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장. 장래희망은 당신의 신부 (15/30)

14장. 장래희망은 당신의 신부

“자. 이제 다들 집에 가야지.”

대충 대화는 끝냈고, 앞으로는 자주자주 모여 정보공유 및 친목 도모를 꾀하자고 농담 섞인 진담을 던졌다. 그리고 자리를 파하는데, 당연하게 자리에서 일어서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든 멍청한 동생님께서 오늘도 역시나 멍청한 소리를 시전하셨다.

“나도 가?”

“……스캔들을 냈는데 네가 여기 있으면 어쩌라고. 기껏 낸 스캔들 무산시킬래?”

이건 지금까지 한 말을 뭘로 들은 거야.

이제 조금 걱정 안 해도 될 만큼 대가리가 컸다 싶어 감사했건만, 그 마음이 쏙 들어가는 한마디였다.

다시 한번 교육을 시켜야 하나. 비장한 각오로 싱글싱글 웃자, 그래도 내 생각을 알아차리는 눈치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는 동생 놈이 바람과도 같이 대답했다.

“잠은 집에서 자야지.”

“오냐. 잘 생각했다. 동생아.”

만족스러운 대답에 얼른 꺼지라고 휘휘 손을 내젓자, 변하지 않은 우리의 익숙한 모습에 모두가 살짝 웃음을 터뜨리며 윤지우를 이끌고 나갔다.

그들 나름대로 낯선 환경에 뛰어들어 불안감이 있었는지, 처음 만났을 때보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돌아가는 모습에 나는 괜히 기분이 묘해졌다.

던전 경험이 많아 나보다 백 배는 익숙할 이들도 그런 걸까.

하긴, 이런 건 경험이 많다고 해서 익숙해질 수 없는 종류지.

“모두 조심히 들어가요.”

“네. 물론입니다.”

“좋은 꿈 꾸십시오.”

떠나는 이들을 배웅하던 중, 퍼뜩 떠오른 생각에 나는 그들 중 한 명을 불러세웠다.

“거기.”

“……?”

“나랑 스캔들 낸 남주님은 잠시 멈춰 서시고.”

“……!”

갑작스런 말에 다들 당황스러운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한 사람만을 주시했다. 내 말에 무슨 하늘에서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 같은 황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우리 주인공님을.

그 얼빠진 얼굴을 보며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스캔들, 이왕 만든 거 제대로 해야죠.”

“……!!”

설마 이대로 흐지부지 세컨드로 남겠다는 거 아니지? 장난스런 말에 우리 남주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아. 아니, 그럴 리가요!!”

……누가 보면 진짜로 그렇게 된다는 줄 알겠네. 클리어하면 결국 다 사라질 연극인 걸 알면서 뭘 그리 진지하고 심각하게 구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런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야…….

“자 그럼, 손.”

내가 먼저 내민 손이지만, 놓지 않겠다는 듯 꽉 잡은 손이 답지 않게 설레어서.

* * *

“근데 지호 씨…….”

“네. 왜 그래요?”

함께 손을 잡고 저택에 들어오는데도 제지하는 이가 아무도 없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시선조차 느껴지지 않아서인지 유지한이 뭔가 미심쩍은 얼굴로 나를 불렀다.

모른 척 시치미를 떼고 능글맞게 대답하자 그는 머뭇거리면서 입을 뗐다.

“이래도 되는 겁니까?”

“글쎄요.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요.”

“네?”

유지한이 황망한 듯 되물었으나 나는 진심이었다.

이 소설의 줄거리를 잘 몰라서인지 아니면 내가 벨로아 루체가 아니라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기는 이상한 것투성이였다. 특히 벨로아 루체의 부모, 루체 부부는 정말 이상했다.

‘예쁜 내 딸…….’

‘뭐 갖고 싶은 건 없니? 필요한 건 없고?’

아니 말 안 해도 다 갖다 주는데 새삼스럽게 그런 걸 더 생각할 겨를이 어디 있어요…….

확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들의 목소리에선 딸에 대한 애정이 절절하게 느껴졌으니까. 아무리 내가 불효녀래도 이렇게나 깊은 애정 앞에서 초 치는 소리를 할 정도로 막 나가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정도로 딸을 아끼는 이들이, 마치 암묵적으로 합의를 한 것처럼 딸이 남자를 만나는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이중성이 무언가 힌트인 것 같은데,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 소설 전개에 필요한 개연성 때문인지, 아니면 무언가 음모가 있는 것인지.

정의를 내릴 수 없었기에 나는 차라리 더 막 나가 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음. 내가 유지한 씨를 잡아먹어도 지금과 같은 반응을 보일지 살짝 궁금하긴 하네요.”

“네엑?!”

“아―!”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갑자기 그가 꽥 소리를 질러서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유지한이 이렇게 소리를 지를 수 있다니.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 깜짝 놀라 유지한을 돌아보는데.

“뭘…… 뭘 잡아먹어요……!”

“……아.”

이 순진한 남자를 어쩌면 좋지? 얼굴이 토마토는 비교도 안 되게 현란하게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나이가 어떻게 되더라? 분명히 나보다 연상일 텐데, 어째 내가 원숙한 사모님이 돼서 성희롱하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딱히 별말 한 것도 아닌데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내 화신의 양심리스에 가슴이 웅장해진다며 감동에 젖습니다.]

‘아. 무슨 말을 얼마나 했다고.’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저 퓨어보이한테는 잡아먹는다는 말이 무엇보다 강력하고 야시시한 말일 거라는데 자신의 넷X릭스를 겁니다.]

……헐. 그 정도야?

그 웅장한 선언에 충격 먹은 나는 새삼 내 발언의 위력을 깨닫고 당황했다. 성위님이 요즘 가장 사랑하시는 넷X릭스를 걸 정도라면 그 정도로 자신한다는 것이었다.

순간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싶었지만, 금방 생각을 고쳐먹었다. 자존심이 첫째로 용납을 하지 않았고, 둘째로 이 상황에 미안하다 하는 것도 뭔가 이상해질 게 뻔해서.

그래서 나는 차라리 다른 작전으로 나가기로 했다.

“음……. 우리 남주님?”

그러고 있으면 정말 먹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을 거 같은데.

도발적인 내 말에 이제 아주 터질 거 같은 얼굴이 된 주인공님께서 발끈하셨다.

“……이이……!”

아. 진짜 잡아먹을까. 간만에 잠들어 있던 헌터 본능이 깨어나는 것을 느끼며 순간 진심으로 고민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드디어 리얼 19금을 구경할 수 있는 거냐며 설레어 합니다.]

……라는 성위님의 말을 듣기 전까진.

내 은밀한 사생활까지 성위님과 공유할 생각이 없었던 나는 적절히 초를 쳐 준 성위님께 감사하며 아까까지 했던 생각을 말끔히 정리했다.

‘진짜 프라이버시 보호 모드 같은 건 없냐고.’

살짝 미련이 남았었는지 요런 아쉬운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에이. 제가 동의도 안 구하고 그러는 무례한 사람은 아니에요.”

안전하니까 노 프라블럼!

걱정 말라며 자신만만하게 웃어 주는데, 이번에는 뭐가 문제였는지 우리 주인공님은 그런 내 얼굴을 보면서 오묘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그런 건 제가 해야 할 말 아닙니까?”

……지랄. 반사적으로 비속어가 튀어나올 뻔했다. 누가 뭐가 어째?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소리에 나는 비웃음을 아끼지 않으며 대답했다.

“세상에서 가장 무해할 남자의 조크 잘 들었어요.”

“……예?”

나름 내 경각심을 일깨워 주기 위해 한 말인 건 알겠지만, 방향이 잘못돼도 너무 잘못되었다.

“아니. 저……!”

자신의 말이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는 걸 안 유지한이 황급히 말을 하려 했지만, 이번에는 내가 잘랐다. 들어도 별 쓸데없는 얘기일 게 뻔해서.

“됐고. 자. 골라요.”

“네? 뭘…….”

갑작스런 선택 강요에 유지한이 황당해하며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 얼굴에 대고 손가락을 세워 들이밀었다.

“1. 소파.”

“……지호 씨!”

첫 번째에 곧장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차린, 발랑 까진 퓨어보이가 비명을 질러댔다. 기대했던 반응에 즐거워하면서도 나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2. 바닥.”

“아니……. 그게…….”

“아. 이불은 줄 거예요.”

“그런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는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는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 모습이 더 가학심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래도 한 번 정도는 그만 멈출까, 생각했지만, 나는 나쁜년이었기에 내 짓궂음이 승리했다.

“3. 내 옆에서 조신하게 자기.”

“……윤지호!!”

마지막으로 결정타를 날리자 유지한이 아주 고래고래 비명을 질러댔다.

즐겁게 그 비명을 들으며 나는 유려하게 주변을 살폈다. 여기 사람들은 지금 알아듣지도 못할 언어로 나를 부르는데도 어느 한 명 나와서 보는 이가 없다.

언어뿐만 아니라 황자가 머리를 싸매며 비명을 질러대고 있으면 나와보는 이가 있어야 정상인데, 분명 들었을 터인데도 조용하기 그지없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대체 이 저택의 비밀은 무엇일까.

머리가 차가워지며 새삼 이 저택과 벨로아 루체의 비밀이 아마도 제 생각 이상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무엇하나 정상적인 게 없으니까.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또, 빌어먹게 꼬인 곳에 홀로 던져진 거 같아서.

그리고 내려앉는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건…….

“왜 같은 방이어야 해요……?”

“스캔들에 확신을 불어넣으려면 그 정도는 해야죠.”

역시 이 남자였다.

이 남자가, 고작 만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이 남자가 윤지우보다 더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시켜 준다. 정말 이상하고 신기한 일이다.

아니, 따지고 보면 이 남자와 함께 하는 매일이 내겐 이상한 것투성이였다.

“그…… 그럼…… 소파로 할래요…….”

“에이. 아쉽네요. 개인적으로 3번 골랐음 했는데.”

“지, 지호 씨이…….”

이렇게, 그가 입만 열어도 웃고 있으니까.

* * *

“뭐야. 진짜 소파에서 잘 거예요?”

아쉽게.

내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무슨 장식물처럼 소파에 찰싹 붙은 주인공님을 살살 건드리자, 절대 넘어가지 않겠단 결심을 했는지 주인공님께서는 무덤덤한 얼굴로 건네준 이불을 펼쳤다.

미적지근한 반응에 재미가 없어져 입을 다무니, 드디어 놀림이 끝났다 여긴 것인지 안심한 듯한 얼굴로 주인공님이 소파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그 틈을 타 나는 눈치채지 못하게 몰래 다가가 그의 얼굴 위로 짠―! 하고 얼굴을 내렸다.

“……!!”

거의 코앞에서 내 얼굴이 보이자 기겁을 하며 물러서는 표정이란. 순간 웃음이 터져 나올 뻔한 걸 가까스로 참아내었다.

“……왜 그러십니까?”

“진짜 소파에서 잘 생각을 하는 우리의 정숙한 길드장님을 보고 놀라워서요.”

“……예?”

“아니, 솔직히 내가 어디 가서 꿀리진 않는다 생각하는데요.”

남자가 말이야!

꼰대 같을 거 같아 말하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튀어나오고 말았다. 진짜 대놓고 이렇게 꿋꿋하게 소파에서 버티고 있으니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려 했다.

윤지호 방년 25세. 단언컨대 한밤중에 단둘이 남아 이렇게 홀대를 당한 적은 없었다. 물론 이게 맞는 거고, 당연해야 하는 건데……. 왜 이렇게 그게 섭섭하고 서러운 것인지.

그런 내 마음을 엿보기라도 한 듯 주인공님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래서 문제입니다.”

“……!”

“정말로 내가, 당신에게 무해한 남자일 리 없으니까.”

조금의 거짓도 없다는 듯 꺼내는 덤덤한 말에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모른 척하려 했던 그의 마음을 다시 엿보게 된 것 같아서.

흔들리는 내 눈동자를 보던 그의 눈에서, 멍청하게도, 그렇게 짓밟았는데도 실낱같은 희망이 다시 피어올랐다.

알면 안 되는, 알면 갖고 싶어질 마음이었기에 나는 이 느낌을 착각이라 단정 지으며 또다시 짓밟아야 했다.

하지만…….

“소파 불편해요.”

“……윤지호.”

잔인하기 짝이 없는 내 말에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래도 나는 욕심을 부렸다.

“여기는 소설이니까. 현실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조금은 욕심을 부려도 될 것이리라. 다 허구이니까. 현실로 돌아가면 전부 다 사라져 버릴.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 그런 척을 했다.

“그리고 내 털끝 하나 건들지 않을 정숙한 남자 유지한이니까 하는 말이에요.”

“…….”

“곁에 있어 줘요.”

이 빌어먹을 허구에서. 외롭단 말야.

어린애도 안 부릴 생떼에 그가 화가 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굽히지 않고 시선을 맞추자 결국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억지를 부린다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있었다.

“……당신은 악마입니다.”

상냥한 유지한이니까.

* * *

“보스. 준비는 다 끝났어.”

한편, 한국 최상위 랭커들이 전부 사라진 시기를 틈타 어김없이 움직이는 이들이 있었다.

“아. 그래. 그럼 얼른 움직여야지.”

모든 준비를 서둘러 마치고 이제 결행만을 앞두고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이리 조급히 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품은 남자가 제 보스를 향해 물었다.

“어차피 당분간 못 나오지 않아?”

청와대에 열린 게이트의 정체를 정확히 알고 있는 듯 묻는 말에 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1년이 걸릴 수도 있는 게이트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가능한 한 서둘러 진행하는 게 좋겠지.”

뭐든 태평하게 굴면 타이밍을 놓치니까.

느긋했던 건 그동안 기회를 엿보며 기다렸을 때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하자, 제 보스의 말에 별 이견이 없는지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랭킹 1위라는 변수가 있잖아. 괜찮을까?”

그냥 국내 1위도 아니고 월드 랭킹 1위다. 아무리 외부 활동을 하지 않는다 한들 신경을 아예 꺼버릴 순 없진 않겠냐는 합리적인 물음에, 보스가 아까까지의 인자한 인상은 날려버리고 험악하게 미간을 좁혔다.

“아……. 확실히. 예상치 못한 변수긴 하지. 변수 자체는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건 쓸데없이 강력해. 참 골치야.”

이곳에 그들이라는 변수가 생긴 만큼 세계에도 다른 변수가 생길 것이라고는 예상했지만, 상상 이상으로 강력해 무시할 수 없는 변수였다.

“정체를 모르니 뜻대로 움직여 줄지도 미지수고.”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나마 지금 드러난 면모를 보면 애국심은 요만큼도 없어 보이고, 웬만큼 난리가 나지 않고서야 전면에 나서진 않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세상일은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정의감이 없다고 해서 정의롭게 나서지 않는단 보장은 없었으니까.

“……보스?”

한창 생각에 잠겼던 그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음. 확실히 위험하긴 하지만, 우리는 이미 청와대에 ‘그’ 게이트가 열리게 하는 데 많은 힘을 소모했어. 더 이상은 여력이 없어. 당분간은 어쩔 수 없지.”

“뭐. 하긴 그것도 그러네.”

“어차피 1위가 움직일 거라는 보장은 없어.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알 수도 없고, 나라가 망한다고 해서 움직일 인물 같지도 않았고.”

아주 짧은 등장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성격과 사상을 확실히 각인시킨 위인이었기에 나름 자신할 수 있었다. 그리 생각하는 건 비단 그뿐만은 아닌 듯, 그 말을 들은 남자 역시 옳다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네. 자신이 마음에 드는 특정 인물을 위해서는 움직여도, 대의에 의해 움직이는 건 질색인 것처럼 보였지.”

“그러니까 아마 큰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그리고 어차피…….”

“응?”

“우리가 이제부터 벌일 일은 고작 한 명이 나선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장난스럽지만 일견 자신감이 넘치는 제 보스의 발언에 남자 역시 그제야 자신감을 찾은 듯 개구지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건 오랫동안 염원하며 치밀하게 준비해 온 것이다. 그런 만큼 아무리 강하다 한들 고작 한 명의 인간이 막을 수 있는 재앙이 아니었다.

물론 그들이 그인지 그녀일지 모르는 존재를 직접 마주한 건 아니었고, 따라서 그 힘을 파악할 수 없는 상태였다. 심지어 그는 ‘저번 생’에서는 없던 변수인 만큼 불안을 아예 없애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로 인해 하려던 일을 멈출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멈추는 순간, 모두가 피를 토하며 준비해 온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되는 것이었으니까.

“자. 그럼 빌어먹을 놈들이 돌아오기 전에 후다닥, 한국을 박살 내 보자고.”

“네. 보스!”

보스의 선언에 모두가 광기 어린 미소를 흩뿌리며 답했다. 그 우렁차고도 환희 어린 목소리를 들으며 보스는 즐겁게 웃음을 흩뿌렸다.

“아, 유지한이 어떤 얼굴을 할까. 기대되네.”

제 목적을 위해서 우리를 나락으로 빠뜨린 네가.

* * *

“꺄아악―!”

자명종도 필요 없는 닭보다 더 우렁차고 째진 비명소리에 나는 귀를 틀어막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우음?”

“……아.”

평소와 다르게 제 옆에서 인기척과 함께 잠에서 막 깬 듯한 소리가 들려 순간 살짝 놀랐으나 금세 기억을 해냈다.

아. 나 어제 이 남자랑 잤지.

담담하게 어제 있었던 일을 정리하자, 어제까지만 해도 참 잠잠하던 성위님이 기다렸다는 듯 태클을 걸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렇게 정리하지 말라고. 그거 사기라고. 그렇게만 들으면 오해하지 않겠느냐며 간밤 19금을 매우 기대했던 사람으로서 아쉬움을 표출합니다.]

‘아. 네. 음란마귀 낀 변태 성위 생각 잘 알았구요.’

저 변태 성위가 화신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줄 거 같지 않으니 프라이빗 블러 처리 강력히 요구합니다.

내 진지한 건의를 알아 준 것인지 뒤이어 시스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신의 건의 사항을 진지하게 수렴하겠습니다. 결과는 추후에 안내 드리겠습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다른 건 더럽게 무시하면서 왜 이런 거만 잘 들어 주냐며 격하게 항의합니다.]

알림과 함께 득달같은 성위의 항의가 들려왔지만 개무시했다.

어쨌든 원하는 바를 얻었으니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안심하고 다시 잠을 청하려는데…….

“……저기, 지호 씨.”

주인공님께서 내가 깬 걸 알아차렸는지 말을 걸어왔다. 정신은 깨어 있었어도 다시 잘 예정이었던지라 매우 귀찮았지만, 그래도 유지한 님이라 특별서비스로 답을 해 주었다.

“……웅. 왜요…….”

잔뜩 잠에 취한 목소리로.

어쨌든 태연히 대답까지 하고 있는 내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인지 메이가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다.

앗싸. 계획대로.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눈도 다 뜨지 않은 채 지한을 재촉하자, 지한이 진짜 이래도 되냐는 듯 물었다.

“……저거 괜찮은 겁니까?”

“저게 목적이었는데요?”

오히려 안 저랬으면 짜증 났을 거다.

“예?”

덤덤한 나와 다르게 초기 목적 자체를 까먹은 듯 그가 되물었다. 지금 상황이 그렇게나 충격적이었나 싶었지만, 너무 졸려서 따지기도 귀찮았다.

“저래야 크게 스캔들 나죠.”

“……아.”

그제야 목적이 떠오른 듯 지한이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 귀여운 얼굴까지 눈에 담고서야 나는 이제 됐겠지 하는 마음에 곧바로 눈을 감았다.

“지한 씨도 더 자요.”

“……안 일어납니까?”

아니 이 남자가 지금, 무슨 그런 잔인하고 무시무시한 소리를 하는가.

“출근도 안 하고, 당장 급하게 할 것도 없는 이 황금 같은 날에 미쳤다고 일찍 일어나요?”

누구 좋으라고.

그간 정말 별로 할 일도 없는데, 출근도 안 하겠다 푹 자 보려고만 하면 메이가 득달같이 깨워대는 통에 짜증이 이만저만 아니었었다. 그런데 메이도 물리쳤겠다, 간만에 꿀잠을 잘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칠 내가 아니었다.

“잘 자요.”

더 이상의 문답은 허용치 않겠다. 라는 의지를 강력히 표력하며 눈을 감자 아늑한 의식 사이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잘 자요.”

잔뜩 머뭇거리면서도 몸은 조금도 일어설 기미가 느껴지지 않는 귀여운 모습에 희미해지는 의식 가운데서도 웃음이 터져 나오려 했다.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 * *

“윤지호는 미친년이야.”

오전에 대서특필되어 수도 전체에 뿌려지는 주간지를 보며 윤지우가 이를 갈았다.

단 하루 만에 여기까지 생각하고 유지한을 남긴 미친 잔머리에 감탄을 하면서도, 제 누나의 어마어마한 스캔들에 진짜 이가 바득바득 갈리는 동생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아마 신경도 쓰지 않고 태평히 쿨쿨 자고 있을 것이라는 데 윤지우는 전 재산을 걸 수 있었다.

“그래도 대단한 건 사실이잖아.”

대체 어디서 이런 생각이 나오는 것인지. 만년 회사원이었던 회사원으로서는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 작전이었다. 덤덤하게 자신을 달래는 목소리에 더욱 더 빡친 윤지우가 샤우팅을 터뜨렸다.

“그건 맞죠! 드디어 우리 집에서 먼저 파혼해 드려야 하는 거 아니냐는 소리가 나왔으니까요! 아니 근데 꼭 이런 식이어야 했냐고!”

동생한테 이딴 거나 보여주고 싶냐고!

알고 있었지만 겪는 건 천지 차이라, 열렬한 시스콤인 윤지우가 울부짖었다.

굳이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해도 제 누나의 열애사를 이렇게 본다면 확실히 기분이 이상하긴 할 텐데, 이쪽은 우애도 좋으니 저런 반응이 당연하긴 했다.

“일단 나라를 이렇게 시끌벅적하게 만들었으니, 의도가 어찌 됐든 이야기는 확실히 움직일 거야.”

더 이상 평온하고 매일이 똑같던 헤르세르크가 아니게 되었다. 이렇게 된 이상, 주인공이 누구든, 원래 이야기가 어떻게 되었든 상황은 빠르게 흘러갈 것이다.

“우리 누나가 그렇게 만든 거죠.”

할 말이 없습니다……. 윤지우가 아주 죽어가는 목소리로 사과했지만, 회사원의 생각은 사뭇 달랐다.

