미련하군. 어차피 죽음은 예정되어 있는 것을…….”
【화룡왕 드라키스의 힘을 내려받은 측근이자, 4명의 수문장 중 한 명. ‘율례의 마드라’를 마주하셨습니다.】
율례의 마드라라니. 진짜 더럽게 안 어울렸다.
다리는 말 다리. 몸통은 사람의 근육질 몸통. 머리는 세 개. 이게 무엇을 흉내 낸 괴물인지 모르겠다.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에나 나올법한 거지 같은 모습이었다.
거기다 지가 진짜로 신화의 괴물인 줄 착각하는 듯한 모습에 위엄 넘치는 대사까지. 절로 비소가 터져 나왔다.
“아. 자기 소개 고마워.”
덕분에 걱정이 하나도 되지 않았다.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지도 않았고.
걱정 없이 스킬을 전개했다.
【진 ‘화신’ 스킬: 수백 개의 가면(S)이 전개됩니다.】
【라이브러리가 펼쳐집니다.】
【시전자가 바라는 힘에 걸맞는 가면이 선정됩니다.】
【성위 고유 스킬임으로 제한 시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스킬: 얼음의 심장(S)이 시전자의 안위를 위해 자동적으로 발동합니다.】
【스킬의 반작용으로 감정 조절이 미숙해질 수 있습니다.】
“건방지도다. 감히 내 앞에서.”
【‘종말의 마법사’가 선정됩니다.】
【‘종말의 마법사’가 라이브러리에 저장됩니다.】
종말의 마법사. 모든 종말의 마법을 터득한 자이자, 종말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존재.
유일하게 세계에서 살아남은 대마법사가 말했다.
“아. 응. 얼른 덤빌래? 나 바쁘거든.”
시간은 금이라는 듯. 오만하게.
“그 건방이 어디까지 가나 보자고!!”
몬스터 주제에 예의를 따지는 건지, 한껏 건방을 떠는 내 모습에 분노한 마드라가 성급하게 내게 달려들었다. 보통 상대의 역량을 어느 정도 가늠하고 덤빌 텐데, 그의 눈에는 내가 워낙 하찮아 보이는 것 같다.
뭐, 종말의 마법사는 겉으로 보면 별 볼 일 없는 평범한 일반인 같으니 그럴 수 있긴 했다.
“음. 평생 갈 거 같은데?”
병신 같긴 하지만.
【‘종말의 마법사’가 상대에게 영원한 종말을 선고합니다.】
【제2 스킬: 영역 선포를 전개합니다.】
파앗―!
“……!!”
스킬을 전개함과 동시에 마력이 일시적으로 뻗어나가면서 내게 달려들던 마드라가 그 영향으로 튕겨 나갔다.
의도적인 것도, 마력으로 실드를 친 것도 아니다. 스킬 전개를 위해 움직인 마력이 워낙 방대해, 그것이 방출하는 압력을 저쪽에서 감당하지 못한 것일 뿐.
물론, 나도 좀 그렇긴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감당이 안 된다기보다…….
‘와. 겁나 쭉쭉 빠져나가네.’
눈으로 볼 수 있다면 게이지가 쭈우욱 떨어지는 것처럼 마력이 쭉쭉 닳는 게 느껴져서.
이 정도로 심각하게 마력을 소모해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동안은 사실 제대로 힘을 쓸 일이 얼마 없기도 했거니와, 써 봤자 고작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새삼 놀랄 수밖에. 나도 마력이란 걸 쓰긴 쓰는구나. 하고.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럼 그게 정말 안 닳고 그냥 휙휙 다 이뤄지는 줄 알았냐며, 진작 던전도 돌고 해서 마력 좀 펑펑 써 보지 그랬냐며 혀를 끌끌 찹니다.]
[그러면서 걱정이 되는 모양인지, 갑작스럽게 마력을 많이 쓰면 익숙하지 않은 몸이 삐걱거릴 수 있으니 신경 쓰라고 걱정스러운 충고를 건넵니다.]
“……아. 그것도 있겠군.”
마력 중독. 과부하. 마력에 익숙하지 않은 몸이 너무나 많은 마력을 감당하지 못해 벌어지는 현상.
이제 막 각성한 초짜 헌터들이 첫 게이트를 경험할 때 많이 겪는 현상이었다. 아직 본인이 얼마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잘 몰라 한계치를 넘지 않도록 조절할 능력이 부족한 이들이, 게이트 같은 재난을 만나면 어떻게든 사태를 해결해 보기 위해 무리하게 힘을 쓰니까.