이대로 흘러가는 상황을 살피려고 했던 우리와 다르게, 차라리 이쪽의 손안에 흐름을 넣어 상황을 컨트롤하며 앞으로 나아갈 것을 생각하다니. 대담하고 막장스러운 계획이었지만, 그들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현명한 생각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정말, 어디서 이런 인간이 우리에게로 떨어졌는지.

기적과도 같은 일에 회사원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원티드 설립 이래 늘 불안함에 전전긍긍만 해 왔던 그에게 이런 기적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아마 이 남매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그리고 윤지우 또한 저는 평범하고 제 누나는 또라이라고 늘 진저리를 치지만, 회사원 입장에서 봤을 때, 그도 틀림없는 윤지호의 핏줄이었다.

“아. 일단 누나가 이 정도 저질러 놓았으면 나머지는 알아서 따라오라는 소리니까, 전 일단 파혼이나 밀어붙일게요. 약혼녀의 행복을 위해서 어쩌구저쩌구 하면 되겠죠. 윤지호의 행복이 우리 길드장이라니…… 우웩……. 이래서 로판이 싫어.”

물론 윤지호라는 천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 천재의 주입식 교육을 받은 덕인지, 아니면 핏줄의 영향인지 영민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으니까. 제 핏줄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캐치하고, 제 누이의 뜻을 이뤄주기 위해서.

“선배는 황실 서기관이니까 입김 좀 있지 않아요?”

“기껏해야 서기관한테 그런 게 어디 있어?”

다른 잘난 인간들이 보기에는 백날 서류나 파고 있고, 조사나 하는 서기관이 뭐 그리 대단해 보이겠는가. 회사원이 시니컬하게 현재 자신의 처지를 토로하자, 윤지우가 그게 무슨 소리냐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온갖 정보는 다 귀에 주워 담을 수 있잖아요. 이 정도로 날뛰어 놨으니 사람들 입이 가벼워지기 딱 좋죠. 귀동냥 열심히 해 가면 윤지호가 좋아할 거예요.”

나한테는 이딴 거나 시키고……. 진짜 망할 누나…….

엄밀히 따지자면 이 일의 궁극적인 원인 제공자는 윤지호가 아니라 망할 게이트였지만, 그 전제는 쏙 빼놓고 윤지우가 서운한 티를 풀풀 풍기며 투덜거렸다.

그래도 제 누나가 좋아할 만한 건 곧바로 캐치해 자신에게 알려주는 게 너무나 윤지우다워 회사원은 부드러운 미소로 그의 머리를 잔뜩 헝클어뜨렸다.

“사랑받는 동생이야. 윤지우는.”

물론 알면서도 모른 척 열심히 사랑받고 싶은 얌체 츤데레 동생은 이게 무슨 개소리냐는 얼굴로 부정했다.

“선배, 윤지호가 나한테 하는 거 못 봤어요?”

어떻게 그런 막말을 할 수 있냐고 충격 먹은 얼굴을 하는 애 앞에서 회사원은 차마 ‘응. 봤지. 예쁨이란 예쁨은 다 받고 있는 거.’라고 말하지 못했다.

본인은 열심히 부정하지만, 윤지호도 늘 퉁명스럽게 대꾸하고 장난을 치지만, 그 모든 것에는 깊은 애정이 배어 있음을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회사원은 자신할 수 있었다. 윤지호에게 소중한 것 1순위는 친구도, 부모님도, 남자친구도 아닌, 바로 눈앞의 이 윤지우일 것이라고.

그야 윤지우를 대할 때 윤지호는 언제나 윤지우밖에 없다는 듯 완벽한 애정을 선사해 주었으니까. 외로움을 많이 타는 귀여운 자신의 동생에게.

그런 걸 인생에서 받아 본 적이 없는 제 길드장이 그걸 얼마나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는지 알기에, 회사원은 그 사실을 더 의심치 않았다.

확실히 무언가 한가지가 결정적으로 결여돼 있는 원티드 인간들에게 이 남매는 너무나 완벽해 눈이 부셨다.

“우리는 그런 걸 겪어보지 못해서.”

살아서 그런 애정을 받아볼 일이, 헌터로서는 더더욱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굳이 그걸 알려주고 싶지 않아 회사원은 장난스럽게 말을 흐렸다.

“그나저나 파혼, 쉽게 되겠어?”

“이 정도 기사가 났는데, 쉽겠죠. 정 안 되면 내 쪽에서 언론에 빵 터뜨려도 되는 거고.”

“그러다 쫓겨난다?”

“그럼 누나한테 빌붙죠. 뭐.”

당당한 빈대 선언에 회사원은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역시 남매야! 막 나가는 건 아주 똑같아.”

“욕하지 마세요. 전 윤지호처럼 막 나가지 않아요!”

“현실 부정은 적당히 해야 몸에 이로운 법이야.”

“진짠데요!”

음. 그건 맞지.

윤지호가 넘사벽 레벨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이는데, 심장 떨어지게 갑자기 예기치 못한 인물이 나타났다.

“이런…… 모리스 경 아니십니까?”

“……!!”

“……형?”

현재 윤지우의 형이자 베어 후작가의 장남, 체셔 베어의 등장이었다.

* * *

호로록―

침묵 속에서 차를 들이켜는 소리만 소름 끼치게 잘 들렸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살얼음판 위에서 들리는 호로록 소리는 사람을 진저리치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결국 참다 못한 두 사람이 황당한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 눈으로 격하게 대화를 시작했다.

‘이게 왜 여기서 나타나?’

‘제가 알아요? 저는 오늘 분명 이놈 황궁에 있을 거라고 들었다고요!’

‘근데 왜 지금 여기 있는 건데?’

‘윤지호가 사고 친 것 때문에 그런가 보져!’

매우 일리 있는 이야기였다. 아침에 그렇게 대서특필되어 집안 스캔들이 터졌는데, 황궁에 볼일이 있다고 해도 황급히 유턴하고도 남았다.

단박에 이해가 되었지만, 회사생활을 그렇게 했음에도 기본적으로 새로운 사람 만나는 것을 매우 싫어하고 이런 어색한 상황에 끼는 것 또한 죽도록 싫어하는 회사원은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이해고 뭐고 황급히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는 체셔 베어였다. 베어 후작가의 후계자이자, 차기 재상으로 손꼽히는 인물. 한마디로 이야기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역할…… 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이에게 찍혀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두 사람이 격한 혼란의 소용돌이를 만들든 말든, 아무 관심도 없는 듯 차를 마시던 체셔 베어가 물 흐르듯 유려하게 대화를 시작했다.

“모리스 경이 제 동생과 친분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최근에 친분을 쌓게 되었습니다. 베어 소후작도 잘 아시다시피, 그대의 동생은 인품도 훌륭하고 저와 잘 맞는 곳이 많아서 말이지요.”

이런 건 전혀 못 할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유려하게 귀족적인 언사가 흘러나오자, 윤지우가 놀란 얼굴로 회사원을 바라보았다.

그야 어쩔 수 없이 하는 거긴 하지만, 애초에 못 해서 안 하는 건 아니라고. 그런 시선을 받는 것이 부끄러운 듯 회사원은 조금 얼굴을 붉혔다.

그사이 체셔 베어가 다시 유려하게 말을 이어받았다.

“그렇군요. 모리스 경과의 친분이라……. 제 동생에게 영광이지요. 물론 오늘 조금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지만, 모쪼록 계속 친분을 이어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불미스러운 일이라니요. 조금도 그렇게 여기지 않습니다.”

불미스러운 일은 무슨. 우리가 일부러 만든 건데.

이런 속내는 철저히 감춘 채, 다년간의 회사생활로 다져진 내숭을 한껏 발휘하며 손사래를 치자 그 모습에 체셔 베어가 한결 안심한 듯 말했다.

“모리스 경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안심이군요.”

진심으로 안심한 것 같은 얼굴에 회사원은 황급히 윤지우와 시선을 교환했다.

‘생각보다 형제끼리 사이가 좋나?’

‘며칠 됐는데 어떻게 알아요. 그래도 가족 전체가 꽤 돈독한 편인 거 같았어요.’

후작가쯤 되면 형제끼리는 거의 필연적으로 사이가 나쁜데, 독특했다. 전부 후작위에는 별 미련 없이 다 제 방면으로 자리를 잡아서 그런가.

회사원이 그리 판단을 내리고 있을 때, 생각보다 두 사람의 친분이 단단하다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세이 모리스는 체셔 베어에게 조금의 위협도 끼치지 않을 인물이라 판단한 것인지, 체셔 베어가 아무렇지 않게 타깃을 지우에게로 돌렸다.

“넌 괜찮으냐?”

그래도 명색이 약혼인데 이렇게 되어 괜찮냐는 뜻인 걸 찰떡같이 알아들은 윤지우가 나름 연기랍시고 씁쓸한 미소를 입에 담으며 말했다.

“안 괜찮을 게 뭐 있어. 약혼이 뭐 다 절절한 사랑으로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약혼이 연애가 아닌, 정략으로 맺어졌다는 것을 미리 알아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연기였다. 그에 홀딱 속아 넘어간 체셔 베어가 생각지도 못한 정보를 털어놓았다.

“그래도 네가 결정한 배필이 아니냐.”

“……응?”

“아버지가 내민 수많은 혼처 중 네가 결정한 것이니 묻는 거다.”

아니. 이건 몰랐는데. 정말로 당황했지만, 지우는 겉으로 티 내지 않고 정보를 유도했다.

“그들 중 벨로아 루체가 제일 나한테 뭘 바라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실상은 매일 뭐 시키기 바쁘지만.

당장 튀어나올 것 같은 억울함을 꾹꾹 참으며 필사의 연기를 펼치자, 그래도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 듯 드디어 원하던 정보가 끌려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 처음부터 벨로아 루체의 마음은 너한테 있지 않았으니까. 애초에 벨로아 루체가 너를 선택한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지.”

“형은 그 마음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말투다?”

“짐작은 하고 있지. 황태자도 거절한 여자니까.”

아니, 황태자가 얼마나 옴므파탈이기에 황태자를 거절하면 세상 온 남자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것 같은 이야기가 되냐. 황태자라는 지위가 대단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꼭 그렇다 해서 황태자를 거절한 게 그렇게 말이 안 되는 일인가?

물론 황태자를 거절하고 후작가 3남을 선택하는 건 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루체 백작가는 뒤를 이을 후계가 없기 때문에 그걸 고려하면 못할 선택도 아니긴 했다. 나름대로 아깝긴 해도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게 세간의 평가였다.

“형, 근데 난 이해가 안 된다. 황태자가 갑자기 여기서 왜 나와?”

“그야 벨로아 루체는 황태자가 지금 그 자리에 오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여자니까.”

지금은 아니지만.

‘……헐.’

생각지도 못한 정보에 두 사람은 할 말을 잃었다. 뭐야. 이 숨은 설정은.

아무래도 윤지호에게 긴히 해 줄 말이 생긴 것 같다.

* * *

“하암. 잘잤당.”

개꿀잠. 해가 중천에 떠서야 만족스럽게 눈을 떴다. 역시 잠은 이 정도로 자야 진짜 잔 거 같다. 일어나 만족스러운 얼굴로 기지개를 켜는데…….

“어머나.”

안 그런 척해도 그동안 계속 긴장했던 건지, 지쳤던 건지 옆에서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는 주인공님이 보였다. 이렇게 보니 자는 모습은 어린애 같았다.

“뭐, 하는 짓도 순수하긴 하지.”

그러고 보니 자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인가? 언제나 내 앞에서는 듬직해 보이려고 노력해서인지, 이렇게 대놓고 무방비한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다.

뭐 그런 쓸데없는 노력을 하는지. 월랭 1위의 마음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 모습조차 귀여웠기에 일코를 핑계로 지켜보기만 했었다. 가끔 너무 심하다 싶으면 일부러 허를 찔러 기운을 빼 주기도 하면서.

“음…….”

깨울까, 말까. 살짝 고민했다. 이미 꽤나 밝아져서 깨울 시간인 건 맞지만, 이렇게 곤히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니 또 깨우기 싫었다.

그렇게 고민하다 답지 않게 시간을 흘려보냈는데, 내가 결정을 내리기 전에 주인공님이 먼저 눈을 뜨셨다. 천천히 열리는 눈을 보며 나는 화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좋은 아침.”

그 미소에 마치 홀린 듯 멍하게 나를 바라보던 주인공님이 화답해 주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이라기보다 좋은 오후에 가까운 시각이었지만, 뭐 어떤가. 우리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지.

“나 배고파요.”

* * *

“아. 역시 아침은 이래야 돼. 넘나 맛있당~”

제가 먹고 싶은 것만 잔뜩 차린 브런치는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스콘에 라즈베리잼을 듬뿍 발라 크림치즈와 함께 먹으니 진짜 인생이 행복해지는 것 같았다.

옆에서 토스트를 베어 물던 유지한 님이 그런 나를 신기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뭐예요. 왜 그렇게 봐요?”

“아니, 너무 행복하게 드셔서…….”

“헐. 당연한 거 아니에요?”

이렇게 맛있는 살찌는 맛을 먹는데 어떻게 안 행복할 수 있어?

혈당을 잔뜩 올리는 맛이 인간을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아 들여다보니, 아무것도 안 바른 맨 식빵 토스트만 먹고 있는 꼴에 오히려 이쪽에서 화병이 나려 했다.

그런 내 시선을 눈치챈 듯, 유지한 님께서는 어물쩡 물고 있던 토스트를 내려놓았다.

“아니. 제가 먹는 걸 그렇게 즐기진 않아서요…….”

안 하느니만 못한 말이었다. 그렇게 먹으니 그렇지!

답답함을 참다못한 나는 결국 또 먼저 손을 내밀었다.

“내놔요. 토스트.”

“아. 네.”

유지한이 먹다 남은 토스트를 주춤주춤 상납했다.

아니, 내가 먹는대? 그 꺼림칙한 태도에 괜히 내가 빵 뜯는 일진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매우 이상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아니었냐고, 미심쩍은 얼굴로 묻습니다.]

‘아니야. 이 씨…….’

저거 진짜 언제 죽이지? 살의를 활활 불태우는데, 그런 내 살의가 보였던 건지 유지한이 고개를 숙이다 못해 아주 땅으로 기어들어 가려고 했다.

애먼 사람 괴롭히는 취미는 없었기에 나는 방긋방긋 웃으며 서둘러 유지한을 달랬다.

“잼 먹어는 봤어요?”

“예? 아…… 물……. 안 먹어 본 거 같아요.”

“……그동안 뭐 먹고 살았어요?”

“……건강식?”

……그동안 유지한 식단 짠 새끼 나와.

이래서 이놈이 양같이 순진하고 미련한가 보다. 무미한 풀떼기와 필수 식량 같은 것만 먹고 사니, 애가 인생의 묘미라는 것을 알 리가 있나.

“좋아. 내 특급 레시피를 전수해 주겠어요.”

호언장담을 하며 유지한의 토스트에 라즈베리잼을 골고루 잘 펴 발랐다.

내가 라즈베리를 좋아하기 때문에 우리 집 식탁에는 항상 라즈베리잼이 올라왔다. 옛날부터 쭉.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 세계에서 딱 하나 마음에 든 건 라즈베리잼이 매우 신선하고 고급진 맛이라는 것이다. 아마 유지한에게는 신세계일 것이라 자신했다.

그리고 여기에, 공장에서 만든 것이 아닌 수제 크림치즈를 얹으면…….

“자! 먹어 봐요!”

최고급 재료로 토핑했으니 맛이 없을 리가. 욕심 같아선 여기에 과일을 얹고 싶었지만, 초보자는 먹기 힘드니 패스했다.

“아…… 저기…….”

진짜 이런 건 처음 먹어 보는 건지, 내게서 토스트를 건네받은 유지한이 무슨 신기한 걸 보듯 꿈뻑꿈뻑 감상만 하며 시식을 망설였다.

뭐, 이해는 했다. 난생처음 먹어 보는 음식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넣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그건 그거고 답답함은 답답함이었다.

“고민 그만하고 눈 한번 딱 감고 먹어 봐요.”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될 테니까. 세상에 얼마나 맛있는 음식이 많은데, 그중 중독성으로는 최고봉인 디저트의 맛을 모르고 살았다니. 인간이 그럴 수는 없었다.

불량식품을 권하듯 약을 팔며 지한을 재촉하자, 지한은 결국 눈을 꾹 감고 토스트를 베어 물었다.

바삭―!

“……!!”

난생처음 맛보는 신비에 유지한이 눈을 부릅떴다.

평생 길들여진 인간이라 눈앞에서 다른 이들이 이렇게 먹는 걸 봐도 아, 이 사람은 이렇게 먹는구나, 하고 말았겠지. 시도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개인 취향을 존중하는 착한 주변인들은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거고.

나쁜 년인 나는 빼고.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유지한에게는 좋은 일 아닌가.

바삭―! 와그작―!

이렇게 맛있는 건 생전 처음 먹어 본다는 듯, 빠른 속도로 토스트를 먹어 치우고 있는 주인공님을 보면.

역시 어떤 고급 음식인들 불량식품 맛을 따라갈 수는 없다.

“맛있죠?”

“네!”

귀여워.

그렇게 유지한에게 새로운 맛을 알려주며 이것저것 비법을 전수해 주고…. 나는 메이가 눈치껏 놓고 간 주간지에 시선을 돌렸다.

『‘사상 초유의 러브 스캔들!’』

베어 후작가와 루체 백작가의 결합은 많은 귀족들이 견제하고 있던 바였으나, 이를 마뜩지 않게 여겨 나선 이가 있었으니. 바로 황가였다! 그것도 사교계에 나오지 않기로 유명한 3황자라니.

제국민 모두가 혜성같이 나타난 이 불같은 연인에 대해 관심을 집중하는 가운데……! 제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화제의 연인들은 현재 루체 백작가에서 같은 방, 같은 침대를 쓰며 사랑이 넘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제보가…….

아주 소설을 쓰고 있다.

주간지가 아니라 찌라시에 가까운 쓰레기 기사였으나, 어쨌든 자극적인 것만큼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건 없으니 아마 이 신문은 어마어마하게 팔려나갔을 것이다.

더불어 벨로아 루체는 어마어마한 유명인이 되었을 터고, 벨로아 루체의 파혼과 그 뒤 행보에 모두가 주목할 것이다. 정말 너무 쉬워 웃음이 나올 만큼 예상한 대로 풀리고 있었다.

이 정도면 슬슬 내가 생각하는 이들에게 다 입질이 올 터, 그들이 내가 바라는 정보를 들고 나를 찾아올 날이 아마 멀지 않을 것이다. 그럼 그동안 내가 할 일은…….

“황자님.”

“……예. 예?”

우리 유지한 황자님. 실권은 뭐 하나 없으면서 빌어먹게 황자의 이름을 달고 있어 이용당하기 딱 좋고, 온갖 견제와 정적들의 목숨 위협을 받는 위치. 그야말로 언제든지 딱 죽기 십상인 콤보 세트였다. 이야기의 주연이라는 게 목숨을 보장해 주진 않는다. 오히려 더 위험하겠지.

일부러 스캔들 상대를 유지한으로 고른 이유는 그 누구보다 무해하고, 내 뜻대로 움직이기 편할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지만, 적어도 이렇게 이슈가 되면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어 함부로 그를 해하기 어려울 테니까. 그 누구든 쉽사리 움직이긴 힘들 터였다.

“나랑 데이트할래요?”

내 나름대로 일코를 하며 당신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 * *

거리 한복판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주변에 있는 모든 인간들의 시선을 집중시킨 실랑이가.

물론 그건 우리였다.

뭐, 아주 사소한 다툼이었다.

“아니. 그럼 옷이라도…….”

“아. 됐어요.”

얼굴이 패션인 인간이 옷은 무슨. 흰 와이셔츠에 검은색 슬랙스만 입어도 빛이 나는 인간이 바로 너란다.

심지어 자고 일어나서 약간 부스스한 머리와 흐트러진 셔츠마저도 은은한 섹시미를 발산해 위험할 정도였다.

벨로아 루체의 남자라고 동네방네 그렇게 소문냈는데도, 밖에 나오자마자 유지한을 본 여자들이 코피를 쏟거나 얼굴을 붉히는 건 예사고, 혼절하려고까지 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다른 의미로 매우 위험한 남자였다.

물론 나는 오늘 이 다른 의미로 위험한 남자를 그쪽으로 더욱더 위험하게 만들 예정이었는지라, 조금 빈정이 상해 순간 살짝 계획을 바꿀까 고민했다.

이런 내 심정은 꿈에도 모르는 퓨어보이가 눈물 어린 눈으로 내게 호소했다.

“싫어요. 지호 씨는 제대로 갖춰 입었는데 저만 이렇게 초라한 차림인 건…….”

“…….”

그걸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 자식. 설마 알고 이러는 건 아니겠지.

진짜 더럽게 치명적인 부탁이었다. 이 남자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의심할 정도로.

결국 지는 건 오늘도 나였다.

“나는 메이가 해 주는 거 그냥 받은 거고요. 당신은…….”

“……?”

“내가 꾸밀 건데?”

* * *

“어머. 레이디!”

“다시 뵈어 반가워요. 마담.”

내가 간 곳은 지난번 무도회 때 나를 환골탈태 시켜주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디자이너. 마담 퐁…… 어쩌구의 샵이었다. 갑자기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퐁도 맞나 의심스러웠지만,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말하는 건 무척이나 쉬운 일이었기에 굳이 기억하려고 머리를 쥐어짜내진 않았다.

“단번에 사교계 제일의 화제의 레이디로 등극하셨더군요!”

“오, 그거 영광이네요.”

내가 그렇게 만들었지만 참 지랄 같은데. 태생이 관종이랑은 거리가 멀어, 이런 관심이 매우 엿 같았다. 물론 이런 마음은 조금도 티를 내지 않은 채, 나는 우아한 귀족 영애의 미소를 지으며 오늘의 목적을 말했다.

“마담. 오늘 내가 마담을 찾은 건 드레스가 아니라 다른 이유인데.”

“어머! 이분 때문이시죠?”

그녀가 아주 능숙하게 정확한 타이밍으로 지한의 존재를 언급했다. 처음부터 모든 관심은 내가 아니라 이쪽이었으면서 어찌나 능청스러운지. 괜히 이 업계에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었다.

어쨌든 나로서는 매우 편리했기에 물 흐르듯 그녀에게 호응했다.

“맞아요. 내가 오늘 이 멋진 분을 멋지게 꾸며주고 싶거든?”

“어머나, 레이디!”

“그러니까…….”

“…….”

“이번 시즌 전부 내 앞에 전시 부탁해.”

인생에서 꼭 해 보고 싶은 갑질 발언 중 하나였다.

어디 한번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쫘악 깔아보렴.