물론 이미 몇 개의 게이트를 박살(?)낸 나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 같긴 하지만, 제대로 힘을 안 써 본 건 마찬가지여서 더 조심해야 했다. 마력이 적은 것도 아니고, 많은 만큼 후폭풍도 어마어마할 테니까.
뭐 생각은 여기까지 하고. 나는 고개를 들어 거친 숨을 몰아쉬는 마드라를 돌아보았다.
“고작 이 정도라니. 실망이네.”
고작 마력 방출을 정면으로 맞은 것뿐인데, 그걸로 공포에 짓눌린 듯 몸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큰 몸이 부끄럽지도 않은가. 팔로 얼굴을 가린 채 그대로 정지돼서는.
“아직 제대로 뭘 맞은 것도 아닌데……. 내 마력이 그렇게 강렬했나?”
누가 봐도 겁을 먹은 것이 분명한 모습이었다. SSS급 보스의 측근이니 못해도 SS급은 될 것이라 여겼는데……. 실망이었다.
뭐.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방심한 만큼 더 크게 느껴졌겠지.
“…….”
푸핫―!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실 전부 다 개소리였다. ‘종말의 마법사’의 마력이 평범할 리 없지 않은가.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청량하게 던전에 울려 퍼졌다. 종말에 어울리는 새빨간 로브가 휘날렸다.
종말의 마법사는 누가 봐도 반하지 않을 수 없는 매혹적인 여성이었다. 그녀가 유일하게 세상에게 제 가치를 인정받아 종말을 정복할 수 있었던 건 그 미모 때문이 아닐까 싶을 만큼.
이윽고 ‘종말의 마법사’가 저보다 훨씬 거대한 괴물의 앞에 섰다. 덩치 차이가 몇 배는 났다.
그럼에도 조금도 기죽지 않은 듯, 그녀는 오히려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제 얼굴을 괴물의 얼굴에 가까이 들이댔다.
“하하. 뭐 그럴만하지. 살아생전 이런 걸 겪어본 적이 있기야 하겠어.”
“넌, 정체가…….”
마드라는 두려움이 물든 얼굴로 ‘종말의 마법사’를 올려다보았다. 그 괴리감 넘치는 모습을 보며, 무척이나 재밌다는 듯 종말의 마법사가 즐겁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때? 내 마력, 종말은?”
“…….”
“네가 본 너의 종말은 어떤 종류였을까?”
정말 궁금해.
홀로 살아남아, 종말을 정복하고 미쳐버린 여자가 미친 듯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하―! 어때?! 어떤 종말이었냐니까?!”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광기였다.
‘종말’을 정복한 자가 멀쩡하다면 그것도 이상하긴 했다. 이름도 잊어버리고, 모든 걸 잃어버린 여자가 얻은 건 고작 홀로 살아남는 것뿐이었는데, 정상일 리가 있을까.
긴 붉은 머리칼이 휘날렸다. 그럼에도 그녀가 매혹적이라는 것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아. 더없이 만족스러운 종말이었으면 좋겠어. 아주 즐겁게.”
“……미쳤군.”
“뭐야. 이제 안 거야?”
생각 이상으로 멍청하네. 뭐 나랑 무슨 상관이냐. 싶지만. ‘종말의 마법사’가 광소를 흘렸다.
“재밌게 즐겨 줘.”
너의 종말이 아름다울 수 있게.
【궁극에 도달한 자가 마력을 개방합니다.】
【직업 궁극 스킬 제 1조: ‘지옥불’】
화륵―!
“크아아아악―!!”
끼이이익―!!
쿠워어어어―!!
지독히도 끔찍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옥에서 끌어온 불은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를 다 불태웠다. 고작 용아병들과 기타 잡다한 몬스터들이 견딜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살점이 타는 냄새와 절규가 심히 불쾌했다. 하지만 ‘종말의 마법사’는 나와 정반대로 느끼는 건지 광소를 터뜨렸다.
“아하하하―!! 어때?! 괜찮은 시작이지?”
아. 진짜 나랑 안 맞아. 멋있긴 하지만.
저런 걸 보는 걸 혐오하는 파로서 혐오감을 감추지 못하자, 재빠르게 알림음이 들려왔다.
【스킬: 얼음의 심장(S)이 시전자의 안위를 위해 자동적으로 발동합니다.】
【스킬의 반작용으로 감정 조절이 미숙해질 수 있습니다.】
이럴 때는 참 재빠르고 좋았다.
스킬이 이렇게 재빠르게 발동할 정도로 이 여자는 너무나 위험했다. 왜 수백 개의 가면이 이 여자를 선택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위험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나와 생각이 같은 듯, ‘율례’라는 단어가 붙은 꼰대 몬스터가 심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세상이 괴물을 만들었군.”
그 의견에는 심히 동의한다. 내가 지금 그녀이긴 하지만, 그녀는 ‘내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내 마력은 거의 무한대에 가깝다 할 수 있는 거대한 것인데도 아주 끝을 보겠단 양, 자신의 안위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듯 한없이 질러대고 있었으니까.
그건 그녀의 생각이라기보단 그냥 본능이었다. 원래 그녀가 가진 마력이 나보다 많은 것 같지도 않은데.
이런 행동을 보면 답은 하나였다. 죽음을 바라고, 활활 타오르는 마지막을 바라고 있는 것. 괜히 종말의 마법사가 아니었다.
“너 같은 괴물도 있는데, 나 같은 괴물은 또 없을 게 뭐람.”
귓등으로 흘려듣는 것 같으면서도 종말의 마법사는 의외로 신실하게 답을 건네주었다. 그의 권속을 전부 산 채로 불태운 것에 대한 자신 나름대로의 예의인 것 같기도 했다.
【내 불은 단 한 번도 목표물을 놓친 적이 없으니】
【직업 궁극 스킬 제6조: ‘플레임’】
화악―!! 콰가가강―!!
“……!!”
물론 그러면서도 공격을 안 하지는 않았지만.
‘이제 적당히 좀…….’
어느 정도 종말의 마법사가 원하는 대로 공격 성향을 맞춰주려 했지만, 그랬다가는 너무 지체될 것 같았다. 내겐 시간이 얼마 없기 때문에 빠르게 녀석을 처치하고 나가야만 했다.
나는 강하게 나서서 더 우위를 잡고 공격을 시작했다.
【종말의 바람은 그 어떤 칼보다 날카롭고 아찔할 것임이 분명하니라.】
【직업 궁극 스킬 제12조: ‘종말의 바람’】
“윽―!!”
쉬잉―! 촤아악―!!
쉴 새 없이 날아가는 바람의 칼날에 마드라의 몸이 형편없이 베어져 나갔다. 몸을 아예 잘라 버리진 못했지만, 그 단단한 피부가 종이처럼 베어져 나갔으니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이제 그 위로 결정타를…….
“욱―!”
[윤지호-!!]
성위님의 진언이 너무 크게 들려 귀가 먹먹했다. 아니, 내가 멈춘 건 성위님의 진언 때문이 아니었다.
투둑―
내 입가에서 피가 울컥 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성위님이 고함을 친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됐는데 가만히 있으면 우리 성위님이 아니지.
“아. 실수.”
성위님을 생각해 황급히 피를 닦으며 너스레를 부렸다. 하지만 속은 만신창이였다. 나는 성위님 몰래 입 안을 짓씹었다.
‘빌어먹을.’
너무 방심했다. 종말의 마법사의 전투 방식을 보고 불길하다고 느꼈을 때 제지를 했어야 했는데. 후회가 들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후회는 언제나 할 때가 되면 늦은 것이었다.
황급히 마나 회로를 확인했다. 역시 엉망이었다. 하지만 아주 못 쓸 정도는 아니었다.
“커억―!”
고작 마나 회로 하나 감지한 것뿐이었는데, 그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몸이 반항을 해 왔다.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그나마 안심이 되는 건, 마드라 놈을 보자마자 하람이를 문 너머로 보내 버렸다는 것이다. 이 모습을 보았다면 분명 자책할 어린아이니까.
“무리였나 보군.”
“걱정 마. 그래도 너 하나 죽일 힘은 넘치거든.”
“마력 과부하로 서기조차 힘들어 보이는데.”
빌어먹을. 몬스터 주제에 더럽게 예민했다.
“그래. 인간이 그 정도 힘을 쉽게 가질 수 있을 리가 없지.”
아니. 존나 쉽던데.
하루아침에 랭킹 1위 먹은 인간으로서 저 개소리에 반박할 말이 턱 끝까지 올라왔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저런 개소리가 나올 만했기에 이를 악물었다. 이 망할 몸뚱아리를 보면 누구라도 저런 말을 하겠지.