너무나 짜릿한 플렉스 발언에 기분 완전 째지는데, 이런 나보다 더한 감동을 먹은 마담이 무한충성하겠다는 표정을 짓더니 직원들을 시켜 순식간에 우리가 있는 룸에 이번 시즌 남성복을 전부 전시했다. 엄청난 영업 욕구였다.

“그럼, 마담. 한번 실력 좀 보여 줘.”

당신의 눈에는 과연 어떤 것이 가장 괜찮냐, 일부러 보란 듯 시험을 하자 디자이너의 승부욕이 불타오른 마담이 열성적으로 자신의 컬렉션을 뽑았다.

“전 자신 있게 이 다크그린의 제복을 추천 드립니다. 소재는 제가 직접 염색한 캐시미어에 금사로 수를 놓은…….”

이건 시작이라는 듯 이어서 그녀는 쉴 새 없이 옷을 걸러냈다. 그 뒤로는 당연히 인형 놀이의 향연이었다.

“어머. 이것도 괜찮네.”

“……그렇습니까?”

“응. 근데 다른 것도 입어 봐요. 다른 스타일은…….”

“여기 있습니다, 레이디!”

“어머. 마담. 역시 눈치 한번.”

그렇게 한 벌, 두 벌.

“오. 이것도!”

세 벌, 네 벌.

“이게 최고일 거 같아요!”

옷가지 수가 점점 늘어갈수록 처음에는 부끄러워하던 얼굴이 점점 퍼렇게 질려갔다. 반면 그와 반대로 나를 비롯해 마담과 직원들은 최상급 옷걸이를 써 보는 즐거움에 입히면 입힐수록 신이 나 아주 날아갈 것 같았다.

입었다 벗었다를 몸소 겪으며 갈수록 힘든 듯 버거워하는 얼굴이 눈에 훤히 보였지만, 그래도 멈추질 못했다. 내 즐거운 얼굴 때문에 결국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만 하는 모습도 너무나 즐거워서.

“……지호 씨.”

참고 참다 결국 컬렉션 20벌을 거의 다 입어봤을 때쯤에야 간신히 말을 꺼내는 게 참 유지한다웠다.

“미안해요.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왜 즐거우셨습니까?”

유지한이 유지한답게 정말 간단한 질문을 해 왔다.

“뭘 입어도 다 예뻐서 기분 좋잖아요. 음. 여긴 이 커프스가 나으려나…….”

“…….”

“내 손에 이뻐지는 건 더 좋구.”

진심이었다. 내가 직접 꾸미는 데다 뭘 갖다대도 예쁜데 재미없을 리가. 심지어 상대는 내가 애정하던 내 최애인 당신이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

“그러니까 조금만 더 어울려 줘요.”

빙긋 웃자, 이번에도 역시 져 줄 수밖에 없는 유지한이 머뭇거리는 얼굴로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말을 하면 내가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거 아는 거죠.”

……설마 그럴 리가. 내가 당신이 아닌데, 어떻게 백 프로 확신을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조금 자신이 있을 뿐이다. 당신이 내게 져 줄 사람이라는 것에.

그야 상냥한 유지한이니까.

“유지한이 예뻐서 그러는 건데요?”

“……악마예요.”

새삼, 대체 몇 번을 당했는데도 변치 않고 이러는 건지. 진짜 바보인 건지, 아니면 다른 마음이 있는 건지.

“에이. 이렇게 이쁘게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악마라니. 너무해요.”

“아. 그건…….”

“또 사과하려고 그러네. 장난이에요.”

음……. 넥타이도 하는 게 좋을까.

지한의 표정을 재깍 눈치채고 사전 차단하면서도 한편으론 이런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는데, 가만히 그런 나를 내려다보던 유지한이 물었다.

“이런 거 처음 아니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그리 처음인 것처럼 신나 하냐고 유지한이 내게 물었다. 답지 않은 날카로운 질문에 나는 들고 있던 넥타이를 내려놓고 유지한을 올려다보았다.

“그야 유지한 씨도 처음은 아니잖아요? 만찬일 아침에도…….”

“그런 일적인 이유 말고요. 사적으로.”

“…….”

꽤나 집요하게 답을 바라는 진지한 얼굴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매우 선을 넘는 질문이지만 어떻게 보면 정말 하잘것없는 질문인데,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뭘 그리 긴장하고, 그러면서도 답을 듣고 싶어 하는 건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못할 답도 아니었기에 순순히 답을 건네 주었다.

“처음 해 보는 거예요.”

정말. 내가 누구한테 이렇게 세세하게 신경 쓸 인간 같은가. 대체 유지한은 나를 얼마나 과대평가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윤지우가 ‘누나! 이게 나아. 이게 나아?’라고 외칠 땐 솔직하게 답을 해주는 정도는 많이 했지만, 이렇게 내 쪽에서 손수 나서서 세세하게 하나하나 챙겨 준 적은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로…….”

아. 이래서 전남친은 숨길수록 좋은 거다. 들키면 뭘 해도 다 튀어나온다니까. 나는 진작 버린 지 오래인 남자인데 참 더럽게도 엮어댔다. 사람 짜증 나게.

“아, 진짜. 자꾸 이로운 이로운하는데, 그거 나한테 그리 달가운 이름 아니거든요? 세상에 전남친 얘기 자꾸 듣는 거 좋아하는 여자가 있을 거 같아요?”

“…….”

좋게 헤어졌으면 모르지만 그러지도 않았고, 이미 잊어버렸는데 계속 상기시키려 하는 것도 진짜 짜증 그 자체였다.

거기다 그 당사자 개새끼도 시간이 지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자기는 그대로라는 듯 굴어 사람을 심란하게 만들고 있는 상황이면 더 그랬다.

그럴 거면 진작, 헤어진 직후에라도 매달려보든가. 그땐 그럴 용기도 없던 새끼가 이제 와서 무슨.

“대체 진짜 그 이름이 계속 나오는 건지 모르겠네. 하도 신경 쓰니까 그냥 솔직히 말해 줄게요.”

“…….”

“없어요. 한 번도. 이렇게 해 준 적.”

아마 넌 그것이 서운했을 것이지만, 나는 너에게는 정말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어째서요?”

“나는 단 한 번도 이로운을 옷차림새나 외모 잣대로 대 본 적이 없었으니까.”

물론 네가 나를 위해 열심히 꾸민 모습도 몰라볼 만큼 둔하진 않았다. 그게 기쁘기도 했고, 예쁘기도 했다. 자체적으로 빛이 나는 외모니 보기만 해도 즐거웠고 말이다.

“그 녀석이 자고 일어나서 부스스한 머리로 잔뜩 흐트러진 차림을 해도 괜찮았고, 그 모습도 좋았어요. 꾸민 모습은 예뻐서 좋았고. 애초에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었어요.”

그냥 이로운이라서 좋았던 것이다. 좋아하는 상대에게 무슨 잘 꾸며진 차림만 바라고, 그것만 좋고,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걸, 너는 몰랐다. 결국 너는 내 아무것도 보지 않은 거다.

“지호 씨.”

“그러고 보니 조금 신기하긴 하네요. 내 인생에서 가장 길게 만난 게 이로운이긴 해도 굳이 이러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는데……. 유지한 씨에게는 이러고 있으니.”

역시 최애는 다른 걸까. 아니면 이로운을, 절절한 사랑까지는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뭐, 이런 인형놀이는 인형이 절절히 바래서 하는 건 애초에 재미없는 법이긴 했다. 하는 사람이 좋아야지.

“사진도 좀 잘 찍혀야 할 텐데.”

“……사진이요?”

이건 또 뭔 소리야? 하는 얼굴에 순간 나는 진심으로 이게 진짜 국내 랭킹 2위가 맞는지 의심했다. 월랭은 좀 차이가 나긴 하지만, 그래도 국랭으로는 내 바로 아래인 게 분명한데.

그렇다는 건 이게 능력은 있어도 그걸 무시할 만큼 미친 듯이 둔하거나, 워낙 많은 기레기들에게 시달려 이제는 그들의 기척도 무시해 버리는 스킬이 최상위까지 다다랐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다.

뭐, 진실이 어느 쪽이든, 네임드 랭커가 지금 의상실 주변을 둘러싼 이 선명한 기척을 못 알아채고 있었다는 것에 어이가 털렸다. 심지어 프로도 아니고 상당한 아마추어들이 내는 기척인데, 진짜 조금도 몰랐던 거야?

언빌리버블.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얘 알면 운다. 세상에는 여러 인간이 있는 거니 너무 그렇게 나무라지 말라며 제 화신을 다독입니다.]

내 적나라한 팩트폭력을 들은 성위님이 답지 않게 나를 다독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하게 보였나 보다. 아니 그래도…….

그래. 엄청 시달렸으면 그럴 수 있지.

차마 내가 있기 때문에, 내가 혼을 빼놔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나는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했다.

“저기 파리들…… 아니, 파파라치들 안 느껴져요?”

눈짓으로 그들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정말 안 느껴지느냐고.

물론 그와는 별개로 저들은 있어도 상관없었다. 있으면 오히려 땡큐였다. 애초에 이 모든 게 소문 나라고 하는 짓인데 당연한 거 아닌가.

다만…… 진짜 몰랐냐는 거지.

“아…….”

그제야 그들의 존재를 깨달았다는 듯 흘러나오는 얼빠진 소리에 진심으로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이걸 언제 키우냐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애를 업고 사는 기분이었다.

“근데……. 사진 찍혀도 됩니까?”

“찍혀야죠. 온 동네방네 소문나게.”

당신이 내 남자라고.

보통은 반대지만, 내 경우에는 언제나 이게 보통이라 장난스럽게 그리 말하며 윙크를 하자, 또 우리 주인공님 얼굴이 불타는 토마토가 되셨다.

“아고, 이런 거에 얼굴이 그렇게 터지려고 하면 나중에 다른 건 어떻게 하려 그래요?”

그게 나는 아니겠지만, 언젠가 유지한도 여자와 찐한 로맨스를 찍게 될 날이 올 텐데, 그땐 어쩌려고 저러는 건지 모르겠다. 물론 나는 귀엽기만 하지만, 세상 모든 여자들이 나처럼 느끼진 않을 테니까.

“원래 이런 것보단 키스라도 쫙― 대문짝만하게 실어야 직빵인데.”

키스신 만큼 완벽하게 사람들을 불타오르게 만드는 상황이 어디 있는가.

솔직히 말해 이로운 정도의 능숙함만 있었어도 그냥 한번 찐하게 찍어 보는 건데, 죄책감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이로운은 몰라도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고작 키스 한 번을 ‘고작’이라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그게 무엇보다 매력적인 부분이긴 했지만, 이럴 때는 조금 아쉽긴 했다. 어차피 내가 가질 수 없는 남자. 이 남자가 조금만이라도 가벼웠다면 장난으로라도 한번 맛이라도 봤을 텐데.

하긴. 정말 그랬다면 정작 맛보고 싶지 않아질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럼 내가 아끼는 유지한이 아니니까.

“키…… 키스라뇨!”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키스라는 단어가 무슨 지구멸망 급의 무언가라도 되는 건지 우리 퓨어보이님이 아주 기겁을 하시는지라 나는 현실로 돌아와 고개를 절레 저었다.

“아. 그럼요. 우리 순수한 길드장님께는 한참 먼 단어죠. 기대도 안 했어요.”

“아니……. 그런……. 저도 그런 것쯤…….”

“당연 불가능. 언빌리버블. 아니까 이거라도 좀 잘 맞춰 줘요.”

그럴듯하게. 알았지? 물론 지금도 그림은 충분히 땄지만, 내 재미를 위해서 살살 꼬드겼다.

다시 입을 다무는 주인공님을 보고 잘 넘어갔다 싶어 다시 액세서리들을 마저 고르는데…….

휙―

“뭐―!!”

갑자기 당겨진 팔에 놀라 제지할 새도 없이 몸이 휙 돌아갔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따질 수도 없었다. 몸이 돌려지자마자 타의에 의해 입이 막혀 버렸으니까.

“……!!”

촉―

오랜만에 입술에 닿는 타인의 입술 촉감은 정말 소름 끼치게 생생한 감각으로 내게 다가왔다.

키스까지도 아니었다. 그냥 입술 박치기. 그냥 뽀뽀라고 할 수 있는, 어찌 보면 심심하다 못해 웃음이 나올 하찮은 스킨십.

하지만 상대가 유지한이기 때문일까. 고작 그 뽀뽀 같지도 않은 뽀뽀에 온몸이 굳어 버렸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 어린애 같은 스킨십의 감촉이 너무나 생경하게 전신에 퍼져서.

그런 나는 보이지도 않는 건지, 저조차 처음 시도하는 스킨십에 딱딱하게 굳다 못해 정신이 나가버린 것인지, 이젠 전신이 토마토가 된 원인 제공자가 빽 소리쳤다.

“나. 나도 이런 건 아무렇……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다구욧―!”

……넌 도대체 몇 살인가. 진짜 어린애인가. 어린애나 할 법한 변명에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할 말을 잃었다.

“마담. 제가 계산하겠습니다.”

“아, 네! 그, 그럼요! 바로 해 드리겠습니다!”

완전히 굳어 있는 나를 지나친 유지한은 무슨 정신으로 움직이는지 모를 얼굴로 마담에게 가서 계산을 마쳤고 조금 정신이 돌아온 건지, 아니면 그 와중에 본능적으로 챙기는 건지 다시 돌아와 넋 나간 나를 붙잡고 가게를 나섰다.

“…….”

본인도 손하고 발이 같이 나갈 정도로 긴장하고 정신이 나가 있으면서, 나를 붙잡은 손은 빠져나가지도 못하게 단단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 어떻게든 제 옆에 묶어두려는 필사적인 얽매임을 보고 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푸핫!”

우리 고매하신 유지한 님과의 첫 키스는…….

“웃지 마세요.”

“아, 미안. 미안……. 크흡…….”

“아. 정말…….”

아늑하고, 풋풋한.

첫사랑의 맛이 났다.

* * *

“……이로운. 괜찮냐.”

하필 그때 마담의 가게에 있던 건 비단 지호와 지한 뿐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가게에 들어가는 것을 우연히 목격한 유해한과 이로운 역시 그들을 따라 가게로 들어와 있었다.

원래 목적은 이미 전 제국민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들의 꿍꿍이가 궁금하기도 해서 엿들으려 했던 것이다. 그들도 이 게이트를 클리어하려는 입장이었기에 상대의 계획을 아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유해한은 조금, 아니 많이 후회했다.

오늘 아침, 제국민을 떠들썩하게 만든 기사는 누가 봐도 일부러인 티가 팍팍 나서 주작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실제로 사이가 좋아 보이긴 했지만, 그 외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이 매우 티가 났던 두 사람이니만큼, 단기간에 이런 급발진이 이루어지리라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로운이 기사를 보자마자 신문을 활활 불태우며 분노하긴 했지만, 그 역시 진짜라고는 생각지 않았기에 그들은 별생각 없이 가게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저, 죄송하지만…….’

‘쉿. 구경만 하고 가겠네.’

그들의 지위를 내세워 직원을 입막음하고 몰래 숨어 그들의 계획을 엿들으려는데…….

“유지한이 예뻐서 그러는 건데요?”

“……악마예요.”

새삼 그들의 모습을 이렇게 보니 그냥 평범한, 알콩달콩한 연인처럼 보였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는, 아주 즐겁고 산뜻한 분위기가 풍겼다.

그에 화가 난 듯 이로운이 주먹을 꽉 쥐었지만, 저 모습이 퍽 자연스러운 한편, 누가 봐도 일부러 저러는 것 같은 티가 팍팍 났기에 꾹 참을 수 있었다.

“아, 진짜. 자꾸 이로운 이로운 하는데, 그거 나한테 그리 달가운 이름 아니거든요? 세상에 전남친 얘기 자꾸 듣는 거 좋아하는 여자가 있을 거 같아요?”

그러다 듣고 말았다.

“대체 진짜 그 이름이 계속 나오는 건지. 하도 얘기하니까 그냥 말해 줄게요.”

“…….”

“없어요. 한 번도. 이렇게 해 준 적.”

그동안 직접 입으로 듣지 못했던 윤지호의 속마음을.

“어째서요?”

“나는 단 한 번도 이로운을 옷차림새나 외모 잣대로 대 본 적이 없었으니까.”

단호한 목소리에 유해한은 그 순간 이로운을 빤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머저리 같은 새끼.

저렇게 단호하게 말할 정도면 한 번도 자신의 감정을 헷갈린 적이 없었다는 것인데, 그것을 제대로 보지 않고 갈구하기만 하다 이 꼴이라니. 그렇게 멍청한 일이 없었다.

저 말에 비로소 자신이 놓친 것을 깨닫고 눈물을 보이는 멍청한 놈의 모습이 조금도 안쓰러워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유해한은 이로운의 친구이긴 했지만, 이건 모두 이로운의 자업자득이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신기하긴 하네요. 내 인생에서 가장 길게 만난 게 이로운이긴 해도 굳이 이러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는데……. 유지한 씨에게는 이러고 있으니.”

아. 이건 좀 너무했네.

이제 그저 방관자가 된 유해한은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로운의 심장을 후벼파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다 드디어 그럴듯한 게 나왔다.

“사진도 좀 잘 찍혀야 할 텐데.”

역시 일부러였구만.

진짜 머리 쓰는 것 하나는 천재적인 여자였다. 어쩌다 저런 여자가 유지한한테 코가 꿰인 것인지 의문일 지경이었다. 딱 봐도 저런 타입은 유지한 같은 인물만 보면 울화통이 터질 텐데. 인생 최고의 넌센스였다.

그나저나 키스신이라니. 유지한을 데리고 그런 게 가능하기나 한가. 볼뽀뽀조차도 무리일 텐데.

“아. 그럼요. 우리 순수한 길드장님께는 한참 먼 단어죠. 기대도 안 했어요.”

“아니……. 그런……. 저도 그런 것쯤…….”

“당연 불가능. 언빌리버블. 아니까 이거라도 좀 잘 맞춰 줘요.”

그녀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지, 애시당초 기대도 안 했다는 듯 말했다. 백번 옳은 소리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매우 당연하지. 유지한이 무슨…….

그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

“헐. 미친.”

너무 놀라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지금 보는 것이 무엇인가. 정녕 저 박력남이 유지한이 맞는 것인가. 옆에서 분노하는 찌질한 전남친을 두고 유해한은 두 눈을 의심했다.

“나, 나도 이런 건 아무렇……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다구욧―!”

입술을 떼자마자 터지는 목소리를 듣고는 곧바로 유지한인 것을 확신했지만.

……넌 도대체 몇 살이야. 형으로서 진심으로 걱정이 들었다. 대체 몇 살이기에 요즘 7살도 안 할 소리를…….

잠시 유지한의 형으로서 그 광경을 보다 그는 제 옆에 있는 친구를 잊고 말았다.

“……야.”

뒤늦게 지금 상황을 깨닫고 황급히 친구를 다독이려 고개를 돌리는데, 이미 늦었다.

“아딜. 일전에 했던 말은 유효한가.”

이로운이 부르자, 유해한밖에 없던 공간이 일그러지며 허공에서 낯선 이가 등장했다. 딱 보아도 관계를 쌓아봤자 하등 이로울 게 없는 인간이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 것처럼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는 이가 이로운의 말에 즐겁게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이야. 대공님.”

그걸 보며 유해한은 이를 악물었다. 벼락같이 깨닫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의 흐름을.

우리는 이 이야기의 악역이었다. 그렇게 짜여진 이야기였다.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느끼며 유해한은 탄식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망했다.”

* * *

그 뒤 불탄 토마토를 잠재우자마자 눈물을 방울방울 떨구는 남자를 열심히 진정시키며 나름대로 재미있는 데이트를 하던 참이었다.

“와. 여기도 맛있어요!”

“정말이네요.”

“음식들은 그래도 우리한테 맞게 변형됐나 봐요.”

아니, 우리 입맛이 바뀐 거려나.

뭐 아무렴 어때. 하고 웃자 결국 같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주인공님은 예뻤고, 음식은 맛있었고. 재밌는 시간이었다.

그런 즐거운 한때에 초를 친 건, 갑자기 허공에서 등장한 웬 병신새끼였다.

“이런이런. 모든 일의 원흉인 주제에 혼자 행복하게 웃으면 쓰나요.”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당한 사람 서럽게. 그렇죠?

“……!!”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를 개소리에 얼이 빠져있는데, 순간이었다. 진짜 보기만 해도 기분 나쁜 칠흑 같은 어둠이 우리에게 쏟아지기 시작한 건.

“지호 씨……!”

예고 없이 퍼부어진 공격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사실 나는 자신 있었다. 고작 저 정도에 당하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하지만 변수를 잊고 있었다. 유지한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는걸.

타악―!

“……!!”

유지한이 나를 강하게 밀쳤다. 내가 이 어둠을 맞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갑작스러운 힘에 저항하지 못하고 나는 그대로 튕겨 나갔다. 그 순간, 어둠이 유지한을 완벽히 감쌌다.

내가 어떻게 하기도 전에.

“유지한―!!”

황급히 그에게로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어버려 한순간의 차이로 유지한을 잡지 못했다.

그때 내 얼굴이 어땠는지, 나는 보지 못했지만 꽤나 절망적인 얼굴이었나 보다.

“……나는 괜찮아요.”

그 상황에서도 그는 병신같이 나를 향해 웃으며 괜찮다고 말해 주었으니까.

그것을 마지막으로 유지한은 어둠과 함께 사라졌다.

“이게 뭐야…….”

허공을 허망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이 사태의 원흉이 아쉽다며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흐음. 같이 갔어도 괜찮았는데 말이죠. 그의 앞에서 연인을 차근차근 밟는 것도 큰 재미였을 텐데. 그래도 소득이 없진 않았으니 이 정도에 만족해야겠죠.”

쉬리릭―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소리에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마자 남자는 사라졌다.

그렇게 나 혼자 남겨진 자리에서,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파앗―!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제어할 수 없는 살기와 마력이 넘실거렸다.

“허억―!!”

“크윽……. 수…… 숨이……!”

“사…… 살려 줘……!!”

“엄…… 엄마……!!”

분노에 완전히 이성을 놓아버린 탓에 방출된 마력이 주변을 뒤덮었다. 사람들이 급격히 무릎을 꿇고 숨을 쉬지 못해 괴로워했으나 내게는 그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런 나를 되돌려 준 것은 성위님이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지금 그럴 때냐고, 일단 진정하고 어서 추격해야 하지 않겠냐 묻습니다.]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재빠르게 마력을 갈무리하자 그제야 주변의 소리가 들렸다.

“크흡……. 하아…….”

“바…… 방금 무슨…….”

“쿨럭! 커억!! 흐읍……! 하아…….”