실제로 보여 준 건 제 마력의 반도 아니었지만, 아무리 많은 마력을 가지고 있다 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몸이 견디지 못하는데.
나는 오늘 아주 처절하게 깨닫고 있다. 내 타임 리미트는 마력 고갈이 아닌, 몸이 마력을 버티는 정도라는 것을.
‘차라리 마력 고갈인 게 낫겠네.’
그러면 다시 채우기라도 하지. 과부하가 걸린 몸은 뭐 어떻게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 일단 임시방편이라도 써 둬야겠지.
【블랙마켓을 오픈합니다.】
【환영합니다. 무명 님.】
…….
줄줄이 이어지는 메시지를 과감하게 스킵하고 서둘러 얼른 엘릭서를 구매했다.
【엘릭서를 구매합니다.】
그래도 내 허세가 먹힌 건지 앞서 당한 게 있어서인지, 또 달려들면 다시 타격을 받을까 염려한 놈이 이쪽을 살피며 기다려주고 있는 덕분에 방해받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대치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알 수 없으니 마음이 급했다.
쏴악―!
똑! 왈칵―!
손에 엘릭서가 쥐어지자마자 그대로 따서 시원하게 원샷을 갈겼다.
“캬아. 좀 살겠네.”
솔직히 엘릭서는 더럽게 맛없어서 쌍욕부터 나올 뻔했지만, 곧바로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면서 마력으로부터의 부담이 덜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물론 이 엘릭서로도 얼마 버티지 못할 건 분명하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었다는 것이 중요하니까.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거 너무 믿고 날뛰었다 그대로 골로 가는 수가 있다고, 제발 조심하라고 간곡하게 당부합니다.]
‘응. 알고 있어.’
모를 리가.
남들은 구하고 싶어도 못 구하는 환상의 엘릭서지만, 이게 만능은 아니었다. 아니, 그냥 내가 문제긴 했다. 아무리 대단한 엘릭서 님이라 해도 이 거대한 마력을 같이 감당해 주긴 무리였으니까.
‘영역 선포 괜히 했어.’
숨 쉬듯이 빠져나가는 마력마저도 이제는 거슬렸다.
영역 선포 자체가 사실 마력이 엄청나게 드는 마법이었다. 웬만한 A급 랭커는 시도조차 못 할 것이다. 당장 이것만 해지해도 몸이 조금 나아질 수 있을 테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영역은 그 안에서라면 마법의 효율이 배가 되고, 마력 소모량은 반이 되는 부가 옵션이 있다. 그러니 영역을 해제하면 이제 그쪽으로 부담을 안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마법은 계속 써야 하니 큰 차이도 없을뿐더러…….
“내가 봐 줄 이유는 없겠지.”
“…….”
“단칼에 고통 없이 보내주겠다.”
이 전투를 빨리 끝낼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이었으니까.
그런 내 생각은 전혀 모르는 놈은 완전히 승기를 잡았다는 것처럼 굴었다. 뭐 그렇게 오해할 수는 있겠지만, 어이가 터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라 반사적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허. 아, 그래라?”
“자신감은 좋은 것이지.”
음. 그런 건 아닌데.
자신감은 아니라 확신이었다. 너를 해치우지 못할 확신이 왜 없겠는가. 다만 그 후의 몸 상태가 걱정될 뿐이지.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여랑을 미리 불러놓기 참 잘했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여랑이 잘 돌봐줄 테니까.
“그럼 잡소리는 그만하고, 끝을 보자고.”
시간이 없는 만큼 난 인정사정없이 갈 생각이거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을 들었다.
【대지는 모두 나의 지배하에 있으니. 대지는 나의 명을 따르라.】
【직업 궁극 스킬 제8조: ‘종말의 대지’】
【영역이 선포된 공간 아래, 모든 공기마저 나의 발아래 있을 것이니.】
【영역 선포 권속 스킬: ‘대기’】
마법을 발동함과 동시에, 대지가 흔들리며 바닥이 쪼개졌다.
“……!”
갑작스러운 반동에 마드라가 황급히 튀어 올랐다. 아직까지는 여유 있는 움직임이었다.
물론 이 정도로 끝이 아니지. 나는 곧바로 대기를 이용해 숨통을 조였다.
“커헉―!! 훕―!!”
갑작스럽게 숨이 막히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마드라가 황급히 목을 부여잡았다. 하지만 당연히 그걸로 뭘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래서 영역 선포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세상 그 어떤 강한 생명체라도 숨을 쉬며 살아가는 한, 내 영역 안에서 날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이 공간은 이미 내 지배하에 있다. 그 어떤 수를 쓴다 하더라도 빠져나갈 수는 없다. 상대가 얼마나 실력이 좋든 말든 상관이 없었다. 이 얼마나 잔인하고도 일방적인 공격인가.
“시시하게 끝나겠어.”
욱―
목 깊숙이에서 다시 피가 치솟아 오르는 것 같았지만, 필사적으로 꾹꾹 누르면서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상대를 비웃었다. 그렇게 여유 부리는 척을 해야 상대가 내 상태를 눈치채지 못할 터였으니까.
“욱……. 욱……!!”
대기를 막아버렸으니 당연히 말을 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이겨내 보려고 노력하며 마드라가 바닥을 뒹굴었다.
콰가가강―!!
그 덩치로 바닥을 뒹구니, 이리저리 갈라져 튀어나온 바닥이라 한들 멀쩡할 리 없었다.
그 몸부림에 자연스럽게 땅이 평평해지고, 아까 바람으로 잔뜩 상처를 낸 피부에서 피가 흘러나와 바닥에 뿌려졌다.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하늘 아래 내 종말 앞에, 피해갈 자는 그 누구도 없으니.】
【직업 궁극 스킬 제14조: ‘종말의 선언’】
그래서 마지막으로 끝장을 내 버리려고 최후의 마법을 실행하는데…….
쾅―!!
“……!!”
갑자기 마드라가 온 힘을 다해 바닥에 주먹을 내리쳤다. 어마어마한 소리와 함께 대지가 부서지며 그 반동이 온 공간을 흔들었다. 가까이 서 있던 나도 함께 흔들리며 시야가 어지러워졌다.
서둘러 뒤로 훌쩍 물러났지만, 그 찰나의 순간 허를 찔린 것은 분명했다.
방심했다. 설마 이런 수를 쓰다니. 마법을 실행할 때 집중이 흐려지면 유지하고 있던 마법이 흔들린다는 걸 알고 있을 줄이야.
“후우…. 신이 원망스러울 지경이군.”
물론 나는 대마법사였고 이 정도로 무너질 리가 없었기에 영역 선포는 멀쩡했지만, 중첩해 유지하고 있던 대기 마법은 캔슬되어 버렸다.
숨을 되찾은 마드라가 몸을 일으키며 자조적으로 말했다.
“우리는 고작 자신의 눈에 차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리 비참하게 만들어놓았으면서, 고작 인간 따위에게 이런 어마어마한 자격을 부여하다니……. 불공평하지 않은가.”
“이미 불공평의 끝자락에 선 놈 중 한 명이 그런 말을 하니 좀 웃기는데.”
말은 번드르르하지만, 그러는 저놈도 이미 많은 생명체를 학살하고 짓밟으며 위에 군림한 놈이었다. 한마디로 그런 말을 할만한 자격이 못 된다는 거다.
“커헉―!”
그러는 사이에 결국 한계를 드러낸 내 몸이 가차 없이 반응을 보냈다. 강제 캔슬 때문에 페널티가 온 것이다. 대체 하루에 몇 번이나 제 피를 보는 건지.
퉤―!
아주 기분이 더러웠다.
피를 뱉고 로브로 입가를 닦으며 현재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캐스팅 중이었던 종말의 선언은 무사했다. 이거까지 강제 취소됐으면 난 페널티로 인해 그냥 골로 갔을 것이다.
그때, 그런 나를 보면서 놈이 말했다.
“그것도 그렇군.”
“그렇지?”
그러니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이제 끝을 보자고.
서로 대화는 이 정도면 차고 넘치도록 했다. 녀석도 이해했는지 힘을 끌어모았다.
그걸 보며 나도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마력을 전부 털었다.
【세계의 종말에서 혼자 존재하게 되었을 때, 내가 깨달은 것은 환희가 아니라 절망이었다.】
【하여 나는 세계에게 묻는다.】
【종말을 정복하면 정말로 그것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소망한다.】
【‘종말’을 정복한 내가, 세상 모든 이의 종말을 소유할 수 있기를.】
내가 마법을 완성함과 동시에, 마드라가 자신이 끌어모은 모든 마력을 내게 쏘았다.