황급히 돌아온 숨을 고르는 이들의 소리에 내가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가늠이 되었다.

죄책감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보다 먼저인 것이 있었기에 나는 서슴없이 그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주연 ‘헤이든 몬트리버 헤르세르크’가 이야기의 흑막에게 납치되었습니다.】

【‘헤이든 몬트리버 헤르세르크’를 구출하십시오.】

타이밍 한번 죽여 주는, 오랜만에 들려오는 시스템의 알림에 가차 없이 비소를 날리며 답했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럴 예정이야.

【스킬: ‘수백 개의 가면’을 발동합니다.】

【라이브러리가 펼쳐집니다.】

【시전자가 바라는 힘에 걸맞는 가면이 선정됩니다.】

【라이브러리가 활성화됩니다.】

난 이제껏 내 인생에서 내 것을 빼앗아가는 걸 가만 둔 역사가 없거든.

【‘강철의 여제’가 선정됩니다.】

【‘강철의 여제’가 라이브러리에 저장됩니다.】

【‘강철의 여제’의 가면을 씁니다.】

【진 ‘화신’ 스킬: 수백 개의 가면(S)이 전개됩니다.】

【성위 고유 스킬임으로 제한 시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살려둘 필요는 없겠지.”

고작해야 세계에 해밖에 안 될 존재들 따위.

강철의 여제가 시린 눈으로 그녀가 나아갈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검이 차갑게 울부짖었다.

* * *

바라던 이들을 만난 건 얼마 달리지도 않았을 때였다.

“넌―!”

이렇게 금방 마주치다니. 이런 행운이.

스윽―

달리면서 정확히 목만을 겨냥하고 검을 움직였다. 물 흐르듯 조금의 힘도 들이지 않고, 마치 검이 내 몸의 일부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스릉. 하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단번에 목이 베어졌다. 검에는 피 한 방울 묻어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목 역시 제가 잘린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듯, 수 초 뒤에 피가 터지며 몸이 뒤로 넘어갔다.

파앗―!

“이런 미친.”

피를 분수처럼 쏟으며 뒤로 넘어가는 제 동료의 모습에, 다른 놈이 기겁을 하며 뒤꽁무니를 뺐다. 도망친다 해서 저런 좋은 먹잇감을 놓칠 리는 없다. 굳이 방향을 틀어 달릴 필요도 없었다. 검격을 날리면 되는 일이니까.

휙―

검을 한번 휘두르자, 날카롭게 일어선 오러가 부메랑처럼 정확히 표적을 향해 날아갔다.

서걱―

“컥……!!”

털썩―

표적이 바닥으로 쓰러지는 것을 무심하게 지켜본 후,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발을 재촉했다.

강철의 여제가 가지는 특성인지, 얼음의 심장 특성인지, 아니면 분노 때문인지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 있는 건 어서 일을 처리해야겠다는 생각뿐. 심문 따윈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애초에 저런 잔챙이들이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을 리 없으니까.

하나로 모아 높게 묶은 머리카락이 빠른 속력에 꼬리처럼 휘날렸다.

‘강철의 여제’는 지금까지 썼던 가면들과는 사뭇 달랐다.

길고 짙은 남색 머리칼. 그 아래의 매우 앳되고 어린, 청순하기 그지없는 가냘픈 얼굴과 몸매. 그런 몸에 맞게 검 역시 얇고 유려한 레이피어였다. 하지만 이 레이피어가 만들어내는 위력은 그렇지 못했다.

게다가 갑옷이라고는 전혀 입지 않은 제복 차림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느껴지는 방어력. 그리고 절대 부서질 것 같지 않은 얇은 검은 강철의 여제가 왜 그런 이명을 가졌는지 증명해 주고 있었다.

강철로 온몸을 두른 것이 아니라, 작디작은 철 하나로 신화를 쓴 여성. 그야말로 경외를 품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어디서 이런…….”

“왜 우리를 찾아온 거지? 우리는 그대와 엮인 일이 없다.”

때문에 겉으로만 보면 얕볼 수밖에 없는 외모였음에도, 그 기세 때문에 마주치는 모든 이들은 그녀의 신위를 의심하지 않고 경계태세를 취했다.

우습기 그지없는 하룻강아지의 자태였지만.

“왜 엮인 것이 없지.”

“무슨……!”

“내 사람을 데려가지 않았나.”

“……!!”

“감히.”

무슨 자격으로.

그것만으로도 이 검으로 그들의 목을 베어 넘길 이유는 차고 넘쳤다.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자, 목숨의 위협을 느낀 이들이 살기 위해 재빨리 마법을 시전했다.

“죽어! 죽으라고!!”

강한 악의와 손에 모이는 기분 나쁜 검은 마력. 거기서 느껴지는 건 끝없는 고통과 원망. 정당하게 모으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동시에 규탄하는 영혼의 울부짖음이었다.

그것을 훤히 들여다보며 깨달을 수 있었다.

“……흑마법사.”

살다 살다 이런 것들까지 보게 될 줄이야.

타인의 생명으로 마력을 사용하는 자. 영혼이 저주받은 자. 어느 소설에서든 흔히 등장하는 존재들.

물론 선한 인물로 등장할 때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흑마법사들은 배척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오늘에야 그 이유를 보다 확실히 알았다. 저렇게 기분 나쁜 마력을 가지고 있는데, 세상 누가 호의적일 수 있을까.

그리고 그들의 정체를 깨닫자마자 나는 그들이 왜 유지한을 납치했는지 대충 알아챘다. 황족의 영혼만큼 탐이 나는 영혼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이 헤르세르크 제국의 황족은 태양신의 축복을 받은 존재로 알려져 있고, 그렇게 떠받들어지고 있었다. 그 증거로 그들의 마력은 선명하고 눈이 부신 금색이었다. 유지한의 원래 마력처럼. 그래서 유지한이 황족으로 선택되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다 죽어도 상관없는 것들이라는 거지.”

현재 내 눈에 보이는 이 2명. 숨어있는 것들 6명. 총 8명. 상대하기 충분한 숫자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들이 날리는 기분 나쁜 마력을 베어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뭐, 뭐야! 마법을 베?!”

“소. 소드마스터다! 다들 도망쳐!”

오러로 흑마법을 베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걸 알아챈 이들은 마법과 저주를 난사하면서 황급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음……. 이렇게 하찮은 수준을 봐서는 흑마법을 터득한 지 얼마 되지 않았군.”

마법의 위력과 농도를 살피며 ‘강철의 여제’가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재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이들 또한 살려두고 뭘 캐물어 본다 한들 중요한 정보는 들을 수 없을 것이라고.

그것으로 그들의 운명은 정해졌다.

서걱―

“아아아악―!! 내…… 내 팔이!!”

다시는 이딴 짓을 하지 못하게 양팔이 베어진 자.

스윽―

“이런……!”

변명을 할 새도 없이 목이 베어진 자.

휙―

“커헉―!”

기습을 하려다 그대로 목이 꿰뚫린 자.

그 뒤로는 그저 심판의 시간이었다. 조금의 힘도 들이지 않고, 목표물들을 하나둘씩 처리해갔다.

처벅. 처벅.

어느덧 바닥이 피로 질척해졌고 시체들의 더미가 쌓여 나갔지만,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구해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정말 사람을 고생시키는 데는 일가견이 있어.”

여러모로.

어쩜 이리도 매일 사건 사고를 몰고 다니는지. 주인공이라 어쩔 수 없다지만 정말 상상 이상이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납치된 공주를 구하러 가는 비장한 왕자를 보는 것 같다며 팝콘을 준비하고 한편의 멋진 동화를 기대합니다.]

오죽하면 성위님마저 이런 소리를 할까. 이 정도면 내 쪽이 주인공이어야 하는 거 아니냐며 고개를 절레 내젓는데…….

“누…… 누굴…… 찾는 거지?”

팔만 베이고 살아남은 놈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안에는 공포와 함께 살기 위한 절박함이 가득했다. 나는 질문에 무심히 답했다.

“글쎄. 너 따위가 알고 있을 거 같지 않은데.”

고작 해 봐야 잔챙이로밖에 보이지 않는 놈이 알면 뭘 얼마나 알고 있을까. 나중에 귀찮아질 걸 생각해 그냥 죽이려 검을 드는데, 시리게 우는 검을 본 녀석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화…… 황자!”

“……!”

“황자를 찾으러 온 거지?! 그러게 내가 그건 위험하다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아무리 홀대받는 황자라 해도 황자는 황자. 그것도 태양신의 축복을 받은 존재니만큼 소드마스터 급의 인물들이 나서는 것은 당연한 거였는데……! 녀석이 씹어먹을 듯 한탄했다.

“그렇게 생각했으면서 잘도 저질러 놓았군.”

동정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맞장구를 쳐 주자, 감정이 터져 나온 듯 녀석이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아딜 녀석이 대공의 비호를 받았으니 문제없다고 자신만만하게 씨부리며 진행한 거니까!”

오. 그건 몰랐는데.

기대 안 했는데 의외로 아주 쓸 만한 정보가 나왔다.

“대공?”

대공이라.

지금 헤르세르크의 대공은 셋. 그중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인물은…….

“이바노프 대공을 엮었다고, 이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말했어. 그런데 이게!”

“……이바노프 대공이라고.”

이로운 이 개씹새가.

가면을 쓰고 있었기에 당연히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았지만, 속에서 오만 쌍욕이 튀어나왔다.

안 그럴 줄 알았는데. 결국 구질구질 티를 내느라 이따위로 굴다니. 그냥 밟을 걸 귀찮아서 내버려 뒀더니 그게 독이 되어 버렸다.

물론 이게 단순히 이로운의 구질구질함만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보기엔 마치 정해진 듯 전개가 너무나 자연스레 이어지고 있었으니까. 이상할 정도로.

아마 이로운은 이 이야기의 악역으로 정해진 것이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로운 개인의 감정이 아주 안 들어간 것도 아닐 것이다. 제일 짜증 나는 건 그거였다.

하나만 하든가.

스릉―

“그래서 황자는 어디 있지?”

목숨 이상의 정보를 잘 털어줘서 죽일 생각이 사라졌다. 검을 거두고 묻자, 녀석은 목숨을 건졌다는 것을 알고 덜덜 떨며 잘린 팔을 뻗었다.

의심 없이 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실 유지한의 마력은 질릴 정도로 익숙한 것이었기에, 굳이 어디 있냐며 잔챙이들을 쥐잡듯 잡을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물은 것은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너는 그래도 살려둘 만한가.

살아있다 한들 아무것도 못 할 잔챙이라면 그 정도 자비는 내려줄 수 있으니까.

“사…… 살았다……. 진짜로…… 살았어.”

등 뒤에서 환희에 겨워 눈물 젖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은 돌아갈 기회가 있는 놈 같았다. 시체 더미에서 저 혼자 살아남은 놈이 이후 정상적으로 살아갈지는 의문이었지만. 그것까지는 제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 * *

앞으로 얼마나 나아갔을까.

이윽고 듣기만 해도 혈압이 오르는 목소리가 허공에서 들려왔다.

“어라? 이 정도 급의 인물이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역시 세상은 넓군요.”

당연하지. 지가 뭐라도 되는 양.

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허공에 뜬 예의 그 녀석이 보였다. 자신만만한 태도로 이쪽을 비웃고 있는 표정.

이렇게 확실히 마주하고 나니 녀석이 어떤 타입인지 딱 보였다.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잘 났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저만 보이는 하잘것없는 쓰레기.

가장 상대하기 싫은 케이스였다.

“황자는 어디 있지?”

검을 들고 있었음에도 아주 제대로 얕보는 듯, 녀석이 내 물음에 키득키득 웃었다.

“좋은 곳에 아주 잘 모셔다 놓았지요.”

곧 있을 의식을 위해 고이 다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앞선 놈들을 전부 죽이고 왔다는 걸 분명 모르지 않을 테도 이 자신감은 대체 뭘까. 멍청한 놈의 무지일까, 아니면 앞선 버러지들이랑은 차원이 다르다는 자신감일까. 어느 쪽이든 불쾌한 건 마찬가지였다.

“……곱게 내어줄 생각은 당연히 없겠지.”

“아이고, 무슨 그런 당연한 말씀을. 그쪽이야말로 곱게 돌아가 주시지 않을 것 아니십니까.”

물론 곱게 돌려보내지도 않을 테지만. 욕망에 번들거리는 눈을 보며 나는 가차 없이 조소를 흘렸다.

아. 저 빌어먹을 쓰레기한테는 나도 실험체로 보이는구나. 아니, 이 경우는 제물인가.

어쨌든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내 눈에 보이는 녀석은 저렇게 자신감을 내뿜을 만큼의 실력자가 전혀 아니었으니까. 앞선 버러지들보다는 한두 배 정도 강하긴 했지만, 그래도 버러지는 버러지. 경계하며 싸우기엔 너무 수준 이하였다.

“……별로 기대는 안 되지만, 그래도 기대해 보지.”

“예?”

“어디 자신만만한 만큼 그럴듯한지.”

녀석이 비웃었던 것을 분개하듯 레이피어가 날카롭게 빛났다.

스릉―

검이 울음을 터뜨리는 것과 동시에 푸른 오러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파아앗―!

“무슨―!!”

고작 개방했을 뿐인 푸른 오러가 날카롭게 몸을 스치며 상처를 내자, 당황한 녀석이 황급히 마력을 내뿜으며 몸을 보호했다.

[“나를 지켜!!”]

명령에 따라 마력이 몸을 보호하는 광경은 꽤나 보기 힘든 것이었기에 조금 놀란 얼굴을 해 보였다.

“……흠.”

백마법이면 몰라도 흑마법의 매개가 되는 검은 마력이 주인의 명령을 따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대단하십니다. 그냥 소드마스터 정도가 아닌 것 같군요. 분명 좋은 제물이 되실 수 있을 겁니다.”

방금 죽을 뻔한 건 잊었는지 녀석이 개소리를 씨부렸다. 봐준 거였는데도 죽을 뻔한 주제에 믿는 구석이 있는 걸까.

그리고 그냥 소드마스터라니. 지금 녀석의 수준은 정말로 ‘그냥’ 소드마스터가 와도 쉽게 잡을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자만인지 근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근거는 의외로 금방 드러났다.

휙―

“……!”

녀석이 마력을 전개함과 동시에 검으로 녀석을 베었지만, 녀석은 연기처럼 흔들리며 베어지지 않았다.

휙― 촤악―!

“하하. 이제 당신과 저의 차이를 좀 아시겠습니까.”

“……그렇군.”

녀석이 자신만만한 이유가 이것이었다. 오러를 두른 검으로도, 오러로도 베어지지 않는다니. 아마 웬만한 마법 역시 통하지도 않을 것이다.

여전히 엄청나게 강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로지, 저 특성 하나로 인해 그는 저보다 대단한 어떤 존재에게도 패배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곱게 포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당신 같은 재료는 귀하거든요.”

“……흠.”

그러나, 녀석이 한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그건 내가 할 말 같은데.”

“공격이 하나도 통하지 않는 걸 뻔히 보고도 아직 그런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충고 하나 하지.”

‘강철의 여제’는 그냥 소드마스터가 아니라는 거.

“저보다 강한 상대를 만났을 때는 자만하지 않는 게 좋아. 상대가 어떤 걸 숨겨놨을지 아나.”

“하. 그렇다고 한들 나를 베지는 못……!”

“그건 버러지인 네 생각일 뿐이지.”

‘강철의 여제’를 무시해도 너무 무시했다.

이 얇디얇은 레이피어밖에 들 수 없는 여린 몸으로 이 경지까지 오른 자다. 오로지 검 하나로만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그녀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휘황찬란한 스킬도 없었다.

그녀에게 주어진 건 오직 한가지.

“괴…… 괴물……!”

“그러게 말했지 않나.”

[‘내 검 앞에 선 자는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내 검 앞에 무릎을 꿇게 되리라.’]

“자만하지 말라고.”

그 어떤 스킬조차 필요치 않는 위대한 권능이었다. 찬란한 빛을 휘감은 레이피어가 하늘을 갈랐다.

“이럴 수는 없어―!!”

녀석이 비명과 함께 빛에 타들어 가 사라졌다. 암흑성에 빠져 거기에 영혼이 절여진 인간이 이 빛을 견딜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타들어 가는 녀석을 묵묵히 지켜보며 나는 기다렸다.

“크아아악―! 이제 다 됐었는데!! 고작, 고작 이 정도에……!!”

녀석이 내뱉을 자를.

내가 구해야만 하는 자를.

정말 손이 많이 가고, 사랑스러운 바보를.

“이렇게 끝날 거 같으냐!! 반드시! 이렇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가 내게 약속했으니까!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었던 거잖아! 내가 황자를 데려갈 때도!!”

“…….”

“위대한 힘을! 권력을! 젠장……! 벨로아 루체……!”

뭐?

“……벨로아 루체?”

방금 내 귀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것인가. 벨로아 루체라니. 조금도 예상치 못했던 이름이 튀어나오자, 너무 놀라 몸이 굳어 버렸다.

그래서, 조금 더 이야기를 캐냈어야 했는데도 녀석이 사라지는 걸 그냥 바라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녀석은 사라진 후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방금까지 있던 공간이 일그러지며 바뀌었다. 이곳 자체가 녀석의 마력으로 일그러진 채였던 것이었다. 시전자가 사라졌으니, 당연히 원래의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장소는 흑마법사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게 하얀 민들레가 가득한,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리고 그 민들레 사이에 곱게 누워 있는 남자는.

내가 찾았던 그 남자였다.

“태평하게 잠이나 자고 있다니.”

확 걷어차서 깨워 버릴까. 어차피 지금은 완전 다른 모습이니 못할 것도 없지 싶었다. 물론, 그냥 원래의 모습으로도 못할 건 없었지만.

그래도 잠든 모습 또한 어디 때릴 곳 없이 예뻐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일어나시죠. 왕자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잠자는 숲속의 왕자가 눈을 떴다.

* * *

“여긴……. 지호 씨!”

자아알한다.

녀석이 부르는 지호 씨가 제대로 삐딱선을 탔다. 눈을 뜨자마자 자신부터 찾는 모습은 솔직히 말해 기분 좋았지만, 지 상황이 어떤지 살피지도 않고 저러는 건 좀 화가 나는 일이어서.

나보다 자신을 더 생각했으면 좋겠다. 제발 좀. 이 남자에게 나는 그렇게 약한 여자였나.

하지만 각성 전에도 나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에게 ‘사막 한가운데 떨어져도 살아남을 년’이라는 소리를 듣는 여자였다. 어디 가서 함부로 당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다.

내 주변의 아무도 나를 걱정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연애할 때는 나름 노력이라도 하니까, 그냥 성깔대로 살라고 조언하는 정도?

그런데,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내가 길 가다 삐끗하는 것조차 걱정하는, 참 이상한 남자였다.

“눈물 나는 이타심이군.”

강철의 여제가 진심으로 질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납치된 건 자기면서, 일어나자마자 남부터 걱정하는 꼴이 그녀가 보기에도 기가 막혔나 보다.

조소를 아끼지 않자 유지한이 그제야 눈앞에 있는 나를, 강철의 여제의 존재를 눈치챘다.

“……당신은?”

난생처음 보는 존재를 마주한 데 대한 당황스러움이 눈에 훤히 보였지만, 이미 삐딱선을 탄 나는 뚱하게 팔짱을 끼고 유지한을 노려보았다.

그저 바라보기만 했을 뿐인데, 무엇을 눈치챈 것인지 유지한이 설마 하는 얼굴로 물었다.

“……설마, 무명?”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가면을 쓸 때마다 마력도 전부 바뀌어서 동일인이라 추측하기가 거의 불가능한데, 이상한 데 감이 좋은 이 남자는 평소엔 더럽게 둔하면서 무명의 존재는 찰떡같이 알아봤다.

벌써 두 번째니 우연히 찍어 맞혔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무명이란 존재가 이 남자에게 꽤나 강렬했나보다. 이 둔탱이가 단박에 떠올릴 정도로.

이 정도면 이제껏 무명이 윤지호라는 것을 들키지 않은 게 용했다.

“참 잘도 알아봐. 이런 거 보면 재주인데……. 아직도 왜 이렇게 아방한지.”

손가락으로 우리 주인공님의 코를 살짝 때렸다. 이 성격을 정말 어떻게 고치나 싶어 암울하면서도, 동시에 제가 귀여워하고 애정하는 부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만약 이 세계가 헌터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원래의 세계였다면, 고치려는 노력은 개뿔. 이걸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언제나 예뻐하기만 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소설 속 인물이 아니었다면, 확 덮쳐서 내 거 만들었을 거 같기도 하고.

어느 쪽이든 가정일 뿐이다. 상상과 현실은 또 다르니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우리 주인공님께서 나를 보며 매우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무명. 당신도 들어와 있었던 겁니까?”

“……어쩌다 보니?”

사람 인생은 모르는 거지. 밥 잘 먹다가, 아니 잘 먹진 못했지만 밥 먹다가 이렇게 게이트에 들어올 줄 누가 알았을까.

너랑.

이러한 소감을 말해줄 수는 없어 그냥 한마디로 축약했다. 대답 같지도 않은 대답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듯, 유지한은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럼 현재 국내에 랭커는 아무도 없는 겁니까?”

……아!

누구 씨처럼 나라 걱정은 한 톨도 하지 않아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최상위 랭커들이 모인 만찬회. 최상위 랭커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대표 길드의 기둥, 브레인들까지 전부 모인 만찬회에서 열린 게이트다.

아직 다 만나보지 못했지만, 만찬장 밖에 있던 윤지우까지 흘러들어 왔으니 다른 이들도 전부 게이트에 들어왔다고 봐도 무방했다. 국내 최고의 전력이 전부 사라져 버린 초유의 사태인 것이다.

그럼에도 게이트에 들어온 이들이 여유로워 보였던 이유는 바로 나.

무명은 만찬회에 참석하지 않았기에 국내에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들에게 보여준 무위는 자신들이 없다 해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만큼 압도적이었으니까. 물론 내가 나서 준다는 보장은 없었겠지만, 그래도 내가 버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름 큰 위안이었겠지.

한데, 나까지 게이트에 휘말려 버렸다. 아직 이 사실을 눈치챈 인간들은 없겠지만, 알려지는 순간 나라에 꽤나 큰 위협이 될 터였다.

“12위부터는 있겠지.”

“……당신이 게이트에 빠진 걸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있을 거 같나?”

물론 윤지호가 빠진 건 너도나도 다 알지. 하지만 그 윤지호가 월랭 1위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할 테니,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얼른 게이트를 클리어해야겠습니다.”

방금 전까진 잠자는 숲속의 왕자였던 놈이 귀여운 헛소리를 했다.

“글쎄. 지금 꼴을 봐서는 영 힘들어 보이는데.”

누가 봐도 납치당한 처지 아니냐는 눈빛을 아끼지 않자, 지한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이. 이건! 방심한 겁니다!”

아니. 너는 그냥 늘 그럴 뿐이잖아.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계속 자신을 희생할 거면서.

나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하면 할수록 짜증이 날 거 같아서.

“그래. 그럼 이제 돌아가면 되겠군. 데려다줘야 하나?”

“……알아서 갈 겁니다.”

오기인지 아니면 진짜로 자신 있는 건지 모를 대답을 들으면서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를 되새겼다.

유지한은 아마 여기로 온 기억이 없을 터이니 이곳을 빠져나가는 데에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아무도 찾지 않는 금기 구역. 미로의 숲 안이었으니까.

‘그런데도 무슨 배짱인지.’

어쭙잖은 패기가 가당치 않았지만, 이번에는 그 의사를 존중해 주기로 했다. 어차피 먼저 가서 의심 가지 않게 상황을 짜 맞춰 놓아야 했다.

족칠 새끼도 있었고.

“그럼 먼저 실례하지. 가는 도중 위험한 것들은 내가 처리해놓을 테니 그 길을 따라와도 좋을 테고.”

“왜 그렇게까지…….”

“강해지라고, 하지 않았나.”

그때까지는 내가 지켜줄 거라고.

망자의 귀부인 때와는 성격부터가 달라 부드럽게 말해 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의미는 충분히 전해졌으리라.

그 말을 끝으로 발끝에 힘을 주어 도약했다.

평범한 몸이 아닌 덕에, 고작 점프를 했을 뿐인데 믿을 수 없는 높이로 날아올랐다. 중간중간 나뭇가지들을 디디며 속도를 올렸다.

“캬아아아아―!!”

“시끄럽군.”

서걱. 턱― 푸수슉―! 쿵―!!

유지한에게 위협이 될 것 같은 몬스터들을 처치하면서도 나는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유지한의 말을 듣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물론 나라 같은 건 어떻게 되든 전혀 걱정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더 빨리 이 게이트를 클리어할 필요가 있었다.

* * *

“영애?”

“아니. 잠깐……!”

신데렐라가 유리구두를 떨어트리고 도망칠 때처럼 나는 드레스를 붙잡고 미친 듯 전속력으로 달려 황궁 안으로 들어갔다. 당황한 경비병들과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모두 무시했다.

“지호 씨!”

“윤지호!”

“실장님!”

그렇게 황궁으로 들어가자, 그쪽에 집결되어 있던 우리 쪽 사람들이 당황한 얼굴로 속속들이 달려왔다. 나는 벅찬 숨을 달래며 그들에게 황급히 이 사건을 전달했다.

“지…… 지한 씨가……!”

“네? 길드장님이요?”

“설마…….”

“납치됐어요!! 빨리! 구하러 가야 해요!!”

정확히는 미로를 헤매고 있을 인간을 구하러 가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나는 이것을 모르고 있어야 했기에 시치미를 뚝 떼고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른요! 위험할지도 몰라요! 흑마법사로 보였는데……!”

물론 이미 그 흑마법사는 내가 처치했다는 이야기는 쏙 뺐다.

“……!! 얼른 기사단에게 알리겠습니다.”

“레쓰비 놈에게도 연락할게요. 마탑 마법사니까 마법으로 금방 찾을 수 있을지 몰라요.”

그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한숨 돌렸다. 이렇게 얘기했으니 유지한을 빠르게 찾아올 것이다. 그래도 황족이고, 황족이 흑마법사의 손에 들어가는 건 제국 자체의 위협이었으니 아마 열심히 찾겠지.

그동안 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녀가 내게 약속했으니까!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었던 거잖아! 내가 황자를 데려갈 때도!!’

‘위대한 힘을! 권력을! 젠장……! 벨로아 루체……!’

드디어 이 빌어먹을 이야기의 진상을 들여다본 기분이었다.

* * *

“지호 씨는 일단 돌아가세요.”

“맞아요. 현재 황궁은 지호 씨에게 위험합니다.”

회사원과 민현이 운을 띄우자 윤지우가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쳤다.

“스캔들을 그렇게 크게 냈는데, 황궁에서 누나를 가만둘 리 있겠어? 얼른 집에 가!”

해 줄 얘기도 있었지만, 그건 여기서 할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윤지우는 일단 빨리 제 누나부터 대피시키려 했다.

역시 감 하나는 기가 막힌 윤지호의 말이 이번에도 옳았다. ‘벨로아 루체’는 그냥 평범한 귀족 영애가 아니었다. 그걸 그는 오늘 황궁에서 깨달았다.

‘어머. 재주도 좋아, 정말. 황태자 전하에 이어 3황자 전하라니…….’

‘그런데 말이 안 되지 않아요? 누가 봐도 황태자 전하가 가장 좋은 선택일 텐데요. 즉위하실 게 분명하니 장차 황후가 될 수 있는데.’

‘바라는 게 그 자리가 아닌 거지. 게다가 솔직히 겉으로만 보면 황태자 전하보다 3황자 전하가 훨씬…….’

‘그건 그렇죠.’

‘대체 무슨 매력이 있기에 그렇게 고귀하신 분들이 푹 빠지신 걸까요?’

아무것도 모르는 대다수의 귀족들은 전부 이런 시답지 않은 대화만 했다. 처음에는 감탄이 나왔다. 노리고 한 거면 윤지호 너 진짜 천재라고.

본인이 여주라도 될 생각인가.

윤지호와 유지한의 조합이라. 물론 평소에도 많이 보고 있지만, 그걸 로맨스의 정점, 연인으로 묶어 놓고 보자면 기분이 참 묘했다. 이 스캔들이 전부 연극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까, 사감 없이 담담히 평가해 볼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길드장님이 불쌍했다. 매우. 맨날 휘둘리며 살 게 뻔하니까.

그렇게 실없는 추측을 하다, 문득 이곳에서의 제 형인 체셔 베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벨로아 루체는 황태자가 지금 그 자리에 오르기에 지대한 공헌을 한 여자니까.’

대체 그건 무슨 뜻일까. 자신은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윤지우는 자신할 수 있었다. 윤지호는 이 한마디만 들어도 뭔가 바로 감을 잡을 거라는 걸.

‘내 누나지만 가끔 대단하다니까.’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같은 태를 빌어 태어났는데도 참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뭐, 이제는 그런 것조차 이해해 버리긴 했지만.

“민현 선…… 아니, 아이리스 경!”

“아……. 베어 경.”

그러던 중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 상대가 다 죽어가는 얼굴로 지우를 향해 몸을 돌렸다.

“왜, 꼴이…….”

대체 뭘 했기에 그러냐고 황당한 얼굴로 묻자, 민현이 얼굴을 와그작 구겼다.

“빌어먹을 폭검 새…… 죄송합니다. 머리가 과열돼서.”

굳이 더 말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저 울분을 더 들으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 지우는 그간의 교육에 따라 아무것도 묻지 않고 넘어갔다.

“어, 저쪽도 마침 오시네요. 모리스 경!”

이쪽이에요, 이쪽!

대신 막 등장한 사람을 향해 활기차게 손을 흔드는데, 저 멀리서 회사원님이 보는 눈도 신경 쓰지 않고 본래의 속력으로 후다닥 달려와 윤지우의 입을 틀어막았다.

“왜 여기 있는 겁니까!!”

“……예?”

아니, 내가 무슨 범죄자도 아니고, 여기 내 직장이기도 한데?

물론 후작가 자제로써 기사서임을 받아 기사단에 속해 있긴 하지만, 평소엔 자율훈련을 할 수 있어서 출근은 성실히 안 해도 되지만 말이다.

온몸으로 당황한 티를 풀풀 내고 있는데도, 그런 윤지우를 챙겨줄 여력이 없다는 듯 회사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얼른 황궁을 나가요! 빨리! 위험해질 수 있다고요!”

“예?”

아니, 알아듣게 설명을 좀 해 주세요. 민현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도 회사원은 더 말하지 않고 다급하게 지우를 밀어댈 뿐이었다.

얼떨결에 밀리는 대로 밀려가던 그는 이윽고 최악의 사태를 마주하고 말았다.

“……!!”

“이런 젠장…….”

회사원이 나지막이 욕을 짓씹었다. 그 음성이 훤히 들리면서도 지우는 굳은 채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러나 저도 말을 할 수 있었다면 회사원과 똑같이 말했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상대는 일개 후작가 삼남인 그가 웬만해서는 절대 만날 수 없는 이이자, 현재 상황상 만나서 절대 좋을 리가 없는 이였으니까.

“……폐, 폐하. 태양신의 축복이 늘 함께하시길.”

“제국의 태양을 뵈옵니다.”

민현과 회사원은 힘겹게 입을 떼었다. 저절로 손이 덜덜 떨렸다.

눈앞에 있는 이는 이 제국의 황제였다. 지금은 얌전해졌지만, 한때는 모든 주변국들을 무력으로 짓밟았던 위대한 사자.

소설이 주는 영향 때문인지, 아니면 본래가 가지고 있는 무력 때문인지, 앞에 서는 것조차 숨이 턱턱 막혀왔다. 마력을 최대한으로 전개하는 유지한에게서도 느껴본 적 없는 위압감이었다.

두 사람은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짓씹었다.

“컥……!”

그런 이들의 속사정을 모르는 초보 헌터 윤지우는 숨을 쉬기도 벅찬 듯, 차마 인사도 하지 못하고 열심히 벅찬 숨을 고를 뿐이었다. 과연 제 아들의 여자를 뺏은 남자에게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생각하면서.

그리고 그런 이들을 무감각하게 내려다보며 황제가 입을 열었다.

“……결국 움직이는군.”

“……?!”

누가?

모두가 묻고 싶었지만, 아득한 하늘에게 감히 질문을 던질 수는 없었다. 다음 순간, 황제의 시선이 윤지우에게 꽂혔다.

“너를 선택한 건 나름 운명에 순응하겠다는 뜻인 줄 알았건만. 역시 그럴 리가 없나.”

“…….”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를 말이었다.

하지만 윤지우는, 고르지 못한 숨 때문에 머리조차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서도 직감적으로 알았다. 저건 윤지호를, ‘벨로아 루체’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걸. 왜냐면, 윤지호와 같이 태어나 자라고 엮이면서 가장 많이 겪은 상황이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황제가 무감한 얼굴로 그들을 향해 명했다.

“벨로아 루체에게 전하라.”

“……?!”

“때가 되었다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를 찾아오라고. 그대가 약속을 지킨 것처럼…….”

“…….”

“나 역시 약속을 지킬 터이니.”

터벅터벅―

엄청난 말을 뱉었음에도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런 말을 뱉은 적조차 없다는 듯 황제는 유유히 그들을 지나쳤다. 과연 군림하는 제왕의 모습이었다.

“……푸하!”

황제의 기운이 사라지자, 너나 할 것 없이 참았던 숨을 토했다. 엄청난 쓰나미가 쓸고 지나간 것 같았다.

“방금 뭐냐…….”

“황제까지 벨로아 루체를 알고 있어…….”

“미쳤다. 대체 정체가 뭐야…….”

그 순간이 돼서야, 그들도 이제 직감했다. 힌트는 지호가 충분히 주었으니 헷갈릴 이유도 없었다.

‘벨로아 루체’는 이 이야기의 중심이었다. 주인공, 혹은 주인공에 못지않을, 거대한 이야기의 주체.

“지호 씨를 만나야 합니다.”

“아니, 그전에 황궁을 얼른 나가야 해요.”

윤지호가 있을 곳은 뻔했다. 분명 그녀의 성격상 간만에 찾아온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겠다며 집에서 뒹굴거리고 있겠지. 그러니 서둘러 저택으로 가야 했다.

‘그러면서 더럽게 날카롭고 정보를 빠르게 수집하는 건 정말 재주네.’

그때, 갑자기 황궁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영애?!”

“아니. 잠깐……!”

그 소리를 들으며, 윤지우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저건 윤지호라는 걸. 언제나 조용하게 등장하질 않으니까.

“지…… 지한 씨가……!”

아니나 다를까.

“네? 길드장님이요?”

“설마…….”

“납치됐어요!! 빨리! 구하러 가야 해요!!”

거기다 더럽게 파격적인 소식까지 들고 왔다.

지호의 말을 듣고 순식간에 황궁 전 기사단이 출동 준비를 마쳤다. 흑마법사가 기생할 곳은 제국에 몇 없었으니 금세 수사망이 좁혀졌다.

레쓰비한테도 연락을 넣자 마탑도 빠르게 움직이겠다는 답이 왔으니, 유지한은 금방 찾아올 게 분명했다.

이제 문제는…….

“아니, 황궁은 언제나 위험한데 뭘 새삼.”

그들이 겪은 충격적인 사건을 전혀 모르는 윤지호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일단 집에 가자! 가서 이야기해.”

여기서 전하기엔 듣는 귀와 퍼트릴 입이 너무 많아, 지우가 열심히 돌려 말하며 지호의 등을 떠미는데…….

“……로아.”

“……?”

‘아놔……. 갑자기 너는 또 왜 나오세요?’

꼭 이런 건 하나씩 안 일어나고 동시다발로 터지더라. 하나만 해. 제발.

윤지우가 절망했다.

* * *

윤지우가 절망하든 말든,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신들린 듯한 연기로 이야기의 한 챕터를 잘 넘겼다 생각했는데, 갑자기 이런 또 다른 챕터가 시작되다니…….

어찌 보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던 이야기였다. 좀 놀라긴 했지만, 벨로아 루체와 엮인 이야기를 보아 언젠가는 한 번 이렇게 될 거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렇게까지 당황할 것도 없었지만, 여기 세 사람은 다른 듯했다. 윤지우랑 놀더니 같이 간이 콩알만 해진 건가.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게 아니라 뭐가 있는 것 같다고. 안 그러면 이 직진형 인간들이 이렇게 놀란 얼굴을 할 리가 없다 추리합니다.]

음.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아무리 교육해도 안 되는 윤지우를 비롯해, 원티드 인간들은 전부 길드장 특성이 옮기라도 한 건지 기본적으로 다 더럽게 올곧고 인생이 직진뿐인 인간들밖에 없었다. 편법 따위는 쓸 줄도 몰랐고, 돌아가는 법도 몰랐다.

그러다 보니 돌려 말하는 것도 안 통하고, 항상 정확히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해 줘야 했다. 그런 이들이 이 정도 심각한 반응을 보이는 건, 확실히 평범하지 않았다.

‘이따가 물어봐야겠어.’

분석을 마치고, 나는 일단 우아하게 예를 갖추었다.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부디, 언젠가 제국의 올바른 태양이 되시길.”

황태자 이시스 에우로페 헤르세르크. 1황자이자, 황제의 장자.

그가 아직 황태자가 아니었을 무렵, 황후의 적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지기반은 매우 약했다. 왜냐하면, 황후는 사교계 데뷔조차 하지 못하는 변방의 가난한 자작 영애였기 때문이었다.(물론 평민인 하녀 소생의 3황자 유지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런데 어떻게 그런 황후가 황제와 만났냐 하면, 황제가 한참 정복 전쟁을 벌이느라 궁에만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쟁통에 역경을 딛고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고, 부부가 되었다.

물론 이 신분제 사회를 생각하면 자작 영애가 황후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황제가 그 누구도 항의할 수 없는 절대자이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 급격한 신분 상승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이들이 사라졌다는 것은 아니었다. 황제가 무서워 직접적으로 괴롭히거나 하는 건 꿈조차 꾸지 못했지만 따돌림은 당연히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크게 상관없었다 한다. 둘만의 세계에 빠져 살았으니까. 물론 그 기간은 짧았다. 황후가 1황자를 낳음과 동시에 사망했으니까.

한미한 가문과 태어나자마자 어미를 잃은 황자의 지지기반이 뭐 얼마나 있겠는가. 적의가 있으면 있었지, 쓸만한 세력은 하나도 없었다.

황제가 그의 뒤를 지지해주고 있었지만, 황태자의 자리는 비단 황제의 힘만으로 되는 자리가 아니었다. 황제가 제 의지로 그를 황태자로 만들고 뒤이어 황제로 세운다 한들, 그의 사후에는 과연 어떻게 될지. 차기 황제가 국정을 운영할 때 아무도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으면 모두 무용지물이었으니.

그게 이전까지의 1황자였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황태자가 되었다. 지지기반도 얻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여전하구나. 너는.”

“황송하옵니다.”

여전하다니? 순간 머릿속이 카오스가 됐다. 진짜 벨로아 루체, 정체가 뭐냐. 그냥 청혼만 받은 건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대체 뭐가 있는 거야.

이런 내 머릿속은 알 리 없는 황태자는 마치 버림받은 전남친처럼 찌질하고 아련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인사말까지 그대로라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겠어.”

“…….”

“나더러 황제가 되라고 소망하는 것까지도 전부.”

……이 새끼는 뭘까. 말하는 것부터가 유약함이 보였다. 대체 무슨 수로 황태자가 된…… 아.

바로 눈치를 깠다. 저렇게 티를 팍팍 내고 있는데 모를 수가. 이 벨로아 루체가 그를 황태자로 만든 거다.

하지만, 어떻게……?

“걱정 마. 네가 안배한 대로, 나는 분명 황제가 될 거니까. 그러니까…….”

“…….”

“네가 헤이든을 선택한 것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을 거다.”

“…….”

“네가 나아가는 길이 네게 만족스러운 길이었음 좋겠군.”

아무래도 알아야 할 것이 더 늘어난 것 같다. 그리고 그 해답은…….

“누나. 저택 가서 얘기하자.”

“……그래.”

아마 이쪽에서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자, 그럼 준비도 끝났겠다.”

“…….”

“아는 거 다 불어요. 각자. 전부.”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하인들을 모두 물리고 단호한 미소와 함께 협박을 하자, 기다렸다는 듯 모두들 엄청난 이야기를 쏟아냈다.

“……황제가 그랬다…….”

줄줄이 사탕처럼 흘러나오는 이야기가 아주 가관이었다. 벨로아 루체. 진짜 가지가지 한다. 예상을 했어서 놀랍지도 않았다. 대신 어이가 터져나가긴 했지만.

“그뿐 아니라 우리 형도!”

“아. 얘 큰일 났다. 벌써 동화되어 가네.”

망했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보란 듯 탄식하며 혀를 끌끌 차자 윤지우와 민현이 뭐가 문제냐는 듯 나를 돌아봤다. 베테랑도 저러는 꼬라지에 절로 한숨이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다행히 그들보다 훨씬 네임드에 베테랑인 회사원은 내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마찬가지로 한숨을 푹푹 쉬며 대신 답을 해 주었다.

“스토리성 던전은 이게 문제죠. 웬만한 헌터들도 쉽게 실수하니까.”

“……네? 왜요. 고작 형이라고 한 것뿐인데…….”

윤지우는 여전히 뭐가 문제인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이 한심한 동생을 보며 진짜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야. 내가 말했잖아. 네 가족은 나라고.”

“당연한 거지.”

뭘 그런 당연한 걸 또 말하냐는 물음에 진짜 멍청해서 짜증이 폭발할 것 같았다.

“그 당연한 게 당연하게 안 될 수 있으니까 새겨놓으라고 말한 거라고.”

아니면 내가 뭐하러 굳이 그런 오글거리는 말을 굳이 꺼냈겠냐. 걱정이 결국 현실이 되니 진짜 머리를 싸매고 드러눕고 싶어졌다.

말은 별거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문제는 저 별거 아닌 말을 시작으로 이곳과 동화되는 것이 문제였다.

“이곳에 동화되면 안 됩니다. 지우 군.”

“……동화요?”

“던전 클리어를 위해선 이야기에 섞여들 수밖에 없지만, 그러는 사이 점점 스며들어 가는 겁니다. 이 세계에.”

그렇게 동화되는 순간, 더 이상 그들은 이방인이 아닌 이곳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스토리성 던전의 가장 큰 위험성. 만약 100% 동화되면 이후 던전이 클리어되더라도 돌아가지 못할 수 있었다.

물론, 우리는 여럿이 함께 들어왔으니 아주 그렇게 되는 일은 잘 없겠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것이 뭐 있겠는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지나치게 리얼하고 섬세한 세계관을 보며 직감한 것이었다. 오래 있으면 위험하다고.

그런데 이 망할 동생넘은 힌트를 줘도 받아먹질 못했다.

“이런 걸 동생이라고…….”

“아. 알았다고.”

대놓고 한탄을 하자, 윤지우 놈이 쪽팔리긴 한지 알았으니까 그만하라고 틱틱거렸다. 진짜 저걸 언제 사람 만들어서 어디다 내놓지.

그래도 동생이라고, 결국엔 그만하라고 드러누워 아우성치는 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쩌겠나. 하나 있는 피붙이인데.

그러고 있는 내게 회사원이 물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황태자 문제로 엮이기도 했으니 상황이 여러모로 복잡합니다.”

황궁 중심 인물들의 얘기를 엿듣고, 벨로아 루체가 1황자의 세력을 만들어 그를 황태자로 즉위시켰다는 정확하고 자세한 정보를 건네준 회사원은 난감한 얼굴로 물었다. 내가 이쪽으로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 여긴 듯했다.

확실히 까도 까도 속이 안 보이는 양파 같은 인물이라 매우 짜증 나긴 했다.

“벨로아 루체가 황태자를 지금의 자리로 올려줬을 거란 것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어요.”

비록 나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예?”

“어떻게?”

대수롭지 않은 내 말에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단체 바보들의 집단인가.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알 수 있는 것을.

“말해 줬잖아. 벨로아 루체는 황태자의 청혼을 받았다고.”

“그게 왜. 뭐 반해서 그랬을 수도 있잖아.”

아, 얘가 나보다 로판 더 본 거 같아.

내 구매리스트를 나 몰래 정독했음이 분명한 남동생의 은밀한 취향을 깨달으며, 진짜 귀찮지만 모두를 위해 이번 한 번만 자세히 설명해 주기로 했다.

“일개 백작 영애가 황태자의 청혼을 받는다……. 열렬한 사랑이 바탕이라고 해도, 그렇다면 여론이 부정적이어야지. 하지만 주변에선 그저 놀랍다는 정도뿐이었어. 이유는 몰라도 벨로아 루체가 훗날 황후가 된다 해도 수긍한다는 분위기였지.”

“……아.”

“열렬한 사랑에 빠진 당사자라면 몰라도 모든 이들이 그렇다는 건 말이 안 되지. 그렇다는 건 결국 이 벨로아 루체에게 대단한 뭔가가 있다는 건데, 그녀의 가문인 루체 백작가는 돈은 풍족하게 있지만 딱히 뭐 대단할 게 없는 상인 집안이야. 백작 부부 역시 평범하고.”