콰아아아앙―!!
딱 봐도 알 수 있는 거대한 마력이었다. 정면으로 맞으면 형태도 남지 않을 것이다.
“과연. 엄청난데.”
놈에게는 아쉬운 일이다.
【종말의 마법사가 눈앞에 있는 존재의 종말을 소망합니다.】
【직업 최종 궁극 스킬 1계명: ‘종말의 지배’】
상대가 내가 아니었다면 승리가 자명했겠으니.
종말을 지배함과 동시에 내게 밀려오던 거대한 공격이 그대로 눈앞에서 소멸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내가 지배한 종말에 나의 ‘종말’은 없었으니까.
“……아. 그대가 신이었군.”
그런 나를 보며 그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개소리였다. 나는 신과 거리가 멀었으니까.
아, 신만큼 이기적이니 그건 맞는 것인가.
그래도 마지막 자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콰과과광―!!
펑―!!
【‘율례의 마드라’가 종말을 맞이합니다.】
내가 곳곳에 낸 상처에서 빛이 터지며 그대로 폭사하는 놈에게 그 정도 자비는 줄 수 있었다.
마침내 거대한 몸이 눈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후, 나는 영역 선포를 해지했다.
“우웩―!!!”
마력 과부하로 망가져 있던 몸이 한계를 알려왔다. 눈앞이 흐려졌다.
고작 이 정도 힘을 썼다고 이 모양이라니. 진짜 빌어먹을 이야기였다. 잔챙이 하나에 월랭 1위가 이 꼴인데, 과연 드라키스는 어떨지.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 나중에 생각하자.”
당장 이대로 엎어져 그냥 푹 자고 싶었지만, 힘겹게 몸을 움직였다.
나는 돌아가야 했다.
【‘율례의 마드라’를 처치하셨습니다.】
【드라키스의 측근, 마드라의 던전이 클리어됐습니다.】
【솔로 레이드 클리어입니다.】
【클리어한 자는 ‘이매망량의 주인’입니다.】
【SS급 던전을 클리어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특전이 지급됩니다.】
【‘텔레포트’를 습득하셨습니다.】
【추가 보상이 인벤토리에 지급됩니다.】
“시스템이 이럴 때는 참 쓸모 있네.”
여기서 더 힘을 쓰면 진짜 죽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돌아가지 않을 수는 없어 천천히 눈을 감고 텔레포트를 발동했다.
나를 기다리는 상대가 있었으니까.
부디 무사하게 도착하길.
【텔레포트(S)를 발동합니다.】
【중간에 의식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 주십시오.】
【의식을 잃으면 시공간에 갇히실 수 있습니다.】
“……주인님!!”
“여랑. 뒷일을 좀 부탁할게…….”
털썩―
그 뒤는 기나긴 잠이었다. 그래도 큰 산 하나는 치웠으니, 편하게 잠을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눈을 떠 보니…….
【시전자의 안위를 위해 잠재된 마력이 해방됩니다.】
【몸이 마력에 적응되었습니다.】
【한계를 넘은 그대에게 축복을!】
【세계 최초로 2차 각성자가 등장하였습니다!】
【세계 최초 2차 각성을 하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헐. 대박.”
내가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2차 각성’이 유지한이 아닌 나한테 일어났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어……. 응. 괜찮은데…….”
안 괜찮아. 아니, 나 말고 유지한을 해 달라고!!
진짜 이놈의 시스템은 내 바람을 항상 이상하게 이뤄준다.
* * *
쏴아아아―!!
“……주인님!”
지호가 텔레포트로 집 안에 등장했을 때, 여랑은 드디어 제 주인이 돌아왔다는 생각으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처음엔 환희에 빠졌던 그였으나, 그 감정은 금세 절망으로 물들었다.
“……컥―!”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대로 피를 토하면서도, 그것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듯한 그녀의 주인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으니까.
여랑은 황급히 달려가 상태를 살폈다.
엉망이었다. 위대한 제 주인의 거대한 마력이 몸을 아주 다 망쳐 놨다. 저 같은 건 한순간에 먼지로 만들 수 있는 마력이니 이 여린 몸에겐 얼마나 가혹했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어디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몰라 머리가 하얘졌다.
그때, 자신의 위대하고 사랑스러운 주인이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지어왔다.
“여랑. 뒷일을 좀 부탁할게…….”