“…….”

“결론은 이 벨로아 루체가, 뭔가 했다는 거지.”

뭘 어떻게 한 건지가 문제지.

“황태자의 청혼을 거절했으니 그를 도운 건 뭔가를 위한 수단에 불과할 거고. 그게 뭘까.”

사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남의 사정 따위 귀찮아.

이래서 나는 방탈출 카페 같은 것도 질색했다. 관심 없어, 남이 저질러 놓은 일의 해결 같은 거. 왜 내가 해결해 줘야 하지.

“대체 벨로아 루체가 뭘 한 걸까요?”

“……음. 사실 이 인물 자체가 특별하단 건 알겠는데, 특별한 힘이 있다거나 이런 건 모르겠으니. 아마 뭔가 가지고 있다는 거겠죠?”

일단 힘은 몽땅 내 거고, 내 힘은 다 우주최강의 특별함이라 벨로아 루체에게 특별한 힘이 있다고 해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을 거 같지만, 몸에 변화는 전혀 없으니 다른 쪽으로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혹시 벨로아 루체가 좋아한 사람 누군지 알아요?”

“……예?”

“우리가 그걸 어떻게 알아.”

“들은 거 없나 해서 한번 물어봤어.”

“근데 그게 왜?”

“이 이야기가 로판 장르는 맞는 거 같아서.”

기승전 로맨스가 빠질 수는 없지.

물론 아닐 수도 있겠고, 로판이라고는 해도 로맨스가 없는 경우도 있으니 확신할 수 없지만, 왠지 자꾸 감이 왔다. 이 모든 시작에는 로맨스가 깔려 있을 거 같다는.

그게 아니면 개연성이 너무나 부족…….

“……이 세계 최강자라 통하는 이가 누구 있죠?”

다소 뜬금없는 내 질문에 민현이 답을 해 주었다.

“현 헤르세르크 황제. 소드마스터인 미하일 공작. 그리고…… 마탑의 창시자, 아세르입니다. 아세르는 늙지 않는 몸으로 대륙을 떠돌아 현재 흔적이 묘연하고요.”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죽었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기에 현 최강자로 통한다고 덧붙였다.

그 답을 듣고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일단 황제는…… 그가 말했던 걸로 보아 주요인물은 맞아도 결정적인 포인트가 부족했고……. 미하일 공작은 본 적조차 없다. 하지만 그건 아세르도…….

“일단, 유지한 씨를 찾아 오죠. 길드장님 없이 얘기하면 쓰나요.”

“뭐야. 뭔가 눈치 깠지?”

떠오른 바는 있지만 아직 무엇도 확신할 수 없기에 일단 유지한부터 찾자고 하자, 괜히 피붙이가 아닌 걸 증명하듯 이럴 때만 예리한 윤지우가 예민하게 찔러왔다.

딱히 감출 필요가 없었기에 시원스럽게 답변을 들려 주었다.

“조금 심증만.”

“대체 무슨 머리통을 가지고 있는 거야.”

“니가 멍청한 거야.”

머리는 그냥 장식으로 들고 다니는 게 아니라고, 제발. ……뭐, 조금 생각하다가 ‘에씨, 그냥 가!’하며 몸빵할 놈에게 바랄 소리는 아닌가.

한심함에 혀를 끌끌 차는 내게 이번에도 민현이 상황 보고를 해 주었다.

“아마. 금방 찾을 겁니다. 흑마법사가 있는 곳은 한정되어 있고, 때마침 이상한 기색이 보인다며 신고가 들어온 곳도 있어서 우선 그쪽으로 향했거든요. 수색은 금방일 테니…….”

그 때, 양반은 못 되는 듯 우리 주인공님께서 등장하셨다.

“지호 씨!”

“길드장!”

“선배!!”

빠져나오자마자 나를 찾아온 듯 꼴이 엉망이었다. 예상하긴 했지만, 고생깨나 했나 보다. 예상을 했어도 막상 그 꼴을 보니 기분이 좀 많이, 그랬다.

“……꼴이 그게 뭐예요.”

“아, 이건…….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퍽이나. 정말 저렇게 말하는 게 습관인가 보다. 그래도 기껏 든든한 척을 하는 그를 생각해 뭐라 하진 못했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결국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웃어줄 뿐.

* * *

“어쩌다 이건 다 긁혔어?!”

“아……. 달려오느라.”

“…….”

이런 병……. 회사원이 눈으로 쌍욕을 했다. 내 심정도 같았다. 랭킹 어디다 갖다 버렸냐.

“길드장님. 여기 연고요.”

“아. 감사합니다.”

윤지우가 늘 가지고 다니는 연고를 건네주자 두말 않고 받는 모습에 할 말을 포기했다. 민현 역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저런 게 리더라는 사실에 새삼 회의감이 드나 보다.

정말 이해가 잘 되어 그냥 등을 토닥여 주고 있는데, 우리 길드장님이 연고를 치덕치덕 바르면서 돌연 선언을 하셨다.

“모두에게 알려 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

“어떤 거요?”

연고를 바르면서 진지한 얼굴을 해 봤자 참 위엄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다들 익숙했기에 암말 않고 얌전히 귀를 기울였다. 그런 이들의 심정은 조금도 알지 못하는 지한이 덤덤하면서도 심각하게 제가 알아낸 사실을 전달했다.

“무명이 이 게이트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

“……!!”

그 선언에 민현과 회사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윤지우도 터진 눈을 감추지 못했고.

그런 그들을 보며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게 이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당사자로서 사태의 위험성 정도는 인지하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이들에게 공감할 만한 정의감은 없었다.

아. 생각해 보면 각자 소중한 이들이 그곳에 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게 가장 소중한 이들은…….

“누나. 누나. 어떡해?”

“다들 서둘러야 할 거 같습니다.”

어쩌다 보니 모두 여기 있었으니까. 오히려 내가 밖에 있었다면 어떻게든 뛰어 들어왔을 것이다.

“당장 나가야겠습니다.”

“바깥에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조차 알 수 없으니…….”

초조함이 눈에 훤히 보였다. 주인공님까지 저러고 있으니, 확실히 서둘러 움직이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요. 그럼 재빠르게 이 게이트를 클리어해 봐요.”

조금 손해를 감수해야 될 수도 있지만.

* * *

“이거 실화야?!”

옆에서 시원하게 내지르는 샤우팅에 나는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두 귀를 틀어막았다.

“아, 또 왜.”

니들이 빨리빨리 끝내자며. 바라는 대로 해 주려고 하는데 뭐가 문제냐고 타박하자,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한 시스콤이 소리쳤다.

“아니, 그게 왜 황제를 알현하는 걸로 이어지는데!!”

그 말대로, 우린 현재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알현실 앞에 서 있었다. 누가 봐도 확실한 급발진이긴 했다.

“당연히 필요하니까.”

하지만 급발진만큼 사이다스럽고 로판에 효과적인 것이 있던가. 로판 불변의 법칙을 나는 믿었다. 막무가내인 내 모습에 질린 윤지우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가서 뭘 뜯어내려고 그러는 건데?”

뭐 뜯을 거 아니면 그 무거운 엉덩이 뗄 생각도 안 할 게 뻔하다며, 꿍꿍이를 얼른 불라고 윤지우가 되도 않는 협박질을 시도했다.

코웃음만 칠 솜방망이 발차기였지만, 그래도 사기 진작을 위해 좀 넓은 마음을 가져 주기로 했다.

“황제한테 용건이 뭐가 있겠냐.”

내가 삥을 뜯겠어, 뭘 뜯겠어. 황제를 상대로. 얘는 나를 2N년이나 봐 왔음에도 아직도 내가 그렇게 파악이 안 되나 보다. 사실 어떻게 보면 답은 정말 뻔한데 말이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게 네 동생의 귀엽고 깜찍한 점 아니겠냐며 동생을 두둔합니다.]

‘뭐. 그렇긴 하지.’

“전혀 모르겠거든!”

저 녀석이 어느 날부터 뭘 잘못 먹고 내가 하려는 일 하나하나를 귀신같이 다 알고 나서서 땍땍거렸으면 그것도 소름 끼치는 일이었을 것이다.

“로판의 엔딩이라면 자고로, 결혼 아니겠어?”

“……!!”

자고로 동생은 이렇게 멍청하게 귀여운 맛도 있어야 했다.

* * *

“……난 이제 그분이 무서워지기 시작했어.”

“뭐야, 이제 그런 거야?”

엄청 둔하네. 대체 그 눈치로 어떻게 세상을 사냐고, 그래서 네가 아직 고백도 못 하고 있는 거라고 회사원이 가차 없이 촌철살인의 한마디를 날렸다.

다른 건 그러려니 넘겨도 ‘고백’은 그냥 넘길 수 없는 민현이 대번에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입니까!!”

새빨개진 얼굴이 누가 봐도 ‘나 찔렸소.’ 하는 얼굴이었다.

저 잘난 얼굴로 뭐 하고 있는 건지. 한심하다 못해 한탄이 하늘을 찔렀지만, 그래도 순수한 청년 그 자체의 모습에 안쓰러워진 회사원은 평소 성격대로 톡 쏘아 주지 못했다.

그런 회사원을 보던 민현은 결국 제 발등 제가 찍는 건지 토마토가 된 얼굴로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티 많이 나요?”

“둔탱이 당사자 빼고 많이들 알걸?”

아, 실장님은 모르겠다. 그런 거에 관심 없어 보였거든.

한마디로 신입 빼고(길드장은 당연히 제외) 다 안다는 소리에 민현은 절망했다. 그래도 당사자는 손톱만큼도 모른다는 게 위안이 됨과 동시에 더 절망스러웠다. 이렇게까지 다 아는데 왜 그리도 몰라주는지. 그래도 나름 열심히 표현했다 생각했는데…….

아주 땅을 파고 기어들어 가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혀를 끌끌 찬 회사원은 비록 안쓰럽긴 해도 너그러이 지켜봐 줄 요량은 없었기에 적당히 기다려 주다 수정구를 들었다.

“이제 연락한다?”

“아, 진짜 선배!!”

“응. 니 짝사랑 기다려주다 반평생.”

“……그 정도예요?”

정말 그 정도로 심하냐는 절망스러운 얼굴에 회사원은 저게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순간 고민했다. 이미 그 정도 걸렸으면서 말은 잘한다.

제가 본 것만 장장 거의 5년이다. 그 긴긴 시간 동안 아무것도 못한 놈이 말은 절절하기 짝이 없었다. 차라리 저 절절함의 반의반의 반만이라도 행동으로 옮겼으면 진작 결판이 나고도 남았을 거다.

“어. 건다.”

“서, 선배!”

말할 가치도 없어, 곧바로 수정구를 작동시키자마자 옆에서 곡소리가 튀어나왔지만 회사원은 익숙하게 개무시했다.

그리고, 특유의 성격답게 재빠르게 수신자가 연락을 받았다.

「“어. 회사원. 와이.”」

“서유라. 그쪽 지역에 유명한 신물 하나 있지.”

「“……신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익숙하게 들려오는 쌍욕에 회사원이 그럼 그렇지. 라고 혀를 찼다. 예상은 했지만, 진짜 이런 거 알아보는 데는 길드장만큼 문외한인 녀석이었다.

그래서 둘이 소꿉친구인가. 답 없는 생각을 하며 그가 말했다.

“응. 그럴 줄 알았어. 북쪽을 수호한다고 하는 수호석이 있을 거야.”

「“그게 왜?”」

그게 뭐 어쨌다고?

순진무구하게 물어오는 질문에 순간 회사원은 이럴 때마다 윤지호가 싱글싱글 웃으며 놀리는 듯 말했던 게 떠올랐다. 그때마다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는데. 한번 따라 해 볼까?

“응. 그거 부수래.”

「“뭐?”」

그걸? 나보고?

대체 뭔소리냐고 묻는 황당한 목소리에 대고, 윤지호에게 빙의한 듯 회사원이 즐겁게 답했다.

“응. 너더러 부수라고.”

「“아니…….”」

막상 따라 해 보니 이렇게 재미질 수가 없었다. 이래서 윤지호가 이런 화법을 끊을 수 없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걸 왜 부숴야 하는데?”」

“이야기를 통째로 부순대.”

사실 뭔 소린지 이쪽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따라서 나쁠 것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 보면 제가 생각해도 참 신기한 일이었다. 원래 이렇게 무작정 따르는 편이 아닌데.

“그럼 난 이만. 레쓰비에게도 연락해야 돼.”

「“뭐?! 야. 잠깐!!”」

“아, 참고로 최대한 빨리 부수고 튀래. 우리 시간 별로 없어.”

「“알아듣게 얘기해 줄래?”」

“설명할 시간도 아까우니까, 그냥 빨리 이 게이트를 클리어해야 된다는 것만 알아둬. 끊는다.”

「“야! 이 개새……!!”」

뚝―

가차 없이 끊어지는 통화에 이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민현은 넋이 나갔다.

“……그래도 돼요?”

유라의 성격을 잘 알기에 후환이 두려워서.

하지만 회사원은 태평하기만 했다.

“괜찮아. 윤지호가 시켰다 할 거야.”

“…….”

이런 게 바로 권력 남용. 아. 짜릿하여라. 권력의 참맛을 맛보며 회사원이 사악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즐거움도 잠시.

「“네. 꼰대 아져씨.”」

“닥쳐. 아저씨 아니랬지!”

「“응. 서른 살 아재.”」

“아, 저 새끼를 진짜…….”

“선배, 용건. 용건!”

물론, 천적 레쓰비 앞에서는 다 무용지물이었지만.

* * *

알현실 문이 열렸다. 안쪽으로는 황제가 있는 방까지 이어지는 긴 복도가 나 있었다. 주위는 기척 하나 없이 조용했다.

복도에 들어서서 한참 걷자, 정 중앙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윤지우는 여기서부터는 들어올 수 없어서 두고 온 게 천추의 한이었다. 있었다면 나를 대신에 온갖 놀람을 다 보여주었을 텐데.

애석한 마음을 누르고 그에게 솔직하게 물었다.

“아니, 왜 들어왔어요?”

“지호 씨 혼자 다 하게 할 수는 없어서요.”

……있어도 도움이 안 될 것 같은데.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실상 그렇다 해서 그 마음까지 쓸모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그런 생각을 눈치챈 것인지 지한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분명 전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겠지만, 그래도…….”

“…….”

“곁에 있는 것 정도는 하고 싶어요.”

욕심인가요?

그런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남자를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 단언컨대 세상에 그럴 수 있는 여자는 없을 것이다. 이건 비단 나뿐만은 아닐 거라 믿으며, 나는 익숙하게 항복을 선언했다.

“자, 그럼.”

휙휙―

“?”

지한의 눈앞에다 대고 손을 휘휘 흔들자,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지 못한 얼빠진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얼빠진 모습조차 이제 익숙해진 건지 콩깍지가 쓰인 건지,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한바탕 선언하러 가는 건데, 손은 잡아야 그럴듯해 보이죠.”

그리 말하며 다시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자, 험한 길을 달려왔을 것이 분명한, 굳은살이 박인 단단한 손이 내 손을 꽉 잡아 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놓을 생각이 없다는 듯.

“폐하께서 드시라고 하십니다.”

“예.”

그의 말은 옳았다. 유지한은 분명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 뻔했지만, 나를 잡은 이 단단한 손만으로도.

“자. 가요.”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 * *

북쪽의 수호석. 아스레스타.

황실 기사단이 소유하고 있는 신성의 검. 스텔라.

마탑의 마력 기동석.

내가 그들에게 없애 달라고 부탁한 것들이었다.

왜 그 물건들인지를 물으면 이유는 간단했다. 세 가지 모두 고대부터 내려온, 이 제국을 지킨다는, 없어지면 제국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물건이었으니까. 마탑의 마력 기동석만 하더라도 부서지는 순간 제국을 빠르게 혼란으로 물들일 수 있었다.

그건 곧, 이 이야기의 배경 자체를 무너뜨리겠다는 것이었다. 아예 배경을 무너뜨리면, 이야기는 그때부터 정해진 흐름대로 절대 갈 수 없으니까.

이런 쉬운 방법이 있음에도 그동안 나를 포함해 아무도 그것을 시도하려 하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이야기의 근본을 깨뜨리면 어떻게 될지 몰랐으니까. 자칫 잘못하면 이 게이트에 갇혀 평생 클리어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런 계획을 지금에서야 실행에 옮긴 건 반쯤 도박이었다. 그리고 그 도박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근거는, 아직 전부는 아니었지만 대충 예상되는 이 이야기의 진실과…….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자신의 감.

한마디로 근거는 없다는 거다.

하지만 나는 자신 있었다. 분명 실패하지 않으리란 걸.

“결국, 나를 찾아왔군.”

황제가 엄청난 위압감을 뽐내며 제왕답게 나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회사원을 비롯한 다른 이들이 하도 겁을 주기에 어느 정도 각오했는데, 막상 마주하니 위엄 넘치긴 하지만 위압감에 짓눌리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뭐야. 그 정도는 아닌데?’

괜히 쫄았네. 라고 생각하는데…….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팝콘을 주섬주섬 준비하면서 네가 고작 저딴 거에 짓눌릴 거 같냐며 코웃음을 칩니다.]

[아. 물론 네 옆에 놈은 아직 그 정도는 아닐 거라고 덧붙입니다.]

응. 그래 보이네……. 옆에서 바짝 긴장해 있는 인간을 보고 있자니 실감이 났다.

사담은 이쯤 하고, 황제를 더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 서둘러 영업용 미소를 쓰고 입을 열었다.

“언젠간 오게 될 운명이었습니다. 오늘은 아마 폐하의 뜻과는 다른 이유로 온 거겠지만요.”

“다른 뜻이라……?”

아, 물론 아주 다른 뜻이리라 자신할 수 있었다.

“벨로아 백작의 장녀 벨로아 루체가, 폐하의 삼남이자 제국의 축복인 헤이든 몬트리버 헤르세르크와 영원한 인연을 맺고자 합니다.”

“……!!”

할 말이 이거였는지는 예상치 못한 듯, 우리 맹하신 주인공님께서 화등잔만 하게 커진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 그의 시선을 즐기며 나는 쐐기를 박았다.

“혼인을 허하여 주시겠습니까. 폐하.”

단호하게 웃으며 쐐기를 박자, 옆에서 주인공님이 다급하게 속삭여왔다.

“지, 지호 씨?”

이건 대체 무슨 일이냐며 당황하다 못해 아주 정신줄이 가출한 것 같은 모습에 나는 즐겁게 웃음을 터트렸다. 잊어버리고 있을 줄 알았다.

내가 처음부터 얘기하지 않았나.

“내가 말했잖아요. ‘장래희망은 당신의 신부.’라고.”

그런 작전명을 괜히 지은 줄 아나.

그 작전명을 이제야 상기한 듯한 남자가 토마토 저리 가라 할 정도의 터질 듯한 얼굴로 내 손을 꼭 잡아 왔다. 그 모습에 이곳이 어딘지도 잊고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하여간. 내 말은 허투루 듣는 게 아니에요.”

“……새겨 둘게요.”

푸핫―!

가슴이 간질거리고, 간만에 설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흠. 이것 참 흥미롭군. 내 고집불통 아들이 이걸 해낼 줄이야.”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며 황제가 무척이나 놀랍다는 투로 말했다. 그 안에는 순수한 감탄까지 섞여 있었다. 설마 기대하지도 않았던 이에게서 이런 걸 보게 될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놀람의 포인트가 자기 아들의 새로운 일면을 발견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나를 낚아 왔다는 것 그 자체인지는 조금 헷갈렸다. 어느 쪽이든 그렇게 기분이 좋은 소린 아니었다.

“폐하께서 제게 기대하신 것이 있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인생을 흥미로만 살 거 같은 절대자가 하는 말은 비꼬는 거로밖에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다른 절대자가 배배 꼬인 심정을 그대로 표출했다.

그러자 황제의 심기를 거스를까 겁이 난 모자란 주인공이 옆에서 안절부절못했다. 저건 진짜 언제 자라서 절대자가 되나 싶었다. 진짜 절대자는 보통하고는 궤가 다르다는 걸 아직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미 이룰 것을 모두 이룬 절대자는 이런 걸로 일희일비하지 하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모든 감정에 초탈하게 된 지 오래니까.

그렇게 되면 결국 남는 건…….

“……호오. 물론이지. 그대는 내게 즐거움을 안겨 준 몇 안 되는 존재니 말이야.”

흥미뿐.

물론 난 완벽한 일반인이지만, 소설을 읽어서 그 정도는 깨우치고 있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사기 치지 말라며 선글라스를 끼고 관전하며 격하게 야유합니다.]

‘아이 씨.’

이건 뭐 가만히를 못 있어. 관전하려면 조용히 관전이나 할 것이지.

“제가 무엇이라고 고작 폐하께 그런 즐거움을 안겨드릴 수 있겠습니까.”

망할 성위를 뒤로 하고 일단 냅다 발뺌을 하자, 황제가 보란 듯 코웃음을 쳤다.

“겸손이 지나치면 기만이다. 벨로아 루체. 그대의 진실을 아는 자라면 이 대륙의 누구라도 경의를 표하지 않을 이가 없을 텐데.”

“…….”

아, 역시. 왜 꼭 이런 감은 틀리지 않는지. 진짜 이럴 때는 너무 잘 맞아서 짜증이 났다.

그럼에도 이곳에 온 건, 진실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저에게는 전부 부질없는 것들입니다.”

이건 벨로아 루체보다 내 진심이었다.

나는 이 빌어먹을 세계도, 이 벨로아 루체에게도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없는 관심을 바득바득 긁어모아야 하는 짜증을 아는가.

정말 이곳에 빠진 망할 윤지우와 저기 맹한 주인공님만 아니었더라면 대번에 이 세계를 전부 부수고 홀로 탈출했을 것이다. 세계멸망 엔딩은 모두를 데려가지는 못할지언정, 혼자는 유유히 탈출할 수 있을 테니까.

게이트에 갇히거나, 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내 별님이 그렇게 둘 리가 없으니까.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대의 연인이 목숨을 바쳐 이룬 세계. 연인의 마음을 알기에 그대 역시 그의 뜻대로 세계의 궤도를 맞춘 것이 아닌가.”

죽은 연인.

그 말을 듣자마자 모든 안개가 걷힌 듯 진실이 보였다.

“……이미 세상에 없는 이의 뜻을, 평생 따라줄 이유는 없습니다.”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을 맺자, 내 의지를 깨달은 시스템이 뒤늦게 화려한 알림을 보내왔다.

【시스템을 갱신 중입니다.】

【믿을 수 없는 업적을 이루어 냈습니다.】

【정해진 이야기가 아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셨습니다.】

【헤이든 몬트리버 헤르세르크의 구출에 훌륭히 성공하셨습니다.】

【모든 운명을 뒤틀어 이야기가 결말에 치닫습니다.】

【그대가 원하는 길을 걸어가십시오.】

【그대가 가는 길이 곧, 이야기입니다.】

화려하게 이어지는 개소리를 어이없게 바라보고 있는데, 그런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한 건지 황제가 답지 않게 덕담을 던졌다.

“그렇게 여긴다면 다행이고. 그대는 이 세상을 살아갈 자가 아닌가.”

“…….”

“이곳은 그대의 연인이 그대를 위해 만든 세상일세.”

역시 벨로아 루체는 빌어먹을 여자였다.

* * *

<결혼식 14일 전>

대망의 이벤트를 앞두고 신랑 신부의 일행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진짜…… 이거 부수면 돼요?”

부숴도 돼요? 정말?

황실 기사단 보고에 잠입해 목적했던 것을 얻은 윤지우가 망설임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회사원이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말했다.

“방금 확실히 부수라고 연락 왔어. 확신이 생기신 거야.”

“아. 그럼 얼른 부숴요.”

윤지호가 확신하는 건데, 잘되겠지. 라는 맹목적인 믿음이 담긴 우디르급 태세 전환에 회사원이 얼빠진 얼굴로 윤지우를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윤지우는 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회사원 역시 그의 손 위에 손을 겹치며 마력을 더했다.

솨아아앗―!

찬란한 빛이 검과 함께 피어올랐다.

―스텔라 파괴 완료―

<결혼식 13일 전>

“……헐. 이거 진짜야?”

“대박.”

장하리와 유해한이 신문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설마설마했지만, 이런 식으로 일을 벌일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이곳에 떨어져 시스템의 안내를 받았을 때부터 이야기의 엔딩을 보면 되겠다고 생각하긴 했다. 그러나 그건 정해진 스토리를 따르는 거였지, 이렇게 스스로 움직여 ‘로판’에 걸맞은 엔딩을 만들어 내겠다고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려면 본래 이야기 규모에 걸맞게 상당히 판을 키워야 할 것이고, 헌터라면 그런 고행길을 가느니 간편하게 몬스터를 해치우는 방법 쪽으로 생각할 테니까.

실제로 그들은 처음엔 거의 다 때려 부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머리를 쓸 줄 아는 유해한이 말려서 망정이었지.

그래서 현재 이쪽은 저희가 가진 이권으로 상권을 차지해 황녀를 손에 넣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략이든 이득을 노린 결합이든, 황녀와 혼인이 결정되면 그것 역시 ‘헤르세르크의 반려’라는 말에 부합했으니까.

이 계획도 유해한이 이로운을 끌어들이며 밀어붙여 결정한 거지, 아니었으면 다 때려 부쉈을 거다.

“와. 머리 진짜 잘 썼다. 아. 원티드가 이점을 잘 잡아서 그런가?”

그래도 이 정도면 딱 해피엔딩의 정석이지. 작전 잘 짰다. 장하리가 감탄했다.

“이거면 우리가 뭐 할 게 없겠는데요?”

졸지에 날로 먹게 생긴 폭검이 개꿀이라며 박수를 쳤다. 저희야 이제 결혼식 가서 박수만 치면 엔딩일 테니 이렇게 편할 수가 있나.

“황자 결혼식이니 밥도 맛있게 나오겠다. 가서 꿀 빨자.”

“좋네요. 우리 계획 다 던져요.”

“이미 던진 거 아니었어?”

사람 염장을 지르다 못해 가슴을 후벼파는 둘의 뻘소리를 들으면서 유해한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누구 씨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저거 봐라.’

쯧쯧. 미저리 진짜. 신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 돌이 된 망할 친구를 보며 그는 혀를 끌끌 찼다. 결혼이라고 해 봤자 진짜 결혼도 아닌데. 누가 보면 세상 무너진 줄 알겠다.

“이로운. 엔딩 보는 거야.”

그리 말했음에도 이로운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래도 듣고 있다는 걸 알기에 유해한은 다시 입을 열었다.

“다, 그냥 클리어를 위해서 짜고 치는 판이라고.”

진짜가 아닐 게 뻔하니 아무 의미도 없다. 그저 단순히 옷을 맞춰 입고 주례 앞에 서서 ‘네.’라고 대답만 하는 거다.

그런데도 대체 왜 이런 얼굴을 하는 것인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다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까지 상처받은 얼굴을 하는 게 솔직히 유해한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가 사랑이라는 것을 한 적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사랑이 다 이런 것인지. 도통 의문투성이였다.

그의 속내를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여전히 신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이로운이 답했다.

“나도 알아.”

“알면 신문 좀 그만 내려.”

“그래도, 그냥…… 내가 하고 싶었던 것뿐이야.”

가짜인 그것조차도 복에 겨워서, 그것조차도 바랐다. 아니, 무엇이든 전부 바랐다. 연기든, 뭐든 전부 제가 하고 싶었다. 이제 모두 잃어버린 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안 되는 거 알잖아.”

“……알아. 그래도…….”

왜 안 돼? 라는 생각이 든단 말이야.

그 중얼거림을 들은 유해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결말에 다다르면서 악역의 배역이 사라져버렸음에도, 현실에서조차 악역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제 빌어먹을 친구는.

“이번에는 방해하면 안 돼. 확률상 우리가 가장 빠르게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이야. 다 가짜잖아. 이번 한 번만 참자.”

유해한이 한숨을 쉬며 선수를 쳤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그동안은 제 친구라 어떻게든 이해를 해 주긴 했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른 건 뭐, 이로운이 어떤 진상을 부리든 용인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이번 게이트의 빠른 클리어는 중요했다. 여기서 느긋하게 시간을 죽이고 있기에는 그는 지켜야 할 것도 많았고, 이룰 것 역시 많았다. 쌓아 올린 것이 많은 만큼, 그것이 모조리 무너지는 걸 절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단호한 유해한의 말에, 상황을 전혀 모르는 장하리는(그녀에게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후폭풍이 뻔히 보였으니 당연했다.) 뭐 저렇게까지 단속하냐는 얼굴을 했다.

‘유지한이 아무리 싫다 해도 결혼식을 파투낼 필요까진 있나?’

그녀가 생각하는 건 기껏해야 이 정도였고, 한편 제 보스의 연애사에 하등 관심 없는 폭검은 아마 유례없을 그 장면을 담아가서 뿌리면 얼마를 받을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이딴 것에 흥미는 없지만 분란에는 흥미가 있고, 돈은 많을수록 좋다는 것이 폭검의 지론이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일행으로 달고 있는 유해한은 있는 대로 한숨을 푹 쉬며 비장하게 각오를 다졌다. 이미 개판이지만, 여기서 더 개판을 만들 수는 없었다.

그런 단단한 각오가 보이는 건지 이로운이 씁쓸한 얼굴로 답했다.

“걱정 하지 마. 아무것도 안 하고 조용히 지켜보기만 할 거니까.”

분한 한편 궁금한 것도 사실이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윤지호는…… 얼마나 예쁠지.

* * *

<결혼식 13일 전>

“……폐하가 미치신 건…….”

“원래 재미를 사랑하시지 않나.”

“3황자라면 사실 일찍 분가시킬수록 더 이득이고 깔끔할 테니…….”

“그래도 너무 갑작스럽지 않나. 명색이 황자의 결혼식인데…….”

아무리 순위 계승권에서 멀어진 황자라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결혼하는 경우는 없었기에 결혼 소식은 파란에 파란을 일으켰다.

더군다나 3황자는 본인이 순위 계승을 포기해서 그렇지, 사실 어떻게 보면 누구보다 황위에 가까운 이였다. 신의 축복을 가장 넘치게 받은 황자였으니까.

기반이 약하다 한들, 결국 이 제국은 힘이 전부. 본인의 의지만 있다면 아마 그를 황위에 앉히고 싶어 안달하는 이들이 넘쳐날 것이다. 하지만 성정이 황위 같은 귀찮은 것과 거리가 먼 황자는 일부러 칩거를 선택했다. 그런 이의 결혼이었다.

처음 이 소식을 들은 이들은 황제가 3황자를 팽한 것인가, 하며 수군댔지만, 그런 의심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제가 애정한다고 하는 아들에게도 의무로만 대할 뿐, 고르게 매정한 아비가 바로 황제였으니.

더욱 황당한 건, 결혼식 장소가 바로 대성당이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황태자나 할 법한 호화로운 결혼식이었다. 그러니 도무지 종잡을 수 없어 당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모든 의문을 다 압살했고, 그리하여 모두는 입도 뻥끗하지 못하고 그저 다가오는 결혼식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준비할 것이 넘쳐났으니까.

누군가의 결혼식은 다른 이들에게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제국을 뒤집어 놓은 커플은…….

“마담, 시간 내에 가능해?”

웨딩드레스를 맞추고 있었다.

중세풍 웨딩드레스 제작 기간을 모르지 않아 절대 불가능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드레스는 기대도 안 하고 있었는데, 마담은 이야기가 다른 듯했다.

“제 이름을 걸고 내보이는 아가씨의 웨딩드레스를 허술하게 작업할 수는 없습니다!”

영혼을 갈아서라도 완수할 겁니다! 광기가 철철 흘러넘치는 모습에 순간 기가 눌렸다. 황제에게도 눌리지 않았던 기가. 역시 열정과 광기만큼 사람을 압도시키는 것은 없는 것 같았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알아서 해 주게.”

완성이 제대로 안 됐다고 해서 탓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애초에 진짜 결혼도 아니니만큼, 드레스고 나발이고 결혼식 자체에 그다지 기대를 하지 않기도 했으니까.

사실은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 결혼식은 그저 최종관문으로 향하기 위한 단계? 정도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저기 결혼하는 신랑은 조금 다른 듯했다.

“……마담. 여기에는 노출보다는…….”

“아. 그게 낫겠군요!”

“그리고 구두는 내가 준비하지.”

“디자인은 이미 정해지신 겁니까?”

“그래.”

“그럼 완성되는 대로 이쪽에 보내 주시지요. 맞춰서 구상하겠습니다.”

“그러겠네.”

아주 마담과 합이 짝짝쿵 잘 맞았다. 근데 저거 내가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포지션이 바뀐 거 아니냐는 위화감을 살짝 받고 있는데, 여전히 그들은 그들만의 세상이었다.

그리고 더 웃긴 건, 아무도 그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 문화가 이런가? 아닌데. 졸라 개꼰대 남성우대사상일 텐데……. 갑자기 머릿속에 혼돈이 올 것 같았다.

“아가씨. 음료라도 드시지요.”

“환복을 거들어 드리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뭐, 공주 대접은 받고 있으니 상관없지만.

솔직히 내가 안 정해서 편하기도 하고.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럼 여긴 이렇게…….”

“전하의 예복은 그럼 이렇게 맞춰서…….”

나름 즐거워하는 것 같으니 초치기도 뭐하고.

쪼오옥―

그래서 나는 주스나 빨며 다른 일을 하기로 했다. 내가 잘하는 일을.

띠롱―

「“넵. 레쓰비 소환 완료입니다~”」

“어머. 깜찍한 소개 좋네요.”

다른 분도 했으면 재밌으려나. 라고 말을 덧붙이자, 레쓰비가 바로 반박했다.

「“노노노노. 이건 큐티뽀작한 저라 가능한 겁니다. 전 레어하다구요.”」

“하하하하. 네. 알았어요. 일은 어떻게 됐나요?”

웃으면서도 말을 돌리지 못하게 단호히 묻자, 레쓰비가 머뭇거리면서 답을 해왔다.

「“그, 찾긴 찾았는데…… 솔직히 놀랐습니다. 아무 보안도 되어 있지 않아요.”」

상상치도 못한 대답에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마력 기동석을 아무렇게나 놔둔단 말이야?

“가짜일 가능성은 없나요?”

「“없습니다. 일단 힘으로 증명되니까요.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없기도 하고요. 소문으로는 이게 그 대마법사 아세르의 영혼석이라는 말이 돌 정도였으니까요.”」

“흠. 그럼 그 기동석 자체의 방어가 견고해서 보안이 없는 걸 수도 있겠군요.”

「“바로 그겁니다.”」

“근데, 그게 문제가 되나요?”

「“……예?”」

저, 그러니까 이거 부수기가 어렵다는…….

머뭇머뭇한 그 대답에 나는 그제야 전달이 약간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님 그냥 레쓰비 좋은 꼴 보기 싫은 누군가가 골리려고 했다던가.

“전달이 잘못됐나 보네요. 전 그거 부수라고까진 안 했는데?”

「“예?”」

하지만 그건 그쪽 사정이고.

영문을 몰라 하는 레쓰비에게 인자한 마음으로 진실을 들려 주었다. 레쓰비를 내 편으로 만들어서 나쁠 것 없었으니.

“망가트리고, 가져요. 그거.”

「“……예?”」

완전 뇌정지가 온 것 같은 얼굴에 나는 친절하게 쐐기를 박아 주었다.

“좋아하잖아요. 보석.”

난 웬만하면 챙겨갈 건 챙겨 가자는 주의인데. 내 선물이 싫어요?

대신 말 안 나오게 알아서 잘 처리해 놓으라며 미소를 지어주자, 그제야 뇌가 제 기능을 하는 듯 그의 얼굴이 환희로 물들었다.

「“평생 충성하겠습니다!!”」

그는 수정구 챙기는 것도 잊고 당장 제 워너비를 손에 넣기 위해 달려갔다. 정말로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쓰비가 영상에서 후다닥 사라진 것이다.

그 광기를 보며 새삼 왜 길드원들이 레쓰비에게 ‘보석에 미친 또라이’라고 하는지 좀 이해가 갔다. 보석이 아무리 좋아도 정신은 좀 챙겨야지. 정줄부터 날리면 쓰나.

여유롭게 영상구를 중지시키며 그래도 한시름 놓았다는 생각에 숨을 편하게 내쉬었다. 저 정도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럼 마력 기동석은 해결되었고. 이제 단 하나만 남았다. 그것까지 끝내고 결혼식을 진행하게 되면 드디어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계를 현재 지탱하고 있는…….

“……안면 별로 안 궁금한데 말이지.”

벨로아 루체의 남자를.

―마력 기동석 기동 정지―

* * *

한편, 어떻게 느낀 건지 모르겠지만……. 차원 너머 원래 그들이 있던 곳, 이 게이트의 원흉 중 하나가 갑자기 몸을 흠칫― 떨었다.

“……뭐지?”

등골을 타고 오르는 오싹한 기운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제 양팔을 연신 쓸어내렸다. 그 모습에 이상함을 눈치챈 이들이 심각한 얼굴로 그녀를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아니, 뭔가 일이 틀어진 거 같아서…….”

뜬구름 잡다 못해 기분 잡치기 딱 좋은 소리였지만, 아무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녀의 능력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녀의 직감은 그저 단순한 직감이 아니었다.

지금은 랭킹에서 자의로 삭제된 지 오래지만, 예지자로서 부동의 1위를 놓치지 않았던 이의 능력을 누가 의심할까.

그녀가 가장 굉장한 것은, 굳이 보려고 하지 않아도 그녀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혹은 그녀와 연관이 된 것이라면 알아서 이렇게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마야. 무슨 일인지 정확히 볼 수 있나?”

그 말에 예지자, 코드네임 마야가 다급하게 정신을 가다듬고 예지를 더듬기 시작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아니요. 보이지 않아요.”

“네가 보지 못하는 거라면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상대거나, 우리가 볼 수 없는 급의 인물이 엮여 있단 이야기군.”

가령 세계 랭킹의 네임드라거나.

아무리 뛰어난 예지자라 하더라도,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세계를 뒤흔들 수 있는 이들을 엿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떻게 변할지 예측 불가였으니까.

단순히 힘으로 감당할 수 없다는 문제도 있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그들은 미래 자체를 예측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다만 한가지 보였던 건……. 우리 계획이…… 실패해요.”

마야는 두려웠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온 것을 후회하진 않는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는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여전히 예측할 수 없고, 심지어 실패의 결과를 보게 되자 두려워진 것이다.

더군다나 실패를 눈앞에 둔 순간, 그녀는 예지할 수 있었다. 어떤 인물의 그림자를.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그 소름끼치는 분위기를 영접하고 마야는 생전 처음으로 다리가 후들거린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할 수 있었다. 만약 그 존재를 직접 마주한다면 주저 없이 무릎을 꿇게 될 것이라고.

아마 고개를 들어 눈으로 그를 쳐다보지도 못할 것이다. 고작 저 따위가 마주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듯, 몸이 본능적으로 그리 행동하리라. 주제 파악을 잘하는 것이 그녀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였으니.

“화룡왕이 진다고?”

하지만 주위의 모두가 이번에는 그녀의 말을 선뜻 믿기가 힘든 듯 그를 부정했다.

그들이 지금까지 괜히 시간을 죽여온 것이 아니었다. 절대 실패하지 않게, 한 번에 반드시 성공하게, 완벽하게 해치우기 위해 그 긴 인내의 시간을 견뎌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인고 끝에 그들은 비로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화룡, 드라키스라는 키를.

단언컨대 그 어떤 랭커라도 이 화룡을 상대할 수 없을 것이었다. 화룡의 정점, 화룡왕을 고작 끝에도 다다르지 못한 인간들이 무슨 수로.

미래를 알고 있는 그들이라서 더욱 확실히 알고 있었다. 지금의 이 힘의 지표들은 전부 하잘것없다는 걸. 2차 각성조차 하지 않은 이 세계의 랭커들은 화룡왕이 아니라 화룡의 앞에서도 속수무책으로 날아갈 것이다.

그러나 마야는 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저도 생각할 수 없어요. 하지만 분명 보았어요……. 화룡왕이 추락하는 걸요…….”

그리고 그것조차 지루하단 듯 내려보고 있는 사람을. 다시 떠올려도 경이롭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황홀하게 느껴지는 건, 그녀도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일까. 저의 바람이 몽땅 무산되는 것이나 다름없는데도, 분노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저는 발치에도 닿지 못할, 아득히 높이 있는 자에게 그런 가당치 않은 감정을 가질 수 있을 리가.

‘……젠장.’

그런 마야를 보며 수장이 입술을 짓씹었다. 정말 빌어먹을 소식이었다. 그들이 모르는 미지수가 결국.

‘……무명.’

이름처럼 모든 게 불명인 그자는 그 어디에도 나타난 적 없는 변수였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그 또한 처음으로 두려움이 엄습했던 존재였다. 어디서,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 어떻게 나타날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으니까.

아무것도 모른다는 건 정말 빌어먹을 일이었다. 무엇하나 종잡을 수 있는 것이 없으니까.

“준비는 어느 정도 되었지?”

“이제 마지막 한 단계 봉인만 남았습니다.”

“내가 직접 하지.”

“보…… 보스가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다들 우려를 금치 못했다. 보스가 그동안 나서지 않았던 이유는 봉인을 풀고 화룡왕이 날뛰고 난 다음 마지막에 화룡왕을 제어하기 위해 힘을 비축해두고 있기 때문인 걸 모르는 자가 없었다. 그런 보스가 직접 나선다는 것은 뒤에 그들이 벌인 일을 수습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야의 직감으로 미루어보아, 무명이 우리 앞을 막아설 게 분명하다. 어떤 식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무명이 나서는 게 분명해진 이상, 더 이상의 변수는 없게 해야 해.”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더 시간을 끌어선 안 된다는 것을.

“그러니 우리는 예정보다 더 빠르게 움직여야 해. 적어도 게이트가 클리어되어 지원군이 나타나기 전에. 우리가 변수를 제어할 수 있을 때, 돌이킬 수 없는 데까지 일이 벌어지도록. 빨리.”

단호한 보스의 말에 더 이상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순응할 뿐.

“여기 마지막 한 단계입니다.”

“마석을 부수면 되는 거죠.”

말로만 들으면 아주 간단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건 화룡왕을 깨우기 위한 마력 매개체. 구하기도 힘든 S급 마석 11개였다. 이걸 깨부수려면 얼마나 많은 마력과 힘을 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걱정 어린 얼굴들을 훤히 보면서도 보스는 익숙하게 마석을 손에 쥐었다.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금방 끝낼 수 있겠군.”

콰작―!!

그가 이 길을 걷기로 결심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이었으니까.

* * *

<결혼식 8일 전>

휘하 기사단에 무기한 휴가를 선언하고 수호석을 찾으러 떠난 오른 유라는 고된 여행길에 꾀죄죄한 얼굴을 쓸어내리며 푹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나 혼자 이 북부에 떨어져서는…….”

늘 누군가와 함께해서 그런가, 막상 이렇게 혼자가 되어 보니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 이래서 사람은 한번 혼자가 되어 봐야 한다는 것인가. 그녀는 처음으로 외로움이라는 것을 느껴 보았다.

내색은 안 하려고 노력했지만, 다들 눈치챈 것 같았다. 연락을 할 때마다 저를 보면서 혀를 쯧쯧 차고 이제 얼마 안 남았다는 소리나 해대고 있으니까.

‘하여간. 눈치는 귀신같아서.’

아. 물론 이럴 때만.

잔뜩 투덜거리긴 했지만, 유라는 이런 길드를 사랑했다. 매일같이 문제가 터져도 개의치 않고 계속 함께하는 날들이 그 증거였다.

‘이후로도 이어지겠지,’

참 우습고 신기한 일이다. 떠올리기만 해도 힘이 샘솟는 것 같은 이 기분이란. 무엇이든 하지 못할 게 없을 것 같았다.

“얼른얼른 끝내 버리자고!”

크아아와!!

쾅―!!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굉음과 함께 숲이 일어났다. 흔들리는 대지와 나무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목표물 앞에서 유라는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상대가 어떤 성질을 가졌든, 어떤 몬스터든 이제는 확인도 필요 없었다. 전부 얼려 베어버리면 그만이었으니까.

【화신 스킬: 얼음의 기사가 발동합니다.】

【스킬을 발동하는 동안 원치 않는 생물체를 얼리지 않기 위해 주의해 주십시오.】

【얼려버린 이상, 베지 않으면 페널티가 부여됩니다.】

“아. 언제나 걱정이 너무 많아. 이 망할 시스템 님은.”

단 한 번도 그런 실수 따위 한 적 없는데 말이다.

얼음의 기사의 눈이 푸르게 물들었다. 앞을 가로막는 모든 걸 얼려 버리겠다는 듯.

솨아아아―!!

콰지지직―

검을 휘두르자, 칼날에서 얼음의 기운이 뻗어 나와 닿는 모든 것을 얼려 버렸다.