툭―
당연하다는 듯 자신을 완전히 믿고 편안한 얼굴로 잠에 빠져든 주인을 보며, 여랑은 제 삶에서 처음으로 무서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평온하게 잠이 든 얼굴이, 마치 생의 마지막처럼 보여서. 이대로 숨을 쉬지 않을까 봐.
너무너무 무서웠다.
“……주인님……. 나의 주인…….”
여랑은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처음 그녀가 각성하고 자신의 주인이 되었던 그 순간을.
생애 처음 느껴 보았던 고양감과 환희. 그 감정이 홍수 같은 애정으로 변모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무 이유 없이 그저 존재한다는 것 자체로 그와 사랑에 빠지고,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었다.
그 뒤로 하염없이 문 앞에서 기다렸다. 자신을 불러주길. 문이 열리고 자신을 부르는 날이. 주인을 마주하는 날이 어서 오기를.
그러므로…….
“여랑은 모든 걸 바칠 수 있어요. 나의 주인.”
여랑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오늘만큼 자신의 능력에 감사한 적이 없었다. 여우의 요술은 기본적으로 치유의 특성을 강하게 띠고 있었으니.
지호를 침대에 눕힌 여랑이 제 저고리 앞섶으로 손을 가져갔다.
촤라라락―!
여랑이 꺼낸 수십 가지의 부적들이 빼곡히 지호를 둘러쌌다.
“대 구미호 여랑의 이름으로.”
그리고 제 여우 구슬을 꺼내 힘의 원천으로 삼았다. 마나로 망쳐진 몸은 어지간한 힘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했으니까.
제 목숨과 직결되는 여우 구슬을 기꺼이 내었음에도 여랑은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부족할까 두려워 여전히 안심하지 못했다. 스멀스멀 부서진 몸에서 새어 나오는 마력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시무시했으니까. 저로선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여랑은 남은 힘을 쥐어짜, 힘이 새어 나오지 않게 결계를 쳤다.
물론 다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아 하는 주인을 위해 여랑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꼭. 나중에 칭찬해 주셔야 돼요.”
부디 일어나서, 잘했다. 하고 안아 주시길.
띵동―!
“……!!”
그때, 울릴 일 없을 거라 여겼던 초인종이 울렸다.
“지호 씨. 혹시 깨어 계시나요?”
몇 번이고 망설이다 간신히 말을 꺼낸 듯한 수줍은 남성의 목소리.
여랑은 재빨리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새벽 6시 정도. 누가 깨어 있다고 여기기에는 어설픈 시간이었다. 특히 제 주인의 특성을 여랑은 잘 알고 있었다. 제 어린 주인은 절대, 지금 이 시간에 일어날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도 혹시 계속 초인종을 눌러댈지 모르니 여랑은 일단 지호의 모습으로 변신하고 긴장한 얼굴로 문 앞에서 대기했다.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여우에게 둔갑은 특기였지만, 미천한 제가 제 주인을 얼마나 따라 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으니까. 더욱이 제 주인에게 빠져 있는 남자에게는 더더욱.
다행히 주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지 문 너머에서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나 있을 리가 없지.”
더불어 억지로 깨우면 어떤 지옥이 펼쳐질 것을 잘 아는지 남자가 순순히 등을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
완전히 인기척이 사라지자, 여랑은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자연스럽게 주저앉아 한숨을 내쉬는데, 제 다리에 퐁신한 발이 얹어졌다. 고개를 돌려보자 예상치 못한 생물이 그곳에 있었다.
“뀨우―?”
“하람?”
“뀨!”
“넌 언제 나왔니?”
걱정돼서 계속 안에 있을 수 없었다는 대답을 눈으로 들은 여랑은 문득 이 어린 백호가 너무나도 부러워졌다.
“넌 좋겠구나.”
걱정이 되면 이렇게 자유롭게 나올 수 있어서.
제 주인에게 허락을 받은 하람은 언제든지 자신이 원할 때 문을 넘어올 수 있었다. 다만 하람도 주인을 곤란하게 하지 않기 위해 그것을 멋대로 남용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여랑은 그가 부러웠다. 자신도 그랬으면 좋으련만. 하람이를 끌어안고 여랑은 다시 외로운 시간을 견뎠다.
“……언제 일어나시려나.”
바닥에 앉아, 제 주인이 눈을 뜰 시간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 시각, 세계는 다른 의미로 또 시끄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