콰과과광―!

곧바로 빠르게 굳어가는 거대한 몬스터를 단칼에 베었다. 생명체가 아닌 바위를 벤 것 같은 소리가 들려오며 몬스터가 두동강 났다.

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유라의 냉기에 닿는 순간, 그건 살아 있는 생명체이되 생명체가 아니게 되었으니까. 그게 유라가 그동안 가차 없이 온갖 몬스터를 벨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이제 좀 끝내자. 제발.”

그렇게 거대한 몬스터를 베어내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한참. 드디어 유라는 그토록 고대하던 것과 마주할 수 있었다.

“찾았다.”

콰직―!

보기만 해도 사람을 미혹시키는 아름다운 빛을 뿜어내는 보석이 유라의 손에서 무감각하게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지호 씨! 임무 완료입니다!”

「“고생하셨어요. 얼른 이쪽으로 오세요.”」

“네!”

―아스레스타 파괴 완료―

드디어 무대의 조건이 다 갖춰졌다.

* * *

대망의 결혼식 당일.

꽃이 온 거리에 흩날렸고, 거리엔 각양각색의 좌판이 나와 장사를 시작했다. 사람들은 모이면 이 얘기뿐이었다.

“드디어 결혼식이네.”

“오늘이 대목이야!”

“열심히 팔아 보자고!”

거의 축제 수준으로 모두들 활기가 넘쳤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흥미진진한 결혼식을 위해 수도의 모든 이들이 몰려들 뿐만 아니라, 타지에서도 사람들이 구경을 왔으니.

그런 그들로 인해 황성 앞은 더 북적북적해졌다. 파격적인 만큼 주목을 받다 보니 거의 전 제국민의 기대와 축복을 받게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제국을 축제로 만든 주인공은…….

“아가씨, 이쪽으로. 아직 향유가 덜 배었습니다.”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해야 합니다.”

“거기! 아직 멀었어?”

“……알아서 하렴.”

시녀들의 프로페셔널한 움직임에 넋이 나가 있었다.

꼭두새벽부터 강제로 이동 당해 욕조에 몸을 담근 게 몇 시간 전인지 모르겠는데, 아직도 만족하지 않은 듯 욕조에 사람을 담가놓은 채로 머리를 손질하고, 피부를 마사지하고 있었다.

결혼식은 오후인데, 그래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듯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에 나는 진짜 입도 뻥끗하지 못하고 가만히 하는 대로 움직여 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정줄을 놓고 있으니 어느새 치장이 끝에 가까워졌다.

‘……결혼식이 뭐라고 사람을 이렇게까지.’

나란히 손잡고 천이 깔린 길을 걸을 뿐인데 이렇게나 많은 준비과정이 필요할 줄 미처 몰랐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래도 이런 것도 재밌지 않냐며 즐거운 목소리로 말합니다.]

‘뭐. 그건 또 그러네.’

제 평생 언제 이런 걸 또 해 보겠는가. 오늘이면 끝일 일. 그렇게 따지고 보면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아가씨. 다 되었습니다.”

“아, 이제 아가씨가 아니시게 되겠군요.”

“감개무량한 기분입니다…….”

저들이 완성시킨 모습을 보고 감탄하면서도 새삼 감회가 새로운지 시녀들이 뭉클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들을 보며, 나는 벨로아 루체가 아니었지만, 나를 위해 열심히 일해 준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감사의 인사를 남겼다.

“다들 고마워.”

이제 끝을 볼 시간이었다.

* * *

“축하드립니다, 황자님.”

“이렇게 보니 3황자님께서 가장 먼저 경사를 맞이하게 되시는군요.”

“제국의 복입니다. 진정한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되시다니요.”

“한동안 연애 결혼이 많아질 것 같습니다.”

쏟아지는 온갖 덕담에 지한은 머리가 어질해질 것 같았다. 진짜 결혼식도 아닌데, 마치 진짜인 것처럼 수많은 인사들에게 신랑 대우를 받고 있자니 진짜 기분이 이상해졌다.

물론,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건 다 하나같이 속이 텅 빈 말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당신의 계약성 ‘승리를 걷는 자’ 님이 그러다 진짜 결혼식 때는 아주 영혼이 허공을 떠돌겠다고, 정신 좀 차리라고 혀를 끌끌 찹니다.]

‘지…… 진짜 결혼식?!’

생각만 해도 정신이 나갈 것 같다. 좋아서.

그런 지한의 모습을 보고 성위님이 혀를 차다 못해 저딴 걸 어쩌다 화신으로 뒀는지 모르겠다며 머리를 쥐어뜯든 말든 그는 관심도 없었다.

진짜 결혼식이라니, 너무 황송해서 꿈에도 그리지 못할 정도지만…….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자신하건대, 지금처럼 태연하게 있지는 못했을 것이리라.

“……황자 전하?”

“아. 예……. 예.”

물론 지금도 썩 태연한 편은 아니었지만, 진짜에 비한다면 태연하다 못해 무심하다는 게 맞을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지한의 속내를 안다면 아무도 그에 동감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미 표정으로 이 가짜 결혼식마저 기대하고 있다는 걸 선명히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아주 넘치게.

유지한의 모든 신경은 단 하나에 쏠려 있었다. 그것만을 바라고 오늘을 기다린 것 같았다. 비록 가짜지만, 자신을 향해 걸어올…….

“전하. 이제 식이 시작합니다.”

“그래.”

자신의 신부를.

“곧 가지.”

식장에 들어오기 전, 지호가 이렇게 말했다.

‘뭐 그렇게 굳어 있어요.’

‘아니, 그래도.’

‘진짜 결혼식 아닌 거 알잖아요. 연습해 본다 쳐요. 별 느낌도 없을 거예요.’

‘……아니.’

‘어차피 가짜 신부. 진짜 신부만 하겠나요.’

그건 맞는 말이었다. 진짜 신부만 하겠는가. 세상 어떤 가짜 신부가.

하지만 당신이 간과한 것이 있다. 내가 바라는 진짜 신부는…….

“신랑 입장.”

짝짝짝짝―!

가짜 신부와, 가짜 신부인 당신과 같다는 걸

“신부 입장!”

와아아아아―!!

울려 퍼지는 함성과 함께, 저만치 빛 속에서 그의 신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짓말쟁이.”

별 느낌이 없을 수 있을 리가.

이 길을 걸어 내게로 곧장 다가와, 내 앞에서 나를 올려다보는 당신이…….

“심장이 터질 거 같아요.”

“예?”

너무너무 예뻐서. 당신이 마치 내 것이 되는 것만 같아서.

“……미안해요.”

주체할 수 없이 가슴이 설레었다.

* * *

이 망할 결혼식은 아무래도 망한 것 같다.

“와, 너님 누구심?”

“니 누나다. 시방새야.”

“응. 구라 즐. 내 누나 미혼임.”

이 새끼가……. 해도 미혼일 거거든? 드레스 입어서 손 올리기도 힘든데, 앞뒤 생각 안 하고 그냥 이걸 확 후려칠까, 진지하게 고민이 되었다.

그런데 이 망할 놈의 동생뿐 아니라 성위님도 한술 뜨셨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아니 가짜 결혼식 주제에 뭐 이리 본격적이냐며, 진짜 시집보내는 거 같다며 눈물을 쥐어짭니다.]

‘아오. 저걸 진짜.’

여기서만 멈췄으면 말도 안 했다.

“실장님. 진짜 이러니까 결혼하시는 거 같아요.”

“……일단 결혼하는 건 맞는데요?”

“길드장님이랑요? 진짜요?”

“이건 또 왜 이래!”

“악. 날아 차기 하지 마!”

연이어 터지는 바보들의 향연에 진짜 정신이 아찔해질 것 같았다.

어차피 너도나도 가짜란 걸 알고 있는 결혼식. 그냥 모의 결혼식 정도의 장난으로 여기면 그만이었건만, 쓸데없이 상황이 너무 리얼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웨딩드레스 때문인지, 가짜인 것을 알면서도 다들 이게 진짜인 것처럼 착각을 해 버렸다. 내가 그렇게 신부 같았나.

정말 짜증 나는 건, 그런 바보들의 착각을 계속 듣고 있자니 나 자신도 착각을 해 버릴 것 같았다는 거다.

가슴이 이상하게 욱신거리고 설레었다. 이건 내 결혼식이 아니고 ‘벨로아 루체’의 결혼식일 뿐이었는데, 진짜 내 것이 된 것만 같아서. 저 길을 걷는 건 나고, 그 끝에 있는 건…….

‘아씨. 괜히 깊게 생각했어.’

괜스레 싱숭생숭해진 마음을 애써 눌러 치웠다.

“신부 입장!”

잡념을 없애려 노력하며, 무생물의 마음으로 붉은 융단 위를 걸었다. 속으로는 ‘나는 태엽 인형이다. 나는 돌하르방이다.’ 그렇게 주문을 외고 있는데…….

“……거짓말쟁이.”

그 속삭임에 자기세뇌가 한방에 무너져 버렸다. 뭐, 뭐가 어째?! 당황한 건 나와 같은 걸 듣는 성위님도 마찬가지였는지 황급히 소리치셨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저넘은 뭔데 갑자기 로맨스를 서스펜스로 만드는 거냐고, 내 화신이랑 결혼하기 싫은 거냐고 야유를 보냅니다.]

두말할 것 없는 개소리였지만, 너무 당황해서 그조차 설득력 있게 들렸다.

그러게. 이게 정말 죽고 싶은가. 아니, 내가 뭐 어디가 어떻다고? 상대는 그런 생각을 한 것도 아니고 거기까진 말하지도 않았는데 온갖 생각이 아주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뭐 그래봤자 이 모든 생각의 끝은…….

‘나도 어디 가서 꿀린다는 소리 한 번도 못 들어 봤다고!’ 였지만.

겉으로는 차분했지만 속으로는 나 좋다는 남자가 얼마나 많았는데!!(구라다.) 등등 온갖 아무 말을 갖다 붙이며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터질 거 같아요.”

“예?”

마치 내가 너무너무 예뻐서. 라고 말하는 것 같은……. 모든 감정을 손바닥 뒤집듯 한 번에 뒤집어 버린 한마디가.

갑작스러운 돌직구에 솔직히, 엄청나게 당황했다.

그렇지 않을 인간이 어디 있을까. 지금 이 황홀한 결혼식장에, 누가 봐도 황홀한 미모를 가진 남자가, 온 마음으로, 온몸으로 말하듯 감정을 전해오고 있는데.

내가 드디어 미쳐버린 게 분명하다. 고작 이런 한마디에, 그저 당황하는 게 아니라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아서.

남자 하나에 이렇게 동요하는 게 가당키나 한가. 그것도 고작 한마디에.

적어도 내 인생에서는 그랬다.

내 당황스러움을 눈치챘는지 유지한이 황급히 사과를 해 왔다.

“미안해요.”

아니, 지금 뭘 알고 사과를 하는 건가. 게다가 이걸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이 사과는 내게 그런 감정을 가져 미안하다는 의미의 사과가 아니었다. 내가 당황하고 놀랄 걸 알았어도, 혹은 무시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야말로 어쩔 수 없이 제 감정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데 대한 사과였다.

‘심지어 다신 안 하겠다거나 조심하겠다거나 같은 말도 하지 않았지.’

착한 호구 새끼답지 않은, 참으로 이기적이고 강압적인 사과였다.

“신랑 신부는 저를 보시지요.”

때마침 들려온 신관의 말이 그토록 다행일 수 없었다. 나는 빠르게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식이 시작되는 내내 필사적으로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도저히 저 망할 놈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신랑은 신부를 평생 아끼고 사랑하며, 존중하고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까?”

만약 마주친다면, 이 날뛰는 감정을 숨길 수 없을 것 같아서.

하지만 그런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옆에서 단호한 대답이 들려왔다.

“네.”

네. 고작 한마디였지만, 그 한마디에 담긴 무거운 진심을 모를 정도로 머저리는 아니었다.

차라리 그런 머저리였으면 참 좋았으련만.

“신부는 신랑을 평생 사랑하고, 헌신하며, 존중하고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까?”

누구는 진심이래도 나와는 상관없었다. 그러니 그냥 가볍게 한마디만 하면 되었는데도,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고작 한마디가 왜 이리도 어려울까. 그게 상대를 기만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기만조차 상관없다는 호구인데, 대체 무엇이…….

아. 그래서구나.

몇 번을 달싹이다, 입을 닫았다.

웅성웅성―

“……지호 씨?”

시간이 지나도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이상함을 느낀 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수군거림에 그제야 망할 주인공님도 불안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러면서도 내가 상황을 스스로 엎어버릴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는 듯했다.

당연한 소리였다. 내가 이 판을 어떻게 벌였는데, 고작 이 정도로.

그래. 고작 그뿐이다.

“……네.”

하지만…….

“반지를 교환하겠습니다.”

……정말 그뿐일까?

그러나 이제는 세뇌도 먹히지 않는 것인지,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의구심이 들었다. 손가락에 끼워지는 이 의미 없는 반지가…… 정말 내게 의미가 없을 수 있나.

나도 이젠 잘 모르겠다. 정말로.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눈을 뜨면 보이는…….

“……반지, 내가 먼저 아니에요?”

“제가 먼저 하고 싶었어요.”

설렘이 가득한 얼굴로 손을 내미는 이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

결국 나는 그의 손을 꽉 쥐고 모른 척 웃어버렸다.

“어때요. 내 작전 재밌었어요?”

그래도…….

“네. 매우…….”

“…….”

“행복했습니다.”

당신이 즐거웠다면.

“그럼 됐어요.”

그러면 충분하겠지.

당신을 만났을 때 했던 희미한 다짐이 나를 바로 세웠다. 내가 원하는 건 당신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

“……이제 끝이네요.”

끝이 다가옴을 느끼고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이제 이곳과도, 이런 장난과도 모두 안녕이었다.

“현실에서 봐요.”

깔끔하게 인사를 했다. 모든 감정을 털어버리기 위해. 조금의 미련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렸을까. 그가 희미하게 웃으며 화답해 주었다.

“……네. 현실에서 뵙겠습니다.”

그 마지막 인사와 함께 장면이 변했다. 드디어 빌어먹을 진상과의 만남이었다.

【이야기의 종막에 다다르셨습니다!】

【진실에 당도하셨습니다.】

“드디어 뵙네요. 대마법사. 아니…….”

무한한 마력을 가진 위대한 대마법사. 황제를 도와 나라를 통일하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게 된 자.

그리고…….

“벨로아 루체의 연인.”

이 벨로아 루체를 망친 남자.

그 빌어먹을 모든 원흉이 씁쓸하면서도 애처롭게, 아름다운 미모를 뽐내며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것조차 너무나 가증스럽고 이기적이라 나는 가차 없이 그에게 비소를 던졌다.

“만나서 반가워요. ‘내 사랑’.”

* * *

“……당신은 내가 사랑하던 여자가 아니잖습니까.”

아세르 개새끼가 덤덤하게 진실을 말하며 나를 매도했다. 답도 없는 개새끼였다. 이러면 내가 물러설 줄 알았나.

“그렇죠. 벨로아 루체는 당신이 죽였으니까?”

“…….”

“아니라고 하지 말아요. 당신이 죽인 거나 마찬가지니까.”

이미 모든 진실을 파악한 사람에게 어디서 그런 개소리를.

진실은 아주 간단했다.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아니, 너무나 간단하고 단순해,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었다.

“당신이 보고 싶어 했던 결말이 아니라서 참 좋네요.”

“로아는…….”

“당신이 진짜 쳐다도 보기 싫었나 봐요. 이런 일을 저지르고 튄 거 보면?”

이 세계는 한번 클리어가 되었다. 정확히는 이미 한번 모든 이야기를 끝내고 종말에 다다른 세계였다.

‘헤르세르크의 반려’는 정복왕인 황제와 전쟁통에 역경을 딛고 사랑에 빠진 그 연인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활동하기 이전에 이미 완결이 났다.

즉, 이야기가 끝났으니 이제 이 세계를 구성할 힘이 사라져야 하는 게 맞았다. 그리고, 이 모든 진실을 알아차린 유일한 자. 위대한 대마법사는, 선택을 했다.

“당신은 제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아시면서 절 비난하시는 겁니까.”

“아. 물론. 기꺼이. 천 번이고 만 번이고 할 수 있어요.”

자신의 마력과 영혼을 전부 희생해, 이 세계를 지탱하는 선택을.

물론 그의 결심은 너무나 자애롭고 이타적이며, 칭송을 받아 마땅할 것이었다. 그가, 그 모든 선택을 망설이지 않은 채 벨로아 루체라는 연인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어차피 죽을 거, 벨로아 루체를 왜 끼어들게 했어요. 나 혼자 죽기 싫어서? 누구든 기억해 줬음 싶어서?”

“…….”

“연인이 자신을 위해, 세계를 위해 희생한 세계에서 뻔뻔하게 살아갈 만큼 벨로아 루체가 그렇게 독한 여자로 보였나 봐요?”

내가 볼 때는 전혀 아니었다. 빌어먹을 사랑 때문에 독해진 여자였지.

“……그대의 말이 맞습니다. 진작, 아니 처음부터 만나지 말았어야 했어요. 전부 제 욕심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어리석은 꿈을 꾸었나 봅니다.”

“…….”

“결국 엔딩 이후의 세계를 부수고 이곳에 당도한 이가 당신이 아닌 그녀이기를 바랄 정도로.”

“…….”

“이기적인 소망이지요. 그녀도 제가 보고 싶지 않았을 터인데. 이런 끔찍하고 무도한 남자인데 말이죠.”

아세르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걸 보며 나는 진심으로 혀를 끌끌 차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꼴값을 떤다. 아주.’

이 망할 놈의 커플은 여러 사람을 제대로 귀찮게 만드는 진짜 민폐 덩어리들이었다.

한 놈은 희생하겠다 결정했으면서 씁쓸하고, 아쉽고,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연인을 두었고, 그를 위한다는 결심으로 모든 걸 던졌다.

그리고 그런 연인을 본 여자는 모두가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세계가 너무나 싫었지만, 그래도 그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그의 힘을 덜기 위해 움직였다. 어쭙잖은 흑마법사나 황태자, 미하일 베어, 모든 관계를 틀어놓고 새롭게 조립하며 새 이야기를 짰다.

오로지 사랑하는 그를 위해.

아주 세계를 가지고 노는 자극적인 종말 커플이었다.

아마 이 게이트는 클리어가 되어도 나갈 수 없는 곳일 것이다. 이야기의 엔딩을 보아도 다시 시작 지점으로 돌아가 다른 엔딩을 보라고 종용하겠지. 이 세계가 끝나지 않는 한.

새로운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내려는 이들이 있는 한은.

한 가지 의문은 벨로아 루체 같이 절대 사라져선 안 되는 캐릭터에 어떻게 내가 빙의될 수 있었던 것인가였지만, 어차피 이건 게이트일 뿐인데. 거기까진 정말 알고 싶지도 않았다. 이런 귀찮은 커플사 따위.

“이제 막을 내릴 때예요. 아세르.”

“…….”

“제발 당신의 연인도 좀 쉬게 해 주고.”

“…….”

“아니면 뭐, 내가 없애 줘요?”

그냥 얌전히 가자고, 실체도 없어진 당신을 위해 아등바등한 당신의 연인을 좀 생각해서 여기까지 하자고 한숨을 내쉬자, 그가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딱 훌륭한 바보 꼴이었지만, 미인이다 보니 그 모습조차 예뻤다.

“……그 말을 기다렸나 봅니다.”

그게 그의 마지막이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사라졌다. 보석하나를 남기고.

【클리어 보상: 아세르의 눈물(SS)을 획득하셨습니다.】

【‘헤르세르크의 반려’를 완벽하게 클리어하셨습니다.】

【최초 올 클리어 대상자이십니다.】

【게이트 최종등급을 산정 중입니다.】

【축하드립니다! 무명!】

【최초 SS급 게이트를 클리어하셨습니다.】

【믿을 수 없는 업적입니다.】

【랭킹에 영향을 줍니다.】

징그럽게 주르륵 뜨는 창들을 무시하며 드디어 끝났다는 생각에 한숨을 쉬는데, 목소리가 들려온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고마워.’

라고 말하는 벨로아 루체의 목소리가.

“……!”

너무 놀라 순간 눈을 번쩍 뜨다, 여전히 변화는 없어 착각인가 하는데, 뒤이어 마치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알림창이 떴다.

【추가 보상: 벨로아 루체의 유산(A)을 획득하셨습니다.】

【아도니스의 눈물(SS)을 획득하셨습니다.】

【루체의 거울(A)을 획득하셨습니다.】

“뭐야. 이번에는 눈물 시리즈냐.”

받은 눈물이 두 개나 되었기에 심드렁하게 평했다. 그게 SS급인 건 물론 스킵했다. 그거에 일일이 놀라기엔 너무 피곤했다. 그저 집에 가서 씻고 침대에 얼른 다이빙했음 싶었다.

몸으로는 피곤한 건 딱히 없는 것 같았는데 심적으로 심히 피곤했나 보다. 진짜 딱 48시간만 침대에서 꼼짝도 안 하고 싶었다.

“당장 휴가계 쓰고 집돌이 한다.”

나는 좀 쉴 때도 되었어. 그렇게 다짐하는데 때마침 게이트가 열렸다. 망설임 없이 그 게이트에 손을 뻗으면서, 그제야 문득 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 키스 그냥 할걸 그랬나.”

어차피 다 없는 걸로 치부될 맹세의 키스, 그냥 해도 좋지 않았나. 그런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뭐, 그것도 아주 잠시긴 했다.

“으. 집에 가자, 집에.”

이제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호잇차―”

폴짝 뛰어서 지면과 발이 안정적인 키스를 하며 현실에 도착했다. 그러나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주인공님이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내게 달려들었다.

“지호 씨! 위험해요!”

덥석―!

“……!!”

쾅―!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주인공님과 함께 밀려나 바닥에 처박혔다. 그러면서 주인공님의 등 뒤 풍경이 보였다.

바닥에 처박혔음에도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은 조금도 없었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건.

키오오오오―!!

“모두 신속하게 대피하십시오!”

끼아아악―!!

“꺄아아아! 사, 살려줘! 살려달라고!!”

“모두 진정하시고, 침착하게 움직이세요!”

“빨리 저거 해치우라고! 헌터들은 뭐 하는 거야!!”

콰과과광―!!

화르르륵―

언젠가 보았던 빌어먹을 붉은 하늘과, 통제가 안 될 만큼 아비규환이 된 현장이었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음에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X발.”

서울이 불타고 있었다.

<랭킹 1위 탈환을 소망합니다> 5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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